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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5일 토요일 제288회 이습회 일지 작성자 : 바다소년.
이번 이습회 합주일지를 쓰기로 한 사람(?)의 결석으로
대타로 이습일지를 쓰게 되어서 여간 부담이 아니다.
움츠렸던 기억의 저편을 헤집으면서
제388회 이습회 풍경을 여과없이 전하고자 한다.
첨부된 자료는 참고문헌에 인용근거를 명시했으며, 사진은
직접 찍은 것이니 함께 누려야할 호사라고 생각한다.
수업일지가 부실해서 사진첩에서 2006년 한소리국악원 하계수련회 사진도 추가하였다.
추억을 곱씹으며 오늘을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요즈음이기 때문이다.
이번 주는 가는 겨울을 아쉬워하듯이 겨울비가 촉촉히 내린 토요일이었다.
제388회 이습회(肄習會)~~
이습(肄習;학업이나 실무 따위를 배워 익힘, 肄 익힐 이, 익히다. 배움. 애쓰다. 힘씀. 習 익힐 습, 익히다. 배우다. 닦다)
토요일은 한소리국악원의 역사가 새로 쓰이는 날이다.
이습회명칭의 재현..
이습회(肄習會)라는 명칭은 1932년 10월 이왕직 아악부의
노악사들이 중심이 되어 아악의 보존과 육성, 개개인의 기술 향상을
꾀하기 위하여 조직한 모임이라고 한다.(뒤에 쉬어가는 글 참조)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이습회의 명칭이 지속적으로
부활되는 시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늘은 월례발표회가 있는 날이다.
올해부터는 매달 마지막 주에 조별로 “작은 발표회”를 갖는 시간을 마련한 것이다.
벌써 금년 6월 상반기까지 일정이 다 잡혀져 있다.
그 첫 번째 무대가 이번 이습회부터 시작된 것이다.
2시부터 이번 발표조의 연습으로 5층의 열기는 이미 프로수준이다.
2월 달 조도 미리 오서 옆방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3시부터 이습회는 시작되었다.
제388회 이습회의 하루일정은 수연장지곡을 시작으로,
취태평지곡(세령산~군악), 당악지도 및 태평춘지곡(본령),
1월 발표조의 발표순으로 진행되었다.
총괄지도는 한소리국악원 조성래 원장님과
노헌식 부원장님께서 해주셨다.
참석자는 다음과 같다.(순서 없이).기록이 없으신 분..알려주세요~~
대금: 박종인 샘, 김종현 샘, 김승조 샘, 김진호 샘, 강명구 샘,
박명덕 교수님, 이해종
해금: 유선영 샘, 임채린 샘, 김은수 샘, 이경미 샘, 이형욱 샘,
김영순 샘, 서정현 학생, 정서연 학생
피리: 김유찬 샘, 추상철 샘, 김기영 샘
가야금: 김미옥 샘
거문고: 주은경 샘
수연장지곡을 시작으로 이습회는 시작되었다.
첫 합주곡은 수연장지곡..조성래원장님의 맛깔스런 소금소리,
노헌식 선생님의 구음에 맞추어서
피리, 해금, 대금, 가야금, 거문고의 대향연이 펼쳐졌다.
누군가(?)의 장수를 기원하듯이..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잠시 원장님의 말씀.. 취태평지곡(醉太平之曲) 시간...
잠시 분야별로 나누어서 연습의 시간을 갖도록 한 것이다.
각 파트별 집중식 분석수업(분야별 연습)..
해금은 잠시 옆방에서 집중식 수업을 하고 4시까지 오기로 한 것이다.
해금지도는 김은수 샘..전공도 하셨고..
국악관현악단 멤버로 활약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성격도 좋으시고~~~
해금소리가 좋아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해금을 제외한 피리, 대금, 가야금, 거문고 팀은 장소변경없이
취태평지곡을 세령산부터 시작하여~~~군악까지 합주하였다.
안 되는 부분은 무한 반복지도와 합주를 거듭하면서 합주의 완성도를 높여갔다.
어느덧 오후 4시.. 해금팀들이 합류하였고
이제는 조성래원장님 지도로 당악(唐樂)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 있었다.
국악음계 시창(12율명중 평조 5음계 연습) 합동연습과 원장님의 학창시절의
경험담까지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 부분은 소중하고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기에
자세하게 수업시간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찬란한 빛을 내는 ~~이게 소가예요. 노래가 다르지요.
입학식때 듣고 깜짝 놀랐어요!
국악식으로 작곡하신 거예요. 선생님께서..
소가에 대한 국악식의 작곡~~국악을 배우기전에 기본으로 음계를 익혀야 한다.
유치원 때부터 서양음계를 익힌다.
도레미파솔라시도..아무 의미 없이 리코더를 분다.
이건 독일에서 나온 것을..
이미 여러분들은 국악을 서양식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국악을 배우기전에 국악음계를 배워야 하는데..
이미 서양음악에 젖어있다.
산조보를 전부 오선보로 만든 거예요. 한심한 거다.
가야금, 거문고 정간악보가 없다. 국악 현실이다.
대금, 피리, 해금은 정간 악보가 있다.
이미 서양식으로 산조를 오선보로 만든 문제..
국악을 오선보로 만든 문제..국악의 맛이 덜 난다.
12음계를 다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말씀이 있으셨다.
시창~ 수ㅡ업 계-속~~~
자~~ 시작 1번
黃太仲林南→(구음)나누너노느~~, 南林仲太黃→(구음)느노너누나~~,
黃黃→(구음) 나라~~, 太太→(구음) 누루~~
원장님~~ 아시겠지요. 이게 서양음계로 바꾸면
솔라도레미~~ 미레도라솔과 비슷해요. 똑같지는 않아도...
108음계..원장님의 일성!!!
자~~ 다 같이~~
나~누~너~노~느~~~~느~노~너~누~나~
둘째줄~~~계속~~~~~누너노느나~ 나누노너누~~
이어지는 원장님의 말씀...
“처음에 배울 때는 하!하!하! 이상하더라고 누나~~누나~찾으니 "라는 말씀과 함께
"당시는 다 시험보았어요. 국악음계를 1년 동안 배웠고,
소금하고 단소를 1년 동안 배우고 일주일에 1시간씩...
