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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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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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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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
봉산 수안일부 곡산 황주 은율 문화 장연 신천 송화 풍천 안악 재령 평산 서흥일부 | |
평남 |
평양 안주 숙천 여유 순안 강동 자산 삼동 중화 상원 영원 덕천 개천 순천 은산 맹산 성천 강서일부 증산일부 용강일부 | |
평북 |
의주 용천 철산 선천 곽산 정주 가산 박청 구성 삭주 창성 벽동 초산 위원 강계 자성 후창 | |
남장로회 |
충남 |
대전 부여 목천 |
전북 |
전 지역 | |
전남 |
전 지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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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역 | |
호주장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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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등 전 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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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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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
전 지역 | |
미감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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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
원주 횡성 평창 영월 정선 강릉 삼척 울진 평해 | |
황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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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
평양 양덕 함종 삼화 맹산일부 성천일부 개천일부 온산일부 순천일부 강서일부 증산일부 강동일부 용강일부 | |
평북 |
태천 운산 회천 영변 | |
남감리회 |
경기 |
서울 송도(개성) |
강원 |
춘천 철원 양구 이천 지경대 | |
함남 |
원산 회양 안변 용동 |
Ⅴ 선교 정책
1. 네비우스의 선교 방침
여러 교파들이 한국에 모여들자 여기에 따른 선고 정책의 수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1890년 6월, 한국 주재 장로교 선교사 일동은 중국 산동성 지푸를 중심하여 선교사업에 종사한 네비우스(John L. Nevius)박사를 초청하여 그로부터 경험담을 듣기로 하였다. 네비우스는 25년 동안 중국 선교 사업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논문인 [중국보] (Chinese Recorder)에서 선교 방법에 관하여 발표한 것이 있었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이 글을 읽고 한국과 흡사한 풍토를 가진 중국에서 시행된 선교 방법을 연구함으로서 한국에서의 선교가 성공적으로 수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네비우스 목사는 약 2 주간을 서울에 체재하면서 저서인 [선교 사업의 방안](Methods of Mission Work) 을 중심으로 주한 선교사들과 사이의 세미나를 통하여 한국 선교사업을 위한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첫째로, 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으면 그를 끝까지 붙들어 그 인물이 스스로 개인 전도하는 일꾼이 될 때까지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생활을 통하여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되기까지 계속하여 전도한다.
둘째는, 교회의 운영과 기구 조직은 그 교회 자체가 능히 감당할만한 범위 안에서 기획 실천하여 발전시켜 나아가게 한다.
셋째로, 교회에서 전도 사업을 지도할만한 인물이 나오거나, 재정을 공급하여 운영할 수 있는 유자격자가 발생하면 곧 그를 선임하여 교회의 책임 일꾼으로 세우고, 선교사는 가급적 목회 일선에서 후퇴한다.
넷째는 교회당 건축은 그 교회의 교인들 자신의 힘으로 하게 하되 건축 구조나 모양은 한국 고유의 양식으로 지방의 교회당답게 건축한다.
장로회신학대학에서 다년간 교회를 강의한 마삼락(Samuel H.Moffett)박사는 위의 내용에서 두 가지를 더 첨가하여 설명하였다. 즉 성서 연구반을 조직하여 성경 지식을 신도들에게 광범위하게 보급시키도록 협의했다는 점과, 외국인 선교사들에게는 개체 교회의 담임을 못하게 강력하게 규제하였다고 뚜렷하게 말하였다. 그의 부친인 S. Austin Moffett박사도 [네비우스 목사의 한국 내방은 나에게 가슴깊이 두 가지의 큰 교훈을 남겨 주었는데 그것은 성서 연구의 강조와 자립 정신의 고취이었다]라고 언급하였다.
위의 내용이 일반적으로 네비우스 선교 방안이라고 불려지는 내용이며, 이를 대별할 때 자력전도(Self-Propagation), 자치제도 (Self-Government) 자급운영(Self-Support)의 셋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중심 이념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피 선교지로서의 의타심이나 경제적 무능력을 배제케 하여 역량 있고 자립하는 교회 상을 갖게 하여 기독교 토착화에 기초를 조속히 설정하려는데 목표가 있었다. 초기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에 있어서는 이 방안을 채택함으로 그 이후의 선교 정책에 있어서 직접적이고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또한 이것이 한국교회 성장을 위해 상당한 공헌을 남겼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2. 장로교회의 선교 정책
네비우스 원칙을 토대로 하여 몇 가지 핵심적 원칙을 첨가하여 한국의 선교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들이 수립한 정책은 다음과 같다.
(1) 상류 계급보다는 근로 계급을 상대로 해서 전도하는 것이 좋다.
(2) 부녀자에게 전도하고 그리스도인 소녀들을 전도하는데 특히 힘을 쓴다. 가정 주부들. 곧 여성들이 후대의 교육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3) 기독교 교육은 시골에서 초등 학교 정도의 교육을 경영함으로써 크게 효력을 낼 수 있다. 그런고로 이런 학교에서 젊은이들을 훈련하여 장차 교사로 내보내도록 한다.
(4) 장차 한국인 교역자도 결국 이런 곳에서 배출될 것이다. 이것을 유의하고 있어야 한다.
(5) 사람의 힘으로만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신다. 따라서 될수록 빨리 안전하고도 명석한 성경(번역된 성경)을 이들에게 주도록 해야 한다.
(6) 모든 종교 서적은 외국말을 조금도 쓰지 않고 순 한국말로 쓰여지도록 하여야 한다.
(7) 진취적인 교회는 자급(自給)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는 사람의 수는 될수록 줄이고, 자급하여 세상에 공헌하는 그러한 개인을 늘여야 한다.
(8) 한국의 대중들은 동족의 전도에 의해서 신앙하게 되어야 한다. 따라서 전도를 우리 자신이 나서서 하는 것보다는 전도자의 교육에 진력해야 한다.
(9) 의료 선교사들은 환자들과 오래 친숙하게 지냄으로써 가르칠 기회를 찾게 되고 또 깊은 마음의 문제에 골몰하는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시약(施藥)만 가지고는 별 효과가 없다.
(10) 병원에서 치료받는 사람은 고향의 마을에 자주 왕래하게 해서 의료 선교사들의 인애에 넘치는 간호의 경험을 본받아 전도외 문을 열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선교 정책은 한국 교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크게 작용하였고, 여기에 대한 공과가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 방법은 네비우스의 원칙보다는 영국의 유명한 선교사요, 교회운동가였던 헨리 벤(Henry Venn)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그는 1860년대에 자립 교회, 자급 교회, 자립 선교의 원칙을 세계 선교의 방법으로 채택할 것을 권고한 최초의 사람이며,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다.
Ⅵ 교회의 박해
1. 금교령(禁敎令)과 애기 소동
1888년 4월 28일 한국정부의 조병식으로부터 미국의 딘스모어(Dinsmore) 공사에게 기독교 전도를 금지하라는 공문이 전달되었다. 이 금교령은 주로 천주교에 대하여 행해진 것이었지만, 기독교의 선교 단체에도 적지 않게 영향이 미쳤다. 천주교에서는 한국의 문화가 개방되어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기미가 보이자 한국인 교도의 이름을 빌려 선교와 인연 있는 장소를 구입하여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약현성당은 천주교인의 처형 장소였던 서소문 밖 언덕 위에 세워진 것이고, 종현 성당은 순교자 김범우의 집터에 세워졌으며 이곳은 천주교의 요람이기도한 명례동 즉 오늘의 명동성당 자리가 된다. 그런데 이 명동성당 자리는 궁궐보다 높은 장소였고 역대 국왕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건축 금령에 해당되는 지역이었다. 국왕은 그 계획을 듣고 성당 터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하명하였다. 그러나 건축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정부에서는 금교령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목사는 북부지방을 전도 여행하다가 딘스모아 공사로부터 즉시 귀경 하라는 공한을 받고 서울에 돌아와 보니 선교사들 사이에 논란이 분분하였다. 어떤 선교사는 이 포고가 천주교에 해당하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고, 알렌 같은 선교사는 너무 내륙에까지 깊이 들어가 전도함으로 우리에게도 꼭 같이 해당되는 금령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5월부터 9월까지는 주일예배를 포함하여 일체의 종교행사를 중단하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였다.
금교령이 내린 직후, 선동분자들은 모든 외국인은 국외로 추방돼야한다고 험담을 퍼트렸다. 허무맹랑한 유언비어가 떠돌아 서양인들이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눈알을 뽑아서 약에 쓴다는 등의 말도 퍼졌다.
이 금교령과 [애기소동](Baby-Riot)의 결과가 전화위복으로 되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스크랜튼 의사의 말과 같이 선교사들은 전혀 어린아이의 눈알을 뽑지도 아니하였고 아이들을 잡아먹지도 아니하였다. 선교사들은 정부 명령에 곧 순종함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고 무지와 편견으로 된 모해는 시일이 지나자 저절로 해명되었다. 선교사들의 하는 사업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전된 분위기를 이용하여 정부 측근의 알렌 같은 인물이 적극적으로 한국 관리를 설득하며 나섰다.
1886년 한불조약의 [교회] 라는 글귀가 바로 선교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선교사업을 인정함이 마땅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1890년 이후 척사법은 사실상에 있어서 사문화 되었다.
2. 평양박해
초기 한국의 교인들이 핍박을 당한데 있어서는 기독교 신앙과 고래의 조상숭배 관습과의 상충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비밀히 세례를 받고 나서 가족들에게도 잘 알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행사가 있을 때는 제사를 거부하여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곤 하였다.
주민들로부터 전도 인들이 매를 맞거나 돌팔매질을 당하는 사건은 자주 발생하였다. 기독교학교에 자녀를 보내면 서양풍에 물든 사람이요 한국인의 얼을 잃은 자라 하여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보다 더 부당한 박해는 무조건 지방관리들이 자신의 권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또는 일종의 착취의 방법으로 기독교인을 괴롭히는 행동이었다.
1894년 4월 7일 평양에서 장로교의 한석진과 감리교의 김창식의 두 전도인이 투옥되는 봉변이 발생하였다. 그날은 바로 수요일이었다. 삼일기도회를 드리고 있는 포교들이 들이닥쳐 한석진, 김창식, 송린서, 최치량, 신상호, 우지룡 등 여러 사람을 결박하여 잡아갔다. 민병석 평안감사는 [하늘을 향하여 주먹질을 하고 하나님을 욕하면 놓아주겠다]고 하였다. 이때 한석진 전도인은 반대로 평안감사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그의 비행을 꾸짖었다. 민 감사는 대노 격분하여 한석진을 사형에 처하라고 엄명하였다.
사태의 위급을 느낀 마펫 목사와 홀(W.G.Hall) 선교사는 급거 상경하여 영.미 양국 공사를 통해 외아문에 교섭하여 석방될 것이라는 언질을 받기는 하였다. 그러나 민 감사는 이에 강경히 불응하였다. 미국공사는 고종 국왕에게 직접 구명을 아뢰었다. 고종은 [내가 허락하는 것을 그대가 어찌 금하는가] 라는 어명을 감사에게 내려 한석진은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졌다. 이 사건이 있은 후 평양에서의 기독교 전도는 중앙정부의 옹호를 받은 결과가 되어 전도의 문은 널리 개방되었다.
1900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사건이 터질 뻔하였다. 그 내용인즉 서울에 전차가 부설되었는데 군부대신 이근택과 내장원경 이용익이 전차가 운행되면 한국의 재원이 고갈될 것이라고 염려하여 시민들에게 타지 못하게 명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미국인이 고종 국왕에게 사정을 주달하여 두 사람은 크게 꾸중을 들었다. 원한을 품은 두 사람은 박멸을 계획하여 12월 1일에 모든 선교사와 기독교인을 일제히 살해하라는 비지를 각도에 시달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해주에 볼일이 있어 들렸다가 이 절박한 소식을 알게 되어 즉각 소식을 라틴어로 에비슨(D.R. Avison) 선교사에게 알려주었다.
알렌은 지체하지 않고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이에 국왕께서는 외인과 교도들을 일체 가해해서는 안 된다고 칙전을 사방에 급발 하였다. 풍전등화와 같은 혹화를 아슬아슬하게 면할 수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교회에 대한 박해사건은 장소와 시일을 달리하여 계속적으로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그것들은 대부분의 국부적인 문제이었고 전체적인 문제로 등장하지는 아니하였다.
◉ 과 제 ◉
1. 서해안을 통한 개신교의 접촉에 대하여 약술하라
2. 중국에서 벌린 선교사들의 조선인 선교 활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3. 알렌, 아펜셀러, 언더우드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에 대하여 설명하라
4.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대하여 약술하라
5. 외국 선교부들의 입국에 대하여 열거 약술하라
6. 선교 구역이 어떻게 조정되었는가 쓰라
7. 네비우스 선교 방침에 대하여 진술하라
제1편 전래사
( 7세기 - 1906년 )
제1장 기독교의 동양전래
Ⅰ 도마와 네스토리우스파의 동양선교
1. 사도 도마의 동양 전도
기독교의 초기 동방 전도에 관한 전설이나 문헌은 모두 예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인 도마와, 그와 함께 갔다는 바돌로메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인도인들의 전설 중에는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전도할 때, 도마와 바돌로매는 동방으로 진출하여 도마는 인도에서, 바돌로매는 중국에까지 들어가 전도하였다고 한다. 이보다 좀더 구체적인 사례는 남인도 말라바르(Malabar) 교회가 갖고 있는 역사적 전통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말라바르 교회 전승에 따르면, 처음으로 사도 도마가 인도 동쪽 해안에 있는 마드라스에 도착하여 전도하다가 점차 서쪽으로 옮겨 말라바르에 정착하여 전도활동을 벌인 것이라고 한다. 그의 전도 활동은 중국에까지 확산되었다고 한다.
2. 네스토리우스파의 동방 선교
네스토리우스는 예수님의 신인성을 완전 분리하고, 예수님은 두 인격을 가진 것으로 주장하므로 431년 에베소 공의회의에서 주교직을 파면 당하고 추방당함으로 정치적 패배를 맛보았으며, 451년 칼케돈(Chakedon)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확정하면서 네스토리우스파와 서방교회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이후 네스토리우스파는 자기네 교회를 앗시리아교회혹은 갈대아교회라 부르며 독자적인 교회 전통을 수립해 나갔다. 이들은 489년 동로마 황제 제노(Zeno)에 의해 에뎃사에서 추방당하고 니시비스(Nisibis)로 옮겨 신학교를 재건했으며 서방교회와는 다른 전례와 신학 전통을 수립하여 나갔다.
674년 페르시아가 회교국인 아라비아에 의해 멸망된 후에도 칼리파(Khalifa)의 신임을 얻어 계속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고 762년에는 오히려 본거지를 바그다드로 옮겨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페르시아에 근거를 둔 네스토리우스파는 7세기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인도와 아라비아에 선교사를 보냈는데 인도에서는 말라바르에서 중점적으로 활약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중앙아시아를 통해 뚫린 비단길을 타고 중국에까지 선교단을 파송하였고 중국에서 네스토리우스파는 경교란 명칭으로 활발한 선교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3 중국의 경교 전래와 역사
알로펜(Alopen, 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네스토리우스파 선교단이 중국에 도착한 것이 635년, 당(唐) 태종(太宗) 때이었다.
태종은 재상 방현령(房玄齡)을 내보내 이들을 환영하였고 당의 수도 장안(長安)에 머물게 하며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도록 배려하였다.
이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한자 명칭은 여러 가지였다. 그들이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해서 페르시아의 한자 음역인파사(波斯)를 붙여 파사교(波斯敎)라 칭하기도 했으며 후에 그 교가 로마에서 전래되었음을 알고 로마를 의미하는 한자대진(大奏)을 넣어 대진교(大奏敎)라 불렀다. 대진승(大奏僧)은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를 의미하고 대진사(大奏寺)는 그 사원을 의미했다. 그러다가 광명정대(光明正大)한 종교라는 의미가 담긴경교(景敎)란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여대진경교(大奏景敎)란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알로펜이 이끄는 선교단을 환영하고 장안에 정착하도록 배려한 태종은 638년에 경교를 조정이 인정하는 종교의 하나로 선포하였고 장안 의령방에 사원을 건축하여 대진사라 칭하였으며 승려 21명을 두어 포교하도록 하였다.
태종에 이어 고종(高宗)대에 이르러서도 경교는 계속 보호를 받았다. 고종은 경교를 진종(眞宗)이라 하였으며 전국에 경사(景寺)를 건립하였고 알로펜에게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란 칭호를 붙여줄 정도로 후대하였다.
현종(玄宗) 숙종(蕭宗) 대종(代宗) 덕종(德宗)에 이르는 1백여 년 동안 경교는 삼이사(三荑寺=회교, 조로아스터교(祅敎), 경교)의 하나로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인 고위관리들 가운데 경교를 숭배한 인물들도 여렷 나오게 되었는데 처음 알로펜을 영접했던 방현령을 비롯하여 현종 때 명장으로 이름 높았던 고력사(高力士), 숙종․대종․덕종 3대를 섬긴 명장 곽자의(郭子儀)와 그의 밑에 있던 이사(伊斯)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781년 덕종 건중(建中)2년에 유명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奏景敎流行中國時)를 장안에 있는 대진사 경내에 건립했다. 이 경교비야말로 중국에서의 경교 역사와 실태를 증언하는 귀중한 사료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교는 845년 무종(武宗)의 회창멸법(會昌滅法) 조치에 의하여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Ⅱ 중세기 서방교회의 동방 선교
1. 원대의 야리가온
845년의 금교령 이후 경교는 약 4백 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원(元)대(1234~1367년)에 이르러 재흥하는 현상을 보였다. 원은 몽고족이 세운 나라로 우랄 알타이산맥을 근거로 하여 형성되었고 그들의 세력은 동으로는 만주와 한반도, 북으로는 러시아 키에프, 서로는 페르시아와 폴란드에까지 확장되었다. 이들 몽고족이 변방을 점령한 후 중국 대륙의 송(宋) 왕조를 멸망시키고 원(元)이라는 왕조를 세워 중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당 말기에 박해를 피해 변방에 은둔해 있던 경교도들과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하여 시리아문화를 흡수 해 살고 있던 돌궐 계통의 위구르, 네이만, 케락, 온구이트 족들 가운데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이 몽고족을 따라 중국에 들어 오게되었다. 바로 이들을 통해 중국에서 경교가 재흥하게 된 것이다.
