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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8,1-8
그 무렵
1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2 거기에서 그는 폰토스 출신의 아퀼라라는 어떤 유다인을 만났다.
아퀼라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자기 아내 프리스킬라와 함께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었다.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갔는데,
3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
4 바오로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5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면서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였다.
6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바오로는 옷의 먼지를 털고 나서,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7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 티티우스 유스투스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다.
그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
8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다.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바오로의 설교를 들은 다른 많은 사람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6,16-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7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막바지에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며, 우리의 길이 됩니다.
그분의 삶의 마감은 끝이 아니라 끝에서 오히려 길이 됩니다.
그분의 떠남은 떠남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길이 됨을 밝혀줍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6,16)
앞 구절의 “조금 있으면”이란 단어는 오늘 복음에서 일곱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짧은 시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뒷 구절의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단어는 부활하신 후에서 승천까지, 혹은 재림의 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곧 “다시 보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당신의 죽음을 준비시키고자 애쓰시건만, 정작 제자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근심과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이는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근심이나 슬픔이 지나가면 기쁨이 온다’는 고진감래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혹은 ‘슬픔이나 근심 대신에 기쁨이 주어진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슬픔 그 자체가 기쁨으로 변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겪고 있을 때는 아픔이었지만, 뒤돌아보니 그것이 은총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이 열리면, 신비롭게도 슬픔이 곧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슬픔인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슬픈 일 자체’가 기쁜 일로 바뀐다는 이 사실, 곧 슬픔은 슬픔이 아니라는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이미 기쁨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셨고, 성령이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여전히 근심과 슬픔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근심과 슬픔 속에 깃들어 있는 ‘이미 베풀어진 자비’를 관상하고, ‘여전히 베풀어지고 있는 사랑의 선사’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와 있는 “기쁨”을 덮어버리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그 어떤 근심과 슬픔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빼앗기지 않는 기쁨”(요한 16,22)이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그렇습니다, 주님!
근심이 지나고 나야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근심, 바로 그것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바람은 근심도 기쁨도 떠나와, 떠남도 머물음도 떠나와, 불고 싶은 대로 불고, 그 속에서 열매는 싹으로 바뀌고,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고,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은 우리 기쁨의 바위>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제 조금 있으면 제자들이 당신을 볼 수 없게 돼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당신을 볼 수 있게 돼 제자들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기쁨으로 바뀌는 근심에 관해 성찰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모든 근심이 다 기쁨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되치기를 잘하여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지만 어떤 사람은 외부 상황에 의해 자기의 근심과 기쁨이 좌우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새옹지마의 얘기는 우리 인생을 깊이 생각게 하지요.
중국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노인이 기르던 말이 국경을 넘어 오랑캐 땅으로 도망치고 이에 이웃이 위로의 말을 전하자 노인은 "이 일이 좋은 일이 될지 누가 알겠소"라며 태연하게 말합니다.
과연 며칠 후 노인의 도망쳤던 말이 암말 한 필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이웃들이 노인에게 축하의 말을 하자 노인은 담담하게 "이게 화가 될지 누가 알겠소"라고 말했는데 그 말대로 노인의 아들이 오랑캐 땅에서 온 말을 길들이다가 낙마하여 그만 다리가 부러지고 맙니다.
이에 이웃들이 노인을 위로했지만, 이번에도 노인은 담담하게 "이 일이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라고 말하고, 과연 노인의 말대로 몇 년이 지나 전쟁이 났을 때 다른 집 아들들은 전쟁에 나가 다 죽었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친 다리 때문에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땅을 치며 애통할 일도 있고 기뻐 춤출 일도 있으며, 이에 따라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이 출렁일 수도 있고, 이 노인처럼 길흉화복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근심과 기쁨의 관계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의 근심과 기쁨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슬퍼할 일도 많고 기뻐할 일도 많지만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일도 주님 때문이고,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일도 주님 때문이어야 한다고 오늘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근심과 기쁨이고, 동양의 행불행과 다른 그리스도교의 행불행입니다.
