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엄마에게 늘 "누구 자식인지도 모를 새끼를 낳은 년."이라고 욕하며 무자비하게 때리다가
나가서는 며칠씩을 안 들어왔고, 그런 날이면 엄마는 울며 날 때리고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집에 누군가 있다는 것은 곧 내 몸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차라리 아무도 없기를 바랐다.
며칠 씩 굶는 한이 있더라도...
외로울 땐 노래를 불렀다.
여기저기서 주어들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부르고 있노라면 지겨울 정도로 무료하고
슬픈 시간이 다른 때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그래서 난 외로울 때는 노래를 불렀다.
내가 6살 때.
아빠는 아주 돌아오지 않았고, 얼마 후 엄마는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손목을 그었다.
그리고 난 또 다시 혼자가 되었다.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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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있을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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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좋은 일요일 오후.
소우가 소파에 길게 누워 TV에 나온 최근 인기 급상승 중인 그룹 OMG에게 비웃음을 날려주고 있을 때의 일이다.
벌컥!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잘 정돈된 검은 머리카락에 잘 어울리는 정장을 입은 세련된 남자가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지만, 소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옆에 있던 유리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세련된 남자는 급하게 뛰어온 듯 이마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옷매무새만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것이
평소 그 남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려주고 있는 듯 했다.
"소우야!"
"안녕, 오빠."
"그래, 안녕이다."
"변함 없이 능력 없고, 가창력 없고, 곡 선정 능력 없는 주제에 잘난 얼굴과 화려한 말빨로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오빠네 기획사의 그룹 OMG는 지금도 아주 잘 보고 있어."
소우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상당히 씨니컬한 내용을 담았지만, 세련된 남자는 한 쪽 눈만
살짝 찡그렸을 뿐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소우에게 물었다.
"강우는 어디에 있냐?"
"싸이코 과학자께서는 늘 그렇듯이 실험실에서 알 수 없는 약을 불쌍한 쥐들에게 먹이며
희열을 느끼고 있겠지. 올 때마다 뻔한 것을 묻는 오빠도 우리 오빠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야."
"오늘따라 더욱 씨니컬하구나?"
"더워서 그래."
"에어컨이 이렇게 빵빵한데?"
"그래도 더워. 이것보다 딱 10도만 더 낮았으면 좋겠어."
"그럼 얼어죽을 텐데..."
"덥고 짜증나는 여름의 오후에 더더욱 짜증나는 붕어 그룹 OMG의 공연을 보며
오빠에게 인체학 강의를 듣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얼른 볼 일이나 보러 가시지."
"하하. 그래, 알겠다, 알겠어. 정말 까탈스럽기는... 이 불청객은 물러나 주마."
"........"
"오오. 성민이! 왔는가?"
세련된 남자-성민이라 불리운-가 몸을 돌리려는데 젊게 들리는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노인 같은 말투가 성민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깔끔한 흰색의 실험복과 잘 어울리는 날카로운 눈매,
미끈하니 잘 생긴 얼굴에 반가움의 미소를 함빡 담고 있는 그가 소우의 친오빠인 강우였다.
강우는 터벅터벅 성민에게 다가와 몇 년을 못 본 친구를 대하듯 성민을 꽉 끌어안았다.
"우리 바쁜 친구께서 이곳엔 어쩐 일이신가?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겐가?"
"아아. 강우야. 더운데 실험복 좀 벗지 그러냐?"
"지금 실험복인 문제인가? 세기를 뒤흔들 만한 발명을 앞둔 판에... 그래, 실험복 이야기는 관두고...
어쩐 일로 날 찾아온겐가?"
"내가 뭐... 꼭 일이 있어야 널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웃기고 있네."
강우와 성민의 다정한 대화 사이에 싸늘한 목소리가 끼어 들었다.
소우의 눈은 여전히 TV를 향하고 있었지만, 얇은 입술을 조근조근 움직여
두 남자에게 자기의 뜻을 전했다.
"오빠가 일이 없어도 저 바보 오빠를 만나러 찾아온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요새 한창 잘 나가는 붕어 그룹들을 키우느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도 힘이 든 판인데,
그런 일들을 다 젖혀놓고 우리 집으로 몸소 찾아온 걸 보면 분명히 아주 심각한 일이 벌어진 거겠지.