원대에 재흥한 네스토리우스파는 경교란 명칭을 쓰지 않았다. 대신야리가온(也里可溫) 혹은 아이개온(阿爾開溫)이란 칭호가 붙여졌는데복음을 섬기는 자 또는 복음을 받들어 섬기는 자란 뜻을 지니고 있다.
몽고족은 변방 부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결혼정책을 사용했는데 징기스칸이 아내로 맞이한 케라르트(Kerart)족 공주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징기스칸 영내에 사원을 설립하였으며 케라르트 출신의 야리가온들이 몽고의 수도 카라코룸(和林)에 진출하여 상당한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쿠빌라이도 자신은 불교도였으나 야리가온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는데 1289년 숭복사(崇福寺)를 설립하여 야리가온에 대한 업무를 관장케 하였고 궁 안에 3만 경호대를 기독교도들인 알라인(Alains)들로 조직할 정도였다.
로마교황 사절이 되어 몽고를 1275년 방문한 아버지 니콜로(Nicolo)를 따라 몽고에 도착한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으며 17년간 원의 조정에서 봉사하였는데 그 동안 듣고 본 바를 나중에 본국에 돌아가서 쓴 책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이 책은 진강에서의 십자사 건립뿐 아니라 중국의 서북지방, 내몽고지역, 화북과 화남은 물론 서남지역인 운남(雲南)에 산재한 야리가온들의 행적에 관해 상세한 언급을 하고 있어 원 초기의 기독교 이해의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원대에 적어도 47개 지방에 야리가온 사원들이 건립된 것으로 정리된다. 즉 원대에 야리가온이 지역적으로 폭넓게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대의 역사가 변방족인 몽고의 한족(중앙 민족) 지배의 역사였던 것과 같이 야리가온은 외래종교로 몽고족의 지원을 받으며 지배계층의 종교로 정착했다. 본토민인 한족에서 유래된 종교가 아니라 몽고족과 함께 지배자로 도래한 색목인들의 종교였기에 그만큼 중국에 토착되기도 어려웠고, 원대의 야리가온은 경전 번역에 소홀했을 뿐 아니라 예배 시에는 시리아 말을 사용하였고 시리아어로 된 기도서와 경전을 그대로 사용함으로 외래종교란 인식을 오히려 강하게 부각시켰다.
이처럼 야리가온이 지배계층의 외래종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1368년 한족이 다시 일어나 명(明)을 세우고 원을 멸망시켰을 때 야리가온도 함께 소멸되었다. 명에 들어오면서 만주족을 비롯한 외래민족에 대한 견제가 강화되고 중국에 남아 있던 이방민족들도 한족화(漢族化)됨에 따라 외래종교로 인식되었던 야리가온이 자리할 위치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2. 경교의 한국 전래 주장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제일 먼저 언급한 학자는 영국인 여류 고고학자 고든(E.A. Gordon)이었다. 기독교의 동양전래 및 기독교․불교 교류에 대해 연구하였던 그는 한일합방 무렵에 한국에 4년간 머물면서 불교 사찰을 살펴보고 한국 불교와 경교의 연결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는 특히 경주 불국사 석굴암의 신장(神將), 관음상(觀音像), 나한상(羅漢像). 제석천상(帝釋天像) 등에서 페르시아의 경교적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능묘에 나타나는 십이지상(十二支像) 부조나 능 앞의 무인상(武人像)에도 경교적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 같은 연구를 기념하기 위해 중국 장안에 건립되었던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모조비를,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경내에 세우기도 했다.
이 주장을 따르는 자들은 특히 1956년에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되었다는 십자가 형태의 석제물(石製物), 전남 해남 대흥사에 소장되어 있다는 동제(銅製)십자가, 그리고 마리아 상과 유사하다는 관음상(觀音像)을 예로 들며 경교의 한국전래 가능성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이후 경교의 한국전래 가능성은 여러 학자․연구가들에 의해 꾸준히 지적되고 있으나 아직은 가설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객관적인 입증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3. 카톨릭교회의 동양선교
13세기 유럽은 몽고족의 서방 진출로 인해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페르시아를 점령했고 폴란드 지경까지 진출한 몽고 세력과 타협하여 유럽의 평화를 지키려는 노력이 당시 로마 교황 이노켄티우스 4세를 중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서 추진되고 있었다.
몽고족과의 타협을 통해 그들의 서방 진출을 막고 가능하다면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므로 기독교 세력의 확산을 꾀하고자 하였다.
로마 카토릭교회의 이 같은 정책을 수행한 단체가 프란체스코회였다.
1245년 리용에서 개최된 공의회 결정에 따라 교황의 전권대사가 몽고에 파견되었는데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제자였고 프란체스코회 창설에 참여했던 카르피니(1182~1252년)가 그 사절로 선출되었다.
카르피니는 1245년 4월에 리용을 출발하여 1246년 7월 22일 몽고의 수도 카라코룸(和林)에 도착하였다. 마침 그때가 쿠유크(Kuyuk)가 정종(定宗)으로 즉위할 무렵이어서 그 대관식에 참석, 교황의 친서를 전달했고 정종의 우호적인 내용의 친서를 받고 1247년 가을에 유럽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여행 체험을 바탕으로〈몽고의 역사〉(History of the Mongols)를 저술했는데 이 책에서 몽고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야리가온) 신앙의 존재를 알렸고 가톨릭 선교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1253년에는 다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루브루크(William de Ruburck)가 동료 크레모나(Bartolomeo da Cremona)와 함께 카라코룸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사절들로 징기스칸의 증손 사르탁이 기독교인이란 소문을 전해 듣고 그와 협력하여 이집트를 공략할 정치적인 목적에서 파송된 인물들이었다. 카라코룸에 도착하여 사르탁을 만났으나 그가 기독교인이 아님을 알고 실망했으며 그의 부친 바투와 왕인 헌종(憲宗)을 알현하고 몇 차례 종교적인 토론을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헌종의 친서를 받아 1254년 돌아오고 말았다.
코레아로 알려지게 된 우리 나라
▶ 루브루크는 귀환한 후 몽고에서 체험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몽고인들 사이에 퍼져있던 네스토리우스파 신앙의 현황과 이때 유럽에서 포로로 잡혀 온 기독교인들의 실태를 소개하였다. 이때 그는 압록강 부근까지 여행하였었는데, 교황에게 고려를카울레(Caulej)로 보고하여 우리 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소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 (1653년에 화란 사람들 하멜 외 36명이 제주도에 표류되어 잡혔고 13년간이나 본토에서 억류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멜(Hendrik Hamel)을 포함한 8명이 우리 나라를 탈출하여 일본 나가사끼〈長騎〉에 들렸다가 귀국하였다. 이 하멜이 1668년에 화란어로 표류기〔漂流記)와 조선 왕국기(朝鮮王國記)를 발표하여 우리 나라에 대한 자세한 것을 유럽에 소개하였다.
그 뒤에 이 책이 프랑스어로, 독일어로, 영어(1740)로 각각 번역되었는데 그 책들이 우리 나라 이름을 Coeree. coree, 또는 Corea로 소개하였다. 그 뒤에 Korea로 바뀌게 된 것은 앵글로 색슨어〈영미계)에서만 그렇게 되었고 다른 나라에서는 지금도 Corea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를 처음 세계에 소개한 사람은 개신교인 하멜이었다)
이 같은 전초 과정을 거쳐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선교사가 파송 되었다. 즉 교황 니콜라이 4세(Nicolas IV)의 명령을 받아 프란체스코회 소속의 몬테 코르비노(John of Monte Corvino, 1247~1328년) 신부가 중국 본토에 진출하였다. 그는 해로로 광주(廣州)를 거쳐 1294년 북경에 도착하였다.
이미 그때 몽고는 송을 멸망시키고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북경으로 옮겼으며 원을 건국했다. 당시 황제는 세조(世祖, 쿠빌라이)의 뒤를 이어 성종(成宗)이 즉위해 있었다. 코르비노는 원 황실의 지원을 받으며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폈다.
1305년에 보낸 서한에 의하면 그가 이미 북경에 교회를 두 곳 세웠고 6천여 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7-11세 소년 150명을 모아 그리이스어. 라틴어와 성가 등을 가르치고 어린이 합창단까지 조직했음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과 시편을 몽고어로 번역하였으며 네스토리우스파(야리가은)였던 온구이트족 할리길사(關里吉思)왕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켜 그 부족을 가톨릭화시키기도 했다.
이와 같은 코르비노의 활약으로 중국에 가톨릭 신앙이 확산되었으며 로마교황 클레멘스 5세(Clement V)는 1307년에 중국교구를 창설하고 코르비노를 대주교로 임명하여 중국을 중심 한 동방 선교를 관장케 했다.
가톨릭교회도 몽고인을 주요 대상으로 하여 선교하였기 때문에 본토 한인(漢人)들에게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은 후에 원의 멸망과 함께 가톨릭 교회도 폐쇄되고 마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Ⅲ 종교개혁 이후 카톨릭의 동양선교
1. 예수회의 동양선교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운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톨릭 교회 내에서 전개된 자기혁신운동의 일환으로 형성된 선교단체가 예수회(jesuits)다.
예수회는 스페인 출신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년)와 사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년)에 의해 1534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되었다. 내적으로는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고 외적으로는 선교에 주력하여 실추된 교회의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교황 바오로3세(Paul Ⅲ)에 의해 154O년에 정식 외방 전교회로 인정되어 외국전교단체로 활동할 수 있게되었다.
예수회의 동양선교는 설립자의 한사람인 사비에르의 직접 참여로 시작되었다. 1541년 그는 포르투갈 국왕의 지원을 받아 인도 고아(Goa)에 진출하였다. 이미 인도에는 도미니쿠스회나 프란체스코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실론, 페구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착민들의 거부 반응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사비에르는 과감하게 토착화 정책을 펴며 주로 인도 서남부에서 활동했는데 병원을 세우고 환자를 치료한 것이 선교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 결과 8년 동안 활동하면서 약1O만 명에게 세례를 베푸는 큰 업적을 이루었다. 그가 선교 거점으로 삼고 있었던 고아는 동방선교의 관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방 여러 나라들이 동방에 진출하는 전초기지가 되었다.
2. 예수회의 일본 선교
인도 고아에서 8년 동안 선교하면서 예수회의 동양 선교 발판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사비에르는 일본 선교에 착수하였다.
그가 일본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본을 다녀 온 바 있는 친구이자 포르투갈 선원 핀토(Memes Pinto)로부터 받은 권유 때문이었다. 또한 사비에르는 다른 친구 알바레스(Jarge Alvares) 선장의 소개로 일본인 안지로(安次郞) 일행을 만났고 그들을 고아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시켜 신학 수업을 받게 하면서 일본 선교를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 마침내 사비에르는 토레스(COSIne de Torres)신부, 페르난데스(Joao Fernandez)수사. 안지로 등과 함께 1549년 8월 15일에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했다. 이것이 일본 기독교 선교의 시작이다. 사비에르가 2년 3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전도한 결과 1천 5백여 명의 개종자를 얻었는데 이것이 일본 선교의 기초가 되었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일본에 처음 왔을 때 일본인들은 그들을 불교의 한 유파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가톨릭교는 일본에서 남만종(南蠻宗), 천축종(天竺宗)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가톨릭 선교사들이 불교인이 아님은 곧 알려지게 되었고 대신 기리시단(切支丹, 혹은 吉利支丹)이란 독창적인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는데 이는 포르투갈 말로 그리스도인을 뜻하는 Christao에서 유래된 명칭이었다.
처음에는 선교사들을 통해 포르투갈과의 무역에 관심을 두고 접근했던 영주나 다이묘들 가운데 신앙을 고백하면서 기리시단으로 개종하는 예가 속출하게 되었다. 명문 출신의 기리시단들을 특별히 기리시단 다이묘(切支丹 大名)라 부르는데 이들의 개종은 한 개인의 개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과 그가 지배하고 있는 성(城)주민들의 개종으로 연결되어 기리시단의 수적 증가를 가져 왔다. 그 결과 1570년에 약3만 명의 기리시단이 생겨났고 1579년1O만 명, 1581년 15만, 1587년에는2O만 명에 이르렀다. 특히1570~82년의 10여년 간이 일본 기리시단 역사의 절정기로 큐우슈의 3대 명문 오오토모 ․아리마 ․오오무라에 의해 12, 3세 되는 소년들로 구성된 사절단이 로마 교황청에 파견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상류계층인 영주들이 기리시단으로 개종한 것은 신앙적인 동기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선교사를 통해 포르투갈․스페인 등과 무역하고 서양의 신무기를 얻으려는 세속적인 목적도 크게 작용하였다. 후에 기리시단에 대한 정부의 박해가 가해졌을 때 끝까지 신앙을 수호하며 순교했던 다이묘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대부분이 배교하고 만 것도 이 같은 입신 동기를 반증해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처럼 빠른 기간 중에 유행하게 된 기리시단 신앙이 정부측의 탄압을 받기 시작한 것은 1587년 무렵부터였다. 당시 일본 통치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었는데 집권 초기에는 기리시단을 보호하는 정책을 펴다가 얼마 후 기리시단을 사법(邪法)으로 규정하는 금교령을 반포하였다. 그가 기리시단을 금하게 된 동기는 기리시단 세력이 정치적 위협 요인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고, 1596년 우라도에 정박 중이던 스페인 선박 산 펠리페(San Felipe)호 선원이 스페인의 위력을 자랑하면서 일본인들을 위협한 언동을 한 것이 토요토미를 분노케 하여 선교사 6명과 일본인 기리시단 20명을 체포하고 나가사키에서 처형시킴으로 기리시단 박해가 본격화되었다.
그의 후임들도 계속 기리시단을 박해하였으며, 1623년 통치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도 계속 기리시단을 금하였는데 1637년 시마바라에서 일어난 농민주동의 반란에 기리시단 신자들이 많이 참여했다는 구실로 또다시 기리시단에 박해를 가했다. 결국 1639년에는 네덜란드 선박을 제외한 어떤 외국선박의 입항도 금하는 한편 외국 선교사를 추방하고 기리시단을 박해함으로 기리시단은 표면적으로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1853년 안세이(安政)조약 체결로 문호를 개방하고 기독교 선교가 재개되기까지 거의 200여 년 동안 일본에서는 기독교 역사가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회에 의해 추진된 일본 선교는 기리시단 역사를 창출하여 기독교 신앙을 일본에 접목시킨 것 외에도 포르투갈. 스페인의 서구 문화가 일본에 유입되어 일본 문화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3. 예수회의 중국 선교
예수회의 일본 선교를 개척한 사비에르는 1551년 말에 고아로 귀환하였다. 그는 일본에 체재하는 동안 극동 아시아에서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파악한 듯하며 중국 선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일을 위해 고아로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 사비에르는 1552년 4월에 중국을 향해 고아를 출발했고 8월 하순에 중국 광동에 가까운 상천도(上川島)라는 섬에 도착하였으나 이곳에서 중국 선교를 준비하다가 그 해에 사망함으로 중국 선교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로마 교황은 1568년에 이르러 카르네이로(Carneiro)를 중국 주교로 임명하여 본격적인 중국 선교에 착수토록 했다. 카르네이로의 뒤를 이어 1573년에 발리냐니(Alexandro Valignani, 范禮安)가 40명의 선교사들을 이끌고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 후 발리냐니의 요청으로 도착한 루지에리(Michael Ruggieri, 羅明堅)는 마테오 릿치(Metteo Ricci)를 중국으로 인도했다. 이 들은 모두 예수회 소속이었다. 이들은 유럽에서 철학, 과학 분야의 고등교육을 받은 예수회 소속의 학자들로서 마카오에 머물면서 우선 중국어 학습에 몰두하였다.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중국인들에게 선교하는데는 중국어를 사용하면서 중국 문화에 긍정적으로 접근한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1583년 루지에리와 릿치는 광동성 수도인 조경(肇慶) 지부(知府)를 방문하고 정중한 예절을 갖추어 선교 허락을 요청하였다. 선교 허락 요청을 받은 지부는 서문밖에 성당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조경에 3층 짜리 유럽식 성당을 1년만에 건축한 루지에리나 릿치는 중국인들의 문화 전통과 타협하는 태도를 취하며 선교에 착수했다. 루지에리는 광동에 정착한 이듬해(1584년)에 한문으로 〈성교실록〉(聖敎實錄)을 간행하였다. 한문으로 된 천주교 서적으론 처음 것이었다.
릿치는 같은 해 〈산해여지전도〉(山海與地全圖)라는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이 지도는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만 알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루지에리나 릿치는 우선 중국인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문화적인 접근 방법을 썼다. 복음이나 교리를 전하는 것은 가급적 삼갔다. 이 같은 방법은 문화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중국인들에게 효과가 있었다. 중국 선교를 개척한 루지에리와 릿치는 구체적인 선교 방법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루지에리는 중국 민중을 주요 선교 대상으로 삼은 반면 릿치는 유식 계층을 대상으로 삼았다. 루지에리는 민중 종교였던 불교의 문화 양태를 이용하려 했으나 릿치는 지배 계층 종교인 유교의 문화 양태를 이용하려 하였다.
루지에리는 로마 교황으로 하여금 명 황제에게 직접 사절을 보내어 선교 허락을 얻게 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여겨 1588년 이탈리아로 귀국하였다가 중국에 다시 귀환하지 못한 채 1607년 사망하고 말았다.
따라서 중국 선교는 릿치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유식자 계층, 지배 계층을 지향하는 선교가 추진되었다.
◉ 과 제 ◉
1. 네스토리우스파(경교)의 중국 전래에 대하여 약술하라
2. 예수회의 일본 선교에 대하여 설명하라.
