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믿음과 온전한 믿음(약2:13-26)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야고보서 2장의 17절의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아주 논란이 많이 있어 온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중세의 천주교회가 예수를 믿는 믿음 외에 무언가 공로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공로주의 사상에 반발하면서 로마서의 주제인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이신칭의의 교리에 근거하여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변질되어 가던 기독교회를 원래의 은혜의 종교로 개혁시키는 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의 입장에서는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이 말씀이나 14절에서 그런 행함이 없는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말씀이 그런 이신칭의의 교리와 달리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서, 말하자면 자신이 주도해서 일으킨 종교 개혁에 거침돌이 된다고 생각을 해서 이 야고보서를 정경, 즉 교회가 정식으로 인정하는 성경책으로 인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처럼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혹평을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교회나 다른 나라의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는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의 구절을 근거로 해서, 어떤 사람이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고 해도 삶에서 선행의 실천이 없으면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즉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지옥으로 간다고 하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치기도 했습니다. 또는 구원을 받았다 하더러도 그런 실천이 없고 죄만 지으면 구원에서 탈락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주로 장로교와 같은 교단에서는 예정 교리와 성도의 견인 교리에 의해서 한 번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끝끝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다는 쪽에 서 있고, 감리교나 감리교에서 파생된 구세군과 같은 교단에서는 행함으로 입증되지 않은 믿음은 거짓 믿음이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쪽에 서 있으면서 선행을 대단히 많이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데도 우리 삶에서 선행이 없고 행함이 없다면 우리는 그래도 믿음의 고백이 있으니까 구원을 받을까요. 아니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으니까 그런 죽은 믿음이라는 말은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십니까?
예. 이 문제가 사실은 한 번의 설교를 통해서 다 다룰 수 있는 간단한 주제가 아닙니다. 저 자신이 장로교 계통의 신학을 배웠고 그 입장에 서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삼십 년 이상을 계속 성경을 연구하면서 고민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좀 젊었을 때에는 행함으로 입증되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고 강하게 주장을 했습니다만, 그 이후 오랜 기간 교회 목회를 하면서 여러 교인들을 접하기도 하고 특별히 지적장애인이나 치매 노인들을 접하면서 그런 저의 주장이 좀 설익은 주장이고 성급한 생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 십자가의 옆에 달린 한 강도는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자신을 구원해 주시기를 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로써 그의 구원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는 사형을 당해야 마땅한 악행을 범한 사람으로서 사실상 그의 삶에서는 율법을 지키지도 못했고, 선행이나 의로운 행동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기 직전에 오직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한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으로서, 이 강도의 구원 사건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마음으로 믿고 또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앞서도 제가 지적장애인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의 돌봄이 없으면 정상적인 생활 자체가 어려운 지적 장애인들의 경우 예수님을 믿노라고 입술로 말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지적 장애인들에게 너에게 행함이 있느냐, 너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냐 하고 묻는다면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 자신이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의 경우 자기 이름조차 기억하기가 어려운 그분들에게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도 또 괴기한 주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들이 치매에 걸리기 전까지의 삶에서 선행이 있었는가, 없었는가가 판단 기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 역시 억지에 가까운 논리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적 장애인이나 치매 어르신들의 경우에는 그 분들이 그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행함이고,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는 야고보서에서는 분명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고, 그런 언급을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예수를 믿고 나서 선행의 실천이 없다면 그런 믿음은 가짜 믿음이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이 기록된 원래의 의도를 잘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먼저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했을 때 그 행함이란 무엇을 행함이란 말이며, 또 얼마나 행해야 죽은 믿음의 커트라인을 통과해서 산 믿음이 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 행함이라는 단어의 원래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행함이라는 말이 아홉 번이나 나오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 행함이라는 말을 선행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면서도 선행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단정해 버리는데, 헬라어 원문으로는 이 행함에 해당하는 말이 ‘에르곤’으로서 이 에로곤이라는 말은 우리 한글성경에서는 역사(役事)한다는 말로 자주 번역이 됩니다.
가령 살전1:3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너희에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있음을 안다고 했는데, 거기서 나오는 믿음의 역사라는 말에서 역사라는 말이 오늘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함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헬라어로는 에르곤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역사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예. 그것은 한마디로 움직인다는 말이고, 좀 더 알아들기 쉬운 말로 하자면 작동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역사라든지, 또는 역사하는 믿음이란 말은 움직이는 믿음, 작동하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작동한다는 말 아시지요?
이 작동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손목시계를 예로 들어봅시다. 누가 나에게 아주 값비싸 보이는 손목시계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계를 손목에 차려다 보니 시계가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즉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손목시계는 죽은 시계입니까? 산 시계입니까?
