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허생전(許生傳)
[페이지] F01
극단 思潮(사조) 제19회 공연
창단10주년기념 공연
許生傳 (허생전)
오영진/작
김효경/연출
스타라인/기획
/음악
/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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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第一話) 다방골. 進仕(진사)
[곳] 서울 다방골 진사 卞承業(변승업) 댁 후원
[때] 서기 一六五0년대를 바라보는 어느날, 늦은 봄.
[사람] (등장순)
억쇠
상노一
상인甲(갑)
상인乙(을)
卞承業(변승업)
기생一(일)
기생二(이)
삼청동대감
상노들
許生員(허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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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막이 오르기 전부터 풍악 소리 유량하게 들린다. 무대 중앙에는 아담한 정자.
左下手(좌하수)에는 사랑으로 통하는 일각문이 있고, 左下手(좌하수)에도 작은 문이 있어 안채로
통한다. 후경은 돌담으로 둘렸고, 담너머로 수목이 우거졌다. 나무사이로 안채 기와지붕이
은현하다. 右下手(우하수)에는 해묵은 은행나무 한 그루. 막이 오르면, 억쇠와 상노1이 은행나무
밑에 멍석을 깔고, 권커니 자커니.
[해설] 때는 바야흐로 십칠세기 중엽. 이 나라가 병자호란으로 만주 오랑케에게 패하여
남한산성 三田渡(삼전도)에서 城下(성하)의 盟(맹)을 맺어 청국에 항복한 이후 어언 십여년이
지났다. 볼모로 만주땅 藩陽(번양)으로 끌려가서 팔년동안이나 고생살이를 하시던 왕자
鳳林大君(봉림대군)도 그립던 한양성으로 무사히 돌아와, 선왕의 뒤를 이어 등극하시니 이분이 곧
孝宗(효종)이시다. 임금께서는 西人(서인)을 중히 등용하여, 그 영수로서 영의정을 삼으니, 이로
인하여 사분오열되었던 서인의 모든 붕당은 일단 함께 뭉쳐서, 잠시나마 정국은 안정된
듯싶었으나 이로 인하여 權座(권좌)에서 물러난 南人(남인)의 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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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말씀이 아니었고, 그보다도 임진. 병장의 두 큰 난리를 겪고난 훗덧침에, 설상가상으로 몇차례
천재를 겪는데다가 벼슬아치와 양반 토호들의 행패와 착취에 시달린 백성의 살림은 그 야말로
도탄에 허덕이고, 따라서 민심조차 흉흉하여 팔도강산 가는 곳마다 조용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권력있는 양반들은 물론, 그들과 결탁한 부유한 장사치들만은 金樽美酒
玉盤佳肴(금준미주옥반가효)로 홀로 태평성대의 별유천지를 구가하고 있었으니. 이댁 다방골 갑부
卞承業(변승업)의 집에서도 때아닌 풍악 소리가 유량하구나
풍악 소리 계속된다. 이윽고 상인 甲(갑) 과 乙(을)이 좌하수 일각문으로 등장, 무대 중앙에서
정면을 향하여 서서 수작을 주고 받는다.
[갑] 귀신이 곡헐 노릇이지, 도시 이게 어떻게 돼먹은 심판이어, 응? 동갑, 이집 쥔놈은 지금쯤
포동청에 묶여서 죽지 않을 정도루 늑진 곤장이나 맞구 있어야 얘기의 앞뒤가 맞는 게 아냐?
[을] 누가 아니래?
[갑] 아니, 동갑! 일은 누가 저질러놓구설랑 아까부텀 [누가 아니래]만 되풀이험 어떻허지?
[을] 왜! 나만 잘못이야? 동갑두---
[갑] 쉬! 저기 상노놈들이 듣구 있네. 우리끼리 왁자지껄 시빌 가릴 때가 아냐.
[을] 그렇지, 참. 억쇠야, 너 안에 가서 술상이나 좀 정갈히 봐오련?
[억쇠] 예. (상노1과 함께 좌상수, 안채로 퇴장)
[갑] 동갑. 자초지종 다시 한번 찬찬히 얘길 좀 해보시지? 그래 무슨 仙官(선관)의 조화가
있어서 이집 변가놈이 백방되어 나왔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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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옥에 갇힌 몸이 무슨 재주루 가봇쪽 같은 진사 감툰 떼냈느냐말일세. 이제 변가놈은
양반이야, 엉? 우리완 지체가 다르단말일세. [저놈들 잡아 대령하라]험, 꼼짝 못허구 당허야 헐
우리 처지란말야, 이 맹추야!
[을] 누가 아니래. 모든게 뒷줄인걸 뭐.
[갑] 뒷줄이 있으리란 생각두 않구, 그래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을] 내야 뒷줄이래야 기껏 포도청에 인정이나 써서 곤장 몇대 감헐 정도루 생각했지. 누가 그
뒷줄이 저 은행나무 줄기처럼 우악스러울 줄이야 꿈에나 생각했어?
[갑]도대체 그 뒷줄이 누군데?
[을] 놀라지 마. (귓속말)
[갑] 뭐? 사직골 대감?
[을] (끄덕)
[갑] 어이구, 하느님 맙소사! 사직골 대감이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정승댁? 이거 달걀루
백운대 치기였네그려?
[을] 자다가 벼락맞기지.
[갑] 아뿔사! 요 맹추야, 우리가 꽂아 넣었단 사실이 당장 들창이나겠구먼?
[을] (대들며) 들창이 나두 뻐젓허다구 배짱을 부린 건 누군데? 증거가 있으니 걱정없다구 누가
말했어? 누가? 변가놈이 은십만냥을 만주루 실어보내구 나라에서 금허는 약재랑 비단일랑
들여왔으니 이제 곧 국법에 어긋나는 밀무역이라 허잖았어? 누가 그랬어, 누가? 응? 자네가
그랬지.
[갑] 헛! 그러나 바루 그 약재니 비단이 사직골 대감댁 안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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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숙이 들어갈 줄야 꿈에나 생각했나? 일템, 때아닌 세찬이며 상납으루 둔갑을 했으니.
대감댁에선들 입을 씻구 변가놈의 곤경을 보구만 있을리 없지.
[을] 딴은! 그러구보니 대궐에서 불러들인 것두 대감이 주선이었구먼?
[갑] 뭐, 대궐에서 불러들여? 그 얘긴 금시초문인데? 그래서, 대궐에서 어떤 일이 있었나?
[을] 그걸 누가 아누?
[갑] 흠! 이거 큰코다쳤군.
[을] 내가 저 실학인가 뭔가 헌다는 선비놈들의 글귀를 살짝 따서 들여뜨렸거든. 일테면
투서지. 글귀가 뭐였드라? 옳지! [천년묵어두 변치 않는 은덩어릴 실어다주구 한두 해면 알아보는
비단이나 약재를 사온다니, 이야말루 국법을 범하는 역적이 아니오니까?]이랬것다. 동갑두
변가놈을 운종가 바닥에서 몰아내는 길룬 이 방법밖에 없다잖았어?
[갑] 옳아요. 잘했어, 썩 잘했어!
[을] 그래두 아까 사랑에서 우리헌테 술을 권허는 품이 아주 캄캄 무소식이던데?
[갑] 엉큼허거든---내색을 않는 거야. 그러나저러나 이제부턴 동갑이나 내나 물 밖에 난
고길쎄.
[을] 물 밖에 난 고기? 왜?
[갑] 변가놈이 아무리 밉지만 비싼 이문을 주구라두, 그놈의 돈을 돌려쓰기 전에야 꼼짝달싹 헐
수 없잖아?---장삿길이 막혔단말일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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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참, 그렇군. 장삿길이 막혔구먼.
[갑] 돈을 돌리기는커녕 당장이라구 꾸어간 돈 물어놓람 어떡하지? 난 일조에 패가망신일쎄.
[을] 누가 아니래?
[갑] 그보다두 투서 종이가 나타나는 날엔 우리 어떡허지.
[을] 이 은행나문 정정두 허다아. 乙(을,) 은행나무 밑으로 가서 밑등을 어루만지고는 다시
우악스러운 가지에 매달려 떼를 쓴다.
[을] 영감. 내 죌 내가 모르겠소? 영가암, 마지막 가는 길에 이 은행나무 좀 빌립시다.
[갑] 동갑 생각이 그렇담, 어서 올라가서 시험해보게나. 가지가 부러지는 날엔 목불일견일쎄.
[을] 암, 동갑 먼저 올라가소.
[갑] 이사람아, 가두 함게 가구 남아두 함께 남어야지. 어서 오르게 뒤따라 갈테니.
[을] 내가 먼저 가? 乙(을), 울쌍이 되어 나무에 기어으르려고 할 때, 좌상수 일각문으로
기생에게 주안상을 들려가지고, 변승업 도폿자락을 너풀거리며 등장. 乙(을), 나무에서 떨어진다.
[변] (정자에 오르며) 아니, 여보게들. 아까부터 보이질 않는다 했더니만, 애들처럼 뒤뜰에서
나무잽인가?
[갑] 아, 아니올시다. 은행이 하두 먹음직허길래---
[변] 어느새 은행이 열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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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아, 아니올시다. 나무가 하두 정정하길래 올라가서 바람이나 좀 쏘인다는 게 헤헤헤. 진사
나으리.
[변] 헛, 헛, 헛, 진사 나으리? 벼락감투 썼다구 자네들꺼정 이렇게 서먹서먹하게 굴긴가?
[갑] 서먹서먹?
[변] 우린 뭐니뭐니해두 장사치야. 대대루 운종가에 나서 여기서 자라구 뼈가 굵은
장사치란말야. 장사친 장사치끼리 어울리는 거야. 어서 이리들 올아로게나.
[을](갑에게) 올라오란다.?
[뱐] 바깥 사랑에선 양반 나으리들 대접하노라 어디 술맛이 나야지. (기생에게) 얘야, 어서
손님들 이리 모셔올려라.
[기생] 예.
[을] (갑에게) 저 친구 소식불통이지?
[갑] (작은소리로) 엉큼허거든. 내색을 않는 거야.
[변] 헛! 운종가에서 날 몰아내서 무슨 덕을 본다구? 철따구니없는 것들이라니---그래 날
집어넣음 모든게 제것이 될 줄 알구?
[갑.을] (찔린다) 아무렴입쇼.
[변] 관쓴 불한당에게 좋은 일 해줄 뿐이지.
[갑.을] (쩔쩔맨다) 하늘보구 침뱉깁죠.
[변] 어서들 올라와, 내 술 한잔 받게나.
