섶 섬 섶섬은 서귀포시 보목동 앞바다에 자리한 아름다운 조그만 섬이다. 섶섬은 숲이 우거졌다고 해서 '숲 삼(森)'자와 '섬 도(島)'자를 써서 '삼도(森島)' 또는 '숲섬'이라고 불린다. 또한 '신도(薪島)'라고도 불린다. 찾는 이가 없어 섭섭하다고 해서 '섭섬'이라 불린다는 유머도 전한다. 이 섬은 상록수림으로 뒤덮이고 450여종의 아열대성 식물이 자생한다.
특히 섶섬은 파초일엽인 '넙고사리' 자생지로 유명하다. 넙고사리는 고사리과에 속하는 아열대성 상록 양치류 식물로서 음습지의 나무나 바위에 붙어 자라며, 우리 나라에서는 유일하게도 이곳의 '섶섬'에서만 볼 수 있는 식물이기도 하다. 섶섬의 넙고사리 자생지는 '국가 지정 천연 기념물 제18호(1962. 12. 3)'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처럼 이 섶섬은 자연 식물의 보고로 널리 알려진다. 세계적인 식물군상을 볼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는 섬이다. 이 섬에는 그럴 듯한 전설도 전해진다.
섶섬의 전설; 아득한 옛날, 이 섶섬에는 귀 달린 큰 구렁이가 살고 있었다. 이 구렁이는 용이 되려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구렁이였다. 뜻을 못 이룬 구렁이는 그러나 끝내 용이될 수 있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매달 음력 초사흘과 초여드렛날이면 용왕님께 용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이렇게 삼 년 동안을 변함없이 간절히 기도 드리던 어느 날 용왕은 구렁이의 정성 어린 기도에 감응하여 모습을 나타냈다. "섶섬과 지귀섬 사이에 숨겨 둔 야광주(夜光珠)를 찾아내어라, 그러면 용이 되게 해 주겠노라." 지귀섬은 섶섬 동쪽 편 위미리 앞 바다에 있는 섬이다. 용왕님 말을 들은 구렁이는 그날부터 용이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푼 집념으로 섶섬과 지귀섬 사이의 깊고 넓은 바다 속을 헤치며 찾기 시작했다. 날이면 날마다 바다 속을 헤쳐 다녔지만 좀처럼 야광주를 찾지 못했다.
오직 야광주를 찾아내려는 일념으로 무려100년 동안을 애써 헤쳐 다닌 구렁이는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제 힘이 빠졌다. 참으로 한 맺힌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이 맺힌 구렁이는 그만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바다 속 깊이 슬픈 한을 품은 채 죽고 말았다.
이로부터 비가 내릴 때면 섶섬 봉우리에는 짙은 안개가 피어 올랐다. 이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그 한 맺힌 구렁이의 혼이 섶섬 꼭대기에서 조화를 부린다고들 한결같은 이야기를 한다. 이에 마을에서는 섶섬에 당을 짓고 매달 음력 초여드렛날이면 어부들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섬 가장자리는 온통 깎아 세운 듯한 절벽으로 둘러쳐져 있다. . 서귀포항에서 30분 정도 걸린다
문 섬
문섬(蚊島)은 서귀포 앞바다에 새섬 남쪽에 우뚝 자리잡은 사람이 살지 않는 아름다운 섬이다. 서귀포와 약 1㎞ 떨어져 있는 이 섬은 눈 내리는 한겨울에도 파리나 모기가 죽지 않고 월동한다고 해서 '모기 문(蚊)', '섬 도(島)'자를 써서 '문도' 또는 '모기 섬'이라고 부린다. 문섬은 일명 '녹도(鹿島)'라고도 한다.
이 섬은 온통 상록 활엽수림으로 덮여 있다. 이 문섬의 상록 활엽수림은 '제주도 지방 천연 기념물 제 45호(1995. 8. 26)' 보호되고 있다. 문섬 주변 바다 속은 아름답기로 널리 알려진다. 신비스러운 바다 속 세계의 여행을 위해 국내 스킨스쿠버 다이버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문섬 주변은 스킨스쿠버 다이버들에 천국이기도 하다.
