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열차로 동대구역에서 내려서 628번 시내버스 이용 |
수봉정사(壽峯精舍) 천수봉에서 이름해 손님접대및 일족의 모임장소
광거당(廣居堂) 후손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곳 壽石老苔池館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님의 글씨인데
굵직한 대나무와 높이 솟은 노송들이 고가의 분위기다.
인수(仁壽)문고 만여권이 소장되어 한국전적종합목록(국학자료보존협회 발행)에 수록
중곡(中谷)문고 5천여권의 현대의 서적을 보관한 서고
고려 때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인흥사는 없어지고 마을 이름만 인흥으로 남은 터를 잡아 또한 수봉 문영박(1880~1930)의 사망 후인 1931년 비단천에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는 제목의 추조문과 특발문을 수봉의 자제들에게 비밀리에 보냈는데 이는 독립자금을 지원한 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가로 15cm, 세로22cm의 분홍색 비단천에 활자판으로 인쇄한 임시정부 조문은 문씨 집안에 보관되어 있으며 선조를 모심에도 소홀함이 없어 선산은 14대 조부부터 모두 보존되어 있다 |
인흥록 발췌 내용(2003년 10월 문희응 발행) |
1. 위치 대구시내에서 5번국도를 따라 남서쪽 13km인 화원읍에서 천내천 다리를 건너기 전 왼편으로 하천을 끼고 2km올라가면 직경510cm 높이 270cm인 조산무더기(원추형으로 만든 돌무더기로 마을의 안녕과 수호석 역할함)가 보이고 안내소가 있다 오른편에 본리1리(인흥)의 안내판이 있고 19세기 후반에 세운 고려문신 노당 추적(秋適)을 모신 인흥서원과 비각도 있으며 왼편에는 마을 앞밭에는 고탑의 일부가 있고 대구광역시 민속자료 3호의 표석과 국,영문의 안내판이 있다.
2. 면적과 개요 본리동 397번지 주거지 1만여평 외곽을 합하면 2만평을 조금 넘으며 대구입향조이신 통덕랑 휘 세근(세근)의 9대손 인산재 경호(경호,1812~1874)께서 새로이 터를 열었다 광거당과 수봉정사는 재실이며 인수문고(문중문고)와 부속건물 심대소가 아홉의 재택으로 모두 12집이며 70여채 250칸의 전통와가로 구성되었다. 세거지의 동편에는 광거당의 전신인 용호재가 있었고 그 옆에는 1906년 세워진 개화기의 사립학교인 인수학교도 있었다. 인수학교는 한국인 교사 2명에 남학생22명이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폐교되고 1950년에 헐리었다 3. 지리적인 면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길쭉한 말굽형으로 북서쪽이 트여있어 낙동강이 흐른다. 비슬산의 지맥이 화원의 지맥들이 화원의 주산인 함박산을 거쳐 설화동과 명곡동 까지 내려갔으며 뒤쪽으로 삼필봉에서 북서쪽으로 한 소맥을 형성 천수봉을 거쳐 구라동에 이르고 있다. 앞산과 뒷산의 지맥은 유순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이고 앞으로는 인흥천이 부채꼴처럼 감싸 흐른다 마을 뒤로가면 청록색의 용바위가 이채롭고 용흥사가 있으며 큰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이 고여 멱을 감을수 있는 들럭소가있었으며 한강 정구(1543~1620)를 기려 후학들이 세운 동계재가 모습의 일부를 유지하고 있다. 웃들옆을 지나 산자락에 이르면 계곡이 둘로 나누어진다 왼편은 본리2동인 마비정에 이르고 그곳에는 해곡등 안골짝에 있는 누대의 선산을 위한 재사 혜곡재가 있다. 더 올라가면 비슬산 능선상에 장단상이 있고 그 산을 넘으면 가장면 정대로 통한다. 오른편은 인흥천의 주류로 한달이라는 작은 들이 있고 골짝 중턱에 용문동이 나온다. 용이 승천했다는 동천이며 웅장한 규모는 아니나 빼어난 경관이다. 개울바닥의 양측은 바위덩어리이며 두 개의 작은 폭포가 있으며 물이 맑고 깨끗하여 한여름에도 발이 시리도록 차다 도은 이숭인과 한강이 탁족하여던 곳이며 수봉이 이곳을 찾아 남긴시는 三年不得至龍門 : 삼년동안 용문에 이르지 못했는데 古壁題詩尙有痕 : 암벽에 쓴시는 아직도 흔적이 남아있네 回想前塵怊愴久 : 지난날의 온갖 생각에 한참을 잠겨있다니 蒼然遠色己生昏 : 어둑어둑 아련한 빛 황혼이 찾아드네 4. 인흥사에 대하여 인흥사는 인홍사라고 하였으며 신라때부터 있던 사찰이며 고려의 보각국존 일연스님이 1264년부터 11년이나 주석한 곳이다. 역대연표를 비롯 불경을 간행하는 등 불교의 본산역활을 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1450년에는 화원창을 짓기 전데 나라에서 인흥사를 빌려 군자와 미곡등의 물자를 비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195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화원창에 관해서는 예전에는 인흥사를 빌려서 본 현의 군수 미곡을 저장하였었는데 세조때에 현재의 읍 남쪽에 별도로 세웠다. 일본사신이 가지고오는 동 철 소목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이곳에 저장했다고 한다. 세거지 일대에서 출토된 와당을 살펴보면 유익사자문과 귀목문 단엽연화문 등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것이 다양하게 나오는 것은 통일신라때 지은후 고려때 중창한 것으로 볼수 있으며 채상식님이 고려후기 불교사연구에도 3층석탑이 있는 인흥이 현지 조사결과 인흥사지임이 밝혀졌으며 탑의 건립시기는 조형향식으로 보아 신라말의 작품으로 보여 인흥사의 건립시기도 신라말을 하한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절에서 사용한 우물(고려정)과 돌유구 등이 남아있고 5. 풍수적으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전형이라고 하며 어떤이는 비슬산이 태조산이고 삼필봉이 소조산이며 천수봉이 주산이고 함박산이 안산으로 회룡고조형국이라고 했다. 뒷산의 줄기와 앞을 흐르는 시내의 휘어진 모습이 산태극수태극에 가까운 형국이라고도 한다 주산인 천수봉은 금계가 알을 품고있는 형국이나 부처가 좌선을 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기도 한다 북서면이 트여 서북풍이 일고 다소 허한 감을 주어 선인들은 백여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쳤는데 1982년 자연보호림으로 지정되었다. 원광대 교수 조영헌님의 글에서 까치봉은 삼필봉의 속칭이다 6.주택에 대하여 목수 신영훈은 근래에 보기드문 취락의 배치이며 연대는 높지 않으나 깨끗하게 유지되어 온 이조시대의 주거양식을 볼 수 있었다 7. 세거지 세거지는 여러대에 걸쳐서 학문과 도덕이 온축되고 유가의 전통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며 환경과 인물 그리고 경제적인 받침이 따라야 한다 인흥은 백오육십년 밖에 되지 않고 규모도 작다 불천위나 두더러진 현조도 없으나 유가의 체통을 지켜왔고 아직도 대가족 생활양식의 모습이 조금은 남아있는 곳이다. 8. 인흥의 유래 인흥사가 있었기에 마을도 인흥으로 불리어 지방조직 정비기에 공식화 한 것으로보이며 한글학회의 한국지명총람에도 본리동은 본래 대구부 인흥면의 소재지로 본리라 하였고인흥동은 화원읍 본리동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고려때 인흥사가 있었으며 이조때는 인흥면 사무소가 있었다고 했다 1978년 매일신문이 영남의 이름난 마을을 기획 취재한 취락에서 용문동 등 명승지와 골이 깊어 가믐을 모르는 복된 땅이라고 한다 인흥에는 웃마을 본동에 이씨 김씨 박씨 등 120여 호가 살고 있었고 새로된 마을인 문씨 세거지에는 대구 입향조의 15세손인 정기등 10여호가 오늘의 인흥을 지키고 있다. 인흥에 타성보다 늦게 입주했으면서도 학문과 경제력으로 이 마을을 대외적으로 주도해 왔다는 인흥동민들의 설명이다 이곳에 입주한 가장 오래된 성씨는 성산이씨와 김해김씨였고 재력을 갖춘 현풍곽씨도 있었다. 인흥문씨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이들이 거주해 왔던 것은 명확하나 인흥이 과거 문화의 산실로 학문진흥의 고을로 또한 유림들이 인흥을 칭송하게 된 데에는 문씨 문중의 업적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문씨들은 인흥을 대외적으로 고양 시킨 주역으로 당시나 형재도 받들어 지고 있는 것이다. |
배치도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유홍준(미술사학가)님 인흥방문기(인흥록에서 발췌) |
◆ 소문나지 않는 명소 대구의 문화유산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팔공산자락의 동화사와 파계사 정도이다. 그것은 대구를 위해서도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대구에는 답사객들에게 대한미국의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아주 아름답고 우리에게 참된 전통의 계승이 무엇인가를 침묵의 소리로 말해주는 소문나지 않은 명소가 하나 있다. 그곳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 인흥 마을에 있는 남평문씨 세거지이다. 문익점의 18세손 되는 문경호가 약 150년 전 이곳에 정착한 이후 남평문씨들만이 살고 있어서 그런 별칭이 붙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안동 하회마을, 안강 양동마을, 성주 한개마을 같은 전통 한옥마을은 아니다. 지금 남평문씨 세거지에 있는 10여 채의 한옥은 모두 1910년대부터 40년대까지 계속 지어진, 당시로서는 신식 내지 신흥마을이다. 그 내력을 보면 입향조의 후손인 수봉 문영박이라는 분의 아들들이 분가하면서 모두 한 동네에 살게 되어 자연스럽게 시간을 두고 가족마을로 설계된 곳이다. 마을 전면에는 수봉정사라는 수봉의 사랑채가 자리 잡고 뒤쪽으로는 8채의 한옥이 높은 토담을 경계로 배치되어 있으며, 마을 한쪽 끝으로 광거당이라는 재실이 있다. 집집이 모두 전통한옥으로 일자, 기역자, 디귿자, 미음자로 저마다의 필요에 따라 크기를 갖고 있고, 집집이 상랑채고 안채고 한옥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집에는 아직도 그 후손들이 생활을 하고 있으며, 가문에 걸 맞는 인사들이 배출되고 있다. 남평문씨 세거지는 한국건축사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선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선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계획된 마을이라는 점이다. 