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은 ‘주자학’으로 코드화된 국가 질서를 주조하고, 그 질서에 저항하는 소수자를 이단으로 적대시한다. 소수자들이 질주할 수 있는 광장을 밀폐시키고, 주자학주의라는 홈 파인 공간에 정주하면서 안정감을 누리도록 강요한다. 그곳엔 광장이 없었다. 만주족이라는 소수자에 당한 굴욕을 명의 주자학으로 다수자의 홈을 만들고, 조선의 모든 지성 집단을 그 홈에 정주하며 살기를 강요한 그였다. 그는 제국을 만들었다. 유가적 질서를 강요하는 국가는 제국이다. 이 제국을 벗어나 자유롭게 질주할 공간은 없다. 그 제국의 집을 지은 조선의 대표적인 주자학주의자는 우암이다. 그의 강학 공간이었던 남간정사는 그의 제국이다. 주자학적 질서로 환원될 수 없는, 제국의 주변인으로 살아야 했던 소수자들의 한을 외면한 곳이다.
대전은 한반도의 배꼽이다. 미국의 보스턴이나 중국의 우한(武漢)과 같은 교통의 중심이다. 대전은 한반도의 동서와 남북을 이어 주는 교차로이다. 동서를 이어 주는 교차로이면서 남북을 잇는 중심에 있다. 대전은 중심이면서 탈중심이다. 경상 좌와 우의 퇴계와 남명의 경계를 허물어 주는 탈경계이면서, 남과 북의 리와 기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다문화 벨트가 바로 대전이다. 이 다문화 벨트에 주자학적 교조주의가 폐쇄적 공간으로 재현된 곳이 바로 우암의 남간정사이다. 인조의 삼전도 굴욕을 치유하기 위한 대안을 명의 주자학으로 재구성한 우암이다. 하지만 그의 북벌론은 자신의 권력 부상의 디딤돌이기도 했지만,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조선의 학자 중 유일하게 송자(宋子)로 불릴 만큼 살아서나 죽어서나 절대 권력을 누렸던 우암이다.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 이상 그의 이름이 언급될 정도로 그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조선의 리더였음은 분명하다. 전국에 송시열을 배향한 서원이 44개나 되는 것도 그의 위상을 말해 준다. 절대권력을 누렸던 시간은 비록 짧았지만, 그는 자신이 지녔던 권력 때문에 유배와 사약을 받아야 했던 부침의 삶을 살았다. 권력의 부침이 우암만큼 심했던 인물이 또 있을까? 효종, 현종, 숙종 3대를 거치면서 우암의 권력은 효종 때 하늘을 찔렀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치면서 결국은 숙종 15년(1689)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으면서 그 유효기간의 종지부를 찍는다. 노론의 거두로서 소론의 학문적 저항을 극단적인 주자학주의로 단호하게 물리쳤던 그였지만, 그의 근본주의가 오히려 화를 불러오게 되었다.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의 시발점이 된 이유이다.
우암의 제국 짓기는 사계를 스승으로 모셨던 젊은 시기에 지은 팔괘정에서 시작된다. 이 누정은 스승에 대한 존경의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암의 강한 권력의지를 새긴 곳이다. 강경 죽림서원을 중심으로 좌우로 두 개의 쌍둥이 정자가 있다. 하나는 임리정이고 하나는 팔괘정이다. 거의 같은 모양의 정자이다. 두 정자 사이의 거리는 겨우 150미터이다. 건물의 모양은 거의 같아도 정자의 이름에서 드러나듯 건물의 공간성은 다르다. 사계 김장생과 우암의 나이 차이는 60살이다. 스승과 제자의 나이이다. 하지만 제자인 우암이 스승으로부터 실지로 배운 기간은 극히 짧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지은 것으로 추론되는 두 정자이지만, 팔괘정에는 우암의 권력의지가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팔괘정은 『주역』의 팔괘에서 인용한 이름인 것은 분명하다. 팔괘는 우주를 설명하는 8개의 기본 원리이다. 자신의 공간에 ‘8괘’라는 우주적 의미를 담은 것은 조선의 중심에 서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암은 미래 서인의 영수로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욕망을 자신의 공간에 각인해 두었다. 바위에 가로로 새긴 ‘청초안(靑草岸)’과 세로로 새긴 ‘몽괘벽(蒙卦壁)’이란 글자이다. 그중 ‘몽괘’이 눈에 띈다. 『주역』의 몽괘는 산수몽괘이다. 상괘는 산(艮)이고 하괘는 물(坎)이다. 전체적으로는 산에 막혀 있어 아직은 어디로 흘러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이다. 산이 물을 덮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막혀 있음은 잘 견디기만 하면 언젠가는 열린다. 열려서 길해진다. 몽괘는 결국 길괘이다.
우암은 산이 물을 덮고 있어 아직은 세상으로 나갈 길이 열리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세상으로 나갈 것이라는 권력의지를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거대한 바위에 또렷하게 새 겼다. 팔괘정은 임리정에 비해 다소 폐쇄적인 공간이다. 금강 쪽으로 바로 열려 있지 않다. 더욱이 주변의 큰 바위가 세상으로 나갈 길을 아직은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는 이 바위에 그의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강하게 육화해 놓았다. 아직은 젊지만 언젠가는 노론의 영수가 될 것이라는 욕망을 ‘청초(靑草)’로 새겼다. 이미 나이가 많아 거동조차 불편했던 스승 사계의 대를 이어 갈 재목으로 성장하고 있던 우암의 권력욕이 숨 쉰 공간이 바로 팔괘정이다. 이곳은 훗날 남간정사로 이어질 욕망의 제국의 기초를 닦은 곳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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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의 북벌론, 완고한 주자학으로
대화나 타협의 여지를 없앤 것은
참으로 아쉽습니다.
공자님의 정신과도 십만팔천리 떨어진 것은 아닐지요~
송시열은 주자주의자 주자패밀리 주자매니아라고 할 정도로 주자를 추종했다고 보여진다.
그가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삼은 이는 주자와 율곡였다. 이렇게 된 데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 송갑조는 그가 열두 살 때 “주자는 훗날의 공자다. 율곡은 훗날의 주자다.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며 주자와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쳤다.
1630년에 송시열은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율곡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고, 이듬해 김장생이 죽자 그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 들어갔다.
송시열에게 중국의 주인은 여전히 청이 아닌 명이었다. 청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은 송시열에게는 패륜이자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송시열은 현실로 굳어진 국제관계를 무시하고 유교적인 가르침대로 명을 위해 복수해 줄 것을 당부하고자 했다.
그가 벼슬길에 잘 나서지는 않은 표면적인 이유는 70이 넘은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예의와 염치가 없는 무리들이 조정의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 전해진다.
마지막에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좋은글을 많이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많은 참고가 됩니다.
@후설 감사합니다.
여기에 이런 저런 글들이 있어서 한번씩 보니 좋습니다.
솔직한 저의 생각(사상)을 조금씩 적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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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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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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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