조금 있으면 주님이 안 계시기에 우리는 근심하고, 조금 더 있어 주님께서 다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기뻐하게 되는,
그런 인생이어야 하고, 그런 신앙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른 것들로 인해서는 우리 인생이 출렁거리지도 않고 일희일비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이 안 계신 것이 근심거리고, 주님이 함께 계시면 온갖 근심이 기쁨으로 바뀝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기쁨은 온갖 출렁거림을 막아 잔잔해지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묵직한 바위와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희로애락에 까불리지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게 하시는 기쁨의 바위라고 다시금 고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조금 있으면>
인간은 살아가면서 근심과 걱정거리를 안고 다닙니다.
아마도 새 하늘과 새 땅에까지도 안고 갈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마리아 임금 아합왕은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해서 근심합니다.
궁전 곁에 있는 포도밭을 정원으로 사용하고자 이즈르엘 사람 나봇에게 더 좋은 포도밭을 줄 것을 약속하며 포도밭을 달라고 합니다.
나봇이 ‘조상으로 물려받은 포도원을 임금께 드릴 수 없다.’고 거절하자 왕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음식도 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1열왕 21,3-4).
욥(3,23-26)은 시련을 견딜 수 없어서 두려움 속에 근심했고, 잠언(10,1)에서는 ‘어리석은 자녀를 두는 것은 어미의 근심거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거리도 많아지고 근심거리가 느는 법’이라고 코헬렛서(1,18)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이 위태로워서 근심하였습니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하였습니다(마태 8,23-25).
마르타는 너무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다가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라는 충고를 들었습니다(루가 10,41-42).
근심 걱정거리는 이렇게 다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중에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반대자들은 큰 승리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 앞에 넋을 잃었습니다.
너무 큰 슬픔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그 근심과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해산의 진통을 앓듯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기쁨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믿고 기다리며 최선에 최선을 다하면 영광을 만나게 됩니다.
“조금 있으면”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간절함을 지니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너희의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1.27)
시편은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 37,5),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의 흔들림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시편 55,23) 하고 노래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 하고 선언했습니다.
우리의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고 큰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워도,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조금 있으면” 해결되고 풀어지며 좋아지리라 믿습니다.
‘실패는 미루어진 성공일 뿐’입니다.
등산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조금만 가시면 됩니다.”
아직도 한참을 가야 하는데도 지치지 말라는 희망을 주는 위로의 말입니다.
조금 더 힘을 내라는 동료애를 주는 것입니다.
이 위로를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사랑 안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대의 모든 근심 걱정을 하느님 안에 두십시오.”
(오상의 비오)
지금의 근심 걱정이 하느님 안에 있다면 그것이 기쁨의 바탕임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긴장을 풀고 마음을 달래라.
그리고 근심을 네게서 멀리 던져 버려라.
정녕 근심은 많은 사람을 망쳐놓고 그 안에는 아무 득도 없다.”
(집회 30,23)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문다면 아무리 나이들어도 청춘을 살 수 있습니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께서 택시를 탔을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운전 기사분 연세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동년배끼리 만났는지라 반갑게 인사를 한 후, 목적지 영등포역으로 잘 가고 있던 어느 순간이었습니다.
승객 어르신께서 운전 기사 어르신께 묻습니다.
"기사 양반! 내가 어디 가자 합디까?"
운전 기사 어르신의 반응이 더 웃깁니다.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습니다.
"아이고 깜짝이야! 대체 언제 타셨슈? "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는 극단적 노령화의 가속으로 인한 여파가 만만치 않습니다.
인구수가 급격히 줄어든 농촌 지역의 많은 지자체들은 존립 자체를 위협받고 있습니다.
더 이상 신자들이 오지 않는 관계로 대성전이 매물로 나오고 성전이 공연장이나 술집으로 바뀌는 유럽 교회의 현실이 우리에게 멀지 않습니다.
한때 공동체의 주역으로 왕성히 활동하던 나였는데, 이제 새파란 후배들에게 주인공 자리를 물려주고 무대 뒤로 내려와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정말 힘듭니다.
나이듦에 따른 노화와 질병, 죽음 앞에서 비참함을 느낍니다.
