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민족의 러블룩한 명절 트레밍,떡국과 만두국 이야기]
-설날을 기다리면서 특집으로 – 저자-자연주의
[부자되는 설날떡국과 만두국,강정,그리고 歲酒의 역사성과 심리 연구 보고서]
부자되는 설날떡국과 만두국,강정,그리고
歲酒의 역사성과 심리 연구 보고서
시대가 무성히 변하고 스마트폰 시대가 돼도 천년이 흘렀어도 설 명절은 우리 삶에서 정신적 맹주로 차지합니다.
「세시풍요(歲時風謠)」에서 “황우고기 썰어 놓고 흰 떡도 수북하니 한 해중의 이때가 가장 풍요롭네. 기름진 음식으로 설날 배불리 먹으면 일 년 내내 배고프지 않네.”라고 설날의 풍요로움을 노래하면서, 이 구절 마지막에는 설날 아침에 배불리 먹으면 일 년 내내 굶주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아닌 팩트로써 아직도 우리 가슴에 도도히 흐릅니다.
또 있습니다.
이조 연산군 시대를 살가간 모재 김안국(金安國:1478~1543)의 시문집 모재집(慕齋集을 보면 떡국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의 글 모재집에서 2,000수에 글에는 육박하고 정치(情致)와 풍운(風韻)도 독특하고 기발(奇拔) 정사(情思)를 경악을 자아내는 필치로 적어 내는 글에는 직감직서(直感直敍)하고 일견담담불미(一見淡淡不味)한 것이면서도 쟁익(諍謚)한 가운데에 억누를 수 없는 유흥(幽興)이 동탕하는 일면을 보이고 있는데, 의외에도 음주 내지 취흥(醉興)이 다루어진 글 過飮尹明仲雙井亭次諸公韻에서 설날 떡국과 만두이야기가 나옵니다.
설날.....
일제는 구정인 설날을 배척하고 신정을 지내도록 강요했지요
민족적인 설날을 말살정책으로 음력에 따라 ‘설’을 지내며 신정은 우리와는 좀 떨어진 이중설,관공서의 설’로 치부한 기억 새롭습니다. 드디어 우여곡절을 겪다 1995년 마침내 ‘설날’이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3일 동안의 공휴일로 지정되었지요?
그런데도사람들은 구정이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인데도 왜 사람들은 설날 대신 구정이라는 말을 매우 많이 하더군요
음력 1월 1일은 한해의 첫날, 달의 첫날, 날의 첫날이라 삼원지일(三元之日)이라하고 원조(元朝), 원정(元正), 원일(元日)이라고도 한다지요?
지금 음력으로 일컬어지는 세력(歲曆)은 중국 한나라 때부터 시행 정착되었고 왕조에 따라 세력이 바뀌다 원나라 때 새로 정리되었는데 이를 태음력이라 하고 우리나라에서 음력을 시행한 것은 삼국시대 초기부터라합니다.
신라에서는 정월 초하루에 왕이 백관들에게 신정 하례를 받는 하정례(賀正禮)를 행하였고, 연회를 베풀고 일월신(日月神)에게 절을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설날은 9대 속절(俗節)---원단(설날), 상원(정월 대보름), 한식, 상사(삼월 삼짇날), 단오, 팔관회, 추석, 중구(중양, 음력 9월 9일), 동지를 말하며 이 날은 형 집행을 금하였고 왕은 이날 천지신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관리들에게는 7일 간의 휴가를 주었고
조선시대에는 한식,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의 하나였다. 하정례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해마다 정월이면 도성과 지방에서 전문(箋文)을 올려 새해를 축하하였고, 공경과 재상의 집에는 해당 관아의 관리들이 새해 인사를 오곤 하였다. 민가에서도 설 차례가 끝나면 친척과 이웃들에게 세배를 하러 다녔고
조선 순조 때의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이날 시절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세찬(歲饌)이라 하고, 이때의 술을 세주(歲酒)라고 하였다. 설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내놓는 음식 중에 떡국만한 것이 없었다고합니다. 떡국은 한자어로 병탕(餠湯) 혹은 탕병이라 하고. 떡국은 설날 차례에도 쓰이고 손님을 대접할 때에도 쓰인 음식
역사적 문헌을 보면
유득공(1749~?)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도 세찬에 없어서는 안 될 음식으로 떡국을 들고 있다. 옛 속담에 나이를 물을 때 ‘떡국을 몇 그릇 먹었냐?’라고 물을 정도로 떡국은 새해의 첫 음식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하고.