그래서 국악음계를 정확하게 배웠죠~~~”
학생생활도 소개해주셨다.
원장님의 계속적인 수업은 이어졌다.
평조음계 우조음계의 비교..
동요 “학교 종”을 평조음계와 계면조와 비교해서 시창해주셨다.
평조음계는 밝은 느낌..
계면조는 슬픈 느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새야~새야의 구음까지 모두 함께 한 시간이었다.
대표적인 남도 계면조 음계라고 하심..
중광지곡 계면조 3음계..황이 기본음 황임~임(요성) 자꾸 흘려내야 한다.
임~중(안 흔든다)..황황
대표적인 천년만세 황중~중중황 중황~중~무림 계면조 음악의 대표적이다.
시간이 역류하여, 원장님의 학창시절..
타임머신과 현대적 감각이 조우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안 오신 분은 후회하실 것입니다.
물론 다음에도 계속되니 걱정은 안하셔도...
그리고 당악음계를 배우게 되었다.
처음하는 분들을 위해 조성래 원장님은 당악의 음계 및
역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주셨다.
당악은 특히 매년 종묘에서 펼쳐지는 종묘대재(宗廟大齋)의
종묘제례악의 기본이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참고로 종묘대재는 조선 왕조 시대에는
1년에 다섯 차례 제향을 모셨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중단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1년에 한 번 제향을 모시고 있다.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제례악(祭禮樂)과
일무(佾舞)를 갖추고 제례(祭禮)를 봉행해 오고 있다.
지나간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그대로 모셔 놓고, 옛 격식대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 곳은
세계에서 우리 종묘밖에 없으며, 종묘는 199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고,
1997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01년에는 종묘제례 및
제례악이 국내 최초로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록되었다
이번 제388회 이습회에서 함께 한 곡은
태평춘지곡(太平春之曲)의 도입부분 두 줄까지만 했다.
그 이유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1월의 조별발표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자리를 정돈하고...
1월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피리: 김유찬 샘, 단소: 김진호 샘, 대금: 박종인 샘, 해금: 이경미 샘
모두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모두 그 자리에 한번 이상씩은 올라가야하기 때문에
그 어느 순간 보다 긴장감이 흘렀다.
순식간에 지나간 상령산~~~
토요일에 하는 KBS 국악한마당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주일의 일상에 찌든 거친 숨소리와 혼탁해진 정신을
맑게 해준 삶의 청량제로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자리였다.
큰 박수소리에 1조의 상령산 마무리...
그들만의 발표회가 아닌 모두의 발표회로 첫 무대가
바람처럼 지나갔다. 많은 준비 연습이 엿보이는 자리였다.
박명덕 교수님은 발표하는 모습을 그려주셨다.
아래 박교수님의 그림을 옮겼습니다.
참 대단하신 분이다.
그림이면 그림..마라톤 221회 완주..색소폰에 대금에..
성격까지 좋으시고(이건 한소리 가족 모두 해당되는 사항이지만..)
또한 한소리 대표미인~~안 실장님은 오늘도 사진을 예쁘게 찍어주셔서
값진 추억의 한자락을 만들 수 있게 해주셨다.
차렷!!! 경례~~~ 감사합니다. 수업 끝나는 모습이다.
유선영샘의 낭랑한 안내멘트..
오늘은 삼겹살이 길 건너에 도사리고 있다고...
모두의 참석을 종용(?)...
어김없이 2차 수업은 한소리 별관에서 펼쳐졌습니다.
2조부터는 기본의상과 조장책임, 중심(?)으로 별관에서
약소한(?) 酒님을 모실 기회를 갖자는 논의도 있었습니다.
2차 수업후 일부는 사께 한 잔으로~~
길고도~! 짧은! 토요일 오후를~~
끈적끈적하게(?) 더 채웠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물론 저도 함께 했습니다만...
자기가 좋아서 하는 한소리국악원 이습회..
부담 없이 참여해서 부담 없이 삶의 거친 여백을 채워가는
자리인 것 같습니다.
갑작스럽게 일지 쓰는 주자가 바뀌어서 한소리 가족의
“많은 숨소리”를 담지 못했습니다.
서로간의 간극 조정이 더 이루어질 때
수업일지는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는 저같이 국악 비전공자만이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서
잠시 쉬어가시라고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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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는 글 1> : 이습회 [ 肄習會 ]
일제강점기 사설 연주모임의 하나. 일명 아악이습회(雅樂肄習會).
1932년 10월 13일 이습회의 첫 무대를 올린 이후,
광복 이전까지 총 150회의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이습회의 초기 공개연주회는 운니동(雲泥洞) 청사의 일소당(佾韶堂)에서
초청인사를 위해서 개최됐지만,
1938년부터는 부민관(府民館)에서 공개연주회로 개최하였다.
1938년 10월 6일 이습회의 6주년기념공연이 일반인을 위해서
부민관에서 열려 청중들의 찬사를 받았다.
공개공연 후 김천흥(金千興)과 김영윤(金永胤)은 우수 연주자로 뽑혀
쌀 한 가마를 상으로 받았다.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이습회는 계속되는 동안
아악수 및 아악수보(雅樂手補)는 이왕직아악부의 노악사(老樂師)들로부터
아악의 전승 받았다.
그 전통은 해방 후 국립국악원의 젊은 국악사(國樂士)들에게 전승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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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4.1764~65쪽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 562쪽
『國樂大事典』 張師勛,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4, 594~613쪽
참조어 아악이습회(雅樂肄習會)
한겨레음악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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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는 글 2> : 이습회 [肄習會]를 만든 함화진[咸華鎭](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참고)
교방사(敎坊司)의 가전악(假典樂)·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제5대 아악사장(雅樂師長). 본관은 양근(楊根: 경기도 楊平).
자는 순중(舜重). 호는 오당(梧堂). 전공은 거문고.
제2대 국악사장(國樂師長) 함재운(咸在韻)의 장자(長子).
족적은 경성부 서부 여경방(餘慶坊) 선공동(繕工洞) 55통 6호.
1884년(고종 21) 8월 19일생.