[갑.을] (캥긴다) 에?---네. (갑.을, 기생의 뒤를 따라 마루로 올라, 저만치 꿇어앉는다)
[변] 양반이 주는 술이니---헛, 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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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돌아앉아 마신다)
[변] 몸은 왜 비비꼬나? 바루 앉지 못허구?
[을] 헤, 헤, 헤. 자넨, 아니 영감은 이젠 양반이라---
[변] 뭐 말라죽은 게 양반인구? 빛좋은 개살구라네.
[갑] (도폿자락을 매만지며) 개살구두 이런걸 입나요?
[뱐] 양반이란 놈은 노상 저보담 한치라도 지체높은 놈의 눈칠 봐야 허는가 험, 때룬 우리네
장사치 앞에서두 아양을 떨어야 허는 따분한 족속인걸. 그뿐인감? 그래두 명색이 양반이니, 사람
앞에선 일거일동을 조심해야거든?
[갑.을] 그렇겠읍죠.
[변] 기침의 가래침일랑 지근지근 씹어넘겨야 허구.
[갑.을] 지근지근?
[변] 양반님네 의례준칙일쎄. 걸음걸인 느릿느릿, 신축은 딸딸 끌어야 헌다나.
[갑.을] 따알 딸?
[변] 손엔 돈을 지니지 말 것이며, 쌀값의 오르내림을 물어두 안되구.
[갑] 돈이 싫여?
[을] 쌀값두 몰라?
[뱐] 날씨가 무더워두 버선을 벗지 말 것이며, 또는 아무리 추워두 화롯전에 손을 쪼이지 말
것이며.
[갑.을] (끄덕)
[변] 볼이 오목 파이도록 담밸 빨아들여선 못쓴다네.
[갑.을] 허, 허,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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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막걸릴 마신 뒤엔 수염을 쭈욱, 빨지 말 것이며.
[갑] 그 준칙 어지간허군요?
[변] 그러나 그건 겉치레구, 알맹인 따루 있지. 양반보담 더 큰 이문 나는 장사두 또 없다던데?
(紅牌(홍패)를 꺼낸다) 이 홍패라는 게, 길이루 침, 두 자두 못되네만, 이게 바루 돈자루란 말일쎄.
끌어내서 쓰구 쓰구 또 써두 무궁무진헌 돈자루야.
[을] 흥부네 박타기 조활 부리는군?
[변] 깊숙한 안방에서 귀개루 기생이나 놀리다가 돈이 소용됨, 동네 부잘 잡아다가 [이놈, 네가
네 죄를!] 으, 흐, 흐, 흐.
[갑] 그런 신통력 있는 귀물을 어디서 구했수?
[변] 가던 날이 장날이었지.
[을] 장터에서두 파나요?
[뱐] 내가 들었던 감방에 쬐고만 고을 원님 하나가 잡혀 들어왔겠다---
[갑] 그야말루 관쓴 도둑이었구먼?
[뱐] 원, 천만에! 옥에 갇힌 벼슬아치야말루 벼슬아치중에선 청렴결백헌 축이지.
[갑.을] ?---
[변] 먹지를 못했으니 상납헐 돈이 어디서 나?
[갑] 하, 하? 그 양반 바보로군.
[뱐] 잡혀온 이 양반은 백성에게 꿔졌던 양곡조차 거워들이지 못한 무골호인니야.
[을] 거, 미물이로군.
[변] 그럭저럭 해를 포개구보니, 나라에 바칠 환자(還子)만두 천 섬이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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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라, 이말씸이야.
[갑] 개 팔아 두 냥 반두 못되는군.
[변] 그러던 어떤 날, 관찰사가 관곡의 출납을 검열허구보니, 천 섬 쌀이 축났더라 이말씸이야.
원님이지만 어쩌노? 밧줄을 칠 수 밖에. 양반놈들의 체모가 상호간에 말씸이 아니지.
[갑] 공연히 벌집을 건드렸구먼?
[변] 그래 이 사연을 듣구 운종가의 의협남아 변승업이 손을 꽂구 앉아 있을 수 있겠나?
[갑.을] 암!
[변] [이는 원님 한 사람의 불명예가 아니오라 사대부 전체에 관한 건이로소이다. 소인은 비록
운종가 장사치에 불과하오나, 반상의 질서가 문란해짐을 차마 좌시할 수 없사오니,
소인으로하여금 양곡 천 섬을 대신 환납케 하옵시요] 이랬겠다.
[을] 이문은 얼마루 허구?
[변] 이문을 따질 경운가? 이 소릴 듣고나서 이 선량허구 착허신 원님이 그냥 있을 수 있겠어?[
여보슈, 그럼 내 진사 당신이 가지슈. 난 백방되니 좋구, 당신은 양반되어 좋은 일 아뇨?]
[갑] 헤,헤. 누이 좋구 매부 좋구?
[변] 그래서---거간이나 구문 한푼 없이 옥중에서 거래가 성립된걸쎄.
[을] (홍패를 매만지며) 그래두 요까짓것 하나에 천 섬은 좀 비싸다. 어디 좀 싼 걸루 하나
없을까? 쉰 섬이나---기껏놔서 백---섬, 짜리---쯤?
[변] 여보게, 운종가에 그런 것, 두셋씩 있어 뭣에 쓰려나? 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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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허지.
[을] (갑에게 작은 소리로) 돌려가믄성 세놓아먹을려구? 흥!
[변] 문제는 홍패로 끝난 게 아닐세. 이 사연이 드디어 (엄숙히) 형조판서 대감으로해서
상감마마에게까지 알리게 되었으니---
[갑.을] 상감마마까지?
[변] 전교에 가로되, [군자로다, 부자여.]
[갑.을] [군자로다, 부자여?]
[변] [양반답고나, 부자요.]
[갑.을] [양반답고나, 부자요?]
[변] [곡식이 많되 아끼지 않음은 정의에 불탐이요, 남의 어려움에 용맹스럽게 돌봐줌은 어진
마음이요, 낮은 것을 미워하고 높은 자리를 그리워함은 슬기있는 일일지니---]
[을] [슬기있는?]
[변] [일일지니---이야말로 참된 양반이로다.]
[갑.을] [일일지니---양반이로다]
[변] (호령하듯) [빨리 입궐케 해라!]
[갑.을] 이크!
[갑] (을에게) 헛소문이 아니었구나?
[을] 여, 여, 영가암.
[변] 이런 사연으루해서, 내 앞길이 훤히 틔었단말일쎄. 알겠나? 삼정승 부러워말게. 벌써부터
서슬이 푸른 양반님네들이 우리 상놈을 뵙자구 집문턱이 닳을 지경이 아닌가?
[을] 우린 사농공상 주에서두 맨꼴진데?
[변] 꼴지가 꼭질 좀 부려닉음 어때? 헛, 헛. (갑.을, 완전히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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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사람에서 풍악 소리 높아지며 훤소)
[변] 저 소릴 좀 들어보게. 한 패가 떠나더니만 또 다른 한 패가 밀려드는가부네. (억쇠,
좌하수에서 황급히 등장, 정자 앞에 와서 아뢴다)
[억쇠] 마님, 왔어요. 왔---아니 오셨어요.
[변] 왔어? 헛, 헛, 왔겠지. 그리구 또 오겠지. 내가 온담 오는 거야. 사랑에서 좀 기다기시게
해라.
[어쇠] 기다리겝쇼?
[변] (갑.을에게) 내 말 알겠지? 운종가에선 진사 하남 충분허다는 걸? 자네들이랑 아예
허탕스럽게 돈쓸 생각 말게. 자네 돈이자 내 돈이구, 내 돈이자 운종가 돈 아닌가? 썩어 내다
버릴지언정 북촌에 갔다가 바칠 순 없잖어? 헛헛. 양반놈들이 돈을 쥐물락거리게 됨 이야말루
범에 날갤쎄.
[을] (갑에게 귀속막) 히, 히, 히. 우리일은 깜쩍같구나.
[어쇠] 영감마님.
[변] 오, 오냐. 기다리시게 해라 않더냐.
[억쇠] 그런게 아니와요. 이번에 오신 분은 양반 중에서 두 꼭지양반, 삼청동 대감이셔요.
[변] 뭐,삼청동 대감께서? 헛! 서인 남인이 번갈아 들구나는구나. 한땐 나는 새두 떨어뜨린다던
남인출신 원임대신일쎄.
[갑] 원임대신이 다방골 행찰 하셨어? 甲(갑).乙(을) 요지경 속이다.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허우적 거린다. 변승업, 점잖게 억쇠 뒤를 따라 좌하수로 퇴장. 甲(갑).乙(을), 뜰에서 맴돌다가
풍악 소리 커지니 엎치락뒤치락 은행나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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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 새둥지를 틀고 아래를 굽어본다. 변승업, 삼청동 대감을 응원하듯 다시 등장, 정자로
안내한다. 억쇠, 봉물짐을 걸머진 상노들을 인도하여 등장. 풍악 소리 차츰 잦는다.
[변] 누옥을 찾아 은밀한 말씀이 있으시다 하오니, 어찌된 소관이온지 황미하옵기
그지없사옵니다. 여기 후원이 그래두 좀 조용하옵지요.
[대감] 내가 어찌 영감이 백방됐단 소식을 듣구 그냥 집에 박혀 있을 수가 있으리요?
(상노들에게) 얘들아, 그거 어서 안으루 옮겨다가 실내마님께 보여드려라. 어디 이댁에서야 깊은
바다에서 산호를 따온들 눈에 차리오만, 헛, 헛.
[변] 이것들이 뭡니까?
[대감] 뭐, 대수롭지 않은거요. 변진사, 기특허지 않소? 내가 서인에게 몰려 낙척불우의 신세루
두문불출 칩거하는 몸이로되 그래두 옛 은의를 잊지 않음인지, 가끔 고을 토산물이나마 꿰어차구
찾아오는 수령 방백두 없지 않구려. 서인 천하에서 벼슬아치가 남인의 지붕 밑을 드나들다니---
[변] 대감마님의 은덕이야 어디 가겠읍니까.
[대감] 암! 다방골 변진사 대감이 그저 요즘에 와서 날 원두쟁이 쓴 오이 보듯 해서 좀 섭섭헐
따름이지, 허, 허, 허. 웃구 받아주시오.
[변] 원, 별 당찮은 말씀을. (변승업, 지그 눈짓, 억쇠 알아차리구 상노들을 좌상수 일각문으로인
도, 안채로 퇴장. 대감, 은행나무의 甲(갑).乙(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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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역시 부잣집이라 다르군. 영감댁엔 사람 열리는 나무두 있구려?
