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바다(萬海)에 어찌 구름용(龍雲)으로 날지 못하랴
만해축전 참가후기
-무념 2008.8.11-8.12
1.
만해마을 만해축전
불교문예주간 공광규시인의 초청장을 사전에 이메일로 받고 참석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다하였다.
불교와 문예 불교와 시
좀 통하는 것 같아서 내가 끼어도 될 듯해서 가려고 마음먹었다
이틀 휴가를 냈다.
금강카페 강독회날인데도 무릅쓰고 만해축전에 참석하기로 했다.
만해마을이 조성된지 10년만에 처음 방문하는 것이다
만해 한용운선사, 한용운시인, 독립투사 한용운, 독립운동가 한용운...
내가 감히 만해스님의 행사에 낄 수 있는가?
나는 이분을 생각하면서 만해마을 가기전에 붓을 잡고
오도송悟道頌 한구절을 단숨에 썼다.
인사동에서 산 합죽선(아니 모양만 합죽선이지 진짜 합죽선은 아니다. 제값을 주어야 합죽선인데 좀 부담스러워 싼 걸 샀다. 언제나 제대로 된 합죽선에 쓸지 모르겠다.)에
男兒到處是故鄕 대장부 남아 어느곳인들 다 고향이니
幾人長在客愁中 누가 긴 시름 젖어 있으리
一聲喝破大千界 한소리 대천세계를 울리니
雪裏桃花片片紅 눈꿍속에도 복숭나무꽃 성큼성큼 피어나네
남아도처시고향
기인장재객수중
일성갈파대천계
설리도화편편홍
이 오도송의 마지막 구절 ‘雪裏桃花片片紅’을 썼다
낙관도 찍어
인연있는 분을 만나면 드리려고 챙겼다.
마지막 구절은 만공스님의 제안으로 ‘飛비’에서 ‘紅홍’으로 수정했다고 전한다.
* 오도송은 만해스님이 설악산 오세암에서 수행정진할 때이니 39세때 1917년 12월3일에 읊었다.
8.11일 오후 2시 약속시간 5분전에 도착했다. 관광버스가 대기중이다. 탑골공원옆에 대기중인 버스를 탔다.
전건호님이 먼저 와서 자리잡고 있었다. 전에 광륜사 거사 지대방에서 몇 번 뵌 분이다. 인연이 있는지 인사동에서도 뵈고 오늘도 뵌다. 우편으로 못보낸 나의 시집을 드렸다.
그리고 공광규 주간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나이는 아래지만 시인등단년도는 훨씬 먼저 등단한 선배다. 그와 나는 기세춘선생님이 강의하신 묵자와 노자 장자를 공부할때의 동학同學이다.
불교문예동인들이 자리한 버스에서 간단히 인사말씀을 나누었다
“뜻깊은 귀한 자리에 함께 해서 영광이며 반갑습니다.좋은 시간 되시길 빕니다...”
오늘 이 하루의 시간으로 기억에 남아 가슴에 다가가기가 어려우리라고 본다.
준비위원 한분이 떡 한쪽과 물 한병을 주신다.
양평을 지나 달려 인제 만해마을에 도착하였다. 찐 무더위가 어느새 소나기도 내리고 날씨는 오락가락했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저녁공양을 했다. 이후 자유시간. 처음 온 방문자에게 자유 방목은 망연하기도 하다. 찻간에서 알아본 이는 어디론가 가고 믿고 왔던 공주간도 주관자라 말 붙일 새도 없다. 이럴거면 미리 지인 도반과 함께 왔다면 좋을 것이다. 시집도 8권이나 가져왔는데 아무도 줄 수 없을 것 같다.
숙소앞에 걸어놓은 프랑카드(펼침막)가 좀 의아스럽다. 어울림! 안팎이 다 잘 조화롭게 어울림! 얼마나 감동적인가! 그러나
2008 만해축전
2008.8.11~14
주최 강원도,인제군,조선일보,만해사상실천회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신흥사, 낙산사
제작의 실수인지 어찌 조선일보가 만해사상과 얼마나 어울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실망스럽다. 많은 언론 중에 하필이면 그 신문인지 일제에 한치의 타협도 거부한 만해스님의 정신을 되새길 때 천황경하天皇慶賀에 열을 올렸던 그 신문은 분명 만해축전에 걸맞지 않는 것 같다.불청객이 서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일은 적막을 용납하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정신적인 동반이라기보다 협찬과 스폰서 경제적 지원과 밀접한 듯하다. 만해스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를 용납할까?