저번에 건우가 오빠에게 전화했을 땐, 바쁘다고 통화도 못하고 끊지 않았던가?"
"하... 하하... 그건 말이지...."
성민이 조금 당황한 듯 웃으며 변명을 하려했지만 소우는 성민의 말을 차게 끊었다.
"굳이 오빠에게 변명을 들으려고 이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 일을 가지고 오빠에게 나쁜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니까 그리 신경 쓸 건 없어. 단지 우리 사이에 그런 입에 발린 소리는 안 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지. 사람이 사람을 찾을 때,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만 찾는 건 당연한 거잖아. 안 그래?"
"야아.. 너 오늘따라 정말 씨니컬하다?"
"더워서 그렇다고 말했잖아. 난 정말 여름이 싫어."
"이보게, 성민이... 날 찾아왔으면서 소우랑만 이야기하는 이유가 뭔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새하얀 실험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성민이 왜 왔는지 말해주기를 기다리던 강우가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끼어 들었다.
소우는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강우를 한 번 흘겨보고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고,
성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강우를 돌아봤다.
성민의 얼굴엔 젊은 나이부터 일을 시작해서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사람들이 갖는 여유로움이 있었다.
"더운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일단 소파에 좀 앉게. 소우야. 성민이에게 시원한 아이스티라도 한 잔.............."
"아니, 아니!! 난 괜찮............"
성민은 소우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 강우의 말을 끊으며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소우는 평소의 그 쌀쌀맞은 눈으로 강우와 성민을 한 번씩 쳐다보더니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내가 내 손님도 아닌 성민 오빠에게 아이스티를 가져다주는 칼로리 소비적인 일을 해야하는 거지?
내가 지금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TV를 보며 아주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나의 그런 평화를 깨려는 오빠의 시도를 이해할 수 없네.
그게 만약 남녀차별주의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면 오빠에게 아주 많이 실망을 하게 될 거야."
"아냐, 아냐. 남녀차별주의라니... 강우 이 녀석이 원래 남 부려먹는 걸 좋아하잖아.
아이스티가 먹고 싶으면 내가 가져다 먹을게. 넌 어서 보던 TV나 더 보면서 유익한 시간을 보내."
소우는 느물느물 잘 웃으며 넘어가는 성민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 번 째려봐 주고는 리모콘을 찾아 채널을 돌렸다.
더 이상 OMG를 보고 싶지 않아서 채널을 돌린 건데, 또 OMG의 멀끔한 얼굴이 브라운관에 떠오른다.
소우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채널을 돌렸다.
또 OMG다.
채널마다 나오는 OMG에 대해서 성민에게 뭐라고 쏴주고 싶은 마음이 역려했지만,
고운 미간에 주름만 잡았을 뿐, 왈가왈부하지 않고 다시 채널을 돌렸다.
이번엔 역사 채널. 다행히 OMG가 역사 채널까지 침범하진 않았다.
고조선의 유물 따위엔 별 관심이 없지만, 괜히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렸다가 또 OMG를 본다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것만 같아 그냥 소파에 편하게 기대 고조선의 유물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옆의 소파에선 강우와 성민의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성민은 괜히 말을 잘못한 것이 소우의 귀에 들어가 꼬투리가 잡히는 일이 없도록
목소리를 한껏 낮춰 강우에게 말했다.
연예계의 큰손이라 불리는 성민도 소우의 독설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강우야. 너 말이다. 요새 기업체에서 의뢰 받은 일 같은 건 없지?"
"S그룹에서 받은 게 있긴 하네만, 이제 거의 마무리 작업 단계라네. 무슨 일인가?
일 의뢰라면 잠시 보류해두겠네. 이번 여름엔 좀 쉬고 싶어서 말이야."
"일 의뢰이긴 한데.... 너의 실험과 관련된 일은 아니야."
"흠... 그렇다면 무슨 일이지? 오직 실험실에서 허리를 굽혀 실험만 하며 살아온 꽁생원에게
별달리 의뢰할 일이 있단 말인가? 세상적인 일이라면 삼가주게. 난 이 넓은 세상이 두려워서 말이야."
