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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상황에 너무 열이 받던 차에 관련 내용을 요청받아 내용을 정리하면서 개인 공간에 쓴 글입니다.
-내용이 매우 길어서 읽기는 힘드실텐데, 관심 있는 분이 있으실까 하여 긁어 올려봅니다. 본문이 반말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자게에선 금방 아래로 내려가긴 하겠지만, 혹시 이러한 내용이 도탁에 어울리지 않다면, 그것도 말씀해주세요. 바로 내리겠습니다. 정치 언급은 따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방부·육사의 홍범도 동상의 이전·철거에 관하여 (feat. 자유시 참변)
-홍범도의 무장투쟁과 러시아 연해주 한인사회
홍범도의 무장투쟁은 일제시대 항일독립전쟁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가 지휘한 전투이자 항일무장투쟁의 첫 번째 회전이라고도 불리는 '봉오동전투'는 청산리전투와 함께 항일독립전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봉오동전투는 2019년 영화로도 제작되어 상영된 바 있다. 최근 연구를 통해 청산리전투에서도 홍범도부대가 김좌진-이범석의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양축을 담당했다는 사실이 언급되면서, 홍범도의 무장투쟁은 더 빛을 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독립무장투쟁의 영웅, 홍범도(1868-1943)는 어떤 인물인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평안북도 자성군(현 자강도 자성군)에서 태어난 그의 젊은 시절 이력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홍범도는 양반가 출신은 아니며, 평민 출신으로 1895년 을미의병 당시 평민의병장으로서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1930년대 초에 작성된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강원도 북부-함경도 남부 일대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과 세 차례 전투를 진행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이후 함경도 지역으로 몸을 피신했다고 한다.
이후 홍범도는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함경도 일대에서 재차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의병투쟁의 역사라는 큰 궤에서 보면, 1904~1905년 러일전쟁-을사조약을 계기로 국내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 의병투쟁은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었으며, 각지의 의병-항일무장대는 일본군과 친일파, 침략거점을 공격하여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이에 일본은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1908년부터 대대적인 '대토벌' 작전으로 의병들을 진압하고 1910년 조선을 병합하였다.
일본의 '대토벌' 작전 이후, 국내에서는 무장투쟁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이에 함경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홍범도는 만주로 넘어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시점부터 홍범도가 러시아령 연해주의 한인사회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조선 내에서 활동이 불가능했던 시기에 러시아령 연해주는 비교적 자유로운 한인사회가 존재했고, 이 지역의 한인사회로부터 무장투쟁을 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홍범도의 활동에 대한 언급을 안중근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안중근 역시 독립군 활동을 위해 1907년 연해주로 넘어갔고, 1908년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서 함경도로 진공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일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심문을 받게 되는데, 이때 1908년 4~6월경 함경도에서 홍범도를 만났다고 언급했다. 즉, 연해주 한인사회의 지원을 받아 무장투쟁을 벌이는 독립군 부대들이 대한제국 말기-일제강점기 초기에 등장했으며, 홍범도와 안중근은 이 지점에서 접점을 갖고 있었다.
일제의 조선병합 이후, 홍범도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으며, 그 지역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들과 관계를 맺었고, 이동휘(이후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대 국무총리)와도 이 시기에 깊은 연을 맺었다. 연해주로 넘어간 이후 3·1운동 이전까지 홍범도의 행적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한인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세력을 키우며 무장투쟁을 준비한 것으로 추측된다.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아니 한인사회가 있는 그 모든 곳에서 전개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에는 연해주의 독립운동세력도 참가했다. 연해주 지역의 대표격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동휘는 무장투쟁에 매우 적극적인 입장이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미 비밀리에 독립군을 창설한 상태였다. 홍범도는 이 독립군부대의 총사령관이었고, 독립군을 총지휘하라는 명령을 하달받고 1919년 10월 북간도로 이동해 독립전쟁을 개시하였다.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와 1920년 10월의 청산리전투에서 홍범도의 독립군부대가 활약한 내용은 굳이 부언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생략하겠다. 이걸 모르는 사람도, 부인할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설마.... 그... 국방부도 이건 안다고 했으니까.