[변] (나무 쪽을 향하여 눈을 흘긴다)
[을] 저 은행을 따려구--- 아니, 마악 따가지구 물러가려던 참이올시다.
[대감] 헛! 내가 축객을 헐 수 있겠나? 이리를 올라오우.
[갑] 아니올시다, 소인네들은 하찮은 장사치올시다.
[대감] (위선적으로) 장사치가 어쨋단 말씀이오?
[을] (갑에게) [말씸이오]란다.
[대감] 오늘 같은 국가 존망지추에 상하귀천이 어딨으며 반상의 구별이 무슨 쓸데가 있소.엉?
다 함께 걱정해두 이 난국을 헤어나기 힘들겠거든.
[갑] (을과 [마임]으로 한창 의논한 끝에) 그러나 상인은 상인이올시다.
[을] 맨꼴지올시다.
[데김] 헛, 모르는 말씀.
[갑.을] (서로 보며) 또 [말씸]이란다?
[대감] 왕후장상이 어디 씨가 따루 있으며?
[갑.을] (울쌍이 되어) 소인넨 맨 밑바단이올시다. 대감마님.
[대감] 맨 꼭짐 제일인가? 빛좋은 개살구지.
[갑] (을에게) 변가놈 말과 같다.!
[을] 초탈했어.
[갑.을] 그러나 소인넨 쌍놈이올시다.
[대감] 그럴수록 우린 손을 잡아야지.
[갑] 손을 잡는다닙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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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소인네 손인갑쇼?
[대감] 임진왜란 이후 백성은---
[갑.을] 예, 그쯤은 알구 있읍죠.
[대감] 초근목피루 근근 연명허는데 우린 어째서 삼백예쉰날을 주지육림속에서---
[변] 죄송합니다.
[대감] 아, 아니, 때로는 그럴 수도 있지만서두---어, 어험! 그보다두 궁중에서는 간신배들이,
우으로는 상감을 둘러싸서 총명을 가리우구, 아래로는 오직 백성의 입을 막기에 힘을 쓰니,
이러구서두 나라의 앞날이 평온헐까?
[을] (갑에게) 어디서 듣던 말 같다.
[갑] (을에게) 남산골 샌님 닮았는데?
[대감] 어, 그런 불칙스런 실학파 놈과는 다르지. 자, 어서들 내려와서이리 올라오우.
[갑.을] (못믿겠다는 눈치)
[변] 대감마님 분부시니 어서들 내러오게나. (갑.을, 내려와서 네발 걸으므로 대청에 올라,
머리를 조아린다)
[대감] 남산골 샌님들 때문에 자네들 입장두 난처해졌지뭔가?
[갑.을] 지당하옵신 말씸.
[대감] 생각해보오. 그래 청국에서 약재니 비단 좀 들여왔기로서니 그게 어쨌단 말이오? 그래
장사허는 사람이 돈 좀 벌자는 것이 그토록 못마땅헌 것일까? 공연히 배가 아파서---
[갑.을] 심술이 나서 그러는겁죠.
[대감] 암! 그저 내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요놈만! (일동 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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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을 보니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안심)
[대감] 있으며언---어서 가까이들 오게나.
[을] (갑에게) 이번엔 [오게나]다? 갑.을 대감 앞까지 기어간다. 대감, 기생을 시켜 술을 권한다.
갑. 을 한숨에 들이켜고 당돌하게도 대감에게 잔을 돌린다.
[변] 여보게, 자네들 환장했나?
[갑.을] 어?
[변] 어느 안전이라구. 예의범절두 모르구 이렇듯 호탕헌가?
[대감] 변진사아. 마시구 노는 자리에선 상하를 가릴 것이 아니라구.
[변] 황공하옵니다. 그러나 대감마님께서 항상 소인네 상인배에게 너무 과분헌 염려를 해주셔서
가끔 이렇듯 버르장머리가 없어진답니다.
[대감] 흐, 흐. 변진사두. 내가 당신네들께 좀 기대려는 마당에 예이범절이 다 무슨 소용이오?
[변] 기대다닙쇼?
[대감] 헤, 헤, 헤. 다 들었어. 다 들었다니까.
[변] 예?
[대감] 엥이, 공연히 시치밀 떼느라구? 어젯밤에 입궐했었다지요, 영감?
[변] 아, 예.
[갑] (신이나서) 틀림없읍니다.
[을] 예! 우리 변진사 나으리가 입궐했읍죠.
[대감] 삼청동 골목까지 소문이 자자허단말요. (수연히) 우리 남인들이 묘당에서 물러난 지
이미 여러 해를 거듭했지만, 한번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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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눈 밖에 난 뒤에야 어디 용안을 뵈올 기회가 있어야말이지.
[변] 음지가 양지될 날두 있지 않겠읍니까?
[대감] 휴우! 그 소릴 믿구 이렇게 허송세월을 하구 있지 않소? 내 나이 머지않아 침순이오,
영감, 사람 좀 살리우. 영감 은혜는 내 결초보은하리다. 예? 영감, 신라 경혜왕 후손임 어떻구
문성 최씸 뭣하구, 원임대신은 어디다 써먹소? 그저 이놈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있어야지,
변진사. 이눔만 있음 권력이 생기구, 권력이 생김 이눔은 저절루 뒤따르기 마련이니, 이건 만고
불변의 법칙 아뇨? 여보, 변진사, 돈없는 양반이란 이빨 없는 호랑이요! 뒷줄 없는 상인이란
짝잃은 기러기라오. 영가암! 영감과 내 문벌 관록이 합치는 날엔 무서울 게 무엇이며, 못 헐짓이
뭣이겠소? 범에 날개 아니오?
[을] (갑에게) 그게 우환이랬어!
[대감] 그래, 상감마마께선 나랏일에 관해서 뭐 어떤 분부라두 계시옵디까요?
[변] 소인 같은 상인배를 상대로 정사를 의논하실 리가 있겠읍니까?
[대감] 어, 참 그렇겠군. 그래 옥체는 무양하시구?
[변] 안개에 싸인 깊은 성려야 소인이 감히 헤아릴 바 못되옵니다만---
[대감] 바로 정통이야! 문제는 그 안개야. 안개! 하루바삐 안갤 헤치시구 다시 우리 남인을
등용허셔야만 도탄에서 헤매는 억조창생두 건져낼 수 있단말야. 안 그렇소, 변진사?
[변] ---그렇겠읍죠.
[페이지] 020
[대감] 들으나마나지만, 내가 이렇듯 오랜 세월을 삼청동 막다른 골목에서 푸욱 썩구 있다는
사실을 보구 느낀대루 자상히 말씀드렸겠지?
[변] 아, 원, 어찌 소인이?---
[대감] 허어? 모처럼의 기휀데?
[변] 감히 얼굴을 들어 용안을 우러러뵈옵지두 못했읍니다.
[대감] 어허! 태조대왕 성업이 속절없이 무너지는구나!
[변] 상감께서는 삼청동 골목보다는 오히려 남산골이 퍽으나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이십니다.
[대감] 남산골? 아니, 저 실학파 샌님들?
[변] 예.
[대감] (분연히) 그러실테지! 나라 망하기를 한천에 비기다리듯 허는 녀석들!
가갑] (을에게) 비단을 마다 허는 친구들 아냐?
[을] (갑에게) 약재도 싫어하지.
[대감] 맞았어, 바루 그놈들이어. 상감께 해괴한 참소와 악담을 제멋대루 허는 방자스런
놈들이지. 변진사두 그 덕에?
[갑.을] (목을 움츠린다)
[변] 그러나, 상감께선 어느 모를 보구 허시는 말씀이온지 모르오나, 남산골 샌님들의 주장엔
도리에 맞는것도 없지 않다 하시옵니다.
[대감] 아니, 도리에 맞다니? 그놈들이 서인패보다두 더 악질이구 버릇없는 불한당인 줄
모르시구? 그래 그 소릴 듣구두 변진산 아뭇 소리 없이 어전을 물러나왔소?
[페이지] 021
[변] 소인이 어찌 감히?---
[대감] 어헛! 이거 태조대왕의 성업은 차처허구, 우리 남인은 앞문에 호랑이, 뒷문에 이리를
한꺼번에 만난 셈이로구나. 여보, 변진사, 당신은 일찌기 우리 남인 편이었소.
[변] 예. 소인네야 그저 장사나---
[대감] 지나친 공손을 비례라 했소이다. 변진사가 양반이 됐다구 갑자기 서인편에 설 순 없지
않소? 그 작자들이 뭐 쬐꼬만 고을 원님 하나라두 떼줄 성싶소?
[변] 소인은 본래 그런거 원치 않습네다.
[대감] 그럼 구구루 돈자랑이나 허다가 가는 장사치루 일생을 맞치겠단 말요? 변진사, 당신은
이제 떳떳이 반열에 참여했소. 그렇담, 모든 행동거지를 양반답게 가져야 헐 게 아뇨?
[을] 가래침이랑 지근지근?
[대감] 암! 진퇴 거취에 매듭이 있어야지.
[을] 신축을 딸딸 끌며?
[갑] (을에게) 쌀값두 묻지 말 것이며. (갑.을, 사이에 문답식 대화가 오간다)
[을] 돈을 지녀서두 아니되구.
[갑] 추워두?
[을] 곁불을 쪼이지 말 것이며.
[갑] 날씨가 무더워두?
[을] 버선을 버싶 말 것이며.
[갑] 담배 필 땐?
[을] 불이 오목 파이도록 빨지 말 것이며.
[페이지] 022
[갑] 막걸린?
[을] (대감에겐) 수염은 쭈욱 빨지 말아얍죠?
[대감] (변에게) 아니, 이 사람들. 의례준칙의 강의를 받는거요?
[변] 이 친구들두 어떻게 좀 반열에 끼어보려구---
[대감] 아, 그래요? 그야 누워서 떡먹기죠. 남인의 문흔 항상 널리 개방되어 있으니까.
[변] 그런데 이 친구들은 좀 싼 걸루 고루구 있답니다.
[대감] 얼마짜릴?
[을] (대감의 눈치를 보며) 그저, 쉰 섬이나 예순? 하옇튼 젤 싼 걸루.
[갑] 최고로 놓아서 백 섬?
[대감]예끼, 고오연 사람들 같으니라구!
[갑.을] (쥐구멍을 찾는다)
[대감] 남인의 시세가 제아무리 땅에 떨어졌기로서니!