경성부 남부 종현(鍾峴) 출생. 출생 - 사망 1884 ~ 1948
1900년(광무 4) 12월 13일 가전악이 됐고,
1901년 1월 1일 장례원(掌禮院)의 전악이 되었다.
장악원(掌樂院)의 악사 함윤옥(咸潤玉)은 함화진의 증조할아버지이고
젓대와 단소 명수인 함재홍(咸在弘)은 그의 할아버지이다.
제2대 국악사장 함재운의 아들로 태어난 함화진은 어려서부터
음악공부를 시작해 재학시절 거문고 명수 이병문(李秉文)에게
거문고를 배웠고,
제3대 아악사장을 지낸 명완벽(明完璧)으로부터
가야금을 배워 기악의 명수가 되었다.
1902년(광무 6) 4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보령(寶齡)이
51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 입소 경축 잔치 때,
그리고 1902년 11월 고종황제의 망육순(51세) 및
등극 40년을 경축하는 잔치 때, 의궤청(儀軌廳)의 간역(看役)이었다.
1909년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의 설립 당시 교사진의
한 사람으로 가야금 교사였다.
그는 김경남(거문고)·김상순(양금)·명완벽(가야금)·이영환(가곡)·
이춘우(단소)·조동석(단소)·조이순(거문고)·하순일(가곡)·
한규우(가야금)와 함께 활동하였다.
1910년(隆熙 4) 1월 4일 장례원의 장악(掌樂)이 됐고,
1911년 2월 1일 이왕직(李王職)의 장악이 됐으며,
1913년 8월 1일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장(雅樂手長)이 되었다.
1911년에 설립된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의
가야금선생으로 있을 때 소장에 한석진,
소감에 홍긍섭 아래 교사로 임명된 학감 하규일을 비롯해
생황에 한진구, 가곡에 하순일·이영환, 거문고에 김경남·조이순,
가야금에 명완벽·한규우, 양금에 백용진·김상순,
단소에 이춘우·조동석, 그리고 서양악과에 초빙된
김인식과 함께 일하였다. 조선정악전습소에서
함화진은 거문고와 가야금을 가르쳤다.
한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西洋樂科)의 제1회 졸업생인 그는
성악과의 하대홍·안종건·최용환 등 및
악리과(樂理科)의 김의균·한규우·백윤기·백종성과 함께
1912년에 졸업하였다.
『장악원이력서』(掌樂院履歷書)에 의하면,
1915년 당시 아악사장 함재운 아래 함화진은
아악수장 8명 중 한 사람이었다.
1913년 아악대(雅樂隊)가 이왕직아악부로 개칭됐을 당시
아악수장(雅樂手長)인 그는 동료 아악수장인
안덕수·이원근·강희진·이수경·최순영·박덕인·고익삼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5년 『朝鮮雅樂槪要』를 출간하였다.
1916년 아악사(雅樂師)가 됐고,
1939년 제4대 아악사장 김영제의 뒤를 이어
제5대 아악사장이 되었다.
1928년 11월 3일 이왕직아악부가 최초로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서 "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
"만파정식지곡"(萬波停息之曲) 등
여러 아악곡을 방송했을 때 출연했다.
1931년부터 이화여전(梨花女專)에서 실기와 이론을 가르쳤다.
1932년 이왕직아악부의 제5대 아악사장으로 취임한
함화진의 업적 중 하나는
아악부원의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이습회(肄習會)라는
연주단체를 만들어 기량을 연마하여
공개연주회를 개최한 일이었다.
1932년 10월 13일 이습회의 첫 무대를 올린 이후,
광복 이전까지 총 150회의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이습회의 초기 공개연주회는 운니동 청사의
일소당(佾韶堂)에서 초청인사를 위해서 개최됐지만,
1938년부터는 부민관(府民館)에서 공개연주회로 개최하였다.
1933년 『이조악제원류』(李朝樂制源流)와
『조선악기편』(朝鮮樂器篇)을 출간했다.
1938년에는 『아악정수』(雅樂精髓)라는 제목의 아악곡을 레코드에 취입했으며,
가곡·가사·시조를 수집·정리하여 『증보가곡원류』(增補歌曲原流)를 편찬하였다.
1936년 일본음악계를 시찰했고,
1937년 중국음악계를 시찰하면서
여러 고악기(古樂器)를 구입했다.
1932~1939년 이왕직아악부 시절 이병성과 함께
가사(歌詞) "건곤가"(乾坤歌)·"경록무강지곡"(景籙無疆之曲)·
"경풍년"(慶豊年) 등의 여러 아악곡을 방송하기 위해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였다. 이왕직아악부의
연주단원을 지휘해 취입한
가악(歌樂)·계락(界樂)·대금독주·"만년장환지곡"·
"만파정식지곡"·"별우조타령"(別羽打令)·
"보허자"를 포함한 20여 곡의 아악곡과 가곡은
일본 빅타음반에 전한다.
1939년 4월 14일 후진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아악사장을 사퇴했다.
1942년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 조선음악부장을 역임한
그는 박헌봉(상무이사)·김석구(창악)·최경식(민요)·김정실(섭외),
이상의 임원과 함께 활동했으며,
조선음악협회의 이사 14명 중 한국인 이사 김관·계정식·김원복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39년 이왕직아악부를 나와
『조선음악소사』(朝鮮音樂小史)를 집필했다.
1941년 3월 25일 설립된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의 이사 14명 중
한국인 이사 김관·계정식·김원복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함화진 관련의 여러 기사는 『朝光』(1936) 13호,
『朝光』(1936) 14호, 『朝光』(1937) 21호,
『朝光』(1939) 43호, 그리고 『춘추』(1941) 4호·5호·6호·11호 등에 발표되었다.
해방 후 1945년 8월 16일 결성된
조선음악건설본부(朝鮮音樂建設本部)의 국악 위원장을 맡았고,
중앙위원장 박경호(朴慶浩), 작곡부위원장 김성태(金聖泰),
기악부위원장 안병소(安柄玿),
성악부위원장 안기영(安基永)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5년 10월 국악건설본부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창설한 국악회를 국악원(國樂院)으로 개칭했을 때 원장직을 맡았다.