지금까지도 꽤 길었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홍범도는 20대 후반이던 1895년부터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들었고, 을사조약 이후 더욱 본격적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투쟁을 벌였다. 일본의 의병대토벌 작전이후, 홍범도는 근거지를 연해주로 옮겨 러시아 한인사회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세력을 키우던 중, 3·1운동이 발발했고, 홍범도는 독립군부대를 이끌고 간도로 이동하여 무장투쟁을 지휘했으며,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라는 독립군역사의 빛나는 업적을 세웠다.
-자유시참변과 홍범도의 관계
청산리전투 이후, 일본군은 만주-간도 지역의 조선인사회를 파괴하기 위해 무차별적인 보복-학살을 자행하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했다(간도참변). 이로 인해 만주지역의 독립군부대는 이 지역을 떠나 중국-러시아 국경지역으로 이동했다. 1920년 12월~1921년 1월 사이 대부분의 독립군 부대는 러시아의 자유시(현재 러시아 스보보드니)에 집결하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 지역의 독립군부대 통합이 진행되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 독립운동 사상 최악의 참극이라고 불리는 '자유시참변'이다.
그런데, 자유시참변을 설명하기에 앞서 당시 세계 정세, 그리고 이 지역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일본은 영국이 속한 연합군과 동맹을 맺었고 러시아제국과도 같은 진영에 속해있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에서 '소비에트혁명'이 발생하여 러시아제국은 멸망했고, 러시아는 백군(기존 러시아제국의 잔여세력)과 적군(소비에트군) 간 내전에 돌입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도 러시아의 내전은 계속되었고, 이때 일본은 백군의 편에 서서 적군-극동공화국(소비에트의 위성국)과 전투를 벌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이 지역의 독립군 부대는 자연스럽게 소비에트와 연합하여 일본과의 항전을 준비하였다.
즉,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부대는 적군의 편에서 일본과 전쟁에 돌입하거나, 소비에트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이는 이념적인 판단이 아니라, 당시 정세에 따른 무장투쟁의 지속을 위한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유시에 집결한 약 3천여 명의 독립군부대 통합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각기 다른 배경을 갖고 있었던 독립군부대가 통합되었을 시, 통합된 군단의 주도권과 성격을 두고 독립군 부대는 크게 두 진영으로 갈라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에트는 극동 지역의 투쟁을 위해 소련 빨치산 영웅 칼란다리쉬빌리를 사령관으로 한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중심으로 부대를 통합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은 지속되었고, 결국 통합에 반대하는 독립군부대(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전투로 대한의용군 소속 독립군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약 80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이 바로 자유시참변이다.
자유시참변의 피해상황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소 갈린다. 사건 이후 고려혁명군은 사망자 36명, 포로 864명이라고 밝혔으나, 피해자측인 대한의용군은 전투 중 사망, 익사, 행방불명자가 600여명이라고 집계했다. 다만 사실로 확인되는 기록인 포로와 사건처리 기록에서 보이는 대한의용군 소속 군인 포로 864명을 고려해을 때, 일부에서 주장하는 700~800명의 사망자 숫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대한의용군은 1천여명 내외였다. 하지만, 실제 피해현황과는 별개로, 이 사건이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대의를 품고 러시아 자유시에 집결했던 독립군부대 내에서 발생한 끔찍한 비극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홍범도는 어떤 역할을 수행했을까?
우선 홍범도는 이후 기록을 살펴봤을 때, 대한의용군이 아닌 고려혁명군 진영에 속해있었다. 홍범도의 입장은 자유시참변 이후, 직접적인 피해자인 허재욱이 코민테른에 보낸 보고서와 간도 독립군부대의 지도자들인 홍범도, 최진욱, 안무, 이청천 등이 발표한 성명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귀중한 형제들이여>라는 제목의 성명서는 '무장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권위'에 대한 인정, 그리고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홍범도는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하기 위한 소련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과 별개로 홍범도가 자유시참변에서 대한의용군 소속 독립군부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거나, 궤멸시켰다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으며, 사실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후 당시 홍범도의 행적에 대한 다른 이의 증언에 따르면, 홍범도는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배경은 달랐으나, 독립군 부대들은 만주-간도에서 동지로서 전투를 함께 치렀으며, 일본이라는 분명한 적을 갖고 있었다. 참변 당시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정황상 참변을 주도한 것은 홍범도가 아니라,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지시한 소련-극동공화군 군대였다고 봐야 한다.