또한 이 섬과 약간 떨어진 왼쪽 편에 조그마한 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는 생긴 모양새가 흡사 사람의 엄지손가락과 닮았다고 해서 '엄지바위', 또 문섬의 새끼라고 해서 '새끼섬'이라고 불린다. '문섬이 생긴 것과 관련하여 하나의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한 사냥꾼이 한라산 정상에서 사슴 사냥을 하다가 실수하여 그만 옥황상제의 배를 쏘아 비위를 건드리고 말았다. 이에 화가 치밀어 오른 옥황상제가 사냥꾼을 혼내 줄 심사로 집어 던진다는 것이 그만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진 것이다. 이때 뽑아 던진 한라산 봉우리가 서귀포 앞 바다까지 날아와 주저 앉아 섬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섬이 바로 '문섬'이라 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섬은 '문섬'과 '범섬'이며, 그 한라산의 뽑힌 자국이 바로 백록담이라고 한다. 근데 이런 전설로 이루어진 산이 바로 산방산이라는 전설도 있는데... 진짜는? 아무튼..이곳 문섬은 낚시하기에도 좋다. 낚시를 즐기기에는 5-7월, 9-11월이 적절하며, 수심 15-30m이다. 이곳에서 참돔, 돌돔, 흑돔, 벤자리, 벵어돔, 방어가 많이 잡힌다.
범 섬
범섬은 서귀포 항에서 남서쪽으로 5km 해상에 위치해 있고 법환동 앞 바다에 있는 섬이다. 이 섬은 문섬 곁을 지나면서 정면을 바라다보면 흡사 공작새가 꼬리를 펼쳐 놓은 것과 닮은 섬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공작새 바위』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부채를 펼쳐 놓은 모양과 닮았다고 해서 『부채바위』라고도 불린다. 이 섬은 한라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흡사 한 마리의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범 호(虎)' '섬 도(島)'자를 써서 호도(虎島) 또는 범섬이라고 불린다. 전설에 불과하지만, 그래서 이 섬에는 고양이를 기를 수 없다고 한다. 섬의 둘레는 온통 절벽으로 이루어졌고, 약 2㎞에 달한다. 섬의 정상은 약 3만 평의 평평한 초원으로, 이곳에 한때는 사람도 살았었다고 하며, 지금은 경작지로도 이용되고 있다.
또한 이 범섬에는 사람의 약용으로 쓰인다는 토끼와 흑염소가방목 서식되고 있으며 흑비둘기도 서식하고 상록 활엽수림 지대를 이루는 데. 이 흑비둘기 서식지 및 상록 활엽수림 지대는 '제주도 지방 천연 기념물 제46호(1995. 8. 26)'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범섬은 섬 자체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역사의 유적지이기도 하다.
고려 공민왕 23년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출정한 최영 장군이 이곳 법섬에서 목호의 무리들을 최후로 격파시킨 곳으로 유명하다. 여·몽 연합군이 파군봉에서 삼별초 군을 토벌한 것을 계기로 1275년 (충열왕 1년)부터 제주도는 고려에서 분리되어 원(몽고)에 예속되었다. 이후 100년 동안 원나라의 지배사에 목모장(牧馬場)이 되었는데 이때 들어온 원나라 목자들의 횡포로 제주도민들은 많은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다. 원(元)이 망하고 명(明)이 선 이후에도 그들은 계속 제주도를 점거하고 난동을 부렸는데, 이것이 곧 '목호의 난'이다.
이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최영장군은 1374년(고려 공민왕 23년) 에 전함 314척과 군 25,600명을 거느리고 제주도로 출정해서 명월포로 상륙하여 어름비(현재의 애월읍 어음리)지경·밝은 오름지경·금물오름(현재의 한립읍 금악리) 지경·샛별 오름 지경· 연래(延來)지경·홍로(烘爐)지경에 걸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백방으로 공격하며 이들을 소탕하기에 이르렀다. 이네 처음 3,000여명의 기병으로 강력히 항쟁하던 몽고의 목자(목호) 들은 견디다 못해 마침내 이곳 범섬까지 밀려오게 되었다.
이때 쾌속선 40척으로 완전히 포위 당한 목자들은 도망 갈 길이 없었다. 두목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관음보(觀音保)등은 섬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는 잡혀 죽었다. 나머지 목자들은 격파시키고 또한 항복한 목자들은 귀화시켰다. 이렇게 하여 몽고 세력이 제주에서 완전히 소탕되었다. 이래서 이 범섬은 아름다운 섬인 반면에 역사의 유적지로도 알려진다. 범섬을 한 바퀴 돌다보면 4개의 동굴을 보게 된다.
