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고다공원의 정문 기둥, 대학로에서 마주치다
서울 대학로 인근에는 가까이 궁궐도 있고, 넓게는 명륜동 쪽부터 동대문 권역까지 지역적으로도 그러하고, 또한 조선시대, 대한제국시기, 일제강점기, 자유당 시절에 이르기까지 역사유물이 시기별로도 비교적 골고루, 그리고 풍부하게 남아 있는 편이라서 역사탐방을 하기에는 딱 좋은 구역이라 생각되는데, 작년인가 이화장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파고다공원의 정문 기둥이 서울사대부설초등학교의 교문 기둥으로 사용되고 있는 걸 보았다.
▲ 서울 대학로(동숭동)에 있는 '서울사대부설초등학교(부설여중)'의 교문이다. 파고다공원의 정문을 옮겨다 놓은 것이다.
▲ <동아일보> 1926년 6월 12일자에 수록된 '파고다공원'의 입구 모습이다. 사진원문에는 "6월 10일후(後) ...... (下) 탑골공원"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즉 순종의 인산일과 관련한 거리풍경을 담아낸 모습니다.
위의 <동아일보> 자료사진에서 보듯이 그건 파고다공원 앞에 서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것이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 있나 했더니 친절하게도 그 옆에 "우리학교 교문 기둥의 유래"라는 안내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학교 교문 기둥 4개는 본래 파고다공원에 세워졌던 대문 기둥이었다.
파고다공원은 고려시대에는 흥복사, 조선시대에는 원각사가 있던 자리였는데 조선말기(1897년)에 탑과 대문을 세우고 파고다공원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그 뒤에 이 공원 안에서 3.1독립선언문이 선포됨으로써 전국적인 독립운동의 발상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 기둥이 우리 학교로 옮겨지게 된 유래는 1969년 3.1절 5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특별시가 독립선언기념탑을 세우면서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높여주기 위하여 이 기둥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문 기둥으로 기증하였다.
그 후 1974년 서울대학이 관악캠퍼스로 옮겨지면서 우리 학교 교문 기둥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기둥 자체로만 보면 '일제풍'의 솜씨가 분명한데, 그것도 독립정신을 높여주기 위한 역사자료라고 하니 딱히 할 말은 없다. 거기에도 어쨌건 되새겨보아야 할 숱한 역사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말이 난김에 위의 '설명문안'에 대해 몇 가지 딴죽을 좀 걸어보자.
우선 "조선말기(1897년)에 탑과 대문을 세우고 파고다공원으로......"라고 했는데, 1897년에 무슨 탑을 세웠다는 것인지? 그것이 원각사탑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번지수를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조선초기에 세워진 탑이 어찌 1897년의 탑으로 되는 것인지?
그리고 1897년에 대문을 세웠다고? 그걸 누가 봤는지? 아님 그걸 입증할 사진자료라고 있는지?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파고다공원의 정문 기둥이 언제 세워졌다고 단정할 만한 자료는 아직 아무데도 없다. 아마도 공원의 건립시점을 1897년이라 하니까 거기에 맞춰 대문도 함께 세웠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는가 본데, 그건 잘못된 추론이다. 훨씬 나중에 세워졌을 수도 있다.
위의 <동아일보> 1926년 6월 12일자에 그 모습이 들어 있으니 적어도 그 이전에 세워진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딱히 언제 세워진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대문 자체가 '일제풍'이 확연하다는 점에서 그 시기가 분명 그리 빠른 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파고다 공원의 건립시점을 1897년이라고 정설처럼 못박는 것도 잘못된 고증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작년에 "원각사 10층석탑, 그 어색했던 풍경"이라는 글을 정리하면서, 여러 가지 자료를 뒤져본 적이 있었는데 파고다공원이 1897년에 만들어졌다는 증거는 없다.
그저 일본사람들이 남겨놓은 <경성부사>의 기록에 '고종시대 광무의 초년'이라는 적어놓은 것 보고, "초년=원년"이라고 잘못 이해하여 광무원년 즉 1897년에 파고다공원이 개설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던 듯이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1899년에 가서야 "공원건축계획을 반대 운운"하는 공문서가 보이고, 또 <제국신문>과 <독립신문> 등에 탑골의 민가를 헐어내는 기사가 등장하는 걸로 봐서 공원의 개설은 적어도 1899년 이후의 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경성부사>에 나오는 '고종시대 광무의 초년'은 '광무 원년'이 아니라 '광무시대의 초기'라는 의미, 즉 그것이 1897년이 될 수도 있고, 광무2년(1898년)일수도, 광무3년(1899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파고다공원 안에 설치된 문화재 설명문구에는 온통 "1897년"이라고 못을 박아두었다. 문헌고증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교문 기둥의 유래'에 들어있는 또 다른 오류 한가지......
"이 기둥이 우리 학교로 옮겨지게 된 유래는 1969년 3.1절 5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특별시가 독립선언기념탑을 세우면서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높여주기 위하여 이 기둥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문 기둥으로 기증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기둥은 서울특별시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넘겨준 것인데, 어찌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운운"하고 있는 것인지? 대학생들이 더 자라나야 할 사람들인지, 그리고 꼭 독립정신을 일일이 높여주어야 하는 대상들인지? 그 뒤에 곧장 1974년에 와서야 초등학교 교문으로 옮겨졌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것과 좀 헷갈린 것 같기는 하다.
아마도 이러한 설명문구 하나 정리하자면, 그 누구라도 여러 날은 머리 싸매고 애를 쓰셨을 것 같은데 그러고도 공연히 욕먹는 꼴을 당하시게 되었으니...쩝... 그럼, 저보고 설명문안을 직접 재정리 해보라고 하면 어쩔 것인가? 전들 역시 별 수 없이 문장의 오류나 고증의 잘못으로 누군가의 욕을 먹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정리: 2004.9.22,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첫댓글 재작년에 썼던 글인데, 문득 생각나서 이곳에 다시 옮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