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자의 축복
롬5:1-6
제가 부목사로 섬기던 교회에 100세셨던 여자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99세 생신에 많은 분들이 축하를 드렸습니다. 그중 한분이 생신축하로“백수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축하에 99장로님께서 화가 나셔서 노발대발하셨다고 합니다. 백수란 “100살 사세요”란 말입니다. 즉 장수하시라는 말인데, 장로님의 입장에서는“나 보고, 일년만 살고 죽으란 말이냐?"는 것으로 들린 것이죠. 같은 말도 따라,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로마서 5:1-6을 읽었습니다. 같은 말씀을 함께 읽었고, 듣고 있지만, 각자에게 들려지는 메시지가 다를 것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첫째, 갈급함의 차이입니다.
갈급하십니까? 정말로 갈급해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어떤 사람이 대충 교회를 다니다가 하나님의 뜻이 궁금했습니다. 대충 다녔지만 말씀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마치 점집에서 패를 찾듯이 성경을 아무데나 펴고 눈에 들어온 구절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폈고 처음 눈에 들어온 구절이 마27:5 말씀이었습니다.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깜짝 놀라면서 이건 아냐, 부정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성경을 아무데나 폈습니다. 이번에는 눅10:37이었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번에도 부정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성경을 다시한번 폈습니다. 요13:27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그는 재수 없다고 소리치며 성경을 내던지며,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그의 모습은 가룟 유다가 제자로서 예수님을 삼년 동안 따라다니다가, 자신의 뜻과 맞지 않다고 은 30에 팔아버렸던 모습과 동일합니다.
목사로서 제가 볼 때에 그에게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갈급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갈급함이 있었다면, 마27:5의 말씀을 보며 재수없다가 아니라, 회개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죄인인지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같은 말씀이라도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는 갈급함의 차이입니다. 갈급하면, 말씀도, 예배, 찬양도 달라질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에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1990년 3월부터 고양군 벽제 재활원이라는 곳에 봉사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벽제 재활원에는 결핵환자들이 3-40명쯤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하나는 농사일을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핵환자들은 호흡에 문제가 있고, 조금만 육체를 움직여도 숨이 가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첫번 방문 때에 20명 가까이 가서 봉사를 했습니다. 두번째 방문 때에는 반으로 줄었고, 얼마 가지 않아서 방문자가 선배와 저만 남았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이분들이 원해서 예배를 드릴 때에, 결핵환자들의 기침과 거친 숨소리, 그로인해 풍기는 냄새가 어린 신학생들에게 공포스럽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봄에 씨를 뿌릴 때에 다니기 시작해서, 11월에 추수 감사예배를 드릴 때까지 매주 한번씩 봉사를 했습니다. 저도 그분들과 예배 드릴 때마다 두려웠습니다. 의학적으로는 공중 전염이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전염에 대한 공포가 사리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예배 드리는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사회에서도 버림받은 그들, 교회들도 거부하는 그들이 모여, 호흡의 문제로 거친 숨소리와 기침 속에서도 찬양하고 눈물로 예배드렸습니다. 마지막 예배가 저희가 가는 평일저녁에 추수감사절 예배였습니다. 고립되고 홀로된 그들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며, 천국을 바라며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며, 눈물 흘리던 그분들의 간절한 모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환경과 건강, 물질적 조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간절함이 필요 없을까요? 간절함이 사라지면, 하나님도 외면하실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이 누구를 위한 말씀일까요? 간절한 자들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두번째, 누구를 위한 말씀인가?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록한 성경입니다. 로마서 16장에는 28명의 교인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가 이들의 이름을 바탕으로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이름을 토대로 분석해 놓은 자료를 보았습니다. 28명 중에 거의 대부분은 로마들이 아니라, 대부분 중동이나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수가 노예들이 사용하는 이름라고 합니다. 결국 로마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노예이거나, 노예에서 해방되었거나, 그들의 선조가 노예였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삶이 어떠했을까요?
강제로 고향에서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달프고 무시당하는 힘겨운 삶이었습니다. 희망 찾기가 힘든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을 향해 바울이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갈급한 심령에 뿌려지는 복음은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희망이 되었고, 지금의 삶을 견디는 능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바로 나를 위한, 말씀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니, 그들만큼 갈급할 이유가 없다고 착각할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 앞에, 질병 앞에, 물질의 문제 앞에, 죽음 앞에 얼마나 무력한 자들입니까?
한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대기업의 높은 자리에 계셨고, 한강 경치 좋은 곳에 넓은 땅과 집을 소유한 재력가셨습니다. 교회에서 큰소리치셨고, 담임목사님께도 할 소리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갑자기 뇌의 질병으로 수술을 받게 되셨습니다. 치료가 끝나고 주일아침에 담임목사님이 장로님을 위해 기도해주셨는데, 그때 어린 아이같아 지더군요. 교만도 사라지고, 거드름도 사라지고. 겸손하고 공동하게 기도받던 모습을 보며, 인간이자랑할 것도 없구, 저렇게 약한 존재였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 간절함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세 번째, 구원받은 자의 축복
구원받으면 하나님과 상관있는 자가 됩니다. 원죄 이전에 에덴 동산에는 불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원죄로 에덴 동산에서 좇겨난 인간은 평생 동안 불안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원죄로 하나님과 갈라졌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내가 상관있는 관계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면 죄인이었지만 용서받아 하나님은 아바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깨닫게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감을 얻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2)
구원받으면, 하나님의 능력 속에 거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주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95%는 마음대로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5%는 당신이 꽉 쥐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5%가 진짜입니다. 시간, 생명, 질병, 미래 등등 그래서 우리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 같아도 하나님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능력이 임합니다.
다음의 단어들은 마음 속에 존재하는 나쁜 생각들입니다.
슬픔 절망 의기소침 우울감 불만 감퇴 불면증 초조 죄책감 건강 염려증 냉담 무기력 식욕상실, 외모나 옷차림에 대한 무관심, 자기 비난, 지연 흥분 동요 애정상실 울음 적의 분노 예민함 불안 공포 근심 적개심 좌절감 자기 비하
안타깝지만 이러한 생각들로부터 자유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탄이 주는 생각들입니다. 이같은 마음과 생각과의 전투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자에게 성령을 허락하십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아멘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으면,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