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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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일터선교주일
일상의 선교사로 살라
마 5:13-16
오늘은 일터선교주일로 드립니다. 올해부터 처음 시작되는 예배입니다.
올해부터 선한목자교회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핵심 가치를 계승하여,
“예수님과 동행하며 닮아가는 선교적 공동체”라는 비전을 품었습니다.
이미 교회사랑주일에 보셨듯이 4N으로 정리되는 4가지 선교영역이 있습니다.
Next 다음세대, Neighbors 이웃, North 북한, Nations 열방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선교영역의 기초가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일상의 선교, 삶으로서의 선교입니다.
우리의 가정, 학교, 일터에서 선교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 선교가 존재합니까? 그곳에 예배가 없기 때문에 선교가 존재합니다.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그곳에 예배가 없기에 선교가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그분께 경배하고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마태복음 28장에 나옵니다.
(마 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가서, 제자 삼는 것입니다. 일부 민족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여전히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종족”들이 있습니다.
가는 자가 없이, 전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그들이 복음을 듣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행 1:8).
그래서 아프리카도 가고 인도도 가고 남미도 가는 것이지요.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전달하고, 가르치고 삶을 함께 하는 분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기선교팀을 보내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우리가 매일, 매년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선교라고 하면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교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됩니다.
선교하는 삶 vs 선교적인 삶
여기서 우리가 용어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교하는 삶과 선교적인 삶은 비슷해 보이지만 둘은 다릅니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단기선교를 가는 것은 선교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선교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의 삶 자체가 선교가 되는 삶”을 뜻합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고, 돈을 벌고 쓰고, 일하는 것 자체가 복음을 증거하는 삶이며, 선교적인 삶입니다.
선교사님들만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성도가 선교에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 대위임령은 선택된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아야 1년에 한 가정 선교사님들을 보내는 추세로 과연 지상명령을 완수할 수 있겠습니까?
선교적 사명은 선교단체나 일부 선교사님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의 선교사, 일상의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매일의 평범한 삶을 통해 일어납니다.
사업가나, 자녀를 키우는 부모나, 할아버지, 할머니, 대학생, 전문직에 계신 변호사, 의사, 학교에 계신 선생님들, 카페에서 일하는 바리스타나, 지식노동자나 육체노동자나 모두가 다 일상의 선교사로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이름 없는 무명의 선교사,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인해 멸망의 저주를 푸는 천국의 열쇠가 쥐어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위대한 사명과 위대한 약속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땅 끝까지 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예루살렘입니다.
우리의 예루살렘이 어디입니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가정이며, 또한 일터입니다.
또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남미에서 보면 이 한국이 땅 끝입니다.
여전히 한국에 믿지 않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게다가 디아스포라 이주민들이 한국에 몰려들어오고 있습니다. 대략 230만 명 정도 됩니다.
그들 중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로 온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사는 이곳이 예루살렘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땅 끝입니다.
일상의 선교사, 일터 선교사로서 선교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르시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이미 제자들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빛이라”
(마 5:13-14)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여기서 너희는 소금이라고 했을 때 세상은 부패한 곳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빛이라고 했을 때 이미 세상은 어둡다는 겁니다.
소금은 음식 고유의 맛을 내는 조미료입니다. 고기에 뿌리면 고기의 맛을 더해줍니다.
음식에 넣으면 음식의 맛을 완성시켜줍니다. 조미료입니다.
동시에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입니다.
고대에는 냉장고가 없었고 지중해는 대부분 열대기후였습니다.
이때 소금은 육류와 같은 식품이 상하거나 썩지 않도록 막는 데에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가 소금이라고 했을 때는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썩는다.
하지만 제자들이 소금과 같이 되어 세상을 보존하고 본래의 맛을 낼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공적,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사적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말씀에서 공통점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떠나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도피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셨습니다.
(요 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둔 세상에서 빛이 되라고 보냄 받은 자들입니다.
부패하는 세상에서 썩지 않도록 하는 소금이 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논문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에게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멋진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을 통해 거하시고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만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드러날 수 있습니다.
2.
그러나 문제가 있는데, 바로 세상의 소금으로 부름 받은 그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엄밀히 말하면 소금은 짠맛을 잃을 수 없습니다.
염화나트륨은 거의 모든 공격에도 저항할 수 있는 매우 안정적인 화합물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는가? 소금이 불순물과 혼합되어 오염될 때입니다.
고대 세계의 소금은 항상 순수하지 않았고, 그 안에 다른 미네랄이 있으면 그 독특한 맛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 더러워진 소금은 음식에 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순물이 포함된 소금, 맛을 잃은 소금은 겉에서 보기에는 소금 같지만,
불순물들이 있기에 그저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밟히고 도로의 먼지에 불과한 취급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잃어버리는 방식은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은둔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소금이 소금통에만 갇혀 있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가 교회 공동체로 모여서 예배해야 하지만, 월요일부터는 세상으로 흩어져야 합니다.
소금은 고기와 생선에 뿌려져야 부패를 막으면서 맛을 내는 겁니다. 소금이 녹아야 합니다.
