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와 육신의 표출
Daum카페/ 울타리만들기
④ 울타리 만들기
휴머니즘은 인간사를 처리하는 처방약이다. 인간사는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는 일이 모두이고 이를 벗어나는 일은 곧 죽음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이 있음은 곧 고통의 물살이 다가오는 일이고 이를 피할 수 없는 숙명 앞에 어떤 자세로 갈아가는가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이는 전적으로 선택이다. 에피큐리언에 욕망의 포로도 있고 자타 공존의 에로스적인 삶, 마지막으로 종교의 헌신인 아가페적인 생활 등 이는 전적으로 선택의 문제이다. 이런 문제 앞에휴머니즘의 명제는 변해왔다. 중세기에는 종교로부터의 인간해방, 산업사회에서는 인간소외와 빈부격차 그리고 작금의 세기엔 인간의 고독과 소외에서 오는 인간 해방. 이 주제는 시대의 고비마다 차이가 분명 있었으나 사랑의 자유를 주는 일에 휴머니즘의 몫은 변함이 없었다.
중세기 신의 절대절명을 비판한 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주인공은 태어나자마자 “술이 마시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29세에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운 선물로 성(城)을 물려받고, 그 중앙에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라’라는 말을 써놓았다. 이는 모든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암시하는 발성으로 당시의 휴머니즘을 뜻했다. 그리고 현대엔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과학 메커니즘에서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이나 『심판』, 『단식광대』 등은 소외와 불안과 부조리의 비의를 나타내는 작품들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인간을 사랑하는 명제는 영원의 가치로 승화하는 목록이기에 시는 그 중심에서 존재한다.
가슴으로 터진 길 찾아
사랑을 부르고 힘겨움을 떨치며
곡예사처럼 줄 위를 걷는다
치솟으려고 두리번거리다가
속도감이 주는 후련함으로
짙은 향에 취해 엄마 품 깜빡 잊고
길을 가로지르는 아가 울음
상처가 내린 차단기
밟으며 지나가려는가
부리가 뿌리를 잡듯이
너와 나 손잡고 가는 길에
보폭은 거미줄 위에서 맞추려나
―김연정, 「손잡고 가는 길」
위기와 어려움이 다가오는 생활은 여유를 갖지 못하고 불안을 증폭시킨다. 일상의 곡예는 항상 엄습하는 이름이고 이를 벗어나는 사위의 길은 막혀 있을 뿐 해답이 묘연한 나날에서 삶이란 이름은 고단할 수밖에 없을 때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종교는 이런 길을 제시하는 임무에서 인간을 위무하는 몫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길을 만들지 않는다면 손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다. 즉 ‘뿌리와 뿌리가’ 손을 잡음으로써 너와 나의 사이엔 강물이 없어지고 사랑의 따스함이 서로의 혈관을 이어가는 공간을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다. 이 같은 울타리는 헌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헌신에는 사랑의 물기가 필요하고 조화의 이루어짐을 만들 때, 사랑의 영역은 무한의 크기를 자랑한다.
이런 무한의 경지는 ‘짙은 향에 취해 엄마 품 깜빡 잊고’의 집중된 경지를 만들게 되기에 『보듬는 울타리』에서 ‘가슴을 사르르 녹이고/ 오순도순 알콩달콩/ 가는 나침판 어디에 있는지’의 녹임과 알콩달콩의 체온을 교환하는 조화로운 세상을 이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모든 기력이 쇠잔해지고 이로부터 혼자 살아가기 어려워 일정한 의식처가 더욱 필요해지는 것이다. 「잊지 마소서」, 「노인의 바람」 등은 노인에 대한 배려의 정감이 있는 시들이다. 꿈은 젊음의 특권만이 아니라는 「잊지 마소서」의 늙은이들의 ‘꿈과 낭만도/ 꽃이 지고 또 피어나듯이/ 그대의 가슴같이’ 살아 있다. 「잊지 마소서」를 간곡히 주문하는 시인의 마음은 소외와 고독에 대한 성찰이 아니면 찾기 어려운 말이다. 평등심은 참된 사랑이고 그 사랑에는 신의 뜻이 들어있어 따스함을 배가하는 에너지를 느끼게 하고 있다.
잡으려는 용트림으로
이웃에게 짐이 되지 않고
선구자의 길이 되게 하소서
눈으로 바라보이는 끝자락이
정으로 얽으려는 욕망덩이를
들꽃으로 살게 하소서
―김연정, 「노인의 바람」
‘이웃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소서’의 바람은 건강이 해결할 일이지만 한계 앞에 이르면 처참해지는 에필로그를 맞아야 한다. 그렇기에 노인의 문제는 해답이 묘연하며 방황하게 된다. 결국 김 시인의 처방전인 ‘선구자의 길이 되게 하소서’의 소망이 불을 켜야 할 것이다.
아울러 노년의 삶이 싱싱하고 향기 높은 ‘들꽃으로 살게 하소서’의 기도문은 노인 누구나가 가져야 할 이름이라면 희망의 높이는 찬란할 것이다.
의식과 보살핌의 사고는 김 시인의 정서 속에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자리하면서 시의 부축을 받고 있는 느낌이 강한 것도 종교적인 헌신과 일치하는 강하게 드는 느낌이다.
김 시인의 주옥같은 시는 많지만 일일이 열거할 수 없어 의미가 넘치는 시만 빼내어 나름대로 유추하였다. 한 사람의 시에는 그 사람의 세계가 보편성을 확보할 때, 감동을 자극하게 된다.
김연정 시인의 시에는 신을 신봉하고 있고 편견의 늪을 빠져나온 데서 투명하고, 누구에게나 사랑을 전달하는 에너지로의 힘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는 그만큼 시적인 재능이 상징의 숲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만드는 일이 되는 것이다.
물이 시적인 정서를 이루면서 이동하는 메시지로의 작용을 하는 일면 눈이 사랑과 헌신으로 시인의 의도를 나타내는 이미지의 역할에 헌신하는 상징이라면 보살핌의 울타리 만들기는 현실의 어둠에서 희생으로서의 기독교의 정신으로 수행하는 시인 스스로 암시를 주고 있다고 본다.
길이 아가페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일이라면, 꿈과 갈증을 갖는 것은 현실에 사랑을 베풀려는 모성애적인 헌신을 달리 표현하는 시적 묘미가 된다.
지금까지의 논지를 종합하면 김연정 시인의 시는 사랑을 어떻게 실현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면서 실천에 대한 예지적인 고뇌를 언어로 포착하여 풍경화 같은 시를 쓰는 시인이라 하겠다. <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이승섭, 마음시회, 2022.)’에서 옮겨 적음. (2024. 6.12.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