거기에다 수봉정사와 광거당이라는 중심축을 갖고 집들이 배치되어 있으니 그 계획은 정연하면서도 무게를 지닐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양의 많은 계획도시를 알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시도된 피엔짜라는 작은 도시는 성당을 중심으로 마을이 퍼져나간 도시로 소문나 있다. 토스카나 지방 피렌체에서 시에나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 작고 아름다운 도시를 보는 순간 나는 남평문씨 세거지를 머리소에 떠올렸다. 건축이라는 것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가꾸고 개조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한 대답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 매대와 차면 담 남평문씨 세거지는 본래 옛날에 큰 절터였다. 인흥사라는 제법 큰 절이 있어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스님이 한때 이 절에 주석한 일도 있었다. 그 인흥사에 있던 작은 삼층 석탑은 지금 마을 앞 대추밭에 남아있고, 대웅전이 있던 자리에 바로 수봉정사가 들어 앉아 있다. 수봉정사는 높은 솟을대문과 일자집 사랑채로 구성된 아주 단순한 구성이다. 그러나 대문의 생김새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굴뚝의 앙증맞은 디자인에서 벌써 우리는 예사롭지 않은 이집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앞마당에는 정원으로 석가산을 만들어 놓고 잘 생긴 소나무, 배롱나무, 모과나무로 배치하고 이광원이라 새긴 석주를 꽂아 놓았다. 그리고 정사 왼쪽 담장에는 매대를 만들어 홍매, 백매가 지금도 3월이면 변함없이 꽃을 피운다. 수봉정사는 그 스케일이 자못 장중한데, 건축부재도 아주 잘 다듬어진 튼튼한 목재로 이루어져 건실하고, 앞마루와 곁마루를 이어 붙여 보기에도 시원하고 사용하기에는 너무도 쓰임이 좋다. 수봉정사엔 미닫이로 방이 4칸 나뉘어 있으나 이를 다 열면 60명은 족히 앉아 세미나를 할 수 있고, 칸을 막으면 여러사람이 묵어갈 수도 있다. 실제로 일제시대에 명사, 묵객치고 이 집을 다녀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수봉정사의 현판은 위창 오세창의 글씨이고, 또 다른 현판 수백당은 우당 유창환의 명작이다. 이 집은 장서도 유명하여 1천여종의 전적들이 인수문고로 따로 서고를 지어 보관하고 있다. 수봉정사 뒷문은 바로 마을길 각 집으로 연결되는 길로 나 있다. 골목길엔 잔자갈이 곱게 깔려 있고 전통흙담으로 구획이 나누어진 집집마다 능소화, 장미꽃 넝쿨이 그 운치를 한껏 자아내며 마을 어귀의 해묵은 느티나무가 이 동네의 연륜을 증언해 준다. 광거당은 기역자집의 큰 재실인데 이 집의 대문을 열면 정면에 낮은 기와 토담이 앞을 막고 시선을 안쪽으로 유도한다. 건축구조상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기 때문에 헛담이라고 불리는 이 담장은 사실상 헛담이 아니다. 이 헛담이 있음으로 해서 안채는 바깥채와 분리되고 안채의 품격이 유지되며, 방문객들 첫인상도 차분하게 감싸준다. 진실로 슬기로운 건축적 장치인 것이다. 게다가 그 헛담의 토암엔 소박하게 연꼿 한 송이를 기와로 장식한 것이 얼마나 눈맛을 시원스럽게 하는지 모른다. 정말로 감동적인 건축이다.
2) 만권당과 사람들 마을의 구체적인 형성과정과 내용 그리고 현황은 다음에 밝히겠으나 여기서 특기할 것은 1910년 광거당을 새로 짓고 수만의 전적을 모아 지금의 인수무고의 모체인 만권당을 연 사실이다. 더욱이 그해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탈한 해였다. 그러한 여건과 상황속에서 질과 양 면에서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문고를 갖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재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재실을 짓고 정자를 마련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기본적으로 학문이 있어야 하고 또한 서책에 대한 높은 안목과 식견이 따라야 했고 그리고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문자와 글이 없어지면 나라와 민족이 멸망한다. 그 어려웠던 시기에 선현들의 책과 글을 모아 후진을 가르치고 나아가서는 우리의 학문을 진흥시키려는 의지나 사상은 정녕 놀라운 것이라고 하겠다. 주재자인 수봉 휘 영박이 심재 조긍섭(1873-1933)을 비롯한 이름있는 사우들과 함께 광거당 안에 만권당을 편액할 때에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에서 만권당을 열어 두 나라의 학자들의 학문과 문화적인 교류의 장으로 삼았다는 옛일을 상고하였을지도 모르겠다. 만권당은 옛날 중국에서 서책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의 당호로도 쓰였지만, 고려 충선왕이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가 성장했던 원나라 연경으로 돌아가 1314년 만권당을 마련하였다. 고금의 진서를 많이 수집한 후, 고려에서 이제현, 박충좌 등을 부르고, 원나라의 저명한 학자인 조맹부․염복․우집․요봉 등과 교류하면서 중국의 고전 및 당시 북중국에서 유행한 송학 즉 성리학도 연구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백이정은 충선왕을 섬기면서 만권당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여 그보다 늦게 만권당에 출입하게 된 이제현․박충좌 등에게 이 학문을 전수하였다. 이것은 다시 이색․이숭인․정몽주 등에게 전수되었다. 만권당에 모여든 학자들은 학술 뿐만 아니라 예술 등에 걸쳐 광범위한 활동을 함으로써 고려와 원나라와 문화교류의 중심적인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인흥의 만권당은 물론 자제들의 교육을 위한 명분도 있었겠으나 그러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만권당이 열리자 귀중한 문헌과 자료를 찾고 참고하기 위해 경향의 학자들의 모임과 왕래가 잦았으며 여러 종류의 문헌을 간행하는 등 1920년을 전후해서는 인흥동이 사우강론의 집합소이자 문화의 산실로서 그 이름을 드높였다는 평도 있다. 심재 조긍섭, 근재 정지순, 다곡 이기로, 백괴 우하구, 소암 김현동 등 영남의 거유들이 수시로 광거당에서 회동했으며 회봉 하겸진과도 교유가 있었고 그 후로는 도산 성순영, 청한 이세호, 형재 박기현, 임당 하성재, 운당 성원표, 우인 조규철 등도 자주 인흥을 찾은 학자들이다. 강화학맥의 거장 난곡 이건방을 비롯해서 이정 변성상과 이어 위당 정인보, 산강 변영만, 그리고 이시완, 김태준, 청명 임창순, 우인 송지영 등 쟁쟁한 학자, 문인들도 오갔다. 중국 상해에 있으면서 중국서책의 도입을 도운 사학자이자 문장가인 창강 김택영(1850-1927)과 그로 인한 중국의 명사들과도 두터운 교류가 있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우남 이승만도 만권당의 책을 참고했다고 하며, 유석 조병옥도 서책을 보기위해 인흥을 찾은 일이 있다. 거의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난 분들이다.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단히 어려웠던 때인데도 왕래와 교류가 이어졌으며 많은 서간과 시문도 남겨 자료가 됙 hdlT다. 그 후 지금까지도 학문하는 사람들이나 국내외의 저명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어 서책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힘을 가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3) 시류에 따르지 않고 일제에 대한 유림의 저항운동은 대체로 세 가지 형태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망명을 해서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경우와, 둘째로는 파리 장서사건 등 세계에 독립청원운동을 전개하고 모금운동에 동참한 경우, 그리고 셋째로는 일제가 강요한 단발을 거부하고 자제들을 일제의 신제학교에 보내지 않고 서원이나 서당에서 전통적 학맥과 학풍을 지키게 하는 이른바 비타협적 저항운동 등을 들 수 있다. 인흥은 1930년대 중반까지도 단발을 거부했고 자녀들을 신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우직할 정도로 수구적인 입장을 지키고 거기에다 많은 학자와 유관 인사들이 자주 모여들었기에 일경의 주목을 받아 수봉이 구금되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소극적인 저항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일제에 동화되지 않고 민족의식을 간직한 것이 오히려 지금까지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문고를 유지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본다. 서지학자 이춘희는 「어떤 도서관도 그 사회 혹은 한 집단의 강력한 요구 없이는 우연히 성립될 수 없으며 문중문고도 그 예외일 수는 없겠다. 문중문고의 출현도 일제침fir에 대한 양식 있는 유림들의 저항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음으로 그 본질과 성격도 이러한 사회․정치적인 차원에서 구명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문고「인수문고」가 자제교육을 강력히 내세우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사회․정치적인 배경에 기인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한학과 금석학의 대가인 청명은 만권당에 관한 학문적인 평가로 「영남에 있으면서도 기호출신 선학들의 저서가 상당한 수를 차지하였다. 이는 단연 진보적인 학문자세였다.」고 하며 높이 평가하였고, 중국책이 상당수인 것은 「당시 중국학자들의 새로운 학설에 관심을 크게 기울였음을 볼 수 있으며 또한 후학을 계발시키려는 새로운 욕구에 대하여 우리는 경의를 표현한다」고 말하면서 「비록 필사본이지만 많은 야사 등 지방장서에서 보기 드문 많은 사료와 서적을 비치하고 있는 것은 수집자의 고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라고 했다.
