필리핀을 보라, 친미국가가 무조건 잘 사는 게 아니다! 趙甲濟
오늘 뉴욕타임스에 왜 필리핀이 못 사는가를 다룬 흥미있는 기사가 실렸다. 미국의 정책 때문이란 것이다. 미국은 필리핀을 통치하고 독립시켜준 이후에도 필리핀 지도층에 농지개혁을 압박하지 않았고, 제조업을 육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리핀은 제조업 비율이 17%인데, 한국은 26%이다. 제조업이 발달하지 않으면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농지개혁을 하지 않아 필리핀은 지금도 대지주가 정치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중산층이 허약하여 대중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했다.개인의 자유가 약하면 자본주의도 발전이 늦다. 이 나라가 1961년엔 한국보다 세 배 잘 살았다. 새삼 이승만의 농지개혁과 박정희의 수출입국 중화학공업 건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친미국가가 무조건 잘 사는 게 아니다. --------------------------------------------------------- 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중 87위로 최하위권이었다. 1위는 2926 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필자의 가족은 이 무렵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기 위한 수속을 밟았는데 다행히 잘 되지 않아 모두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낫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낫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카메룬은 116달러로 77위였다.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그 뒤 52년간 한국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높게 뛰었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201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명목상 2만2589 달러로 세계 34위, 구매력 기준으론 3만2800 달러로서 세계30위이다. 삶의 질 순위로는 180여개국 중 12등! 1961년에 한국보다 세 배나 잘 살았던 필리핀은 2611달러로 세계 124위, 이집트는 3112달러로 119위이다. 짐바브웨는 756 달러로 158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 51년간 약10배, 한국은 약250배가 늘었다. 한국인은 필리핀인보다 25배나 빨리 달렸다. 2012년 기준, 한국은 美,中,日,獨에 다음에 가는 5大 공업국, 7大 수출국, 8大 무역국, 12위의 경제大國(구매력기준GDP)이고, 12위의 삶의 질을 자랑한다. 재래식 군사력은 8위 정도. 울산은 세계 제1의 공업도시. 維新期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1970년대 말에 우리는 선진국으로 가는 막차를 탔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