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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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6)
이가봇에서 임마누엘로
삼상 4:1-22 (봉독: 1-2, 8-11, 18-22)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전쟁의 승자는 누가 될까요?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드실까요? 아니면 아무의 편도 드시지 않을까요?
보통 신앙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니 전쟁에서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실제로 1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약 200년간 여덟 차례에 걸쳐 이뤄진 십자군 전쟁이 그러했습니다.
이슬람 세력에 의해 성지순례가 중단되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서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십자군 파병을 호소합니다. 사실 교황으로서는 이슬람과의 전쟁을 빌미로 교황의 권위를 높이고 분열된 교회를 통합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교황의 연설을 들은 군중들은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 DEUS RO VULT”라고 호응하며 전쟁을 지지합니다. 심지어 당시 중세가톨릭교회는 십자군으로 죽으면 하늘에서 불멸과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십자군 전쟁에 대한 역사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탐욕과 욕망이 빚어낸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대 한 철학과 교수님은 이 십자군 전쟁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신의 뜻’이라 쓰고, ‘인간의 탐욕’이라고 읽는다.”
오늘 본문에도 비슷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패배입니다.
오늘 4장 1절에 보면 “그 무렵에”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 무렵이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의 귀를 기울여 듣기 시작한 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실로의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의 탐욕과 성적 타락이 그치지 않았을 그 무렵입니다. 바로 그 무렵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이 블레셋 사람들은 남서부 해안 평야에 정착한 해상 민족으로서 이미 주전 11세기 중반에 철 기술을 사용해서 군사적으로 전략적인 우위를 점했던 이들입니다. 이들은 늘 비옥한 중앙 지역으로 확장하기를 원했는데, 그랬기에 늘 이스라엘과 충돌을 했던 것입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오자, 이스라엘 사람들도 맞서 싸우기 위해 “에벤에셀”이라는 곳에 진을 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전열을 갖춘 이후 쳐들어옵니다.
치열한 전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블레셋의 승리였습니다.
그 벌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려 4,000명쯤이나 죽습니다.
패배의 원인을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패잔병들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묻고 패배의 원인을 발견하여 해결책까지 제시합니다.
[삼상 4:3] ... "주님께서 오늘 우리가 블레셋 사람에게 지도록 하신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실로에 가서 주님의 언약궤를 우리에게로 모셔다가 우리 한가운데에 있게 하여,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하여 주시도록 하자!"
하나님이 블레셋에게 지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진단은 주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언약궤를 우리 한가운데 있게 하자는 겁니다.
여러분, 언약궤가 무엇이죠?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진 나무 상자인데 길이가 약 114cm, 너비와 높이가 약 68cm 정도로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겉은 순금으로 덧입혀져 있고, 언약궤 안에는 말씀을 상징하는 십계명 돌판과 권위와 이적을 상징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생명의 떡을 상징하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궤는 야웨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인 표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언약궤를 가져오면 원수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언약궤를 앞세웠을 때 이긴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예로 여호수아서에서 여리고성을 함락할 때 기억나십니까?
그때 제사장들이 앞장서고 그 뒤에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그 언약궤를 메고 13번 성을 돌았을 때,
손 하나 건드리지 않고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날 이후로 언약궤는 전쟁에서 승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패배한 이유를 언약궤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이었습니다. 그들이 진 것은 언약궤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또한 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했던 엘리 제사장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그분과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지켜주리라.”
지도자들은 언약 관계에 신실하지 않고 탐욕스러웠으며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장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왜 패배했는지, 우리 안에 어떠한 죄가 있는지 깨닫게 해 주십시오.”
적어도 사무엘을 찾아가서 물었어야지요. 그때 그들이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심을 알았잖아요.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그들은 언약궤를 마치 부적처럼 쓰려고 합니다.
마치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이들이 십자가만 들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전쟁에서 승리케 해 주시리라 생각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부정직하게 사업을 운영하더라도 오피스에 성경 구절 액자나 십자가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것은 마치 차량에 십자가를 걸어놓고, 신호와 차선을 무시하고 속도를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운전해도 지켜주시겠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그럼 왜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이런 미숙한 결정을 내렸을까요?
먼저는 첫 패배의 충격이 컸기 때문일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들은 언약 백성이기에 질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한다! 우리는 승리해야만 한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
그렇게 외치다가 어느덧 하나님의 뜻은 온데간데없어집니다. 무엇만 남습니까? “우리”만 남습니다.
3절을 다시 보시면 얼마나 이들이 “우리, 우리, 우리”하는지 아시게 될 겁니다.
[삼상 4:3] ... "주님께서 오늘 우리가 블레셋 사람에게 지도록 하신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실로에 가서 주님의 언약궤를 우리에게로 모셔다가 우리 한가운데에 있게 하여,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하여 주시도록 하자!"
그들의 주도권을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 쥐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영적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는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유익과 혜택만 누리려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을 사용하고 이용하려 합니다.