4) 대를 이은 성력 인흥의 세거지는 비록 역사는 짧으나 비교적 일찍 그 명성이 드러났다는 평이 있다. 혹은 풍수적으로 터가 좋아서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역시 새로이 문호를 열어 보겠다는 강한 의지와 집념, 그리고 이를 이어나간 인물과 재력의 뒷받침 등의 우합의 힘이 더 컸던 것으로 본다. 이곳은 인산재가 1840년을 전후하여 새로 터를 잡고 아들인 죽헌 달규(1832-1905)와 더불어 기반을 닦아 살기 시작한 곳이다. 손자인 후은 휘 봉성(1854-1923)대에 이르러 특히 경제에 힘써 거만의 부를 이룩하고 아들 소은 휘 영근, 수봉, 보당 휘 영환 삼형제로 하여금 학문을 닦게 하는 한편 문호를 열어 가는데 마음껏 포부를 펴나가도록 뒷받침했다. 이러 급변하는 시대상황 속에서도 아래 2․3대들로 하여금 학문과 수기를 잊지 않게 하고 선대의 뜻을 지키고 계승하게 하여 오늘의 인흥으로 자리잡게 한 것이다. 조선조 중기의 거유이며 명신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은 그의 선군 행정 말미에 「아버지께서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사셨기에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 비록 숨은 덕이 있으나 잘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세상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본인에게는 더 할 것도 덜 할 것도 없지만 자식된 입장에서 아버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은 저절로 있어 그만두지 못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자손들이 어버이를 생각하는 마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조상 없이 어찌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가 말이다. 오늘의 인흥도 밖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개기조 인산재와 죽헌, 후은 3대로 이어진 의지와 노력 그리고 적덕에 힘입어 그 기반이 닦여진 것이라고 하겠다. 후은의 아랫대에 와서 맏이인 소은은 아우 수봉과 함께 저명한 치주 손정은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단아한 선비로 문필에도 능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으나 아깝게도 일찍 돌아가셨다. 지금의 인흥을 있게 하고 세상에 드러나게 한데는 수봉에 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수봉이 안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조상을 받드는데 쏟은 이력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리고 밖으로는 만권당을 여는 한편 국내의 학자들과의 친교와 교류의 범위도 실로 광범위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경륜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수봉의 학문과 덕행에 관해서는 당대의 유종이라고 할 수 있는 하회봉과 조심재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다. 회봉의 글에 「나의 심재 그리고 수봉이 자리를 함께 하고 서로가 경서의 오묘한 뜻과 명리의 미묘함과 시사의 인품의 득실현부를 의논하며 밤이 다 하도록 그칠 줄 몰랐다. 그 사이에 간혹 내가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중근이 풀어주었고 또한 중근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장지(수봉의 자)가 그것을 알았다. 내 마음 속으로 심히 놀라고 감탄하여 개인적으로 중근에게 물어 말하기를 「장지가 이미 이에 이르렀는가」하니, 중근이 이르기를 「그렇다. 이것이 어찌 장지의 모든 것이겠는가, 그 기량은 넓고 그 포부는 크며 언변이 있으나 묵묵하며 지혜를 펴지 않고 남보다 먼저 하지 않으니 이가 곧 장지이다. 바로 우리들 열 수레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1918년에 있은 대화이며, 수봉정사 기문에 나온다. 문집으로 「수봉유고」와 산남지방의 인물론을 정리한 「산남징신록」의 초고가 남아있다. 또 하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로 수봉이 돌아가신 후 중국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로부터 조문을 보내온 사실이다. 1931년의 일이다. 그 어려운 시기에 국내로 사람을 보내 전하게 한 이러한 임정의 의전문서는 아직은 처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조문에 쓴 「역사의 주인되는 분」이라는 존칭은 비록 임정활동이나 광복운동에 많은 기여과 공헌을 했다고 해도 결코 쉽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이 한마디로 그의 인물됨과 인품을 살필수 있게 한다. 조문은 상해임시정부가 밀파한 경남 창원 출신의 이교재라는 분에 의해 국내로 들어왔다. 이교재는 조문 외에도 상주 앞으로 보낸 위장을 겸한 격문인 특발문과 본인에 대한 임정의 「경상남북도대표」임염장 그리고 이중과 앞으로 보낸 국내전역 및 일본지역에서의 광복운동을 총괄하는 「총특파원」의 사령장도 함께 가지고 왔다. |
흥선(직지성보 박물관장) 인흥인상기39쪽~45쪽 |
♦ 사람이 살면 훈기가 돌고 집에 사람이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이 미덕일 때가 있다. 고가의 경우가 특히 그러해서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으면 같은 집인데도 훈기가 돌고 윤기가 흘러 집이 돋보인다. 반대로 아무리 가치 있고 훌륭한 집이라도 그곳에 사람의 손길이 끊어지면 찬바람이 휘감기고 허망함이 배어나와 집의 품격이 떨어지고 수명은 줄어든다. 어느덧 미덕이 되어버린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는 옛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다. 화원읍 본리리, 같은 집안 아홉 대소가만으로 한 마을을 이룬 인흥마을 남평문씨 세거지가 그곳이다. 동네 안쪽으로 들어서면 반듯반듯한 흙돌담이 가로세로 몇 줄씩 뻗어있다. 듣기로는 여기에 터를 잡은 마을 사람들의 조상이 정전법에서 땅을 나누듯 우물 정자 모양으로 길을 내고 집을 지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실제 모습이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드는 것이 높은 담장이다. 민가의 담치고는 상당히 높아 필시 무슨 까닭이 있어 이리 담을 높게 쌓았겠지만 안에 사람들은 좀 갑갑하지 싶다.
♦ 담장너머 꽃들이 골목골목을 두른 담장은 무너직 구석은 물론 흙 한줌, 돌 하나 빠지거나 흘러내린 곳이 없다. 담장 아래는 길게 자란 잡풀 한 포기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작은 자갈들도 아마 빗물이 튀어 담장을 조금씩 파먹지 않도록 깔았으리라. 그렇다고 이 골목길이 맨송맨송한 것은 아니다. 마구 번져가는 담쟁이덩굴을 걷어내어 담을 보호하면서도 군데군데 뻗는 대로 두어 운치를 살렸다. 때로는 옥잠화․원추리․분꽃․금잔화 따위를 담 밑에 심어 멋을 부렸다. 집집마다 매화나무․살구나무․오얏나무가 담장너머까지 가지를 내밀어 열매가 떨어질 무렵이면 골목 안 자갈밭에 떨어진 살구나 매실, 혹은 자두를 주워 그 시큰함을 맛볼 수도 있다. 능소화는 떨어진 모습이 강렬하고 인상적인 꽃이다. 시들지도 않은 생생한 주홍빛 꽃송이를 뚝뚝 땅 위에 떨군다. 그렇게 떨어진 능소화가 어느 집 대문 앞을 밝히거나 줄기에 매달려 담 위를 기어가는 것도 이 골목 안이다. 비록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 집안까지 살펴볼 수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골목한 차분차분 누비고 다녀도 마을의 풍치를 가늠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산 너머 연기나면 불난 줄 알고 담장 위로 뿔 지나가면 소 가는 줄 짐작한다지 않는가. 골목길에서 미처 볼 수 없었던 인흥 마을의 건축적 특색은 마을을 대표하는 건물 수봉정사와 광거당을 통해 미루어 볼 수 있다. ◆ 전통 건축의 본보기 마을 첫머리에 견고하게 솟아 만만치 않은 솟을대문을 비껴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탄탄하고 무게있는 건물에 적이 압도되어 가벼운 긴장감이 인다. 수봉정사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일자형겹처마 팔작지붕건물로 이마에는 「壽峯精合」라 쓴 위창 오세창의 전서체 현판이 걸렸다. 수봉정사는 우리 전통건축이 얼마나 튼튼하고 정교하게 지어질 수 있는가를 본보기처럼 보여주는 건물이다. 위가 잘린 우너추형 정평주초 위에 놓인 느티나무 두리기둥은 지름이 30cm는 너끈하여 지붕의 무게를 충분히 견디며 시각적 안정감을 준다. 대들보 역시 민가의 그것치고는 대단히 육중하다. 기둥머리의 주두, 단면이 둥근 굴도리, 도리에 받쳐진 서까래, 그 위로 덧대어진 덧서까래, 이 모든 부재들이 굵직굵직하고 큼직하여 기둥이나 들보와 어울리며 집 전체를 대범하게 만든다. 마루에 올라 걸어보면 살살 삐걱대는 소리가 아니라 깊은 울림이 있다. 그렇다고 정교함이 뒤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여느 건물에 비해 치밀함이 두드러진다. 부재와 부재가 맞물리는 부분에는 거의 틈이 없고, 기둥․들보․서까래 등은 트거나 갈라진 것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마루 또한 처음 짜 맞춘 모습 그대로여서 여모중방․장귀틀․동귀틀․마루널에 트집이 없음은 물론 널과 널 사이도 벌어진 곳을 찾기 어렵다. 