그중 첫 번째맞이하는 동굴이 '석굴'이다. 석굴은 높이와 길이가 약 20m, 너비 약 18m이다. 이 석굴은 하나의 그림으로 감상하자면 세계 미술대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할 만큼 아름다운 굴이다. 이어서 범섬 절벽 중간 부분을 보면 붉은 띠가 형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붉은 띠를 중심으로 위쪽은 수성암, 아래쪽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이 범섬은 특이하게 이루어진 섬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조금 앞 쪽을 보면 이 섬의 두번째 동굴이 보인다. 이 굴은 'ㄱ'자 모양으로 생긴 굴이라 해서 'ㄱ자 굴'이라고 불린다. 이 'ㄱ자굴'은 깊이 약 70m, 높이 약 5m, 너비 약 5m이다. 이 굴에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인 전설이 하나 전해진다. 남자들이 이 'ㄱ자굴'속에 들어가 담배를 피우면 그 담배 연기가 한라산 백록담에 피어오른다고 한다. 계속해서 앞 쪽으로 범섬과는 분리된 조그만 섬이 보인다. 이 섬은 흡사 한 여인이 한복 치마를 곱게 차려 입고 양손을 무릎 위에 단정히 올려놓은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치마섬'이라고 불린다. '치마섬' 정상을 보면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모습 같은 바위를 볼 수 있다. 이 바위는 생긴 모양새가 흡사 장군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장군바위'라고 불린다. '
치마섬'과 '범섬' 주변에는 많은 고급 어종들이 서식한다. 계속해서 이 섬의 세 번째 네 번째 동굴인 '쌍둥이굴'이 보인다. 이 쌍둥이 굴은 일명 '호랑이 콧구멍 굴'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에도 신빙성이 없는 기막힌 전설이 전해진다. 아득한 옛날, 그러니까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이라고나 할까. 이곳 제주에는 삼신 할머니인 '설문대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이 할머니는 몸집이 얼마나 크셨는지 한라산을 베개삼아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우면 범섬의 쌍둥이 굴까지 닿았다고 한다. 이 설문대할머니는 몸집도 큰 반면 자식 욕심도 얼마나 많으셨는지 슬하에 오백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 오백 아들을 하나하나 낳을 때마다 산모의 진통을 겪으면서 두 발로 뻥뻥 걷어 찬 것이 이렇게 쌍둥이 굴이 생겨났다고 한다. 범섬은 흡사 한 폭의 그림과 같다. 그야말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야만 눈앞에 그려진 한 폭의 '범섬' 그림을 멋있게 감상할 수 있다. 섬 주변 바다 속에는 기복이 심한 암초가 깔려있다. 계절따라 낚시하기에 좋으며, 수심은 15-30m이다. 이곳에 참돔, 돌돔, 감성돔, 벵어돔, 자바리, 다랑어, 방어가 많다. 여름철에는 감성돔, 벵어돔, 참돔이, 겨울철에는 자바리, 참돔, 돌돔 같은 고기가 낚시꾼들을 즐겁게 해준다.
차귀도
차귀도는 제주의 여러 섬 중에서도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섬이다. 섬을 떠받치고 있는 절벽, 평평한 들판, 그리고 주변에 있는 와도와 지실이도를 이루고 있는 기암 등이 차귀도를 인상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차귀도가 가장 아름답게 보일 때는 해질 무렵, 노을이 바다를 물들일 때이다.
차귀도는 죽도라고도 불리는데 이 섬 주위는 깎아 세운 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졌으며 장군석이라는 돌이 우뚝 솟아 있어 그 풍치를 한결 돋운다. 차귀도 방파제 앞에 즐비하게 늘어선 식당에서는 싱싱한 활어와 특미 오징어회를 맛볼 수 있어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가 있다. 차귀도는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많이 잡히는 어종으로는 참돔, 돌돔, 흑돔, 벤자리, 자바리 이며 1월에서 3월, 6월에서 12월 사이가 낚시를 하기에 좋은 때이다. 시외버스를 이용해 고산리까지 간 후 20분 걸어서 지구내 포구에 다다른 후 여기서 뱃길로10분 정도 들어가면 된다.