말하자면 전혀 못 쓰는 시계입니까, 그래도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시계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 어떤 경우에는 그 손목시계가 완전히 고장이 난 시계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작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 시계 자체는 고장이 나지는 않았는데, 시계에 들어가 있는 밧데리가 방전되어서 움직이지 않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이 두 경우 모두 시계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계에 밧데리를 새로 갈아 넣어서 시계가 돌아가면 그 시계는 살아있는 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밧데리를 새 것으로 갈아 넣어도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시계는 고장난 시계, 즉 죽은 시계인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말은 믿음은 있다고 하는데 그 믿음이 작동이 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예를 든 손목시계의 경우 시계가 작동을 하지 않는 경우 그 시계는 고장난 시계일 수도 있고 밧데리만 넣으면 다시 작동을 해서 사용할 수 있는 시계일 수도 있는 것처럼, 오늘 야보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에서 죽은 믿음이라는 말 자체를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이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에게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대로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행함이 없을 때, 즉 믿음의 작동이 없을 때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원래부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인지, 아니면 이미 거듭난 것은 사실이지만 다만 믿음이 작동하지 않고 있는 상태인지는 우리는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그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 어떤 사람의 믿음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믿음이라는 말에서 죽었다는 말도 구원받은 믿음인가 구원받지 못한 믿음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죽은 믿음이라고 할 때 그 죽었다는 말도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말로 보면 좀 더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손목시계가 작동을 하지 않으면 일단은 그 시계는 죽은 시계, 즉 고장이 나서 망가진 시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새 밧데리를 넣으면 작동이 되는 정상적인 시계가 있듯이, 비록 지금 현재로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만 보면 죽어 있는 상태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영적으로 죽은 것인지 아니면 사실은 영적인 생명은 있는데 다만 작동하지 않고 있는 상태이기에 죽은 것처럼 보이는지는 하나님이 아시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처럼 죽은 믿음의 사람, 즉 믿음이 작동하지 않는 사람을 대할 때 그 입술로 예수님을 믿느라고 고백을 하면 일단은 그 사람을 거듭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옳은 자세입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어떤 계기에 변화가 일어나서 마치 밧네리를 갈아 낀 속목시계가 잘 돌아가듯이 작동하는 믿음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야고보서에서는 왜 이렇게 논란거리가 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말씀을 했겠습니까? 예. 그것은 그 당시 교회 안에 많은 교인들의 믿음이 작동이 멈춘 시계와 같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가 언제 기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들이 있습니다만, 대략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비롯한 교리 서신들을 기록하고 그 서신들이 그 당시 여러 지역의 교회에 두루 전파된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듯이 사도 바울의 가장 대표적인 서신이 로마서인데, 그 로마서의 핵심 주제가 이신칭의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교리를 잘 설명한 서신이 로마서인데, 이런 사도 바울의 서신이 초대 교회에 두루 퍼진 이후에 여러 교회들 내에서는 “: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거니까, 그렇게 구원을 받은 후에는 어떻게 살아도 상관이 없겠구나” 하는 요즘말로 하자면 구원파 사람들처럼 생각하는 교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안이한 신앙 자세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불신자들과 구별된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과 닮은 모습들이 나타나는 가운데 그런 잘못된 신앙적 상활을 지적하고 바로 잡기 위해서 야고보가 이 서신을 기록했던 것이 아니겠나 추정을 하게 됩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에게는 교회의 교인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활이나 인격에 변화가 없는 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없고, 오히려 세상을 닮아가는 모습이 자꾸 보이게 되면, 설교를 하는 데 있어서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과 같은 기본적인 교리를 강조하던 데에서 “삶에서 열매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고 실천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더 많은 설교를 하게 되는 경향이 있게 되는데, 야고보서의 기록 배경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오늘 이 설교에서 가장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늘 이 본문에서 죽은 믿음이라는 말이 곧 구원을 받지 못하는 믿음, 즉 저짓 믿음이라는 말로 이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의 3장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고 하셨는데(계3:1), 그 말씀에서 네가 죽은 자라고 하신 말씀이 곧 너희는 구원도 받지 못한 자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너희들이 나를 믿노라고 하지만 전혀 믿는 자다운 열매가 없으니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로써 회개를 촉구한 말씀이듯이,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도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이처럼 설명을 하면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즉 약 2:14에 보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한 말씀을 근거로 거기 보면 분명히 믿음만 있고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반박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사용된 구원이라는 말도 영원한 구원, 말하자면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물론 우리가 이 땅에서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는 경우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이 구원이라는 말은 오늘 현재의 삶에서 발생한 위기나 어려움, 또는 마귀의 시험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출되는 것에도 구원이라는 말이 사용이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거기시 ‘악에서 구하여 달라’는 말이 말하자면 오늘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장차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그런 구원도 받아야 하지만, 오늘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과 시험과 곤경에서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어떤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예. 그 믿음은 입술로만 “주님, 믿습니다” 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움직이는 믿음, 작동하는 믿음, 역사하는 믿음, 그런 믿음이 있어야만 우리는 여러 가지 곤경과 시험들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런 작동하는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 예. 