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5년은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전설적인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은 메독과 소떼른의 특급와인 분류를 누가 주관했는지에 관한 당시의 상황 등을 모르고 있다.
1855년은 나폴레옹 III세의 요청에 의해 기획되었으며 황제의 4촌인 제롬 나폴레옹 보나빠르트(Jerome Napoleon Bonaparte)가 주관하는 `제국 위원회`에 의해 조직되고 개최된 `빠리 만국 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de Paris)`의 해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기계 공업 진흥을 목적으로 열린 박람회 개최 목적의 이면에는 1851년 영국에서 개최한 크리스탈 팰리스(Crystal Palace)의 박람회를 의식하여 프랑스도 쉬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이 박람회에서 보르도 와인의 서열이 온 세상에 공식화되었다. 박람회가 있은 지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까지 박람회의 결과물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메독의 레드 60개와 그라브 레드 1개 및 소떼른의 화이트 26개를 인정한 유명한 `보르도의 그랑 크뤼 분류(Classement des grands crus de Bordeaux)`뿐이다.
와인의 선정과 전시에 관한 일들이 어떤 진행 과정을 거치고 구성되었는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지금 많이 남아있지 않다. 본 기사는 영예 수여 전말의 윤곽을 확실히 알기 위하여, 현재의 그랑 크뤼 생산자들에게 영광을 안겨 준 이례적인 박람회의 진행과정에 다가가 본다.
고문서를 뒤져 보면 1855년이 보르도의 분류를 계획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어려웠던 해였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일의 진행은 1854년 3월 15일 시작한다. 국지 공업에 활기를 불어 넣고 전시할 품목의 선정하기 위하여 `지방위원회`를 설립할 것을 지시하는 제롬 나폴레옹 보나빠르트가 서명한 `제국위원회`의 회람 공문이 프랑스 86개 도(道)의 지사에게 전달된다. 국가 규모의 박람회 사상 처음으로 프랑스 전역의 방대한 물산의 소개가 각 지방에 의해 한꺼번에 빠리의 전시회장(le Palais des Expositions)에서 전시될 예정이었다.
- 대표자도 없는 블레(Blaye)
지롱드(Gironde) 도(道)의 지사인 삐에르 드 망끄(Pierre de Mentque)는 스스로 책임을 맡고 지방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포도재배가 주요 업무를 차지하는 `지롱드`, `바자(Bazas)`, `블레(Blaye)`, `라레올(la Reole)` 마을의 농업회의소를 포함하여 그의 도(道)내 모든 상공업 단체들에 대해 소집을 통보한다. 대부분 `지주(地主)`라는 직함으로 포도원 소유주들의 이름이 제출되었다. 바자 회의소의 위임자인 소떼른의 뤼르-살뤼스(Lur-Saluces) 후작 경우도 같은 예이다. 그는 명사로서 초청된 것이지, 샤또 이껨(Chateau Yquem) 와인의 생산자로서가 아니었다. 계획단의 의중에 와인의 빠리 박람회 참여는 우선 대상이 아니었다. 더구나 자기 마을의 주요 산물인 와인이 공예품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간파하지 못한 블레 농업회의소 회원들은 대표 파견을 거절하였다. 이와 같은 해석의 실수가 그 지역 와인에게는 유명해질 수도 있었던 기회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보르도상업회의소의 경우 그 지역의 여러 분야에서 실력 있는 유력자 25인의 명단을 제출하였다. 결국에는 큰 네고씨앙 가문의 상속인이며 보르도 와인 업계에서 매우 활동적이기도 한 스코트랜드계 나타니엘 존스톤(Nathaniel Johnston)이 지롱드 지방위원회 10명의 위원 중 와인과의 직업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는 유일한 인사가 된다.