대범종 만해평화지종, 대법고, 만해사 연등, 서원보전을 보며 지난다.
세미나실 주위에는 여러 문인들이 일일이 축하 메시지를 붓으로 써 액자에 담아 걸어두었다.
해가 지고 아둑해지는 길 뿌옇게 산모룽이에 걸린 달을 보면서 잠시 걸어보았다. 인제계곡수가 맑게 흐르고 있다.
문득 어느분의 비슷한 책 제목이 생각났다.
“혼자만 잘살믄 무신 재민겨”
좋은 곳에는 동지들, 도반들이 함께 있어야 하리라.
상가까지 가서 돌아오니 춤사위에 이어 만해상수상식이 열리고 있었다. 관중석 어느 한켠에 앉았다.
만해상 특별상 수상자 고은시인의 진중한 말씀을 듣고
이어 ‘유심‘지 등단 신인작가 수상작가들에 대한 시상식도 있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화환 두 개가 보인다. 이엠비인의 이름이 적힌 적힌 화환이 연단 아래 양쪽에 놓여있다. 문단과 예단 그리고 종교계의 그것은 하나도 없고 두 개나 있으니 관심이 지나친 것 같다. 이어 락밴드, 노래가 이어지고 있었다.
1999년 처음 만해축전이 시작된 이래 10년이 되었는데 나는 오늘 처음이니 무심한 자신을 반성한다.
이때 돌아보다가 아는분을 어렴풋이 보다가 다가가 인사했다.
분명하다. 이필립李筆立선생! 나는 잊지 않았다.
17년전 거리에서 함께 걸었다. 민주언론을 키우고자하는 열망을 드날렸다. 언론개혁의 열정을 나누었다. 당시 언론지키기천주교모임대표였다.
“안녕하세요 이필립선생님!”
많은 참석자중에서 아는 분을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그것도 동지를 만나니 더하다. 60대후반인데도 아직도 청춘의 의기가 여전하시다. 만해사萬海寺 앞 계단에 앉았다.
17년전 나섰던 거리와 광장에 다시 나서고 있는 선생에게 나는
만해 오도송 일구를 담은 합죽선을 선뜻 드렸다.
“ 내가 받아도 되는 거요. 김시인 고맙소! ”
일기가 부조不調한 날씨같이 정정政情과 민생民生은 언제 벼락 천둥을 만날지 모르는 시국에서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 소용돌이 선봉에서 선생은 서 있었다.
이선생님을 통하여 거리에서 수행과 보살행을 실천하는 한 스님 무송(무소의 뿔 노래)스님도 인사 소개받고, 작지만 강단있는 여성 묘련화보살을 소개받게 되었다. 스님은 마산이 고향이며 나이는 나와 동갑이었다. 묘련화보살은 함안출생 이대 83학번. 나이들어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변호사가 되어 세상에 도움이 되고자한다고 했다. 5공의 잔혹한 시절 학구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대학시절을 보냈음을 안다. 세분들은 다 광화문촛불대학 개근생이었다. 카메라도 빼앗기기도 하고 몸부림쳐 내동이쳐지기도 했음을, 광화문경찰서로 감금되기도 했음을 토로했다.
이내 오래전에 같이 지냈던 것처럼 같이 다니는 4인방이 되었다.
여러 프로그램이 진행되다가 오늘의 마지막 행사인 시낭송회가 진행되고 있어서 동참하였다. 무송스님께서 문뜩 나의 시낭송을 주선하겠다고 권하는 것이다. 주최측을 잘 안다고 마련해보겠다고 했다. 미리 낭송시인은 자기 시를 pc화면에 담아 시연하고 낭송을 같이 하고 있었다. 나는 불시에 끼게 된 것이다.
듬성듬성 자리에 남아 있는 분들 앞에서 나는 아버님을 그린 ‘월명암 가는길’을 낭송했다.
마치고 나오니 몇분들의 환호를 들었다. 4인방이 주막 잔치마당에 잠시 앉았다. 막걸리 한병을 사서 한잔 나누었다. 과거와 달라진 나를 이해하시고 이선생님은 내가 따라드리는 술을 잘 마셨다.
밤이 깊도록 자리에서 일어설 줄 몰랐다. 새벽 2시 넘어 잠시 눈을 붙였다.
2.
