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裕憬 詩人
「시인을 찾아서」 15만 부 돌파
지난 1970年代와 1980年代 중반에 이르는 동안 申庚林(신경림·67) 시인이 남긴 문학적 성과를 새삼 자세하게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첫 시집 「農舞」의 폭발적 호소력과, 이어서 나온 평론집 「문학과 민중」, 시집 「새재」 등이 한국문단에 큰 획을 그어, 문학은 물론 사회적 공감대까지 형성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1975년 高銀 白樂晴 李文求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회」를 발족시키는데 이를 계기로 「민중문학」, 「실천문학」, 「리얼리즘문학」 운동이 대두되었고 그 한가운데에 그가 섰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1990年代 중반부터 많이 달라지고 있다. 1998년에 낸 여덟 권째의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에 실린 詩들은 그 자신이 체험한 과거의 삶과 가족 이야기, 그가 만난 사람들, 지난 세월에 대한 개인적 회한이 主流를 이루고 있다. 통일과 환경문제도 다루고 있다. 서정시의 전형이라 할 사물에 대한 상념도 보인다. 그러나 그의 詩에서 끊임없이 관류하던 슬픔과 탄식의 그림자는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는 또 7월중 아홉 권째의 시집 「뿔」을 낸다고 한다. 지난 4년 동안 써온 57편의 詩가 실린다고 한다.
申庚林 시인의 지난 40여 년의 문학적 성과는 「진지한 역사의식에 입각해 자신의 삶을 표현」한 데 있다고 나는 본다. 그의 문학의 요체는 문학이 부당한 현실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지 않으면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문학으로 그런 명제를 실천했던 사람이다.
1970年代와 1980年代 암울했던 시절 그는 행동에 나서다 핍박을 받았으며 변방에서 오랜 피신 생활도 겪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詩的·인간적 편력은 그로 하여금 1950年代 詩人 가운데 가장 영향력 큰 詩人의 한 사람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모든 저작물이 베스트셀러의 경지를 획득해 왔던 것도 그렇다. 시집 「農舞」가 20만 부가 넘게 팔렸다든가, 1990年代 이후에 나온 그의 다른 시집들도 평균 2만 부 이상 나간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그는 「시인을 찾아서」란 책을 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2년 前에 발행한 것이 그 동안 꾸준히 팔리다가 요즈음 들어 베스트셀러로 껑충 뛴 것이다. 이미 15만 부를 돌파했다는 보도를 읽은 적이 있다.
먼저 독자 여러분은 그의 다음 두 편의 詩를 읽어보기 바란다.
인용되는 앞의 詩는 그가 1956년 「文學藝術」을 통해 데뷔할 무렵에 쓴 「갈대」란 작품이며, 두 번째 것은 그로부터 20년 후에 쓴 「裸木」이란 詩의 全文(전문)이다. 두 편 모두 사물을 노래하고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사물을 존재론적으로 접근한 듯하고, 후자의 경우는 사물을 알레고리化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두 편의 詩에 「울음」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갈대의 조용한 내면의 울음과, 추위 속에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裸木의 울음이 그것이다. 이 두 울음에서 우리는 그의 내면의 변화와 시대적 배경도 읽을 수 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그런 어느 날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밤이면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흔들어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한국 축구 16강- 8강 뜨던 날 만나
그와 두 번을 만났다. 월드컵 축구로 전국이 절정을 이루던 지난 6월14일(한국이 포르투갈을 이겨 16강에 진출하던 날)과 18일(이탈리아를 이겨 세계 8강이 되던 날) 나는 그를 만나 인터뷰했다.
첫날은 그 때 말고는 시간이 없다고 해서 만났는데 저녁에 한국 축구 대표팀이 포르투갈을 깨고 16강에 진출하는 기적이 일어났고, 두 번째는 8강으로 가느냐 마느냐하는 기대에 차서 그에게 제의해 시간이 있다 해서 성사가 되었다. 이날도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TV를 켜놓고 축구 구경을 했으며, 우리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경험했듯이 목이 터져라 역전승의 쾌재를 불렀다. 행복한 날이었다. 아마 그도 그랬을 것이다.
전에 몇 번 그를 만났지만 그다지 왜소한 사람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함께 걸어다닌 적이 없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고 몸 전체의 살이 빠진 때문인지 이제 보니 체구가 아주 작았다. 건강하냐고 물었더니 가볍게 『그럼요』 했다. 목소리가 힘차고 카랑카랑했다.
지난 오십 년 동안 타협이란 것을 모르고 오기로 살아온 이 사람은 의외로 소탈하고 잘 웃는 것이었다. 게다가 수시로 『아유, 그거 뭐』 하며 수줍어 해 오래 이야기를 나눠도 전혀 부담감이 없었다. 긴장하고 찾아간 내가 다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원래 그는 솔직하고 다감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첫날 우리는 서울 성북구 정릉 길가에 있는 칼국수 집에서 점심을 같이 했다. 『다른 신통한 음식점이 없다』며 그가 앞장서 안내한 음식점이었다. 거기서는 詩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마침 그날 아침에 확정된 지방단체장 선거 결과에 화제를 두었다. 민주당의 전국적 참패에 대해 우리는 혀를 찼다.