차귀도에 대한 전설 차귀도는 죽도, 지질이도, 화단섬, 누운섬 등 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섬이다. 면적 약 0.16㎞의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이다. 섬의 남쪽은 기암절벽이고 서북쪽은 해안선이 완만하게 이루어졌다. 차귀도를 감상하는 것은 대개 수월봉에서 이루어진다. 수월봉에서 내려다보는 차귀도는 섬 전체가 빼어나게 아름답다. 섬을 떠받친 절벽이 아름답고 유연하게 뻗은 들판 색 또한 아름답다. 차귀도는 수월봉과 깎아지른 듯한 해안과 절벽 엉알의 녹고 물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색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차귀도에 이런 전설이 전해진다.
고려 16대 예종 임금 때의 일이다. 중국 복주 사람 풍수사 호종단이 풍수 지도와 풍수견을 데리고 제주도에 들어와서 제주 섬을 한 바퀴 돌며 지맥과 수맥을 모조리 끊고 다녔다. 그 까닭은 옛날 중국 진시황이 지리서를 펴 본 즉 제주도의 지리가 왕이 태어날 땅이라 그대로 두면 중국에 대항할 유능한 인물이 제주도에서 나타나 중국이 위협을 받을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있는 열 세 군데의 구멍을 찾아 모두 막으라는 명을 받고 제주에 도착한 호종단은 처음에 산방산 남쪽 '절노리코지'를 끊었다. 다음에 호종단은 제주도를 동쪽으로 돌면서 수맥을 끊기 시작했다. 서귀포 서홍리 '지장새미'에 이르러서 수맥을 끊는데 실패한 호종단은 그 자리에서 풍수 지도를 찢어 버리고 배를 타 고산 앞 바다 차귀섬 쪽을 통해 중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호종단이 탄 배가 지금의 차귀도 앞 바다에 이르렀을 때 어디에 선지 한 마리의 날쌘 매가 날아오더니 별안간 폭풍으로 변하면서 그 배를 침몰시키고 말았다. 이는 한라산의 수호신이 분노하여 매로 돌변해서는 자신의 지맥을 끊고 돌아가는 호종단을 복수하여 죽여버린 것이라 한다. 이렇게 호종단이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고 해서 '막을 차', '돌아갈 귀' ,'섬 도'자를 써서 차귀도라는 섬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차귀도는 옛 이름이 죽도이다. 옛날 이 섬에 대나무가 많이 자라나서 대 죽, 섬 도 자를 써서 죽도 또는 대섬 이라고 불린 것이다. 이 섬의 남쪽 해안 가에는 장군석이라는 바위가 우뚝 서 있다. 이 장군석이 어우러져 차귀도는 또 다른 풍취를 자아낸다. 이 장군석에도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오백 아들을 둔 설문대할머니가 계셨다. 식구는 많은데다 계속되는 흉년으로 오백 형제들은 날이면 날마다 식량을 얻으러 헤매 다녀야 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오백 형제는 식량을 구하러 모두 밖으로 나갔다. 오백 아들의 어머니, 설문대 할머니는 큰 가마솥에다 아들들이 돌아오면 먹을 죽을 끓이는데, 워낙 큰솥이라 솥을 빙빙 돌며 힘겹게 휘젓다가 그 휘젓는 힘에 끌려 그만 가마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하루 종일 양식을 구하러 돌아다니다 몹시 배가 고픈 상태로 돌아온 아들들은 그 사실도 모르고 불러도 대답이 없는 어머니는 뒤로 제치고 우선 허기를 채우느라 죽을 떠서 맛있게 먹었다. 그날 따라 죽은 유난히도 맛이 있었다. 그러나 유독 막내는 죽도 먹지 않고 언제나 돌아오면 반기던 어머니가 안 보이고 불러도 대답이 없으며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어머니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여기며 죽 솥을 이리저리 휘저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죽에서는 틀림없는 어머니의 뼈가 나왔다. 이제야 어머니가 죽을 끓이다 가마솥에 빠져 죽은 사실을 알아차린 형들은 울음바다를 이루며 그 자리에 쓰러져 말없는 바위들이 되었고, 막내는 무심한 형들을 나무라며 혼자서 대성통곡을 하며 차귀도에 와서는 말이 없는 바위가 되어 버렸다. 이 바위가 바로 차귀도의 장군석이라고 전해진다. 수월봉에서 바라보는 경관 못지 않게 용수리 절부암쪽에서 바라보는 차귀도 또한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경관이다. 차귀도 앞에 누운섬이 있다. 이 섬은 절부암쪽에서 바라보면 한 여인이 누워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해서 '누운섬'이라고 불리며, 이 누운섬은 누울 와, 섬 도, 자를 써서 와도라고도 불린다. 옛날 고산 마을에는 과부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누운 섬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홀로 사는 여인의 한 같은 것을 느꼈다는 말도 전해진다. 차귀도는 섬 자체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격전지로도 알려진다. 옛날 이곳에 침범하는 왜구들을 무찌르기 위하여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차귀도는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참돔, 돌돔, 흑돔, 벤자리, 자바리가 많이 잡힌다. 1-3월과 6-12월 사이가 이곳에서 낚시하기에 좋다. 싱싱한 활어회와 오징어회를 차귀도 방파제에서 음미할 수도 있다. 당산봉 기슭에 병풍을 펼쳐 놓은 듯 깎아지른 바위 절벽이 아름답다. 초가을 당산봉 아래 노란 들국화가 깎아지른 바위 절벽과 짙푸른 바다와 한데 조화를 이루어 연출해 내는 멋은 운치를 더한다.