새벽 4시에 일어났다. 509호 숙소 너른 방에 15-6명이 잠들어 있다. 코를 크게 고는 분 옆에서 일어나 보리방편문 암독을 한다. 66독을 하고나서 어제 마음 먹은 대로 만해사로 가서 예불을 드렸다. 석불좌상을 모신 부처님 전에 향을 피워 올리고 예불, 천수경을 독송하고 예불집을 독송하며 늘 하던 대로 숙제를 마쳤다. 청화큰스님 발원문과 연지대사 극락왕생발원문을 독송하고 광명진언 108독, 영가현각대사의 증도가, 승찬대사의 신심명, 아미타불 염불 2440념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뿌듯이 마치고 나왔다.
7시 30분이다. 아침공양시간 8시전이다.
세미나관 입구에 pc가 2대가 있었다. 줄서서 잠시 기다리다가 자리를 잡아 금강카페를 조회하고 천일기도 수행일기, 사경1편을 올렸다. 아침공양전 짬을 이용했다.
문득 떠올린 구절 “만해 장파” 참가자 축하의 메시지북에 붓을 들어 썼다.
한자식으로 세로로.
無 長 萬
念 波 海
만바다(온바다)에 긴 파도가 이는구나!
만해선사의 대해에 장구한 파동이 이는구나!
무송스님과 묘련화보살과 아침공양을 같이 했다. 노익장을 과시하던 68세의 이필립선생은 젊은 문학인 몇몇과 밤을 새다가 늦잠에 들었다. 주무시도록 깨우지 않았다.
묘련화보살과 잠시 불교의 현실과 불자의 현실 그리고 바램등을 공감했다.
‘어찌든지 불자들이 수행을 잘하여 널리널리 향내를 전하자’
10시에 ‘불교설화와 현대문학’이란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잠시 경청하다가 나왔다.
만해사 앞에서 다공양하는 보살들이 계셨다.
130가지풀을 넣어 만든 130초차,
연꽃차,
말차,
감사히 마셨다.
이필립선생님과 무송스님이 어제부터 말씀하시던 효림曉林스님을 뵙게 되었다. 무송스님이 소개를 드렸다. 10년전에 보광사에 뵌적이 있다. 연꽃차를 같이 마셨다. 효림스님께 시집을 드렸다. (옆자리에 있는 유종순시인에게도 같이 드렸다)
받자마자 “그의 눈길 좋네” 하신다. 한시집 귀향여로를 보실 때 금강카페를 잠시 소개드렸다.
“저희 카페회원들은 청화큰스님 제자, 청화큰스님법을 따르며 공부하는 도반들입니다“
“아, 그래요. 청화큰스님!”하며 놀라셨다.
“청화큰스님! 근래 8.15해방후 그런 도인스님은 없습니다”
며 서슴없이 말씀하셨다.
“불법을 원통불법으로 회통하는 법문집을 내셨어요, 공부인들은 그 책만 잘 공부해도 좋을 겁니다”
“참선이면 참선 염불이면 염불 두루 회통하고 계신 분이었어요. 저도 청화스님을 몇 번 뵈었는데 너무 겸손하시고...뵙기만 해도 감화를 받고 그랬던 도인스님이었어요”
잘 모르신다면서 금타대화상님,수릉엄삼매도에 대한 말씀도 하셨다.
“스님 나의 행자시절을 쓴 박원자 작가님도 카페 도반입니다”
“ 아 그래요”
‘나의 행자시절3권’을 보면 스님은 초등학교 때 사명대사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고 사명대사처럼 대도인이 되리라고 다짐한 후 중학교때 친구가 절에 놀라가자고 해서 머물다가 출가하셨다고 한다. 수행과 실천을 함께 하시는 ‘실천불교승가회’를 이끄신 분이다. 성남 봉곡사에 계신다고 한다.
이번 만해축전행사에 총 집행위원장을 맡아 바쁜 중에 잠시 차담을 나눈 것이다. 감사한 시간이었다.
점심공양을 국수로 들고 백담사에 참배하기로 했다. 가기 전에 무송스님으로부터 또 한분의 스님을 소개받고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봉문蓬門’스님이시다. 묘하게도 연배가 같다. 동안童顔이시다. 스님께도 내 시집을 두권 드렸다. 무술생 두분의 수행자와 한 거사!가 만났다.
“거사님 저의 절(내마음의 절)에 꼭 오세요”
봉문스님은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셨다. 늦게사 깬 이선생님 점심 드시게 하고 우리 셋은 백담사로 가기로 했다. 비가 한참 내리고 있다.
3.
백개의 못을 지나야 다다르는 백담사!
굽이 굽이 아름다운 계곡안에 자리한 백담사.