칼국수 집은 申시인의 단골 음식점인 것 같았다. 혼자 사는 그는 가끔 여기 들러 식사를 한다고 했다. 안주인이 우리들 대화에 가끔씩 끼어들었는데, 식사가 끝나자 여자는 책을 한 권 들고 와서 『선생님 제 딸에게 주게 사인 좀 해주세요』 했다. 申庚林 시인이 난감한 표정이 되더니 『그거 내가 쓴 책이 아니잖아요. 그런 책에는 원래 사인을 해주지 않습니다』 했다.
길가에 있는 5층 건물의 4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그를 안내했다. 조금 전 내가 약속시간보다 30분을 먼저 와 정오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였다. 이 주변엔 여기말고는 이야기 나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작년에 모친이 돌아가시고 혼자가 되니, 단독주택에서는 살기 힘들더라고요. 여기 아파트로 이사를 했지요. 시집 간 딸애가 가까운 곳에 사는데 가끔씩 와서 청소도 해놓고 밥도 해주고 해요. 원래 小食이라 뭐든 아주 조금씩 먹어요. 건강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柳宗鎬와 李漢稷과의 만남
혼자 산다기에 어쩐 일이냐고 하니까 1971년에 2남1녀를 두고 아내와 死別(사별)했다고 했다. 그 이후 재혼을 하긴 했는데 「종교적 갈등」으로 10여 년 만에 이혼하고 말았다고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자신은 불교에 가까운 편이지만 여자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다고 했다.
―申선생님의 詩 「갈대」가 발표되었을 때 나는 詩 지망의 고교 1년생이었지요. 이 詩가 너무 좋아 노트에 옮겨 적어 틈만 나면 읽고 했었지요. 그 후 한두 편 詩를 본 적이 있고, 그리고는 감감 무소식이었어요. 10년 넘게 문단에서 잠적하다시피 했지 않습니까? 1970년대 초반 「農舞」를 들고 나와 화제가 되었을 땐 다들 놀랐지요. 「갈대」와는 전혀 다른 詩 세계를 보였으니 말입니다.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며 10년을 보내신 겁니까? 「農舞」를 읽어보면 고향 주변이나 광산 같은 데 머문 것도 같은데…. 詩 「갈대」 이야기부터 해주시지요. 추천해준 李漢稷(이한직) 선생 이야기랑 말입니다.
『대학 2학년 때 쓴 것입니다. 지금 중원군 노은면 연하리란 곳이 내 고향입니다. 지금은 충주시가 되었지만. 마을 뒷산이 해발 764m의 보련산입니다. 그 산꼭대기에는 몇만 평이 되는 고원이 있는데 갈대 숲으로 뒤덮여 있어요. 이 갈대가 소재예요. 詩는 단숨에 쓰여졌던 것 같아요.
길에서 우연히 만난 柳宗鎬(유종호)에게 이 「갈대」 초고를 보였더니 아주 좋다면서 나를 다방에 끌고 가 오래 이야기를 나눴지요. 柳宗鎬는 나의 충주고교 1년 선배입니다. 그의 선친이 충주고교의 국어선생이며 詩人이었어요. 柳村이라고… 그 선생에게서 문학적 영향도 많이 받고, 그 아들인 柳宗鎬 교수와는 서울에서 하숙도 같이 하는 등 평생 친구가 되었어요.
충주고교에 다닐 때 나는 문제아였습니다. 하라는 공부는 않고 남한강 주변이나 돌아다니며 詩나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한 번은 국어시험을 보는데 백지를 낸 적이 있어요. 柳선생님이 詩 다섯 편을 써오면 벌을 주지 않겠다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2학년 때인가 교지에다 詩를 발표했는데, 하루는 3학년 학생 한 사람이 찾아와 문학 이야기를 하자고 합디다. 그가 柳宗鎬였어요. 당시 1년 선배면 대단했잖아요. 무조건 「예!」 하고 따랐지요. 그 이후 서울大 영문과를 다니고 있던 柳宗鎬는 1957년 「文學藝術」을 통해 평론가로 데뷔합니다.
나를 詩人으로 추천한 李漢稷 선생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특이한 이력을 가진 분이었어요. 그 분은 일제 때 중추원 참의와 총독부 학무국장을 지낸 친일파 거물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본 게이오(慶應)대학에 다닐 무렵인 1939년 봄 「文章」지에 鄭芝溶 추천으로 데뷔했습니다. 4·19 이후 장면 정부의 駐日문정관으로 渡日(도일) 하지만 5·16 쿠데타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 한동안 입국을 못한 적도 있어요. 그는 詩人으로 20년 동안 겨우 23편의 詩를 썼습니다. 대단한 寡作(과작)이었지만 아무도 그의 詩를 무시할 수 없었지요.
