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N 피플] 잉글랜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다'
럼즈펠드 '모든 책임지겠지만 정치적으로 사임할 수 없다'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의 여주인공 린디 R 잉글랜드 일병(21). 담배를 꼬나 문 그녀가 이라크 포로들의 성기를 향해 총을 쏘는 시늉을 한 모습이 찍힌 사진은 '미국의 추악함'을 극명하게 상징하고 있다.
때문에 그녀는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자행된 일련의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에서 '핵심 인물'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이 사진 이외에도 이라크 포로의 목에 가죽 줄을 매고 마치 개처럼 끌고 가는 모습과 두건을 씌운 이라크 포로를 배경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은 모습에서 그녀는 당당함과 장난기까지 보여주고 있다. 그녀가 '출연한'이 사진들은 마치 가학적이며 엽기적인 포르노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다.
잉글랜드, 독립심 강한 모범생이 '악녀'
이 사진들을 보면서 무엇보다 먼저 그녀가 도대체 어떤 광기에 휩쓸려 이 같은 행위를 저질렀는지 의문이 든다. 그녀의 고향은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한적한 산간마을인 미네랄 카운티이다. 《뉴욕 타임스》와 《볼티모어 선》 등 미국 언론들에 따르면 잉글랜드는 고교 때 말썽 피우는 일 없었던 모범생이었다. 가난하지만 선량하고 똑똑한 철도노동자 딸인 그녀는 자립심이 강하고 고집이 센 편이었다. 2000년 고교 졸업 후 치킨공장과 슈퍼마켓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2002년 3월 같은 슈퍼마켓에서 일하던 남자 친구와 결혼했으나 1년여만에 이혼했다.
사회 초년생으로써 쓴맛을 본 그녀는 토네이도를 추격하면서 이를 연구하는 '스톰체이서(Stormchaser)'가 되려는 고교 때부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 진학을 희망했다. 독립심이 강했던 그녀는 학비를 지원해주겠다는 부모의 말도 거절하고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메릴랜드주에 본부를 둔 제 372 헌병중대에 입대했다. 학비도 벌고 조그만 산간 마을에서 벗어나 외국에도 갈 수 있는 군대가 그녀에게는 꿈을 이룰 수 있는 발판이었다. 이처럼 입대하기까지의 과정은 한 전형적인 미국인이 밟을 수 있는 평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라크는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행정병으로 교도소에 수용되는 이라크 포로들의 지문을 찍고 신상기록을 담당하던 잉글랜드는 하루아침에 '악녀'로 돌변했다. 개방된 사회인 미국과는 전혀 다른 이슬람 국가인 이라크로 파견된 그녀는 아마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겪었을 것이다. 테러와 전쟁의 공포도 그녀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이다. 또 전쟁터도 아닌 교도소의 막힌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포로로 끌려오는 이라크인들을 보면서 그녀는 묘한 감정도 느꼈을 것이다.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라크에 파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 사건으로 기소된 같은 부대 기술부사관 찰스 A 그레이너(35)와 약혼했다. 미국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그레이너는 전처에게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법원으로부터 접근 금지 명령을 받은 경력이 있다. 그는 교도소의 일종인 교정시설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는 전직 해병 출신이다. 이 같은 경력 등을 볼 때 두 사람의 관계를 자연적이라고 말하기는 약간 어려운 측면이 있다. 현재 임신 4개월 째인 잉글랜드는 지난 1월 어머니에게 '약간의 문제가 있으니 알고 계시라'는 내용의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이번 사건이 파문을 일으킬 것을 예상했던 것이다.
