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천주교신앙에서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가
돌보는 일입니다
주일학교에는 어린학생의 신앙을 주일학교교사가 하게 되고요
세례를 받는자는 그의 대부모가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런일은 그에 따르는 교육과 지도가 동시에 이루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기 위해서 6개월정도의 예비자교리를 받게되지만
세례후 이들을 돌봐야 하는 입장에 있는 대부모가 대자녀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는
잘 알려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도 느끼겠지만
우리들이 성장하는 과정중인 청장년층이 신앙생활중에서 가장 취약한 시기라는
것입니다 이때에 젊은이들은 세사에 나가야하고 가정을 꾸려야 하는 어려운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런일이 천주교신앙환경이 아닌 세상이나 가정에 속해있는
대부분의 교우들은 이와 더불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하기에
그 어려움은 심할 것입니다
직장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 중에는 회사일로 인해서
주일미사를 드릴수가 없을때였다 그로 인해서 적지 않게 특전미사를 드린적이
많았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직장과 가까이에 있는 큰 성당 즉 주교좌성당에
주로갔기에
혼배를 하러 본당신부를 만나러 갔을떄에 신부님이 잔소리를 하셨다
본당에 얼굴도 안비치는 놈이 와서 부탁한다니까 기가 막혔을것입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1981년정도일때에는 골목안
봉덕3동 성당은 규모가 적어서인지 주일미사에 오는 이들을
본당신부님이 다 아시고 계셨지요
그런데 저는 주로 계산성당을 다녔던 것입니다
1980년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하는지는 몰라도 혼배나 관면을 받을려면 반드시 교육을 받아야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몰라서요 혼배할 날을 불과 일주일 남겨놓고
신부님을 만났던 것이기에 혼배후에 그 교육을 받으라는 단서조건이 붙은
혼배 즉 관면혼배를 했던 것이었지요
이를 저희 부모님도 모르게 하느라고 집애서 반지를 가져오느라고
한바탕 법석을 떨기도 하였지요
결혼하고 나서 거의 일년 가까이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그래서인지 아내를 데리고 성당에 갈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절에 열심히 다니시는 분이시라서 절대로 며느리는 성당에
나가게 할수가 없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서울교구 청년성서모임으로 만난 자매들중에서 아주 열성적으로 활동하다가도
결혼후 성당을 떠나는 경우를 보게되는데요
주로 비신자나 개신교신자를 배우자로 두게 되는 경우라는 것입니다
한쪽 배우자가 특히 여자인경우에는 이를 극복하고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구에서나 본당에서나 이들에 대한 고민이나 대책이
전혀 없이 나몰라라하는 식이었지요
저도 그이후에 여러명의 대자를 두었지만 이들과 지금 연락되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디서 사는지조차도 알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수시로 연락하던 대자 한사람이 몇년전에 암으로 하늘나라로
샀어요
그 대자는 암으로 그렇게 되었는데요 그가 살아있을떄에 경산에 살면서
수시로 가톨릭병원에 치료하러 오는 것이었지요 그때에 잠시 만났지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암이 뼈에 전이가 되어서 고통이 심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 사정을 대분인 제가 전혀 몰랐던 것인데
간혹 전화통화해서 제가 물어보면 괜찮아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서울살때에 대구에서 그 대자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는 대부를 설때도 그러했고 다른 세례식에도 참여했지만 세례식은 미사중에
하는것인데 대자의 세례식은 주일날 하하지는데도 미사없이 세례식을 하는 바람에
주일미사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날 서울로 대구비행장에서 비행기로 돌아와서 서울서 미사를 드릴려고 했지만
결국은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하고 동대구역에서 기차로 오는 바람에 그날 미사를 드리지 못했지요
대우다닐적에 경기도에 있는 어느 공장에서 같이 근무하던 동료가
대부를 서달라고 해서 서주었는데요
세례이후에 그는 개신교신자인 아내를 맞았지요 그런이유인지 그이후에
연락도 끊어지고 말았지요
지금 가장 어려운것중에 하나는 갸신교배우자를 만나서 결혼한 이후인것입니다
개신교회가 여러교파가 있어서 그 본질이 다르지만
때로는 아주 보수적인 교단이 있어서 천주교흫 아주 배척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안산시청에서 계약직으로 일할때에 만난 형제는
혼배를 하지 못한채 결혼생활을 하였는데 그이후에 혼배조당을 풀고
혼배를 할떄에 제가 증인이 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인구에 비해서 천주교신자가 적은 곳에서는
청년들의 신앙에 대한 변수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교구나 본당에서는 이런문제에 대해서 잘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가지 복잡적인 문제로 냉담기간으로 갖거나
아니면 영원히 회복되지 못하는 성당을 완전히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가지 이유중의 하나로 대구에서 서울로 직장을 옮겨 정착될때까지
3년이상 냉담기간을 가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고 이를 회복하지 못하면 어떤일이
일어날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요
저는 서울에서 거의 40KM이상 떨어진 경기도 의왕시에서 서울역에 있는 직장까지
출퇴근했습니다 아침 7시에 아파트단지로 오는 버스를 타고 출근했지요
저는 이런 냉담기간을 회복하기 위해서 6개월간 매일 새벽미사를 드리고 출근했으며
매일 아침 저녁기도를 바쳤던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렇게 해서라도 냉담을 풀지 않으면 죽을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청년들은 이런 고충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저는 안산시청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안산시청게시판에 글을 많이 올렸지요
그래서인지 새로 임명받아 제가 일하는 것으로 발령받는이들은 천주교신자였던
사람들도 저에게 와서 인사를 하시는 것이었지요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지금 성당에 다니지 못하는 이유를 대는것이었지요
지금도 그곳을 떠나온지 거의 10여년이 되었지만 그 후배는 가끔 연락을 줍니다
그들은 성당을 떠났지만 여전히 마음속에는 성당신앙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통례를 보면 판공성사보는 비율과 주일미사를 드리는 비율을 보면
어느정도 차이가 있음을 알수가 있는데요 이는 매주 미사는 안나오지만
한달에 1~2번 미사참례하고 판공성사를 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인데
이들은 완저히 본당을 떠난것도 아니고 여전히 마음속에 신앙을 푼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친한 후배가 있어요
지금 서울에서 가난한 동내에서 작은 평수에 혼자살기에 가끔 서울에 갈 경우에
그집에서 자기도 하는 녀석이 있습니다
그 후배도 주일미사를 가끔씩 빠집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놀리면서 말하지만
'너처럼 고햐성사를 자주 보는이도 드물것이다..'
본당이나 교구에서 조금만 이들을 위한 배려나 관심이 있다면
지금처럼 많은 청년들이 성당을 빠져나가지는 않을것입니다 이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