주요한 저서로 『朝鮮雅樂槪要』·『朝鮮樂器篇』·
『李朝樂制源流』가 있고,
그밖에도 『增補歌曲原流』·『朝鮮音樂統論』 등이 있다.
편종(編鍾)·편경(編磬) 등의 악기를 새로 제작했다.
아악부의 건물 확충 및 아악부원의 기량 향상을 위한 이습회 제도의 창설 등의 업적을 남기고
1948년 6월 12일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셨다.
참고문헌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 946~48쪽
『朝鮮時代 樂律論과 詩樂和聲』 김수현, 서울: 민속원, 2012,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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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는 글 3> : 취태평지곡[醉太平之曲]
조선후기와 대한제국(1897~1910) 시절 연례악(宴禮樂) 및
정재(呈才) 반주음악의 한 곡명.
"향당교주"(鄕唐交奏)의 아명(雅名).
1828년(순조 28) 순조의 왕세자 효명세자(1809~1830)가
어머니 순원왕후(1789~1857)의 40세를 경축하기 위해
창경궁 자경전(慈慶殿)에서 잔치를 열었을 때,
이 악곡은 "향당교주"의 아명으로 연주되었다.
1877년(고종 14) 12월 대왕대비 신정왕후(1808~1890)의 칠순 및
왕대비 철인왕후(1837~1878)의 망오순(41세)을 경축하는 잔치가
경복궁 통명전(通明殿)에서 열렸을 때,
그리고 1887년(고종 24) 정월 신정왕후의 팔순 및
효명세자 즉 익종에게 관례(冠禮)를 올린 60주기를
경축하는 잔치가 만경전(萬慶殿)에서 열렸을 때
공연된 아박무(牙拍舞)의 반주곡인 "향당교주"의 아명으로 연주되었다.
1901년(광무 5) 5월 헌종(1834~1849)의
계비 명헌태후(1831~1904)의 망팔순(71세)을 경축하는 잔치가
경운궁(慶運宮) 곧 지금의 덕수궁 경운당(慶運堂)에서 열렸을 때,
1901년 7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보령(寶齡) 50세를
경축하는 만수성절(萬壽聖節)의 잔치가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열렸을 때,
1902년(광무 6) 4월 고종황제의 보령이 51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한 것을 경축하는 잔치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열렸을 때,
그리고 1902년 11월 고종황제의 망육순(51세) 및
등극 40년을 경축하는 잔치가 덕수궁 관명전(觀明殿)에서 열렸을 때
공연된 최화무(催花舞)·헌천화(獻天花)의
반주곡인 "향당교주"의 아명으로 연주되었다.
참고문헌『進爵儀軌』(1828), 卷1.21a6~7
『進饌儀軌』(1877), 卷1.31a7
『進饌儀軌』(1887), 卷1.34a7
『進饌儀軌』(1901.5), 卷1.25b8
『進宴儀軌』(1901.7), 卷1.55a10
『進宴儀軌』(1902.4), 卷1.42b9~10
『進宴儀軌』(1902.11), 卷1.64a10(上.281)
『의궤 속의 우리 춤과 음악을 찾아서』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08, 214~225, 396~404,
432~42, 536~46, 578~90, 636~49, 698~711쪽
『國樂大事典』 張師勛,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4, 7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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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는 글 4> : 당악[唐樂](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통일신라 이후 고려시대까지 중국에서 수입된 음악의 통칭.
(1)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 음악의 두드러진 특색은 당악의 수입에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64년(문무왕 4) 3월 “성천(星川)·구일(丘日) 등
28명을 웅진부성(熊津府城:지금의 公州)에 파견하여 당악을 배우게 하였다.”는
기록에서 ‘당악’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온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당악이 있었으리라는 보다 구체적인 확증은,
≪삼국사기≫ 악지에 대금(大笒)에서 사용된 조(調)로
평조(平調)·황종조(黃鐘調)·월조(越調)·반섭조(般涉調) 등
당나라의 조명(調名)을 그대로 쓰고 있고,
더욱이 당악에 쓰이는 박판(拍板:나무로 만든 박)이 당악 이외의
향악에서까지도 사용되었으며, 무인(舞人)의 복식에 방각복두(放角幞頭)와 같은
당나라의 복식제도를 채용했다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사≫에 의하면 당악은 당나라의 음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려 때 송나라에서 수입된 음악도 포함하여 일컫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세종 때 박연(朴堧)은 <청용화악급아조가곡소 請用華樂及我朝歌曲疏>에서
“그 당악의 일부는 곧 중국 속부(俗部)의 음악이다.
그 음악의 이름을 세상에서는 당악이라고 일컫는데,
‘당(唐)’ 자는 한(漢)·당이라는 중국 조대(朝代)의 명칭상의 구별이 있는 이상,
역대 중국의 음악을 모두 당악으로 호칭한다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당악이라는 명칭 대신 ‘화악속부(華樂俗部)’라고 고쳐서 일컫게 하시기 바란다.”고 하였으니,
당악이 당나라 때의 음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악에 관한 문헌자료는 비록 영성하지만 그 밖에 여러 유물에 당악기가 보인다.
즉, 충청남도 연기군에 있는 비암사(碑巖寺)에서 발견된 석비(石碑)에서
요고(腰鼓)·퉁소[洞簫]·쟁(箏)·소(簫)·횡적(橫笛)·비파(琵琶) 등의 그림이 보이는데,
여기의 비파는 곡경비파(曲頸琵琶)로 당비파(唐琵琶)인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이 비석의 건립이 대개 문무왕대로 추정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 당악에서 중요한 당비파의 전래는
당연한 추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725년(성덕왕 24)에 제작된 상원사(上院寺) 동종(銅鐘)의
중앙부에 생(笙)과 공후(箜篌)를 연주하는 천인(天人)이 있고,
그 상대(上帶)에는 쟁, 그리고 하대(下帶)에는 당비파와
요고를 연주하는 악천(樂天)이 있다.
이 밖에도 772년(혜공왕 8)에 만들어진
경상북도 문경시에 있는 봉암사(鳳巖寺)의
지증대사적조탑(智證大師寂照塔)에도
생·당비파·피리[觱篥]·횡적·박판 등의 악기가 보인다.