미군 병사들의 자발적 행위 가능성은...재판에서 밝혀질 듯
그러면 과연 그녀는 자발적으로 이런 행위를 했을까. 《뉴욕 타임스》는 6일 심리학자들을 인용, 교도소에서는 정상적인 사람도 '괴물'(monster)로 변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필립 짐바도 스탠퍼드대 교수는 교도소는 힘의 불균형이 매우 심한 곳이기 때문에 교도관들의 기본적인 충동을 통제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붓지 않는다면 교도소는 잔혹한 학대를 저지를 수 있는 장소가 되기 쉽다고 지적했다. 테러리즘과 공공안전센터의 찰스 스트로저 소장도 이라크 교도소에서 교도관은 전쟁의 감정과 테러리즘에 대한 공포를 느낌으로써 수감자들의 인간성을 말살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잉글랜드도 이번 사건이 공개된 이후 어머니에게 '단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다'고 변명했다.
실제로 행정병인 그녀는 포로들을 심문하기 위해 교도소 감방 내부까지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교도관인 약혼자 그레이너와 그의 동료들이 그녀를 부추겼을 가능성이 있다. 또 어느 정도 죄의식이 없어진 그녀는 이 같은 포로학대 행위를 성인식에서 치러야할 '통과 의례'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사진들로 볼 때 그녀가 어느 정도 포로학대를 즐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녀 스스로 자발적으로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반증인 셈이다. 교도소 내부가 비정상적이었다고 해도 이성적 행동을 해야 할 기본적 의무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교도소라는 특수 장소라고 하더라도 도덕성과 인간성을 망각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극히 잘못된 일이라는 점을 깨달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녀가 입대한 이유가 오로지 돈과 외국 생활에 대한 동경이었다면 이 역시도 문제일 수 밖에 없다. 만약 이번 사건이 폭로되지 않았다면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미국으로 돌아와 고향에서 '전쟁영웅'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녀가 잘못된 장소와 시간이라고 언급했듯이 이라크도 아니고 교도소도 아니었고 전쟁 때도 아니었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자기변명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가 입대한 목적이 오로지 자신의 꿈만을 위한 것이라면 운이 나쁘게도 이라크에 간 죄 밖에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군 검찰은 8일 잉글랜드를 포로 폭행 및 학대 공모 혐의로 기소했다. 그녀는 4가지 혐의를 받고 있다. 이라크 포로들을 여러 차례 폭행하고 다른 병사인 찰스 그레이너와 공모해 포로들을 학대하고 추잡한 행위를 했다는 등의 내용이다. 앞으로 그녀의 자발적 행위여부는 재판에서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다른 여군, 제네바 협약 등 교육 부실과 조직적 핵대 행위 폭로...책임 소재 규명 열쇠 될 듯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미군이 병사들에게 제대로 된 복무 수칙 등을 교육시켰느냐와 조직적인 행위였느냐 여부이다. 특히 잉글랜드를 비롯한 기소된 병사 7명이 제대로 된 군대 복무 교육을 받고 교도소 근무 수칙 등을 준수했다면 이런 일들을 제지하거나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인이다. 또 이라크 포로들로부터 정보 등을 빼내기 위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행위라면 더욱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와 관련, 이번 사건으로 기소된 사브리나 허먼 상병(26)은 8일 《워싱턴 포스트》와의 E 메일 인터뷰를 통해 교도소에는 포로들을 통제할 규칙도 없었으며, 자신들은 교육도 변변히 받지 못했으며 단시 정보 장교들로부터 포로들을 심문하기 편하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망가뜨리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그녀는 '군 정보 장교들과 CIA 요원들 및 민간 계약 청부업자들로부터 이 같은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녀는 또 교도소에는 규격화된 통제 절차가 없었다면서 정보장교들이 마음대로 규칙을 정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어 지금까지 한번도 제네바 협약에 따른 포로들의 취급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교도소에는 제네바 협약 준수조항 문서가 붙어있지도 않았으며 기소된 이후 2개월 만에 제네바 협약 문서를 처음 보았다고 말했다.