형제섬
형제섬은 산방산 밑 사계리 남쪽으로 5.5km 지점에 있는 무인도다. 산방산 중허리에서 망망대해를 내려다보면 그 바다 가운데 크고 작은 두 개의 섬인 형제도가 금방 눈에 띈다. 형제섬은 보는 방향이 바뀔 때마다 그 수와 모양이 달라지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계리 포구를 출발할 때는 두 개였던 섬이 셋으로 갈라지고 셋에서 다시 넷으로, 넷이 일곱, 여덟, 결국 열 개로 쪼개지는 모습이 신기한 섬이다.형제섬은 두 개의 섬이 주를 이루고 그 밖의 것은 모두 갯바위 아니면 썰물에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바위들이다. 형제섬에서는 감성돔, 뱅어돔이 많이 잡히며, 낚시 적기는 5 - 7월 사이다. 사계리 포구에서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비양도
한림읍 협재 해수욕장과 협재굴 그리고 한림항과 연결되어 독특한 경관을 이루는 비양도는 날아온 섬이라는 뜻의 작은 화산섬. 비양도가 이 곳에 멈춰 서게 된 흥미로운 전설도 감돈다. 섬 주위에는 80여종의 어종이 서식하고 각종 해조류가 자라나 수산자원이 풍부하다. 여름철에는 관광낚시터로 유명하다. 비양도에서 가 볼만한 곳으로는 섬 주변의 애기업은 돌을 비롯하여 6개의 봉우리로 된 비양봉과 2개의 분화구가 있다. 섬을 한 바퀴 도는데 1시간 30분이면 족하다. 섬에서 보는 한라산과 협재 해수욕장, 반대로 여름철 협재 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비양도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비양도(飛揚島) 이야기 한림읍 한림리 앞 바다에 비양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도 아주 옛날에 섬이 바다 위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한다. 이 비양도도 본래 대국(중국)쪽에서 조류에 뗘내려 한림읍 앞 바다에까지 와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때 임신한 해녀가 바다에 들어가 해초를 캐다가, 난데없이 큰 섬이 떠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해녀는 이상히 생각하여 이 섬에 올라가 잠시 쉬다가, 소변이 마려워 그 자리에서 그냥 소변을 보고 말았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떠 흐르는 섬이 그 자리에 딱 멈추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는 아무리 조류가 세어도 섬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이 섬이 바로 지금의 비양도라 한다. 비양도는 본래 육지(한국본토)에 있는 섬이었는데 지금의 자리에 떠내려 온 것이다. 이 섬이 본래 떠내려 올 때에는 애월읍 곽지리 앞에 와서 머물까 하여 한림읍 한림리 까지 떠내려 왔다. 이때, 임신한 여인이 큰 섬이 떠오는 것을 발견하고 '아, 저기 섬이 떠온다.'고 소리치며 손가락질을 하였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떠내려 오던 섬이 그만 그 자리에 멈추어 버렸다는 것이다.
