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에서 일어난 일은 운동장에서 풀어야 한다.”
3월 A대표팀 임시 사령탑을 맡은 황선홍 감독은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C조 3, 4차전에 나설 대표팀 명단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 태국과의 2연전은 운동장에서의 해법을 모두 보여준 경기들이었다.
C조 3차전 / 대한민국 1-1 태국(3월 21일) @서울월드컵경기장
경기 분석을 위해 현장을 찾았다. 오랜만에 국내에서 열리는 A매치여서인지 팬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킥오프 세 시간 전부터 경기장으로 몰려든 사람들과 차량들을 보면서 열기를 실감했다. 과거에 비해 20대 여성 팬과 커플 팬이 눈에 띄게 늘었다. 축구장이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장소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 이날 경기장에입장한 관중수는 64,912명이었다. 축구인의 한 사람으로, 2023 아시안컵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기력과 성적으로 실망한 팬들에게 속죄하는 경기가 되길 바랐다.
경기가 시작되자 태국이 ‘팀’으로 준비된 모습을 보였다. 적극적인 압박과 속공으로 경기를 주도했다. 한국은 전반 8분 빌드업 과정에서 실책성 플레이를 했다. 아시안컵에서도 빌드업 과정에서 실점을 허용하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이런 약점을 태국이 잘 분석한 느낌이었다. 조현우의 선방 덕에 실점 위기를 넘겼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태국은 분석을 통해 어떻게 기회를 만들 것인지까지 약속한 움직임을 보였다.
주민규에 대한 기대 혹은 우려
태국의 압박은 퍽 인상적이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후 경기는 한국이 점유율을 높여가며 기회를 만드는 흐름이었다. 태국 진영 깊은 곳까지 볼을 운반하며 찬스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언급할 만한 선수는 스트라이커 주민규였다. 주민규는 전반 19분 황인범의 슈팅 이후 세컨드 볼을 잡아 좋은 찬스를 만들었고, 36분경에는 홀드업 플레이로 2선에서 들어오는 공격수에게 여러 차례 찬스를 만들어 줬다. 풍부한 경험을 쌓은 선수인만큼 노련한 위치 선정과 연계 플레이로 좋은 인상을 남겼다. 주민규가 왜 이 팀에 선발되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다만 태국 원정까지 2경기를 소화한 움직임을 종합해 보면 조금 아쉬운 점도 있다. 세계적으로는 투톱보다 원톱을 선호하는 추세이고, 원톱 자원을 활용하는 팀에서는 스트라이커에게 홀드업 플레이만 기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와!’ 하는 감탄사를 자아내는 순간이나 파괴력이 있어야 한다. 현역 시절 황선홍이 그랬고, 그 계보를 잇는 박주영이 그러했다. 조규성도 지난 2022 카타르월드컵에서 그런 장면을 연출한 스트라이커다.
주민규 역시 꾸준히 대표팀에 합류하는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대표팀의 템포와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예컨대 방콕 원정 경기에서 손흥민이 측면을 연 순간, 가운데로 따라가는 선수가 없었다. 결정적인 기회를 손쉽게 날리는 경우다. 물론 이런 아쉬움은 선수 본인이 더 잘 느낀다. 또 다른 성장을 위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알고도 못 막는’ 한국의 왼쪽 라인
공격에서 또 하나 눈에 띈 점은 왼쪽 하프 스페이스 공략이다. 주로 손흥민이나 황희찬을 활용하는 공격 루트라고 할 수 있는데, 전반 42분 이재성의 컷백에 이은 손흥민의 침투로 선제골을 만들어냈다. 아시안컵에서도 왼쪽 하프 스페이스 깊은 지역에서 득점과 어시스트가 많이 나왔다.
왼쪽 하프 스페이스를 활용한 한국의 공격은 소위 ‘알고도 막을 수 없는’ 파괴력을 갖고 있다. 볼이 이 루트를 거칠 때 볼에 관여하는 풀백, 윙어, 미드필더 사이의 합이 잘 맞는다. 이 지역으로 침투하는 선수가 있으면 거의 예외 없이 볼이 들어간다. 공간으로 들어가는 선수와 밖에 있는 선수들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일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때 패스가 잘릴 수도 있지만, 패스에 성공할 경우 득점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진다. 선제골 장면이 정확히 그랬다.
주장 완장을 차고 해결사 역할을 해주는 손흥민은 말할 것도 없고, 이재성의 부지런한 움직임도 칭찬하고 싶다. 이재성이 뒤에서부터 언더랩으로 공간을 침투하는 과정을 보면 정말 지능적인 선수라는 생각이 든다. 볼의 루트를 읽고, 그다음에 어디로 향할지 예측하며 움직이는 공간 파악 능력이 탁월하다. 이재성의 경기 운영 능력은 대체로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낸다. 지도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선수다.