"장난치지 말고... 난 지금 심각하다구, 이강우."
"하하. 장난이라니... 이 사람... 내가 언제 장난치는 거 봤나?"
"됐다, 됐어. 아무튼... 내가 말하려는 건.... 후우..."
지금까지 여유롭던 성민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성민의 감정에 신경 쓰지 않는 듯 하면서도 매서운 눈으로 성민을 관찰하고 있던 강우가 물었다.
"자네 기획사 쪽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구먼. 그래, 무슨 일인가.
내,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자네의 고민을 들어줄 수는 있다네. 친구 좋다는 게 뭔가.
다 이런 속상하고 안 풀리는 일, 푸념을 놓으라고 있는 게 아닌가. 어서 말해보게."
"그게 말이지.... 요새 내가 키우는 그룹 OMG 알지?"
강우가 애정 어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서 키운 그룹인데, 내 어찌 모르겠나.
그래, 그 그룹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겐가?"
"응. 거의 해체 위기에 놓였어."
"허허. 어쩌다가 그런...?"
"그룹 멤버 중에 민세준이라고 있지?"
"음... 아아. 그 특징 없는 녀석 말인가?"
"그래. 그 녀석. 이번에 OMG가 하마터면 표절 시비가 붙을 뻔 했어.
그 녀석이 자기가 작곡을 했다면서 3집에 곡을 하나 실으려고 했거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게 다른 외국 곡을 가져다가 곡만 조금 바꿨던 거야. 다행히 앨범이 발매되기 전에
전부 수거해서 그 곡을 지우고 다시 제작하긴 했지만, 그 때문에 회사가 입은 손해가 장난이 아니야.
게다가 그 녀석은 잘못했다고 하기는커녕, 자기가 뭐를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오히려 큰 소리지.
그래서 OMG에서 퇴출을 시키기로 했는데... OMG가 워낙 막강한 그룹이라 멤버 하나, 하나의 인기가
장난이 아니잖아. 게다가 팬들은 OMG의 멤버들이 절대로 바뀌지 않기를 원하고,
세준이 녀석 인기도 거의 하늘을 찔렀었고... 그래서 그 녀석 공백을 메꿔줄만큼 굉장한 인재가 필요해.
분명 세준이가 퇴출을 당하면 팬들이 장난 아니게 난동을 부릴 거야. 오래 전에 건이가 장난식으로
"아아. 저 이러다가 OMG에서 쫓겨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라고 말했을 뿐인데도
우리 기획사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로 팬들이 난리였거든. 그럴까봐 세준이의 퇴출 문제는
우리 기획사 직원들 중에서도 가장 믿을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극비리에 진행 중이야.
그러니만큼 새로운 오디션을 할 수도 없어서 예전에 떨어졌던 애들 중에서 골라보고 있지만,
OMG의 인기를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그 이상의 인물이 필요해.
얼굴, 실력, 말빨, 키... 이 모든 것을 만족시켜줄 만한 인물이어야 하는데, 세준이 녀석이 워낙 잘 생겼어야 말이지."
한숨 섞인 성민의 고민을 한 번도 끊지 않고 듣던 강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정말 들어줄 수밖에 없는 고민이군, 그래. 내가 자네에게 그런 인물을 소개시켜줄 만큼의
인맥도 없고 말일세. 진작에 여기저기 인맥을 터놨으면 자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건만,
워낙 숫기가 없는 음침한 성격이고 보니, 그런 쪽으론 별로 능력이 없으이. 이거, 미안하네."
"아니. 미안할 거 없어. 내가 너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은 건, 다른 인물을
소개해주기 바래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럼 무슨 의도인가?"
"강우야!"
갑자기 성민의 목소리가 간절해지며 강우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예상치 못한 성민의 행동에 강우가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쑥스럽게 웃었다.
"허허. 이런... 자네... 나에게 이런 마음을 품고 있던 건가? 쑥스럽군, 그래.
하지만 미안하네. 난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네.
그래도 친구로서의 가벼운 키스 정도는 허락해줄 수 있으니 내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해보게."