鄭芝溶이 제일 좋아한 제자가 李漢稷이라고 공언했을 정도니까요. …李선생은 趙芝薰과 함께 「문학예술」 詩 추천을 맡고 있었는데, 제1회가 朴喜璡으로 지훈이 추천했고 두 번째로 李선생은 나의 詩가 좋다며 전담해 추천하더군요. 朴成龍이 비슷한 시기에 趙-李선생 추천을 받고 있었는데, 우리는 함께 명동에 있는 李선생 사무실을 찾아가곤 했어요. 첫날 선생 앞에서 내가 일으킨 해프닝은 지금도 웃음이 납니다. 멋모르고 술에 취해 주정을 좀 했거든요. 그런데도 선생은 추천을 완료시켜 주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의 詩를 가장 좋게 평가해 주었다고 해요. 내가 찾아가면 언제나 술도 사주었고…』
방황의 시절… 시골로 내려가다
『詩壇(시단)에 등단하고 보니 지금까지 쓴 것들과 비슷한 詩를 계속 써야 하나 싶더군요. 글이라는 게 신명이 나야 잘 쓰여지는 건데, 신명이 안 나더라는 거죠. 그래서 소설을 한번 써볼까 하고 시골에 내려가 단편소설 한 편을 써서 「문학예술」의 朴南秀 선생께 가져갔더니 「문제성이 약하다」는 소리를 듣고 도로 들고 왔지요.
그 후 이번엔 2000장 되는 장편소설을 써서 한국일보의 현상공모에 응모했는데 최종심까지 가서 떨어지더군요. 그게 1957년이었어요. 그 소설을 대구매일에 보내 당선이 되었는데 상금을 받아 귀했던 양복도 사 입고 그랬습니다. 소설 제목도 잊었는데, 당시 그 소설을 읽은 분들이 「당신은 역시 소설보다 詩 쓰는 것이 낫겠다」고 해서, 소설 쓰는 것을 그만두고 말았어요.
사실 대학에 들어가선 문학 서적보다 사회과학 서적을 더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런 셈이지만…. 1950년대 말 나랑 같은 대학에 다니는 친구 10여 명이 모여 독서회를 만들었는데, 여기 모이는 사람들은 대학 1학년에서부터 대학원 학생까지 다양했지요. 「世界史敎程」이니, 「조선사교정」 같은 책을 즐겨 들고 다녔으며 나로서는 이름밖에 모르는 白南雲이나 全錫淡 같은 사회과학자들의 책이 늘 화제가 되곤 했지요. 나는 그들이 읽었다는 책은 고서점을 돌며 기를 쓰고 구해 다 읽었고, 그들이 읽지 못했을 책을 찾느라 늘 분주했으니까요.
「공산당선언」을 구해 읽은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우리는 曺奉岩 선생을 좋아해서 따라다녔는데 얼마 후인 1958년 「進步黨 사건」으로 曺선생이 잡혀가고 우리의 지도자격인 친구 하나도 끌려가더군요. 서울에 있다간 큰일 나겠다 싶어 바로 시골로 줄행랑을 놨지요.
시골 내려가 있으니까 서울 올라오는 일이 쉽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10년 가까이 잠행하고 있었던 겁니다. 시골에선 평창 영월 문경 춘천 등지를 떠돌며 농사도 짓고 광산 일도 했지요. 1962년 5월 어느 날이었어요. 술자리에서 내가 朴대통령을 비난하는 걸 듣고 누군가 몰래 고발을 했어요. 수배자가 되어 원주 인제 제천 등지를 숨어 다니다 결국 체포됩니다. 29일 만에 풀려났는데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어요』
이럭저럭 그는 詩와 담을 쌓고 만다. 詩를 쓰는 일에 신명은커녕 짜증이 났다. 詩를 읽는 것도 무가치한 사치행위 같았다. 그래서 애써 모았던 詩集(시집)들과 문학잡지 등을 내다버리기도 했다.
그는 「내 詩의 뒷이야기」란 글에서 방황하던 당시의 마음 풍경을 이렇게 써놓고 있다.
<…더욱 미워한 것은 이른바 시인들이었다. 나는 이들의 성실성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얘기는 모두 거짓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것이 다분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로서 이들에 대하여 갖는 질투심에 연유함은 물론이었다>
그는 계속 떠돌이 생활을 했다. 충북 북부와 강원도 남서부 일대를 다니며 약초 구하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꾼」이 되기도 한다. 하루 백 리를 걸으면서 그가 만난 것은 세상에서 소외되어 자조와 체념으로 살아가고 있는 변두리 사람들, 즉 소외된 민중이었다.