쪼글쪼글 얼굴에는 주름이 잡히고, 내 삶이 이토록 쪼그라든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고통이요 슬픔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주님 손길 안에 지속적으로 머문다면, 우리는 영원히 청춘을 누릴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 매일 매순간을 살아갈때, 죽음 조차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인도자이신 성모님께서 탁월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모님은 평생토록 주님 뜻 안에 사셨기에, 영원한 젊음을 누리며 사셨고, 지금도 젊고 활기찬 어머니로서 우리를 동반하고 계십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기쁨>
지금 상황은 최후의 만찬 후에 제자들에게 작별의 말씀을 하시는 상황이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임박해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곧 닥친다는 뜻이고,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죽음 때문에 당신과 제자들이 떨어져 있는 시간은 짧다는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은 만 이틀 정도입니다.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 때문에 제자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곡을 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좋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복음 선포 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했던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했다고 생각하고서 안도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의 죽음 때문에 너희는 ‘큰 슬픔’에 빠지겠지만, 그 슬픔은 곧 ‘큰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라는 뜻이고, 이 말씀도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근심’은 ‘슬픔’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면 기뻐하거나 좋아했던 박해자들은 예수님 부활 후에 어떻게 바뀌었을까?
성경에는 자세한 기록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들은 당혹감, 불안감 등을 느꼈던 것 같고(사도 2,43),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복음 선포 활동을 시작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분노했습니다(사도 4,2).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죽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부활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니 믿음과 희망 속에서 기다려라.”
앞의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요한 13,33)
또 베드로 사도에게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요한 13,36)
이 말씀들은 당신의 십자가의 길은 온전히 당신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과 제자들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부활 신앙이 없는 제자들이 당신의 뒤를 따르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만일에 부활 신앙이 없는 제자들이 ‘죽음을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다면, 그것은 자살행위가 될 뿐입니다.
따라서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라는 말씀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 말씀, “지상에서의 인생은 짧은 십자가의 길과 같다.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으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라는 약속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해석하더라도, 지상에서의 신앙여정을 슬픔과 고통만 있는 십자가의 길로 생각하거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조금’이라는 시간은 이천 년 전에 지나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부활하실 예수님’이 아니라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신앙인은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이미 시작된 영원한 기쁨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고, 그 기쁨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힘든 일도 많고 슬픈 일도 많습니다.
‘영원한 기쁨’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불완전하고 쉽게 깨지거나 잃을 때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충실한 신앙인들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시작되었고 이미 누리고 있는 영원한 기쁨을 빼앗기지 않습니다(요한 16,2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필리 4,4)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6-1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신 것에 대해서 늘 기뻐해야 하고, 또 그것을 감사드려야 하고, 그러면서도 지상에서의 인생을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선교의 사랑, 선교의 열정 - 치열熾㤠한 삶, 가열加熱찬 삶이 답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리니,
너희 마음이 기뻐하리라.”
(요한 14,18; 16,22)
선교는 교회의 사명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선교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숨통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선교를 지향합니다.
그러니 수도자는 물론 믿는 이들 누구나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요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이자 선교사입니다.
안으로는 관상이요 밖으로는 선교, 안으로는 기도요 밖으로는 선교 활동입니다.
얼마전 교황님의 성소주일 담화문 중 영문 해석이 잘못되었음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미션mission’을 ‘사명’이 아닌 ‘선교’로 번역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선교 없이는 성소도 없다’로 해야 적절했습니다.
예전 2012년 오틸리아 연합회 회의에서 요셉 수도원의 자치좌 수도원이 결정될 때 회의에서 요셉수도원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일이 생각납니다.
‘선교가 본질인데 너무 관상적이지 않느냐?’는 요지의 물음에 제 짧은 영어 실력이지만 다음 한마디가 논쟁을 종결시켰고 우렁찬 박수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습니다.
"선교와 관상은 둘이 아닌 하나다!"(Mission and contemplatiom is one without two!)
흡사 ‘황소 뒷걸음 치다 쥐잡는다’는 속담처럼 순간 성령의 은총으로 생각치 않은 답변으로 위기를 벗어난 것입니다.
관상은 선교 활동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존재 자체가 복음 선포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교와 관상에 기본적 자세가 날로 치열한 삶, 가열찬 삶입니다.
선교의 사랑, 선교의 열정입니다.
어제 의기투합하는 도반과의 나눔이 생각납니다.
어느 동료 도반의 성취에 대한 제 견해입니다.
“학위논문이 기막히게 완벽하네요.
토마스 머튼의 모두를 망라했어요.
목숨 걸고 토마스 머튼에 빠져 자나깨나 머튼만 생각하며 참 치열히 한결같이 공부한 것 같네요.
내가 이미 참고 문헌 책을 거의 다 봤기에 물흐르듯 읽었고 그 분위기를 알지요.