강우가 망설임 없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강우의 얼굴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던 성민조차도 마음이 동할 정도로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이마에서 어색함 없이 이어지는 콧날은 종이라도 벨 듯 날카로웠다.
성민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강우의 코끝을 톡톡 쳤다.
눈을 감고 성민의 입술을 기다리던 강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는 모습은 또 왜 그리 매력적인지, 성민은 강우가 여자가 아닌 현실을 땅을 치며 한탄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봐, 이봐. 이강우. 나 역시 남자 취미가 아니라구. 그건 오랜 친구인 네가 더 잘 알 텐데..."
"뭐... 사람이란 변하게 마련이니, 세월이 지나는 동안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 세월이 지나는 동안 계속 함께 해왔잖아!!"
"허허. 너무 날카롭게 굴지 말게. 섭섭하이."
"너랑 말을 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어지는 것 같다, 친구. 후우...
아무튼 강우야. 부탁이다. 제발 들어주라. 응?"
"무슨 부탁인지 말해야 들어주던가, 거절하던가 할 것 아닌가.
성민이답지 않게 흥분을 하다니... 정말 의외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래.
그래,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겐가? 진정하고 이야기 해보게."
"후우... 그래, 그래."
강우의 말에 자극을 받은 성민은 자기가 너무 흥분을 했다는 걸 인정하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성민은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절대로 자신의 속마음을 비추는 법이 없었지만,
절친한 친구인 강우의 앞에선 예외였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절대 보이지 않는 속마음을 드러내며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했다.
그에게 있어 강우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성민은 곧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가서 또릿또릿한 눈으로 강우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강우야. 내가 너에게 부탁을 하려는 건.... 너 말이다. OMG에 세준이 녀석 대신으로 들어와 줄 수 없겠냐?"
".......!!"
이번엔 강우가 놀랄 차례였다.
미소를 머금고 있던 강우의 얄팍한 입술 끝이 가늘게 떨렸다.
TV를 보던 소우의 귀에도 그 은밀한 대화가 들어갔는지, 한 쪽 눈을 찡그린 소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미쳤군."이라고 말하고는 다시 TV로 고개를 돌렸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성민이. 하하. 농담이 늘었군, 자네."
"농담이 아냐, 강우야."
"성민이. OMG는 나이가 어린 아이돌 그룹이라네. 그건 그들을 키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는가.
난 28살이나 먹은 꽁생원일 뿐인데 그들 사이에 들어가서 어떻게 그 격한 활동을 할 수 있겠는가.
그냥 농담이었다고 말해주게. 자네 이미지가 무너지고 있네."
"이번 일을 위해서라면 내 이미지 좀 망가져도 상관없어. 어차피 이미지 붙잡아놓고 살지도 않았고...
물론 OMG 멤버의 연령이 21살이긴 하지. 하지만 강우야. 네 얼굴도 고작해야 21~2살로 보여.
어쩌면 더 어리게 볼 수도 있고... 그리고 너 고등학교 때 춤 잘 췄었잖아. 노래도 굉장히 잘 하고...
제발 부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위에서 너만한 인재를 찾아볼 수가 없어."
"하하. 그건 다 옛날 일이라네. 28살의 몸이 어찌 예전 같을 수 있겠는가. 무리네, 무리...
차라리 건우에게 부탁을 해보지 그러나."
"물론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 건우는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겼고, 춤도 잘 추니까...
하지만 그 녀석은 대학 일이 너무 바쁜데다가 성격이 워낙에 불같아서 OMG 멤버들과
쉽게 동화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서 포기했어. 그리고... 그 녀석...."
"그래. 무책임한 싸움꾼이긴 하지. 내가 생각해도 건우를 사용하는 건 미스 캐스팅이긴 하네만...
역시 난 무리라네. 난 그렇게 사교적이거나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무대에 섰다가는 긴장한 탓에 기절해버릴지도 모르겠네."
"고등학교 때, 환상적인 무대 매너로 밴드 구경온 사람들을 거의 무아지경에 빠뜨린 네가?"
"옛일은 떠올리지 말게."
