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벌기 위하여 울릉도 경찰서로 지원했든 나의 목표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얼마 안가 알게 되었다.
일부 여객선 승무원이나 울릉도 본토 고참 경찰들 중 일부가 선박을 소유하고 가족들이 잡아온 오징어를 육지로 직접 팔러 나가는 등하여 돈을 벌 수 있는 것이지 나와 같은 풋내기 경찰이 오징어로 돈을 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경찰관들에게는 연고지로 전출 시켜주는 제도가 있어 난 내 고향 전남으로 전출 지원을 해놓고 있었는데 얼마후 전남으로 전출 명령이 떨어 졌다. 집합하라는 날짜에 맞추어 전남 도경에 도착하려했으나 동해의 풍랑이 거세여 여객선이 뜰 수 없는 사정으로 십여일 늦게 전남 도경에 도착해 보니 이미 보성 경찰서로 발령이 나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광주에 방한칸 얻어 살고 계셨다. 어머닐 뵙고 난 즉시 보성 경찰서에 가서 전입 신고, 거기서도 이미 겸백 지서로 발령이 나 있었다.
보성군 겸백면, 보성은 주로 산악지대인데 그 중에서도 산이 높고 골이 깊은 산중에 자리하고 있었다.
보성에서 13년을 살았다. 그러니까 보성읍, 벌교읍, 율어면, 낙성리, 예당리, 회천면, 겸백면에서는 두번, 발령이 날 때마다 이사를 다니다 보니 이삿짐 싸는 데는 이력이 났었다.
보성읍에 있는 본서 경무과 근무할 적에 두쨋딸, 바닷가 율포 해수욕장이 있는 회천면에서 셋째 딸 벌교읍 척령리 에 있는 남벌교지서에서 근무할 적에 막내인 아들이 태여났다.
나는 경찰에 투신한 동기가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근무하면서 돈이 되는 뭔가를 찾아 다녔다.
경찰 신분을 이용한 민간인과의 금품 강취? 행위 또는 직장 상사에게 인사?를 잘 함으로서 돈이 생기는 자리에 발령 받아 돈을 축적하는 행위를 난 태생적으로 잘 못할 뿐만 아니라 그걸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성격이었나 보다.
그래서 내가 택한 것은 생활에 필요한 발견 또는 발명을 하거나 바다 양식장에 투자하거나 벌을 키우거나 개를 사육하고 미꾸라지 축양 내지는 양식하여 돈을 버는 방법을 택했었다.
득량만 바다 양식장에 피조개 수백만미(미란 아주 작은 피조개 새끼 갯수를 말함)를 뿌렸으나 어디로 갔는지 수확기에 한개도 없었고 개를 사육하기 시작할 때는 마리당 10만원이 넘었었는데 돈들여 사육한 개를 팔아야할 시기엔 완전 똥값이 되여 마리당 1000원도 안되었고 미꾸라지는 직접 농수로에 가서 잡거나 사서 축양시설에 저장 했다가 팔기를 반복하였으나 돈벌이는 별로 되지 안았다.
그래도 조금 돈을 벌어 준것은 양봉 이었는데 벌통 수가 50통이 넘어가니 혼자서 관리하기 어려워 양봉 기사에게 세를 주고 일년에 꿀로 두 드럼 받기로 하였으나 1년 후에 그 기사가 월동 관리를 잘못하여 모두 벌을 죽여버리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개사육법, 양봉서적, 미꾸라지 양식법,등 공부를 하며 열심히 노력은 하였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토룡 ( 지렁이 ), 렉스 토끼, 송이 버섯, 등에도 주민들에게 투자 하여 보았으나 본전도 못건지는 꼴이 되었다.
한가지 양봉을 하다 나의 고질병을 고친 이야기를 해야겠다.
