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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웅의 푸른나무 스크랩 여류비행사 박경원과 동부교육지원청의 히말라야시더
이팝나무 추천 0 조회 68 14.02.03 11:2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대구 동부교육지원청 정문 입구의 히말리야시더

 동부교육지원청 청사

 최초로 공개되는 박경원의 학적부

 영화 '청연'에서 박경원으로 분장한 배우 장진영

 영화 청연의 한 장면

영화 청연의 포스터

여류비행사 박경원과 동부교육지원청의 히말라야시더

 

 

 

 

일제강점기를 살아 온 선각자들의 다 그렇듯 박경원도 힘들게 살았던 분이다. 온갖 역경과 관습을 극복하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여류 비행사가 되었지만 잊혀 진 것은 차치하고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 하고 있다.

더 가슴을 저미게 하는 것은 사후(死後) 그녀는 태어나고 꿈을 키웠던 대구보다 일본에서 더 사랑받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의 생애에 관해서는 <대구의 향기, 1982, 대구직할시>, <여성100년, 2000, 최미화> <학적부>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생생한 자료는 여성 사학의 명문 신명학교에서 많이 입수할 수 있었다. 더불어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윤종찬 감독의 영화 <청연(靑燕)>을 통해서도 잘 알려 졌다. 애기(愛機) ‘청연’은 대구의 하늘을 날고 있는 제비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그녀는 1897년 대구부 덕산정 42에서 아버지 목공(木工) 박덕흥(朴德興)과 어머니 장칠남(張七南)사이에 태어났다.

복명(複明)초등학교 전신인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를 졸업하고 1916년 신명학교에 들어가 얼마 후 가정형편으로 중퇴했다.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요꼬하마기예여학교를 1920년까지 다녔다. 그 후 귀국한 그녀는 자혜의원(현, 경대병원) 간호사 양성소에 들어갔고 1924년 5월까지 약 2년 동안 근무하며 돈을 벌었다. 친구들에게 ‘비행사가 되기 위해 돈을 모은다.’고 털어 놓았다고 한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1924년 9월 다치카와(立川)비행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한 시간 비행술을 익히는데 120원(당시 쌀 24가마 값, 현 4백만 원 정도)이나 들어 동료들의 비행복을 빨아주는 등 아르바이트를 했으나 턱 없이 모자랐다.

마침내 구한말 내무대신을 지냈던 이용식(李容植)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이용식은 일제강점기 자작(子爵)의 칭호를 받을 만큼 친일활동을 했으나 나중에 독립운동을 지원하여 작위를 빼앗긴 분이다.

그녀가 일본에 알려진 것은 1927년 3등조종사, 이듬해 2등조종사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이후라고 한다. 일본의 대다수 여성들도 꿈도 꾸지 못할 때 ‘조선 여류 조인(鳥人, 즉 인간 새)의 첫 탄생’이라고 신문과 잡지에 대서특필되었기 때문이다.

1932년, 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것을 기념하는 행사의 하나로 나고야신문사가 주최하는 일본-만주 간 축하비행이 있었으나 1등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됐다.

낙심한 그녀를 위해 동창들이 육군성을 찾아가 낡은 비행기 한 대를 불하 받으니 바로 푸른 제비라는 ‘청연호(靑燕號)’였다.

1933년 8월 7일 10시 30분 청연호는 하네다공항을 이륙했다. 가장 난코스로 알려진 하꼬네산을 통과했다는 제3신을 받은 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 후 11시 경 한 소년이 이상한 물체가 곤두박질해 내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신고 받은 경찰과 동료들이 달려갔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녀의 나이 36세 아직 미혼이었다.

고향 대구하늘을 날고 싶은 그녀의 간절한 소망도 사라지고 말았다.

장례(葬禮)는 다치카와비행학교장으로 치러졌고 화장되어 고국으로 돌아올 때 동경역에는 주불 대리 대사와 일본 항공국 관계관 등 많은 저명인사들이 전송했다고 한다.

고국에 돌아 온 유해는 의사였던 남동생 박상훈에 의해 팔공산 동화사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비가 세 번째 세워졌다고 한다. 사고 다음해 조난(遭難)한 곳에 세운 ‘조인박경원영적비(鳥人朴敬元靈跡碑)’가 풍화되자 새로 세우고, 2002년 시즈오카현(靜岡縣) 아따마시(熱海市)의 한국정원에 세워졌다.

이 세 번째 행사에는 태양회(太陽會)가 주관하여 모교 신명여고 동창회와 방계 친족이 참석했으며 대구시장도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자랐고 조인(鳥人)으로 꿈을 꾸었던 대구의 어느 곳에도 그녀를 기리는 표석하나 없다. 명신여학교 후신인 옛 복명초등학교(현, 동부교육지원청)의 정문 우측에 있는 한 그루 히말라야시더로 표석을 대신해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인 그녀의 영혼을 위로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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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2.10 22:31

    첫댓글 대명동의 경상공고에 있는 부활호는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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