"부탁이다, 강우야. 실험을 하는데에 지장이 없도록 할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빠지게 할 수도 있고, 사생활 침해가 없도록 베일에 쌓인 멤버라고 홍보를 할 수도 있으니까...
OMG의 새로운 멤버가 되어 주라."
"지금까지 자네가 내게 해준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거절할 수만도 없겠지만.... 후우..."
난감해진 강우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곤란해하는 듯한 강우의 표정에 성민은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런, 이런... 역시 내가 너에게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억지로
떠넘기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미안...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지, 뭐...
너무 마음 쓰지 마라."
".........."
강우가 미안한 표정으로 성민을 올려다봤다.
미안함 때문에 찌푸려져 있던 강우의 눈이 갑자기 환하게 밝았다.
그 변화를 눈치챈 성민이 혹시라도 강우가 허락해줄까 하는 기대를 가지며 강우의
말을 기다렸지만, 강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소우..."
"응?"
"소우를 남장시키면 되겠군."
"응?"
혹시라도 이 말을 소우가 들었을까 싶어, 먼저 소우의 표정을 살핀 성민은
무슨 큰일날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소리를 죽여 말했다.
"이봐. 괜한 농담했다가 소우에게 한 방 먹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런 농담을 할거라면 목소리를 낮춰서 하라구."
"농담이라니... 성민이. 내가 언제 이런 일로 농담하는 거 봤는가? 농담이 아니라네."
"야, 야. 소우를 남장시키느니... 차라리 네가 하는 게 낫지 않아?"
"이보게, 성민이. 난 무대에서 방방 뛰며 노래를 하고, 쇼를 할만한 나이가 아니라네.
게다가 목도 많이 상해서 예전 같이 노래를 부를 수도 없지.
하지만 우리 소우는 어떤가. 21살이네. OMG 멤버의 연령과 같지.
게다가 소우의 노래 실력을 알지 않는가. 아주 잘 해낼걸세."
"노래 실력을 모르는 건 아니지. 하지만 남장은....."
"소우는 여자치고는 꽤 커다란 키라네. 170cm나 되지. 그리고 내가 괜히 과학자겠나.
소우가 남장을 하는데 필요한 이런저런 소품들은 알아서 다 대주겠네."
"소우가 안 하려고 할 텐데...."
"민하 얘기를 들먹이면 분명히 할걸세. 소우도 민하에겐 아주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흐음.... 남장이라..."
성민은 TV에 집중하고 있는 소우를 한 번 흘끗 쳐다보고는 생각에 빠졌다.
처음 기획사를 열고 이런저런 가수를 키울 때, 소우를 가장 먼저 키우려고 했지만, 소우는
"나보고 TV에 나와서 춤추며 노래하는 미친 짓을 하라고? 미안하지만 나에겐
그런 저속한 취미가 없어. 사양할게."
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소우는 놓치지 아까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뛰어난 가창력은 물론이거니와 천부적으로 타고난 음악적인 감각,
음악에 대한 박식한 지식과 작곡 실력까지 아주 완벽했다.
하지만 본인이 가수가 되는 것을 싫어하니, 소우의 단호한 성격을 아는 성민으로선
더 이상 권유해 볼 수가 없어서, 소우의 가수 데뷔 건을 그냥 방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는 강우 역시, 소우가 가수로 데뷔하는 것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 같았기에
더더욱 소우를 꼬셔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우가 지원을 해주는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소우는 늘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한없이 깔아뭉개는 말투로 말하곤 했지만,
그래서 강우에게도 늘 그런 모습을 보이곤 했지만,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 대신으로 소우를 키워온 강우에 대한 애정은 짐작하기 힘들만큼 깊었다.
강우가 잘 설득을 한다면 그 아무리 해괴망측한 일이라도 넘어올 터였다.
'하지만 남장이라니....'
더운 것과 귀찮을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소우의 헤어스타일은 언제가 목 뒤를 살짝 덮는
짧은 커트 스타일이었다.
언뜻 보면 남자처럼 보일 수도 있는 그런 스타일이기에 남장을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OMG 멤버의 평균 키 크기에 비해 좀 작기는 하지만,
저 정도의 얼굴과 노래 실력이라면 키 정도는 쉽게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많은 사람들을 속여 넘기냐는 것이었다.