선제골 이후 한국은 두 차례 좋은 찬스를 만들었다. 하지만 모두 추가골로 이어가지 못했다. 전반 추가시간 왼쪽에서 컷백 크로스에 이어 정우영에게 기회가 났지만 무산됐고, 후반 7분 다시 정우영이 강력한 슈팅을 시도했지만 크로스바를 때렸다. 결정적인 기회들을 살렸다면 후반 경기 운영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불운했던 수비라인… 반복된 실점 패턴
추가 득점 기회를 날린 아쉬움은 결국 실점에 대한 불안과 부담으로 돌아왔다. 태국은 ‘팀’으로 압박하고 역습하는 조직력을 유지했는데, 이 때문에 한국의 수비라인이 순간순간 무너졌다. 수비라인이 회복되는 시간도 오래 걸렸다. 불안감이 누적되는가 싶더니 후반 16분 동점골을 허용했다. 페널티박스 오른쪽 외곽에서 태국이 낮고 빠른 크로스를 시도했고, 반대편에서 번개같이 침투한 공격수 수파낫이 방향만 바꾸는 슈팅으로 한국의 골망을 흔들었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실점 장면은 기술이나 체력의 문제라기 보다 심리적인 문제라고 본다. 내가 수비수 출신이기 때문일까? 무언가에 눌린 듯한 압박감이 더 잘 느껴졌다.
한국의 수비라인은 지난 아시안컵에서부터 비슷한 패턴으로 실점하고 있다. 상대의 역습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다. 좀 더 쪼개서 보면, 라인을 올릴 때 수비형 미드필더는 큰 박스와 하프라인 중간에 있고 두 명의 센터백만 최종 라인에 머무는 형태가 된다. 뒷공간과 좌우 측면이 다 열리는 것이다. 이때 수비수들은 심리 상태에 따라 순간적으로 경직될 수도 있다. 의식의 흐름대로 그들의 심리를 더듬어 보면 ‘아시안컵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니 태국전에서는 잘해야 해-실수는 물론 골도 먹으면 안돼- 그런데 이 시간대에는 계속 실점이 나왔지, 이거 불안해’ 정도가 될 것이다.
비슷한 시간대에 실점이 반복된다면, 그 패턴을 깨트릴 필요가 있다. 프로 팀에서도 이런 흐름이 이어지는 경우 수비수끼리 모여 의지를 다진다. ‘이번 경기에서는 비기더라도 무실점으로 가자’라고 의식적으로 힘을 모으는 것이다. 수비라인에서 발생하는 작은 균열이 불안을 만들고, 불안이 쌓이면 승리와 멀어지기 때문이다.
역시나 태국은 동점골 이후 수비를 강화했다. 한국은 안방에서 계속 좋은 찬스를 만들며 상대의 골문을 두드렸지만 추가 득점으로 완성하지 못했다. 경기 템포도 많이 떨어지는 흐름이었다. 1-1로 마무리하기에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 경기였다.
막힌 혈을 뚫는 패스와 완벽한 마무리
C조 4차전 / 태국 0-3 대한민국(3월 26일) @라자망갈라스타디움
태국은 한국과의 3차전에서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았다. 닷새만에 홈에서 열린 4차전에서 그다지 수비적인 구성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럼에도 팀으로 조직화된 수비는 견고했다. 라인을 아주 내려서 만드는 수비가 아니라 미드필드에서 블록을 형성하는 4-3-3 형태였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우리 공격수들이 노릴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전반 12분 손흥민이 아주 좋은 찬스를 만들었다. 황인범이 태국 수비 배후를 노리는 침투 패스를 넣어줬고 손흥민이 공간으로 침투했다. 태국 수비진의 전환 속도가 빨라 슈팅이 막혔지만, 정확하고 빠른 공격 속도로 수비벽을 뚫는 움직임이 좋았다. 잘 조직된 수비는 이런 방식으로 뚫어야 한다.
전반 18분 선취골 장면도 비슷했다. ‘포켓존’이라고 칭하는 수비와 미드필드 사이에서 이강인이 볼을 받아 콘트롤한 후 전방으로 키패스를 보냈다. 태국의 수비벽을 뚫는 패스 한 방에 조규성이 슈팅을 이어갔고, 동시에 문전으로 쇄도한 이재성의 발을 거쳐 득점이 완성됐다. 아주 빠르고 정확한 공격 장면이었다.
이렇게 집중력이 유지되는 장면에서 우리 팀도 정신적으로 잘 준비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방에서 아쉬운 결과를 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를 챙기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두 번째 골, 포켓존 활용의 정석
비교적 이른 시간 선제골에 성공하면서 주도권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결국 속도 싸움이다. 아시아 무대에서 한국이 상대하는 팀은 대부분 밀집 수비를 펼친다. 이때 수비 조직을 무너트릴 수 있는 키패스나 ‘한 방’, 또는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는 카운터 어택의 속도로 득점을 준비해야 한다.