빛은 어둠 속에 들어가 켜질 때에만 빛이 되는 겁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똑같아지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모두가 Yes할 때, No할 수 있어야 하고, 모두가 No할 때, Yes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독특성, 가치관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으로 들어가 침투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려 하면,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믿는 자다운 예수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합니다.
”웨이터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즈니스를 할 때 갑자기 벌어지는 상황에서 그 사람의 본심과 중심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데, 웨이터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A라는 사람은 웨이터가 물을 쏟았을 때, 괜찮다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B라는 사람은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며 소리를 칩니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웨이터에게 반말하며 종 부리듯이 합니다. 그 웨이터는 누군가의 자녀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아버지요 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함부로 대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분이 전하는 복음을 들을까요?
그것이 그 웨이터에게 복음으로, 기쁜 소식으로 들리겠습니까? 그래서 웨이터의 법칙은 이겁니다.
”웨이터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과는 비즈니스를 하지 말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능력은 뛰어날지 모르나 인격적으로 덜 성숙한 사람이며, 사람을 도구로 취급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겁니다. 웨이터의 법칙입니다.
세상은 본래 어둡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이 어두워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등불을 켜야 합니다. 15절 보세요.
(마 5: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등불을 켜야 합니다. 어떻게 켭니까? 예수님이 궁극적인 빛이십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겁니다.
등불을 켠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내 삶의 왕이 되셔서 말과 생각과 행동을 다스리게 하는 겁니다.
또한 주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시면 타인을 바라보는 눈이 바뀝니다.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이고, 잃어버린 자녀입니다. 절대로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24시간 예수님을 주목하고 바라보는 삶에서 선교적인 삶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빛이 비추도록 등잔대 아래 두지 말고 위에 두라는 겁니다.
소금과 빛에 대하여 존 스토트 목사님이 산상수훈에 대한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밤에 집이 어두워졌다고 해서 집이 어두워진 것을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해가 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문해야 할 것은 빛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기가 상해서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고기가 썩었다고 해서 고기를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박테리아가 번식하도록 방치하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질문해야 할 것은 소금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회가 어두운 밤이나 악취가 나는 생선처럼 부패한다면 사회가 부패했다고 사회를 탓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악이 억제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의 소금과 빛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
세상이 부패하고 어둠이 만연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잘못입니다.
세상은 원래 어둡고 원래 부패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탓할 것이 아닙니다.
왜 정치가 이런가? 왜 악한 법이 있는가? 왜 다음 세대가 마약에 빠져가는가? 말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어디에 있는가? 교회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를 국회의원으로 뽑았는가?
세상이 썩고 있고 어둠이 드리워졌다면 그것은 우리 잘못입니다. 소금과 빛의 역할을 안 한 겁니다.
교회에 대한 비판을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너무 닮아있든지, 아니면 우리가 소금통 안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살아야 합니까?
세상에 빛을 비추라는 겁니다. 그 빛은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16절입니다.
(마 5: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서 먼저 복음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가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는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에 대한 신뢰가 상당히 추락했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은 복음전파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부정직하고 비인격적이라면 복음 전파가 가능할까요?
누가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듣겠습니까? 누가 그렇게 살고 싶을까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영향력은 우리의 성품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복음의 메시지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성품입니다. 착한 행실입니다. 그 바탕 위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빛과 소금이 되려면 먼저 어둠과 달리 빛이어야 하고, 소금의 짠맛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 가장 좋은 환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입니다.
착한 행실 중 하나가 바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언어가 바뀌어야 합니다.
마크 배터슨이 쓴 <<부탁합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탁합니다 Please는 겸손과 배려의 언어입니다.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겁니다.
미안합니다 Sorry는 공감과 용서의 언어입니다. 함께 아파하고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Thanks는 감사와 베풂의 언어입니다. 당신의 존재가 내게 힘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 가지 말만 제대로 써도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은 다르다고 느낄 겁니다.
또한 일터에서 착한 행실 중 하나가 “정직”입니다.
세상은 사기와 부정직이 지혜라고 여겨지는 곳입니다.
거기서 소금이 된다는 것은 부정직의 문화에 대항하여 정직한 문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중장부 쓰지 않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세금 보고하는 것입니다.
거짓 저울을 쓰지 않고 실제로 필요한 재료보다 더 쓰지 않으며
싸게 원자재를 구매하고 비싼 것이라고 청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터에서 착한 행실 중 또 하나는 “탁월함”입니다.
일터에서 크리스천들이 일을 제대로 안하거나 나태하거나, 꾀를 부린다면, 누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겠습니까? 맡겨진 일을 탁월하게 해내야 합니다. 사실 여기서 착하다, 선하다를 쓸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아름다우신 하나님이면서 탁월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이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나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excellencies, 탁월함)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일터에서, 그것이 음악이든, 제품이든, 그림이든, 무엇이든 탁월하게 해낼 때, 그것은 착한 행실이면서 동시에 탁월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은혜로 합시다 말하곤 합니다. 은혜는 종종 “대충 하자”는 동의어로 쓰입니다.