한편, 홍범도는 자유시참변 이후, 포로로 잡은 대한의용군 소속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재판에 위원장으로 참여하였다. 아마도 홍범도는 한인무장대 사이에서 그가 갖고 있던 명망과 권위 때문에 위원으로 선임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후에 홍범도 역시 재판에서 병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고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재판에 참가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정황, 홍범도의 발언 외에는 더 자세하게 확인할 길은 없으나, 홍범도의 입장이 결코 편하지 않았단 것만은 분명하다.
실제로, 홍범도는 이 재판에 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후 주위로부터 많은 원성을 들었다. 더구나 애초에 홍범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사들(이동휘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연해주 기반 세력)로서는 그의 태도가 일종의 배신으로 여겨졌을 가능성도 있다. 1923년 8월 홍범도는 자유시참변 당시 대한의용군을 무장해제 시킨 소련군에 저항하지 않았단 이유로 김창수, 김오남으로부터 불시에 공격을 받아 이가 두 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홍범도는 레닌을 만났을 때 받았다는 총으로 이들을 사살하여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홍범도의 삶에서 독립군 장군으로서의 활동은 끝이 났다.
1937년 홍범도는 스탈린의 고려인 이주 정책에 이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홍범도는 카자흐스탄 크즈올로다의 고려극장에서 수위로 일했고, 고려극장은 연극 '홍범도'를 공연했다. 홍범도는 연극이 끝난 후, 배우들이 "연극이 맘에 드십니까?"라고 묻자, "연극을 아무리 잘 해도 백두산 포수의 백발백중인 총재간이야 보여주지 못하지"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홍범도는 1943년 10월 25일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사망했다.
쓰다보니 또 길어졌는데, 자유시참변과 홍범도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20년 12월 이후 독립군부대들은 독립군부대의 통합과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했다. 통합독립군의 통합방식과 성격을 두고 독립군 내 갈등이 발생했다.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소련은 소련-코민테른 중심의 한인 통합부대 창설을 지시했고, 이를 위해 대한의용군을 무장해제시켰다(자유시참변). 홍범도는 이 사건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으나,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이후 (그 자신에 따르면) 독립군 병사들이 재판에서 부당한 판결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위원장으로 재판에 참여하였다.
그렇다면 홍범도는 공산주의와 관련되어 있으며, 자유시참변의 책임자, 또는 같은 독립군부대를 공격한 문제인물로 볼 수 있는가? 현재까지 확인되는 사실관계와 정황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인 독립군부대들 중 공산주의와 관련이 없거나, 관련된 단체 또는 소련의 지원을 필요로 하지 않은 부대는 당시 정세 속에서 존재하기 어렵다. 둘째, 홍범도는 자유시참변의 피해진영(대한의용군)에 속해있지 않았으나, 자유시참변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에게 자유시참변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당시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 내 갈등은 이념 대립이라기보단 주도권이 원인이었으며, 자유시참변은 통합 문제를 소련이 직접 개입해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독립운동의 역사와 홍범도의 공산주의 경력
마지막으로, 사실 홍범도 논란과 관련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 논란의 핵심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독립운동의 역사, 그 가열차고 치열한 역사에서 공산주의 경력을 갖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은 모조리 거세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북한에서나 기려야할 '빨갱이' 영웅인가?
사실 이 질문이야말로 가장 화가 나는, 어이가 너무나도 없어서 그 개소리를 받아줄 힘도 빠지게 만든다. 이 얼마나 몰역사적인 역사 인식인가.