[갑] (다급해서) 좋아요. 그럼 올립시다 올려요. 올림 되잖어요? (갑과 을, 손짓을 해가며 경매
부르듯)
[갑] 백에 열!
[을] 백에 스물!
[갑] 서른!
[을] 마아흔!
[대감] (동하지 않는다)
[갑.을] 올렸다! 쉰?
[대감] --- 그럼 합쳐서 삼백이 되나?
[갑.을] (마주보며) 삼백?
[페이지] 023
[대감] 원님감툴 책임 안진다는 조건이람? --- 그건 내 소관사가 아니니까.
[갑] (을과 구수회의) 그대신 홍팬 두 개?
[대감] 두 개애? --- 그거야 너무 싸지.
[갑] 해. 헤. 헤. 그럼 얼마 ? 싸움은 말리구 흥정은 붙이랬으니.
[대감] (기생에게) 너희들, 잠시 물러가 있거라.
[기생1.2] 예.
[대감] 이런 흥정은 쥐두새두 모르게.
[갑.을] 암! 은밀한 가운데서. (기생1.2, 안채로 나가자. 사랑채에서 훤소)
[대감] 아니, 벌써 밖으로 샜나?
[억쇠] (밖에서) 글쎄 이러실 게 아니라니깝쇼.
[상노1] (밖에서) 이런 양반 첨봤단 말이란말입쇼!
[억쇠] (밖에서) 사랑방에서 기다려요! 안돼요, 안돼!
[변] 허? 또 양반 한분이 찾아오신 게로군?
혼성 커지며, 이윽고 五(오)척 短驅(단구)의 명태같이 빼빼 마른 젊은이가 등장. 상노1과 억쇠,
뒤따라 등장. 젊은이를 끌어내려고 한다.
[억쇠] 글쎄, 쥔마님은 지금 바쁘시다니깝쇼.
[상노1] 나가란 말이란말입쇼!
[변] 얘들아, 시끄럽다. 그 뉘시냐? 변승업, 의젓이 굽어본다. 망가진 갓에, 낡아떨어진
두루마기에 나막신을 신은 젊은이, 허생원이다. 대감, 허의 꼴을 보고 피식 웃고 돌아 앉는다.
[페이지] 024
[허] (억쇠에게) 저분이 바로 쥔영감이냐?
[변] (굳어진다) 내가 귀요. 댁은 뉘시요?
[억쇠] 남산골서 오셨다는뎁쇼, 마님.
[갑.을] (펄쩍 뛰며) 남산골?
[허] 그렇소. 묵정동에 사는 이름없는 생원으로 성은 허가라 하오.
[대감] (경멸하듯) 성은 허가라 하오?
[갑.을] 드디어 나타났다!
[변] (이상한 느낌에서) 너희들은 물러가 있거라. 억쇠, 상노1과 함께 사랑채로 나간다. 대감,
슬며시 돌아보다가, 허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홱 돌아앉는다. 허, 성큼 마루에 올라 변과 대좌.
무언의 침묵.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어리벙벙한 변진사.
[허] (주안상을 보며) 金樽美酒(금준미주)에 玉盤佳肴(옥반가효)라. 아, 콩나물이 있구나.
[을] (갑에게 귀속말) 아, 아, 암행어사 아냐?
[갑] 흐흠? 얘기책엔 그랬지. (허, 콩나물 무친 것을 입에 넣는다.)
[허] 역시 대갓집 솜씨라.---
[변] 여, 여기---신, 신설로---쇠고기 조리개에 산적---보, 보, 봇쌈에 노, 노, 노루 전골두
있소. (허, 콩나물을 젓가락에 똘똘말아, 변진사 입에 넣어준다. 말없이 입을 딱 벌리고 받아먹는
변진사)
[허] 맛이 괜찮죠?
[변] 예? 예---(허생원, 술을 따라 마신다)
[을] (갑에게) 얘기책 그대루야.
[허] 사흘을 굶구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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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무릎을 치고, 바로앉으며) 그럼 그럴테지! 남산골 샌님들인들 별 수 있겠나? 사흘 굶어
도둑---(그순간, 콩나물 젓가락이 대감의 입으로. 대감, 얼빠진양 받아먹는다)
[허] (대감에게)?---
[대감] (끄덕)
[변] 휴우, 결국 두운?
[허] (끄덕) 아, 고사리 나물!
[변] 그런 일이람, 김서방을 만나볼 것이지---얘, 억쇠야.
[억쇠] (등장) 예, 마님.
[을] (갑에게) 끝장이 싱겁군.
[변] 너, 이 어른 사랑으루 모시구 가서---
[억쇠] 김서방은 안만난다는 걸입쇼.
[허] (연상 먹으며 끄덕)
[갑] (대신 나선다) 그래, 얼맛 돈이 필요허단말요?
[허] (나물먹고, 물마시고)
[을] 한 냥?
[허] (술마시고, 나물먹고)
[갑] 두 냥?
[허] (마시고)
[을] 닷 냥?
[허] (먹는다)
[갑] 뚝배기 봐선 된장맛이 좋다더니만. 흥! 몸뚱아리치군 담이 크구먼?---열 냥?
[허] (변진사를 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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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왜, 왜 날 봐?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침묵)
[변] 배, 백 냥?
[허] ---
[변] 이백 냥?
[허] 그런 푼돈이 아니외다.
[변] 오백 냥? --- 천, 천 냥?
[허] 만 냥. (갑.을 뒤로 나가자빠진다)
[갑.을] 미쳤다!
[대감] (동감이다)
[허] 너무 작은 돈이오니이까?
[변] 만 냥이람, 운종가 돈궤를 몽땅 털어두 모자랄 거금이오.
[허] 당장이 아니외다.
[변] ?---
[허] 이달 그믐까지. 안성 과일 도가 강선달 앞으루 환을 놓아주시오.
[변] 강선달 앞으루요?
[허] 그렇소, 그리 알구 나는 가오. 고맙소이다. (허생원, 나막신을 딸딸 끌며 좌하수로 퇴장.
변진사도 몽유병자처럼 뒤따라 퇴장)
[갑.을] 여보게, 어딜 가나?
[대감] 벼, 변진사!
[을] 자네가 미쳤지---
[갑] 이름 석자두 모르는 실성한 놈을 언제 봤다구. (머리를 깨우둥. 을에게) 어떤 편이 미쳤지?
[울] 저, 궁끼가 쬐르르 낀 샌님이지. 아, 아냐, 우리 변진사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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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역시 샌님이야.
[갑] 아냐. 미친놈을 상대허는 놈이 미친놈이야.
[을] 거지 샌님이 먼저 미쳤어.
[갑] 변진사가 먼저야.
[을] 거지가 먼저라니까! (甲論乙駁(갑론을박)하며, 은행나무까지 와서 쭈그리고 앉아 심각한
회의에 빠진다.대감 역시 혼란에 빠져 위를 거닌다)
[대감] (정면을 향하여) 도대체 이 어찌된 셈이야? 천하의 노랭이루 자타가 공인허는 변진사가
여우에 흘린듯 넋을 잃었으니말이다. 그리구 저 도도하기 짝이 없는 오척 단구의 허가 성을 가진
놈은 과연 누구란말이지? 사람이란 돈을 취하거나, 뭔가 요구할 땐 부끄럼이 있구, 같은 말을
거듭 허니 얼굴엔 상냥스런 웃음을 띠구, 정성이 서리구, 아첨허구, 비굴해지는 것이 상례이거늘,
도대체 저놈은 무엇이기에 저렇듯 안하무인이란말이냐? 아니, 저 누더기옷에 망가진 갓을 쓴 저
화상이 무엇이기에 천하의 변승업이가 마치 고양이 앞에 쥐처럼 오금을 못 쓰구
평신저두헌단말이지? (변진사, 깊은 생각에 잠기어 다시 등장)
[대감] 변진사!
[변]---예?
[대감] 어떻게 된 셈판이오?
[변] 요구대루 환을 놓기루 했읍니다.
[대감] 환을 놔? 만 냥 돈을?
[변] (신비감으로) 예, 그 선비는 물질을 기다리기 전에 스스로 만족을 가진 사람이
틀림없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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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스스로 만족을 가지다니?
[변] 예, 스스로 만족을 ---아마, 그 선비가 하려는 것두 범상치 않을 것으루 생각됩니다.
[대감] 그자가 시도허려는 게 뭐란 말인구?
[변] 소인네 따위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소이까?---얘, 억쇠야.
[억쇠] (등장) 예
[변] 널 속량헐 것이니,. 이 길루 강선달 도가루 가거라.
[억쇠] 안성엘입쇼?
[변] 강선달댁에 묵으믄성 이제 그 생원님의 시중을 드는 거다.
[억쇠] 속량해주시는 건 고맙지만서두---제가 저 비렁뱅이 샌님의 시중을 단다닙쇼?
[변] 이르는 대루 해라. 널 마다해서 돌려보낼 때까지.
[억쇠] ---예, 마님. (시무룩해서 퇴장)
[대감] 변진사.
[변] 어, 아직두 계셨읍니다그려, 대감마님.
[대감] 변진사. 정신은 똑똑헌가?
[변] 예, 아주 상쾌헙니다. 죄송헌 말씀이오나 대감마님 뒷바라지허기보담, 이편이 휠씬 현면헌
처사같습니다.
[대감] 뭐, 뭐라구? 이편이 훨씬 현명해? 아니, 저 비렁뱅이 샌님과 날 견준단말인가? 아니,
내가 저 거지만 못허단 소린가?
[변] 잘 알구 있읍니다그려?
[대감] 변진사, 내 지금 이렇듯 낙척불우의 몸이라 해서 사람을 눈앞에 놓구 괄실허긴가?
아뿔사! 변진사가 그런 위인은 줄은 미처 몰랐구먼! (대감, 대로하여 도폿자락을 너풀거리며
좌하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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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장. 나무아래에서 자초지종을 보고 있던 갑과 을, 눈이 휘둥그래져서 중앙으로 나온다)
[변] (한 점을 응시하며) 소인에겐 소인대루 시도허는 바가 있사옵니다. 대감마님. 거기 누구
없느냐--- 아가! (변진사, 깊은 생각에 잠겨 서서히 몸을 돌려 안방으로 퇴장)
[갑] 아이구, 우린 오늘루 깨깨 망허는구나! 운종가에 무슨 시재가 만 냥이 있노?
[을] 변진사가 망쳤어!
[갑] 실성했어.
[을] 그래, 돌았어. 자네 말이 맞았어.
[갑] 누가?
[을] 샌님--- 아, 아니?
[갑] 미친놈에게 환을 논 변진사야.
