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하느님의 말씀에 굼뜨지 않는 사람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정도 떨어진 엠마오로 걸어가던 두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께서 같이 걸어가십니다. 한 스타디온 = 185m이니 60스타디온은 약 11.1km정도 되는 거리니까 적어도 10km정도는 같이 걸어가셨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동행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을 들으시고,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풀이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성경의 말씀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는 질책의 말씀을 다시 새겨 봅니다. 제자들은 왜 성경의 말씀을 듣고 믿는데 그렇게 굼떴을까 하면 예수님의 부활이 상식을 초월한 하느님의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가끔 성경을 믿는 것을 상식과 과학에 의해서 믿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성령의 은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을 믿는 것에 굼떴을 것입니다. 성령강림 이후에 제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믿는데 눈과 귀가 열렸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령의 은총을 받지 못하면 성경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경을 접할 기회가 없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이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성경의 말씀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경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 원로사제들은 그 해석을 완고하게 해서 우둔한 많은 백성들에게 잘못 가르쳤기 때문에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을 받지 못했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접하지 못하고 있거나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거나 잘못 가르쳐서 성경을 잘못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못 가르치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성경의 말씀을 들으려는 열정이 부족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마음에 새겨듣지 않고 흘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언제나 읽는 소설책 정도로 생각하고 꼼꼼히 읽고 마음에 새기는 버릇이 되지 않고 그냥 대충 읽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 우리의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논어의 이인 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왈 ; 군자욕눌어언, 이민어행.
子曰 ; 君子欲訥於言, 而敏於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말에는 더듬거리지만 행동에는 민첩하게 행동한다.”>
올바른 크리스천은 말만 앞서지 않습니다. 실천이 항상 앞서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말로만 익히고 머리로만 생각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냥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성경의 말씀을 읽고, 읽은 것을 믿고, 믿은 것을 실천하고, 실천한 것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래야 성경의 말씀을 믿는데 굼뜨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의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셔서 제자들의 명오(明悟)를 열어주시고, 깨달음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눠주시는 성찬례를 거행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예수님께서 미사전례를 그대로 거행하시는 것입니다. 동행하시며 성경을 말씀하시는 말씀의 전례와 빵을 떼어 나눠주시는 성찬의 전례를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 주시고,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얼마나 행복했을 것인지 상상만 해도 행복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걸어갑니다. 그들이 걸어가는 동안 얼마나 행복하였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미사를 참례하고 말씀을 듣고 영성체하고 축복을 받고 돌아오는 그 길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오늘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제자들과 같이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있을 때마다 미사에 참례해서 은총을 많이 받고 행복한 시간을 만듭시다.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10
그 무렵 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축일4월 3일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Luigi Scrosoppi)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 지역 : 우디네(Udine)
활동 연도 : 1804-1884년
같은 이름 : 스크로쏘피, 알로이시오, 알로이시우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는 1804년 8월 4일 이탈리아 북부 프리울리(Friuli) 지역의 우디네에서 신심 깊고 자애심 많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2살 때 그는 우디네 교구의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직을 준비해 1827년 사제품을 받았는데, 첫 미사를 봉헌할 때 그의 형제인 카롤루스(Carolus)와 세례자 요한(Joannes) 신부가 옆에서 그를 도왔다.
1800년대 프리울리는 기근과 전쟁 그리고 페스트로 말미암아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형제인 카롤루스가 운영하던 고아원의 운영을 도와 우디네와 그 주변 지역의 가난하고 버려진 소녀들을 모아 교육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 그의 모든 재물과 힘과 애정을 그들에게 쏟아 부었다. 소녀들을 위해 더 큰 시설이 필요해지면 우디네와 인근 지역의 거리를 돌며 구걸하듯이 사람들의 지원을 호소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그가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 속에서 소녀들의 교육에 헌신하는 모습은 인근 지역에서 가난하고 버려진 이들을 위해 활동하던 몇몇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여성들은 재봉과 자수에 숙달된 기술을 갖고 있었고, 읽고 쓰고 계산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연령대와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갖고 있었지만 하느님의 손길에 이끌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안에 살며 하느님을 섬기고자 했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봉사하던 9명의 여성들은 마침내 1837년 2월 1일 모든 소유에서 벗어나 가난 안에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계속해서 다른 이들이 동참했는데, 그들은 부자, 가난한 자, 교육 받은 자, 문맹자, 귀족 출신, 비천한 출신들이 모두 섞여 있었다.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는 이들 모두에게 열려 있었고, 설립자는 그들이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소녀들을 사랑으로 대하도록 격려하며 이끌어 주었다.
그러면서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가난에 대한 이상과 보편적 형제애에 매혹되어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필요성에 대해 고심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를 기쁨과 자유의 시인, 기도의 성인, 겸손과 사목적 열정의 소유자였던 성 필리푸스 네리(Philippus Neri, 5월 26일)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이끌었다. 결국 그는 1846년 42세의 나이에 오라토리오회(Oratoriani)에 가입하여 성 필리푸스 네리의 영적 아들이 되었고, 그로부터 온순함과 다정함을 배웠다. 이는 그가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 설립자이자 사제로서 더 합당하게 처신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수녀들의 자기 개발과 성덕의 성장을 위해 깊은 관심과 존경을 갖고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수녀들의 성소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그들이 더욱 강인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때때로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기도 했다. 또한 허영과 공명심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고 위선과 천박한 태도를 보일 때는 엄하게 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아버지다운 자애로써 수녀들의 약점을 바라보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지원하고 위로하였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베들레헴의 육화에서 드러난 겸손과 가난, 나자렛의 노동자로서의 단순함, 십자가 위에서 바친 온전한 희생, 성체성사의 침묵 안에서 수녀회를 이끌 영성의 기초를 만들어갔다.
그는 일생 동안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추구했다. 그는 죽기 전에 열두 개의 수녀원을 세울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열두 개의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수녀들은 겸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도움이 필요한 젊은 소녀들과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늙어 홀로 남겨진 이들을 위해 봉사했다. 또한 그는 수녀들이 선의를 지닌 사람들과의 폭넓은 공동 협력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지원하도록 했다. 교회의 모든 활동에 적극 협력했던 그는 우디네 신학교의 젊은이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보다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들이 통일의 역사를 걷게 되었다. 정치적 · 군사적 측면에서 이러한 통일은 유럽의 북부와 남부, 동부와 서부의 국경이자 교차로인 프리울리 지역 전체에 고통스런 시련을 가져왔다. 통일의 결과물 중 하나는 불행하게도 반성직주의(反聖職主義)였다. 이러한 풍토는 고아원과 오라토리회 사제들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자신들의 활동과 고아들의 선익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다. 고아들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우디네의 오라토리회의 파괴를 막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영적인 지혜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특별한 직관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1883년 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자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병마와 싸웠다.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알고 그는 모든 수녀들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썼다. “나의 죽음 이후 수녀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새로운 삶이 주어질 것이다. 애덕! 애덕! 이것은 수녀회 가족의 정신이다. 영혼들을 구하고 애덕으로 그들을 구하여라.”
1884년 4월 3일 목요일 밤,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러 떠났다. 우디네 전체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서둘러 모였고, 하느님께서 그를 보호해 주시기를 간청했다. 가난하고 어려움 중에 있는 젊은이들의 선익을 위한 그의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과의 일치, 동정과 사랑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금도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걷는 이들의 발걸음에 동행하고 있다. 그는 1981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1년 6월 10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알로이시우스 스크로소피(Aloysius Scrosoppi)로도 불린다.
오늘 축일을 맞은 루이지 스크로소피 (Luigi Scrosoppi)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