지역 언론에 발표가 있었던 1854년 11월 28일 이후, 보르도의 많은 포도원 소유주들이 각자가 생산한 와인을 갖고 빠리의 박람회에 참여하라는 요청에 긍정적 반응을 나타낸다. 듀이 마크햄 2세(Dewey Markham Junior)의 저서 `1855, 보르도 와인 분류사`에 의하면, 그 당시 네고씨앙이던 존스톤은 포도원 소유주들이 와인 전시를 주관 하게 되면 초래될 위험성을 간파했다고 한다. 그는 이미 18세기부터 보르도에서 시작되고 발전되어 왔으며 잘 알려지기도 했으며 또한 공식적이기도 한 기존의 크뤼 분류가 재검토되는 것을 피하고 싶어했다. 존스톤은 생산자, 중개자(courtier) 및 네고씨앙들 간의 복잡한 관계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권고에 따라 지방위원회는 존스톤도 역시 회원으로 있는 보르도 상업회의소에 연락을 한다. 즉 수세기 동안 작성된 실무적인 참고 자료의 손상 없이 지롱드 지방 와인의 빠리 행사 진흥 계획을 치를 수 있게끔 도와 줄 것을 요청한다.
- 소유주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가지 않게 고려
보르도 상업회의소는 공식적으로 미묘한 문제를 떠맡게 되었다. 비슷한 경우에 언제나 그렇듯이 회의소는, 1842년에 보르도 시장이 된 로디-마르텡 뒤푸르-뒤베르지에(Lodi-Martin Duffour-Dubergier)가 주관하는 전문가 4인 소위원회를 만들어 이 문제를 위임하였다. 그는 대단한 와인 시음가로서 4,100병을 보관하는 개인 까브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했으며, 존스톤과 마찬가지로 보르도 와인업계의 모든 유명 인사들을 알고 있었다. 영국 유학 후 그는 가업인 네고씨앙 업무에 복귀했는데, 그라브의 샤또 스미스 오-라피뜨(Smith Haut-Lafitte), 오-메독, 마꼬(Macau)의 샤또 지롱빌(Gironville)과 같은 포도원의 소유주이기도 하다. 네고시앙으로서 뿐만 아니라 포도원의 소유주로서도 유명한 뒤푸르-뒤베르지에와 존스톤은, 지역 와인 소개를 소유주들 스스로에게 맡기면 그때까지 확립된 가격 체계를 재정립해야만 하는 구실이 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포도원 소유주들의 부가 와인 산업과 매우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기존의 와인 가격 질서가 깨어질 때 소유주들의 원성이 크며, 이를 소위원회에서는 이를 모면해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소위원회는 보르도 시의 중개자조합(Syndicat des courtiers)에 개략적인 거래 가격을 기초로 한 와인 분류표를 작성해 줄 것과 아울러 경작, 생산 및 와인 거래에 관한 명확하고 간결한 요약을 첨부할 것을 요청한다. 소위원회는 또한 다섯째 등급(와인 교역 분야의 전문가들이 반세기 이전부터 작성하여온 분류)까지의 크뤼 분류만 고려할 것을 당부한다.
- 분류, 18세기부터 보르도에서는 분류가 있어 왔다.
보르도에는 18세기부터 다양한 분류가 존재해 왔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분류는 매년 새 와인의 출하 가격을 결정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 중개자나 네고시앙들에게는 수백의 와인생산자들 별개의 가격을 일일이 책정하기 보다는 최고 등급 와인의 품질을 기반으로 빈티지의 매개 변수 값을 결정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1854년, 그때는 뻬삭의 오-브리옹, 샤또 마고, 뽀이약의 라뚜르와 라피뜨 등 4개의 소유주가 보르도 와인업계 최고의 등급에 올라 있었다. 샤또의 와인 값이 통(225리터)에 2,400 프랑 이상이면 1등급으로 분류되었다. 1,900과 2,000 프랑 사이는 2등급, 1,600과 1,700 프랑 사이는 3등급, 1,200과 1,500 프랑 사이는 4등급과 `부르주아 쉬뻬리외 특급`으로 했다. 제국위원회로부터 지방위원회, 상업회의소에서 소위원회를 거쳐 중개자조합에서 업무를 마치고 전시 상품을 마련하고 보르도 와인의 최종 분류 등급을 확정하기까지의 모든 준비가 1년 가까운 걸려 박람회 개최 예정일인 1855년 5월 1일의 며칠 전에 끝났다. 그러나 박람회는 5월 15일로 연기되었다.