난 어려서 부터 기관지가 약해 감기를 달고 살아 아예 판피린 콘택 600등 감기약은 소지하고 다니는 상비약이었으며 편도선이 자주 아프고, 담배를 어려서부터 피웠으나 일찍 끊어 버린 이유도 담배를 피우면 가래가 많이 생겨 숨쉬기 조차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벌을 다루다 보면 자주 벌에 쏘이고 벌의 부산물인 꿀과 꽃가루 생로얄제리등를 먹으면서 기관지가 좋아 졌는지 감기나 편도선 증상이 조금은 없어졌다.
그러던 중 봄에는 월동을 끝낸 벌들을 다시 통갈이 해 주어야하는데 이 때가 가장 벌들이 사나울 때 였으나 몇년 벌을 키우면서 벌에 쏘이는 것은 붓지도 않고 별로 가렵지도 않게되어 장갑을 끼거나 머리에 망을 쓰는 것은 귀찮아 쓰지 않고 벌통 갈이를 하다가 얼마나 많은 벌들에게 공격을 받았는지 얼굴이 왕창 술 마신 것 처럼 뻘개지고 머리통이 깨질 것 처럼 빠각 빠각 거렸다. 보건소 찾아가 혈청 주사를 맞을까하다가 그늘에 누워 한시간여 지나니까 그런 기가 사라져갔다.
그 뒤로 난 벌을 키우지 않은 지 한 5년 후까지도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편도선 아파 본 적이 없었다.
보성 경찰 생활 13년 난 술과 바둑 그리고 낚시를 하며 나의 못 이룬 꿈에 대한 서글픔을 달래었다.
어느 곳에 가든 춤추는 사람들은 많았고 경찰 중에도 몇사람 있어 모처럼 휴일이 되면 광주 카바레에 가서 놀다 마지막 열차로 돌아 오기도 하고 집에서 가르치거나 출장해서 가르치는 선생들에게 배우기도 하고 그 곳에 놀러 오는 여자들과 어울리다 보니 보성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대부분을 다 만나 본 것 같다. 아무튼 춤추는 시간이 젤 재미있고 즐거웠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시골 순박한 사람들과 한잔술 하며 그들의 생활상을 듣는 것도 재미 있었다.
바둑은 나의 여가 생활 중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하였다.
바둑 공부도 하기는 하였으나 기원 아주 강한 1급 그러니까 아마추어 4- 5단에게 4점 5점 접바둑을 두는 수준이었고 바둑은 화투와는 달리 나와 연대가 맞았는지 보성 기원에 가서 적은 돈이나마 걸고 내기 바둑을 두면 내가 이기는 확률이 많았다.
낚시는 보성을 관통하고 있는 섬진강 상류인 보성강에서 시간이 나면 밤을 새우며 하는 장줄 낚시를 하였었다.
내가 직접 제작한 장줄 장비를 9대뜸 방사선으로 설치해 두고 친밀하게 지내며 술도 좋아하는 예비군 중대장과 나는 밤시간 내내 동이 틀 때까지 댓병 소주 두어개를 마시며 붕어 잉어를 낚아 올렸다.
나와 아내는 교회를 다녔다.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술을 마시고도 교회에는 나갔다.
특히 경장으로 진급 시험에 합격 차석으로 겸백 지서 두번째 근무할 당시 교회 생활을 상당히 충실하게 하였던 것 같다. 거기서 건성으로 나마 성경을 10회 이상 읽었었고 휴가 때 삼일간 금식하며 장흥 부흥회에 가서 좀 더 강한 믿음을 얻기도 하고 전도사님이 교육 받으러 가시면 내가 강단에 서서 성경 주석서를 보고 설교문을 작성하여 설교도 하였다.
2년여쯤 주색잡기에 제동을 걸고 교회 활동을 하였었다.
그 당시는 데모의 천국이어서 대학생들은 물론 직장에서도 노동자들의 데모가 연일 일어나고 경찰은 여기 저기로 동원되어 데모 진압에 온 경찰력을 다 쏟고 진짜 경찰 직무인 치안 행정은 뒷전이었다.