처음 몇 달 정도야 이러저러하게 변명을 하며 그냥 넘겨버릴 수도 있지만,
합숙을 전제로 하는 OMG이기에 계속 한 집에서 살다 보면 들통나기 십상인 데다가,
하이에나처럼 집요하게 파고드는 기자들에게 먼저 걸릴 위험이 많았다.
'그래도... 강우가 모든 것을 지원해준다면... 한 번 걸어 볼만도 하지.'
성민은 강우의 실력을 믿었다.
강우는 실력 있는 과학자였고, 발명가였다.
때때로 황당한 것을 발명해놓고(예를 들자면, 애완용 거북이 등을 쉽게 닦는 기계 같은...)
의기양양해하는 적도 많았지만, 그 모든 황당한 발명품을 덮어버릴 정도로
굉장한 것을 발명하는 적도 많아서 국내외에서 꽤 알려져 있었다.
성민이 생각을 하는 동안, 강우는 실험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조급함 없이 성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우는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이 녀석... 단순히 재미인 건가?'
자기가 실험밖에 모르는 꽁생이라고 표현하는 말과는 달리, 어렸을 적부터 재미있는 거라면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드는 강우의 성격을 아는 성민으로선
강우가 단순히 자기의 즐거움 때문에 소우를 남장시키라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뭐... 이 다급한 상황에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는 아니지.
상당히 좋은 제안이기도 하고....'
거실 안엔 커다란 TV에서 흘러나오는 고조선 유물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단조로운 설명만이 가득 차 있었다.
소우는 강우와 성민의 일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태도로 TV를 보고 있었고,
소우가 틀어놓은 에어컨은 방안 온도가 낮아지자 알아서 좀 높은 온도를 기준으로 돌기 시작했다.
성민의 대답은 소우가 신경질적으로 에어컨의 온도를 다시 낮추려 할 때 들려왔다.
"그래, 좋아! 소우를 남장시키자!!"
막 에어컨의 온도를 18℃로 맞춰놓은 소우가 자기 이름이 나오자 성민을 한 번 돌아봤지만,
뒤의 말은 잘못 들은 것일 거라고 생각하고는 다시 TV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곧 벌떡 일어나서 강우와 성민을 노려봤다.
"뭐/라/고?"
소우의 낮은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강우와 성민을 채근했다.
"소우야. 내 말을 좀 들으려무나."
"미안하지만 미치광이 과학자의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아. 헛소리를 입에 담은 장본인이
그 헛소리에 대한 변명을 한 번 해보시지?"
선천적 색소결핍증 때문에 연한 갈색으로 보이는 소우의 눈동자가 성민을 향했다.
성민은 소파에 앉은 채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우야. 사실 이번에 우리 OMG에서 세준이가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퇴출당하게 됐어.
그래서 세준이를 대신할 멤버를 찾는데, 네가 적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
세준이를 대신하려면 모든 면에서 세준이를 뛰어넘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거든.
넌 요새 애들의 취향인 예쁘장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굉장한 노래 실력과
음악적 감각을 가지고 있잖아. 우리 OMG가 세준이의 퇴출로 인해 타격을 받지 않으려면
적어도 너 정도의 인재가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OMG는 처음부터 남성 4인조 댄스 그룹으로
시작을 했던 거고, 중간에 멤버가 바뀌더라도 혼성 그룹으로 바뀌는 일은 없는 것이
인기 유지 측면으로 볼 때 나을 것 같아서 널 남장시키기로 한 거야."
소우는 가만히 성민을 응시했다.
성민은 소우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긴장한 상태로 주시하고 있었다.
곧 소우의 얇은 입술이 벌어지며 냉랭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미쳤군."
소우는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다시 소파에 앉았다.
소우의 잘 빠진 다리가 요염하게 소파 가장자리에 터억 걸쳐졌다.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질 정도로 희고 미끈한 다리를 응시하던 성민이 말을 이었다.
"장난을 치는 게 아니야, 소우야. 부탁이다. 너의 도움이 필요해.