3. 예수회의 중국 선교에 대하여 쓰라.
제2장 천주교의 조선 전래
Ⅰ 조선인과 천주교의 접촉
1. 일본을 통한 접촉
일본은 16세기 중엽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전국의 통일이 이루어졌고 오다의 뒤를 이어 통치권을 장악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巨秀吉)는 강력한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한편 내적 불안 요인들을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로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니 그것이 1592년에 시작되어 1598년에 끝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었다.
이 전쟁 중에 우리 나라는 처음으로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첫째는 전쟁 중에 서양인 성직자가 최초로 이 땅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이고, 둘째는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 간 많은 한국인 포로 중에 상당수의 천주교 개종자가 나왔으며 그들 가운데서 순교의 영광에 이른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의 한사람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유명한 기리시단 다이묘 중의 하나였다.
그는 불과 2O여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고 평양까지 진출했던 고니시 부대는 조선 의병들의 저항을 받아 후퇴, 경상도 남단의 웅천(熊川)을 거점으로 삼아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전쟁이 오래 끌자 고니시는 본국에 있는 예수회 신부들에게 종군 사제를 한사람 보내달라는 서한을 띄웠다.
▶ 이에 예수회 일본 부관구장 고메스 (P. Gomez) 신부는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 (Gregorio de Cespedes)와 일본인 수사 후칸 에이온(Foucan Eion)을 조선에 파송했다. 이렇게 되어 1594년 초 기독교 성직자로서는 최초로 세스페데스가 우리 나라 땅에 발을 내디뎠다. 그는 고니시가 자리잡고 있던 웅천을 중심으로 일본군 진지를 순방하며 성사(聖事)를 집행했다. 세스페데스의 내한 활동은 1년 조금 넘게 진행되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세스페데스의 활동은 우리 나라 기독교 역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들 중에 상당수의 개종자들이 나왔고 그들 가운데 복자(福者) 위에까지 오른 순교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비록 그 일이 일본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한국 기독교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중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적게 잡아도 5만 이상으로 추산된다. 그 중에 전후 양국 정부의 협상에 따라 조선에 귀환한 포로 수는 7천 정도였고, 대부분의 포로들은 남방에 노예로 팔려 가거나 일본에 남아 포로 생활을 해야했다.
▶ 이들 일본에 잔류한 포로들 가운데 천주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일본에 잡혀갔던 포로들 중에 천주교인이 된 조선인 수는 대략 7천명에 이르며 그 중에는 예수회 회원이 되어 신학 훈련까지 받고 조선 선교를 시도했던 권(權) 빈센트 같은 인물도 있었다.
많은 포로 출신 천주교인들이 박해 중에 일본인 교인들 속에 섞여 순교함으로 조선 천주교회의 첫 수확이 일본에서 거두어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포로로 잡혀갔다가 순교한 조선인 가운데 복자(福者) 위를 받은 자가 고스마 다께야 등 9명, 순교자 칭호를 받은 이가 미카엘 등 11명에 이르고 있다.
이 외에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도쿠가와 궁전 안에서 궁녀로 있으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고오즈시마(神律島)란 조그만 섬에 유배당해 그곳에서 절명한 오타 쥴리아(Ota Julia)를 비롯하여 6명의 증거자들이 일본 천주교회사에 기록되고있다.
2. 중국을 통한 접촉
임진왜란을 겪은 지 30년이 못되어 우리 나라는 또 다시 북방 여진족(後金, 淸)의 침략으로 정묘호란(1627년)을 겪게 되었다. 이 침략은 1636~7년의 병자호란으로 끝나기까지 1O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청은 조선에 대해 막대한 전쟁 물자를 요구했고 명과 전쟁할 때 군사적 원조까지 해 줄 것도 요구했다. 그리고 왕세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왕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볼모로 데리고 갔다.
소현세자로서는 볼모로 잡혀 온지 7년째 되는 해, 북경에 머무는 예수회 신부 아담 샬(j. Adam Shall von Bell, 湯若望)과 사귀게 되었다. 소현세자가 묵고 있던 동화문 안의 문연각은 아담 샬이 묵고 있던 동문안 동(東) 천주당과 그리 멀지 않았다. 신부들은 볼모로 잡혀 와 있던 조선의 왕세자에게 관심이 깊었고 세자 역시 서양 신부들의 서구 과학 지식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한 쪽에서는 선교적 관심에서 다른 한쪽에서는 지적 호기심에서 서로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담 살과 소현세자 사이의 교분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던 중 청의 세조가 볼모인 소현세자의 귀국을 허락하여, 귀국을 앞두고 소현세자는 아담 살에게 선물을 보냈고 이에 답례로 아담 샬도 천문(天文)과 역산(曆算)에 관한 서책과 천구의(天球儀)등 서구 과학기물들을 보냈으며, 이와 함께 〈성교정도〉(聖敎正道) 등 천주교 서적 몇 권과 구세주상(救世主像)을 한 장 보냈다. 이러한 선물을 받은 소현세자는 과학에 관한 서책과 기물을 제외한 천주교 관계 서적과 구세주 상은 정중한 사양의 서한과 함께 돌려보냈다.
소현세자는 그 대신에 북경에서처럼 조선의 수도에서도 선교사가 주재하면서 정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선교사 한 명을 귀국할 때 동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조선에 선교사를 보낼 여유가 없어 선교사들은 그 대신에 귀국하는 소현세자 일행 속에 교인을 배행 시키는 방법을 썼다. 즉 중국인 궁녀 감독관으로 선발된 환관 5명을 교인들로 구성했던 것이다.
소현세자 일행은 1644년 11월말에 북경을 출발하여 이듬해 2월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7O여 일만에 돌연 죽고 말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소현세자가 가져온 물품과 서책이 불살라졌으며 소현세자를 수행해 온 중국인 궁녀들과 환관들까지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실이 프랑스에 알려져 파리에서 해외선교를 주창한 팜플릿 속에조선 왕자 이야기로 소현세자 이야기가 등장하였으며 이것이 파리외방전교회 설립의 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이 이 선교 단체가 1830년 정식으로 조선교구가 창설된 이후 조선 선교를 관장한 기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소현세자와 선교사의 교류는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소현세자와 아담 샬과의 만남은 한국의 또 다른 복음의 접촉 사건이었던 것이다.
Ⅱ 서학 연구와 실천 운동
1. 서학 연구
천주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최초의 형태는 조선사회의 내부적 모순을 타개하고자 했던 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서학(西學)이었다. 어느 민족,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 즉 학문으로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청과 조선을 정기적으로 왕래하던 외교사절단 부연사행(赴燕使行)은 중국의 수도 연경(또는 북경)을 방문했다. 그 중 일부는 그 곳의 천주교회당에 가 선교사들과 만나기도 했는데, 이들을 통해서 우리 나라에 서학 물품들이 유입되게 되었다.
서학연구의 근거가 되었던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와 서양 기물의 조선 유입은 이미 17세기초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서학 유입 시기를 지나 18세기 중엽부터는 조선 학자들 가운데 서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대표적 인물은 이 익(李 瀷)이었다. 이 익의 제자와 문하생들에게 확산되어 ‘조선 서학’이란 학문 체계가 수립되며 조선 후기 실학 형성의 중요한 줄기가 되었다.
서학을 연구했던 초기의 양반들은 대부분 실학자(實學者)였다. 이들 실학자들 중에 서학의 기(器)적 측면을 강조했던 북학파는 북경을 다녀온 홍대용을 비롯한 박지원, 이덕형, 박재가 등으로서 이들은 서양 과학과 기술을 적극 도입함으로써 부국유민(富國裕民)을 위한 이용후생(利用厚生)에 기여하려는 의도를 가졌지만 종교적인 면에서는 서교에 대해 폐쇄적이었다.
이와는 달리, 서학의 이(理)적 측면을 강조하는 부류는, 조선 서학이라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한 기호(畿湖)지방 남인계(南人係) 학자들로서 이익의 제자들이 주축 되어 생긴 성호학파(星湖學派)였다, 이들은 서학의 사상적 근거인 서교, 즉 천주학(천주교)까지도 적극 수용하여 실천하려는 모험적인 학자들이었으니 권철신,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이가환, 이 벽, 이승훈, 이기양 등이었다.
2. 서학 실천 운동
이들 성호 학파들은 학문으로서만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신앙실천 운동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게 되었다.
1770년에 이르러서는 이 벽(1754-1785)의 제자 홍유한이 7일마다 하루씩 노동을 금하고 기도와 금욕생활을 함으로써 신앙실천운동의 최초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보다 확실한 신앙 실천은 1777년(정조 원년) 겨울에 성호 좌파(星湖 左派)의 영수이며 유명한 학자인 권철신이 정약전 등 수명의 학자들과 함께 교리 연구회로 모임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교리 연구회는 그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779년 겨울 천진암(天眞庵), 주어사(走魚寺)라는 서울에서 100여리 떨어진 외딴 절에서 교리 연구회 모임을 갖고 신앙 실천을 여행(勵行)하였다. 이 연구에서 그들은 천주교 서적들을 읽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변하기에 충분하여 즉시로 새 종교에 대하여 실천하기에 이른 것이다.
▶ 강학에 참가한 자들은 성호좌파의 영수인 권철신의 문하생이였고 이들과 교우 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강학에 참석한 자들은 권철신,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이벽 등 여섯 명을 들고 있는데, 1779년을 천주교 창립 년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윤하, 이승훈, 정약종, 정약용을 포함시키고 이들을 한국 천주교의 창립성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벽은 천주공경가를, 정약전은 십계명가를, 이가환은 경세가를 지어 불렀고 매월 7. 14. 21. 28일에는 안식을 취하고 육식을 피하며 이 모든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히 비밀리에 실천하였다.
결국 강학회는 조선 서학파의 실질적 구분을 가능케 했다고 볼 수 있다. 학문적 연구로, 또는 혈연, 지연으로 관계를 맺어왔던 자들은 전통적인 유교적 생활 습관을 바꾸는 데서 반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Ⅲ 조선 천주교의 창설과 박해
1. 조선 천주교의 창설
1783년(정조 7년)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李東都)이 동지사俊至使)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때 이승훈도 부친을 따라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 벽은 이승훈을 찾아가 북경에 가거든 천주당을 찾아보고 그곳에 있는 서양 선비(선교사)를 만나보고 신경(信經)도 얻어오고 아울러 영세도 청하여 받고 오도록부탁하였다. 북경에 들어간 이승훈은 이 벽의 말대로 북경의 북천주당을 찾았다. 북천주당은 예수회 해산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맡아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프랑스인 신부를 만나 천주교 서적을 얻어 열심히 읽고 또 신부의 가르침도 받았다.
▶ 이 과정 속에서 이승훈은 자신이 입교할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고 부친의 동의를 얻어 마침내 그라몽(J.J. de Grammont, 梁棟林) 신부에게베드로란 영세 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때가 1784년 정월 말경 귀국 직전이었다.
세례 받은 이승훈은 북경에서 많은 책과 십자고상(苦像)과 성화 등 천주교 성물을 받아 가지고 1784년 서울로 귀환하였다.
이 벽은 이승훈을 통해 전달받은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보다 확고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오랜 동안 은둔처에서 책을 읽으며 천주교교리에 접했던 그는 신앙의 확신을 가진 후 먼저 이승훈․정약전․정약용 등 가까웠던 동지들을 찾아가 이벽은 보다 적극적인 신앙 실천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벽은 계속해서 천주교 전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 1784년 9월경 이승훈은 이 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 벽에겐 세례자 요한, 권일신에겐 프란체스코 사베리오란 세례명이 주어졌다.
권철신의 외숙이었던 홍교만(洪敎萬)도 이 무렵 입교하였는데 홍교만에 의해 그의 고향인 경기도 포천지방에도 천주교 신앙이 퍼지기 시작했다. 또한 권일신은 충청도 내포(內浦, 현 아산지방) 출신인 이존창(李存昌), 전라도 전주 출신인 유항검(柳桓險)을 교인으로 얻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예산 사람 홍낙민(洪樂敏)이 이승훈․정약용 등과 친분을 나누던 중 교인이 되었고, 전라도 진산(珍山)사람 윤지충(尹持忠)이 김범우의 전도를 받아 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지 불과 1년도 못되어 서울과 경기도 마재 ․양근 ․포천 지방, 충청도 내포, 예산 지방, 전라도 전주․진산 지방에 천주교 신앙이 확산되었다. 이렇게 조선 천주교회는 창설되어 갔다. 이승훈의 수세(受洗), 그리고 이승훈에 의한 이 벽 ․권일신 세례, 위 3인의 적극적인 전교활동에 의해 자생적(自生的)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2. 천주교의 초기 박해
1) 을사 추조(乙巳 秋曹) 적발 사건
1785년(정조 9년, 乙已) 봄에 형조의 금리(禁吏)들이 우연히 명례방(明禮坊, 명동 성당자리) 김범우의 집을 지나다가 이상한 집회가 열리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 벽이 중앙에 앉아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있었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정약용 3형제, 권일신 ․권상학 부자 등이 모여 있었다. 금리들은 천주교 서적과 화상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압수하여 형조에 갖다 바쳤다.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집주인인 중인(中人) 김범우만 체포하고 나머지 양반계층 교인들은 책유(責諭)하여 내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것이 소위 을사 추조 적발사건이다. 천주교인의 실체가 정부 기관에 의해 최초로 발각된 사건이었다.
▶ 이 사건으로 체포된 김범우는 단양에 유배당한 후 1년만에 유배지에서 죽음으로조선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비록 중인 계층의 김범우 한 사람의 희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 사건으로 천주교회의 실체가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고 보수적 유림들로부터 천주교가 배척 당하기 시작하였다.
2) 정미 반회(丁未 泮會) 사건
1787년(丁未) 겨울에 이승훈․정약용․강이원(姜履元) 등이 반촌(泮村)에 있는 김석태(金石太)의 집에 모여 서학서를 공부한 사실이 폭로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것을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라 하는데 이 사건을 폭로한 인물은 이승훈, 정약용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처음엔 서학에 호의적 관심을 보였던 이기경 이었다. 이기경은 반촌에서 있었던 서학연구 모임의 실황을 홍낙안에게 알렸고 홍낙안은 이 사실을 세상에 폭로하여 왕으로 하여금 성죄치토(聲罪致討)하도록 해야할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는 서학의 사설(耶說)을 금하지 않으면 점차 백성들에게 퍼져 무군멸친(無君滅親)하는 폐단이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우선 서학관계 서적을 불살라 없애는 것이 시급하다고 하였다. 정조(正祖)는 마침내 그 청을 받아들여 집안에 비장 된 서학서들을 모두 불에 태우거나 물에 던져 버리고 북경으로부터의 서학서 수입을 엄중 단속하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3) 진산 사건
1791년(정조 15년, 辛亥)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인 윤지충 ․권상연(權尙然)이 체포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터졌으니 조선 천주교회로서는 처음으로 맞은 대규모 박해였다. 정약용의 외종(外從)이 되는 윤지충은 진사 시험(1783년)에 합격한 양반계층 신분으로 1784년 서울에 갔다가 김범우의 집에 들러 〈천주실의> 와 〈칠극〉(七克)을 얻어 보았으며 고향에 돌아와 그의 외종형(外從兄) 되는 권상연과 함께 서학을 연구하던 중 둘이 함께 입교하였다.
그는 1790년 말 윤유일을 통해 전달된 북경 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라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그 신주(神主)들을 땅에 묻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은밀한 신앙행위가 1791년 여름 그의 어머니 권씨가 별세하게 됨으로 폭로될 수밖에 없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지고 있던 상례(喪禮)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위마저 만들지 않은 윤지충이나 그의 행위를 지지하는 권상연의 행위는 전통 양반 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사건을 정치 문제화시킨 장본인은 홍낙안이었다. 그는 진산 사건에 접하자 즉시 당시의 집권자 채제공에게 윤지충을 사형시킬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냈고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윤지충의 체포를 촉구하고 나섰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되는데 윤지충은양반 칭호를 박탈당한다 해도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치 않는다고 분명하게 밝힘으로 당시 유교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되어 있던 봉건주의 사회체제에 큰 반향을 이르켰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멸륜패상(滅倫敗常),무군무부(無君無父)의 난행(亂行)을 범한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되어 1791년 12월 8일(음 11월 13일)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진산 사건은 양반계층 교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진산 사건 이후 대부분의 양반 교인들은 신앙의 위기를 맞았다. 홍낙안에 의해 진산 사건의 두목이란 모함을 받은 권일신은 1791년 11월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제주도 유배형이 선고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마음이 흔들려 천주교를 비난하는 글을 쓰고 말았으며 이미〈벽이문〉(闢異文)이란 글을 지어 천주교를 배격하는 입장을 선언하고 평택 현감으로 봉직 중이던 이승훈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홍낙안의 비난을 받게 되자 재차 자신의 무관함을 밝히는 글을 쓰기도 했다. 충청도 내포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도 이 무렵 배교 하였다.
진산 사건으로 천주교는 조상제사를 금하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천주교회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밖으로부터의 박해와 안에서의 배교로 나타났다.