이런 상태라면 아무리 언약궤가 백 개, 천 개라 하더라도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운 것은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비즈니스나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거룩하라. 정직하라. 베풀라. 나누라. 근면하라. 이런 것에는 관심 없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경쟁 업체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장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외하지 않고,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주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이렇게 변하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된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사사기 시대,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패배하게 하신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깨닫지 못합니다. 누구도 말해주지 못합니다.
비참한 두 번째 패배, 언약궤의 상실
결국 언약궤가 실로에 있던 성소에서 오는데 홉니와 비느하스가 함께 옵니다.
벌써부터 뭔가 조짐이 좋지 않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는 이미 심판이 예고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언약궤가 들어오자 환호성을 지릅니다. 지도자들의 결정이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언약궤가 들어오자, 사람들의 기뻐하는 소리가 블레셋 진영에까지 들립니다.
그들이 언약궤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 떱니다.
그들도 예전에 이스라엘의 신이 애굽 사람들을 쳤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잠시 두려워하던 차에, 이름 없는 누군가가 블레셋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습니다.
“대장부답게 힘을 내어 나가 싸우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들의 종이 된다!”
갑자기 두려움이 사라지고 사기충천하여 그들이 쳐들어갑니다.
결과는 블레셋의 압승입니다. 이스라엘은 큰 패배를 겪습니다. 무려 보명 삼만 명이 죽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이 있습니다.
[삼상 4:11]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이 때 전사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 없이, 종교의 형식과 껍데기만 남은 상태에서,
언약궤를 부적처럼 사용한 미신적 신앙의 최후입니다.
언약궤를 가져온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승리와 성공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도구화”하려는 것,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이러한 세속적이고도 기복적인 신앙이 사사기 시대의 특징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편한 것은 오늘날 이것이 현대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속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신앙도 하나님과 종교가 단지 세속적인 세상에서 이기고,
승리하기 위한 도구요 수단이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지도자들의 탐욕스럽고 세속적인 욕심과 수많은 대중의 기복적 성향이
서로 공모할 때, 담합할 때, 개개인과 공동체와 교회와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은 차단됩니다.
예수님과의 동행은 중단되며, 성령의 역사는 소멸됩니다.
예수님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가 그랬지요. 당연히 아들 예수가 동행 중에 있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자신이 가던 길을 계속 갑니다. 나중에 보니 없는 겁니다.
[눅 2:43-45]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로들은 언약궤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병사들을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셨나요? 역사하셨나요? 아니요.
하나님은 우리가 “오라, 가라” “역사해달라” 명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분의 종이지요.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배와 아픔을 교훈으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이가봇, 영광이 어디에 있느냐?
충격적인 패배의 소식을 가지고,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한 베냐민 사람이 티끌을 뒤집어 쓴 채 실로로 달려옵니다.
백성들이 전쟁의 패배 소식을 듣고 슬피 울부짖습니다.
그때 엘리는 언약궤를 빼앗길까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엘리도 뒤늦게 소식을 듣습니다.
“전쟁에서 지고, 죽은 사람이 매우 많고, 두 아들도 죽었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습니다..”
엘리는 당시 98세에 몸이 매우 비둔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그의 사사로서의 40년 사역이 비극적으로 끝납니다.
이때 엘리의 며느리이자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의 패배와 시아버지와 남편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갑자기 진통을 느끼고 출산합니다.
아들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습니다.
[삼상 4:21] 그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어 주며, "이스라엘에서 영광이 떠났다" 하는 말만을 남겼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데다가, 시아버지도 죽고 남편도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가봇에서 ‘카봇’은 ‘영광’을 의미하는데, 부정형 “이”가 붙어서 ‘영광이 없다,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접두사 “이”를 의문형으로 해석하면 “영광이 어디에 있느냐?”가 됩니다.
40년간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던 엘리가 죽고, 제사장이었던 두 아들들도 다 죽었으니,
비느하스의 아내 입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가문의 입장에서는 세상적인 영광은 떠난 것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떠나셨을까요? 아니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겼지만, 언약궤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떠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지요.
떠난 것은 탕자이지,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항상 언제나 그 자리에 매일 계셨습니다.
그러나 탕자가 떠났기에 마치 아버지가 안 계신 것처럼 느껴졌을 뿐입니다.
늘 신앙생활에서 먼저 떠나는 자는 우리이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을 때, 하나님이 떠나서 끌려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포로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때, 이가봇, 하나님이 떠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유다가 멸망하고 성문과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가봇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고난을 통해 그들을 돌이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가봇은 참 자녀를 향한 사랑의 매다
이가봇은 하나님이 사랑의 매를 드신 것입니다.
사랑의 매는 자녀를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고 자녀를 살리겠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매는 참 자녀에게만 들지, 남의 애나 모르는 애에게 들지 않습니다.
부모가 사랑의 매를 들었을 때 “자녀는 부모님이 나를 미워하시나?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나?”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반대입니다. 이가봇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만 징계하시기 때문입니다.