이덕무(1741~1793)는 「세시잡영(歲時雜詠)」에서
“밉기도 하여라 흰 떡국, 작은 동전처럼 둥글둥글하네. 사람마다 나이를 더하게 하니, 측은하고 슬퍼서 먹고 싶지 않네.”라고 읊었습니다.
이는 떡국을 먹으면 한 살을 더 얻게 된다는 뜻으로, 설날 먹는 떡국을 첨세병(添歲餠)이라고도 하였고
권용정(1801~?)의 「세시잡영」에는 떡국을 읊은 칠언시가 있습니다.
백옥처럼 순수하고 동전 같이 작은 것
세찬으로 내올 때는 좋은 말을 전하네
인사 온 아이들 더 먹도록 권하니
큰집의 맛좋은 음식은 매년 한결같네
이 시에서 떡국의 떡은 백옥처럼 하얗고 순수함을 상징한다. 이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때 깨끗하고 엄숙한 의식을 위한 음식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설날에 지내는 차례상에는 떡국이 빠짐없이 올라가며 「해동죽지」에는 이를 떡국차례라고 불렀데요
19세기 초 김매순(1776~1840)의 「열양세시기」에는 설날 풍속으로 제일 먼저 떡국 만드는 법을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좋은 쌀을 가루로 내어 체에 치고 물로 고수레를 한 다음, 시루에 쪄서 안반 위에 놓고 떡메로 친다. 이를 조금씩 떼어 내어 손으로 비벼 둥글고 길게 만드는데 마치 문어발 같이 늘어진다. 펄펄 끓여 놓은 장국에 떡을 동전 모양 같이 썰어 국속에 넣는데, 끈적끈적하지 않고 부서지지 않은 떡이 잘 된 것이다. 여기에 돼지고기, 소고기, 꿩고기, 닭고기를 넣기도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열양세시기」에서는 떡국 외에 설날의 음식으로 강정을 들고 있는데, 한자어로 강정(羌飣, 江精), 건정(乾丁)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강정 만드는 법도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강정은 물을 타지 않은 순수한 술에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떡같이 만들고 가늘고 얇게 잘라 말린다. 말려 놓은 찹쌀 덩어리는 끓는 기름에 넣으면 푸하게 일어나면서 둥둥 뜬다. 이렇게 튀겨진 모양이 꼭 누에고치 같다. 튀겨낸 찹쌀에 엿을 바르고 볶은 흰 참깨를 묻히거나 볶은 콩가루를 묻힌다.”라고 하였습니다.
강정은 유과라고도 하며 모양이나 고물에 따라 이름을 달리합니다.
누에고치 모양의 찹쌀덩어리에 깨를 묻히면 깨강정, 콩가루를 묻히면 콩강정이 되는 것이다. 깨를 볶아서 엿물을 넣고 버물려 납작하게 밀대로 밀어 네모나게 자른 깨엿 강정, 밥도 죽도 아닌 상태로 밥을 끓여 여러 번 헹궈 말렸다가 기름에 튀겨서 엿물에 말아 편편히 굳혔다가 자른 쌀강정 등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인물인 이안중(생몰미상)은 『현동집』「비년사(肥年詞)」에서 설날에는 여러 가지 풍요로운 음식을 먹어 몸에 살이 오르기 때문에 제목도 ‘비년(살찌는 해)’라 하며 설날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여기에서 강정에 대해 이렇게 예찬을 하였습니다.