그들에게서 그는 詩的 공감대를 찾는다. 그 공감대는 서정적 풍경의 것이 아니라, 버림받아 자조하며 살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잡초 같은 민중의 삶을 詩로 증언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보면/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주머니를 털어 색시 집에라도 갈까/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어느 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시집 「農舞」에 실린 「罷場」이란 詩의 全文이다. 詩人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詩 가운데 하나.
서사적 풍경, 혹은 스토리의 詩라고 할만하다. 여름 시골 장터의 파장 풍경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詩論에 근거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고교 때 白石, 李庸岳 등의 詩에 탐닉
그의 고향은 충북 중원군 노은면 연하리다. 지금은 충주시에 편입돼 있다. 100여 호의 鵝洲申氏(아주 신씨) 집성촌에 딸린 마을로 조금 떨어진 곳에 큰 금광이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 형제들은 개화주의자로 한학을 했지만 일찍이 한글전용을 주창했고,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고 한다. 이 집안에선 일본이 강요하던 新正을 무시하고 몰래 舊正 설을 쇠고 있었는데 광복이 되자 이번엔 구정을 쇠지 않고 신정 설을 고집하는 등 진취적인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그의 선친 泰夏씨는 충주농업학교를 나와 면서기와 금융조합 서기로 일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별세하자 이번엔 자기 동생을 「德大(덕대)」로 내세워 分鑛을 얻어 광산을 했다. 그래서 집안엔 도처에서 온 광부들로 늘 시끌시끌했다. 돈이 생기면 이들은 돼지를 잡고 술판을 벌여 놀았는데 「부령청진…」 하는 노래며, 「오막살이 초가집에 돈 돌날이…」 하는 구성진 노래들을 부르곤 했다. 이런 구성지고 애달픈 가락은 어린 申庚林의 정서 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다.
소년 시절 申庚林이 따랐던 인물은 일가의 당숙뻘되는 분이었다. 일자무식이었으나 퉁소를 잘 불어 「신퉁소」란 별명을 가진 그는 읍내 악단 단장을 맡기도 했고 연극도 하고 소리도 잘 하는 대단한 한량이었다. 당숙은 방랑시인처럼 외지로만 떠돌아다녀 그가 옮겨주는 세상 이야기는 申庚林으로 하여금 더 넓은 세계로의 상상력을 키우게 했다. 申庚林이 20代 후반부터 떠돌이 생활을 하고, 지금도 산을 좋아하고 여행을 즐기는 바탕에는 그런 당숙의 「한량 끼」에 대한 모방심리가 스며 있을 것이다.
『옛날 시골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산골에 속한 우리 집안은 원래가 가난했어요. 그렇지만 재당숙 삼당숙 되는 사람 가운데는 일본 유학생도 많고, 내 형제 항렬 중엔 거의가 高卒(고졸) 이상 학력을 갖고 있었어요. 하여튼 시골에서는 희한한 집안이라고 소문이 났었지요. 잘살지도 못하면서 다들 공부는 악착같이 시키고 있다고 말입니다. 일찍부터 집안에선 공부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나 봅니다. 책을 좋아한 사람이 많아 나는 중학생이 되자마자 春園이나 金東仁 李箕永의 소설을 읽었고 집안 누나들과 소설 이야기도 나누곤 했지요.
나는 충주사범병설중학을 다녔습니다. 宗中에서 충주읍내에 대지 500여 평에 방이 열다섯 개나 되는 집을 구해 줬는데 집안 아이들이 읍내의 중-고교를 다니면서 안심하고 기거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거기서 자취생활을 하며 학교를 다녔지요. 졸업하면 사범학교를 가리라 작심하고 사범병설에 간 것인데 나중엔 충주고교로 진학하고 말았습니다. 인문고교로 간 것이 내 인생에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중학교에 안목이 높은 영어선생이 한 분이 내 3학년 담임으로 계셨어요. 성함이 鄭春溶이라고, 이분은 나중에 고등학교 때 만나는 유촌 선생과 함께 제 인생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스승님이지요. 선생께서 나를 거의 강제로 충주고교로 진학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는 문예반 지도교사였는데 내가 과제물로 쓴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과 「전원교향악」 독후감이 아주 마음에 들었던가 봅디다. 「문학을 하자면 대학을 가야 한다」며 사범학교 진학을 가로막는 겁니다. 내가 사범학교 진학을 고집하자 그는 내 선친을 찾아가 말씀드리고 함께 나를 인문고인 충주고로 보내는 겁니다.