[을] 참! 변진사다. 실성헌 건 변가놈이야.
[갑] 진사 감툴 쓰구나서부터야.
[을] 홍패 탓이야. 두 자짜리---
[갑] 옥에서 나와서 부터야.
[을] 아냐, 대궐이야.
[갑] 대궐? 그렇지, 참! 대궐에 들어갔었지?
[갑.을] 틀림없다!---대궐이다!
[페이지] 030
[第二話(제2화) 샌님의 商法(상법) 上章(상장)]
[곳] 안성읍.강선달의 과일 도가, 사랑채
[때] 앞 이야기에서 석달 뒤. 늦은 가을, 저녁
[사람들] (등장순)
강선달
고을사람들
억쇠
시골 젊은이 一(일)
시골 젊은이 二(이)
나졸 一(일)
나졸 二(이)
박몽인---宣惠廳全需(선혜청전수)
허생원
하인들
매화
종년
[페이지] 031
[무대] 강선달의 사랑채 겸 가게. 마루를 가운데 두고 정면과 우수에 방. 앞마당 우하수에는
해묵은 은행나무. 그 옆으로 대문. 좌하수에는 안채로 통하는 일각문. 후경은 돌담. 돌담이 끝나는
곳에 창고가 있으나. 객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돌담 뒤로 무성한 숲. 막이 오르면, 강선달이
대청마루에 책상을 놓고 장책에 일일이 기입하며 과일을 사들이고 있다. 무대 안팎이 마치
장거리처럼 떠들썩하다. 밖에서 [잣이에요.] [감이에유, 감] [밤이 섬으로 나왔어요.] [배 사시오,
배요][은행이 있어요] 등등의 혼성. 대문을 들어오는 사람들은 제각기 과일짐을 졌다. 감을 지고
오는 젊은이, 호도 섬을 맞들고 낑낑거리는 아버지와 아들, 광우리에 배를 이고 오는 아낙네,
대추와 은행자루를 짊어진 꼬마 등등. 과일짐을 곳간에 부리고는 강선달에게 와서 돈을 받고
굽실거리며 나간다. 이렇게 거래서 진행되는 동안에---
[페이지] 032
[해설] 안성은 畿湖(기호)의 어우룸이요, 삼남의 어귀렸다. 이 안성 장은 과일이 많이 나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근래 두석 달을 두고 괴상한 일이 생겼으니, 산처럼 쌓여야 할 장판에 과일
짐이 씻은 듯 없어지고, 시골 각지에서 모여든 과일장사들은 장터를 휘이 돌아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과일 도가 강선달네 가게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그래서 번번이 과일 장은 파장이 되어
서울서 과일을 사러왔던 도가는 물론, 이 고장 장사치들도 파리만 날리고 있는 형편이로다.
이렇듯 석 달이 지나는 사이에 장에 났던 과일은 밤 한 톨 남기지 않고 몽땅 강선달네 곳간으로
들어가고 말았으니 그도 그럴것이, [자아, 과일 삽시다, 과일, 값은 달라는 대로 주고 과일은 있는
대로 다 사오. 누구든지 값 잘 받고 과일 쉽게 팔려거든 물산도가하는 강선달네집으로 과일 짐을
지고 오시오. 한 톨도 사고, 한 접도 사고, 말로도 사고, 섬으로도 사오. 부르는게 값이오, 있는
대루 몰아 사오. 자아, 강선달네 도가로 오시오.] 무대에서는 마지막 과일장사가 강선달에게서
돈을 받아 가지고 우수 대문으로 나간다. 혼성과 훤소, 스러진다. 억쇠, 곳간 있는 쪽으로 나오며
옷을 털고 크게 허리를 편다.
[억쇠] 이걸루 안성 장안의 과일은 싹 쓸었다. 글세 선달님, 세상에 이런 장사가
어딧읍니까요? 전 이날여태 서울 운종가 한복판에 살믄성두 이런 장산 첨해봤다니깝쇼.
[강] 헐 수 있느냐, 화주 영감의 방침이 그러시니, 우리야 그저 분부대루 만 냥어치 과일만
사들임 그만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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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쇠] 헛 그 만냥 돈이 누구 건뎁쇼? 우리 다방골 쥔마님 돈인걸입죠.
[강] 돈 임자가 누구든간에 깨끗이 다 털었다. 엽전 한푼 안 남었어, 헛! 제아무리 글밖에
모르는 골샌님이기로서니, 원, 내, 참.
[억쇠] 누가 아니래요, 선달님. 어린애가 아니구서야 미친 지랄이지, 물건 거래에 달래는 값 다
주구 사는법이 어디 있사오며, 그것두 당장 쓸 데나 있음 모르되, 몇달씩이나 광 속에
처넣어둔채. 한편에선 상허구 썩어, 내버리는가 허면, 한편에선 감 한 접에 열곱이나 주구?
틀림없어요, 미친 지랄입죠. 글쎄 쇤넨 무슨 낯을 들구 서울 쥔마님댁엘 돌아간답니까? 헛, 내
팔자두 기구허지---선달님은 구문이나 두둑이 잡수세요. 이런 판에 안자시구 언제 잡솨요?
[강] 어디 구문 먹기두 꺼림칙허다. 천둥 벌거숭이 어린앳 걸 속여 먹는 것 같아서 원. 난
구문보담두 앞일이 더 걱정이로구나.
[억쇠] 앞일이라닙쇼?
[강] 과일값을 천장만큼 올려놨으니 내년 일이 걱정이 되지 뭐냐? 앞으룬 오는 손님이란
열곱이나 더 받구 팔려는 날도둑놈들일게구, 과일을 사려는 사람은 그림자두 못 볼 것이니, 내
평생 장살 올 한 여름으루 결단을 낸 게 아니냐? 이런 병신짓이 어딧겠니?
[억쇠] 헷! 그러니까, 대대손손이 두구두구 자실 걸 두둑이 떼내어 되잖어요, 선달님?
[강] 글쎄---원. (밖에서 시골 젊은이1이 씨근덕거리며 뛰어든다)
[젊은이1] 죈마님, 이 댁이 강선달네 과일 도간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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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쇠] (끄덕) 아직두 안성 장에 과일이 남았던가? 우리가 싹 쓴줄 알았는데?
[젊은이1] (뒤를 돌아보며) 장에서 온 게 아녜유.
[억쇠] 장에서 안 왔음, 그럼?
[젊은이1] 관가에서 나왔이유. 서울 관가에서 나오신 높으신 어른이 나졸들을 앞세우구 우리
동네로 쳐들어 왔단 말씸이에유.
[강] 무슨 일루?
[젊은이1] 무슨 일은 무슨 일이에유? 과일 거둬들인다구 왔지, 우리 동네서두 밤 한톨 안
남기구 댁에다 팔았으니, 남은 과일이 어딧이유? 그런데두 관가 손님들은 우리 동네 집집마다,
골방 다락꺼정 벌컥 뒤엎다시피하구, 과일 내놓라 호령호령하믄설랑 닥치는 대루 잡아다가
달구치니 이를 어뗘해유? 때린다구 없는 과일이 나올 리 만무허구, 동넨 온통 초상집처럼
울음바다가 되구, 집안 어른들은 죄나 진 사람처럼 숨어다니구---
[강] 헛! 관가의 토색질이 또 시작됐구나? 밖에서 사람들의 혼성 . [이 집입니다] [바루
여깁니다!][ 틀림없지?] [ 제 목을 따세요] 등등, 우는 소리도 섞인 훤소.
[젊은이1] 아, 왔이유! 이렇게 빨리 들어닥칠 줄이야---(젊은이 1, 뒷문으로 도망치려고 한다.
나졸1이 우수 대문으로 급히 등장. 젊은이1을 잡아 끓어앉힌다. 뒤따라 나졸2가 시골 젊은이2를
앞세우고 등장)
[나졸2] (젊은이 1에게) 이 집이 강선달네 도가가 틀림없단 말이지?
[젊은이1] 아, 예. 나으리.
[페이지] 035
[나졸2] 쥔놈이 어떤 놈이냐?
[강] 저올시다만. 젊은 사람이 뭐 못헐 짓을 했읍니까?
[나졸2] 저놈이 바루 마지막 감 한 접까지 사들인 놈이라지?
[젊은이1] 예, 나으리.
[나졸1] (나졸 2에게) 여보게, 두말험 긴 말 되네. 어서 놈을 묶어 대령험세
[강] 아, 절 묶어요? 제가 무슨 되가 있읍니까? 안성 장터에서 과일 도가허는 것두 죕니까요?
[박몽인] (밖에서) 이놈, 네가 네 죄를 알렸다! (선혜청 전수, 박몽인이 대문으로 등장)
[나졸1] 선혜청 전수 영감 행차시다.
[강] 어이구머니나! 전수 영감이랑 정五(오)품?
[박] 내가 서울에서 여기까지 온 연유는 선헤청 당상 대감마님의 명을 받들어 너를 보려구 온
것일다. 내 듣자허니 너희집 광에선 과일이 썩어나갈 지경이라지?
[강] 어쩌다가 그렇게 됐읍니다.
[박] 엉큼한 녀석 같으니라구. 알구보니 모두 두꺼비 같은 네놈의 작전이었구나?
[강] 소인은 지은 죄를 어찌 소인이 모르겠읍니까만, 영감마님께 꾸주들을 만한 잘못은 없다구
생각하옵니다.
[박] 어, 고이헌지고! 네놈 땜에 서울장안에선 온통 난리가 났다.
[강] 난립쇼?
[억쇠] 에구머니! 임진 병자 다 치르구 이번엔 또 무슨 난린갑쇼, 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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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나두 이런 난린 첨일다. 장안에는 과일이 동이 나서 일반 백성을 물론이요, 양반댁에서두
크게 곤경을 계시니---
[강] 난 또, 과일 난리군입쇼? 허허?
[박] 이눔, 네가 아직 네 죄를 깨치치 못허는구나? 네 작간의 폐가 어찌 사대부의 안살림에
그치리오? 의원들은 탕약에 대추 두 알을 넣지 못해 겨우 생 세 쪽을 넣어 약을 대릴 지경일다.
[강] 아, 그래요. 쯧, 쯧. 얘 억쇠야, 너 냉큼 가서 대추 두 알만 가져온.
[박] 에끼놈!
[강] 아, 예?
[박] 문제는 대추로 그치는 게 아닐다! 황공하옵게두 궁중에선 밤 대추에 곶감까지 떨어져서
약식을 못 만들며, 상감마마 수라상 식혜에 도오동 뜨일 잣 한알을 구하지 못허는 형편이니. 이
모든 괴변이 모두 너루 인함일다.