그런데 현재 미국 시카고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당나라 주문구(周文矩)의 <주악도 奏樂圖>에는
당비파·공후·쟁·방향(方響)·생·박판·대고(大鼓) 등의 악기가 보이는데,
이들을 위의 유물에서 보이는 당악기와 비교해보면
통일신라 때 당악기의 대부분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 鄕樂雜詠> 5수에는
중국계 음악과 서역계 음악이 포함되어 있다.
5수는 <금환 金丸>·<월전 月顚>·<대면 大面>·
<속독 束毒>·<산예 狻猊>인데,
이 중에서 <월전>·<속독>·<산예>가 서역계의 것이고,
<금환>은 중국 한나라의 산악(散樂)이다.
그런데 이 서역계·중국계를 합하여 향악이라고 불렀던 것은
당악이 소개되자 그 이전의 모든 음악을 이것과
구별짓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향피리에 대한 당피리, 향비파에 대한 당비파가 있는 예를 보아도
당나라의 그것들이 향(鄕)의 것에 맞설 정도로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범패에도 당풍(唐風)이 있었다.
830년(흥덕왕 5) 진감(眞鑒)이 귀국하여
옥천사(玉泉寺:지금의 쌍계사)를 짓고 범패를 가르쳤는데,
진감과 거의 같은 시대 사람인 일본 승려 원인(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 의하면
중국 산둥반도(山東半島) 등주(登州)에 적산원(赤山院)이라는
신라인의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서 부르던 범패에는 당풍·향풍(鄕風:신라풍)·
음성(音聲)이 일본과 같은 것 등의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당풍은 당나라 때 생긴 비교적 새로운 범패이고,
일본의 음성과 같다는 범패는 당나라 이전에
우리 나라를 경유하여 일본에 건너간 범패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 말하는 당악이 당나라 때의 음악이기보다는
고려 때 중국 송나라에서 유입된 사악(詞樂)이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
사악은 송나라의 ‘사(詞)’라는 시형으로 되어 있고
가사(歌詞)가 있는 기악곡을 말하며,
당악 대곡(大曲)은 본래 가무희(歌舞戱)의 개장(開場)과 수장(收場),
즉 그 시작과 종결을 알리는 치어(致語)와 구호 등
몇 가지 단사(單詞)의 결합으로 구성되었다.
(2) 고려시대
고려조에 당악을 직접 수입한 시기는 광종 때였다.
그것은 1413년(태종 13) 12월 예조에서 아악을 정하면서
“전조(前朝:고려) 광왕(光王:光宗)이 사신을 보내
당나라의 악기와 악공을 청하여 그 자손이 대대로
그 업을 지키게 하였다.”는 글을 올린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송나라 사악의 전래는 그 뒤 문종 때
교방(敎坊)의 여제자(女弟子)가 새로이 전하는
<답사행가무 踏沙行歌舞>가 그 시초이다.
즉, 1073년(문종 27) 2월 교방에서 여제자 진경(眞卿) 등 13명이 전하는
<답사행가무>를 연등회(燃燈會)에서 쓸 것을 상주(上奏)하여 문종의 재가를 얻어 실시하였다.
또, 그 해 11월 팔관회(八關會)에서 교방 여제자 초영(楚英) 등이
새로 전하는 <포구락 抛毬樂>·<구장기별기 九張機別伎>를 연주했는데,
<포구락>은 제자 13인이요, <구장기별기>는 제자 10인이었다.
1077년 2월 연등을 하고 임금이 중광전(重光殿)에 거둥하여
교방 여제자 초영의 <왕모대가무 王母隊歌舞>를 보는데,
일대(一隊) 55인이 춤을 추어 ‘군왕만세(君王萬歲)’
또는 ‘천하태평(天下太平)’의 네 글자를 지었다.
이것은 당나라 단안절(段安節)의 ≪악부잡록 樂府雜錄≫
무공조(舞工條)에 나오는 자무(字舞)의 일종이다.
이 중 가무희를 곁들인 이른바 대곡으로는
<헌선도 獻仙桃>·<수연장 壽延長>·<오양선 五羊仙>·
<포구락>·<연화대 蓮花臺> 5종(種)이고,
그 무악(舞樂)에 편입되어 가창되는 곡으로는
<보허자 步虛子> 등이 있었다.
≪고려사≫ 악지에는 송나라에서 들어온 사악 43곡의 곡명이 실려 있다.
즉, <석노교곡파 惜奴嬌曲破>·<만년환만 萬年歡慢>·
<억취소만 憶吹簫慢>·<낙양춘>·
<월화청만 月華淸慢>·<전화지령 轉花枝令>·
<감황은령 感皇恩令>·<취태평 醉太平>·
<하운봉만 夏雲峯慢>·<취봉래만 醉蓬萊慢>·
<황하청만 黃河淸慢>·<환궁악 還宮樂>·
<청평악 淸平樂>·<예자단 荔子丹>·
<수룡음만 水龍吟慢>·<경배악 傾杯樂>·
<태평년만 太平年慢>·<금전악만 金殿樂慢>·
<안평악 安平樂>·<애월야면지만 愛月夜眠遲慢>·
<석화춘조기만 惜花春早起慢>·<제대춘만 帝臺春慢>·
<천추세령 千秋歲令>·<풍중류령 風中柳令>·
<한궁춘만 漢宮春慢>·<화심동만 花心動慢>·
<우림령만 雨淋鈴慢>·<행향자만 行香子慢>·
<우중화만 雨中花慢>·<영춘악령 迎春樂令>·
<낭도사령 浪淘沙令>·<어가행령 御街行令>·
<서강월만 西江月慢>·<유월궁령 遊月宮令>·
<소년유 少年遊>·<계지향만 桂枝香慢>·
<경금지영 慶金枝令>·<백보장 百寶粧>·
<만조환령 滿朝歡令>·<천하악령 天下樂令>·
<감은다령 感恩多令>·<임강선만 臨江仙慢>·<해패령 解佩令> 등이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만(慢)이나 영(令) 등
특수한 악조(樂調)의 이름을 달고 있는데,
만은 대개 전단(前段)과 후단(後段)을 합하여 59자 이상이 되고,
1구가 16자 이내로 된 것으로 <억취소>·<수룡음> 등이 이에 속한다.