6·25 전쟁 중이라 막상 고교에 들어가서 보니 학교엔 미군이 주둔해 있어 학교수업이란 것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어요. 책상도 의자도 없는 마룻바닥에서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수업시간은 노상 땡땡이 쳤지요. 비 오는 날이면 근처 호숫가에 가서 생각에 잠겨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이 무렵에 나는 많은 독서를 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열 권을 다 읽었고 鄭芝溶 林和 尹東柱 白石 李庸岳 金起林의 詩들을 구해 읽었습니다. 가장 감명이 깊었던 것은 백석과 이용악의 詩들이어서 거의 다 외우다시피 했어요. 그리고 문학비평도 하려고 했는데 교지에다 「李炯基論」을 발표하고 말이지요』
음악다방 「르네상스」 출근하다시피…
그리고 그는 1955년 서울로 올라가 동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영문과를 택한 것은 영어 원서를 읽으며 문학을 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선 서울 충무로 4가에 있는 외가에 있었다. 학교까지는 걸어서 15분이 채 안 되는 곳. 지방법원 판사인 외숙과 함께 집을 나서기 때문에 申庚林으로선 너무 이른 등교시간이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 학교는 늘 텅 비어 있었다. 대학생활도 재미가 없었다. 유명한 詩人이라 해서 잔뜩 기대하고 강의를 들으러 갔다가 횡설수설에 실망하고 나온 경우가 허다했다.
그의 전공인 영문학 쪽은 더 했다. 근·현대작가 것은 도외시하고 구닥다리만 다루는 듯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도서관에서 보냈다. 당시 이야기를 「바람의 풍경」이란 산문에서 그는 이렇게 써놓고 있다.
<…하지만 내게도 서울 와서 붙인 한 가지 취미는 있었다. 복개하기 이전에는 청계천을 따라서 고서점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주머니에 여유 돈이 생기면 그 고서점들을 도는 일이었다. …백석이며 정지용의 값진 시집들을 헐값으로 고른 것도 이 책더미 속에서였다.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가난 이야기」를 발견한 것도 이 고서점의 책더미 속에서였는데… 나는 그 책의 가치를 모르는 채 자장면 한 그릇 값을 주고 샀다. 그때 옆에서 나를 지켜보는 젊은이가 있었다. …같은 대학의 대학원 학생인 그는 가와카미 하지메를 화제에 올렸고, 나는 그 무렵 미키 기요시의 「철학 노트」를 읽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해서 아는 척했다. 내가 「가난 이야기」를 밤을 세워가며 정독한 것도 실은 그로 인해서였다. 이 책을 알고 나서 눈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을 느꼈고, 이후 나는 그 책을 읽었는가의 여부를 친구를 사귀는 잣대로 삼았다>
그의 외갓집 기식을 마감한 것은 작은 외숙이 갑자기 별세한 때문이었다. 유종호와 둘이서 하숙을 하게 되는데 1년여를 함께 생활한다. 두 사람은 강의실에는 안 가고 하숙방을 뒹굴면서 밤새워 책을 읽었다. 점심 무렵이 다 되어서 늦잠에서 깨어나면 「르네상스」라는 음악다방으로 가는 것이었다. 음악실은 출근하다시피 했다. 여기서 만난 친구들이 千祥炳 黃命杰 朴成龍 등 젊은 詩人들.
종일 르네상스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다가 저녁 무렵에 「퇴근」을 했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그들은 좁쌀 술 몇 잔을 얻어 걸치고 헤어져 하숙집으로 돌아와 또 책에 달라붙고는 했다. 그는 이때 읽은 책이 가장 많은 분량이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그의 대표적인 詩 「목계장터」를 읽어보자. 목계는 1910年代까지 중부지방의 각종 산물 집산지로, 남한강의 많은 나루터 중 가장 번창한 곳이었다. 서울에서 소금이나 어물을 실은 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와 목계에서 짐을 부렸고, 그러면 닷새고 이레고 장이 섰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어려웠던 홍은동 단칸방 생활
그가 수배자로 떠돌 때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거기였다. 낯익은 막국수 집에 가서 한 그릇을 사먹고 나니 빈털터리였다. 그는 나루터로 간다. 남한강을 건너 왼쪽 길을 따라 가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그의 고향 마을. 그는 어떻게 강을 건너나 하고 망연히 서 있다가 형사에게 체포되고 만다.
물론 詩 「목계장터」는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다만 목계란 곳이 그에겐 떠남과 정착의 상징처럼 여겨졌으며, 너저분한 현실로부터 일탈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졌는지 모른다. 아니면 세상만사에 대한 분노를 초월하고 싶어 「…되라 하네」식의 민요조 詩를 썼는지 모른다. 詩의 운율이 우리 전통 詩歌의 4음보를 토대로 하고 있는 것도 범상치가 않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무/잡초나 일깨우는 잔 바람이 되라네/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물 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려/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 하네/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그는 서른에 결혼을 한다. 신부는 李康姙. 충주읍내의 작은 문간방이 그들의 신혼살림방이었다. 장남이라 부모를 모신다고 했지만 변변한 직업도 없었던 그는 더부살이나 다름없었다. 돈벌이하는 친구를 찾아다니며 술을 얻어 마시고 운이 좋으면 용돈 몇 푼을 얻어 과일봉지를 감추어 들고 들어올 수밖에 없는 그런 룸펜 남편이 申庚林이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의 영어 과외지도를 하게 되었다. 신혼방은 몇 개 그룹으로 나뉘어진 아이들의 공부방으로 바뀌었다. 밤늦게 공부가 끝나고 아이들을 다 보내고 들어와 보면 아내는 뜰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기 일쑤였다.