[강] 얘, 억쇠야. 잣두 한줌.
[박] 네 이눔! 아직도 관가의 분부를 알알차리지 못허구 이토록 방방자허구나? (나졸에게)
얘들아, 곳간에 가서 밤 한톨 남기지 말구 몽땅 마소에 실어, 이놈들과 함께 서울로 옮기렷다.
[억쇠] 에구, 쇤네게 무슨 죄가 있다굽쇼?
[강] 소인두 아직 구문 한푼 먹지 않았읍니다.
[박] 구우무운?
[억쇠] 과일 쥐은 따루 있사와요.
[강] 소인넨 그저 객주를 해가며 사구파는 데서 구문이나 몇푼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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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먹을 따름입니다요.
[박] 그래에? 화주는 따로 있어?(나졸1에게) 너 냉큼가서 진짜 쥔놈이란 놈 잡아 대령해라.
[억쇠] 쥔놈이란 놈? 어이구, 우리 샌님 골루 가셨구나! (허생원이 사랑방에서 조용히 등장.
여전히 초라한 의복과 해진 갓)
[허] 내가 쥔놈이란 놈이외다.
[억쇠] 어이구, 생원님. (전수에게) 영감마님, 이분이 화준 화주지만 천둥 벌거숭이 어린애라---
[박] 요, 생쥐 같은 놈, 네놈이 바로 화주라구?
[허] 허? 댁은 뉘시기에 수인사두 없이 대뜸 이눔 저눔 허시우?
[박] 뭣이 어쩌구 어째?
[허] 보아허니 서울 관가에서 나온 양반 같소만, 서울양반이람 나두 서울양반이오.
[박] 서울양반?
[허] 영감두 아니구 대감도 아닌 생원 나부랭이가 장사 좀 했기로 서니 그게 뭐 국법에
어긋나는 큰 죄가 되오? 먹고 살자니 별 도리가 없지 않소?
[박] 어, 노, 노형. 우리가 서루 같은 반열에서 아랫것들 보는 데서 이렇게 따지기오? 우리
체모만 깎이게?
[허] 장사거래에 양반 상놈이 어딨소? 그래, 선혜청 대감께선, 양반 이건 상놈이건
불문곡직허구 백성의 재물을 약탈해 오랍디까?
[박] 약탈? 아, 아니 그런게 아니구. 이거 얘기가 좀 빗나가는데? 당신이 과일을 매점하여
우으로는 상감마마로부터, 아래로는 억조창생에 이르기까지 골탕을 먹이니 우리로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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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골탕을 먹이는 것이 아니오, 영감. 만 냥 돈을 기울여 나라의
[허] 골탕을 먹이는 것이 아니오, 영감. 만 냥 돈을 기울여 나라의 얕고 깊음을 알아봤을
따름이오.
[박] 나라의 얕고 깊음을?
[허] 그렇소, 서울에선 난리가 났다믄성요? 돈 만 냥 때문에?
[박] 노형두 알구 있구먼, 응? 알구 있으믄성두 이런 몹쓸 짓을 했어, 엉? 젯상에 고일 밤,
대추가 없다는 사실을 알믄성두?
[허] 허, 허어? 밤 대추를 고이지 않았다구 조상어른들이 무덤을 헤치고 뛰쳐나온답니까?
[박] 대갓집에서 곶감을 구허지 못해서 엉? 못해서---
[허] 마님들이 목이 타서 돌아가셨나요?
[박] 사대부댁만이 아니라, 그 화는 억조창생에 미치며 이로 인해 민심은 흉흉하며 서울장안에
난리가 날 지경이니---
[허] 난리? 오호라! 나라의 흥망이 겨우 만 냥 돈에 달렸구나! 묘당에 앉아 국록을 처먹으믄성
정사를 본다는 대감들의 궁량이 어쩌면 이토록 어리구 좁소이까?
[박] 아아니---그런게 아니라 노형---여, 생원, 생원님.
[허] (불호령) 선혜청 당상은 정一(일)품으로 그 소임의 막중함이 영의정에 버금가는 자리로서
대궐에서 쓰이는 범백 물자를 조달함이 주관 임무이거든 어찌하여 상감마마 수라상 식혜그릇에
도옹동 뜨일 실백조차 평소에 비축함이 없이 오늘에 와서 이렇듯 망치소조하여 정五(오)품의
귀하신 전수 영감의 몸으루 직접 안성고을까지 내려와서 이렇듯 민페가 자심하니, 이는 우으로
상감마마의 성려를 어지럽게 함을 비롯하여, 도제조 대감과 영감의 직속상사인
濟用監(제용감)에게까지 누를 끼쳐 상하를 함께 욕되게 함이요, 실로 태만과 직무유기도
이만저만이 아니오니 그 죗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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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누구에게 물어야 마땅하오며 아울러 무법스럽게도토색질을 제멋대로 자행하는 그대의 소행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오?
[박] 여, 여보시요, 새, 생원님. 토색질이란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외다. 소인은 그저 안성
강선달네 도가엘 감, 과일이 곳간에서 썩어나간다기에, 적당한 값으루 사볼까---아무렴, 돈을
내구 사는 거요, 물론 값을 치르구---
[허] 그래요? 그럼 진작 ---얘, 억쇠야. 손님 오셨다.
[억쇠] 묶이는 대신에 팔아드리는갑쇼? (허생원, 방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강] (신이나서) 화주영감. 흥정을 붙여놓구 자릴 뜨심 어떡하시지?
[허] 나두 앉아 있어야 허우?
[강] 아무렴입죠. 얘 억쇠야, 너 안에 들어가서 마님께 술상 좀 정갈히 봐 내오라구 여쭙구---
[허] 안주는 콩나물과 고사리나물임 족하다.
[억쇠] 생원님 식성은 제가 알구 있사와요.
[강] 그리군 장터 술집에 가서, 술따를 계집두 한 마리 꿰차구 오너라.
[억쇠] 술에밉쇼? 히히히. 마침 버드나무집에 서울서 갓 내려온 절대 가인이 있읍죠. 얼굴은
떠오르는 반달이며---
[강] 냉큼!
[억쇠] 아, 예 선달님( 좌우수로 퇴장)
[허] 계집이 무슨 소용이 있소?
[강] 귀허신 서울손님을 소홀히 접대해서야 되겠읍니까요? 우리네 상법이니 제게 맡겨두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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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헛! 어디나 주색이 따르기 마련이구먼?
[강] 그럼, 값은 어떡하죠?
[허] 밑져서야 팔 수 없지. 마지막 걸 얼마에 샀소?
[강] 감 한 접에 닷돈.
[박] 닷돈? 그건 열 갑절 아닌가?
[허] 그럼 그게 시세로구먼?
[강] 그렇죠, 일템 이게 오늘의 시세입죠.
[허] 그럼 그 값으루 내는 거지, 머.
[박] 자, 잠깐만.
[허]?---
[박] 꼬박 열 갑절을 받겠단 말이오?
[허] 우린 부르는 값에 샀는데, 머?
[강] 폭리다!
[박] (강에게) 폭리가 뭔고?
[강] 영감마님, 폭림 어떻구, 만 냥 십만 냥임 어떻습니까? 머, 영감마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입니까요? 원 내---
[박] (작은 소리) 그쯤 나두 아네만서두, 그래두 열 갑절은 좀 심허지 않어? 이게 발각되는
날엔?
[강] 이 강선달을 믿으세요! 액수가 클수록 구문두? --- 흐흐흐.
[박] 글쎄?--- 항용 허는 일이긴 허지만.
[강] 조선 천지에 과일이라곤, 이 생원님 이외엔 밤 한톨 없다는 엄연한 사실과 이유로써!
[박] 으흠!
[강] 필요허구두 충분헌 조건이 아니옵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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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그래라, 샀다! 만 냥이든 있는대루 몽땅 잡아둬라!
[강] 그러셔얍죠!
[박] 그대신 원형이정으루 구문두 열 갑절일쎄?
[강] 두말험, 긴 말입죠.
[허] 구우무운?
[박] 그래 구문.
[허] 허허헛?
[박] 왜 웃어? 물건 매매에 구문, 몰라
[허] 그런 거 없어요.
[박] 없어?
[허] 영감, 미리 못을 박아뒀어야 했지만---영감 돈은 나랏돈이자 백성의 돈이 아뇨?
[박] 암, 여부가 있나.
[허] (정면을 향해서) 백성의 돈으루 사들이는 흥정에 전수영감이 구문을 자시겠다네?
[박] (정면을 향해서) 아니, 백성의 돈임 어떻구, 나랏돈임 어떻담? 물건매매에 구문이란 천만번
당연헌 일이지.
[허] 영감님은 이미 구문을 두둑히 자시구 계시오니이다.
[박]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얼마? 누가? 날 줬어?
[허] 나라에서 내리는 녹은 뭣이오니이까?
[박] 녹? 요요 젊은 친구가? 녹은 녹이구, 구문은 구문이구.
[허] 전수라는 정五(오)품 직함은 대궐에서 쓰이는 물건 일첼 조달허라는 벼슬자리 아니오?
일템, 영감이 받아자시는 녹은 영감이 물건 조달해들이는 데 대한 구문이외다. 그런데 이완
별도루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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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문을 자시겠다니, 이건 이중 소득이며 불법 소득이 아니오리까?---난 못하오.
[박] 힛! 요 골샌님이 구문을 받음 나 혼자 먹는 줄 아나베?
[허] 이 흥정 파이헙시다.
[박] 뭐, 파이?
[강] 아아니, 생원님! (허생원, 사랑방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강선달, 허의 두루마기 자락을
부여잡고 박에게 눈짓)
[강] 헛, 산통 깨치네, 왜들 이러십니까? 양반님들 흥정이란 닭싸우듯 한번 톡톡 쪼아보군 그만
집어치우는 겁니까? 이러시지들 마시구 생원님, 여기 좀 앉으세요. 그리구 영감마님두 너무
고지식허시지---아, 구문이라야만 꼭 맛입니까? 원, 내, 참! (강, 무엇인가 전수 귀에다 속삭인다)
[박] 그것쯤, 선혜청에서두 항용 허는 일이지만---
[강] 모루 가두 서울만 가면 그만 아닙니까요? 원---
[박] (작게) 그렇지만 저 꽁생원이?
[강] 제게 맡기십쇼. (허에게) 자, 생원님, 어서 이리루. (억지로 앉히며) 헛! 이렇게 고달퍼서야
객주집 쥔노릇인들 해먹겠다. (연상을 앞으로 당기며) 생원님, 자 증서 한줄 쓰십쇼, 십이만
냥이라구.