시험에 들 수밖에 없고, 곤경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없어서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 보면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고 한 말도 그런 의미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믿노라고 말은 하지만 작동하는 믿음, 역사하는 믿음이 없으면 결국은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유익이 없고, 이웃들에게도 유익을 줄 수 없으며, 하나님께도 유익이 없는 삶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오늘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야고보서 2장의 본문을 영원한 구원에 대한 교리적 진술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우리의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지 못하거나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은 현재 우리의 믿음이 죽은 상태와 같은 믿음, 즉 움직이지 않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하는 실제적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이해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기독교인인 “뭐 오늘 살면서는 구원을 받지 않아도 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하고 말한다면 그는 극히 게으르고 불충성한 사람으로서, 어쩌면 그처럼 말하는 사람은 정말로 영원한 구원에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런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은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예. 야고보서에서는 그것을 온전케 된 믿음이라고 합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2:22)
믿음의 전혀 작동을 하지 않아서 정말로 영적으로 죽은 것인지, 아니면 영적인 생명은 있는데 전혀 움직임이 없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운 신자들이 많은 가운데, 나 스스로가 보기에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보시기에 작동하는 믿음, 계속 자라는 믿음, 그 결과 성숙해진 믿음을 가리켜서 성경은 온전한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온전한 믿음에 대해서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믿음을 씨앗에 비유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마치 한 알의 씨앗과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1:18에서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한 말씀이 이런 씨앗의 비유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전에 믿음이 없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살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이시며, 더 나아가서 우리의 아버지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구원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말씀, 즉 복음을 듣고서 믿을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는 것인데,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우리를 거듭나게 한 그 믿음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신 한 알의 씨앗과 같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싸앗을 땅에 심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 일반적인 경우에는 절절한 온도와 습기가 주어지면 움이 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핍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씨앗의 발아와 성장의 과정은 신비로운 것으로서,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서 우리 마음에 심어두신 믿음의 씨는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자랄 때 움직이는 모습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고속촬영을 해 보면 땅에 심겨진 씨앗이 발아하서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는 중에서 계속 힘차게 움직이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세상 것들을 좋아했는데, 그런 것들이 싫어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좋아하게 되고, 세상 친구들 만나는 것보다 교회에서 성도들과 예배하며 교제하는 것을 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어려움이 생기면 사람들을 의지했는데, 이제 먼저 기도부터 하게 됩니다.
또 이전에는 내 주변에 누가 어려움을 당하고 궁핍해도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자꾸 그들이 눈에 들어와 나름대로 힘껏 돕고자 긍휼을 베풀게 됩니다.
또 이전에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했는데, 이제는 사람의 내면을 바라보며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들이 나타나는 믿음- 그것이 움직이는 믿음, 즉 역사하는 믿음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런 역사하는 믿음은 마침내 자라나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주시고 믿음의 씨를 심은신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이 멈추어진 상태 - 그것을 야고보서에서는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움직임을 멈춘 상태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가 아니면, 다만 잠시 그 성장이 멈춘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문제이지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자라가야 하며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온전케 된 믿음, 즉 성숙한 믿음이 우리의 믿음의 목표가 되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씨앗을 땅에 심었는데 너무 여러 날이 지나도 싹이 트지 않으면 어쩌면 땅을 파서 그 씨앗을 꺼내서 이게 정말 살아있는 씨앗인가, 아니면 아예 죽은 씨앗인가 - 궁금하게 여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서 많은 신자들이 그런 상태일 때가 있습니다. 즉 믿음의 작동이 멈추어져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여전히 세상적이며,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시기하고 다투며,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또 주변에 어려고 힘든 이웃과 형제가 있어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어 외면하기가 십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성도들 - 그들은 한 마디로 작동이 멈추어져 있는 믿음이며, 씨앗으로 말하자면 땅에 심기는 했는데 싹도 나지 않고 처음 씨앗의 모습 그대로 땅에 묻혀 있는 상태와 같은 믿음, 그런 믿음을 야고보 선생은 죽은 믿음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야고보 선생은 우리의 믿음이 움직이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역사하는 믿음, 작동하는 믿음,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믿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나 지신의 영혼에게도 유익이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적으로 유익을 주는 그런 온전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고,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냐고 강력하게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야고보서의 목회적 관점에서의 메시지를 잘 새겨들으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심어두신 믿음의 씨앗이 날마다 자라가며 성장해 가는 것이 우리의 일생일대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 묵상하는 것을 쉬지 마십시오. 그럴 때 그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으므로 여러분의 믿음이 움직이도록 역사할 것입니다(히4:12).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가 권면한 것처럼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히10:24, 2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살면서도 우리가 정말로 산 자인지 죽은 자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그런 죽은 믿음에 상태로 머무르지 맙시다. 그래서 우리가 장차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의 씨앗을 그 모습 그대로 가져가는 죽은 믿음의 사람이 되지 맙시다.
움직이고 작동하는 믿음, 성장하는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들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며, 나 자신의 영혼과 내 이웃들에게 영적인 유익을 주며,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실 만한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