내가 머튼에 대해 석사논문 쓴 것이 1988년이니 벌써 35년이 지났네요.
도반의 책 후기를 보면 캐나다 9년 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감동깊게 유려한 문체로 감동깊게 묘사되어 있지요!
참으로 도반이 캐나다에서 이룬 성취에 감동하게 됩니다.
이렇게 소감을 나누니 더욱 분발심이 샘솟네요!”
이어 계속하여 보낸 제 소감문입니다.
“토마스 머튼 1915-1968 만53세, 프란치스코 신부 1949-2023 현재 만74세, 머튼보다 21년 더 살고 있네요.
지금의 관심은 이미 머튼을 완전히 넘어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가 됐지요!
수도공동체 체험만해도 제가 머튼을 훨씬 능가했고, 머튼 참 문제가 많았던 장상도 참 힘들어 했던 명암明暗 양면을 지닌 분, 그리고 불우했던 분이지요.
물론 불세출의 천재이자 영성가임은 분명하구요.
통과해 가야할 분이지 결코 계속 머물 분은 아닙니다.
영원히 머물 분은 오직 한 분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인 그리스도 예수님뿐이지요!
토마스 머튼은 경탄의 대상은 될지언정 결코 부러움의 대상은 아닙니다.
머튼 책 안본 지 참 오래됐습니다.”
어쨌든 토마스 머튼이나 논문을 쓴 도반의 공통점은 치열한 삶을 살았던 열정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수도형제의 답변입니다.
“로마에서 공부할 때 학생들 공부 엄하게 시키기로 유명했던 교수님 한분이 수업 마지막 시간에 남기신 다음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내 아들아, 이 밖에도 조심해야 할 바가 있다. 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고달프게 한다.’(코헬12,12)”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인 믿는 이들의 삶은 치열해야 하고 날로 가열차야 합니다.
하루하루 절실하고 절박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무려 아주 오래전 26년 전 여기에서 써놨던 “사랑”이란 글을 여전히 공감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살아온 제가 고맙습니다.
물론 당신이 지칭하는바 영원한 연인이자 도반인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래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같은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날로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 1997. 3.
어제 오랜만에 갑작스레 면담고백성사차 방문했던 참으로 열심한 아름다운 자매와의 만남도 생생합니다.
아름다움은 젊음의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에, 치열한 삶에 있습니다.
“빈손으로 와서 미안합니다.”
즉시 강복후 안아 드리며, “자매님 자체가 제게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답하고 나니 얼마나 통쾌하던지요!
이또한 선교 열정, 선교 사랑의 표현일 것입니다.
아마 하느님 마음도 똑같을 것입니다.
보속으로는 '말씀 처방전'에 이어 성모성월을 맞이하여 성가 244장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정말 기도하듯 성가 부르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감동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습니다.
참으로 치열한 사랑을 살다가 빈손으로 주님께 갔을 때, 주님은 당신 품에 꼭 안아 드리며, “사랑하는 너야말로 나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다!” 하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수도형제들과의 공동카톡방에 올린 다음 “꽃길”이란 시와 당부도 생각납니다.
제 집무실은 천장암天藏庵의 은수처이자 선교의 장이요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 야전사령부입니다.
“내 집무실 꽃자리 주님이
계시는 곳
천국에 이르는
꽃길
저절로 난
꽃길
샛노란 애기똥풀꽃들 사이
꽃길
주님 친히 마련해 주신 사랑의
꽃길”
- 2023.5.5
“사랑하는 수도형제님들,
제 집무실옆 꽃길 주변의 애기똥풀꽃들 절대로 깎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는 하늘길입니다.
마음 아팠던 형제자매들 면담성사 후 사진 찍어 드리는 힐링의 꽃길입니다.”
이런저런 예화로 서론이 참 길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의 선교여정이, 선교활동이 참 치열합니다.
주님 사랑에서 샘솟는 지칠줄 모르는 참 치열한 삶입니다.
아테네에서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코린토에서 치열한 선교활동을 펼치는 바오로입니다.
관계되는 도반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천막을 만드는 생업과 함께 선교활동에 전념하다 도반들이 늘어나고 여유가 생기자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였고 풍부한 결실을 거둡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입니다.
복음에서 주목할 말마디는 “조금 있으면”으로 무려 7회 나옵니다.