성사는 중단되고 교인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천주교회를 지켜나간 인물들은 중인계층의 교인들이었다. 역관 출신인 최창현․윤유일 ․최인길, 악사(樂師) 출신인 지 황 등은 양반계층이 떠나간 초기조선천주교회를 지켜 나갔다. 이들에 의해 신부 영입운동이 추진되었고 흩어진 교인 규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3. 신부의 입국과 포교 활동
1)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
조선 선교에 관한 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周文模)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 윤유일, 지 황 등은 북경에 들어가 그 동안의 박해 상황을 주교에게 보고하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에 대해 북경 주교로부터 사도직 수행을 위한 일반적인 권한과 비상 권한을 모두 받은 주문모 신부를 안내하여 1794년 12월 23일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1795년 초 서울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최인길이 맡아 관리하던 북촌 사택에 거주하며 우리말을 익히는 한편 은밀하게 세례 등 성사를 베풀기 시작했다. 신부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자 은둔했거나 배교 했던 교인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외국인 신부가 국내에 들어와 종교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은 관청에까지 들리게 되었고 1795년 6월 국왕의 신부 체포령이 떨어졌다. 마침 주문모 신부는 조선인 교인들의 주선으로 체포를 면하고 멀리 연산의 이보현(李步玄)의 집에 숨을 수 있었으나 신부 영입을 주도했던 윤유일․지 황은 물론, 신부사택을 마련했던 최인길까지 체포되었다. 이들은 1795년 6월 28일에 처형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되어 홍낙민, 김종교, 허 수, 이가환, 이승훈, 황사영 등이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는데 대부분이 배교 하거나 신부 입국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이 드러나 풀려났다. 일이 이 정도로 정리된 것은 무엇보다 정조(正祖)가 과격한 천주교 탄압을 싫어했으며 권력을 잡고 있던 채제공이 남인(南人) 시파(時派)에 속했던 인물로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들이 대부분 자신과 같은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을 축소화하려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었다.
연산으로 피신했던 주문모 신부는 1년 후 다시 서울로 잠입하여 여자교인 강완숙(姜完淑)의 집에 숨어 있으면서 이후 6년 동안 은밀하게 조선 천주교회를 지도해 나갔다. 1년 전의 사건을 거울삼아 교인 접촉에도 신중을 기했다. 신부의 행방은 강완숙 만이 알고 있었다. 성사 집행은 엄격한 심사를 거친 교인들에게만 베풀어졌다. 교인들조차도 신부가 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정도였다.
주문모 신부의 활동이 여러 가지 면에서 제약을 받고 있었으나 그의 활약으로 교회는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특히 그가 들어온 이후 조선 천주교회는 여성 교인들의 증가라는 새로운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2) 강완숙의 활동
강완숙은 여러모로 선구적인 여성 지도자였다. 주문모 신부가 들어오자마자 그에게 세례를 받았고 박해기간 중 신부의 피신과 은둔을 주선했으며 1796년 이후 실질적인 신부 보호인 역할을 감당했다. 여 교인 증가도 강완숙의 열심 있는 전교활동 결과였다. 여성 교인들의 신앙지도도 강완숙이 맡았다.
강완숙의 활약으로 왕족에게까지 신앙이 전파되었으니 양제궁(良娣宮)에 살고 있던 은언군(恩彦君) 부인 송(宋)씨와 그 며느리 신(申)씨가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뿐만 아니라 양반집 부녀자들과 궁 안의 궁녀들도 여렷 입교하였다. 강완숙 외에 정약종 ․황사영 ․흥익만(洪翼萬) ․황 심(黃心) ․신태보(申太甫) 등이 신부를 도왔고, 최창현 ․유항검 ․최인철 ․유관검 ․이존창 등 배교 하거나 냉담했던 교인들도 다시 돌아와 돕고 나섰다.
우리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주문모 신부는 교인들의 교리연구회 성격을 지닌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여 조선인 스스로 신앙 훈련을 쌓도록 유도했다. 초대 명도회 회장으로 정약종을 임명했으며 이 회원들이 열심히 전도하여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 4천 여명에 불과했던 교인 수가 몇 년 후엔 1만 여명에 이르렀다. 주 신부는 서울 이외에 경기도 여주, 충청도의 공주 ․온양 ․내포 ․고산 ․남포, 전라도 전주 등지를 돌면서 지방 교인들의 신앙 생활도 지도하였다.
Ⅳ 천주교회의 수난
1. 신유사옥(邪獄)(박해)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純祖)가 즉위했으나 나이가 11세에 불과해 순조의 증조모이자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活) 김(金)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수렴청정을 계기로 벽파는 정조 때 남인시파에 눌려 정치적으로 배척 당했던 한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했다. 이 같은 정치적 갈등의 배경에서 야기된 천주교 박해가 바로 신유박해로 표현되는 1801년의 대규모 교난(敎難) 사건이었다.
정순왕후는 1801년 1월 1O일(음)에 각 고을 수령들은 각기 자기 관할지역 전역에 서로 연대 책임을 지는 오가작통법을 만들어, 만일 그 다섯 집중에 사학(邪學)을 따르는 자가 있으면 그 감시를 맡은 통수(統首)는 수령에게 보고하여 개심케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도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국법이 있으니 그들을 싹도 나지 않도록 뿌리 뽑아 버리라는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이 교서 반포에 따라 전국에 걸쳐 천주교인 체포가 실시되었다.
교서가 반포 된지 9일 만에 명도회장 정약종이 천주교 관계 서적과 성물(聖物)들을 고리짝에 넣어 숨기려고 옮기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주문모 신부의 활약상은 물론 천주교인들의 실상이 폭로되고 말았다. 양반 계층 교인들의 천주교 관련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벽파의 처벌 요구는 더욱 가열되었고 마침내 2월에 접어들면서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흥낙민 ․권철신 ․홍교만․정약종 둥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홍교만․최필공 ․이승훈 등 6명이 2월 26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정약용 ․정약전은 배교 하였으나 유배당했다. 박해는 지방으로도 확산되어 내포, 여주, 양근 지역에서 교인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황해도 황주까지 피신했던 주문모 신부는 교인들의 피해를 줄일 목적으로 3월 12일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체포로 그 동안의 행적이 소상히 밝혀졌고 무엇보다 은언군의 부인과 며느리가 교인이 되었다는 것, 궁 안에도 상당수의 교인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강완숙을 비롯한 여자 교인들의 실태도 발각되고 말았다. 강화에 유배 중이던 은언군이 사사되었고 그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도 사약을 받았다. 주문모 신부는 4월 19일 군문효수(軍門梟首) 되었고 그를 숨겨주거나 도와주었던 강완숙 등 여러 교인들과 궁녀출신 강경복 ․문영인 및 강완숙을 도왔던 동정녀 윤점혜도 처형당했다. 이러한 엄청난 박해가 신유년(1801)에 일어 났다하여 신유박해(신유사옥)라 하며 이때 희생된 천주교인의 수는 3백 명이 넘었다.
황사영 백서사건
신유박해는 9월 25일 충청도 제천 배론〔舟論〕에 숨어 있던 황사영이 체포됨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가 체포될 때 북경에 보내려고 만들었던 장문의 서한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이 정부를 더욱 흥분시켰다.
황사영은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배론으로 피신하였으나 박해 초기에 이미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다. 이 같은 급박한 상황에 처한 황사영은 배론의 은둔처에서 박해내용을 비단에 적었는데 이를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라 한다. 그는 이것을 황 심(黃沁)을 통해 북경에 보내려 했다. 그러나 황 심이 체포되자 은신처가 탄로 나고 황사영도 체포되었으며 백서도 발각되고 말았던 것이다. 백서는 1만 3천여 자에 이르는 장문의 서한으로 그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신유박해를 중심으로 박해의 경위와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사적을 적었으며, 둘째는 폐허가 된 조선 천주교회를 살리는 방도를 나름대로 제시한 것이다. 첫째 부분의 내용은 초기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적 자료로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둘째 부분은 황사영이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을 세 가지로 제안하고 있었던 것인데 나라에 알려지면 큰 문제를 야기시킬 내용이었던 것이다.
첫째는 청의 황제가 직접 조선왕에게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권면하는 방법이었고. 둘째는 청의 황제와 친한 중국인 신자를 조선에 파견하여 평양과 안주 사이에 무안사(撫安司)를 두고 조선의 정치를 감호(藍護)케 하고 또 청의 공주를 조선 왕비로 삼게 함으로 천주교 신앙을 확산시키는 방법이었으며. 마지막 셋째 방법은 서양 함대를 동원하여 조선 정부를 위협하여 강제적으로라도 천주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백서는 천주교를 대역부도(大逆不道)하고 반국가적인 단체로 몰아넣을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황사영이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을 당했고 그와 관계 맺었던 자들까지도 모두 참수되었다.
이 박해로 순교한 자가 약 1백 여명에 이르며 유배된 자가 4백 명에 이르러 도합 5백여 명이 희생을 당했다. 살아 남은 교인들은 산간 벽지로 몸을 숨겨야 했고 교회의 존재는 표면상 사라지고 말았다.
2. 기해 사옥
1839년(헌종 5년)에 신유박해보다 더 치열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으니 그것이 곧 기해박해(己亥追害)이다. 이 박해는 이지연을 비롯한 풍양조씨 세력이 순원왕후에게 천주교처벌을 끈질기게 요구하여 이를 물리치지 못한 순원왕후의 박해령 포고로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박해는 4월 18일에 선포된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에서 비롯되었다. 오가작통법 실시를 골자로 한 이 교서가 발표되면서 전국적으로 교인 체포가 실행되었고 기왕에 잡혀 들어온 교인들에 대한 심문과 처형이 실시되었다. 5월 24일, 남명혁 ․권득인 ․이광헌 ․박희순 ․이아가다․김업이 등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한 것을 필두로 서울과 전주 ․홍주 ․공주 ․원주 등 지방에서 교인 체포와 처형이 진행되었다.
김순성이란 배교인(背敎人)이 있어 교인들에 대한 정보를 정부에 알려 주어 많은 지도급 교인들이 체포되었는데, 유진길 ․정하상․조신철 등 교회 재건운동의 주역들이 그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또 김순성의 간계로 8월에는 앵베르 주교까지 체포되었다. 그리고 모방 ․샤스땅 신부도 앵베르 주교의 자수권유 서한을 받고 자수하여 체포당했다. 세 명의 프랑스 신부는 국사범으로 취급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심문을 받은 후 9월21일에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그해(1839년) 11월에 정부는 〈척사윤음〉(斥邪輪音)을 반포하여 천주교 박해에 대한 정부 처사의 정당성을 백성에게 선전하였는데 이 윤음 반포는 박해를 마무리 짓겠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했다. 기해박해는 신유박해 이상 가는 피해를 교회에 안겨다 주었다. 이 무렵 기록된 〈긔해일긔〉에 따르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중에서 죽은 자가 60여명에 이르며 배교하고 석방된 자가 4, 50명에 이른다. 이처럼 처참한 박해를 받았으나 교회의 회복능력도 전보다 강하여 신유박해 때처럼 오랜 세월 폐허상태에 머물지는 않았다. 교황은 순교한 앵베르 후임으로 1843년 1월 페레올(J. J. Ferreol-高) 신부를 3대 주교로 임명하였고 메스트르(A. Maistre-李)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여 입국하도록 했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1836년 마닐라 유학을 떠났던 김대건은 1845년 8월 조선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고 입국의 기회를 모색했다. 마침내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와 새로 임명된 다블뤼(M. A. N. Daveluy 安敦伊) 신부와 함께 18455년 1O월 12일 충청도 강경을 통해 입국하는데 성공했다.
페레올과 다블뤼는 도착 즉시 서울과 충청도 지방에서 선교활동에 착수했다. 김대건 신부는 만주에서 입국의 기회를 찾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의 입국을 주선하기 위해 황해도 해안으로 갔다가 등산곶 근처에서 등산첨사 정기호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것이 1846년(헌종 12년) 6월 5일의 일로 이 사건을 계기로 또 한 차례 박해 선풍이 불었다. 페레올이나 다블뤼는 다행히 체포를 면했으나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현석문 남경문 등 기해 박해 때 살아 남은 교인들이 처형당했다.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박해를 병오 박해라고도 하나 1839년의 기해 박해의 연장으로 취급하고 있다.
3. 병인 박해와 양요(洋擾)
1836년 모방 신부가 한국에 온 이래 30년 동안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신부가 20명이나 입국하여 희생적인 선교활동을 폄으로 조선 천주교는 1840년대 이후 크게 발전하여 1865년에 이르러는 2만 3천 여명으로 증가했다. 이런 천주교회는 결국 1866년(고종 3년 丙寅) 엄청난 박해의 회오리에 말려들게 되었다.
1) 병인 박해
병인 박해의 원인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천주교회의 수적 부흥이다. 강화 도령 철종(哲宗)이 현종 서거 이후에 즉위하였는데, 철종은 신유 박해 때 죽은 은언군(恩彦君)의 직손이므로 천주교 확장의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여건을 배경으로 신부들이 밀입국하여 전도활동에 박차를 가하여 1857년에는 1만 3천여 명의 교세를 확보하였고 1865년(고종 2년)에는 2만 3천여 명이 되었다. 또 국내에 있는 외국인 신부만도 12명이 되었는데, 이것이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또 다른 원인이라면 박해를 감행한 섭정 흥선대원군의 과격한 내정 개혁으로 인한 내적인 저항과 잇따른 이양선(異樣船)의 내침으로 외적인 침략의 위협을 받게 되므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할 방법의 하나로 천주교 박해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원인이다. 당시 국내는 동학란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고 있었으며 동북 국경 지역은 제정 러시아의 침공으로 어려움이 많았었다.
이때에 여기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으려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홍 봉주(洪凰周), 김 기호, 남 종삼(南鍾三) 등이 러시아의 남하를 방지하기 위하여 신부를 조선에 파송하고 순교자까지 낸 프랑스와 대영제국의 협조를 얻어, 조영불(朝英佛) 삼각 동맹을 맺어 러시아를 저지하고 그 대신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고 하였다.
천주교 교인들이 여기에 대하여 희망적인 전망을 가진 것은 그 당시의 섭정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그 측근들이 천주교에 대하여 상당한 관계가 있었고, 대원군의 부인과 고종의 유모도 천주교 신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 종삼 등의 계획에 대하여 베르누 주교는 교정 분리〈敎政分離)의 원칙에 따라 개입하기를 꺼려하였다. 대원군은 신부들에 대한 한 가닥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자 탄압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청나라에서도 심한 탄압이 있었고 국내에서도 서학(西學) 배척의 여론이 비등하자 대원군은 천주교 박해의 칼을 빼 들은 것이다.
1866년(고종 3년-병인)의 천주교 교도 대학살은 앞에 있었던 어느 박해보다 크고 넓은 실로 비참한 박해였다. 1866년에 시작하여 대원군이 실각하는 1873년까지 8년간이나 조선 전역에 미쳐서 계속되는 박해였던 것이다.
6명의 외국 신부들이 순교 당하고 약 8천-2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신도가 순교 당하는 비참한 참극이 일어났다.
2) 병인 양요(洋擾)
병인 박해가 국내 문제로 끝난 것이 아니라 프랑스와의 충돌이라는 대 사건으로 확장되고 말았다.
박해에서 몸을 피한 프랑스의 리델(Felix Clair Ridel) 신부가 한국인 교인 11명과 함께 어선을 타고 서해를 건너 천진(天律)에 있는 프랑스 공사관을 찾아가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 상을 보고하였다. 프랑스 인도지나 함대 사령관 로즈(P.G. Roze) 제독은 제1차로 한강변 서강(西江)에, 2차로 병인년 lO월에 7척의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에 침입하였는데. 이때에 리델 신부가 통역으로 동승하였다.
이들은 강화도에 상륙하여 살상과 만행을 일삼았고 귀중한 사고(史庫)를 불태우고 많은 사료들과 은괴를 찬탈해 가는 죄악을 범하였다.
이들이 강화도에 침공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퇴각함으로서 반대로 천주교의 박해는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대원군은 어린아이들까지 모든 교인을 다 죽이기로 하는 순교의 회오리가 다시 불어왔던 것이다.
3) 남연군묘 도굴 사건
1868년 6월에는 독일인 상인 오페르트(E. 0ppert)가 충청도 덕산에 상륙하여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南延君) 묘소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터졌다. 1866년에 이미 두 차례나 조선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하고 돌아간 오페르트는 남연군 묘소를 도굴하여 무덤에서 몇 가지 유물을 담보물로 잡고 대원군의 기세를 꺾어 보려는 계획이었다. 그는 페롱 ․깥래 둥 조선에서 탈출한 신부들과 최선일 등 조선인 교인들의 안내를 받아 덕산에 상륙하여 남연군 묘소를 파다가 서해안의 바닷물이 빠지는 바람에 중단하고 돌아갔다. 이 사건은 대원군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신부와 교인들이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됨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 한층 가열될 수밖에 없었다.
4) 신미 양요
l866년(병인년) 7월 평양 대동강에 미국 국적의 상선 제너럴셔만(The General Sherman)호가 나타나 무장한 채 1O여 일 버티다가 조선 군인들의 반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 배에는 웨일즈계의 영국인 목사 로버트 제르메인 토마스{Robert Jarmain Thomas)가 통역의 자격으로 동승하였는데, 그는 1866년 음력 7월 27일(양력 9월 3일)에 대동강변에서 순교하였다.
이 사건은 국제적 외교 문제로 번졌다. 일본과 중국을 중계로 한 외교적 교섭이 계속되다가 1871년 5월에 미국 극동 함대 사령관 로저스(John Rodgers) 제독이 군함 4척을 이끌고 영종도를 거쳐 광성진(廣城鎭)까지 진출하였으나 만행만 저지르고 퇴각하였다. 이리한 사건은 천주교의 수난을 더하게 한 것이었다. 리델 신부가 안내역으로 동승한 것이라든지. 한국인 신도 몇 명이 안내역을 하여, 밤마다 천주교 신도들이 미국 함대와 접촉을 꾀한 점등이 더욱 박해를 심하게 하였다. 대원군은 종로 네거리와 각 지방에 척화비를 새우고 쇄국 정책을 고수하였던 것이다.
◉ 과 제 ◉
1. 조선인들의 서학 연구와 실천운동에 대하여 설명하라
2. 천주교의 창설과 포교활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3. 천주교의 초기 박해에 대하여 약술하라
4. 천주교의 수난에 대하여 약술하라
제3장 개신교의 전래
Ⅰ 개신교와의 접촉
1. 서해안을 통한 접촉
1) 바실 홀의 성경 전달
조선에 성경을 처음 전해 준 사람은 영국인 바실 홀(Basil Hall)이었다. 그는 1816년 중국으로 파견된 사절단을 태우고 온 배의 선장으로서 조선 서해안을 측량할 목적으로 맥스웰(MaxweU)과 함께 배를 타고 1816년 9월 1일에 백령도와 대청도(大靑島)근방에 상륙하여 여러 가지 진귀한 물품을 그곳 주민들에게 주는 동시에 당시 중국 선교사로 와 있던 모리슨(Morison) 목사의 부탁을 받아 가지고 왔던 한문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9월 5일에는 군산만에 들어가 비인에서 조대복(趙大福)을 만나 다른 선물과 함께 성경을 전하였다. 그는 다시 약 1O일간 다도해 근방을 순항하였고 추자도에도 상륙하였는데, 아마 여기서도 성경을 전한 듯 하다.