광주 대학생들 거기에 시민들까지 합세한 민주화를 위한 데모로 인해 전남 전 경찰의 80%는 데모 진압차 광주로 동원 되었다.
밤 낮을 가리지 않고 도청 앞 광장에서 몇일을 교대로 지키고 노상에 앉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점차 데모가 격렬해지고 경찰력으로는 도저히 이를 저지할 힘이 없어 지자 군이 투입되었다. 군이 투입되여 강력한 데모 진압이 이루어 지고 광주는 쫒고 쫒기는 아수라장이 되어 갔다.
우리 경찰은 이제 군의 허수아비가 되어 그들의 지휘 통제하에서 데모대를 막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군이나 경찰은 데모대에 밀려 최후 방어선을 도청 앞 광장에 치고 전남 도청을 사수해야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다.
군인들이 집으로 도망간 시위대를 워카발고 걷어 차고 나무 봉으로 머리를 때려 죽게 했다거나 애기밴 여자 배를 차서 사산케하고 여자 대학생의 가슴을 도려 팠다는등 별아별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이러한 유언비어에 격분한 광주 시민들은 모두 들고 일어나 계엄군을 원수 처럼 비난하고 항거했다.
경찰은 넋을 놓고 군과 광주 시민의 유혈 사태를 지켜 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민들은 경찰에게는 우유나 빵상자를 나누어 주며 고생한다고 경찰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어느 경찰 서장이 군인 지휘관에게 도청 앞 광장에서 경찰과 모든 시민들이 보고 있는데도 구둣발로 채이고 뺨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경찰 내부에도 돌아 우리 경찰은 진압봉을 들지 말자는 의견 일치를 보고 데모 진압에 아주 소극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드디어 광주 사태의 분수령인 5월 17일 시민 데모대는 탈취한 장갑차와 버스를 몰고 광주 도청 앞 방어진을 뚫고 들어 왔다. 무수히 쏘아대는 최류탄이 도청 앞 광장을 눈물 바다로 만들고 총소리가 난무하고 사람들의 아우성, 아수라장, 이런것이 바로 전쟁이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우리 경찰은 도청안으로 도망하기도 하고 인근 주택으로 도주했다. 나와 몇 경찰은 어느 여관 같은 곳으로 들어 갔는데 그 집 주인이 우리에게 민간인 옷을 빌려주고 데모 진압복은 숨겨 주었다.
광주 도청도 시민군이 접수하고 그들의 본거지가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광주는 완전히 정부의 손에서 벗어나 데모대의 무질서한 난장판으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난 그 길로 국수 공장하시는 이숙집으로 가서 배달 자전거를 빌러 타고 그 여관으로 가 진압복과 진압 방패등을 찾아 온 후 국수 공장에서 10여일 지냈다.
그동안 민간 복장으로 시민군이 몰고 다니는 뻐스를 타고 난 광주 시내를 돌아 다녔다. 광주는 완전 무법 천지였다. 시민군이 타고 다니는 뻐스등은 모두 유리창이 다 부숴지고 차체는 찌그러지고 총을 든 시민들중 일부는 약탈을 일삼고 강도행각을 벌이며 다닌 것 같다.
금남로 충장로 길 바닥은 온통 유리 천지 였고 광주 주변의 경찰 관서는 모두 시민군에 의해 총기가 탈취되고 경찰은 몸을 피하고 치안 부재의 상태가 여러날 계속 되었다.
광주에서는 시내 뻐스를 시민들이 맘대로 타고 다니고 기차도 시외 뻐스도 전화도 모두 정지되어 시외로 빠져 나갈 수도 전화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시민군들에게 밥과 음료를 제공하던 광주 시민들은 점차 냉정을 찾고 불법적인 시민군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으며 시민 단체들이 총기를 반납하고 치안 질서를 지켜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일부 불순분자가 낀 시민군은 광주 교도소를 습격하여 파옥을 단행하려 했고 군이 강력하게 사격 대응 많은 희생자가 생겼으나 교도소는 무사히 지켜 졌고 이건 참 다행한 일이 었다. 광주 교도소는 주로 사상범 즉 북한을 찬양하는 비전향 죄수들이 많았었으니까.