은혜는 그런 의미가 아니지요.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더 탁월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목수셨습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탁자는 은혜로 만들어졌을까요? 대충 만드셨을까요?
의자 하나가 한 달만 쓰면 빠지거나 삐걱거렸을까요? 아뇨 탁월하게 만드셨을 겁니다.
창조주의 숨결이 들어간 작품이었을 겁니다. 일반 목수와 크리스천 목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크리스천 목수는 그저 예배에 잘 참석하고 술 마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목수로서 훌륭한 탁자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돌아가신 팀 켈러 목사님이 한번은 비행기를 조종하는 일반 기장과 크리스천 기장의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해 이런 예를 든 적이 있습니다.
1989년 2월 24일, 뉴질랜드로 가는 유나이티드에어라인 항공기가 호놀룰루공항을 이륙했습니다.
그런데 이 보잉747기가 2만 2천 피트 상공에 이르렀을 즈음, 화물칸 앞문이 뜯겨 나가면서
항공기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겁니다. 순식간에 승객 아홉 명이 허공으로 빨려나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게다가 흩날리는 파편에 손상을 입은 오른쪽 엔진 두 개가 멈춰 버렸습니다.
착륙이 가능한 지점까지 도달하려면 2백 킬로미터 남짓 더 날아가야 했습니다.
그때 기장은 크리스천이었던 데이비드 크로닌(David Cronin)이었습니다. 그는 온갖 지혜와 38년에 걸친 비행 경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짜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최선의 판단을 내리면서 승무원들의 기억에 길이 남을 만큼 매끄럽게 항공기를 착륙시켜 승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습니다.
항공 전문가들은 그날 착륙에 ‘기적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지요.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 지 며칠 뒤, 어느 기자가 기장 크로닌에게 화물칸 문짝이 날아가는 순간,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이 들더냐고 물었습니다. 기장은 말했습니다. “승객들을 위해 잠깐 기도하고 곧바로 일에 집중했습니다.” 재난을 만난 고객들과 사람들을 위해 크리스천 기장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기도였을 겁니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문제는 승객 전체의 생명을 책임지는 파일럿으로서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 기체를 안전하게 조종할 만큼 “탁월한 능력을 갖췄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데이비드 기장의 사례에서 그가 승객이라는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탁월한 솜씨였습니다. “탁월한 솜씨가 곧 사랑의 표현“이고, ”자신의 일에 대한 능숙함이 곧 이웃 사랑“인 것이지요. 크리스천들이 일터에서 탁월함을 추구할 때, 그것은 곧 아름다운 하나님의 덕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된다는 거예요. 예술계나 의료계, 서비스업계, 모두 마찬가지죠.
최근에 홍이삭이라는 가수가 싱어게인 시즌3- 무명가수전에서 최종우승을 했습니다.
선교사님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그의 노래에는 탁월함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음색이나 고음처리나 곡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유튜브에 그분이 작사작곡하여 부른 “하나님의 세계”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댓글에 안 믿는 분들이 뭐라 하는지 아십니까?
“교회 다닌 적이 없는데... 노래하는 선한 모습을 보고 너무 좋아서 나이든 노인네가 처음으로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우승,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아마) 제가 교회 나가게 된다면, 이 곡 때문일 겁니다.”
“종교는 다르지만, 너무 아름답게 들리네요. 아름다운 홍이삭님이어서 그런가 봐요.”
‘아름다운 홍이삭님’이어서... 메신저가 신뢰가 되니까 찬양의 메시지가 들려지는 겁니다.
이삭씨가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발전시켜 탁월하게 드러냈을 때,
그 탁월함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들에게 증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라는 곡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세상은 항상 말하네 그 길이 아니라고
곱디고운 길이 있는데 왜 힘들게 사냐고
단순한 선택조차 내겐 버겁기만 한 곳
그래도 나는 주님만 따르리
나는 계속 걸어갑니다
수 없이 넘어져도 사람들의 방향과는
조금 다르다 해도
내가 가는 길이 주가 가르쳐준 길이니
이곳은 바로 주님의 세계라
여러분들이 계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의료, 과학, 교육, 서비스, 모든 영역 속에서
말이 바뀌고, 정직하게, 탁월하게 일을 감당할 때, 사람들은 물을 것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홍이삭 씨에게 느꼈던 마음처럼, 그가 하나님을 노래한다면, 나도 그분을 믿어보고 싶다.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노래하게 하고 세상과 다르게, 더 어려운 길을 가게 합니까? 묻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 보세요.
[벧전 3:15, 개정]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예수님을 진정 우리의 왕으로 모실 때, 그분을 따르고 섬길 때, 소망을 묻는 자들이 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금은 갈증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왜 대충하지 않지? 왜 정직하게 하려 하지?
어떻게 이렇게 탁월하게 할 수 있지? 왜 다른 이들을 도우려 하지? 왜 기도를 해주지?
무슨 소망이 있는 것이지?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하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왕이신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선교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일상에서 선교적 삶을 살아감으로써 패역한 세대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구원하는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아멘으로 순종으로 응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