그렇게 지나는 가을 어느 날 그는 길을 가다 시인 金冠植을 만난다. 충주에서 한의원을 하는 형을 만나러 왔던 그는 申庚林의 딱한 형편을 보고 당장 서울로 올라가자고 강권하는 것이었다.
『김관식 형은 그때도 거지꼴이었어요. 막걸리나 몇 잔 마시고 헤어지려는데 나의 詩 「갈대」와 다른 몇 편을 큰 소리로 외며, 「너 같은 좋은 詩人이 詩를 안 쓰면 어떡하느냐. 나도 얼마동안 詩를 못 쓰고 있지만 네가 쓰면 나도 쓰겠다」 이러며 서울로 가자는 거였어요. 서울 홍은동에 자기 집이 있으니 당분간 함께 살자면서 말이지요. 결국 며칠 후 아내와 나는 이삿짐 보따리를 쌌습니다』
金冠植 시인의 홍은동 집은 무허가였다. 그 문간방을 차지한 申庚林 부부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지금은 즐비한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지만 1960年代 중반의 이 무허가 산동네는 수도가 없었다. 겨울엔 우물도 마르고, 개울물도 얼어 얼음을 깨고 받아야 했다. 그나마 너도나도 개울물을 식수로 챙겨야 했기에 그의 아내는 매일 새벽 4시 전에 일어나 물을 길어와야 했다.
겨우 얻은 직장은 사설학원의 영어강사 자리였다. 신출내기여서 학생들이 제일 적은 새벽과 늦은 밤 시간이 배당되었지만 열심히 다녔다. 새벽에 나와 밤늦도록 학원에서 기다린다는 건 고역이었다. 그래서 빈 강의실을 찾아다니며 책을 읽었다. 석 달을 버티었지만 수강생들은 점점 줄어 다른 학원으로 옮기고 말았다.
다행인 것은 학원에서 한 달에 4000원씩 받은 돈으로 김관식 詩人의 문간방 신세를 면하고 아랫동네에 보증금 5000원에 월세 500원짜리 방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쌀 한 말 값이 300원이었다. 이 방에 김관식 시인, 朴鳳宇 시인, 천상병 시인 등이 자주 「쳐들어와」 그의 아내에게 술상을 보게 했다.
1950年代 중반에서 1960年代 중반까지 뛰어난 서정시를 써오던 김관식은 늘 현실초월적 삶을 살아 詩壇에선 奇人으로 통했다. 학력은 보잘것없었으나 漢詩(한시)에 통달했던 천재시인이었는데 37세에 세상을 떴다. 그는 1960年代 후반 현실과 정치를 개조하겠다며 국회의원에 출마, 영등포에서 尹普善 前 대통령과 대결하다 고배를 든다. 그때 그가 돌린 명함에는 「大韓民國 金冠植」이란 글자가 커다랗게 찍혀 있었다.
『30여 년 전 이야기지요. 그 때의 아내도 가고 내 아내에게 술 심부름을 시키던 김관식 박봉우 白時傑 천상병 詩人도 저 세상으로 갔군요. 거기서 우리 집 큰아이가 태어났는데…. 요즈음도 북한산에 올랐다가 홍은동 쪽으로 가끔 내려오기도 하는데 옛날 나 살던 곳이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도 안 되더군요』
시집 「農舞」를 내고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를 나서면/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뿐/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철없이 킬킬대는구나/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그의 詩 「農舞」의 전문이다. 「농무」란 징 꽹과리 등에 맞춰 추는 춤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가 만든 말이다. 이 詩에서 우리는 쉽게 학교 운동장, 가설무대와 농악대, 장터거리, 소줏집 등 어떤 서글픈 읍내 풍경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의 세계가 아니라 누군가가 체험한 서사적인 세계인 것이다.
상경 이듬해인 1966년 4월 申庚林은 한국일보의 「아침詩壇」에 詩 「겨울밤」을 발표한다. 「文學藝術」 추천작 「갈대」를 쓴 후 10년 만이었다. 「갈대」의 신경림을 기억하던 사람들로선 낯선 詩였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묵내기 화투를 치고/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로 시작돼 있어 당시 통념으로선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詩 발표를 상당히 중요시하고 있다. 그것은 이 詩를 발표함으로써 詩에 신명을 얻었고 친구들로부터는 많은 격려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詩가 본격적으로 詩壇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은 1970년 계간 「創作과 批評」에 앞의 「농무」를 비롯한 5편의 신작이 발표되고서였다. 詩壇의 반응은 『좋다』와 『이게 무슨 詩냐』 등 양쪽으로 갈라졌다.
