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31사단장과 클래식에 관한 대화에서 2차 세계대전 중에도 독일 장교들은 연주회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실제로 베를린 필은 나치 치하인 1944년 1월에 폭격으로 연주회장이 파괴되자 다른 장소를 빌려서 연주를 진행했으며, 연합군 치하인 5월에도 연주회를 지속했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단원들을 모아 음악회를 열었던 지휘자는 독일인 보샤르트로 알려져 있으며, 지휘자와 단원들은 죽음 앞에서도 국민을 위해 연주를 택했다.
세계 정상 베를린 필의 초대 지휘자, 리스트와 바그너의 제자이며 지휘자의 아버지라 불리는 뷜로(Hans von B?low)는 “나쁜 오케스트라는 없다. 그저 나쁜 지휘자가 있을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멕일러렌에 의하면 지휘자가 갖추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단원들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능력이라고 하며, 유능한 지휘자가 연습실에 들어오기만 해도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더 좋아진다고 한다.
중국 국립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예를 보면, 유진 올만디가 70년대에 북경을 방문했을 때 교향악단의 연주 실력이 형편없었으나, 올만디가 지휘봉을 잡자 며칠 사이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고, 연주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변화에 놀랐다고 한다. 서울시립교향악단도 정명훈을 상임 지휘자로 영입하면서부터 놀라울 만큼 좋아졌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연주회 취소는 오케스트라의 존재 부정이다. 며칠 전 DMB 뉴스를 보면, 광주시립교향악단의 2013년 교향악축제 참가가 루드비히의 독단적인 반대로 무산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으며, 루드비히는 지휘능력이 부적합 하다는 내용이다.
교향악축제를 관장하고 있는 예술의 전당측에 의하면, 루드비히가 외국인 지휘자여서 일정조율이 어려운 모양이라고 한다. 전국규모의 행사에서 자신의 지휘능력 부족이 들통 날까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상임지휘자로 억대의 연봉을 받고 있지만, 독일 개인적인 일정이 광주시립교향악단의 전국규모 행사보다 중요해서 일까?
누가 광주시립교향악단을 이렇게 방치했는지 부임 이래 단원들과 마찰을 빚어온 루드비히를 보자.
지휘자는 단체의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야 하며, 단원들로 하여금 소속감과 긍지를 갖게 해야 한다. 분수에 넘치는 고액의 연봉이나 과분한 명예를 안 놓치려고 버둥거리는 것은 본인과 그를 옹호하는 사람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1976년 창단 이후, 한때 우리나라에서 4대 교향악단으로 평가되었던 광주시립교향악단이 지휘자 하나 바뀌었다고 이리도 소란스러운 모양을 보면, 루드비히의 역량이 대단함을 알 수 있다.
고액의 출연료를 주면서 아마추어 수준의 여자친구와 동생을 협연자로 초청하여 웃음거리를 제공했던 자가 단원의 20%를 무조건 탈락시려키는 뱃심은 대단하다. 공무원과 대기업도 매년 20%씩 탈락시키면 사회가 좋아질까?
그날 연주회 감상후기에 올려 진 글을 보면, ‘200년간 사랑받아온 곡을 지휘자의 역량 미달로 인하여 이토록 망가지게 할 수도 있구나’라고 한탄 하는 사람도 있다.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좋은 지휘자, 나쁜 지휘자라는 것은 없다. 나쁜 지휘자는 이미 지휘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비추면 루드비히는 단원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나쁜 지휘자가 아니라, 이미 지휘자도 아니다.
뷜로, 카라얀 등이 지휘했던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손꼽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나 오스트리아 빈 필은 상임 지휘자, 매니저, 단원을 모두 단원들의 투표에 의해 선정한다고 한다.
시민들을 행복하게 해주던 순수한 예술인들이 선언문을 쓰고, 엄동설한에 피켓 들고 시위하고 있는 현실을 어찌 봐야 하는가?
‘군림형 지도자’보다는 ‘진정한 지도자’가 필요하며, 지도자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면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보다도 일관성을 지키고 시민들에게 객관적으로 정직하여야 한다. 오만한 지도자는 모두를 패배자로 만든다.
가장 나쁜 지도자는 국민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정치인이다.
이번 대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고 나선 문화예술인들이 많았다. 예술인도 선거판에 뛰어드는 것이 현실이다. 나쁜 지도자를 만나면 국민이 얼마나 피폐해 지는가를 우리는 절실하게 느끼면서 새로운 지도자에게 다시 한 번 기대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