1879년 홍성에서 태어난 만해스님은 27세에 여기 백담사에 출가하셨다. 1905년이다.
극락보전에 참배드리고 묘련화보살과 만해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전에 한번 지났으나 오늘은 좀더 여유를 가지고 살펴보았다.
만해스님은 필체가 고졸한 듯하다.
1910년 일제의 조선 병탄이 되는 암울한 시기에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펴내어 불교개혁을 주장하였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 아니다 송장? 아니다. 삼십일 본산 주지 바로 네놈들이다”고 했다.
오늘의 불교상황에서 비추어 보면 얼마나 나아졌는가?
1918년 잡지 ‘唯心유심’을 창간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1919년 3월1일 3.1절 민족대표33인에 합류하여 독립선언서 행동강령 ‘공약3장’을 추가한다
일제에 의한 교육에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교육을 발원하며 1923년에 민립대학 설립을 주도하며 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한다
대표작 ‘님의 침묵’은 불교 십현담 주해를 펴낸 1926년이었다
십현담은 동안상찰同安常察스님이 저서다. 잘 알려진 구절이 있다.
‘無心猶隔一重關무심유격일중관: 무심이라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이 막혀 있다’
.........還鄕曲調如何唱환향곡조여하창 : 귀향의 노래를 무어라고 부를까?‘
‘연꽃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만해스님의 시 알 수 없어요’
두두물물 산하대지 삼라만상을 찬탄하는 선사의 시다.
오늘의 상황에서 만해스님을 그리는 만해축전에 즈음하여 만해정신의 물결이 많은 분들에게 다가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만해선사 약력을 보면 불굴의 치열한 구도자로서 혁명가로서 민족자주 독립투사로 살았다.
파사현정의 기치를 높이 들고 어둠과 미망을 물리치려고 온몸을 던졌다.
1919년 조선의 자주독립선언을 세계만방에 천명했던 역사를 어찌 잊을 것인가?
공화국의 창립이 된 1919년을 잊으려하는 어리석은 이들의 무도함을 보면서 건국과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만해스님은 조선총독부가 바라보이는 남향집을 거부하고 북향의 심우장을 지어 민족혼을 굽히지 않고 지내시다 광복을 눈앞에 두고 한해전에(1944년) 입적하셨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 마지막에 첨가한 만해스님의 ‘공약3장’은 민족지사적 견결함과 수행자적 자비무애함을 느낄 수 있다
89년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빛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금일 오인의 차거는 정의,인도,생존,존영을 위한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주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逸走하지말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안과 밖이 여일한 지침이다. 오늘의 퇴보적이고 민족 생존과 존영을 저해하는 무지한 행동에 대하여 바른 가르침으로 반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내 바로 나아가야 한다.
정당한 의사표시와 거리낌없는 광명정대함!
여기에 우리의 역사의 발전과 후퇴의 기준이 된다. 나라를 이끌겠다는 이들이나 어느 단체나 조직을 앞장서는 이들이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자세!
만해축전 도중에 돌아와서 만해스님의 글과 행적을 살피면서 늘 현현하는 만해를 그려본다. 역류하는 세류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공영방송의 사장이 영장도 없이 이 만해스님의 축전기간에 체포되고, 언론의 바른 역할을 주장하고 시민의 알권리를 알리고 실천하는 단체의 장이 영장없이 체포 구금되는 무도한 일들이 만해스님의 축전기간(8.11~8.14)에 벌어졌다.
그러나
눈꿍에도 도화행화 그득 펴서 흐벅진 나날이 되리라
설리도화편편홍雪裏桃花片片紅!이나니
슬퍼마라! 방심마라! 바로 나아가라!
허물을 죄다 드러내어 볕에 말리어 다시는 미망에 빠지지 않고 바른 길로만 나아가게 하소서!
만바다에 어찌 구름용으로 날지 못하랴!
자타일시 성불도!
온누리에 가득한 광명은 이미 돌아왔나니!!
2008.8.14
무념 _()_
시낭송
묘련화보살,무송스님과
감사드립니다. 아미타불!_()_
늘 현현하시는 만해스님. 감사합니다 무념거사님, 아미타불 _()_
감사드립니다. 상행불행! 아미타불!_()_
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
항상 감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___
늘 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
무념거사님 공덕으로 밝아지는 마음입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밝아집니다. 무량광여래불아미타불!_()_
금강까페와 함께 밝아 집니다. 신심 발심하여 정진할 마음 가득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함께 정진해갑니다. 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