2) 귀츨라프의 선교 활동
개신교 선교사로서 최초로 조선을 방문한 사람은 귀츨라프(Carl.A.F.G tzlaff)였다. 그는 유태계 독일 태생으로서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으로 동남아선교의 뜻을 두고 중국에 머물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영국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으로 임명되어, 영국 배 암허스트호를 타고 1832년 7월 17일 경에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에 나타나 가지고 온 책과 물건을 주면서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암허스트호(Lord Amherst)는 한국의 서해안을 답사하였는데, 백령도와 대청도, 그리고 소청도에서 정박하였을 때 성경을 반포하였다고 한다. 이 섬들을 서양인들은 제임스 홀 군도(James Hall Group of bland)라고 한다.
암허스트호는 항해를 계속하여 7월 23일 경에는 충청도의 홍주만 고대도에 정착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그곳에 머물면서 지방관리를 통해 왕에게 청원서와 선물을 보내었다. 그 선물 속에는 성서 한 질이 포함되어 있었다. 왕에게 보낸 청원에 대한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 일행은 그곳 사람들에게 한문으로 된 전도문서를 나누어 주기도하고 지방관리들의 식사초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으로부터의 회신은 중국황제의 허락이 없으면 외국과 통상할 수 없음을 알려주었다. 결국 귀츨라프 일행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약 한 달간 조선에 머문 후 조선해안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선장 린제이의 1832년 7월 27일자 일기에 보면 그들이 ‘양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한글 자모를 써 받았고, 귀츨라프가 한자로 주기도문을 써주고 그것을 한글로 베끼게 했다고 한다.
3) 토마스의 전도와 순교
1866년 7월 미국선박 제너랄셔만호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근처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하다 평양관민에게 잡혀 죽임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제너랄셔만호에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승선한 영국선교사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목사가 타고 있었다.
토마스 목사는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 머물며 조선선교에 깊은 관심이 있던 윌리암슨(A.Williamson)의 소개로 조선선교를 결심하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미국 상선이 조선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동승하였다.
1866년 8월 9일 중국의 지푸를 출발한 제너랄셔만호는 일주일이 지나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도착하였다. 제너랄셔만호는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선원들은 조선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는 토마스 목사를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며 예수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목적을 밝혔다.
이에 평양 백성들은 처음에 땔감과 양식을 주면서 친절을 보였으나, 그들이 관군을 억류하고 총을 쏘아대자 관군과 평양백성들이 격분하여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맹렬하게 항거하였다. 때마침 제너랄셔만호가 모래톱에 걸려 꼼짝못하게 되자, 평양백성들은 배에 불을 질러 선원 전부를 포로로 생포하였다.
▶토마스 목사는 처형당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성경을 나누어주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순교하였다. 그때 목격자중 12세 소년이었던 최 치량(崔致良)이 신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 목사는 27세의 나이로 이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림으로써 조선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된 것이다.
장로교 마펫(S.A.Maffet)목사는 이로부터 27년 후인 1893년 11월 평양에서 학습 세례 반을 조직할 때 토마스 목사에게 한문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순교의 피는 평양 성을 위대한 기독교 성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2. 중국을 통한 접촉
1) 윌리암슨의 고려문 전도
알렉산더 윌리암슨(A1dander Wimamson) 목사는 스코틀랜드출신으로서 토마스 목사와 함께 중국 선교사로 왔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성서 공회 대리인을 겸하여 산동성 지푸에 본부를 두고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전도하고 있었다. 그는 한편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산동성에 온 조선인을 만나 조선 천주교의 형편을 듣게 되었다. 그는 조선에 가서 전도하는 것은 어려우나 조선인들에게 전도할 것을 결심하고 토마스 목사의 순교 1주년이 되는 1867년 9월 9일에 고려문(高麗門)을 포함한 만주 전도여행을 떠났다. 고려문은 봉황성 아래 있는 작은 마을로 조선과의 교역 관문인데,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장이 서고, 이 때에는 한국인이 자유로이 와서 중국인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윌리암슨 목사는 고려문으로 와서 많은 조선인율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팔았다. 무료로 주는 것보다 돈을 받고 파니 조선인들이 더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었다고 한다.
2) 로스와 맥킨타이어의 전도
귀츨라프와 토마스 목사에 이어 조선선교를 시도한 선교사는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aclntyre)목사였다. 이들은 스코트랜드장로교회 소속으로 1872년 중국에 파송 되었다.
중국에 온 로스는 조선선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윌리암슨의 충고에 따라 만주지역을 선교하기 위해 만주의 개항장 영구(營口)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로스는 윌리암슨으로부터 토마스의 순교사실을 듣고 조선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로스는 1874년 10월 9일 첫 번째 고려문 여행에 나섬으로 조선인 전도에 나섰다. 그러나 로스는 제1차 고려문 여행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되돌아 왔다. 로스목사의 두 번째 여행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직후에 이루어졌다. 이 여행에서 로스는 의주상인 이응찬(李應贊)을 만나 그를 봉천으로 데려와 조선어를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1877년에는 조선선교사를 위한 조선어 교재인 <Korean Primer>를 출간하였다. 로스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1878년 봄에는 이응찬과 몇 명의 조선인 도움을 받아 요한 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이 번역은 한문성경을 원본으로 삼아 한문에 능통한 조선인이 번역하였기 때문에 착수한 지 1년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이응찬이 귀국하자 서상륜(徐相崙)이 로스의 조력자가 되었다. 서상륜은 홍삼 장사 차 영구에 왔다가 열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어 그곳 서양인 의사의 치료를 받게되었을 때에, 맥킨타이어의 전도를 받게 되어 기독교인이 되었다. 병이 낫게되자 서상륜은 마침 조선어 번역에 힘을 쏟고 있던 로스를 소개받고 그를 돕게 되었다.
개신교 최초의 세례 교인
▶ 그리하여 1879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2명의 구도자와 이응찬, 백홍준(白鴻俊)이 맥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 세례는 비록 국내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조선인으로써 최초로 개신교 세례를 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해에 이응찬과 백홍준 등은 최초의 세례자와 함께 한문성경을 대본으로 하여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 성경이 번역하였다. 로스는 이 번역 초역을 가지고 영국으로 안식년 휴가를 떠나 스코트랜드 성서공회 본부로부터 한글성경 반포 사업에 대한 지원을 약속 받게 되었다.
1881년 6월 안식년에서 돌아온 로스는 본격적인 한글성경 출판사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미 스코트랜드 성서 공회에서 지원하여 주문한 음절별 한글 연활자가 7월에 도착하여 1881년 9월부터 심양 문광 서원에서 인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10월에는 성서 인쇄를 시험하기 위해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이 간행되어 그 이듬해 각각 수천 권씩 인쇄되어 만주와 일본을 거쳐 조선에 반포되었다. 그리고 1882년부터는 만주에서 한글로 인쇄한 기독교 서적이 조선에 반포되기 시작하였다.
▶ 시험인쇄가 성공하자 1882년부터는 본격적인 성경 출판 작업이 시작되어 1882년에는 누가복음이 간행되었다. 이 성경은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성경이었다. 그 다음으로 같은 해 요한 복음이 간행되었다. 로스는 이 최초의 한글성경 누가복음, 요한 복음을 일본의 톰슨(J.A.Thomson)총무에게 보냈고, 이 성서는 일본인 권서인의 손을 거쳐 부산에 반포되었다.
성서 번역 및 출판사업은 계속되어 1883년에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합본으로 나왔고, 1884년에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1885년에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간행되었으며, 마침내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셔>라는 신약성경이 간행되었다.
3) 국내의 성경반포와 최초의 개신 교회
최초의 주재 선교사가 입국하기 이전 국내의 성경반포는 두 갈래 경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 하나는 만주를 통해 주로 조선 북부지방에 반포되는 경로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일본을 통해 조선남부지방에 반포한 경로를 말한다. 우선 첫 번째 경로의 성경 반포 과정을 살펴보자. 한글성경이 간행되기 이전에는 로스의 한글성경번역에 참여한 조선인 개종자들이 만주와 조선을 왕래하면서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성경을 조금씩 국내에 반포하였다.
그러다가 로스는 최초의 한글성경이 간행되자 식자공 김청송을 그의 고향 즙안에 보내어 성경을 반포하게 하였으며, 1882년 10월에는 서상륜을 대영 성서 공회의 최초의 권서인으로 파송하여 한국에 성경을 반포하기 시작하였다. 서상륜은 3개월간 복음을 전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온 서상륜은 1883년 후반기에 서울에 성경을 반포하며 전도하였다. 그 결과 서울에도 다수의 개종자를 얻어 로스에게 "서울에 와서 세례를 원하는 13명의 친구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교회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는 글을 보냈다. 그러나 로스는 본인이 가지 못하고 1884년 봄에 다량의 한문, 한글 성경을 상해 제물포간의 정기항로를 이용해 서상륜에게 보냈다.
한편 김청송에 이어 로스의 한글성경인쇄에 참여하였던 이름을 알 수 없는 제2식자공은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인 평양에 오면서 약 1천 권의 성경을 가지고 와서 판매하였고, 맥킨타이어로부터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은 수세자 중 한 사람도 이 무렵 국내에 와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 당시에는 천주교를 극심하게 탄압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비가 정권을 잡고 있었을 때이므로 이전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위험하지 않았다. 그래도 초기의 권서인들은 아직 가시지 않은 위험을 무릅쓰고 대담하게 성경을 반포하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또 하나의 성경 반포과정은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경로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만주에서 한글성경이 최초로 간행된 때는 1882년 초이다. 스코트랜드 성서 공회는 이 성경을 곧 만주와 조선 본토에 반포하고 동시에 이중 일부를 톰슨 총무에게 보내 일본을 통하여 조선에 성경을 반포하게 하였다. 톰슨은 기독교 소책자를 포함한 성경을 받아 일본인 권서인을 통하여 부산에 반포하고 이어 1884년에는 직접 내한하여 부산에 성서보급소(Bible depot)를 개설하였다. 이 성서 보급소는 일본인 권서인을 두어 운영하였는데 아주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
한국 최초의 개신 교회
▶ 이와 같이 열성적인 조선인 권서인에 의해 국내에 성경이 반포되자 이 성경을 통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모여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자발적 신앙공동체는 로스와 맥킨타이어로부터 신앙지도를 받았던 백홍준과 서상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백홍준은 그의 고향 의주를 드나들면서 1882년에 간행되기 시작한 복음서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점차 구도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백홍준은 이들을 중심으로 요리문답 반을 운영하여 1885년에는 18명의 신자로 예배처소가 마련될 정도로 발전하였다.
▶ 또 하나의 자발적인 신앙공동체는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로부터 비롯되었다. 서경조는 형의 전도를 받고 소래(松川)로 돌아와 주위에 전도하여 신앙공동체의 기초를 마련해 놓았으며, 만주의 로스에게 다녀온 서상륜이 소래로 돌아오자 1886년까지는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매주일 정기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초의 주재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선교하기 이전에 이미 두 곳에서 조선인 권서인의 전도에 의해 자발적인 교회가 형성되었다. 그중 소래의 교인들은 그후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최초의 교인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수용자와 복음의 전래자가 만나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게 된다.
3. 일본을 통한 접촉
이 수정의 성경 번역
일찍부터 중국을 통해 여러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선교를 시도한 것과는 달리, 일본을 통한 개신교 선교는 1883년경 이수정(李樹廷)이란 조선인의 자발적인 개종에서 비롯되었다. 이수정은 온건개화파의 양반으로 임오군란 때 민비를 구출한 공으로 1882년 9월 수신사(修信使)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다.
그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안종수란 친구로 부터 기독교인 농학자인 츠다센(津田仙)박사를 만나도록 권고에 따라, 동경에 도착하자 곧 츠다센을 방문하게 되었다. 츠다센은 이수정에게 기독교에 관한 설명과 함께 한문 신약성경 한 권을 주었다. 이수정은 이 성경책을 통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서서히 알게 되었고 일본에 건너간지 약 7개월 만인 1883년 4월 29일 일본에 주재하던 녹스(G.W.Knox)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의 개종은 그 동안 조선선교를 시도하려던 일본 주재선교사들과 일본교회에 큰 용기를 주었다. 이런 새로운 조선선교의 가능성에 힘입어 미국성서공회 총무인 루미스(H.Loomis)는 이 수정에게 제의하여 곧 한글성경번역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수정의 성경번역은 우선 한문성경에 토를 다는 소위 현토성경(懸吐聖經)으로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84년까지는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이 현토성경으로 출간되었다. 성경번역과 함께 이수정은 기독교 소책자도 번역하였다. 이와 함께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S.Maclay)의 요청으로 <감리교 요리문답서>를 번역하였으며,<천도소원>(天道遡原)과 <랑자회개>(浪子悔改)도 번역하였다.
그러나 <감리교 요리문답서>만 국내로 1천 여권이 유입되어 반포되었고 나머지는 원고형태로 아펜셀러에게 전달되었다.
한편 이 수정은 동경유학생을 중심으로 전도를 시작하여 1883년 말에는 7,8명의 수세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경에는 이들이 중심이 되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1883년 말에는 동경에 최초로 한인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즈음 일본은 1858년 개항 후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일본에는 각국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이들 선교사들의 이수정의 개종과 한글성경번역 그리고 동경에 세워진 한인교회를 보면서 조선선교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이수정은 한글성경 번역을 통해 이들 선교사들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이즈음 일본 내 교회부흥으로 조선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일본은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 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수정은 일본인의 조선선교를 반대하고 미국교회의 조선선교를 강력히 요망하였다. 그 이유는 일본 문명이 서구문명의 직접적인 유입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여, 서구문명을 일본에 전해준 미국의 선교사들이 복음 뿐 아니라 서구문명을 직접 전해 주기를 바랬던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이수정은 두 번이나 직접 조선선교를 진정하는 글을 미국교회에 보냈다. 뿐만 아니라 이수정과 친분이 있던 재일 선교사들은 조선선교의 문이 열릴 때가 되었다고 확신하고 각 교파마다 본국에 한국의 선교를 요청하는 전문을 보내게 되었다. 미국 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와 이수정에게 세례를 주었던 미국 장로교의 녹스는 미국 선교잡지 등에 이수정과 조선인 유학생 신앙공동체를 소개하며 조선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특히 이수정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던 맥클레이는 4-5차례나 미국교회에 조선 선교사를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이 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1885년에 입국한 언더우드 목사와 아팬젤러 목사가 가지고 오는 선교 역사에 유례가 없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전파나 개신교의 전도가 선교사보다 의식과 성경이 먼저 전달되는 축복의 역사가 이 나라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Ⅱ 선교사들의 입국
1. 조선 내 선교 활동의 시작
조선 정부는 외국과의 개항(開港)을 통해 각종 조약을 체결하였다. 쇄국 정책을 고수하던 대원군이 하야하고 민비를 중심 한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잡은 후 새로운 정책을 쓰게 되었다. 조선 정부는 일본과 1876년에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고 일본과의 우호관계와 통상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의 강요에 못 이겨 맺은 조약이지만 조선이 외국과의 관계를 수립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의 조선 실정은 수구파와 개화파의 투쟁, l882년에 있었던 임오군란(壬午軍亂)을 통하여 국력이 쇠약하고 기강이 서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미국은 1882년(고종 19년)에 조선과 한미 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그 후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이 계속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의 정세가 이렇게 변하자 미국의 교회에서는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찾기 시작하였다. 일본 주재 미국 선교사들은 일본에 온 조선 유학생들과 접촉하였다. 그중 미국 감리교회의 매클레이(Robert S. Maclay) 목사, 미국 성서공희 총무인 헨리 루미스(Henry Loomis, 미국 장로교회의 녹스(George W. Knox)였는데 이들은 조선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이 수정으로 하여금 성경을 번역케 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 교회는 조선에 대한 지식이 전연 없었다. 안다고 해도 조선 정부가 천주교에 대하여 박해 정책을 사용했다는 정도이며 선교가 어렵다는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83년 미국의 푸트 (Gen. Lucius H. Foote)장군이 조선 주재 초대 공사로 와서 현재 미국 대사관 관저 (서울 정동 소재)를 구입하였다.
1883년 6월, 주미공사로 부임하는 민 영익(閔泳翊)이 워싱톤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발티모어에 있는 가우처 대학의 가우처(John F. Goucher) 목사를 만나 가우처 목사로 하여금 조선에 대한 인식을 하게 하고 조선 선교에 열의를 가지게 하였다.
가우처 목사는 감리교 선교 본부에 한국 선교를 즉시 시작할 것을 권하는 편지를 보내고 아울러 2,OOO달러를 헌금하였다. 그러나 선교본부는 아직도 시기 상조라고 거부하여 가우처 목사는 일본에 주재하는 매클레이(Robert S. Maclay) 목사에게 편지하여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조사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1884년 6월, 메클레이 목사 부부는 가우처 목사의 권유대로 조선에 와서 3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에서부터 깊이 교제한 김 옥균(金玉均)을 통하여 국왕으로부터 교육 사업과 의료 사업을 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으며, 미국공사 푸드장군에게는 선교사가 거주 할 주택과 학교며 병원 부지를 구입해 줄 것을 부탁하교 일본으로 귀임 하였다.