만의 사(詞)는 1구의 자수(字數)는 불규칙하지만
그에 붙인 음악은 규칙적으로 16박(拍)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이와 반대로 영은 만보다 자구(字句)가 짧아서,
전단과 후단을 합하여 거의 58자 이내이고,
1구는 7자 이내이다.
예를 들어, <낙양춘>은 불규칙적인 길이를 가진 가사가
규칙적으로 8박에 붙여지고 있다.
즉, 1구 8박이 4박과 4박으로 2분되고, 제4박과 제8박에는 규칙적으로 박을 친다.
≪고려사≫ 악지에 나오는 <헌선도>·<수연장>·<오양선>·
<포구락>·<연화대> 등의 대곡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전하나,
송나라의 사곡(詞曲) 중 만으로 된 곡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또한, ≪고려사≫ 악지에 나오는 사곡 <낙양춘>은 송나라 때
구양수(歐陽脩)의 작품이고,
<하운봉> 외 7곡은 유영(柳永)의 작품인 것으로 미루어,
대개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고려에서 유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1076년에는 대악관현방(大樂管絃房)을 두고
여기 매인 악사(樂師)의 식록(食祿)을 정하였는데,
그 직종을 보면 당무(唐舞)·창사(唱詞)·생·비파·장구·당적·향·
당비파·방향·중금(中笒)·가무박(歌舞拍) 등이다.
이로써 보면 향비파와 중금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악에 사용하던 당악기임을 알 수 있다.
그 뒤 1114년 송나라 휘종(徽宗)이 보내 온 신악기는
철방향(鐵方響)·석방향(石方響)·비파·오현(五絃)·
쟁·공후·피리·적·지(篪)·소·포생(匏笙)·대고·장구·박판 등으로,
이 중 지·소 2종이 아악기에 속하고 나머지는 모두 당악기에 속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당악기가 방향·퉁소·
적·당적·비파·아쟁·대쟁·장구·교방고·박 등으로 제한되어,
그 전에 쓰이던 공후·생이 빠지고 퉁소·아쟁·대쟁 등이 편입된 것이 주목된다.
당무는 곧 당악(唐樂)정재(呈才)로서 역시 ≪고려사≫ 악지
당악조에 보이는 대곡인 <헌선도> 등 5종으로,
우리 고유의 무악(舞樂)인 향악 정재의 대칭 개념이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당악은 순수한 가악(歌樂)으로 또는
정재의 반주음악으로 활발히 연주되었다.
1434년(세종 16) 이후의 당악 전승 상황을,
1447년 6월에 편찬된 ≪속악보 俗樂譜≫와 1471년(성종 2)에 편찬된
≪경국대전≫ 및 1759년(영조 35)에 서명응(徐命膺)이 편찬한
≪대악전보 大樂前譜≫ 등에서 조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속악보:<환환곡 桓桓曲>·<헌천수 獻天壽>·<절화 折花>·
<만엽치요도최자 萬葉熾瑤圖嗺子>·<포구락>·<보허자파자 步虛子破子>·
<청평악>·<오운개서조 五雲開瑞朝>·
<중선회 衆仙會>·<백학자 白鶴子>·<반하무 班賀舞>·<수룡음 水龍吟>.
② 경국대전:<오운개서조>·<낙양춘>·<만엽치요도최자>·
<보허자령 步虛子令>·<보허자급박파자 步虛子急拍破子>·
<환환곡>·<태평년만>·<전인자 前引子>·
<후인자 後引子>·<반하무>·<절화삼대 折花三臺>·
<절화급박 折花急拍>·<소포구락 小抛毬樂>·
<청평악>·<수룡음>·<하운봉 夏雲峰>·<억취소>·
<백학자>·<헌천수>·<중선회>·<하성조 賀聖朝>·
<회팔선인자 會八仙引子>·<헌천수최자 獻天壽嗺子>·
<금전자만 金箋子慢>·<금전자최자 金箋子嗺子>·
<서자고만 瑞鷓鴣慢>·<서자고최자 瑞鷓鴣嗺子>·
<천년만세인자 千年萬歲引子>·<성수무강인자 聖壽無彊引子>.
③ 대악전보:<보허자>·<낙양춘>·<전인자>·<후인자>·
<보허자관악>·<환환곡중강령 桓桓曲中腔令>·<수룡음>·
<억취소>·<하운봉>·<소포구락>·<오운개서조>·<회팔선>·
<천년만세 千年萬歲>·<절화>·<중선회>.
현재 전하지 않는 ≪속악보≫의 당악곡 때의 수효보다
≪경국대전≫에 소개된 당악곡이 많고,
영조 때의 ≪대악전보≫에는 그것이 세종 때의 음악이라고 하면서도
세종 때의 ≪속악보≫보다도 훨씬 적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까지 전승된 당악곡의 수효는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당악은 주로 정재 반주에 많이 쓰였으나
그 밖에도 조하(朝賀) 때 전정헌가(殿庭軒架) 또는
회례연(會禮宴)에서도 쓰였다.
세종 때의 어전예연(御前禮宴)에서 향악은 동쪽에,
당악은 서쪽에 자리하여 동서로 갈라져 연주되었으나,
조선의 당악은 고려의 그것에 비하여 곡목과 사용 악기가
감소하여 변모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가속되는 당악의 향악화(鄕樂化)로 인하여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고려 때 들어온 당악 중 현재 전하는 곡은
<보허자>와 <낙양춘>뿐인데, 모두 향악화되었다.
(1) 당악기
≪고려사≫ 악지에는 방향·퉁소·적·피리·비파·
아쟁·대쟁·장구·교방고·박 등이 당악기로 소개되었으며,
≪악학궤범≫에도 아부악기(雅部樂器)·향부악기(鄕部樂器)와 더불어
당부악기(唐部樂器)가 도설(圖說)로 나와 있는데,
그 중 당부악기는 방향·박·교방고·월금(月琴)·장구·
당비파·해금(奚琴)·대쟁·아쟁·당적·당피리·퉁소·태평소(太平簫) 등이다.