기성시단에선 그의 詩를 외면했지만 젊은 독자들의 호응은 아주 좋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 詩들을 創批에 소개한 평론가 유종호는 물론이고 辛東門 시인이 높이 평가해 주었다. 또 당시 미국에 가 있던 白樂晴씨는 감명 깊게 읽었다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1973년에 그는 지난 7년 넘게 써온 詩를 묶어 첫 시집 「農舞」를 自費(자비)로 출판한다. 500부 한정판이었다. 그러나 시단에 증정본 돌릴 만한 마땅한 사람도 없어 고스란히 자신이 다니던 출판사 창고에 쌓아두었다. 한데 어쩌다 열 권 정도 서점에 내보낸 것이 순식간에 매진됐고, 서점에선 책이 없어 못 팔고 있으니 좀더 보내달라는 주문이 잇따랐다. 책이 매진되고 이듬해 이번엔 「창작과 비평」에서 개정판 1000부를 낸다. 잘 팔렸으므로 중판을 거듭하게 된다. 이 시집으로 해서 그는 제1회 萬海문학상을 수상한다.
시집 「農舞」는 점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유신과 긴급조치 등으로 암울한 세월을 견디던 많은 사람들은 申庚林의 서글프고도 해학적인 詩들을 읽으면서 위안을 찾았을 것이다.
핍박의 세월… 유신시절과 5共 초기
『1971년에 아내를 잃었지요. 암에 걸렸던 것입니다. 어린 2남1녀를 둔 채 고생만 잔뜩 하고 말입니다. 안양 비산동 산비탈에 살 무렵이었는데, 그 사람은 첫 시집 나오는 것도 못 보고 간 것입니다.
문학인을 사찰대상에 포함시킨 것은 1974년 1월부터였지요. 명동성당 앞 한 찻집에서 문학인 61명 이름으로 유신헌법 철폐와 개헌청원 성명을 발표하려 한 것이 계기였지요. 이 일로 문인 몇 사람이 잡혀갔고, 나는 다음날 집에서 안양경찰서를 거쳐 남산으로 연행되었지요. 하룻밤을 조사받고 나왔지만 이를 악용해서 당국은 「문인간첩단」 사건이란 것을 조작하더군요. 개헌 청원한 사람들을 그냥 잡아넣을 수 없으니까, 간첩과 접선했다고 뒤집어씌운 거죠.
李浩哲 任軒永 張伯逸 등이 간첩혐의로 구속된 것이 그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당국은 문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어서 黃晳暎의 晳(석)자를 「철」자로 읽어 「황철영」이라 하고, 시인 崔旻(최민)을 최문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나를 비롯해서 廉武雄 황석영 韓南哲이 필명을 쓰고 있어 「글쓰는 놈들은 이름을 두 개씩 갖고 있는 사기꾼들」이라고 투덜거리기도 하더군요. 나의 본명은 申應植입니다만』
이어서 그는 자유실천문인협회 간사를 맡아 각종 비판적 모임에 참가하고 서명을 했으며 글도 쓴다. 정부를 비판하는 데 앞장섰던 그는 1970年代 말까지 연행과 훈방의 쳇바퀴를 도는데, 그들은 걸핏하면 그를 잡아들였던 것이다.
한편 그는 계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민중문학론이다 농민문학, 리얼리즘 문학에 대해 그 나름의 이론도 제기해 젊은이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글은 발표될 때마다 문제를 제기했으며, 그의 저서들은 시집이든 산문집이든 대부분 중판을 거듭했다.
1980년 5·17 이후 申庚林 시인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高銀 趙泰一 具仲書 등과 함께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두 달 만에 풀려난다. 이 일로 하여 그는 출판사의 기획위원 자리도 잃어 다시 룸펜 생활을 한다. 5共 신군부의 정부는 계간 「창작과 비평」 등 거추장스럽다고 판단되는 간행물들을 폐간시켰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강연이 전부였지만 입조심을 해야 할 때여서 그가 설 강단은 드물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鄭喜成 시인 등과 함께 민요연구회를 만든다. 1983년이었다. 「우리의 것을 되살린다」는 취지였지만 마음 맞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목적이었다. 처음에는 뜨악해 하는 반응이었지만 민요운동의 속내가 의식 있는 사람들의 만남과 그 울타리란 취지가 감지되면서 호응이 커졌다. 각 대학에선 민요동아리가 만들어졌고, 지방 문화단체들이 민요와 연관된 단체를 구성하기도 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그는 민요를 채집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찾아다녔다. 여기서 태어난 것이 1985년의 「민요기행1」과 1989년의 「민요기행2」. 어려웠던 시절 그가 공들여 썼던 책 중의 하나다. 민요를 수집하면서 그는 자신의 詩를 민요의 가락으로 쓰기 시작한다. 세 번째 시집 「달 넘세」에 이 민요조의 詩들이 들어갔다.