대개 조금씩은 사이가 뜨고 비틀리기 쉬운 문짝도 틀림없기는 마찬가지여서 앞․뒤․옆으로 달린 여러개의 문짝이 하나같이 문얼굴과 어긋남이 업삳. 어쩌면 이렇게 수많은 목재들이 제대로 아귀가 맞아 돌아가고 트집이 없는지 볼수록 놀랍다. 다음은 돌로 바른층쌓기한 반듯한 기단, 그 위로 정렬한 듯 나란한 두리기둥, 세살문으로 통일되어 좌우로 길게 펼쳐지는 훤칠한 문짝들이 서로 상승하며 빚어내는 정연한 아름다움도 쉽사리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 솜씨와 안목 이만한 집이 이룩되려면 여러 가지가 맞아 떨어져야 하리라. 먼저 대목의 솜씨와 눈썰미 예전 이름 있는 대목들은 나무의 성질을 파악하여 「나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기둥과 같은 수직부계는 뿌리 쪽을 밑으로 세우고 들보 같은 수평부재는 뿌리 쪽을 밖으로 눕혔다. 집주인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하기 전에는 「기둥을 거꾸로 세우지 않는다」는 말도 대목들의 정확한 눈썰미를 전제로 생겨난 속설이다. 심지어 산의 북쪽 사면에서 자란 나무는 건물의 북쪽벽에, 남면의 나무는 남쪽에 세울 줄 알아야 올바른 대목이라고 했다. 수봉정사를 지은 대목의 수준은 이 정도를 넘어섰으리라. 집을 보면 대목의 나무를 다루는 솜씨가 얼마나 능숙하고 노련한 지 그 눈썰미가 얼마나 날카롭고 엄정한지가 한눈에 드러난다. 다음이 건축주의 여유와 안목, 대목의 솜씨를 뒷받침할 만한 경제적 여유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서두르지 않고 일이 되어가는 것을 느긋하게 지켜보는 심적 여유와 전체를 조감하는 안목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점이 시대적 조건이 아닌가 한다. 알다시피 조선조는 신분제사회였기 때문에 주택에도 신분에 따른 차별과 제한이 세세하게 가해졌다. 이름테면 세종 때 시행된 가사규제에서는 대군 60칸, 군과 공주 50칸, 2품이상 40칸, 3품 이하 30칸, 서민 10칸을 넘지 못하도록 신분에 따라 집의 규모를 제한했다. 그밖에도 서민주택의 기둥은 4치, 양반주택이라도 7치를 넘을 수 없다든지, 서민주택에는 굴도리를 쓸 수 없으며 솟을대문을 낼 수 없고, 민가에서는 초석을 제외하곤 다듬은 돌을 사용할 수 없으며 단청을 할 수 없고 두리기둥을 세울 수 없다든지 하여 그 제한은 목잡하고 까다로웠다. 그대로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골격은 유지되던 이러한 규제는 1804년 갑오개혁에 의해 사실상 무너졌다. 양반가옥의 상징 같은 솟을대문을 너도나도 세우는 바람에 정작 양반집에서는 창피하다 하여 솟을대문을 헐고 평대문을 다는 일이 벌어진 것이 그 뒤의 일이었다. 수봉정사는 이렇게 집에까지 일일이 제한을 가하던 조선왕조가 아예 멸망하고 깨 세월이 흐른 1930년대에 세워졌다. 때문에 건축 외적인 제한 없이 도편수와 건축주의 의도대로 자유로이 집ㅇㄹ 지을 수 있었으리라는 짐작이다.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는 전통과 안목은 이어지고 그것을 방해하는 제한은 사라진 시기엗나 있을 수 있는 집이 수봉정사가 아닐까 싶다. ◆ 거북이와 석가산 수봉정사에는 몇 가지 눈여겨볼 만한 것이 더 있다. 대문의 빗장을 거든 빗장둔테는 두 마리 나무거북으로 만들어졌다. 목이 상하좌우로 움직여 잠근 빗장이 빠지지 않게 되도록고안된 이 거북은 짧은 쪽은 30cm가 채 못 되고 긴 쪽은 그 이상이 되는 타원형의 등껍질이 둥글넓적하여 자못 큼직하다. 두 겹으로 귀갑문이 음각된 등 한가운데 왼쪽 것은 곤괘☷, 오른쪽 것은 건괘☰가 새겨졌다. 장수와 음양의 조화를 비는 뜻이 담긴 것은 아닐지. 대문에서 몇 걸음 떨어져 석가산의 가장자리에 놓인 바위에도 거북이 한 마리가 새겨졌다. 몇 개의 음각선으로 몸체는 물론 머리 다리․꼬리까지 표현된 이 거북은 무슨 암각화같이도 보인다. 집을 지을 때 냇가에서 주워온 돌로 그때 이미 거북 무늬가 새겨져 있던 것이라는데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처럼 천연스럽다. 마당 왼편으로는 담장에 붙여 석가산을 쌓고 이광원이라 새긴 석주를 꽂았다. 그리 크지 않은 조산에 소나무․전나무․회양목․배롱나무․모과나무․향나무․엄나무․대나무 따위가 마음대로 자란다. 잔손질을 하지 않아 거친 듯 스산한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오른쪽 화단 귀퉁이에는 밑동 굵은 매화나무가 집과 함께 늙어간다.
◆ 대숲속의 광거당 수봉정사의 담장일 끼고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면 아을 언저리에 광거당이 있다. 광거당은 㰠형 건물로 모양만 수봉정사와 다를 뿐 부분부분에 보이는 수법은 흡사하다. 한 목수의 솜씨라는데 정교함은 숮봉정사에 다소 못 미친다. 같은 솜씨라도 공력을 쏟는 심도에 따라 이렇게 차이가 지는가 보다. 누마루 바깥에 추사의 글씨로 「壽石老笞池館」이란 편액이 걸렸다. 「수석과 묵은 이끼와 못이 있는 집」이란 뜻이겠는데 지금은 그 어느 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집 또한 추사가 죽고 나서 한참뒤에 세워졌으니 그의 글씨가 걸린 내력이 궁금해지낟. 오히려 지붕보다 높이 솟은 굵직한 대나무들이 들어찬 뒤뜰 장대한 회화나무, 담장 밖으로 높이 솟은 노송들이 오늘날 광거당의 분위기를 이끈다. 대문 안쪽의 헛담에는 깨진 기와조각으로 아로새긴 꽃 한송이가 질박하다. 수봉정사와 담을 사이에 두고 인수문고가 있다. 문중의 서고이다. 1,059종 만여권의 고서들이 거의 산질없이 완본으로 보관되어 있는데, 한 집안에서 소장한 것으로는 질과 양 모두 보기 드물다는 평가다. 그 내용은 국학자료보존협회에서 발행한 「한국전적종합목록」 제5집에 수록되어 있다. 일반에게 공개하지는 않는다.
흥선의 글 몇 대목에서 새겨볼 것도 있지만 다소의 위안도 얻는다. 이나마도 살아 숨쉬어야 한다는 이 말이 내일의 인흥에도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
일연의 발자취를 쫓아 (도원스님)67-71 |
◆ 삼국유사의 기초 자연의 기운에 한참 취해 있을 때에 안내를 맡은 조춘호 교수의 인흥사에 대한 안내가 시작되었다. 인흥사지는 지금 남평문씨의 세거지로서 대구 달성군 본리에 자리잡고 있다. 일연 스님은 이 근처에 자주 머무셨는데, 22세때 비슬산 보당암에 주석하신 것을 비롯하여, 득도한 곳으로 알려진 무주암, 31세 때 머무신 묘문암이 모두 근처 포산(비슬산)자락에 있는 절이라고 했다. 인흥사에는 스님의 나이 59세에 오어사에서 이곳으로 옮겨 주석하셨다. 이곳 인흥사에서 잠시 개경의 운해사에 머문 것을 제외하고 나중에 운문사로 가시기까지 11년간 주석하면서 삼국유사의 기초가 되는 「역대연표」를 간행했다. 「역대연표」가 나온 후 운문사에 가서 머무시다가 후에 인각사로 가서 열반에 드셨다. 스님께서는 인흥사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셨다. 「삼국유사」는 이곳 인흥사에서 시작하여 운문사를 거치면서 인각사에서 완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지닌다. 인흥사에 관해 설명하는 동안 첫 방문지인 인흥사지에 도차하였다. 차에서 내려 말끔히 포장되어 있는 농로가 펼쳐져 있었다. 이 길을 따라 걷다가 보니 한쪽에는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며 어수선하게 엉클어진 대추밭을 볼 수 있었다. 사전탐방을 하셨던 스님들이 그곳에 인흥사지 석탑 1기가 있다고 하는 순간 평소 느끼지 못했던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 장경각 자리에 문고가 그 누가 버려진 듯한 대추밭 속에 일연의 고결한 숨결이 담겨져 있는 석탑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겠는가. 우리는 쑥대를 헤치며 석탑에 가까이 갔다. 그러나 그것은 석탑이라고는 하나 많이 훼손되어 덩굴에 휩싸여 있었다. 유홍준 교수는 그의 글에서 「우리는 국토박물관의 참모습과 참된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사람들은 생리적으로 흔한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 습성이 있다. 가식의 화려함에는 곧잘 현혹되면서 평범하고 소박한 가운데 진실과 아름다움이 있음은 쉽게 놓쳐버린다.」고 했는데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원래 2lr의 석탑이 있어는데 한 기는 현재 경북대 박물관 앞뜰로 옮겨져 있다는데, 그 보존 상태가 비록 지금의 탑보다 나을지는 몰라도 우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이 작은 탑의 반에나 미치겠는가. 잘 다음어진 길을 따라 걷다가 보니 규모가 큰 옛 기와집과 마주했다. 이곳이 바로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정비된 남평문씨의 세거지라고 했다. 그곳에서는 이곳 세거지에 관해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이곳은 약 150년 전쯤에서 남평문씨들이 종가를 이루고 있었으며, 집들을 지을 때 기반이 된 석재들은 모두 이곳에 흩어져 있는 돌들로 삼았는데 모두가 사찰의 주춧돌이었을 것이라 했다. 그리고 법당자리가 되는 곳은 수봉정사라는 재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옛 사찰의 주춧돌들이 이제는 세도가의 기둥을 바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가 나 자신을 무거운 무게로 짓눌러 오는 것만 같다. 책을 보존하고 있는 인수문고에는 무려 1만 여권의 고서를 보관하고 있었고 책의 보존상태가 아주 좋았는데 모두들 해인사에 있는 장경각과 비교하면서 매우 흥미로워 했다. 옛적 일연스님께서 「역사연표」를 쓰시고 많은 불경을 간행할 때는 바로 이 자리에 수많은 불서들이 보존되어 있는 장경각쯤 되지 않았을까 하고 혼자 씁쓸한 생각을 해 보았다.