10여일 후 새벽 방송이 울려 퍼졌다. 광주 탈환 작전이 펼쳐지므로 모든 시민들은 거리로 나오지 말라는 방송이었고 만약 거리에 나오는 시민은 불순 분자로 간주 발포한다고 했다. 이숙집에서 밖을 내다 보니 총소리가 나고 군 차량이 지나 다녔다.
상당수의 저항 세력들이 죽임을 당하고 광주는 총칼 앞에서지만 다시 평온을 되 찾았다.
다시 정상적으로 시외 뻐스가 다니게 되어 난 보성으로 돌아왔다.
가장 늦게 돌아 왔다고 그간의 경위서를 제출하라하여 거짓 없이 진술서를 제출하고 율어 지서 우리 집으로 가니 아내는 만삭의 몸으로 달려 나와 울움을 터뜨렸다. 광주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났었다고 했다.
애들은 크고 교육상 아내는 장모님과 처제들이 사는 서울로 애들을 데리고 떠났고 일년쯤 후 나도 연고지를 따라 서울로 전출 지원하여 서울 서대문 경찰서로 발령 받아 다시 서울에 발을 딛었다.
서울이여 안녕을 고한지 17여년 만에 돌아온 서울은 상당히 변해 있었다.
서울 경찰은 시골 경찰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 다름을 나열하는 것은 경찰의 치부를 드러내는 처사이므로 생략한다.
서대문 경찰서는 데모의 왕국인 연세대를 필두로 이화여대, 명지대 경기대등을 관할 하고 있었고 주로 매일 연세대 앞에서 데모 동향을 주시하고 데모가 일어나면 그걸 저지하는 일로 하루를 멀다하고 동원되어 학생들의 돌과 화염병에 다치는 동료가 한 둘이 아니었다.
거의 쉬는 날이 없이 매일 파출소에서 근무하거나 방석복을 입고 대모 진압에 차출 되는 날이 반복 되었다.
봉급이래야 애들 네명 학비대기도 어려웠고 미래가 암담했다.
난 경찰을 그만 둘 생각을 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자영을 하자.
그러기 위해 관내에 있는 흑엽소 중탕 가게가 돈을 잘 번다는 소리를 듣고 자주 찾아가 중탕 기술을 배우고 한편으론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를 했다.
일단 5회때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 두었다.
흑염소 중탕 기술이란게 뭐 별건 아니다. 중탕기에 흑염소나 개, 고양이, 소 배냇새끼,포도, 배, 호박등을 넣고 필요하면 한약재를 얼마큼 넣어서 서너 시간 끓이는 것이다.
흑염소 기술을 완전 습득하고 난 사표를 냈다. 그 때 내 나이 46세 였던 것 같다.
다음으로
첫댓글 비극적인 광주민주화현장에 계셨섰군요. 전두환이의 정권찬탈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동족살상의 비극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겠지요. 난 서울국제우체국에 근무를 했는데 바로 앞에 연세대가 있었거든요. 그 당시(85년-87년) 데모진압을 하던 우리 막내동생같은 전경들이 방패와 갑옷을 벗고 휴식을 취할 때면 학생들이 밉고 또 같은 또래의 학생들이 무자비한 전경들에게 짖밟히는 것을 보면 경찰이 밉고 그랬습니다. 다행이 지금은 조용하겠지만 당시 최류탄때문에 우리 직원들이 당한 고통은 장난이 아닙니다. 평시는 물론 숙직이라도 하는 날엔 가스냄새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밤세도록 쿨럭쿨럭 하면서요.
