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慧超) (704~ ?)
신라 후기의 승려오 중국 및 인도 구법승.
혜초는 신라의 승려로 어릴 때 출가하여 723년 당나라로 건너가, 광주에
서 남인도 출신으로 밀교에 밝던 금강지(金剛智) 삼장의 제자가 되었
다. 그 후 금강지의 권유로 나신국을 경유하여 해로로 인도 동해안에 도
착하여, 석가가 불교의 이치를 깨달은 부다가야를 비롯하여, 그 깨달음
을 처음으로 설교한 녹야원, 석가가 세상을 떠난 곳인 쿠시나가라 등 오
천축(五天竺)의 불교 사적지를 두루 순례하였다.
그후 부서, 북동의 여러 나라를 두루 순례하고 10년만인 727년(성덕왕
26) 11월 당나라 안서도호부가 있는 구자에 도착하고, 그후 다시 안서로
부터 동쪽의 여러나라를 답사하고 장안에 돌아왔다. 이 10년 동안의 여
행을 기록하여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3권을 지었다.
그는 733년 1월 금강지로부터 법을 이어 받고, 그 뒤 당나라에 머물면
서 774년 금강지의 법통을 이은 불공(不空) 삼장에게서도 법을 이어 받
아, 불공의 6대 제자의 한사람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780년 오대산 건원
보리사에 들어가 "대승유가대교왕경"에 서(書)했다.
그 밖의 자세한 것은 전하지 않으나, 그의 저술인 "왕오천축국전"의 일
부와,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와경서" 1편, "하옥녀담기
우표" 1편이 모두 현존하고 있다.
불경을 연구하고 번역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힘쓰다가 그 곳에
서 열반하였다.
그가 인도를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 학
자 펠리오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세계적으로 중요한 자료로서 파리 국
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신라의 스님 혜초가 727년 인도와 주변의 여러 나라
를 순례하고 돌아와 쓴 여행기다. 여기서 '천축국'은 지금의 인도를 말
하며, 당시 인도가 다섯 지방, 즉 동천축, 서천축, 남천축, 북천축, 중
앙천축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오천축국'이다. 그리고 '왕'이란 말
은 그 곳에 갔었다는 한자말이다. <왕오천축국전>은 인도 지방 여행기라
는 뜻이다.
원래는 세 권이었으나 앞뒤가 잘려진 채 발견된 이 책은 1천2백여 년 전
의 인도를 알 수 있게 되었고, 중국과 인도를 잇는 도로 사정을 아는 데
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 역사적인 가치도 큰 것으로 평가된다.
동국대학교 불교사회문화연구원/뇌허 김동화 전집/2001.10
혜초가 태어난 것은 신라 통일기로서, 많은 승려·학자·관리 및 상인
들이 당(唐)에 왕래할 때이다. 혜초도 어린 나이에 그런 풍조를 좇아 당
나라에 건너갔다. 그런데 당시의 중국에서는 이미 남북조시대부터 승려
들이 육로 혹은 해로를 통해 인도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고 불도를 닦은
다음 불경을 가지고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그 중 유명한 예로 들 수 있
는 중국의 승려들만 해도 법현(法顯)·혜생(慧生)·현장(玄 )·의정(義
淨)등 여럿이고 신라에서 건너간 승려들 -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혜
업(慧業)·현태(玄太)·현각(玄恪)·혜륜(慧輪) - 도 인도에 갔었다 한
다.
이들의 뒤를 따라 혜초가 천축행의 장도에 올랐던 것은, 인도출신으로
중국에 와서 밀교의 초조(初祖)가 된 금강지(金剛砥)-Vajrabodhi)를 만
난 때문인 듯하다. 그의 나이 30세 전, 서기 723년경일 것이다. 그의 여
행기 《왕오천축국전》은 그 첫머리와 끝부분이 없어져서, 그가 중부 인
도의 갠지스강 유역에 있던 마가다국(摩 陀國-Magadha)에 이르렀을 때
부터 천축 여행을 마치고 당나라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자리잡은
구자국(龜玆國-Kucha)에 이르른 727년 11월까지 기록한 부분만이 남아
있다.
혜초가 천축여행에서 돌아온 것이 30여 세 때의 일이라면, 그가 입적한
것은 80여 세 때의 일이니까 당나라에서 50여년동안 더 살았던 것 같
다. 그는 끝내 그의 고국 신라에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동안에 그
는 당나라 서울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스승 금강지의 지도 하에
《대승유가 금강성해 만주실리 천비천발 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珠
室利千譬天鉢大敎王經)》이라는 밀교경전을 연구했다. 741년 금강지가
입적한 뒤에는 역시 인도인 승려이면서 금강지의 제자인 불공삼장(不空
三藏)에게서 위의 밀교 경전 강론을 받아, 이른바 불공삼장의 6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게 되었다 780년에는 그 스승 불공삼장과 인연이 깊
다는 오대산(五臺山)의 건원 보리사(乾元菩提寺)에 올라가 밀교 경전의
연구를 좀 더 계속한 듯하나, 그 뒤에는 어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길
이 없고, 80여세에 건원 보리사에서 입적한 듯하다.
그 뒤 그의 이름도 여행기도 세상에서는 완전히 잊혀졌다가, 1908년 그
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의 두루마리가 중국 감숙성(甘肅省)의 돈황
(敦煌)천불동(千佛洞)에서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오(Paul Peliot)
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실로 1200여년만에야 햇빛을 보았다. 앞서 말했
듯이 불행히도 이 두루마리는 첫머리도 끝부분도 떨어져 나가고 없어
서, 처음에는 책명도 저자명도 알 길이 없는 사본(寫本)에 불과했는데,
펠리오가 여러 가지의 불교서적에 관한 혜림(慧琳)의 주석서(註釋書)인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를 근거로 하여, 그 낡은 사본이 《왕오천축
국전》임을 알아냈고, 중국인 학자 나진옥(羅振玉)의 검토와 교감을 거
쳐 그 내용이 세상에 알려졌고, 1915년에는 일본인 학자 다까구스(高楠
順次郞)의 노력에 의해 혜초의 생애가 대강이나마 밝혀지게 되었다.
펠리오가 발견한 그 사본은 앞뒤가 떨어져 나가서 불완전한 데다가, 원
래 3권이던 원저를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도나 중앙아시아
의 각 지방에 관한 서술이 매우 간단하고, 지명이나 국명 또는 왕의 이
름도 자세히 안 나오고 언어·풍속 및 제도 등에 대해서도 너무 간략하
게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여행기는 다른 각도에서 세계적으로 큰 가
치를 지닌다.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기록으로는 이만한 것
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여행기에는 인도 각국의 왕들이 가
진 코끼리와 병력, 투르크족·티베트족 및 한족이 지배한 나라들, 그가
여행한 지역의 종교·경제·습속 등에 관한 흥미있는 서술이 많다.
이만한 여행기를 쓴 데다가 불공삼장의 6대 제자 중 한사람이었던 혜초
는 중국의 어느 대덕(大德)에 못지 않은 위대한 신라인 승려였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과거 우리 나라의 기록에는 그에 관한 것을 전혀 찾아 볼 수 없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