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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반야암 오솔길 (지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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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작은 제국을 짓다, 남간정사(2)
후설 추천 0 조회 64 23.06.08 07:23 댓글 1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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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3.06.08 08:56

    첫댓글 고맙습니다.

  • 23.06.08 11:22

    _()()()_

  • 23.06.08 18:44

    우암의 북벌론, 완고한 주자학으로
    대화나 타협의 여지를 없앤 것은
    참으로 아쉽습니다.
    공자님의 정신과도 십만팔천리 떨어진 것은 아닐지요~

  • 23.06.08 20:15

    송시열은 주자주의자 주자패밀리 주자매니아라고 할 정도로 주자를 추종했다고 보여진다.
    그가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삼은 이는 주자와 율곡였다. 이렇게 된 데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 송갑조는 그가 열두 살 때 “주자는 훗날의 공자다. 율곡은 훗날의 주자다.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며 주자와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쳤다.

    1630년에 송시열은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율곡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고, 이듬해 김장생이 죽자 그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 들어갔다.

    송시열에게 중국의 주인은 여전히 청이 아닌 명이었다. 청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은 송시열에게는 패륜이자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송시열은 현실로 굳어진 국제관계를 무시하고 유교적인 가르침대로 명을 위해 복수해 줄 것을 당부하고자 했다.

    그가 벼슬길에 잘 나서지는 않은 표면적인 이유는 70이 넘은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예의와 염치가 없는 무리들이 조정의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 전해진다.

    마지막에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 작성자 23.06.09 07:20

    좋은글을 많이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많은 참고가 됩니다.

  • 23.06.09 13:57

    @후설 감사합니다.
    여기에 이런 저런 글들이 있어서 한번씩 보니 좋습니다.
    솔직한 저의 생각(사상)을 조금씩 적을 뿐입니다.

  • 23.06.09 05:24

    -()-

  • 23.06.09 08:52

    고맙습니다. ()

  • 23.06.09 18:21

    _()()()_
    고맙습니다.

  • 23.06.10 18:39

    _()()()_
    고맙습니다.

  • 23.06.11 20:32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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