럼스펠드, 군 지휘체계상 책임자 문책하겠다
이 같은 발언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책임 소재 여부가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로 국방부를 총괄하고 있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부장관의 거취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럼즈펠드 장관은 7일 상원과 하원의 군사위원회에 출석, '국방부장관으로서 이번 사건은 자신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말했으나, 민주당 의원들의 거듭된 사퇴 촉구에 대해 자신의 장관직 유지가 사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되면 즉각 사퇴하겠으나 정치 쟁점으로 비화한다면 사퇴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럼즈펠드 장관은 또 현재 진행중인 조사 활동의 속도와 범위, 수준 등을 검토해 추가 조사나 연구 여부를 결정할 위원회를 구성해 앞으로 45일 이내에 결론을 보고토록 했다면서 학대 행위에 연루된 민간 용역직원 2명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럼즈펠드 장관은 직접 가혹행위에 가담한 사람들뿐 아니라 군 지휘체계상 책임있는 지휘관들의 책임도 묻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건 피해자들에게 깊이 사과한다면서 이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증언 말미에 '더 많은 (학대) 사진과 비디오가 존재한다'면서 '이것들을 공개하면 문제가 더욱 악화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상.하원에서 럼즈펠드 장관의 거취에 대한 의견을 어떻게 모을 지는 미지수이지만 일단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그의 유임을 천명한 바 있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이 앞으로 이번 사건의 파문이 더욱 확대되고 이라크 문제가 대선 가도에 발목을 잡을 경우 럼스펠드 장관이 자리를 보전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WP 등 美언론들,'이번 사건의 근본 원인은 럼스펠드의 정책 때문'강력 비판
특히 이번 사건의 근본적 원인이 럼스펠드 장관의 정책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는 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와 관련, 6일자 '럼즈펠드의 책임'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2년여 전부터 럼즈펠드는 외국에서 구금자들을 처리하는 미군의 수 십 년 된 관행을 뒤엎기로 결정했다면서 국방부는 제네바 협약에 구속되지 않고, 죄수 신문에 관한 육군 규정들은 지키지 않고, 많은 구금자들을 독방에 감금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럼즈펠드의 결정은 이라크와 아프간의 포로들이 학대당하고 고문 받고 살해되는 무법체제를 만드는데 기여했고 최근까지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이 같은 무법체제는 럼즈펠드가 아프간에서 미국과 동맹국에 의해 구금된 수 백 명은 제네바협약에 따른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2002년 1월에 시작됐다고 강조했다. 이 신문은 또 이라크에서 학대행위들은 만일 럼즈펠드가 규정 위반에 대한 초기의 보고서들에 대응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면서 그는 대신 보고들을 공개적으로 일축하거나 최소화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럼즈펠드의 이같은 태도가 미군의 기본적 인권 존중 태도를 훼손했고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미국의 능력에 타격을 줬다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도 7일자 사설에서 포로학대 사건으로 미국이 국제사회의 비웃음거리가 됐으며 이는 헌병들 중 일부 기강이 풀린 자들에 의한 행동으로 훌륭한 각료 한사람이 오점을 쓰게 된 경우와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국방부 장관을 두 번이나 역임한 미국 역사상 가장 유능한 장관 중 한 명이라는 평판을 들어왔던 럼즈펠드는 진퇴의 기로에 빠지게 됐다. 럼즈펠드는 잉글랜드처럼 '잘못된 장소와 시기'에 '잘못된 행위'를 저지른 인물은 절대 아니다. 그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 자신이 선택한 장소와 시간에 따라 올바른 전략을 구사한다고 생각하는 신념에 찬 인물이다. 그의 신념과 전략을 부시 행정부는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과연 부시 대통령이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을 주도한 럼즈펠드의 목을 칠 수 있을까?
이장훈(국제문제 애널리스트)
- 약력
한국일보 모스크바 주재 초대 특파원, 사회부 차장, 국제부 수석 차장, 주간한국 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국제문제 집필 활동을 하고 있음. 저서 <홍군 VS 청군-미국과 중국의 21세기 아시아 패권 쟁탈전>, <네오콘-팍스 아메리카나의 전사들>, <유러화의 출범과 21세기 유럽합중국> 등.
첫댓글 끔찍합니다. 인권을 가장 많이 주장하는 나라, 미국. 외국을 침략할때 꼭 등장하는 명분도 미국은 상대국의 인권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