생산자들에게 통보된 지시문을 보면 놀라운 점이 있는데, 어떤 빈티지에 관해서도 특별한 언급이 없다. 다만 `좋은 년도`의 와인을 출품하기를 환기시키고 있다. 실제로 전시장에 올려 보낸 와인의 대부분은 6년 ~ 10년의 숙성을 거친 것이었다. 당시의 시점에서 10년 이전부터 오이디움병이 프랑스의 포도원 전역을 휩쓸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품질이 타격을 입고 있었다. 대부분 경우 시의 창고에 접수된 와인의 생산자들은 빈티지를 등록하지도, 기록하지도 않았다. 하여간 뽀이약의 바따이에(Batailley)는 1844년 6병을 보냈고(로톤(Lawton)의 평가에 의하면 평년도 수준의 빈티지) 셍줄리앙의 랑고아(Langoa)는 1846년(일반적으로 바디가 있고 좋은 해)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세 소유주에 의해 나뉘어진 셍줄리앙의 레오빌(Leoville)은 바르똥(Barton) 포도원의 1847년 빈티지를 보냈다. 후일 라피뜨-로칠드가 되는 샤또 라피뜨의 관리인 몽쁠레지르 구딸(Montplaisir Goutal)은 특히 그를 잘 알 뿐 아니라 그의 와인도 좋아한다고 소문난 이가 제롬 보나빠르트라는 이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1846년과 잘 안 팔려 골치거리인 1848년산을 신청하였다. 빠리 국제박람회에서 잉여 생산량을 팔고자 구딸은 두 곳에 걸쳐 전시한다. 처음은 지롱드지방위원회에서 산업전시장(Palais de l’Industrie)의 부속 건물에 있는 48번 ‘알코브’로 보내는 다른 와인들과 함께였으며, 이때 레이블은 상업회의소에서 모두 만든 것으로서 샤또 이름과 소유주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샤또 고유의 레이블을 부착시켜 전시장의 다른 곳에서 전시했다. 외젠느 라리외(Eugene Larrieu)와 삐숑 드 롱그빌 남작(Baron Pichon de Longueville)이 소유한 오-브리옹 와인은 상공회의소에서 모은 전시품의 위치와 좀 떨어진 마지막 순간에 차지하게 된 장소에서 전시하게 된다.
15일간의 개막일 연기로 인하여 빠리에 올라와 있는 상업회의소 대표, 앙리 갈로(Henri Galos)는 각 6병씩 받은 그랑 크뤼 중 한 병씩만을 전시하게 된다. 상등급의 와인들은 앞쪽에 전시하여 눈에 잘 띄도록 하였으나, 넓은 전시장의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과 열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나머지 5개의 병들은 건물의 지하층 바닥을 파낸 후 작은 까브를 만들고 보관하였다. 등급 외 와인들은 뒤쪽에 전시되므로 열기의 문제는 없었으나, 대중들로 하여금 어디에서 왔으며, 원산지는 어딘지, 어느 마을인지 알리는 것이 문제였다. 이를 위해 뒤푸르-뒤베르지에는 벽걸이용 지도에 포도원 위치 및 대부분의 유명 샤또를 표시한 후 박람회 기간 동안 대중에게 홍보한다. 이러한 시도로 인하여 상업회의소 는 박람회 와인에 대한 시음 평가의 권한을 갖는 `11번째 클라스`의 배심원으로부터 영예 대상을 수여 받는다.
- 오-브리옹은 '우수 등급(Mention Honorable)' 수상
보르도 상업회의소의 감독하에 지롱드 지방위원회는 모두 145 케이스의 와인을 빠리로 보냈다. 최고급의 와인들은 `11번째 클라스`의 배심원 몫이었다. `11번째 클라스`의 임무는 `발효 식품 및 음료의 준비와 보관`이었다. 1855년 7월 20일 금요일, 57개의 레드 크뤼 끌라세와 유일한 화이트 특 1등급인 이껨(Yquem)과 9개의 1등급, 11개의 2등급 와인의 시음이 이루어진다. 기타 다른 와인들은 `내국 경제 상품`을 맡고있는 `31번째 클라스`의 배심원들이 시음하기로 배정되었다. 위 구별은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11번째 클라스`의 배심원 구성은 모두 빠리 사람으로 다음과 같다:
가스떼라(Castera) 경찰청의 수석 시음가, 엠메(Hemmet) 외 1인 와인중개자, 뒬뤼아르(Duluart) 중개자조합, 빠리의 와인감식가이며 네고시앙 2인.