중게사님께서 계신우체국 에 울형제들의 소포를 붙이려면 그곳을가곤했지요 창천동과연희동넘어가는 중간쯤 좀언덕이던 생각이납니다
편하다는 공무원이 었으면서도 순탄치 않았던 생활이었습니다 항상 더나은 생활을 찾아 노력하시는 모습은 대단했습니다
왕십리 한양대 그처 출 퇴근 버스나 전철이 지나면 후각이 예민한 나는 재채기 가났다.
그런 날은 어김 없이 데모 하는 날이였습니다.
데모 정말 지긋지긋하던 정권 쟁탈에 제물이 된 군경과 대학생,
공부해해야 될 시간에 데모하다 죽고 부상 당항 학생수 ?
데모를 진압하는 군경과 전찰경 피해 이 모두를 누가 책임져야 인권과 부채인지?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어야합니다.
중학때 제일교포 북송반대 대모에 동원되어 매일 등교와 동시 2=3시간씩 서울역 남대문 시청앞을 뛰었지요
4. 19땐 종로통으로 뛰구요 지금생각하면 잘한건지 못한건지 구별이 어렵읍니다.
저는 4. 19때 광화문에 초등학교 5학년때 하교길에 광화문에서 데모대들때문에 길을 건널수가없어서 집에 가지못하고 사람들틈에
몇시간이나 둘러쌓여있던 공포가 지금도 잊혀지지않습니다 저는 데모라는말만 들어도 경기를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제 삶의 한 부분일 뿐 정치성이나 제 의견을 완전 배제한 글을 쓸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후로는 완전 공직 생활을 청산하고 사회 밑바닥 인생의 길을 가는 제 모습을 보여 드릴 것이오니 너무 염려 마시기 바람니다. 제목을 수정할께요.
이어지고는 있지만 다 옛날 이야깁니다
실감나는 삶입니다
40 중반의 삶을 고스란히 쏟아부은 이야기들 `시련도 실패도 희망의 맛도 보았던 세월들이 정말 주마등 처럼 지나가겠네요
앞으로 20여년 동안의 삶이 ~오늘에 이르기 까지의 시간들이 ~정말 순탄하길 바래봅니다 ..긴글 수고 하셨어요 ~잘 읽었습니다 .
세상에 가장부지런한 분을 뵙는것같습니다 그많은 직업을 경험하셨으니 어데가신들 잘사실것 같습니다
님의 글을 보다보면 어느소설보다 재미가 있어요...지금은 행복한 생활을 하시겠지요.....
정말 소설을 읽는 기분입니다. 다음을 아~기다리 고기다리겠습니다.ㅎㅎ
역사의 산 증인 이십니다. 근데 젊어서일때라 그랬을까요? 하시는 일이 다 순탄치 못하셨는데 다음글 부터는 형통하시리라 믿어요. 교회를 다니신다는 말에 더 친근감이 드니 이것도
종교 토론의 빌미가 되는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기대하시라! 금강산 신선님의 일대기 시작되다.
근대사 공부가 퍽으나 인상적입니다.
감사해요.
정말 인생살이 일대기를 적나라하게 쓰셔서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방황하는가 하면 그래도 기본은 되 있으셨기에 나쁜길로 빠지지 않고 가정을 지켜가면서 믿음생활도 하시면서 가정을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셨네요.여하튼 다음을 기대해 봅니다.
그당시 40이였지요 동 주민담당과 경찰은 유대가 좋았지요 그당시 주민증 지문을 파출소에가 채취했거든요 /아 30년전의 그 젊음 그립습니다 /그리고 박봉이였지만 중.고대 학자금이 나오고 무이자로 대학등록금이 휴 /주부가장으로 힘겨웠던 삶이 최류탄에 더 질식 했지요 힘들었던 과거만큼 진한 거름이 어디있겠습니까?가족을위해 가장으로서 최선을다하신 님이 부럽습니다 /아 후생이 있다면 살림하며 애들만 보살피고 싶습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울엄마 독일병정 같다는 그소리가 상처로 남습니다 비슷한 연대라 체전이다 무어다하여 몪아뽂아하던 조직의 일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다행이 공무원은 차별이 없어서 연금날마다 감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