추자도
한반도와 제주도 중간 지점에 위치한 추자도는 상, 하추자도, 추포도, 횡간도와 같은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군도로 관광지와 바다 낚시터로 유명하다. 겨울은 감성돔, 학꽁치, 봄에서 가을까지는 황돔, 흑돔, 농어가 많이 잡힌다. 추자도는 일본에까지 바다 낚시터로 알려져 많은 낚시인들이 찾는다. 또한 추자도는 예로부터 추자 12경으로 알려져 오는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추자도에는 곳곳에 민박이 많아 숙식에는 별 어려움이 없고, 제주항에서 데모크라시2호가 1일 1회 운항. 1:40분 정도 걸린다. 추자 면사무소로 문의하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 낚시 및 민박안내 : 추자면사무소 064-742-8400
우 도
우도는 마치 물소가 드러 누웠거나 머리를 내민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산포에서 북동쪽으로 3.5km 떨어진 섬으로 성산항에서 15분이면 갈 수 있다. 섬 남단 동어귀는 광대코지라 불리는데 안에 동굴이 있다. 이 동굴에 스며드는 햇빛이 암굴의 천장에 반사하여 둥근 달이 떠오르는 듯한 절경을 이루는데 이를 '달그리안' 또는 '주간 명월' 이라 하여 우도 8경 중의 첫번째로 꼽는다. 우도에 가면 꼭 이곳을 가보도록 한다. 달그리안을 보려면 작은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맑은 날 12시 전 후 햇살이 동굴 안으로 비춰 드는 때를 잘 맞추어야만 한다. 이 곳에는 우리 나라에서 유일한 산호 모래사장도 있다. 성산포항에서 하루 5 - 6회 반복하는 도항선을 타면15분 가량 걸리며 승용차를 싣고 들어갈 수도 있다. 면사무소나 어촌계로 문의하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가파도
가파도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바로 우리 나라가 처음으로 서양에 소개된 계기가 된 곳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1653년 가파도에 표류 했으리라 짐작되는 네덜란드 선박인 스펠웰호, 그 안에 타고 있었던 선장 헨드릭 하멜이 '화란선 제주도 난파기' 와 '조선국기'를 저술함으로 써 우리 나라가 처음으로 비교적 정확히 소개된 것이다. 가파도는 대정읍 모슬포에서 5.5km 떨어져 있는 섬으로 모슬포와 마라도의 중간 지점에 있다.
마라도
남제주군 대정읍 모슬포항에서 11km 떨어진 마라도는 우리 나라의 끝이자 시작인 곳이다. 섬에는 최남단을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해안을 따라 도는데 1시간 반이면 충분하다. 섬 가장자리의 가파른 절벽과 기암, 남대문이라 부르는 해식터널, 해식 동굴이 마라도의 손꼽는 경승지이다. 그리고 잠수 작업의 안녕을 비는 처녀당(또는 할망당)과 마라도 등대, 마라 분교도 한 번 둘러볼 만하다. 이 곳 주민들은 관광객이나 낚시꾼을 위해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경찰 마라출장소나 마라도 등대로 문의하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마라도 할망당(처녀당) 전설
아득한 옛날 마라도에 사람이 살기 이전에는 마라도 주변 해안에는 소라, 전복, 미역, 해삼 등의 해산물이 너무도 풍성하여 가파도는 물론, 모슬포에서도 해녀들이 이곳을 많이 드나들며 물질을 했다. 초겨울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모슬포에서 많은 해녀들이 여러 날 동안 물질을 할 계획으로 배에 식량을 잔뜩 싣고 마라도에 들어왔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거센 바람에 파도가 높이 일고 몹시 물살이 세어 물질이 어려운데다 식량마저 거의 떨어져 돌아갈 일이 큰 걱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잠을 자는데 한 해녀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 꿈의 내용인 즉, 이 섬을 떠날 때는 모두 떠나지 말고 애기업개 한 사람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해녀들이 올 때 애기업개인 업저지 처녀를 한 명 데리고 왔었다. 그 업저지를 섬에 두고 떠나야 배가 무사히 건널 수 있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배는 중도에서 파선되어 모두가 고기밥이 된다는 것이다. 꿈을 꾼 해녀는 사공과 여러 해녀들이 앉은자리에서 꿈 이야기를 하는데, 사공도 이와 똑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 여기며 모두들 의논한 끝에 이 업저지를 희생시키고 여러 사람을 구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다음날 날씨는 갑자기 좋아졌다. 어서 빨리 떠나야 한다고들 아우성 치며 사공과 해녀들이 바닷가로 몰려들어 배에 올라타 이제 막 떠날 준비를 하는데 저쪽 높은 바위 언덕에 하얀 헝겊 자락이 너풀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 해녀가 업저지에게 말했다. "얘 저기 달려가서 저 기저귀 가져오너라." 영문을 모르는 업저지는 기저귀를 향해 힘껏 뛰어가는데, 배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출발해 버렸다. 업저지가 기저귀를 들고 달려왔을 때 이미 배는 멀리 떠나가고 있었다. 해녀들이 배에서 뒤를 돌아보자 그 업저지는 계속 손을 흔들어대며 울부짖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살얼음 같은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날, 모슬포 해녀들이 다시 물질하러 마라도에 와 보니 업저지가 흐느끼며 울부짖던 그 자리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을 뿐,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해녀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희생당한 업저지 처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곧바로 「처녀당」을 짓고 1년에 한번씩 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이 처녀 본향당에서 빌면 어린아이들을 잘 보호해 주고 바다에서 작업할 때 불길한 재앙을 막아준다고 해서 길일을 택하여 일년에 서너 차례씩 정성을 드린다고 한다. 이것이 처녀당의 유래이다.