4) 문호 도은의 시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적인 중심의 한 곳인 비슬산의 자락에 인흥사를 낳게 하고 또 오늘에 와서 바로 그 자리에 세거지 인흥을 있게 한 것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크게는 자연이 낳은 하나의 조화와 인연이고, 작게는 이곳을 열고 이어온 사람들의 심력과 의지도 숨어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인흥에 관한 또 하나의 글로 고려말의 문호인 도은이 남긴 「기제인흥사」라는 시가 있다. 인흥사가 포산(비슬산 기슭에 있는데 옛날에 그 곳에서 눈과 반딧불을 짝 삼아 놀았다. 시주들은 때때로 와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스님은 맑은 낮에 앉아서 경을 말한다. 뜰에 있는 탑은 우뚝하게 서 있고 길을 끼고 있는 장송들은 하나같이 푸르구나 가장 머리에 남는 것은 황금빛의 어필이고 지금도 그 광채는 빛나는 별과 같도다 라 하였고, 또 「절에는 충렬왕이 하사한 금필의 편액이 있다.」라는 주기도 있다. 700여 년 전의 인흥사와 그 주변의 경관을 짐작케 한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성주편 불우난에 [인흥사는 비슬산 북쪽에 있으며 고려 공민황이 사액을 했고 이숭인의 시가 있다.」라 기록되고 있다. 비슬산의 불교유적은 말할 것도 없고 인흥 세거지를 중심으로 10리 안팎에는 많은 불적들이 남아있어 이것들은 모두 옛 인흥사와 유관한 것으로 짐작되며 앞으로도 세거지와 더불어 길이 함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대구문장지의 장서(천태산인 김태준116-118 |
조선에 장서가 이야기가 나면 수년 전 연희전문학교에 만여 권 도서를 기증한 전남 곡성 정씨를 첫째로 꼽고는 아마 그 손가락으로 대구 문장지(성명은 문영복1880~1930, 자가 장지, 호는 수봉인데 현재 이 장서는 인수문고로 보존 개방되고 있다.)씨 장서를 세어야 할 것이다. 하도 많은 소문을 들은 터라 일부러 대구역에 내려서 화원행 버스를 잡아탔다. 대구 시민의 유일한 교회 유람지로 퍽 한적한 곳이었다. 화원에서 동으로 한 마장쯤 골짜기로 들어가면 소송독류와 인산지수가 말하지 않아도 처사의 집같이 엄숙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 상투를 짠 선비님들이 얼른 5․6명 모여 왔다. 장서가 문장지 씨는 벌써 고인이 되었고, 그 자손 시채, 진채 제씨가 인계해서 유지한다고 한다. 따로 재실을 깨끗이 짓고 석병토전과 무림수죽이 모두 고아한 흥취가 있었다. 장서는 물론 옛날 한적 뿐이지만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영남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제현 문집류가 그 목록에 실은 것만 193종이니 기호 본위로 모은 규장각 도서관, 이왕직 도서관, 한림서림 등의 서적 목록에서 보지 못하던 것이 상당히 있었다는 것이다. 그 Dp로 문집의 일부만을 여기에 소개한다. 『고청집』1책, 『창계집』2책, 『남계집』2책, 『간이집』9책, 『분지집』2책, 『죽유집』3책, 『격재집』1책, 『존재실기』2책, 『설계집』2책, 『옥동집』1책, 『옥봉집』3책, 『연강재집』1책, 『모계집』2책, 『두암집』3책, 『도곡집』2책, 『송계집』1책, 『두암집』3책, 『도곡집』2책, 『송계집』1책, 『수현집』1책, 『문탑집』2책, 『창석집』10책, 『양직집』1책, 『겸재집』2책, 『표은집』2책, 『오계집』3책, 『낙촌집』1책, 『갈암집』21책, 『하당집』4책, 『낭산집』10책, 『밀암집』14책, 『대산집』27책, 『대산실기』4책, 『백불암집』7책, 『약산만고』9책, 『묵헌집』6책, 『번암집』1책, 『간웅집』12책, 『소산집』7책, 『입재집』24책, 『후산집』10책, 『천사집』10책, 『성호집』27책, 『면암집』7책, 『만웅유고』1책, 『대산집』10책, 『초암집』7책, 『학양집』5책, 『회병집』6책, 『슬재집』7책, 『만웅유고』1책, 『대산집』10책, 『초암집』2책, 『의암집』30책, 『영사헌집록』8책, 『용산집』2책, 『노주집』3책, 『매헌집』2책, 『정헌집』10책, 『정재집』27책, 『강고집』10책, 『역암집』7책, 『봉하집』2책, 『효처당유고』1책, 『면재집』3책, 『미강일고』1책, 『지족헌집』1책, 『삼원당집』2책, 『진암집』4책, 『임재집』7책, 『경재집』5책, 『척암집』19책, 『학호집』2책, 『아천집』1책, 『요재집』1책, 『석계집』1책, 『성암집』1책, 『만성집』10책, 『만구집』10책, 『명미당집』8책, 『소호당집』10책, 『방산집』12책, 『미산집』1책, 『경재집』1책, 『지암집』1책, 『침산집』2책, 『소산유고』2책, 『서유자집』1책, 『학고집』2책, 『집어』5책, 『용산세고』3책, 『석문세고』1책, 『달성세고』1책, 『문소세록』2책, 『하산삼세고』2책, 『다의당실기』1책, 『송은실기』1책, 『일두실기』1책, 『아암실기』1책, 『퇴재실기』1책, 『이우당실기』1책, 『삼충실기』1책, 『도촌실기』1책, 『수우당실기』2책, 『포산곽씨삼강록』1책, 『상현록』1책, 『안락당창효록』1책, 『어초정효행록』1책, 『경정공필첩』1책, 『남평세고』2책(이상 각 1책) 영남에서 이조지피가 안 되는 문집을 남제한다는 평판은 있으나마 병호 양가의 문집을 이렇게 모아 놓은 집은 희소한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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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거당 문고(청명 임창순)외119-126 |
문고가 있는 광거당은 경북 달성군 화원면 인흥리에 있다. 이곳은 본래 고려 시대에 『삼국유사』의 저자인 명승 보각국존 「일연」이 거주하던 인흥사의 유지이다. 사찰이 어느 때에 없어졌는지 미쳐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아직도 당시의 패초의 파와가 집터와 논밭 사이에서 산견되어 유심인으로 하여금 왕석의 고승의 유촉을 조문하게 한다. 다행히 만권의 전적을 간수한 광거당을 위시하여 주인 수봉 선생의 웅걸한 유택이 자리잡고 있을을 볼 빼 비록 유석의 분별은 있으나 문풍이 다시 이 자리에서 떨쳤던 것은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닌 듯하여 다소 허전한 마음을 위로해 준다. 문고의 내용에 대하여 이미 제사에서 상세히 밝혔으므로 구체적인 설명을 피하겠으나 다만 일반 문고와 다른 몇 가지의 특색을 지적하려 한다. 첫째, 본 서책은 개인 일대의 수집품이다. 서적은 수 백년에 걸친 누대의 전세품과 개인이 당대에 수집한 것으로 구별된다. 전세품은 임란이전부터내려온 것과 임란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서지학적 참고자료로 희귀본이 많은 것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후자일 경우에 희귀본은 비교적 적다. 개인 일대의 수집일 경우에는 그 내용이 자신의 학문과 취향을 따르게 됨으로 종류가 잡박하지 않고 매우 체계적이며 일관성 있는 간결한 선택을 거쳐서 구입하게 된다. 그러므로 서지학적인 희귀가치가 적은 대신 수집가의 성정과 체취가 그대로 풍기며, 또한 전세본에서 흔히 본 수 있는 결본이 적게 된다. 본 서책은 수봉선생 개인의 수집품이라는 데에 우리는 고인에 대한 친근감을 가지게 된다. 또한 특기할 것은 이 문고는 당초부터 그 보존에 철저를 기하였기 때문에 결본이 거의 없는 완정본인 점에서는 국내 어느 도서관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자랑거리라고 할 것이다. 둘째, 수장범위가 편협한 지역성을 초월하였다. 이조 봉건사회의 특징인 당쟁은 학문에까지 크게 미쳤고, 당색과 병행한 학파는 지역별로 그 영토를 할거했기 때문에 서적의 교류조차 차단되어 목록만 보고도 그 소재지의 지적을 식별할 정도로 색깔이 선명하였다. 우리 학자들의 편협한 당쟁의식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본 문고는 영남에 있으면서 기호출신 선학들의 저서가 상당한 수를 차지하였다. 비록 가까운 연대에 속한 수집이라 할 지라도 이는 단연 진보적인 학문자세였음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중국판 서적의 보고 본 문고에서 언뜻 눈에 띄는 것은 고판 및 근대 석인판이 많은 중국본이다. 이 책들은 대개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중국에서 직수입한 것으로 수집자가 전통적 성리학범주 안에서만 맴돌지 않고 당시 중국학자들의 새로운 학설에 관심을 크게 기울였음을 볼 수 있으며, 또한 후학을 계발시키려는 새로운 욕구에 대하여 우리는 경의를 표한다. 넷째, 풍부한 사료 서적 특징 가운데의 하나로는 우리나라의 많은 야사를 볼 수 있다. 야사류는 인본이 적고 대부분이 필사본인데, 본 문고에는 구입하기 어려운 것은 직접 수사비치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는 역시 수집자의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 밖에 지방장서에서 보기 드문 것으로는 우리나라 및 중국 근대의 문학대가들의 문집이 많이 수장된 것과 명인들의 진적서화첩과 비첩류가 많은 것 등을 들 수 있으나 번잡을피하여 이상으로 그 특징을 열거해 보았다. 또한 이 보고를 물려받은 후손은 선생의 수택을 매만지며 유덕을 우러러 문고의 연구 보존책을 확립함은 물론, 다른 후학들에게도 열람의 편의를 제공하여 선생이 끼친 혜택이 일분의 사유에만 국한되지 않게 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또한 「인수문고목록」간행사에서도 문고의 내용과 성격 등을 여러모로 살필 수가 있다. 《간행사》 전적의 종합목록을 작성하는 사업을 시작한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그동안 서울에 있는 개인장서를 고사하여 목록을 편집해 오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지방의 적적으로서 경북 달성군 화원면 인흥동에 있는 인수문고의 소장본을 수방하여 여기에 그 목록을 간행하게 되었다. 인수문고의 서적은 대개 수봉 문영박의 수집 피열본으로써 원래 광거당과 수백당에 장치되어 왔으며 산질이 없는 완본으로 일가소장으로써 질량이 공히 보기드문 문고이며 특히 당판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의 하나이다. 문영박은 남평인, 삼우당 문익점의 후손이며 재기와 경제가 웅섬한 후은 문봉성의 이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장지요 수봉은 아호이고 수백당이라고도 한다. 