후반 9분에 바로 그런 방식으로 두 번째 골을 만들었다. 이강인의 패스와 손흥민의 침투 플레이가 빛났다. 태국이 전략적으로 또 전술적으로 한국의 주요 선수들을 잘 방어했지만, 이 장면에서 양 팀 선수들의 기량 차이가 드러났다. 손흥민이 보여준 한 방의 위력이 대단했다.
동시에 핵심 지역인 포켓존에서 볼을 받는 작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 시사점을 준 장면이었다. 요즘은 거의 모든 팀들이 수비를 견고하게 다진다. 그 수비 조직을 깨기 위해서는 포켓존에 들어가는 선수가 볼을 어떻게 관리하고 뿌릴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즉, 상대 미드필드 라인을 붕괴시키면서 한번에 최종 수비선과 마주할 수 있도록 공격 전개를 해야 한다. 태국전에서 결정적인 장면이 나온 흐름을 보면 보면 패스(수비->미드필드) 후 콘트롤, 그 자리에서 다시 패스(미드필드->상대 배후) 후 콘트롤 그리고 슈팅으로 이어지는 식이었다. 빠르고 정확하게 연결됐다. 대표팀의 템포 수준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사실 이강인과 손흥민의 마지막 움직임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에는 이재성과 황인범의 공이 매우 컸다. 이들은 태국 수비라인의 위치를 파악하고 역공을 주도한 결정적 움직임에 거의 예외 없이 관여했다. 기본적으로 살림꾼 스타일인데다 공격적인 센스도 아주 좋은 선수들이다. 볼이 있는 곳이면 항상 이 선수들이 있었다. 볼이 없는 상황에서의 움직임도 좋았다.
2-0으로 승기를 잡은 이후에는 사실상 일방적인 페이스였다. 축구는 골에 따라 경기 운영이 달라진다. 심리적 우위를 점하느냐 쫓아가느냐의 차이다. 경기를 리드할 때와 리드를 당할 때 체력적으로 느끼는 부담감은 큰 차이를 보인다.
후반 30분 이후 적절한 수비 라인을 구축한 것도 효과적이었다. 상대방을 우리 지역으로 끌어들이고 카운터 어택을 노리는 전략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체력을 비축하면서 상대 뒷공간을 노리는 운영으로 추가 득점까지 만들 수 있었다. 후반 37분 세 번째 골이 나왔다. 코너킥 상황에서 올라온 볼을 김민재가 머리로 떨구고, 박진섭이 슈팅으로 마무리했다. 피지컬과 기술에서 한국이 월등했다.
총평: 한숨은 돌렸지만
태국과의 2연전을 통해 양팀의 수준 차를 확인했다. 태국 감독도 인정한 사실이다. 감독의 전술과 전략으로 어느 정도 한국을 위협하는 경기력을 보였지만, 거기까지였다. 한편으로 두 팀의 감독들이 각각 홈과 어웨이 전술을 바꿨더라면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해 본다. 두 감독 모두 홈팬들 앞에서 시원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4차전에서 3-0 스코어로 승리를 챙겼고, 아시안컵 이후 갈등이 드러난 이강인과 손흥민도 좋은 호흡을 보이며 골을 합작했다. 3차전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된 불안한 수비와 실점 패턴 역시 4차전의 무실점으로 보완됐다. 임시 감독 체제에서 ‘원팀’으로 뭉쳐 낸 결과들이라는 점에서 축구팬들에게 적지 않은 위안이 되었다. 승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경기들이었다. 운동장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모두 해결한 셈이다.
4차전 승리로 한국 축구는 고비를 넘겼다. 차기 A대표팀 감독을 선임하기까지 한숨 돌릴 만한 시간을 벌어준 결과였다. 이제 한국 축구에 필요한 캐릭터는 확실한 경기 모델을 구축할 수 있는 ‘축구를 잘 아는’ 지도자다. 3월의 두 경기를 통해 새삼 우리 선수들이 얼마나 좋은 자원들인지를 확인했다. 이 선수들을 잘 조합해 최상의 경기라는 상품으로 내놓는 것이 감독의 몫이다. 감독의 리더십과 권위는 결국 철학과 경기력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황선홍 임시 감독 체제로 위기를 슬기롭게 넘긴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 이 글은 KFA 기술리포트&매거진 ONSIDE 4월호 ‘ANALYSIS’ 코너에 실린 기사입니다.
분석=최성환(KFA 지도자강사)
정리=배진경
사진=대한축구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