『어렸을 때부터 민요를 좋아했지요. 광산촌의 광부들에게서 민요가락을 들으면서 자랐으니까요. 중학교 다닐 때는 강가에 나가서 많이 놀았는데 뗏목이 50m씩 간격을 두고 스무 개가 지나갑니다. 한 뗏목에 두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노래를 불러요. 앞사람이 선창을 하고 나면 뒷사람이 받고 하면서 말이지요. 구성지고 신명이 나는 것이었는데, 나이 들면서 알고 보니 「정선 아리랑」입디다.
시집 「달 넘세」를 내놓고 나는 나의 詩에 상당히 절망했어요. 민요가락이란 틀에다 詩를 맞추려하다 보니까 싱싱한 맛이 없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어요. 제 민요시들 가운데서 「목계장터」, 「어허 달구」, 「씻김 굿」 등 10여 편을 제외하고는 거의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詩를 쓸 때 민요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정릉 아파트로 이사하고 혼자 살아
서울 성북구 정릉 1동1018 태영APT 103동 1405호.
지난해 가을 그의 모친이 작고하자 혼자 남은 그는 오래 살던 단독주택을 팔고 이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2남1녀(炳璡 炳珪 沃珍)가 모두 성혼을 해 따로 나가 살아, 주택에서 혼자 살기 힘들어서였다.
서울 은평구 기자촌과 신설동을 오가는 154-1번 버스를 타고 숭덕 초등학교 입구에서 내려 육교 위를 올라갔더니 태영APT가 눈앞에 바라보였다. 옛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미아리 산동네가 아파트 타운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승강기를 타고 14층에 내렸더니, 마침 申庚林 시인이 밖에 나와 그의 딸 옥진씨와 외손자를 작별하고 있었다. 부근에 사는 딸이 들러 청소도 하고 점심도 차려 주었던 것 같았다.
34평인 이 아파트는 새로 지은 것이어서 그런지 아주 깨끗했다. 문간에 있는 것이 그의 침실이고 큰방이 서재로 쓰이고 있었다. 서재 한가운데에 책상을 놓고 있었는데 컴퓨터가 테이블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엔 그가 쓴 산문이 떠올라 있었다. 글을 쓰고 계신가보다 했더니 「시인을 찾아서」 속편을 내기 위해 원고를 손보고 있다고 했다.
책은 비평서와 사회과학서가 대부분이었다. 「唐詩新評」, 「韓國의 農謠」, 「한국해금문학전집」, 「연려실기술」 12권 등이 눈에 잘 띄는 곳에 꽂혀 있었다. 英書(영서)와 日書(일서)가 좀 있었으나 오래된 것들이었다. 내가 장정이 잘 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全25권을 열심히 보고 있자 그는 『소년 시절 일본어로 된 전집을 읽었는데, 완벽한 우리말 전집이 새로 나왔기에 독파해 볼 작정으로 구입했다』고 했다.
거실엔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TV 앞에 흔들의자가 하나. 벽에는 徐廷柱 시인이 「신경림에게」라고 써준 詩가 하나 표구되어 걸려 있었다.
그것은 〈春香이 눈썹 넘어 廣寒樓 넘어 다홍치마 빛으로 피는 꽃을 아시는가 비 개인 해에 가야금 소리로 피는 꽃을 아시는가 茂州 南原 石榴 꽃을〉 하는, 未堂이 60세에 쓴 「石榴꽃」이란 詩의 전반부.
『詩人이란 꾸준히 자기 길 가야 하는데…』
―「무명산악회」란 모임 아직도 계속합니까? 멤버도 많이 달라졌을 텐데….
『하고 있어요. 고정 멤버는 소설가 현기영, 詩人 정희성 그리고 희곡 쓰는 안종관씨와 나 이렇습니다. 국회의원 이부영 임채정씨도 멤버이긴 한데 요즈음엔 바쁘니까 잘 참여하지 않아요. 매주 한 번 주로 북한산을 오르지요』
―요즈음 젊은 사람들의 詩 읽고 있습니까? 어떻습디까?
『일괄해서 말하긴 뭣하지만…. 전반적으로 말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언어를 쏟아붓는 느낌인데, 깊이 생각하고 말을 다듬지 않으니까 詩가 난해하고 산문 형식이 되고 거칠게 되는 거죠. 읽을 사람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쓴다고 할까. 무슨 유행병 같아요. 몇 년 전 어떤 좌담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나와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詩人이란 남이 읽어주건 말건 좋다 하건 말건 그냥 꾸준히 자기 길을 가야 하는데, 요즈음 젊은 詩人들은 그냥 휩쓸리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이지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디다. 섹스詩니 사랑詩니 하는 상업주의적 詩가 나도는 것도 문제이고…』
그가 詩 이야기는 그만 하자고 했다.
나는 오후 3시30분부터 하는 월드컵 「터키-일본 戰」 중계를 시청하러 서둘러 작별을 하고 그의 아파트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