인품과 학문이 위대한 분으로 일찍이 치주 손정은과 만구 이종기에게 수학했다. 원근 인사의 추종이 많았으며 특히 당시 거유인 심재 조긍섭과는 막역한 교분으로 왕래가 잦았고, 또 문장과 사학으로 저명한 창강 김택영과도 심교로 서신이 서로 끊이지 않았다. 이로써 당시의 광거당은 사우강론의 집합소가 되어 학문진흥에 크게 공헌했고 또 국내 유수한 문집 등도 많이 출간하였다. 한 예로 약산 오광운의 유고를 간행한 것이다. 약산은 국포 강박과 같이 영조 조에서 불우했던 미웅의 후계자로서 경학과 문장이 탁월했으니 기호에서는 약산집의 간행을 부담할만한 남인이 없는지라 그이 육대손 병서가 유고를 가지고 영남의 남인 유지를 찾던 중 수봉을 만나 극력 협찬을 얻어 약산집이 드디어 간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퇴계 선생 이후 사학의 중조로 알려진 대산 선생의 실기와 이기휘편 제양록 등을 간행하였고, 예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결송장보를 출간하는 한편 고려조 명신 문공유와 충숙공 문극겸 양대의 필첩과 실기를 출간하기도 하여 당시의 인흥동은 문화의 산실로서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금 이 문고는 문씨 세거지인 인흥동에 있는 수봉정사 내에 병구로 마련된 서고에 보관되고 있으며 그 많은 전적이 이 목록을 통하여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책의 판종을 대별하면 당판, 국내각판 초고본, 선현 유묵 등으로 구분 할 수 있으며 총 1,059종에 만여 권이 된다. 끝으로 이 목록을 작성하게 된 것은 임창순, 천혜봉 양교수의 사전답사로 위시하여 목록작성에는 강신혁, 최순희, 박성학 제씨가 월여에 걸친 지리고사 끝에 편집한 것으로 천혜봉 교수가 교열을 담당했따. 1975년 강주진
그리고 서지학의 대가인 이춘희가 1973년에 인수문고를 중심으로 「문중문고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상세하고도 전문적인 분석과 해석을 한 장편의 논문을 쓴 바 있다. 새로운 형태의 근대 도서관이 생겨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는 대체로 네 가지 형태의 도서관이 있었다. 즉 그 하나는 규장각과 같은 왕립도서관이며, 둘째는 성균관․향교․서원 등 교육기관에 설치되었던 학교도서관이고, 셋째는 문중의 자제교육을 위해 개인 또는 문중의 자금으로 설치된 문중문고이다. 이밖에 개인문고가 있었다. 규장각․서원․향교 등의 장서에 관하여는 부분적으로 남아 연구된 바 있으나 문중문고에 관하여는 전혀 관심 밖에 있었던 것 같다. 필자는 1968년 경상도 지방의 서원문고를 답사하던 중 봉화의 김씨 문중에서 설립한 영규헌문고를 보고 우리나라에 문중문고가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후 문중문고에 대한 관심을 늘 두고 있던 차,지난해에 또다시 문씨의 문중문고라고 할 수 있는 수봉정사문고를 대구 화원에서 보고 문중문고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도서관사연구에는 물론 이조말의 교육 문화 및 문중사회연구에도 일조가 되겠기에, 우선 두 개의 문중문고만이라도 필자가 직접 답사하고 알고 있는 바를 정리하여 소개하는 바이다. 후일의 문중문고에 대한 보다 많은 발굴과 연구에 기대한다. 수봉정사문고는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인흥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창설자는 한말의 지방부호이며 독지가인 문박 선생이다. 선생의 자는 장지, 호는 수봉 혹은 수백당이라고 하였다. 수봉정사는 곧 선생의 호를 따서 이름한 것이며, 정사는 본당과 서고 두 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고는 약 7․8평 내외의 아담한 건물로 출입구 위에는 존안각이라는 전서 편액이 걸려있었다. 이 문고의 설립을 위하여 장서를 언제부터 수집하기 시작하였는지 그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추측컨대 한일합방으로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1910년 전후가 아닌가 한다. 본 문고의 창설자인 문수봉의 교우관계나 본 문고 소장도서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징등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본 문고의 장서 중에는 당시 중국으로부터 직수입한 거질의 청판본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는 모두 청강 김택영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장서의 양은 모두 6,948책으로 서원문고와 비교해 보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만큼 많은 수이다. 서원문고로서 장서를가장 많이 보관하고 있는 곳이 안동의 도산서원인데 그 장서 양은 약 4,400책 정도에 불과하니 사실상 지방의 문고로서는 본 문곡가 양적으로는 가장 많은 서책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리고 단 한권의 낙질도 없다는 것은 도서수집에 있어서나 그 관리에 있어서 매우 용의주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장서의 관리는 서원의 경우와 비슷하며 미리 마련된 규칙에 따라 철저한 감독을 하였다. 문고에는 광거당 전수규약과 수봉정사 서적수호교약에 서적의 보존관리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문중문고는 이조사회의 제 문고와 근대도서관의 중간에 위치한 과도기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으며, 비록 그 규모는 작으나 그 설립이 관이 아니라 민간의 힘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들 문고는 본질적으로 이조사회 제 문고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사회에 적합한 것이었다. 문중문고는 근기보다는 보수성이 강했던 지방에 일어났던 현상으로 여겨지며, 그 수도시설이 간단했던 서당에 비해 극히 적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끝으로 문중문고 당사자 및 도서관 입안자들은 이들 문고를 한 역사적 유물로만 방치할 것이 아니라 오늘의 도서관과 어떤 유대를 맺어 예를 들면 그 지방의 대학이나 공공도서관 또는 마을문고 등과 제휴하여 계속 이용되고 발전될 수 있는 길이 모색되기를 바란다.
◆ 사회적 활용도 지금도 서책의 참고와 열람을 위해 찾아오는 국내외의 학계인사들이나 일반관람자에 이르기까지 그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고, 연전에는 서울에 있는 전문출판사인 경인문화사에 의해 문고소장 문집 가운데 100여종과 기타 상당량의 문헌을 영인 반포해 사회적으로 활용한 바도 있다. 그러나 문중문고가 「이조 말 유림사회의 부산물로 나타난 보수적인 도서관이었기 때문에 다음 세대의 근대도서관 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1920년대 일제의 식민지 도서관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어느 서지학자의 분석에 유념하면서 인수문고도 앞으로 어떻게 수호유지하여 나가며 또한 활용해야 할 것인가가 크고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
중곡서고유감 외127-131 |
◆ 중곡서고와 거경서사 인수문고 경내에 주로 20세기에 간행된 한국학 중심의 책 약 5,000권을 장서하고 있는 중곡서고가 병설되어 있다. 19세기까지의 전적문고인 본 문고에 보첨하는 것을 목적으로 모은 책들이아. 외형은 3칸 한옥이나 역시 시멘트 콘크리트 구조이며 거경서사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1003년에 지었다. 거경서사는 인수문고를 건립할 때 같이 지은 열람과 담론의 공간으로 전면 3칸 겹집인 조촐한 규모의 목조건물이다. 그리고 1982년 같은 해에 문고 전면에 4칸의 목조건물로 관리사옥을 함께 지었으며 수봉정사와 문고로 통하는 협문이 각각 나 있다. 이로써 문고 전체의 구도가 짜여지고 광거당 수봉정사 그리고 아홉 대소가의 제택과 더불어 오늘의 인흥으로 짜임새가 갖추어졌다. 「중곡서고 유감」과 학우 김기동이 쓴 「거경서사기문」이 서고와 서사의 내력과 집에 담긴 뜻을 살피는데 도움이 될지도 몰라 아래에 싣는다. ≪중곡서고 유감≫ 중곡서고의 책은 비록 나 개인이 수집한 것이나 인수문고의 보첨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나는 일찍이 만권당의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유관한 학문에 전념할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유속에 젖어 반세기를 보냈다. 미성의 꿈에 대한 아쉬움과 향념으로 금세기에 간행된 한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회와 경제 등에 관한 책을 주로 모아보았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을 인사동의 헌책방과 신간서점을 출입했고 또한 알찬 학술회의나 서평도 살피기도 했다. 해외 나들이나 체류할 때면 책가게를 찾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모아진 것이 근 5,000권이다. 1982년 명실공이 인수문고가 건립된 후 10년만인 1993년 그 옆에 작은 규모로 서고를 지어 책을 장치하고 「중국서고」라고 현판을 하니 나의 작은 바람이 이루어져 더 없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가운데는 한국의 사서나 사료만도 1,000권을 헤아린다. 조선왕조실록과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사료총서와 역사학보 등 각종 자료 그리고 일제총독부가 편찬한 43권의 조선사, 66권으로 된 세계의 명저 등도 있고, THE KOREAN REPOSITORY나 THE KOREAN REVIEW 등 외국인이 쓴 책도 100여 권이 있다. 이십오사 등 중국의 서적도 만만치 않고 주요 사전류와 각정 도록이나 발췌한 논문들도 상당수다. 한 권의 책을 얻기 위해 몇 차례나 어려운 걸음도 하고 때로는 청탁도 마다하지 않는 등 나도 책에 관한 이야기꺼리가 적지 않다. 