곧 죽음의 슬픔에 이는 부활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인내의 기다림입니다.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은총, 파스카의 축복입니다.
슬픔은 기쁨으로, 불안은 평화로, 절망은 희망으로, 어둠은 빛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니 파스카 주님의 은총입니다.
어찌보면 이들은 영적 삶의 리듬이기도 합니다.
순간의 슬픔이나 불안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이 아니라 항구히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에 전념할 때, 주님의 파스카 은총이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어둠을 빛으로, 불안을 평화로 바꿉니다.
파스카 신비의 은총이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바로 이 거룩한 주님의 파스카 미사은총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알렐루야.”
(마태 28,20)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6,1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런이런 경로로 수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하리라'고 구체적으로 예고하실 때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오늘의 대목에서처럼 빗대어 말씀하셔도 이해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요한 16,18)
정말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지, 직면할 자신이 없어 모르는 척 무지를 선택한 것인지 그들 자신만 알 겁니다만, 사실 꽃길만 걷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라 앞으로 닥쳐올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미리 대면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아, 이대로 계속 가면 좋겠다'고 느낄 때가 있지요.
대개 뭔가 순조롭고 평탄하고 미래의 빛이 보일 때 그렇게 여깁니다.
터무니없이 큰 걸 바라지 않으면서 소소한 만족과 안정감이 일상으로 자리잡은 행복입니다.
그런데 뭔가 그 일상성이 무너질 것 같은 예감이 닥칠 때가 다가옵니다.
인간 삶에서 영원한 건 없으니까요.
"조금 있으면..."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이 그런 불길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곧 닥쳐올 어둠의 시간, 스승을 빼앗기고 목자 잃은 양처럼 흩어져 목적과 의미의 혼란을 겪게 될 두려움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수수께끼같은 이 말씀에서 감지할 수 있으니까요.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길도 여느 인생길처럼 슬픔과 기쁨이, 고통과 평화가, 죽음과 생명이 항상 짝을 이루어 다닌다는 걸 알려주려 하십니다.
짧은 생각으로는 좀 더 좋고 편한 쪽만 계속되면 좋겠건만, 인생은 그걸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조금 인생을 살아 본 제자들은(우리는) 제법 알고 있지요.
코헬렛 저자 역시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코헬 3,4)고 누구나 다 아는 (누구나 다 알지만 자주 잊어버리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요.
오늘 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선교를 이야기합니다.
그동안 겪어온 것처럼 여기서도 바오로는 성공과 실패를 두루 체험하게 됩니다.
서로 도우며 힘이 될 신앙의 동료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를 만났고 또 기다리던 실라스와 티모테오까지 합류하여 온전히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게 되니 더 바랄 나위가 없었을 텐데, 이대로 쭈욱 갈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곧 난관에 부딪히지요.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는"
(사도 18,6)
이들에게서 또 한 번 거부 체험을 당해야 했던 바오로 사도는 옷의 먼지를 털고 선언합니다.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체험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에게로 갑니다."
(사도 18,6)
이 선언은 진정으로 동족의 구원을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며 최선을 다한 이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는 그래도 유일신 사상과 종교적 체험의 뿌리를 공유하는 유다인들에게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 했지만 번번이 난관에 부딪혔던 것이니까요.
그래도 오늘 제1독서의 마무리는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은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방금 겪은 어둠과 절망처럼 보이는 체험이 빛과 희망으로 이어지고 있네요.
과연 예수님 말씀처럼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먼저 근심이 있어야 깨달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먼저 실패가 있어야 성공을 느끼고, 먼저 상실을 체험해야 획득에 감사합니다.
먼저 없어 봐야 작은 것에도 만족하게 되고, 먼저 죽음이 있어야 부활을 압니다.
일상의 삶에서처럼 영성생활에서도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빼앗길 때가 있으면 다시 얻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 충만히 머무르며 진보하고 성장할 때가 있고, 주님이 안 계신 듯 공허하고 메마를 때가 있지요.
대부분의 고통의 순간이 그렇듯, 영적 메마름이 오면 언제 좋았는지 언제 주님을 누리며 행복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영혼은 슬픔에 빠져버립니다만, 그럴 때는 "조금 있으면"과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견디어야 합니다.