이어도(환상의 섬)
기쁨과 슬픔이 혼재하는 환상의 섬. '이어도'는 제주도 전설에 있어서 여인들만이 살고 있는 섬, 곧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섬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는 섬이다.
연날 조천이엔 헌 모실에 고동지란 소나이가 살아신디. 호루는 중국으로 국마진상을 가게 되어수다. 그 날따라 보롬 혼 점 어시 바당은 잔잔허영 고동지는 혼디 나간 배들이영 몰을 잔뜩 실엉 순풍에 돛을 달앙 조천포구 수진개를 떠나게 되었주 마씀. 경헌디 배가 수평선에 이르럼시난 갑자기 폭풍이 불언개마는, 배가 막 흔들리멍 표루허기 시작헌거라 마씀. 몇 날 며칠사 표류해신지 어렵사리 혼 섬에 도착허게 되어신디. 그제서야 고동지는 다른 사람덜은 몬딱 죽엉 혼자만 살아 남고, 도착헌 디가 '이어도'렌 헌 것도 알게 되어수다. '이어도'엔 헌디는 큰 태풍 때 괴기 잡으레 간 어부들이 물귀신이 되어부난 여자덜은 몬딱 과부가 되어분 섬이우다. 이 섬에 고동지가 도착허난 '이어도'의 과부들은 난리가 나수다. 과부들은 고동지안티 이 집에도 글라 저 집이도 글라 허멍 환영이 대단했던 거라. 고동지는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이 여자 저 여자 돌아다니멍 정을 나눈거라 마씀. 경허던 어느날 비가 좌락좌락 온 다음 처마 끝에 낙숫물이뚝뚝 떨어지는디 고동지는 갑자기 고향에 이신 각시영 부모 형제가 막 그리워진거라 마씀. 마침 구름사이로 달이 떠신디 반달인디도 경볼글 수가 어신거라 마씀. 고동지는 바당에 강 저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멍 각시이름을 열백번도 더 불러 보았주만 어떵헐거라 대답은 어시 파도만 찰랑거리는 디. 고동지는 파도가락에 따라 설운 모심 달래멍 구슬프게 노래를 불렀주 마씀. 강남가는 반짝쯤에 '이어도'가 이시난 자길 불러주렌헌 애절한 내용이라 마씀. 이어도 사럼덜은 이 고동지가 부르는 노랠 듣잰 꼬닥꼬닥 모다 들었고, 많은 여인네들이고동지의 처지를 동정허게 되었주 마씀. 그 사름덜 부른 노랜 파도에 실령 먼디까지 퍼지고 누구나가 몬딱 알게 되었주 마씀. 얼마 어성고동지는 뜻밖이도 중국상선을 만낭 그 도움으로 고향에 귀향허게 되는디, 이때 '이어도'의 한 여인이 고동질 따라 제주에 들어 오게 되수다. 고향에선 태풍으로 죽은 줄만 알았던 고동지가 살앙 돌아오난 잔치가 벌어지곡, 따라온 여인도 혼디 살게 되었주 마씀. 그때 '이어도'에서 고동지를 따라 온 이 여인네를 모실 사름덜은 '여돗할망(이어도 할머니)'이렌 부르당, 그 할망이 죽은 후젠 모실 당신으로 모시게 되었주 마씀. 지금 조천리에 이신 '장귀동산당'이 바로 그 당이우다. ( 진성기의 '제주도 전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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