[허] 십이만 냥?
[강] 눈 딱 감구. 열 갑접이나 열두 갑절이나 오십보 백본데 머.
[허] ?---
[강] 항용 허는 일인데?
[허] 오십본 오십보구 백본 백보 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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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엥이! 글쎄 통허지 않는다니까!
[강] 헛! 이렇게 숨구멍이 막혀서야. (억쇠, 매화와 함께 좌우수에서 등장. 과연 미인이다.)
[억쇠] 버드나무집 술애미, 매화 대령했읍니다.
[매화] (큰절) 매화라 불러주십시오.
[강] 옳지! 너 마침 잘 왔다. 서울서 온 색시라 역시 다르구나. (눈으로 허를 가리키며) 귀허신
손님이시니 그리 알구---
종년이 술상을 들고 나와 마루에 올리고 퇴장. 매화, 마루에 올라 허생원 옆에 앉는다. 허는
좌불안석
[강] (박에게 귓속) 영감, 최후 수단입네다.
[박] (끄덕)
[강] 이걸루 넘어가지 않는다문 없읍죠.
[박] (작게) 골신님에겐 아깝다.
[강] 엥이, 욕심두. 자, 우린 잠시 꺼집시다.
억쇠, 매화에게 눈짓. 무대, 허와 매화만을 남기고 어두워진다. 매화, 술잔을 권하며 교태.
[메화] 영감마님?
[허] 나, 난 영감이 아니구 새, 생원이란다.
[매화] 생원임 어떻구 영감임 어때요? 쇤네 영감님임, 영감이지, 머?
[허] 어쩌구 어째?
[매화] 에구머니, 이를 어쩌나? (허의 무릎에 몸을 던진다.)
[허] 아, 오, 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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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영가암, 여기 --- 여길 좀---(허의 손을 목덜미로 가져간다)
[허] 너 왜 이러느냐? 갑자기 경풍이라두 일었느냐?
[매화] 벌레가---
[허] 벌레?
[매화] 등골루 해서 겨들랑이두.
[허] (쩔쩔맨다)
[매화] 쇤네 가슴에 손을 넣어 끄집어내어 주사와요. 아이구, 매정두 하셔라. 영가암, 에구머니,
아아아이구머니
[허] 아서라. 너 이러는 게 아니다.
[매화] 영가암--- 사람 좀 살리시와요. (매화, 적극적인 공세, 허의 목을 끼어안고 늘어진다)
[허] 아, 아니다! 얘야--- 내 몸이 왜 이리 비비꼬이느냐?
[매화] 쇤넬 죽여주사와요!
[허] (비명) 날 좀 살려다오.
허생원, 가까스로 포옹을 벗어나서 장지문을 열어젖히고 방안으로 도망친다. 매화, [영감]하고
부르며 뒤따라 들어가 장지문을 닫는다. 무대 전체가 밝아진다.
[박] 뭐가 이따위야?
[강] 가, 가만. 하횔 좀 기다려봅시다. 아직 초입인걸입쇼.
강과 박, 마루로 올라가 방안 동정을 엿듣는다. 강선달, 손가락에 침을 발라 장지에 구멍을
뚫는다. 사이. 갑자기 장지문이 열리며, 매화, 두 손으로 얼굴을 싸고 총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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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튀어나온다. 강과 박, 어안이 벙벙.
[매화] 아이구, 쥔마님! 난 이런 망신 첨이야!
[강] (은행나무를 가리키며) 열번 찍어두 안넘어가던가?
[매과] 나무가 아녜요! 돌이예요. 돌! 바우예요!
[박] 바우!
[매화] 아유! 난 못살아! (매화, 도망치듯 우수로 퇴장. 억쇠, 좌우수에서 급히 튀어나온다.)
[억쇠] 매화가 달아났어요?
[박] 하회가 없잖아?
[억쇠] 그럴 리가 없는뎁쇼?
[박] 속수무책인가?
[강] 죄송합니다.
[억쇠] 아, 고게 누구 안전이라구 달아나?
[박] 오냐, 좋다!
[강] 예?
[박] 구문두 증서도 필요 없다.
[강] 그래두 괜찮겠읍니까?
[박] 자네가 구구루 생각했다는 게 이꼴이 됐으니, 이번엔 내 생각대로 해볼 수밖에! 고 생쥐
같은 화주놈이란 놈, 이리 좀 끌고 나오게.
[강] 묘안이 있으십니까?
[박] 이 목을 걸었다. ! (밖을 향하여) 게 누구 없느냐?
[하인들] (밖에서) 예에이.
[페이지] 046
[박] 돈바릴 이리 들여다 부려라!
[하인들] (밖에서) 예에이.
[강] (불안) 영감마님?
구종, 하인배들, 제각기 돈짐을 지고 비척거리며 대문으로 등장, 열을 지어 곳간 있는 편으로
사라진다. 무대, 어두워지며, 한동안 스포트만이 느릿느릿한 이 행진을 비추다가---
-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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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下章(하장)
[곳] 前章(전장)과 같음.
[때] 같은 날, 동틀 무렵에서 새벽까지
[사람] (등장순)
늙은 졸개--
졸개 二(이)
졸개 三(삼)
졸개들
최씨---강선달의 아내
도적 두목
강선달
억쇠
허생원
박몽인
매화
[무대] 돈짐을 멜빵 걸어 짊어진 사람들의 행렬. 全章(전장)과는 반대 방향. 곳간에서 대문으로
느릿느릿 움직인다. 어떤 도적은 전대를 진 위에다가 허리띠의 돈꿰미를 여럿씩 찼기 때문에
치여 휘청거리고, 어떤 도적의 전대는 중동이 갈라져서 돈이 쫘르르 쏟아진다. 이 소리에 선잠이
깬 강선달의 아내 최씨가 좌하수 안채에서 등피를 들고 나오다가, 놀라 뒤로 자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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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으악! 도둑이야, 도둑! 도적들, 혼비백산하여 앞선 놈부터 돈짐에 눌려 비척거리다가
넘어지고, 뒷놈들도 [도미노]식으로 차례로 쓰러진다. 멜빵만 어깨에 걸고는 땅 위에 주저앉아
낑낑거리는 슬로우 모오션의 群像(군상). 최씨, 네 발 걸음으로 안방으로 도망치려고 할 때,
우수대문으로 두목이 장검을 빼어들고 뛰어든다.
[두목] 꼼짝 말아라! (최씨, 제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싹싹 빈다)
[최] 그저 목숨만 살려줍쇼, 밤손님 나으리.
[두목] 목숨이 아깝거든---쉬이.
이 소란통 안채에서는 강선달, 정면 사랑방에서는 허생원이 급히 나온다. 곳간에서는 억쇠가
허리띠도 매지 못하고, 뛰어나오다가 놀라 두 손을 번쩍 들었으니, 아랫도리 꼴이 말씀이 아니다.
[두목] 어느 놈이 돈 임자냐? (허에게) 오! 네로구나! 이 생쥐 같은 놈! 네놈이 그래 나랏돈
십만 냥을 털두 뽑지 않고 통째루 꿀꺽했단 말이냐? (허생원, 이에 대꾸하지 않고 엎치락뒤치락,
돈짐과 씨름하며 쩔쩔매는 졸개들을 보고, 체구에 맞지 않게 우렁찬 소리로 껄껄 웃는다.)
[두목] 이놈이 우, 웃어?
[허] (뜰에 내려가서 졸개를 부축하며) 늦게 배운 도둑질이 새벽까지 걸렸구나? 이봐, 몇냥을
가지구 이 꼬락서닌가? (두목에게) 어디서 이런 것들을 모아놓구 이걸 밤일이랍시구 허구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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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목] (졸개들에게) 이놈들아! 어서 빨랑빨랑 일어나지 못해? 이거 어디 내가 창피해서
견디겠느냐?
[허] 얘, 억쇠야, 너 부축 좀 해줘라.
[억쇠] 부축입쇼, 생원님?
[허] 동여서 관가에 바칠 것두 못된다. 여보게, 두목.
[두목] 네?---예.
[허] 다음번엔 마소라두 끌구 오게나.
[두목] 딴은! 첨 솜씨라---
[허] 자아, 어서들 일어서지---해뜨기 전엔 돌아들 가얄 게 아닌가?
[강] (기운이 뼉혀서) 아니, 이 굼벵이들을 그냥 돌려보내요?
[허] 오, 참! 노자라두 조금씩 나눠줘야겠구먼.
[강] 노오자?
[허] 억쇠야, 노자뿐 아니라 소용되는 대루 가지구 가게 해라. (억쇠와 강, 서로 마주보며
허생원이 정상이 아니라는 시늉. 늙은 도적, 졸개1이 와락 땅을 치며 통곡한다. 허,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졸개1] 아이구, 우리네가 살아서 성인군자를 뵙는구나!
[허] 늙은이가 이게 무슨 일이요? 어서 일어나우.
[졸개1] 나으리의 하해 같은 은혤 어떻게 갚습니까요? 이 몸이 늙었을망정, 남은 생명이나마
나으릴 받들게 해줍소사!
[허] 그건 곤란한데.
[졸개1] (졸개들에게) 얘들아,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졸개2] 누가 좋아서 이런 짓을 허나요? 그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페이지] 050
[허] 아니, 논밭두 없단 말이냐?
[졸개2] 논밭이 있음, 누가 밤일꺼정 허겠어유?
[허] 흠! 억쇠야, 어서 나눠주되---
[억쇠] 아니 정말 돈을 주란 말씸이갑쇼?
[졸개1] 아니올시다, 마님. 고향엘 간댔자 별수없는 놈들이랍니다. 가뭄이라 논밭 곡식은
말라죽구, 물난리라 초가삼간 뗘내려보냈구, 집안의 종자란 핼미, 새끼, 손주놈꺼정 뿔뿔이
흘어졌사와요.
[졸개2] 이제 와서 쇤네들이 양민이 되구 싶단들 이미 도둑 명부에 오른 놈들이니, 갈곳이
어딨사와요?
[졸개3] 다들 마찬가지에유. 종살이라두 좋으니 영감 밑에 둬주세유.
[허] 헛, 이거 야단났군.
[졸개들] (무릎을 꿇고) 한번 살렸으니, 두번 살려줍쇼, 마님.
[허] 두목, 나더러 자네 일을 맡아보란 말인가?
[두목] 아, 아니올시다. 전 가짜 두목이올시다.