이 가운데 박·장구·아쟁은 비록 당부악기로 취급되고 있으나
당악과 향악에 모두 쓰인다고 하였고,
교방고는 무고정재(舞鼓呈才)와 행진음악[行樂]에 쓰이는 것이 좀 달랐다.
월금과 해금은 당부악기에 넣고 정작 본문에는
향악에만 쓰인다고 되어 있어 주목된다.
당초 당악에만 쓰이던 당악기였지만,
점차 향악에도 겸용하게 되고,
또 해금처럼 당악에서 이탈하여 향악에만 쓰이는 악기마저 있게 되어,
자연 향악기화(鄕樂器化)하는 과정을 밟고 향악기와 다름없이 되었을 것이다.
(2) 악기편성·악곡
≪악학궤범≫에 보이는 향당교주(鄕唐交奏)라는 용어는
향악기와 당악기의 혼합 편성인 합주의 개념이지만,
현재 구전되고 있는 향당교주는 하나의 악곡 이름이다.
즉, 오늘날 <향당교주>라고 불리며 연주되고 있는 곡은,
<표정만방지곡 表正萬方之曲>, 일명 <관악영산회상 管樂靈山會相>
또는 <삼현영산회상 三絃靈山會相>의 첫째 곡
<상영산 上靈山>의 처음 부분만을 변주해서 연주하고
그 이하는 원곡과 같은데,
이것은 춤의 장단에 알맞게 원곡의 리듬과
음고(音高) 박절(拍節)을 변형시킨 것이다.
참고문헌『삼국사기』
『고려사』
『증보문헌비고』
『한국예술총람』-개관편-(대한민국예술원, 1964)
『한국음악서설』(이혜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7)
『한국음악사』(장사훈, 정음사, 1976)
『당악연구』(차주환, 범학도서, 1976)
『국역악학궤범』(민족문화추진회, 1979)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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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짱짱맨~!!!! ^^
그리 빼시더니 이리 퍼펙트하게 써주시다니.. 진짜 멋지십니다요 ^_______^
그리고 박교수님의 그림이 화룡점정을 찍으셨네요 ^ ^
(근데 388회 이습회일지신거죠??)
아주 오래전 저 수련회 사진을 보니,
다 낯익은 얼굴들이신데.. 다들 어찌 지내고 계신지.... ㅜ.ㅠ
너무 좋은 사진 감사합니다.. (원장님과 고문님께서는 지금이 더 젊어 보이시네요 ㅎ)
교수님 지난번 말씀하신 가문의 영광 저 뜻깊은 행사에 직접 참여하시다니
진짜 대단하세요~~^^
언제 동영상도 보여주세요~^^
다시한번 정성이 듬뿍 담긴 일지 감사드리며,
한주간도 더욱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저도 교수님 도촬해서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쓰다보니 길어졌습니다.
그리고 수련회 사진은 한소리국악원 역사를 공유하고 싶어서 올렸습니다.
조금만 국악을 공부하시면 대학교 국악과 이론 전공교수(?)로 옮기심이 어떨런지요 -
너무나도 심도있고 해박한 해설이십니다.- -
게다가 종묘제례행사에서 의젓한 저 왕손의 모습에다 2006년도 하계 수련대회 사진까지 첨부해주시니 과거 생각이 납니다....수고와 감사....
1조 조별발표 시작을 훌륭하게 장식해주신 세현님을 비롯한 네분- 수고 많으셨어요 -
2조부터는 의상도 입으시고 암기하여 발표를 하신다니니 기대가 더욱큽니다..
원장님 수업이 감명깊어서 메모하면서
임했습니다.
혹시 잘못된 부분 있으면 지적해주세요.
수정하겠습니다.
2006년 수련회 사진은 기억을 반추하고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학교에서 1학기 공부해도 다 못할 내용을 복사해서 붙이기 하시느라 수고하셨네요~~^^ 읽느라고 어깨가 꽉 눌립니다~~^^
수업좀 나오세요~~
안 나오시니까 자세히 쓰고..복사도 하지요..
다음에는 계환샘의 이쁜 마음(?)도 복사해다가 옮길 겁니다.
다음에 오시면 어깨 풀어드릴께요~~~
좋은 하루되세요~~
@바다소년 ㅎㅎㅎ 짱~!!
한 주의 이습회 열기를 그 즐거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도 남을 많큼의 생생함을
동해의 바다소년님이 자세하고 도 섬세하게 올려주신 일지를 잘 보았습니다.
김기영 선생님의 호탕한 웃음 뒤에 울려퍼지는 피리소리~~
늘 옆에서 대금불고 싶어요..
요즘 피리소리가 넘 좋아요~~
김기영 선생님의 멋진 머플러 인상깊었습니다 ^^
이해종 교수님의 현장감있는 수업일지 정말로 잘 보았읍니다. 다시금 수업현장에 있는 것같은 착각이 들정도의 세세함...
게다가 1조 발표사진까지 첨부해주어 저로서 처음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한소국악원 홈피에 등재하게되는 멋진 기회를 갖게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됩니다.....
얼떨결에 1조 발표멤버에 합류하게 되어 단소를 배운 이래 처음으로 다른 악기와 호흡을 맞추어보니 어렵기 그지없고 또한 혼자 불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또한 자신감은 업!! 조별발표 강추...
초보자를 이끌어주느라 수고해주신 피리 김유찬 샘 대금 박종인샘 그리고 해금 이경미샘께 감사, 원장선생님의 따듯한 격려말씀 감사합니다.
김진호 선생님 감사합니다.
1조의 발표를 보면서 엄숙함과 대단하심을 함께 느꼈습니다. 한소리국악원의 저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늘 제대로 인사도 못드리고~~
종묘제례악을 보러 갔다는것 만으로도 대단하고,
그리고 종묘제례악의 연주자로 참여했다는것 만으로도 존경받는데
직접 아헌관으로 잔을 올리신 분과 같이 자리를 한다는것이 황공하옵니다.
멋지고 생생한 일지 잘 보았습니다.
준비없이 그냥 쓰는 샤프연필로 원장님주신 국악음계 복사물 뒷장에다가 3분 크로키 정도를 했습니다만,
이 정도의 정성을 들인 일지에 걸맞게 앞으로는 지필묵을 준비하겠습니다.
