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履斗) 김선호(金善浩·51)씨는 자미두수(紫微斗数) 전문가다. 전남 여수에서 만난 김씨는 “자미두수는 별자리를 이용한 운명학”이라며 “동양의 점성술이라고 할 수 있다. ‘자미’라는 말은 북극성을 의미하는 자미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월간조선 2008년 11월호 ‘김정일 언제까지 사나’라는 기사에서 당시 북한 최고지도자이던 “김정일이 2011년 세상을 떠난다”고 단언한 바 있다. 그의 예측은 그대로 맞았다. 당시 월간조선 기사를 보자. “김정일은 태양태음(太陽太陰)의 삼방에서 문창화기(文昌化忌)와 복덕궁(福德宮)을 보고 있는 운입니다. 복덕궁은 수명을 관장하는 별로, 여기에 천형(天刑)이라는 질병성(疾病星)이 함께 있어요. 이것이 문창화기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문창은 원래 과명(科名)으로, 명예를 관장하는 별이지만, 복덕궁에서 움직이면 상례(喪禮)를 주도합니다. 즉 죽는다는 말이지요. 게다가 묘유궁(卯酉宮)의 재복선(財福線)이 움직이면서 양명(養命)의 근원이 되는 녹존(祿存)이 깨지게 됩니다. 이는 명(命)을 끊는 결정적 요소가 되지요. 그리고 김정일이 70세가 되는 신묘년(辛卯年·2011년)에는 조객(弔客)이라는 별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해에 사망할 것으로 보입니다.” 김씨는 ‘육효 증산복역’ ‘자미두수 입문’ ‘왕초보 자미두수’란 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언론에 얼굴이 공개되는 게 싫다”며 정면 촬영을 거절했다. “자미두수는 10세기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에서 송(宋) 초기, 진희이(陳希夷)라는 도사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기법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전해지다가 명(明)나라 때 진희이의 후손인 진도(陳道)가 자미두수전집(紫微斗数全集)을 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합니다. 오늘날엔 대만과 홍콩에서 관련 연구가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선 자미두수를 공부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김씨는 “사주는 태어난 시(時)를 알지 못해도 어느 정도 볼 수 있지만, 자미두수는 태어난 시각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볼 수 없다”라며 “김정일의 정확한 생년월일시를 알지 못해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당시 김정일의 것으로 추정되는 생년월일시를 세 개 받았습니다. 이 세 가지를 그동안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김정일의 스타일이나 삶의 궤적과 비교해 봤습니다. 그 결과 ‘양력 1941년 2월 16일 오후 2시30분’이 그가 태어난 때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김정일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강한 카리스마와 부드러움을 함께 갖고 있고, 그래서 변덕스럽고 예측하기 어려우며, 심리적 기복이 심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3~73세에 수명을 관장하는 자리에 기(忌)가 나타나는데, 이 기운이 가장 강해지는 것이 2011년 신묘년(辛卯年)입니다. 그해에 공교롭게도 생명과 재물의 근원이 되는 녹존(祿存)이 깨집니다. 숨을 거두는 것이지요.” 전남 여수가 고향인 김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사람의 운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가정형편이 어려웠습니다. 부친이 8살 때,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한꺼번에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늘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셨죠. 원양어업을 하러 해외로 나가곤 했습니다. 집안에 계신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제 청소년기는 사실상 아버지가 부재(不在)한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어머니는 자애로운 분이지만 배운 것은 별로 없는 분이셨죠. 어렸을 때부터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운명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김씨가 ‘사람의 운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또 있다. 건강 문제다. “중학교 때 철봉을 하다 떨어진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그 이후부터 허리가 조금씩 휘기 시작하더니 결국 척추만곡증(脊椎灣曲症)에 걸렸습니다. 물리치료도 받아보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했어요. 환경이 불우하다 보니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게 됐습니다. 이때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게 대부분 운명과 관련된 책들이었습니다.” 집안 환경 때문에 실업계 고등학교(여수공고)에 진학한 김씨는 “대학 입시는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했다. “자포자기 비슷한 심정이었어요. 제가 그림은 좀 그리는 편이었습니다. 만화가가 꿈이었는데…. 그래서 공고에 진학해 설계를 전공했어요. 그게 그나마 미술 비슷한 거였으니까요.” “허리 때문에 군대도 면제받았다”는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인쇄소에 취직해 편집디자인 관련 업무를 맡았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생활정보지 시장이 괜찮을 것 같아서 정보지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게 잘 안돼서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김씨는 “이후 생계는 아내한테 맡긴 채 한동안 책만 읽었다”고 했다. “그러다 서울에 있는 선생을 만나 자미두수를 배웠습니다. 제가 운명에 관심이 많다 보니 사주팔자 보는 것은 어느 정도 할 줄 알았거든요. 거기에 자미두수를 더하니 봐달라는 사람이 자꾸 생기고…. 그래서 2007년 여수에서 (철학관) 개업을 했어요.” 김씨는 수행자가 아니다. 본인 스스로도 “수행을 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나 자신을 보면 신체장애의 명(命)과 술사(術師)의 명(命)을 가진 것으로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창과 방패를 어떻게 같이 팔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운명을 본다는 것은 비가 온다고 알려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비가 이슬비인지, 소나기인지, 아니면 태풍인지, 폭우인지를 알려줄 뿐입니다. 비를 피해서 갈 것이냐, 아니면 그냥 맞고 갈 것이냐 하는 것은 본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죠. 그 운명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것은…, 저는 알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