메클레이 목사는 이러한 활동 결과와 선교 청원서를 미국 감리교 선교본부에 보냈고, 그 사실이 감리교회 기관지인〈그리스도인 회보>(Chritian Aduocate)에 발표되었고, 〈복음 세계》(The Gospel in All Lands)에는 조선 선교사업에 대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와 같은 기사가 계속되자 한국 선교사업을 위한 헌금이 들어오고 신학생들 사이에 조선선교 열의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 때에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아펜젤러(Henry D. Appngel1er)가 헌신하였다.
2. 알렌의 입국
1883년 1O월 11일, 중국 상해(上海)에 도착한 미국 북장로교 외지 선교부 소속 의료선교사인 알렌 의사는 적당한 선교지를 찾지 뭇하고 있던 중 상해에 있던 친구 헨더슨 박사(Dr. Henderson)의 권유로 한국으로 선교지 변경을 꾀하였고, 1884년 6월 22일 선교본부의 허락을 받았다.
알렌은 l884년 9월 14일에 상해를 떠나 9월 2O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9월 22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미국 공사관 공의(公醫)로서 봉사하게 되었다. 뒤이어 그는 영국, 청국, 일본 공사관 공의와 세관 의사로 수고하게 되었다. 그는 의료 선교사이니 만큼 의술을 통해 사회봉사를 하며 복음 전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있었다.
1884년 12월 4일에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서 당시 수구파의 지도자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그중 민 영익이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당시 장안의 유명만 한의 14명이 불리워 와서 치료하였으나 아무도 지혈(止血)할 수 없었는데, 뭘렌도르프의 연락으로 알렌 의사가 와서 치료하였고, 3개월간의 정성스러운 치료로 민 영익이 완쾌하계 되었다. 이로 인해 알렌의 의술이 인정받게 되었고, 그는 궁정 의사 즉 어의(御醫)로 임명받았다. 이와 같이 안렌 의사가 의술을 통해 당시 고위층들과 접촉하게 되어 선교 활동의 〈세례 요한의 사명>을 하게 되었다.
알렌의 의술이 알려지자 많은 환자들이 몰려 왔으나 이를 자기 집에서 치료하는 것이 어려워 병원 설립을 계획하게 되었다. 알렌은 이 계획을 미국 대리공사 폴크(Foulk)에게 말하여 찬동을 받고 한국 정부에 병원 설립 계획서를 제출하여, 1885년 2월에 병원 설립 허가를 받았다.
▶ 한국 정부는 병원 이름을 광혜원(廣惠院)이라 하고, 갑신정변 때 죽은 홍 영식의 집을 병원으로 사용토록 허락하였다. 알렌의 광혜원은 한국 최초의 신식 의료기관이었는데, 1885년 6월에 입국한 헤론(Heron)의사와 함께 진료를 통해 전도하였다.
3. 선교사들의 정식 입국
1) 아펜셀라의 인천 상륙
아펜셀라(Herry G.Appenxeller)는 드루우 신학교 재학시절에, 1883년 미국 하드포드에서 개최된 신학교연맹 집회에서 해외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미국 북감리교회지 선교회를 통하여 선교사의 임명을 받은 그는 1885 년 2월 2일 한국을 향해 떠나기에 앞서 샌프란시코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펜셀라 목사와 동행으로 스크랜튼 의사 부부와 모친 스크랜튼 여사가 있었다. 이들 감리교의 개척선교사 일행은 태평양을 횡단하여 2월 27일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하였다.
1885년 3월 31일에는 일본에서 재한 선교회가 조직되었다. 파울러(C. H. Fowler) 감독은 감리사로 매클레이 목사, 부감리사에는 아펜셀라 목사, 회계로는 스크랜튼 의사를 각각 임명하였다.
▶ 매클레이 감리사의 의견이 [여러사람이 함께 한국에 들어가면 의심을 받을 염려가 있으니 따로 따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여 아펜셀라 목사는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와 함께 일본 나가사끼를 떠났으며 4월 2일 아침에는 한국 땅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곳은 부산이었으며 남해안과 서해안을 돌아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드디어 인천에 도달하였다.
얼마나 한국 행을 갈망하였던지 그들은 상륙하자마자 땅위에 엎드려 먼 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올렸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을 상륙하였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여!! 어서 속히 이 백성들을 얽어매고 있는 흑암의 사슬을 끊으시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 빛과 자유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아펜셀라 목사는 선교회에 보내는 보고문 가운데 위의 기도문을 실었다.
아펜셀라 목사는 상륙하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의 아내가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았다]라고 아펜셀라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는 함께 한국을 찾아왔으나 한국내의 실정은 아직까지 외국인 여자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아펜셀라 목사는 부득이 부인을 데리고 일본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언더우드 목사만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미국 대리공사 포오크 (George C. Foulk)가 아무리 애써 보았지만 [서울에 서양인 여자가 들어가기는 어려운 사정인고로 부인을 잠시 일본으로 가 있다가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펜셀라는 인천에 도착한지 9일 만인 4월 13일에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 도착 다음날인 4월 18일 청국의 대표 이홍장과 일본 대표 이또오가 중국에서 텐진조약을 체결하여 우리 나라 정세의 긴장이 완화되기는 하였지만, 그때에는 여독으로 건강을 상한 부인의 치료로 아펜셀라 목사의 한국 입국은 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에 가서야 아펜셀라 목사는 인천에 또 한번 상륙하였고 서울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2) 언더우드의 입국
언더우드가 한국을 찾게된 동기와 사정을 회상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 주재중인 올트맨(Allert Oltmans)이 1883년 겨울에 선교 지원자들을 모아놓고 은자의 나라 한국에 관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의 주장은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교회가 기도하고 있고 또 1882년에는 한미 조약이 체결되어 선교사가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교회가 무관심하여 1년 동안을 허송세월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으로 갈 사람을 찾고 있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나는 그때 인도에 갈 생각으로 의학공부를 했으며 한국에 갈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였다. 교회 기관지들은 아직도 한국에 들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기사로 나와있었다. 바로 이때에 나에게 하늘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너는 왜 못가느냐(Why not go yourself?)이었다. 그러나 인도에 대한 선교 희망이 한국 행을 막고있었고 또 실제로 한국의 문은 닫혀있는 것 같았다. 나는 두 차례나 선교본부에 가서 한국 행을 간청하였지만 쓸데없는 말이라고 핀잔을 받았다. 이제 나에게는 본국에 머물러 목회를 하거나 인도에 가는 길밖에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머뭇거리는 상태에서 뉴욕의 어느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나는 이 청빙에 응하기로 하여 수락하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려고 하였다. 그 순간에 [한국에 갈 사람은 없는가,(Not one for Korea)한국은 어찌할 터인가 (How about Korea?)라는 소리가 나의 귀에 쟁쟁하게 들어 왔다. 이때 나는 나도 모르게 손에 쥐었던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단숨에 중앙 통에 있는 선교본부를 찾아갔다. 나는 수석서기인 엘린 우드(F. F. Ellin wood)를 만났다. 몇일 후 그에게서 받은 기별은 다음 회의에서 내가 선교사로 임명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는 종래의 배외 정책으로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정을 하였고,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한국을 위한 최초의 선교 목사로 임명하는데 합의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2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에 들렸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서 약 2개월 동안 선배 선교사 인 헤본(James C. Hep
burns)목사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그의 집에 기거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 있는 동안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제하면서 한국 풍습을 익혔고 특히 이수정을 통하여 그의 번역서인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선교사가 피선교지에 들어가 그 나라 말을 배우고 또 그 성경을 번역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인데 언더우드 목사는 이미 번역된 성서를 손에 들고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으니 그 감격이야말로 형언할 수 없으니 만큼 컸다.
드디어 아펜셀라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인천에 발을 내딛었고,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Ⅲ 초기의 선교 활동
1. 의료 선교 활동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알렌의 입국을 통하여 의료 선교는 실시되고 있었다. 의료 선교는 알렌이 고종의 궁정 의사가 되는 것을 비롯하여 큰 효과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광혜원을 통하여 진료사업은 한국 사회 각층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1886년에 입국한 앨러스 양은 광혜원에 여자부를 신설하고 여자 상대의 전도 활동을 하였다. l887년 알렌 의사가 워싱톤 주재 한국공사와 함께 가기 위하여 병원을 사임하자 헤론 의사가 원장이 되어 병원을 구리개 즉 오늘날의 을지로 2가로 옮겼다. 감리교 소속 스크랜튼 의사는 1887년 6월 15일에 병실 5개가 있는 병원을 완성하였는데. 고종 황제는 그 병원 이름을 시병원(施病院)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니 이 병원은 왕립 양호원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887년에는 여자 병원이 설립되고 메타 하워드(Meta Howord)라는 여의사가 와서 병원을 맡았다. 얼마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의료 선교는 장족의 발전을 하였고 각 계층에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2. 교육 선교 활동
의료 선교와 아울러 시도된 것이 교육 선교이다. 교육을 통하여 새 문명을 점하게 하였고,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한국에서 처음으로 여자 학교를 세운 것은 1886년 5월 31일에 스크랜튼 의사의 모친인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이다. 이것은 당시의 한국 상황으로 보아서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였고, 여자에게는 이름도, 교육도, 인권도 필요 없다고 여겨지는 시대에 여자 학교의 설립은 경이적인 것이다. 스크랜튼 여사가 세운 이화학당(梨花學堂)은 당시로서는 학생 모집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가난한 집 아이들을 모아서 숙식, 책, 의복까지 제공하며 공부를 시켰다. 명성 황후에 의하여 〈이화 학당〉이라고 명명된 이 학교는 한국 여성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 1886년 6월 8일 아펜젤러 목사는 스크랜튼 의사의 조수 두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모체가 되어 학교를 시작하여, 고종 황제가 이학교의 이름을 배재 학당(培材學堂)이라고 명명하여 이것이 한국최초의 신식 교육기관이 되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1886년 5월 11일부터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 붙어 있는 건물에서 고아원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경신 중 고둥학교와 연세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입국하자마자 이와 같이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한국 선교사업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3. 교회 설립 활동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하던 선교사들은 교회를 설립하여 예배를 인도하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처음에는 선교사들과 공사판 직원과 그 가족을 중심으로 하여 영어로 예배드리는 일이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책문에 한국인을 상대로 하여 예배드리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만주에서 로스 목사와 갈이 성경 번역사업과 전도 사업에 종사하다가 고향인 의주에 와서 전도 사업을 하던 서 상륜은 동생 서 경조와 같이 박해를 피하여 황해도 솔내(松川 ․九美浦)에 있는 삼촌 집으로 왔다. 그는 1884넌 로스 목사가 선편으로 부친 6천 권의 성경을 당시 세관 고문이었던 독일인 뮐렌도르프의 호의로 인수하여 전도 사업을 하였고. 1885년에 한국인의 손으로 최초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한국인의 손에 의하여 교회가 설립 된 사실은 선교 역사에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솔내는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요람지이며, 한국 교회 역사의 발상지라고 하겠다. 자립 전도를 실시하였고 몇 해 안되어 이 교회는 그 마을의 58세대 중에서 50세대의 장년을 포섭할 정도로 교세가 확창 되었다.
언더우드 목사가 1887년에 솔내 교회에 가서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은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이미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스스로의 신앙을 키워 나갔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전도 활동을 암암리에 시작하였고 성례를 베푸는 사역을 하였다. 1887년 6월 24일에는 아펜젤러 목사에게 전도 받아 공부하던 학생 중 하나가 아펜젤러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887년 9윌 12일에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새문안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교회는 처음에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서 집회하였다.
첫날은 14명이 모였고, 다음 주일에는 15명이 모였으며, 그 다음 주일에는 서 상륜, 서 경조 두 사람을 장로로 택하여 안수하였다.
1887년 1O월 9일에는 첫 감리교회인 정동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교회는 한국 감리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Ⅳ 선교 영역의 확장
1. 순회 전도의 시작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온 초기에는 수도 적고 한국에 대한 열심도 극히 적어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였으나. 차차 선교영역을 확장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1887넌 가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처음으로 개성, 솔내, 펑양, 의주 등지를 순회하며 약품과 성경을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 여행은 솔내에 있는 교인들의 초청에 의한 것으로서 솔내 교회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1889년 봄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신혼의 부인과 함께 신혼 여행을 겸하여 개성, 솔내, 평양, 의주 등지를 여행하면서 약 600여명의 병자를 돌아보았다. 언더우드 목사는 의학을 공부한 바 있고 그의 부인은 릴리아스 호튼 의사의 미망인이었다. 이들은 1889년 4월 27일에 의주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는 세례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100명이나 되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세례 배푸는 것을 금하였기에 이들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쪽으로 가서 33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래서 이 사건을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고 부른다.
1888년에는 아펜젤러 목사와 존스 목사가 강원도 원주 지방과 경상도의 대구와 부산 지방을 순회하였고, 1891년에는 마팻(Samuel Maffet․馬布 三悅)목사와 게일(Gale․奇)목사가 평양, 의주, 만주의 봉천까지 여행하였다. 만주와 북부 지방을 여행하면서 전도의 중심지로 평양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고, 마펫 목사는 1893년 가을부터 평양에 주재하면서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 감리교의 홀(W.J. Hall) 박사가 평양에 와서 병원을 개설하여 환자를 돌보며 전도하던 중 청일전쟁의 격전이 평양에서 벌어지자 서울로 철수하였다가 다시 평양으로 와서 환자들을 돌보았으나 열병과 이질에 걸려 1895년 11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1891년 가을에 올링거 (F. Ohlinger)목사는 원산을 순방하였고, 미국 남장로회에서는 1892년부터 호남지역을 답사하였다. 1892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레이놀드 (W.D Reynolds) 목사가 공주를 방문하였고 1893년에는 젼킨(W.B.Junkin)목사와 테이트(Mattie S.Tate)목사가 전주지방을 찾아가 전도하였으며 1894년에는 레이놀드와 드루(A.D.Drew) 의 두 목사가 전라도 전역에 걸친 전도여행을 수행하였다. 이리하여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한국 주재 선교사들은 전국 각지에 걸쳐 답사하는 큰 작업을 일단 완료하였다.
이 시기에 선교사들이 지방을 여행할 때에는 외무 아문에서 발급하는 호조를 소지하였다. 이는 중앙정부에서 지방 관리에게 알리는 일종의 지시서와 같은 것으로 외국인 선교사에게 숙소와 환전 그리고 신변을 보호하는 편의를 제공하라는 내용의 문구가 기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치가선교사들의 전도여행을 위하여 적지 않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호신용으로 권총을 휴대하거나, 한국 군인을 대동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 프로테스탄트가 정부로부터 국가적인 비호를 받았다는 사실은 천주교회가 조선왕조 시대에 당한 국가적인 박해와 대조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선교사들은 지방 주민들과의 통역을 위하여 한국어 교사와 길 안내인을 동행하였다. 여행장비는 복음서와 전도지 외에도 통조림과 침구, 의약품 그리고 여비로 사용될 돈 등을 휴대하였다. 당시의 통화는 무겁고 부피가 있는 엽전이어서 이러한 것들을 운반하기 위하여 일꾼을 별도로 고용해야하는 불편이 뒤따랐다. 그런고로 선교사의 지방 행차는 인마 부대의 출동과 같은 진풍경이었다. 점심때 또는 저녁때에 행차가 멈춰지는 주막 앞에는 양인들과 기이한 행려 장비를 구경하기 위하여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촌락민들에게 복음서와 의약품을 나눠주면서 전도의 성과를 올렸다.
원산, 인천 등지에도 교회가 설립되고 학교와 병원을 세워 전도 활동을 하였으며, 공주, 수원, 대구, 의주 등지도 선교 구역으로 정하고 선교사를 파송 하였다.
2. 외국 선교부들의 입국
1) 성공회의 입국.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부가 한국에 설치된 후에 영국 교회(성공회)에서 189O년에 존 코폐(John Corfe․고요한)주교를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여 일하였다.
성공회는 선교시작 때부터 한국교구를 설정하고 주교로 코르프 신부를 임명하였고, 처음 선교 시작할 때에는 <대영종고성교회>란 조직 하에 선교하다가 후에 <조선성공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4년 성미가엘 신학원을 강화에 개원하고 1916년 5월에는 교구회가 조직되고 조선 성공회의 기본교리와 전례에 관한 선언이 있었고 헌장 법규도 제정하였다. 1941년 외국선교사들의 신사참배문제로 강제 추방당하였으나 해방과 더불어 세시주교의 귀환으로 조선 성공회가 재건되었다.
2) 호주 장로회의 입국
1889년 10월에는 호주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Austualia) 소속의 선교사 데이비스 (J.Henry Davis)이 입국하였다. 호주 장로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밖에 안 되는 작은 교파였지만 선교 열은 매우 왕성하였다.
데이비스 목사는 1857년 빅토리아주의 멜보른(Melbourne)에서 출생하였으며 멜보른 대학을 졸업하여 그곳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그 후로 법률학을 공부하였으나 뜻한 바 있어 도중에 그만두고 스코틀랜드의 에딘바라 대학에 가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선교 사업에 헌신하기 위하여 처음에 인도로 갔으나 18개월이 지나는 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부득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1885년과 1887년에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한 바 있는 중국 주재 영국국교회 선교사인 월프(J.R.Wolf)부주교가 한국 선교의 꿈이 영국 국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호주에 있는 친우들에게 한국을 위하여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호소문을 보냈다. 이것을 받은 매카트니 (H.B.Macartuey)목사가 빅토리아 선교신문에 내용을 발표하여, 이 뜨거운 호소의 글을 읽은 데이비스 목사가 헌신의 감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당시 호주 장로교회에서는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조차 갖지 않고 있었다. 청년들의 모임인 성서연구 연합 친우회(The Presbyterian Fellowship Union for Bible Study)에서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야 한다는 기운이 조성되었으며, 데이비스 목사의 본 교회인 멜보른 투락 (Too-rack)교회와 협력하여 선교 비용을 교회와 협력하여 선교비용을 부담하기로 하고 초대 선교사로 레이비스 목사를 선정하여 한국에 파송하게 되었다.