한소리국악원에 박교수님이 계신 것 만으로도
수준이 급 상승합니다.
어디다 그리셨나했더니..
세상 모든 것이 화선지요 도화지요..
그림판이 될 수 있음에 존경심이 그냥 나옵니다.
더 소중함이 묻어나는 1조 무대의 그림인 것 같습니다.
바다소년님^^
이습회 논문 발표 하신줄 알았습니다.ㅎ~
이습의 열기와 정성이 묻어나는 일지 잘 읽었습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부지런하심에 응원 보내구요
매주 뵈었으면 하는 맘 욕심인가요~~
그리고 첫 발표회를 빛내주신
김유찬님 박종인님 김진호님 이경미님
너무 너무 잘 하셔서 대기조 벌써 쫄아있습니다 ㅎ~
숙제하고..복습하는 느낌의 일지..과찬의 말씀입니다.
원장님의 금과옥조같은 수업 강의에
누~~가 될까 염려될 뿐입니다.
국악음계수업이 아주 좋아서 옮겼고요..
늘 기쁘게~~함께 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해박다식함과 섬세한 필치로 일지 속에 많은 것을 담아주셨네요.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악장님께서 이번 주엔 꼬옥 오신다고 하셔서 잠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다녀왔는데......그 빈자리를 꽈악 채워주셨네요.
애써주신 원장님, 부원장님 그리고 월례발표회의 첫 시작을 훌륭하게 해주신 분들 이습회에 참석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엮어주셨던 회원님들
그리고 그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주신 박교수님 모두 애 많이 쓰셨습니다. 감사합니다.신현주
신 샘안계셔서 5층 공간이 허전했습니다.
학교 업무에도 바쁘신데도 불구하시고..
늘 한결같으신 모습~~대단하십니다.
모두가 함께 하기에 행복한 시간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조임금의 어쩌고 저ㅉ고 하는 말 그냥 건성으로 들었는데 종묘대제에 참석한 사진보니 다시 보이네요 ㅎㅎ
그리고 2006년 운악산 수련회 사진을 혼자만 갖고 있었단 말인가요~ 얼마 안된 사진이지만 반갑네요... 추억의 사진방으로 옮겨주세요~~
늘 피리반의 중심이 되셔서 모범이 되시는 모습... 존경합니다.
저는 원장님께 대금을 배우고..거기에 종묘제례악까지 배우게되어서 영광입니다.
2006년 사진은 외장하드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진입니다. 한소리에 최근에 오신분들도 보시라고...
이때가 기점이 되어서 이습회도 시작한 것 같아서 올렸습니다.
추억의 사진방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다소년 처럼 언제나 국악동호회 모임에 웃음과 활력소를 전달하는 모습이 일지에도 확실히 나타나네요....
일지 읽다...목 빠질뻔...말이나 글이나 똑 같해~~~
감사합니다~~
2월 무대는 주샘이 계셔서 빛이 날 겁니다.
만일~~다음에 일지 쓸 기회가 오면 목 안빠지도록 하겠습니다.
즐건 명절되세요~~
오랜만에 글을 읽는 것 같아 기분이 UP이 되었네요
일지를 읽노라면 제가 현장에서 연주하는 듯한
생생한 일지 정말 고맙습니다 언제나 같이 쭈욱
좋은 음악 같이 하고 싶네요 일지 감사 합니다
악장님~~~ 그리고 오팀장님 ~~ㅜ.ㅠ
두분 부재가 크게 느껴지네요
악장님께선 얼른 훌훌 털고 일어나시고,
우리 오팀장님도 바쁜일 마무리되시는데로 얼른 컴백하세요~
보고싶어요^^~~~~~
빨리 건강 회복하시고요~~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집니다.
호탕한 웃음이 그립습니다~~~
얼른 오세요~~~
명절 잘 보내시고요~~~
일지담당자의 결석으로 급한 마음으로 이습회원님들을 뚜루루^^~~ 스캔해본 결과 이교수님이 제 눈에 쏘옥! 들어와서 어렵게 부탁드렸는데 흔쾌히 허락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전 대금일지 쓰신 지도 얼마 안되셨는데 또 수고를 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본인 의 직책답게 전문적인 지식과 이습분위기의 자세한교육현장을 고스란히 담아내시고 ᆢ 2006년 이습회의 계기가 되셨다던 수련회 사진까지 ᆢ정성가득한 글과 사진 잘보았습니다
급작한 일지부탁후 댓글을 빨리 달아야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제 쎌폰 배터리이상과 연이틀 급작스런 조문으로 전라도 광주와 수원 등을 오가며 분주하여 이제사 댓글을 달게 되었음을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ㅡ송구여? ㅎㅡ제가 좋아하는 라떼한잔 드세요 ㅎ
내일이면 설연휴의 시작으로 작은 정성과 소망을 담은 선물로 친지들 뵈러 가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즐겁고 행복한 설되세요
설 명절 잘 보내셨어요~~~
계절은 우리곁을 빠르게 오고~가지만..한소리 역사는 변함없이~오롯이 전해집니다.
저는 숙제하는 기분으로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긴 글로 ~귀한 시간들을 뺏은 것 같아서 저도 송구여~~입니당~~
다음부터는 명령 불복종 입니다~~~
차밍님이 또 낭군님과 세계 크루즈여행 가시느라 잠수(?)타셨나 했더니,,,
전국으로 멀리 지방까지 조문 다니시느라 바쁘셨군요 -
정악풍류회팀의 꽃 - - 자리를 오래 비우시면 궁금증이 배가됩니다. ㅎ ㅎ
읽는것도 어렵고 댓글 다는 것은 더어럽고 근접하기 어려운 국악이론과 멋진 댓글들! 감탄! 또 감탄!.8년전 하계수련회 대단했었나 봐여...토욜 홍콩에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늘 한결같은 모습에 감사드립니다. .
거문고 소리..옛날 선비들의 모습을 보든 듯합니다.
모두 함께 하기에~ 토요 이습회..대 향연이 빛나는 것 같습니다.
2006년부터 시작한 이습회..
장소도 다르고.. 이습회 수련회는 아니지만..한소리의 뜨거운 열기..전체 수련회... 그때의 감흥을 전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