붉은 강정 사이사이에 흰 강정 섞였으니
빙과는 무색하고 약과도 못 미치네
둥글기는 여지(荔枝--타래붓꽃) 같고 달기는 꿀 같아
이(齒) 끝의 파삭파삭 소리는 흰 눈(寒雪)이 부서지는 것 같네
도소주(屠蘇酒)--설날 나이 어린사람부터 마시는 세주(歲酒)부분에서는
어른들의 세찬상에는 음식과 함께 도소주를 내어 온다. ‘도소’란 잡귀를 몰아내고 사람의 정신을 깨운다는 뜻으로, 설날 아침에 세찬과 함께 마시는 찬술이다. 설날에 마신다고 하여 세주(歲酒)라고도 한다. 이 술은 한 해의 시작되는 첫날 마시면 한 해 동안 사사로운 기운을 없애고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도소는 벽사와 기복의 의미를 담습니다.
도소주는 설날의 대표적인 술이지만, 술 담그는 법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새해 첫날 마시는 술을 그냥 도소주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급니다.
도소주를 마실 때에는 젊은 사람은 한 해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마시고, 늙은 사람은 한 해를 잃는 것이기 때문에 뒤에 마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이 들어감을 쓸쓸해하며 읊은 여러 시가 있습니다..
신정(1628~1687)은 「분애유고(汾崖遺稿)」‘원조’편에서 “도소주를 제일 나중에 마신다고 한탄하지 말게나, 이 몸도 역시 일찍이 소년이었다네”와 임상원이 「염헌집」‘정사원일’편에서 “도소주 마실 때에 내 나이 많아졌음을 깨달았네.”라고 한 시구가 그러한 예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곡식이 부족하게 되었을 때나 사치를 금하기 위해 심심찮게 금주령을 내렸습니다..
이덕무는「세시잡영」에서 “관가에서 내린 금주령이 두려워, 도소주조차 담그지 못하네. 백성들은 어찌 알겠는가, 큰 항아리에 청주가 넘치는 줄을”이라고 읊었습니다.
실제로 국가에서 금주령을 내리면 일반 백성들은 법이 무섭기도 하고 곡식도 넉넉지 않아 세주 담글 엄두도 못 내었지만 부유한 집의 술항아리는 차고 넘쳤습니다.
유만공(1793~1869)은 「세시풍요(歲時風謠)」에서
“황우고기 썰어 놓고 흰 떡도 수북하니 한 해중의 이때가 가장 풍요롭네. 기름진 음식으로 설날 배불리 먹으면 일 년 내내 배고프지 않네.”라고 설날의 풍요로움을 노래하면서, 이 구절 마지막에는 설날 아침에 배불리 먹으면 일 년 내내 굶주리지 않는다는 속신(俗信)도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설....
영원히 우리의 자존감...삶의 영원한 존재감입니다.
각 지방에 따리 떡국도 춘추전국 특색이 다양하고 민초들의 삶,그 거룩하고 숭고항 생명력의 민족의 저력을
받침하는 버팀목입니다,러블리룩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민족의 화미한 플라워패션입니다.
역사의 트랜드포멀룩.... 우리의 명절 설입니다.
*참고문헌
1.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음식(국사편찬위원회)
2.역사풍속기행(이이화 선생 )
3.명절음식(한복선 선생 )
4.김안국 모재집 等
5. 기타 자료 다수
첫댓글 잘보고갑니다.饼汤,중국도떡국이 있었네요
곧 설이네요.
시의적절한 글.
토씨 하나까지 놓치지 아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그간 모르고 있었던
세시풍습의 으뜸인 설날과
설날의 음식들을
참고문헌까지 동원하여
적어주신 내용.
감동깊게 읽었습니다.
글재가 남다르게 뛰어나시고
학문의 깊이 또한
우리 보통 사람들은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건
어제 자연주의자님의 몇편 글을 통해 익히 알았지만
의혹이 생깁니다.
혹시 민속학자이신가요?
역사탐사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신 분이었다는 건 이미 알았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결례라면 부디 이해하여 주셔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2.02 15:49
아.그래서 설날푸쟘하게
음식해먹고
떡국을 먹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