본 본을 구하지 못해 영인본으로 대신한 경우도 많았다. 모두가 나의 손때가 묻은 책이어서 손에 익었고 지금도 비좁은 서고의 한 모퉁이에 앉아 책을 펴노라면 시공을 잊고 만다. 그래서 책은 사람에게 없어선 안 될 양식이요, 더욱이 나의 많은 것이 담긴 중곡서고는 더없이 소중한 곳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가 책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고, 가져야 할 사람이 가져야만 살아 숨쉬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언 20세기가 지나가 버렸다. 비록 크게 내어 놓을만한 것은 못되나 중곡서고로 본 문고에 20세기의 관계서적을 다소나마 더 했으니 앞으로 누가 21세기의 새로운 책을 첨가한다면 인수문고는 더욱 값진 문고가 될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나의 새로운 바람이기도 하다. 2001년 봄 중곡 《거경서사기》 중곡 문희웅은 나의 오랜 학우이며 본래 성품이 넉넉하고 자질이 빼어나 출중의 기품이 있었다. 과시 한 시대가 그를 중히 여기는 바 되어 일찍이 중앙에 나아갔으며 분망불가 속에 오십성상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가운데도 선세의 상재지리인 인흥에 대한 향념은 남다른 바 있어 선인의 수택을 상신하는데도 많은 일을 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계해년에 나라의 도움으로 인수문고와 관리사옥을 신축하는 과정과 서책의 열람과 훈고를 위해 별도로 서사를 건립한 것은 기록할 일의 하나라고 하겠다. 그 후 계유년에는 본 문고를 보첨하는 중곡서고도 병설, 광거당과 수봉정사와도 잘 어울리는 오늘의 포치를 이루게했다. 인수분고는 만 권이 넘는 국내외의 귀중한 전적이 충동한 서고로 왕시 많은 학자와 참고자들이 찾았고, 금일에도 그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어 경향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소중한 문고를 수호하고 학문과 담론을 위하여 세운 양용삼간의 서옥이 바로 거경서사이다. 거경과 궁리는 주자철학의 근간이며 서산 김홍락도 거경으로 삼았다니 더없이 훌륭하다. 서사 안에는 독서양성원가교 적학참미황조풍이라는 소당 윤석오의 대련과 창명 임창순이 휘필한 청한당의 액자 그리고 첨하에는 혜사 노재봉의 편액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끌게한다. 중곡이 이 서사를 낙성하고 경영함에 있어 그 목적과 필요를 위해서는 누구라도 함께 사용할 수 있을 것ㅇ임을 밝혔다고 하니 상고하건대 그 소이는 소동파의 노산이군산방기에 나오는 인자지심과 흡사함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 의아권세에 급급하여 서수도덕하는 참된 선비가 적고 실학유풍이 날로 자취를 감추니 거경궁리에 무실역행함이 더할 나위 없는 도리라 하겠다. 이제 그가 길상이 우합한 인흥향리에 귀거래하여 교목의 보전과 지경을 실천하면서 수졸을 즐기고 오는 이에게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있으니 이우보인 이문회우를 익혔던 금란지우로서 감회가 새롭다. 나 일찍이 유속에 어울려 이미 연참을 버린 지 오래여서 중곡의 참뜻을 다소나마 헤아렸는지 의구되나 거경서사가 인흥 그리고 인수문고와 더불어 무궁연면하기를 기원하면서 감히 무사로써 기하는 바이다. 1998年 戊寅 小春 永嘉 金起東 記 |
목수 신영훈148-169 | |||||||||||||||||||||||||||||||||||||||||||||||||||||||||||||||||||||||||||||||||||||||||||||||||||||||||||||||||||||||||||||||||||||||||||||||||||||||||||||||||||||||||||||||||||||||||||||||||||||||||||||||||||||||||||||||||||||||||||||||||||||||||||||||||||||||||||||||||||||||||||||||||||||||||
【주】다음 글은 목수 신영훈이 1973년 정부의 문화재전문위원으로서 인흥을 찾았을 때 요청하여 쓴 것이며, 글 가운데 수봉파 무중은 후은공파 문중이 옳다. 당시는 지금의 인수문고 건물이 세워지기 전이다. 1) 1973년 7월 15일 불과 수시간의 짧은 동안이었지만 경북 달성군 화원읍 본리동 397번지 소재의 수봉공파 문씨 문중의 한 취락인 와즙의 수 동 주가를 조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문중의 후손들이 그들의 주가가 지닌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려는 갸륵한 노력이 동기였다. 너무 짧은 시간에 여러 동의 건물을 간과해야 하는 벅찬 조사였기에 그 집들이 지닌 가치를 충분히 은미하고 탐색하기에는 미흡하였지만 근래에 보기 드문 취락의 배치와 비록 연대는 높지 않으나 깨끗하게 유지되어 온 조선시대 주가양식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퍽 다행스러웠다. 이때 조사한 간략한 기록과 그때 느낀 인상을 토대로 하여 요청에 따른 개략보고를 작성하여 우선 면책하는 방도를 차리기로 하여 이 미흡한 글을 쓰게 되었다. 후일 차근히 더 심사할 수 있을 때 보다 더 근실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이 집의 진면목을 밝히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개략만을 적기하려 노력하였다. 2) 잘생긴 산의 기슭에 송림이 우거졌고, 그 송림에 여러 동의 기와집이 즐비하다. 우선 그 첫 인상은 매우 정결하다는 느낌이며, 지세와 판도가 어울려 마을은 안정감을 갖추었다. 비미한 대지에 잘 자란 소나무가 지금은 비록 헐벗었지만 뒤산의 무성하였을 옛날의 숲을 말해주고 있음으로 그 산에 나무가 우거졌을 때 여기에 마을을 포치한 것이라면 매우 득의의 개기였다고 사료된다. 마을은 개울가의 길을 따라 들어가게 되어 있다. 널찍한 논의 샛길로 꼬부라져 접근하게 된 길을 제법 널찍하여 승용차가 어구까지 출입하는 정도이다. 차는 동리 중간쯤의 느티나무 그늘에서 멎었다. 수려한 문중의 노옹들의 마중을 받았다. 지세와 지미에 따라 문중의 제공들이 기대하였던 대로 이목이 수려하다. 반드시 이 동리의 물맛이 좋을 것 같다. 마을 앞 밭 가운데에 파탑 일기가 있었다. 지금은 도치되거나 왜곡되게 그 부재가 놓여 정연하지 못한 채 석재 일부만이 잔존되어 있으나 남아있는 탑신과 옥개석으로 미루어 상당히 정제하였던 석탑이었다고 추정된다. 3층이었으리라고 보인다. 탑신각의 반보 층급과 조법의 정치함으로 미루어 이만한 석탑이면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을 만한 작품이다. 탑은 신라 시대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그 제작연대는 고려 시대라고 추정된다. 마을은 대략 서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반듯한 대지로 구획된 지역에 수봉정사 광거당의 공동건물과 백채가와 시채가․진채가․형채가․노채가․기채가 그리고 복채가․현채가․혁채가 등의 대소와가가 축에 따라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런 주가의 배치법은 매우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자연취락이 한집 한 집이 첨가되면서 하나의 가군을 형성하여 그 도로의 설정이 꼬불거리는 것이 우리네의 일반적인 양상인데 비하여 이 마을은 처음부터 계획된 구역에 따라 하나하나의 주가가 차례로 자리 잡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특성을 지녔다. 이는 추측컨대 이 마을을 개기한 선조께서 형안이 있어 장차 후손들의 증가를 예견하고 가기를 구획하여 두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지 않고는 동시에 주가를 건축하지 않는 한 이처럼 정확하게 축에 따라 구획되고 배치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적도에 의하면 지번에 따라 20목으로 구획되었다.(별표 참조) ◎ 後隱公派門中의 地番構成
위의 표에서 보면 일견 잡다한 듯 보이나 원래의 구상은 375-1의 대지와 397-1의 대지 사이에 설정된 도로를 주축으로 하여 도로 좌측에 사기, 우측에 사기로 구획되었던 듯 하다. 후일 가문의 번창으로 후손이 증가함에 따라 그 기본구획을 다시 세분하기에 이르렀고 수봉정사와 광거당은 이 기본구획에서는 크게 주시되지 않았던 듯하다. (지적도 참조) 도로 좌우 각 사이의 구획은 주축도로와 그 구획선을 병행시켜서 설정하고 각기는 남북 장축의 구형으로 네모반듯하게 하여서 경우에 따라 그 구형대지를 반분하면 또 하나의 훌륭한 대지로서 사용할 수 있게 마련되었다. 이는 마치 조방에 따르는 도시구획법과 같은 것으로 이른바 기자정전법이라는 도시계획법과 같은 안목으로 기대를 결기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도시계획법은 우리나라에서는 고류려의 국내성, 요동성, 평양성, 신라의 서라벌, 고려의 송도, 조선의 한양, 남원성 등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있다. 정전도시계획법을 축소시켜 한 마을을 계획하였다는 사례는 아직 조사보고 된 것이 없으므로 우리나라 취락 중 여기의 가기 배치는 아주 드문 예라고 할 수 있고, 드문 예라는 의미는 거의 유일에 가까운 것이라는 뜻이 포함된다고 우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점에서 이 마을은 변형이 용납되지 않으며 장차 유지 관리에 주목하여야 되리라 생각한다. 도로의 확장이나 토벽의 현대화 기타의 개량이라는 서투른 안목으로 개장되면 이 유일의 수명은 그 한도를 다하는 정도에 이르게 됨으로 현상대로의 보존관리에 지극함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3) 앞에서와 같이 정연히 구획된 대지에 다음 표와 같은 주가가 현존하고 있다. 이 표의 길이는 편의상 미터법을 사용하였고 건평은 곡척을 이용하여 건평으로 산출하였으므로 조영당시의 사용척도와는 자연히 그 내용이 달라 소수점이하의 수치 등이 보이게 되었다. ◎ 후은공파 문중의 주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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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에서 대구로 (한문원문과 한글 해설부분중 한글해설 부분만 기록함198-224 |