레이비스 목사는 먼저 한국에 도래하여 선교사업에 자리잡고 있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과 협의하여 부산을 중심 하여 남부지역에서 선교하기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것은 서울이나 서부지역 등 다른 지역은 이미 선교사들이 자리잡고 선교사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중복이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서였다.
당시 부산에 머물고 있었던 게일[James Gale]선교사는 레이비스 목사로부터 급히 오라는 전갈을 받고 달려갔다. 긴 여행을 보행으로 하여 피로에 지친 나머지 급성 폐렴에 천연두까지 겹쳐 소생할 가망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1890년 4월 15일 레이비스 목사는 한국선교의 청운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아야했다.
레이비스 선교사의 별세의 보도가 호주에 전달되자 전국의 교회는 깊은 애도 속에 잠겼다. 비록 선교의 결실을 맺지 못하였으나 그의 사망으로 인해 호주의 본국교회에서는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유지를 계승하여 그러한 그의 유지를 계승하여 그러한 죽음이 헛되지 않게 뒤를 이어 선교사를 파송 해야 한다고 강렬한 선교 열이 고조되었다.
1907년 평양에 마펫(Samuel A.Moffett) 선교사에 의하여 장로회 신학교가 설립되자, 엥겔 선교사는 호주 장로교회를 대표한 파송 교수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쳤고 그리고 교회사를 주로 강의하였다. 그는 30여 년을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원어를 하는 신학교들을 특별히 취급한다든지 잘못을 저지르는 학생에게는 철저한 징벌을 가하는 등으로 강직한 일면의 성품을 보여주어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엥겔 목사는 1913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2대 총회장에 피선되었고 1917년에는 경남 노회를 창설하면서 제1,2,3대의 노회장을 연임하면서 호주 장로교 파송 선교사로서의 위상을 격상하였고 또한 지방교회 사업도 소홀히 하지 않고 꾸준히 수행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미국 장로교 파송 선교사와 호주 장로교 파송 선교사 모두는 선교 초기부터의 우호 협력의 유대 관계를 전통적으로 지속하였다.
3) 미국 남장로회 입국
미국 남 장로회에서는 1892년부터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언더우드 목사가 1891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을 때 신학교 연맹 (The Inter-Seminary Aliance)서 주최한 내슈빌(Nashville) 대회에서 선교강연을 할 때 여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은 레이놀드(William D.Reinolds) 는 한국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그후에 남장로교 총회 외지선교회에 선교사로 한국에 보내달라고 지원하였다. 그러나 선교회에서는 아직 한국 선교사업은 착수할 단계가 아니라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레이놀드와 젼킨은 한국 선교의 실현을 위하여 매일 3시에 기숙사에서 합심 기도회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레이놀드는 세 사람의 선교 동지와 함께 각지를 순회하면서 언더우드 목사를 강사로 하여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열심히 강조하였다. 교회 신문에도 한국에 관한 기사를 많이 발표하였다.
드디어 독지가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뉴욕에 사는 죤 언더우드(John T. Under
wood)란 사람으로 2만5천 달러를 한국 선교를 위하여 사용해 달라고 기탁하였다. 그렇게 되자 외지 선교회에서도 선교에 착수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레이놀드는 떠나기에 앞서 한국 선교 7인 선발대에 동참하기로 뜻을 함께 한 볼링(Patsy Bolling) 양과 결혼하였다.
드디어 1892년 2월에 레이놀드 부부와 젼킨부부 그리고 데이트와 그의 누이 동생 매티 데이트(Mattie S.Tate) 데이비스(L.Linnie Davis) 등이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해 10월 18일에 그리고 나머지 몇 사람은 11월 3일에 서울에 각각 도착하였다. 이렇게 하여 남 장로회의 한국 선교의 막은 올려진 것이다. 그들은 얼마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국말을 익힌 다음에 선교 활동에 나서게 되었는데 주로 호남지역인 전라도 일원을 선교구역으로 생각하여 사업에 종사하였으며 성과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레이놀드 목사는 도착한 그해 연말 크리스마스 후에 미국 북 장로회 파송인 마펫(Samuel A. Moffett) 선교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공주 지방을 방문하여 선교 적지로서의 여부를 타진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젼킨과 테이트 목사가 함께 전주를 찾아가 시찰하였다. 1893년 2월 레이놀드 선교사는 비서인 정해원을 전주에 보내 선교 사업을 위한 전초기지가 될 기지를 구입하였다.
그는 전라도의 서해안 관문인 군산을 방문하고 그리고 연이어 전주 김제, 영광, 함평, 무안, 우수영, 순천, 좌수영 등지를 쭉 순방하면서 무척 만족하였다.
레이놀드 목사는 한국교회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 이념을 수립하는 문제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다. 그는 1917년부터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어학과 함께 조직신학 분야를 담당하여 가르쳐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에 있어서 자신의 지도 이념을 구체화 충분한 기회를 가졌다.
그의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의 이념은 오직 성령 충만한 성신인으로 키우는데 있었다. 오직 한국교회를 하나님 말씀의 터 위에 선 성령 충만한 교회로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레이놀드 목사는 장로회신학교 교우지인 신학 지남의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보수주의 신학노선의 많은 논문을 게재하여 한국교회를 그러한 방향으로 인도하는데 주력하였다.
실로 한국교회를 위한 신학교육은 장로교에 있어서 영적 훈련 면에 있어서 우수하였다. 그러나 지적 훈련 면에 있어서 빈약하였다. 아쉬움,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일제시대 하에서 수난과 박해가 중첩되는 그 시기에 있어서 성령 충만한 교회의 신앙노선은 필요하였다.
신사참배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도 남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철저하게 반
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여 굴하지 아니하였다.
4) 미국 남 감리교 입국
미국 남 감리교(The N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의 한국선교는 미국의 북 감리교보다 10년이나 늦게 개시되었다. 1895년 미국 남 감리교가 한국 선교를 착수하게 된데 있어서는 두 가지의 요인이 있다.
그 첫째는 한국인 윤치호로부터 한국에 선교 사업을 개시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일이고, 둘째는 중국 중앙 지대에 정착하여 선교하고 있는 남 감리교 선교사들이 한국을 선교의 적지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1895년 10월 헨드릭스 감독과 함께 중국에서 선교하던 리드목사가 한국에 와서 선교 사업의 상황을 시찰하면서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또한 기후도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윤치호의 주선으로 고종 국왕은 지극한 호의로 헨드릭스 감독과 리드목사를 접견하면서 미국의 여러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교육과 의료 면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고 칭찬하였다.
1896년 8월 리드목사는 한국의 선교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상동교회 부근에 선교회 본부를 설치하여 선교사업의 기초를 닦았다. 중국 연회와의 관계는 1897년 5월 조선 선교 처로 분리 발족하였으며 9월 10일에 제1회 조선 지방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여 회장에 리드 목사, 서기에 윤치호가 각각 직임을 맡았다. 지방회의 본부는 개성으로 정하였다.
서울을 내놓고 개성으로 간 이유는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부산을 선교 본거지로 한 것처럼 서울에는 여러 교파의 본부가 주재하고 있어 경쟁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중국 연회로부터의 완전한 분립은 1907년에 시행되었다.
리드 목사가 최초의 남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윤치호 장로가 시종여일하게 협력하였음은 두말 할 것 없다. 그리하여 서울 부근에 고양읍에는 제1 남감리 교회가, 파주에는 제2 남감리 교회가 그리고 서울에는 광희문교회가 잇달아 서는 호전된 발전을 보여 주었다.
5) 캐나다 장로회의 입국
캐나다 장로교회 (The Prebyterian Church in Canada)에서 파송된 정식 선교사단이 한국에 도래하기는 1898년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맥켄지(William John MaKenzie,)목사가 개인 선교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와서 일하다가 생명을 희생한 사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맥켄지 목사는 신학교 재학 시에 한국에 관한 서적을 많이 읽고 한국에 가서 선교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맥켄지는 총회 본부를 방문하여 저축한 돈 1백 달러를 내놓으면서 한국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총회에서는 아직 한국선교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선교회의 배경 없이 독립적 선교사로서 1893년 10월에 캐나다를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인천 제물포에 내항하였다.
새 해가 되면서 그는 곧 서울을 떠나 2월에 황해도 솔내로 갔다. 맥켄지 선교사는 자연히 솔내교회의 초대 목사처럼 되었으며, 희생적인 헌신의 결과로 1895년 7월 3일 교회당을 신축하여 헌당 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 교회당은 외국인 선교기관의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이 한국교인 스스로의 헌금으로 완공한 최초의 교회당이라고 하는데 뜻이 크다.
멕켄지 목사가 한국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심 성의껏 그리스도를 전하는 생활에 헌신하여 우상 숭배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을 속출케 하였다. 이렇듯이 숭고한 생활로 일관한 그가 1895년 7월 23일 너무나 무더운 여름날에 피로에 지친 나머지 일사병에 걸려 고열로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멕켄지 목사의 죽음의 소식은 캐나다 본국 교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뒤흔들었다. 그의 유서에는 한국 선교를 위하여 2천 달러의 남은 돈을 전부 바친다는 귀절이 있었다. 솔내교회 교인들은 맥켄지 목사의 신앙생활을 본받아 살겠다는 결의를 표시하면서 선교사를 꼭 보내달라고 진정서를 캐나다 장로회 총회에 발송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한국 선교의 개시를 촉구하는 글이 교회 잡지에 많이기고 되었으며 그리어슨 (Robert Grierson,)의사 부부와 푸트(W R.Foote,)목사 부부 그리고 맥래 (Duncan M. Mcrae) 목사 등이 선교사로 선임되어 캐나다 장로회 총회의 동해안 연합노회 (The Synod of the Maritime Province)의 파송을 받아 1898년 9월 8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 사업에 있어서 큰 공헌이 있다고 한다면 만주간도 지방에서의 선교활동을 간과해선 안 된다. 1912년에는 정식으로 캐나다 선교부가 용정에 설치되었으며 은진 중학교, 명신 여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운동의 일대 요람지가 되게 하였다. 특히 간도에 설치된 제창 병원은 의료 선교 기관의 역할 뿐 아니라 한국망명객들이 출입하며 독립운동을 숙의 하던 장소로 유명하게 등장하였는데 병원장 마틴(Stanly F.
Martin) 선교사는 한국인에 대한 이해와 동정이 깊어 솔선해서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3.1운동의 추진을 위하여도 상당한 공헌을 남긴 인물이다.
6) 침례회의 입국
침례교회의 한국 선교는 펜윅(Malcolm C.Fenwick)에 의하여 개시되었다. 그는 캐나다의 토론토(Toronto)출신으로 선교를 위해 내한할 때 선교 기관의 배경이 없이 개인 자격으로 왔다.
펜윅 선교사는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통하여 한국에 가라는 소명감을 느꼈다고 한다. "1889년 7월에 나는 출처를 알지 못하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랑하는 친구 헤론(J.W.Heron) 선교사의 부인이 한국에서 복음을 증거 한 죄로 감옥에 갇혀있으며 교수형으로 처형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를 신문에서 보는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으며 한국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났다. 와일더(Robert. P Wilder) 목사가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해외 선교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자 나는 한국인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감을 느끼게 되었고 한국에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1889년 12월 8일에 28세 청춘의 몸으로 인천에 상륙하였고 서울에 거주하면서 한국말을 익혔다. 그후에 그는 한국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언어를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황해도 솔내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가옥과 토지를 구입하여 채소를 재배하면서 서병조를 교사로 하여 한국말을 배우면서 부근 일대를 순회하며 전도사업에 종사하였다.
1894년 불타오른 선교 열은 중국을 위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en) 가 조직한 중국 내지 선교사회 (The China Inland Mission= CIM )의 이름을 본 따서 한국 순회선교회 (The Corea Itinerant MIssion- CIM) 을 조직케 하였다. 그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교파를 초월한 선교사의 단합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전도 방법 등의 모색을 표방하면서 쉼 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엘라 딩 선교회 (Ella Thing Memorial Mission)에서 1895년 폴링 (E.C. Pau-
ling)목사 부부를 한국에 파송 하였고, 엘라 딩 선교회에서는 그 이듬해에 연이어 스테드맨(F.W Steadman)선교사 부부와 액클스 (Sadie Ackles)와 엘머(Arma Ellmer) 등을 파송 하였다.
이들이야말로 공식적인 침례교 한국선교를 시작한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일행은 처음에 부산을 중심하여 스태드맨 목사는 일본 선교사로 옮겨가게 되면서 자신이 전도한 선교 기득권을 펜윅 선교사가 주관하는 한국 내지 선교회로 이관하였다.
1903년 충청도 지방의 전도사업을 이양 받은 펜윅 선교사는 처음으로 신명균과 황상필의 두 사람에게 교사의 직분을 맡겼다. 이 교사직은 전도사에 해당하는 직분이라 하겠으며 1905년에는 교사로 활약한 신명균을 목사로 안수하고 그해에 성서학원을 개설하고 초대 원장으로 임명했으며 이 종덕, 황태봉, 등 여러 청년들을 모아 교역자 양성을 목적하여 가르쳤다.
펜윅 선교사는 1906년 충청도의 강경 교회에서 회집한 제1회 대화회에서 '대한 기독교회'라고 명칭한 침례교단의 초대 감목으로 추대되었다.
1893년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가 교계의 예양 협정 원칙에 따라 선교지역을 분할하였던 고로, 대한 기독교회에서는 선교 터전을 멀리 만주와 시베리아 몽고 지역으로 확장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곳에 역점을 두고 선교사업에 헌신하였다.
펜윅 선교사는 1935년 12월 6일 원산 선교본부 자택에서 별세하였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무덤을 평장으로 하였다. 이 이유는 무덤이라도 높으면 교만스럽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펜윅 선교사는 한국 속에 살면서 한국교회의 한국다움을 찾았고 또 그 길을 통하여 교회의 성장과 확립을 기대하고자 노력한 인물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7) 성결교회의 선교
오늘날 한국에 성결교회가 존재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선교활동은 한국인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동양선교회는 1901년 시작되었다. 무디 부흥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무디성서학원에서 공부한 찰스.E.카우만과 에른스트.A.길보른 그리고 그들을 도운 일본인 목사 나카다 시게하루(중전중치)가 일본에서 동양선교를 위해 설립한 것이다.
"성결 연맹(Holiness Union)"이란 명칭으로 시작한 이 단체는 1905년에 이르러 지방 전도관이 7개소로 확장됨에 따라 조직적 발전의 필요를 느끼고 논의하던 중 이미 성서학원에 한국인 학생이 와 있음을 계기로 선교영역을 확장한다는 비젼에 따라 그 명칭을 "동양선교회"(Oriental Missonary society)라 정했던 것이다.
동경성서학원에서 3년간 수학한 정빈, 김상준이 1907년 귀국하여 선교사들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셋집을 얻어 '(동양선교회)복음 전도관'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물론 이 두 선구자들의 선교활동에 동양선교회의 후원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은 직접 전도의 방법으로 그 당시의 선교에 크게 공헌하여 1910년까지는 진남포와 개성에도 복음 전도관을 세웠다.
1910년 동양선교회 파송 감독인 토마스 목사가 오기까지의 3년간에 걸친 정빈, 김상준 두 사람에 의하여 수행되었던 초기 복음 전도관 사업은 선교사가 오기 전에 한국인의 손으로 닦아진 한국성결교회 수립의 바탕이 되는 것이기에 이는 한국 개신교 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선교사적으로 특이하고 귀중한 국면인 것이다. 한국인으로 말미암아 씨뿌려 열매를 거둔 한국 자생적 교파인 것이다.
8) 구세군의 입국
구세군 (The Salvation Army) 의 한국 개전은 1908년부터이다. 구세군은 영국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우드(William Booth)와 부인 캐더린(Catherine)이 창시한 전도, 자선, 사회 사업을 목표한 종교 단체이다.
1865년에 활동 본거지를 런던(London)에 두고 옥외 광장이나 천막 집회 등을 이용하여 전도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1878년부터 구세군(The Salvation Army)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구세군의 조직과 기율은 군대식으로 편성되었고 부우드 자신이 대장에 취임하였다.
한국 선교를 위하여 파견된 구세군의 선봉 장교는 로버트 혹가아드 (Robert Hoggard) 정령과 그의 일행이었다.
윌리엄 부우드가 세계 순회도중에 1907년 일본에 들렸을 때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 하기로 결정하게 되었으며 레일튼(C.S.Railton)과 로울리(C. J. Lawley)의 두 사관을 파송 하여 한국의 현지를 답사케 하였다.
그들은 1908년 10월 1일 내한하여 서울 서대문구에, 현 고려병원 뒤에 본부를 두고 선교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가로 상에서 전도하고 옥내 집회는 혹가아드 정령의 집에서 모였으나 참가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11월에는 새문안에 서대문 영을 개척하게 되었고 12월에는 서울 2영을 개척 설립하였다.
1885년에 장로교, 감리교가 들어와 선교 구역을 책정하는 등으로 기독교 선교의 문호가 열려 있었고 또한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의 여파로 선교 사업은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는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식 조직의 구세군의 복음 선교는 쉽게 적응되지 아니하였다.
1909년 7월에는 월간지 구세공보(The War Cry)가 발간되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구세군의 큰 발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으며 처음에는 구세신문이라는 제호로 발간되었다.
1910년 2월 15일에는 교역자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가 서울 서대문구에서 개교되었다. 개교 당시에는 성경대학이라 이름하였고 본윅 참령이 교장으로 시무했다.
한국 구세군은 1916년이래 대대적인 금주 운동의 전개, 육아원의 개설 18년에는 걸인 아동을 위한 구제사업과 빈민을 위한 연료와 식료품의 공급 그리고 22년에는 간이 진료소를 개설하기도 했고 24년에는 빈민 숙박 시설 등을 마련하면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 1928년에는 한국 최초로 [자선남비] 사업으로 이웃돕기 운동을 실시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행하고 있다.
구세군은 6.25 전란 기간에도 쉼 없이 자선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군산, 대전, 대구, 부산, 서울 등지에 고아 육아원을 시설하였고 특히 서울에는 여자 후생학원, 군산에 모자원, 영동에 구세 병원을 설립한 것이 뛰어나 있다.