학생들이나 대중을 상대로 강의를 할 때, 항상 강조하는 내용이 있다.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공산주의는 하나의 노선일 뿐이며, 공산주의 진영의 독립운동 역시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소중한 우리의 역사이다. 러시아제국을 무너뜨린 소비에트 혁명이후, 공산주의는 전 세계 식민지에서 발생한 독립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투쟁노선으로 떠올랐고, 소련이 내세운 반제국주의 혁명의 구호는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를 지지하거나, 우호적이었으며, 공산주의 세력에 소속되어 또는 연계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공산주의 투쟁노선은 다른 진영(소위 '민족주의')의 투쟁노선과 같은 목적을 위해, '조선의 해방'이라는 대의를 공유했다. 해방을 앞둔 시기, 독립운동 세력 간에 다양한 통일전선 수립 시도가 있었던 것은 이들은 노선은 다르지만, 독립된 하나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은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을 위해 투쟁한 독립운동가들은 처음부터 '분단된' 남북을 꿈꾸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의 삶을 온전히 싸워가며 투쟁한 이들은 모두 하나의 조국, 하나의 해방된 나라를 수립하고자 했다.
이념이 문제가 된 것은, 해방 이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부터였다. 해방된 조선에서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 에 대한 문제에 부딪히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진영 간 대립은 실체가 있는,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다.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6·25전쟁이라는 끔찍한 비극이 발생했다. 냉전은 이 전쟁을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갔으며,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선이 되었다. 이후 여전히 한반도는 분단이 유지되고 있으며, 공산주의 국가 북한은 연일 적대적인 발언을 일삼으며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다. 지금이라면, 공산주의에 대한 찬동, 공산주의 진영과의 관련성, 공산주의 운동은 분명히 문제가 된다. 이 점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의 공산주의 경력은 어떻게 봐야 할까? 밀정의 김원봉은 우리의 영웅이 아닌가?
육사에서 출발하여 국방부에서 옹호하고 있는 홍범도 동상 철거 또는 이전 문제는 처음부터 무리한 주장에서 출발한다. 대한민국 군인을 키워내는 육사에서 또는 군을 통솔하는 국방부에서 공산주의 경력을 갖는 홍범도를 기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1943년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한 독립군 장군 홍범도는 공산주의 전체주의자이다. 따라서 공과 과는 따로 보더라도 공산주의자의 흉상은 철거해야 한다.
너무나도 많은 문제를 갖고 있는 이 주장을 대체 어디에서부터 반박해야 하는걸까. 해방이후 우리가 살았던, 살고 있는 냉전시대 극단적 이념 대립의 역사를 해방이전의 역사에 그대로 투영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몰역사적인 사고이다. 1920~30년대와 해방이후의 너무나도 다른 세계관과 현실은 어마어마한 역사적 간극을 불러온다. 독립운동은 두 날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한국사회는 '반공'의 굴레 속에 그동안 감춰져있던, 언급하지 못했던 그 다른 한 축의 소중한 독립운동사를 이야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왔는가.
이제서야 한국사회는 김원봉을 이야기하고 홍범도를 이야기한다. 이들 역시 우리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사는, 또는 국방부는 국군의 뿌리를 어디에서 찾고 있는걸까? 독립군일까? 아니면......
군의 '아몰랑 매카시즘' 속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영웅의 명예가 한 순간에 추락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장군, 부디 해방된 조국의 땅에서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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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178, 2017.
반병률,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재해석」, 『국제한국사학』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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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저 끼워맞추기로 국론분열시키면서 자기말안따르면 공산빨갱이 만들려는 누군가들 천벌받기를 바란다
이거는 건드릴 이유도 없는데 왜 처 건드는지 모르겠음 다른거 할 거 존나 많은거같은디
업적 까내리기 같음
멀쩡한 위인 흠집낼시간에 잼버리나 잘하지 병신들
남탓과 친일을 못하면 ..읍읍읍
정성글 감사합니다.
군사 독재 옹호 하더니 ㅋㅋㅋ 앗 죄송 고양이가 쳤습니다
좋은글 읽고갑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일제시대 전공자는 아닙니다 ㅎㅎ;
@racket 화이팅입니다ㅜㅜ!!
잘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