21세 휘 세근은 지우의 장자로 충선공의 9셋손이다. 동덕랑이었고 16세기 초에 송경으로부터 대구의 달구현으로 이거했다. 연산군 전후의 어려웠던 시대였고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전해오는 말로 달성서씨인 처가가 있는 곳으로 와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대구 입향조이며 지금은 대구를 중심으로 달성, 경산, 청도, 군위 등 경북 일원에만도 그 자손이 수백호가 살고 있다. 대구 입향의 내력과 지금은 인흥 혜곡으로 산소를 옮긴 사유 등을 밝힌 통덕랑 묘비문을 첨가한다. 22세 휘 동현은 세근의 맏이로 통덕랑이었고 아들 23세 위 영남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선략장군 훈련봉사를 맡았으며, 당시를 기록한 용사록을 남겼다고 한다. 영남의 아들 24세 휘 만천은 인성이 높고 맑았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책과 거문고를 즐겨했다. 그리고 통덕랑 묘소 아래 모신 사세팔위의 묘소에 관한 내력과 경위는 「사세묘단비」에서 밝히고 있다. 25세 휘 진장은 만천의 둘째 아들로 절충장군이며 정삼품에 가자되었으나 관직은 알 수 없다고 비문에 쓰고 있다. 26세 휘 재징은 진장의 맏이로 재주와 기량이 뛰어났으며 대구영성축감동을 맡았고 가선동지중추부사로 추증되었다. 묘비를 세워 이장의 사유 등을 밝히고 있다. 27세 휘 의찬은 재징의 셋째 아들로 통훈대부군자감정으로 증직되었으며 역시 서중리에 있던 묘를 인흥혜곡으로 옮긴 사유 등을 비문에서 적고 있다. 서중과 평리 등지에 있던 세근 이하 6대의 묘소가 대구시의 확장으로 모두 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8세 휘 덕수는 의찬의 둘째 아들로 현종 때 공조참의로 추증이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29세 휘 무일(1777~1833)은 천성이 굳고 후했으며 어려운 족친이나 이웃을 많이 도와Tr,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묘소에는 「증공조참의남평문공덕수지묘」의 묘비만 있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왕조가 새로 들어서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문벌의 영고성쇠도 뒤따라TEk. 삼우당의 후예들도 점차 빛을 잃어가 사회적으로 크게 저명하거나 높은 벼슬을 한 분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초야에 묻혀 학문과 수분으로 성맥을 유지해 왔다고 하겠다. 대구로 내려온 통덕랑 세근의 후손들도 그러하다. 8세손까지 한 두 분을 제외하고는 공적으로 두드러진 업적이나 사회적으로 크게 남겨진 것이 없으며 그저 나름대로 끊이지 않고 가계를 이어왔다. 대구 입향조 이래의 조상묘소가 모두 보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4) 중흥의 기운 그런 가운데 덕수와 무일 대에 이르러서 중흥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무일의 묘비문에 보면 「성품이 본래 효우스럽고 언제나 어려운 친지들을 돌보았으며, 만년에는 인흥리에 별당을 지어 자손들을 교양하는 방편으로 삼았다.」는 대목이 있어 이를 짐작케 한다. 30세 휘 경호(1812~1874)는 호가 인산재며, 무일의 넷째 아들로 천성이 인자하고 후덕했으며 또 위엄이 있었다. 그는 사람의 도리가 조상을 숭상하는 일이 그 첫째임을 강조하고 중형 휘 선호와 함께 조고와 선고의 묘소를 가꾸고 원모재와 영모재의 두 재사를 세워 추모했다. 분가를 할 때 화원 인흥의 윗마을을 택해 그는 가문의 중흥을 그리며 자제들의 공부에 각별한 정성을 쏟았다. 이웃에도 많은 것을 베풀었다. 거실에 인산재라 편액하고 평소의 시문과 기문을 모은 「인산재잡록」을 남겼다. 말년에 미리 살펴 둔 마을 왼편 천수봉 기슭의 새 터에 집을 짓고 살기시작한 것이 인흥을 개기한 시초이다. 천성이 인자하고 후덕했으며 종족은 친소와 원근을 가리지 않고 도왔으며 사람을 사귈 때는 오로지 화후충신으로 대하였다. 그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고 손자 10명 손녀 2명 그리고 35명의 증손자녀들을 두었다. 창강 김택영은 그가 쓴 묘갈명에서 「예로써 노비를 대한 처사의 깊고 인후한 덕은 공경할 일」이라고 말하고, 그의 이력을 살피고는 「장지 부자의 행실이 이에서 근원하였구나」고 했다. 6․25동란 때 비의 일부가 손상되어 1996년에 새로 개수하였다는 사실도 부기되어 있다. 31세 휘 달규(1832~1905)는 인산재의 둘째 아들로 어릴 때부터 도량과 재주가 출중했으며, 풍채는 보는 사람이 저절로 존경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사창법의 시행에 따라 마을에서 사정을 맡아 업적을 남기고 뒤에 통정대부 행돈녕부도정에 제수되었따. 맏형이 일찍 졸해 장자인 휘 봉찬을 양자로 보냈으며 부군과 함께 새로 개기한 곳을 넓혀 기초를 다졌다. 서숙을 마련해 자제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며, 죽곡의 선대묘소 가까이 추모재를 지어 해마다 반년 넘게 그곳에서 지냈다. 수봉이 쓴 조고부군가장에 보면 인흥세거지의 개기에 있어 부군을 모시고 「시작에서 끝까지공사에 직접 참여하여 기초을 닦았다.」고 했다. 그리고 「연만해서도 제사 때는 반드시 헌작을 했고, 성묘 가는 행사에도 셋째 아우와 함께 나귀 한 마리에 어린 시동을 데리고 두루 참례하고 돌아왔다. 간혹 주위에서 만류하게 되면 여생이 많지 않으나 다만 나의 정성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어 본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년 이후에는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하면서 사랑채 남쪽 창 아래 오죽 10여 그루를 심어 완상했다. 그래서 스스로 죽헌이라 호를 하였다. 아들 4형제와 손자 11명, 손녀 4명 그리고 50명의 증손자녀들을 두었다. 「공은 근본에 힘쓰고 떳떳함을 따라 일찍이 남에게 명성을 구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있는 심재가 쓴 묘갈명이 있다. 5) 세거지의 확립 32세 휘 봉성은 호가 후은이다. 형 봉찬이 맏집인 철규가로 출계함에 따라 죽헌가를 이었다. 자태가 웅장했고 사람됨과 품성이 훌륭했으며 경제에도 탁월한 역량이 있었다. 부조가 시작한 기초를 바탕으로 일찍부터 살림살이에 주력한 결과 큰 부를 이루었다. 지금의 인흥 세거지의 전역을 하나로 만들었으며 그 위에 여러 가지 일을 평쳐 나갔다. 문호를 넓히기 위해 아들로 하여금 그에 걸맞는 제택을 짓게 하는 한편 예 서사 용호재를 헐고 광거당을 세웠다. 손님을 맞고 책을 갈무리하는 곳으로 삼았고, 스스로도 주인이 되어 그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자신이 학문과 경제를 양립시킬 수는 없었으나 자손의 교육과 집안 일 등 뜻하는바 거의 모든 것을 성취했으며 만년에는 어려운 사람이나 공사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휘 영근․영박․영환의 세 아들과 손자 11명 손녀 4명 그리고 59명의 증손자녀와 수십명의 외손을 두었다. 십재는 묘갈명에서 「행실의 넓음은 자로는 잴 수가 없고 지극히 검소했음에도 문사가 찾아와 혹 수십 일을 머물러도 옷과 음식을 대접하는 데 아낌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타고난 성품이 우뚝하였고 늘 처사를 보면 깊은 숲 속의 용호의 기개를 엿볼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
2만권 고서 소장한 한국 최고의 민간 아카데미 |
- 조용현님의 명문가 이야기(푸른역사 출판)에서 발췌 - |
전통적인 도서관은 왕립도서관(규장각 등) 학교도서관(성균관, 향교, 서원등) 개인도서관과 유교적인 토양에서만 가능한 문중문고(문중 자녀들 교육용) 로 나눌 수 있다. 상당수는 중국에서 수입한 책으로 선별은 김영택(유학자요 문장가로 한국소사, 한사계 등의 저서가 있으며 을사보호조약후 통분하여 상해에 거주함)님의 추천으로 구입한 책을 목포로 보내면 소달구지로 남원, 함양, 거창을 넘어 대구로 수차례에 걸쳐 운반되었다. 대표적인 가옥은 종갓집인 문정기씨 가옥으로 반듯한 흙담에 손질된 마당의 잔디, 윤이나는 현관마루 정감있는 사랑채 온돌, 청결한 수세식 화장실 안채옆 채마밭 모두 사람의 손길로 다음어져 있어 전통가옥에서 연상되는 생활의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고 한옥이 지닌 고풍스러움과 낯익은 편안함, 그리고 양반집에 와 있다는 품격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어 법도를 지키는 명문가 후손들이 사는 동네답다 문씨 집안의 문풍이 전국적으로 알여진 계기는 1910년 광거당이 설립되면서이다 광거당은 본래 재실로 지었으나 광거당내에 만권의 책을 비치한 만권당이 설치된 뒤로 전국의 문인과 학자들이 방문하여 책을 읽고 학문과 예술 그리고 조선의 앞일을 걱정하고 토론하는 문화공간으로 사용됐다. 살롱이면서 도서관이고 아카데미 기능을 가진 복합문화 공관인 셈이다 인수문고는 1981년 정부 보조를 받아 수봉정사 옆 공터에 별도의 건물을 지었고 1993년에는 인수문고 옆에 중곡(中谷)문고에 5천여권의 현대의 서적을 보관하였는데 관료와 정치인을 거쳐 서울신문사 사장을 지난 수봉의 손자인 문태갑(文胎甲)씨가 설치하였는데 1955년부터 인수문고 청지기 역할을 하는데 신학문을 하지 못하게 했어도 대학을 다닌 것은 조부님이 돌아가신후 신학문 금지가 해제가 되어 최초로 신학문을 했다고 한다. 현재 인수문고는 동양사상과 고전을 연구하는 대학교수들이 많이 찾아오며 광거당도 개방하고 있으며 학술세미나 장으로 사용 요청시 집안에서 협조하고 장기간 열람한 사람들을 위하여 거경서사도 개방해 놓고 있다고 한다. |
인흥 방문기(2002년 6월 문병달 작성) |
08:45 병준충선공파 부회장, 차범부산종친회 총무, 병준님과 함께 목화 이식을 위해 부산을 출발했다. 대청에서 보이는 마당은 온통 꽃밭인데 종부님이 꽃을 좋아해서 3년전 산청에서 목화꽃을 본 후 씨앗을 구하여 목화를 3년째 기르고 있다고 하시고, 야생화도 손수 심어 가꾸고 있다고 했다. 행랑살이가 없어진 후에 2칸의 행랑채를 헐어 정원으로 만들었다는 곳에는 배와 포도가 녹음속에 종이 고깔을 쓰고 영글고 있다. |
첫댓글 언제 한번 시간을 내어 가봐야 하겠군요.
좋은 곳 안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