그러나 심사 후 와인의 시음 평가 결과를 발표해서는 안되었다. 배심원의 역할은 메달을 부여하는 것에 있었다. 결과는 상업회의소의 발표와 동일한 모든 크뤼 끌라세 와인들이 상을 받았으며, 중개자들이 분류한 등급에 따라 배분되었다.
상업회의소는 만족했고, 1등급인 마고, 라피뜨 및 라뚜르는 1등급 메달을 수여 받았다. 또한 메독의 2등급은 2등급 메달을 받았으나 소떼른의 크뤼 끌라세 와인들은 등급에 상응하는 취급을 받지 못하였다. 소떼른의 1, 2등급은 메독의 기타 크뤼 끌라세 및 품질이 재평가된 몇몇의 등급外 크뤼와 함께 묶여 `우수 등급(Mention Honorable)`으로 취급되었다. 오-브리옹 와인은 상업회의소 셀렉션의 공식 전시 밖에 추가로 전시했으며 역시 `우수 등급(Mention Honorable)’을 받았다.
그러나 1855년 11월 15일 박람회는 폐막식의 호사스러움으로도 행사의 실패를 만회 시키지는 못하였다. 1851년 영국에서의 박람회는 크게 흑자를 본 반면 프랑스에서는 적자였다. 그러나 보르도 와인에게는 영광의 출발이었다.
- 최상급 크뤼 브루주아 와인들의 낙담
요지부동이었던 크뤼 끌라세의 변화는 1973년 무똥 로칠드를 재심사하여 1등급으로 올린 것과 1855년 박람회 기간 중인 9월에 오-메독, 마꼬(Macau)의 샤또 깡뜨메를르(Cantemerle)를 5등급에 추가한 것이다. 끈질긴 성격의 소유주인 까롤린 드 빌뇌브-뒤르포르(Caroline de Villeneuve-Durfort)는 수십 년 전부터 깡뜨메를르 와인의 중개자 거래 가격이 크롸제-바즈: Croizet-Bages의 것과 같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따라서 자기의 와인에 5등급의 명칭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개자조합은 그의 항변을 인정했고, 따라서 그의 샤또명은 매우 폐쇄적인 1855년 명단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크뤼 끌라세의 분류도 현실에 맞게 변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몇몇의 전문가는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기도 하지만, 150년 동안 최고로 인정되어온 엘리트 집단에서는 절대 반대하고 있으며, 좀더 나은 새로운 체계를 만들고 그것을 시행하려면 막대한 재정 소요나 물류 비용이 소요될 것이다. 크뤼 부르주아의 생산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체념한 듯하다. 최고 중의 최고 자리에 초대 받아 보지도 못한 그들은 2003년 비넥스포(Vinexpo)에서 나름대로의 분류를 발표하였다.
# 일정 요약
1854년 5월 15일 : 전시품 선정을 위한 `지방위원회` 설립
1854년 11월 28일 :전시 신청 지원자 모집을 위한 공고, 지방 신문에 게재
1855년 5월 1일 : 최종 분류 확정
1855년 7월 20일 : 빠리에서 채택된 78개의 크뤼 와인 시음
1855년 9월 : 깡뜨메를르 와인을 5등급에 추가하는 첫번째 수정
* 보르도의 독주
1854년 11월 7일 부르고뉴 지방에 있는 디종의 `상업회의소` 소장은 `꼬뜨 도르` 지방 위원회 위원장의 요청 하에 지롱드 지방위원회에 서신을 보낸다. 내용은 보르도 와인을 빠리로 보낼 때 부르고뉴 지방과 샹빠뉴 지방의 와인도 합류시켜 보낼 수 있는지에 관한 의중을 타진하는 것이었다. 대답은 명확하였다 : 절대 불가. 지롱드는 가능하면 완벽하게 그러나 자기 지방의 와인만 갖고 전시하길 바랬다.
첫댓글 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