게다가 라이벌 기획사에서 이번에 어떤 그룹을 내보낸다는데, 그 그룹이 아주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낸 그룹인 모양이야. 세준이가 빠진 와중에
다른 그룹까지 나온다면 OMG에게 타격이 아주 클 거야."
"그거 잘 됐네. 외모와 말빨로 먹고 사는 OMG는 그만 들어가줘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아?
사자가 한 번 울부짖었으면 들어갈 때를 알고 들어가기도 해야지.
이번 기회에 오빠네 기획사도 진짜 실력이 있는 애들을 키워보는 게 어때?"
"그래도 최근 가요계에선 우리 기획사가 그나마 나은 거야."
"그래? 요새 우리나라 가요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만하군."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오빠 사정은 아주 안 됐지만, 난 저런 붕어 그룹에 들어가서 나의 음악 세계를
추하게 짓밟고 싶은 생각이 없어. 요새 가요계는 독이야. 나까지 그 독으로 썩게 만들고 싶은 거야?"
"그럴 리가 있냐."
"그럼 그 허무맹랑하고 말도 안 되는 계획에 날 끌어들이지 말아줘.
남장이라니... 유치한 연애 소설도 아니고, 그게 될 법한 얘기야? 분명 금방 들통날 게 뻔하다구."
"들통나지 않으면 해줄 거냐?"
소우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쳇!"
"소우야."
성민과 소우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강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 들었다.
소우는 불만 섞인 표정으로 강우를 쳐다봤다.
"내 발명품들이 너의 남장 생활에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을게다."
"엿이나 먹어."
"소우야."
"내 이름 부르지 마, 미치광이 과학자씨."
"물론 나도 입만 벙긋벙긋하며 노래라는 신성한 영역을 짓밟고, 인기를 유지하는 OMG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단다. 하지만 우리... 그런 모든 것을 넘어설 만큼 성민이에게 많은
신세를 지지 않았느냐. 게다가 OMG는 민하가 있는 그룹이란다. 민하는 OMG에 많은 꿈을
걸고 있는 듯 한데, 그 꿈이 짓밟히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있겠느냐.
그것은 도리가 아니란다. 민하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느냐."
민하의 이름이 나오자 소우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소우는 여전히 불만인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손가락 끝으로
짧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생각에 잠겼다.
그 행동은 소우가 크게 고민할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성민은 반쯤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소우만 허락을 해준다면 그 다음부터는 승승장구일 거라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한동안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고민을 하던 소우가 천천히 손을 내리며 답했다.
"좋아. 그까짓 남장. 한 번 해주겠어. 하지만 내가 절대로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아둬.
첫댓글 +ㅁ+ 여기에서도 올리시군요 >ㅁ<//
백묘님 너무 좋아요! 그런데 말머리가 없내요 -ㅅ-;
정말 재밌어요>_<
앗+_+ 팬카페에서 봤었습니다;ㅁ; 또봐도 재밌군요 ㅇ_ㅇ 히히히'-'
꺄>ㅁ< 넘넘 재밋어요!!!!!!!!!!!!!!!!!!!!! 말머리 빨리 다세요 +ㅅ+!!!!!!!
-..-역시 백묘님ㅎㅎㅎ 아무리 팬카페에서 봤다지만~ 너무 재밌는거 아닙니까~?ㅎㅎ
재,재밌어요..... 열심히 보겠습니다♡
우와 짱이에요..,,
재밌네요 ㅋㅋ
ㅈ ㅐ미있습니다.^^삼류소설에 이어서.....인거죠?아니구나,여우야,늑대 잡으러 가자도 있군요.^^;
오홐~ 백묘님이군 ㅎ 잼나네용 ㅎ
백묘님짱!!!!!!! 넘 재밌어요!!! 탄탄한 스토리 기대할께요~~~~~~><건필~~~~
아 진짜 재밌다..정말 최강 글빨이셈..ㅠㅠ 완전 부럽삼~
아아아아 또 다시 봤다.ㅋㅋ 정말 재밌어요~
제밌어요 백묘님 소설은 역시 !! 스토리가 넘 좋은거 같은데!?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