로드 (H.A.Lord) 사령관을 비롯한 김삼석 고등정위, 김진한 참위의 세 사관이 남침한 공산권에 의하여 남북 되었음은 비극이었다. 로드 사령관은 3년의 포로생활을 거친 후 1953년 4월 기적적으로 본국에 귀환하였으나 두 사람은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영수 참령은 진주 영문을 지키고 있다가 체포되어 지리산 밑으로 끌려가 총살로 순교하였다. 한 손에 군가 다른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총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순교자의 피]라는 영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 외에도 1910년 이후 한국에 선교를 시작한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그리스도의 교회, 오순절 교회, 나사렛 교회 등과 반 선교사 운동으로 이루어진 한국교회라 할 수 있는 자유교회, 자치교회, 하느님의 교회 그리고 한국적인 신앙의 유산으로 이루어진 조선 기독교회, 조선 복음교회, 예수교회 등도 각기 교단 조직을 갖추고 해방 전 복잡한 개신 교회 종파의 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3. 선교 구역의 조정
여러 교파의 선교 단체가 속속 도래하게 되자 자칫 잘못하면 선교사들 사이에 불화와 대립이 발생할 염려가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각 교파들 사이에 협동만 이루어진다면 모든 교인을 한데 묶어 하나의 교회를 형성할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아니하였다. 1890년 [선교사 연합 공의회] (United Coyncil of Missions in Korea)는 그것을 목적하여 탄생하였다.
창립 회합에서 미국 북장로회의 헤론(John W. Heron,)의사가 의장이 되었고, 호주 장로회의 데이비스(J. Henry Davis)목사가 서기로 선임되었으며, 언더우드 목사와 기포드 (D,L.Gifford)목사, 그리고 알렌(H.Newton Allen) 의사 등이 참석하였다. 마펫(Samuel A. Moffett)목사는 제2차 회합부터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회합은 호주 선교회의 유일의 대표인 데이비스 목사가 별세하게 되자 미국의 북장로회 만으로는 존재할 의의가 없어져 3, 4개월이 지나면서 자연히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1892년 미국 남장로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도래하게 되어 1893년 1월 28일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 (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the Presby-
terian Form of Government)가 빈튼 (C.C Vinton)박사의 집에서 회합하였는데, 여기에는 장로회 계통의 선교사들 전원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개혁 신앙과 장로회 정치를 준행 하는 하나의 한국교회를 조직하는 것] 을 목적으로 설정하였고 한국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라는 기구가 정립되기 전까지 전국 교회에 대한 상회의 역할을 자연히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 회가 결코 공식적 기구는 아니었으며 다만 상호간의 친교와 상담과 조언하는 회합에 불과했고 권리 행사를 여전히 각자의 선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다.
1893년 1월에 열린 첫 회의에서 미국 남장로회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호남지방에서 선교하기로 약정되었고 미국 북장로회는 이미 선교를 개시한 모든 지역에서의 선교 기득권을 인정받았다. 부산 지역에서는 북장로회와 호주 장로회가 함께 선교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에는 두 선교회가 함께 상주하기로 하고 경상도 남부는 호주 장로회가 낙동강의 이북은 북장로회의 선교 구역으로 합의가 성립되었다.
미국 북 장로회와 미국 북감리교의 선교회 사이의 특수 한 합의점은 한국의 전 지역에서 인구 5천명이상의 도시에서는 함께 선교 사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그 인구 미만의 도시에서는 먼저 선교를 개시한 선교회의 담당 구역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안에 대하여는 당시 한국교회를 방문했던 감리교의 포스터(R.S.Foster) 감독이 동의를 하지 않아 약간의 어려움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 원칙이 선교회 상호간에 그대로 적용된 것은 사실이었다.
1905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양 교회 사이에는 선교 구역을 재조정할 필요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평안북도에서 영변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북감리교에서 맡기로 하고 그 외의 강계와 선천 등 지역은 북 장로회의 선교 구역으로 결정하였다. 선교 도상에 있어 아무래도 각 교파의 선교사들 사이에 부딧치는 난관이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상호간에 협동정신을 잘 발휘하여 순조롭게 사업을 진행하여 선교의 실적을 크게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친선을 도모하면서 예배도 드리고 전도사업도 함께 협력하여 좋은 결과를 나타내었다. 하나가 되어 하는 선교의 성과는 초기 한국교회의 발전을 이룩하게 하는 커다란 기반이 되었다.
선교회 |
도 |
도 시 및 지 방 |
북장로회 |
경기 |
서울 고양 파주 교하 양근 광주일부 과천 용인 양지 진위 양성 안성 시흥 김포 죽산 통진 양주일부 |
충북 |
연풍 청주 문의 영동 회인 청산 보은 청안 옥천 황간 괴산일부 | |
경북 |
대구 안동 경주와 전지역 | |
황해 |
봉산 수안일부 곡산 황주 은율 문화 장연 신천 송화 풍천 안악 재령 평산 서흥일부 | |
평남 |
평양 안주 숙천 여유 순안 강동 자산 삼동 중화 상원 영원 덕천 개천 순천 은산 맹산 성천 강서일부 증산일부 용강일부 | |
평북 |
의주 용천 철산 선천 곽산 정주 가산 박청 구성 삭주 창성 벽동 초산 위원 강계 자성 후창 | |
남장로회 |
충남 |
대전 부여 목천 |
전북 |
전 지역 | |
전남 |
전 지역 | |
제주 |
전 지역 | |
호주장로회 |
경남 |
부산 등 전 지역 |
캐나다 장로회 |
함남 |
원산 성진 문천 등 북부지역 |
함북 |
전 지역 | |
미감리회 |
경기 |
서울 인천 수원 안산 남양 교동 강화 부평 여주 광주일부 이천 음죽 양천 양근일부 |
충북 |
진천 음성 충주 제천 청풍 영춘 단양 괴산일부 | |
강원 |
원주 횡성 평창 영월 정선 강릉 삼척 울진 평해 | |
황해 |
옹진 강녕 해주 연안 배천 평산 신계 봉산 일부 수안일부 서흥일부 | |
평남 |
평양 양덕 함종 삼화 맹산일부 성천일부 개천일부 온산일부 순천일부 강서일부 증산일부 강동일부 용강일부 | |
평북 |
태천 운산 회천 영변 | |
남감리회 |
경기 |
서울 송도(개성) |
강원 |
춘천 철원 양구 이천 지경대 | |
함남 |
원산 회양 안변 용동 |
Ⅴ 선교 정책
1. 네비우스의 선교 방침
여러 교파들이 한국에 모여들자 여기에 따른 선고 정책의 수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1890년 6월, 한국 주재 장로교 선교사 일동은 중국 산동성 지푸를 중심하여 선교사업에 종사한 네비우스(John L. Nevius)박사를 초청하여 그로부터 경험담을 듣기로 하였다. 네비우스는 25년 동안 중국 선교 사업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논문인 [중국보] (Chinese Recorder)에서 선교 방법에 관하여 발표한 것이 있었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이 글을 읽고 한국과 흡사한 풍토를 가진 중국에서 시행된 선교 방법을 연구함으로서 한국에서의 선교가 성공적으로 수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네비우스 목사는 약 2 주간을 서울에 체재하면서 저서인 [선교 사업의 방안](Methods of Mission Work) 을 중심으로 주한 선교사들과 사이의 세미나를 통하여 한국 선교사업을 위한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첫째로, 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으면 그를 끝까지 붙들어 그 인물이 스스로 개인 전도하는 일꾼이 될 때까지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생활을 통하여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되기까지 계속하여 전도한다.
둘째는, 교회의 운영과 기구 조직은 그 교회 자체가 능히 감당할만한 범위 안에서 기획 실천하여 발전시켜 나아가게 한다.
셋째로, 교회에서 전도 사업을 지도할만한 인물이 나오거나, 재정을 공급하여 운영할 수 있는 유자격자가 발생하면 곧 그를 선임하여 교회의 책임 일꾼으로 세우고, 선교사는 가급적 목회 일선에서 후퇴한다.
넷째는 교회당 건축은 그 교회의 교인들 자신의 힘으로 하게 하되 건축 구조나 모양은 한국 고유의 양식으로 지방의 교회당답게 건축한다.
장로회신학대학에서 다년간 교회를 강의한 마삼락(Samuel H.Moffett)박사는 위의 내용에서 두 가지를 더 첨가하여 설명하였다. 즉 성서 연구반을 조직하여 성경 지식을 신도들에게 광범위하게 보급시키도록 협의했다는 점과, 외국인 선교사들에게는 개체 교회의 담임을 못하게 강력하게 규제하였다고 뚜렷하게 말하였다. 그의 부친인 S. Austin Moffett박사도 [네비우스 목사의 한국 내방은 나에게 가슴깊이 두 가지의 큰 교훈을 남겨 주었는데 그것은 성서 연구의 강조와 자립 정신의 고취이었다]라고 언급하였다.
위의 내용이 일반적으로 네비우스 선교 방안이라고 불려지는 내용이며, 이를 대별할 때 자력전도(Self-Propagation), 자치제도 (Self-Government) 자급운영(Self-Support)의 셋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중심 이념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피 선교지로서의 의타심이나 경제적 무능력을 배제케 하여 역량 있고 자립하는 교회 상을 갖게 하여 기독교 토착화에 기초를 조속히 설정하려는데 목표가 있었다. 초기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에 있어서는 이 방안을 채택함으로 그 이후의 선교 정책에 있어서 직접적이고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또한 이것이 한국교회 성장을 위해 상당한 공헌을 남겼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2. 장로교회의 선교 정책
네비우스 원칙을 토대로 하여 몇 가지 핵심적 원칙을 첨가하여 한국의 선교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들이 수립한 정책은 다음과 같다.
(1) 상류 계급보다는 근로 계급을 상대로 해서 전도하는 것이 좋다.
(2) 부녀자에게 전도하고 그리스도인 소녀들을 전도하는데 특히 힘을 쓴다. 가정 주부들. 곧 여성들이 후대의 교육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3) 기독교 교육은 시골에서 초등 학교 정도의 교육을 경영함으로써 크게 효력을 낼 수 있다. 그런고로 이런 학교에서 젊은이들을 훈련하여 장차 교사로 내보내도록 한다.
(4) 장차 한국인 교역자도 결국 이런 곳에서 배출될 것이다. 이것을 유의하고 있어야 한다.
(5) 사람의 힘으로만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신다. 따라서 될수록 빨리 안전하고도 명석한 성경(번역된 성경)을 이들에게 주도록 해야 한다.
(6) 모든 종교 서적은 외국말을 조금도 쓰지 않고 순 한국말로 쓰여지도록 하여야 한다.
(7) 진취적인 교회는 자급(自給)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는 사람의 수는 될수록 줄이고, 자급하여 세상에 공헌하는 그러한 개인을 늘여야 한다.
(8) 한국의 대중들은 동족의 전도에 의해서 신앙하게 되어야 한다. 따라서 전도를 우리 자신이 나서서 하는 것보다는 전도자의 교육에 진력해야 한다.
(9) 의료 선교사들은 환자들과 오래 친숙하게 지냄으로써 가르칠 기회를 찾게 되고 또 깊은 마음의 문제에 골몰하는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시약(施藥)만 가지고는 별 효과가 없다.
(10) 병원에서 치료받는 사람은 고향의 마을에 자주 왕래하게 해서 의료 선교사들의 인애에 넘치는 간호의 경험을 본받아 전도외 문을 열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선교 정책은 한국 교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크게 작용하였고, 여기에 대한 공과가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 방법은 네비우스의 원칙보다는 영국의 유명한 선교사요, 교회운동가였던 헨리 벤(Henry Venn)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그는 1860년대에 자립 교회, 자급 교회, 자립 선교의 원칙을 세계 선교의 방법으로 채택할 것을 권고한 최초의 사람이며,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다.
Ⅵ 교회의 박해
1. 금교령(禁敎令)과 애기 소동
1888년 4월 28일 한국정부의 조병식으로부터 미국의 딘스모어(Dinsmore) 공사에게 기독교 전도를 금지하라는 공문이 전달되었다. 이 금교령은 주로 천주교에 대하여 행해진 것이었지만, 기독교의 선교 단체에도 적지 않게 영향이 미쳤다. 천주교에서는 한국의 문화가 개방되어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기미가 보이자 한국인 교도의 이름을 빌려 선교와 인연 있는 장소를 구입하여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약현성당은 천주교인의 처형 장소였던 서소문 밖 언덕 위에 세워진 것이고, 종현 성당은 순교자 김범우의 집터에 세워졌으며 이곳은 천주교의 요람이기도한 명례동 즉 오늘의 명동성당 자리가 된다. 그런데 이 명동성당 자리는 궁궐보다 높은 장소였고 역대 국왕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건축 금령에 해당되는 지역이었다. 국왕은 그 계획을 듣고 성당 터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하명하였다. 그러나 건축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정부에서는 금교령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목사는 북부지방을 전도 여행하다가 딘스모아 공사로부터 즉시 귀경 하라는 공한을 받고 서울에 돌아와 보니 선교사들 사이에 논란이 분분하였다. 어떤 선교사는 이 포고가 천주교에 해당하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고, 알렌 같은 선교사는 너무 내륙에까지 깊이 들어가 전도함으로 우리에게도 꼭 같이 해당되는 금령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5월부터 9월까지는 주일예배를 포함하여 일체의 종교행사를 중단하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였다.
금교령이 내린 직후, 선동분자들은 모든 외국인은 국외로 추방돼야한다고 험담을 퍼트렸다. 허무맹랑한 유언비어가 떠돌아 서양인들이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눈알을 뽑아서 약에 쓴다는 등의 말도 퍼졌다.
이 금교령과 [애기소동](Baby-Riot)의 결과가 전화위복으로 되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스크랜튼 의사의 말과 같이 선교사들은 전혀 어린아이의 눈알을 뽑지도 아니하였고 아이들을 잡아먹지도 아니하였다. 선교사들은 정부 명령에 곧 순종함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고 무지와 편견으로 된 모해는 시일이 지나자 저절로 해명되었다. 선교사들의 하는 사업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전된 분위기를 이용하여 정부 측근의 알렌 같은 인물이 적극적으로 한국 관리를 설득하며 나섰다.
1886년 한불조약의 [교회] 라는 글귀가 바로 선교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선교사업을 인정함이 마땅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1890년 이후 척사법은 사실상에 있어서 사문화 되었다.
2. 평양박해
초기 한국의 교인들이 핍박을 당한데 있어서는 기독교 신앙과 고래의 조상숭배 관습과의 상충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비밀히 세례를 받고 나서 가족들에게도 잘 알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행사가 있을 때는 제사를 거부하여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곤 하였다.
주민들로부터 전도 인들이 매를 맞거나 돌팔매질을 당하는 사건은 자주 발생하였다. 기독교학교에 자녀를 보내면 서양풍에 물든 사람이요 한국인의 얼을 잃은 자라 하여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보다 더 부당한 박해는 무조건 지방관리들이 자신의 권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또는 일종의 착취의 방법으로 기독교인을 괴롭히는 행동이었다.
1894년 4월 7일 평양에서 장로교의 한석진과 감리교의 김창식의 두 전도인이 투옥되는 봉변이 발생하였다. 그날은 바로 수요일이었다. 삼일기도회를 드리고 있는 포교들이 들이닥쳐 한석진, 김창식, 송린서, 최치량, 신상호, 우지룡 등 여러 사람을 결박하여 잡아갔다. 민병석 평안감사는 [하늘을 향하여 주먹질을 하고 하나님을 욕하면 놓아주겠다]고 하였다. 이때 한석진 전도인은 반대로 평안감사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그의 비행을 꾸짖었다. 민 감사는 대노 격분하여 한석진을 사형에 처하라고 엄명하였다.
사태의 위급을 느낀 마펫 목사와 홀(W.G.Hall) 선교사는 급거 상경하여 영.미 양국 공사를 통해 외아문에 교섭하여 석방될 것이라는 언질을 받기는 하였다. 그러나 민 감사는 이에 강경히 불응하였다. 미국공사는 고종 국왕에게 직접 구명을 아뢰었다. 고종은 [내가 허락하는 것을 그대가 어찌 금하는가] 라는 어명을 감사에게 내려 한석진은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졌다. 이 사건이 있은 후 평양에서의 기독교 전도는 중앙정부의 옹호를 받은 결과가 되어 전도의 문은 널리 개방되었다.
1900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사건이 터질 뻔하였다. 그 내용인즉 서울에 전차가 부설되었는데 군부대신 이근택과 내장원경 이용익이 전차가 운행되면 한국의 재원이 고갈될 것이라고 염려하여 시민들에게 타지 못하게 명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미국인이 고종 국왕에게 사정을 주달하여 두 사람은 크게 꾸중을 들었다. 원한을 품은 두 사람은 박멸을 계획하여 12월 1일에 모든 선교사와 기독교인을 일제히 살해하라는 비지를 각도에 시달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해주에 볼일이 있어 들렸다가 이 절박한 소식을 알게 되어 즉각 소식을 라틴어로 에비슨(D.R. Avison) 선교사에게 알려주었다.
알렌은 지체하지 않고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이에 국왕께서는 외인과 교도들을 일체 가해해서는 안 된다고 칙전을 사방에 급발 하였다. 풍전등화와 같은 혹화를 아슬아슬하게 면할 수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교회에 대한 박해사건은 장소와 시일을 달리하여 계속적으로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그것들은 대부분의 국부적인 문제이었고 전체적인 문제로 등장하지는 아니하였다.
◉ 과 제 ◉
1. 서해안을 통한 개신교의 접촉에 대하여 약술하라
2. 중국에서 벌린 선교사들의 조선인 선교 활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3. 알렌, 아펜셀러, 언더우드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에 대하여 설명하라
4.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대하여 약술하라
5. 외국 선교부들의 입국에 대하여 열거 약술하라
6. 선교 구역이 어떻게 조정되었는가 쓰라
7. 네비우스 선교 방침에 대하여 진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