꿋꿋하게 나아가다보면 살짝 가리워졌던 은총이 다시 비칠 때가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조금 있으면"과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씀에는, 일상 삶과 영성생활에서 주님의 현존과 부재의 리듬을 잘 타라는 예수님의 자상한 예고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믿고 갑시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갈릴래아 호숫가에 새롭게 조성된 성지가 있습니다.
기존의 성지는 가파르나움을 중심으로 있었습니다.
‘회당, 베드로의 집터, 참된 행복 성당, 오병이어 성당, 베드로 수위권 성당’이 가파르나움을 중심으로 있었습니다.
멕시코에서 온 사제가 성지순례를 왔다가 호수 반대편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텅 빈 공터가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그곳에 순례자들을 위한 피정의 집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이름은 ‘미그달’이었습니다.
바로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고향 근처였습니다.
피정의 집을 만들기 위해서 공사를 하던 중에 가파르나움에 있던 회당보다 더 오래된 회당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전에 있었던 어부들의 마을이 발견되었습니다.
교회의 관심과 이스라엘 정부의 도움으로 피정의 집보다 먼저 성당이 생겼습니다.
성당의 이름은 ‘더 깊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하였던 베드로 사도에게 ‘더 깊이’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고,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호수 반대편의 성지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었던 곳이라면 새롭게 조성된 ‘막달레나’ 성지는 피정할 수 있도록 계획된 성지였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뒤로한 제대는 2000년 전에 있었던 배의 모양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그 배를 축성하였다고 합니다.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면서 배를 보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깊이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배는 선교의 상징입니다.
성당 안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을 소재로 한 벽화가 있었고, 소성당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호수에 빠진 베드로 사도를 구해 주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고, 일곱 마귀가 들린 막달라 여자를 치유해 주시는 벽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하에는 하혈하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이 워낙 생생하게 묘사되어서 예수님께서 지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것 같았습니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공간에는 기둥이 있었습니다.
그 기둥에는 여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수산나, 마르타, 막달레나, 살로메, 클레오패, 마리아’는 그렇게 예수님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 여인들이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조성된 ‘막달레나’ 성지를 보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리니 너희 마음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로마는 막달레나에 있던 도시를 파괴했습니다.
그곳의 주민들도 로마에 대항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파괴된 마을은 2000년이 지난 지금 한 사제의 ‘꿈’에 의해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잡풀 밖에 없었던 텅 빈 공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 사도의 손을 잡아 주시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일곱 마귀를 쫓아내시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여인들과 대화하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더 깊이’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은 ‘더 깊이’ 그물을 던지는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제 책상 위에는 얇은 나무 막대기가 많습니다.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한 50개 이상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회초리? 저 그렇게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젓가락? 이 역시 아닙니다.
환경보호를 위해서도 나무젓가락은 되도록 사용하지 말아야지요.
정답은 연필입니다.
한때 연필의 필기감이 좋아서 모든 글을 연필로 썼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번거로웠습니다.
흑연이 번져서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때도 있었고, 특히 연필 깎는 수고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필기감도 좋고 글씨도 잘 번지지 않는(물론 물이 묻으면 심하게 번지는 단점이 있지만) 만년필을 사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현재 연필이 제 역할을 못 합니다.
그래서 현재 연필은 필기도구라기보다 그냥 얇은 나무 막대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연필의 의미가 사라진 것입니다.
의미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관심을 두고 사용해야 합니다.
책을 사서 책장에만 꽂혀있다면 어떨까요?
그냥 종이 뭉치일 뿐입니다.
목걸이, 귀걸이가 서랍 깊숙이만 있다면 그냥 쇠조각일 따름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의미’ 없는 만남일 때에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시간 낭비야.’
자기의 관심이 의미를 만듭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떤가요?
큰 의미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분이십니까?
혹시 관심이 없어서 주님과 관계되는 모든 것이 시간 낭비인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주님께 대한 나의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합니다.
조금 더 알려고 하고, 조금 더 기도하면서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나 귀한 분으로,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의미’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겪을 고난과 부활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이 말씀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직 겪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기에 그만큼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이후에 울며 애통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부활 사건을 통해 이루어질 기쁨이었습니다.
이 기쁨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이 멈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관심이 의미를 만드는 것처럼, 주님께 대한 관심으로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했던 사도를 우리는 독서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삶의 유일한 의미로 복음을 받아들인 뒤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 삶의 유일한 의미가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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