[히 12:7-8] 7 징계를 받을 때에 참아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시듯이 여러분에게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8 모든 자녀가 받은 징계를 여러분이 받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닙니다.
참 자녀에게는 반드시 징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이스라엘은 참 자녀이므로, 그들을 사랑하시기에 그들이 패하고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도 그들이 승승장구하고 평안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생아요, 궁극적인 심판입니다.
하지만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를 징계해서라도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임마누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받을 때에는, 죄를 철저히 고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비느하스의 아내가 외쳤던 “이가봇”을 우리도 외쳐야 합니다. 이가봇!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졌고, 그분의 영광의 광채가 사라진 것을 애통해 해야 합니다.
진정 우리가 회개할 때 주어지는 약속이 있습니다. 스가랴 1장 3절입니다.
[슥 1:3] 그러므로 너는 백성들에게 알려라.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간다. 만군의 주가 말한다.'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그분도 돌아오십니다.
이가봇은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임마누엘이 된다
더 나아가 이가봇은 역설적이게도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오직 십자가 은혜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떠나실 수 없고 버리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 많은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시기 위해 하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반역한 죗값을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지우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받아야 할 버림받음을 예수님이 이미 대신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마 27:46]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왜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에서 버림 받으셔야했습니까?
누군가는 하나님을 떠난 죄의 열매, 수치와 모욕과 버림받음, 죽음을 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대신에 죽음의 잔을 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세요.
우리의 죄와 마귀는 계속하여 “이가봇! 영광이 떠나갔다”며 외치고 조롱하고 정죄하지만,
십자가의 은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라고 응답합니다!
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가봇을 임마누엘이라 읽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이가봇이 변하여 임마누엘로 반전된 구원과 회복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어쩌면 이렇게 고백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가봇... 영광이 떠났다. 영광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그때 진정 하나님의 영광에서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받으실 때,
낮 12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었는데 세 시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졌습니다. 그야말로 이가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과 같이 영광스러운 날, 그날처럼 영광이 회복된 날은 없었습니다.
왜죠? 십자가 어린 양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사해지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요 10:28]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십자가 안에서 보면, 이가봇의 외침은 비극적인 소식이지만, 동시에 좋은 소식입니다.
이가봇은 엘리 가문의 입장에서는 비극입니다. 촛대가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전체적으로 보면 그것은 새로운 소망입니다.
타락한 제사장들이 물러나고, 사무엘이라는 하나님의 정결한 자가 세워짐으로써 이스라엘의 영적인 갱신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가봇은 나쁜 소식 속에 담긴 기쁜 소식입니다.
17절에 보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와서 엘리에게 비극적인 소식을 전합니다.
본래 소식을 전하는 사람(메바세르 מְבַשֵּׂ֜ר)이라는 히브리어의 단어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분명 그가 전하는 말은 비극적인 뉴스입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영적인 대수술을 행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가봇은 절망의 상징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여전히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여전히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나쁜 소식” 속에 “기쁜 소식”이 있음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시기를 축복합니다.
2002년 월드컵 4강의 주역이었던 이영표 선수가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이런 간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시합 전 어떤 기도를 하시나요? 아무래도 경기에 지면 한동안 힘이 들 텐데요.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컨디션을 유지하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지요?”
그의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은 패배가 필요할 때는 패배를 주시고, 승리가 필요할 때는 승리를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패배한 사람이 내일 승리할 수도 있고, 오늘 승리한 사람이 내일 패배할 수 있는 것이죠.
승리와 패배는 전혀 다른 의미 같지만, 다른 단어가 아니라 어쩌면 같은 단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데 어떤 사람에겐 현재 성공을 주는 것이 좋은 것이고,
어떤 사람에겐 지금의 실패, 패배가 좋은 것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우리 눈엔 완전히 달라보여도 하나님 눈엔 성공이나 실패나 사실 같은 거 아닐까요?”
이가봇은 패배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패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패배는 패배가 아닙니다. 그들의 패배는 좋은 패배요 영혼을 살리는 패배입니다.
그들의 패배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여전히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이가봇의 패배와 좌절이 있습니까? 사업에 실패하셨나요?
관계의 실패, 가정의 실패가 있습니까? 혹시 회개할 것은 없는지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지는 않았는지,
십자가와 신앙을 마치 부적처럼 쓰려고 한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비느하스의 아내가 외쳤던 “이가봇”을 우리도 외쳐야 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졌고, 그분의 영광의 광채가 사라진 것을 애통해 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십자가 은혜 안에서 이가봇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 안에서만 이가봇, 우리의 실패와 패배는 임마누엘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패배는 패배가 아니게 됩니다. 그 실패는 실패가 아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이가봇 안에 임마누엘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만, 그 패배를 이가봇이라고 쓰고 임마누엘이라고 읽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 안에서, 이가봇에 대해 “임마누엘”이라고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날 사랑하셔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사랑의 매를 들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날 참 자녀로 삼아주셔서, 징계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나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임마누엘, 성령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순절 기간,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