[허] 뭐, 가짜? 도둑 두목에두 진짜 가짜가 있나?
[두목] 위에는 위가 있읍죠. (은행나무를 쳐다보며) 수령님---수령님--- 얘들이 몽땅
돌아섰어요. (사이, 부시시 나뭇가지를 해치고 전수 박몽인이 내려와 엎드린다.)
[박] 뵈올 낯이 없읍니다.
[허] 헛! 언제 날 봤다구? 아니, 당신 전수영감이구려? 하하, 우리 또 만났네.
[박] 높으신 덕을 몰라뵙구---
[허] 하하하. 관쓴 도둑이라더니 영감이야말루 명실상부요, 형용상종이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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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십만 냥 거랠 허구설랑 한푼 돈두 못 지니구 서울루 올라갈 지경이면 위로부터의 구박을
누가 어떻게 감당해냅니까? 궁극에 가서는 도둑의 누명을 씌워 정배 아님 하옥이니, 이래두
저래두 도둑, 도둑의 이름을 면치 못헐진댄 에라 모르겠다, 죽는 셈치구 한번 나서본다는 게
요꼴이 됐읍니다.
[허] 신세 처량하지만, 솔직해서 좋소.
[박] 널리 살피십시오.
[허] 얼맛 돈이 있음 되우?
[박] 이제 와서 돈이 무슨 필요가 있읍니까? 소인두 이사람들과 함께 생원님을 모실까
하옵니다.
[졸개들] 땅 끝, 하늘 끝까지!
[허] 그래요? 이를 어쩐다? (생각) 이봐, 당신네들 사정이 저엉 그렇담 나두 생각이 있으니까,
내달 초이렛날 여기서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졸개1] 그럼, 허락하십니까?
[허] 온다니 낸들 어쩔 수 없잖소?
[졸개들] 고맙습니다, 마님!
[허] 그러나 홀몸은 안되오. 홀애비나 총각은 짝을 묶어 가지고 와야 하우.
[졸개들] 짝입쇼?
[허] 억쇠야, 짝 값까지 내줘라.
[억쇠] 짝 값까집쇼? 헛! (강을 본다)
[강] 원, 내참!
[페이지] 052
졸개들, 억쇠와 강선달에게 돈을 받아가지고 좋아라고 굽실거리며 대문으로 나간다.
[허] 전수 영감은 여기 남아 날 좀 도우쇼.
[박] 황공하옵니다.
[허] 그리군 어떡헌다? 옳지! 참 강선달.
[강] ?---
[허] 아직 돈이 남았지?
[강] 돈을 그대루나 다름없어요. 기껏 몇 십냥씩 밖에 못가지구 갔으니---그렇지만 원, 내참!
[허] 그럼, 만 냥 하난 강선달 앞으루 떼어놓구.
[강] 만 냥입쇼?
[허] 구우무운. 그리구 이만 냥은 다방골 변진사 앞으로 환을 놔주슈.
[강] 이만 냥입쇼?
[허] 적소?
[강] 아니, 석달에 곱절이라니, 그런 변리가 어딧읍니까?
[허] 돈 좋아허는 놈, 돈벼락 좀 맞아보라구.
[강] 아, 네예.
[허] 억쇠야, 넌 돈증설 가지구 다방골루 돌아가는 거다.
[억쇠] 생원님, 정신은 똑똑합죠?
[허] 왜, 너두 못마땅허냐?
[억쇠] 생원님 정신만 똑똑허심--- 쇤네두 생원님 따라 가요.
[허] 헛! 거 조건이 까다롭구나.
[억쇠] 속량된 몸이라 저 좋은 쥔 모시는데 누가 뭐랄깝쇼? 쇤넨
[페이지] 053
당장 다음엔 뭘 살까 궁리 중인걸 입쇼?
[강] 쌀이 좋겠지. 생원님, 내년 보릿고개에 가선 열갑절이 뭡니까 그야말루
[허] 많이 배웠구먼?
[강] 헤헤. 선원님의 상재를 몰라 뵙구---
[허] 그렇지만, 그건 낙방인걸.
[강] 예?
[허] 쌀과 과일은 다르거든? 과일은 없어두 살지만---
[강] ?---
[허] 그러나마나 대갓집 곳간엔 이미 몇해 먹을 쌀이 쌓여 있을 것 이니, 골탕먹는 건 가나난
사람뿐이야.
[억쇠] 암,그래야 우리 쥔마님이지! 그럼 --- 쌀대신에 말총? 쥔마님, 제주도에가서 말총을
몽땅 사들임, 머지않아 온 나랏 사람들이 망건이나 탕건이 없어 저희들처럼 상투바람으루 다닐
게 아닐깝쇼? 히히히?
[허] 헛! 서당개 삼년에 풍월이라더니. 그러나 헛짚었다.
[억쇠] 왜요?
[허] 우선 도둑들이 곧 돌아올테니 그 사람들이 먹구 살어야 헌다. 그러구 집두 지어야 허구.
[박] 지당하신 말씀!
[허] 그러니 먼저 쌀, 보리, 콩, 팥, 서속, 수수.
[억쇠] ?---
[허] 무명, 삼베에다가 보습, 쇠스랑, 괭이, 호미, 낫, 가래, 소, 돼지, 자구, 대패, 톱, 식칼, 기명,
소반, 솥, 도마, 가위, 실, 바늘, 참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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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뭐 없나?
[강] 아니, 저 도둑놈들에게 살림을 채려 줄 생각이슈?
[허] 그럴라구 오랬는데, 머. (박에게) 젤 가난한 고을이 어디드라?
[강] 원, 내참!
[박] 젤 가난한 고을이요?
[하] 그런 델 가야, 아예 놀구 먹거나 훔쳐먹을 생각을 않거든.
[박] 그럼 백석도가 마침입니다.
[허] 백석도? 첨 듣는 고장인데?
[박] 누구나 원님들은 이 섬에 도임허기가 무섭게 다른 데루 자릴 옮겨보려구, 서울루 올리는
봉물짐안은 어마어마헙니다만.
[허] 딴은, 가난한 고을 원님 신셀 먼헐려니 그럴 수 밖에.
어느덧, 훤히 밝은 아침. 밖에서 들리는 군중들의 훤소.
[억쇠] 이크! 이번엔 또 무슨 난리야?
[박] 나 잡으로 온 나졸 아닐까?
[억쇠] 도둑놈들의 다른 도둑놈들과 합세해가지구 쳐들어오나?
[허] 그럴 리가 있겠냐? --- 너 좀 나가서 동정을 살펴 봐라.
[억쇠] 쇠, 쇤네갑쇼?
[허] 그럼 내가 나가보련?
[억쇠] 아, 아니올시다. 나, 나가봅죠! 쥔마님 말씸임 도둑놈들에게 맞아죽어두 나가얍죠. 허,
허---죽어도 좋단말이야, 죽어두--- (대문 밖으로 나가는 억쇠의 걸음이 몹시 휘청거린다.
불안한 사이. 억쇠, 나가자마자 거품을 물고 되짚어 뛰어든다)
[억쇠] 아이구! 이거 큰일났읍니다요, 쥔마님.
[페이지] 055
[박] 역시 나, 나졸이냐?
[강] 도둑이냐?
[억쇠] 도둑이 문제가 아니예요, 마님.
[강] 그럼 민요냐?
[억쇠] 민요람 약과겝쇼?(허에게) 큰 골칫덩어리가 생겼사와요.
[허] ?---
[억쇠] 고울사람들이 쥔마님 뵙겠다구 벌떼처럼 몰려오니, 이를 어떡험 좋습죠?
[허] 날 만난다구?
[억쇠] 방금 밖으루 나간 도둑들이 선봉을 서고, 어린애는 등에 업구 늙은인 손을 잡구,
절룸발인 외다리, 앉은뱅인 두손 걸음, 마님.!
[강] 그럼 역시 도둑떼가 도둑뗄 몰구 오는구나?
[억쇠] 안성고을은 물론, 변두리서들꺼정 몰려올 기세라는뎁쇼?
[허] 가난한 사람이 그리 많았던가?
[강] 흥! 나랏님 탓입죠, 머.?
[박] 어, 헛.
[허] (억쇠에게) 이리루 인도해라.
[억쇠] 아니, 저 비렁뱅이게두 또돈을 주실려굽쇼?
[어] 우선 만나보구서 생각헐 일이다.
[억쇠] 어이구머니? 말총 살 돈, 몽땅 날리겠넵쇼? (강을 보며) 원내?---(소음 더욱 커진다)
[허] 전수 영감, 내가 한꺼번에 저 사람들을 다 만날 순 없는 노릇이지, 영감이 나가서 열
식구씩 모아서 반을 짜구, 그 중 하나를 뽑아서 十司掌(십사장)이라 허구 다음으룬 열 명의
십사장에서 하
[페이지] 056
나를 뽑아 白司掌(백사장)이라 험 어떻소? 난 백사장만 면접상대험일이 퍽 간편허겠는데?
[박] 지혜로운 말씁입니다.
[억쇠] 열 식구에서, 백 식굴 뽑다닙쇼? 헤헤헤? 생원님은 열갑절 장사만 하라구 드시넵쇼?
[허] 억쇠야, 넌 사람 정리나 해라.
[억쇠] 헤헤헤. 쇤네가 헐 일두 있었구먼입쇼? (나무에 반쯤 올라 정면을 향해서) 여러분들!
생원님 말씀대루 열 식구씩 모아앉으시오!
[허] 오, 참. 과부, 총각, 처녀, 홀애빈 금물이다. 이런 비생산적인 족속들은 짝을 묶어가지구
끼이게 해라.
[억쇠] 또 짝이야? 과부, 홀애비, 처녀, 총각은 저만큼 금 밖으로 비켜앉으시오!
[허] 그리구나선, 골고루 자유롭구 비밀리에 십사장을 뽑는 거다.
[억쇠] 아니, 자유로운 비밀이라닙쇼? 헤헤헤? 그건 무슨 조환갑쇼? 자윤데 어떻게 비밀이 있을
수 있으며, 비밀인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 수 있사와요?
[허] 전수영감이 억쇨 좀 거들어줘야겠군.
[박] 예.
[허] (억쇠에게) 넌, 공정허니 뽑나 각심해서 감찰이나 해라.
[억쇠] 감찰입쇼? 헤헤헤? 그건 쇤네두 헐 수 있읍죠. 헤헤헤, 감찰? (억쇠 나무에서 내려와
엉덩춤을 추면서 박몽인과 함께 대문으로 나간다. )
[허] 휴우! 일이 이토록 거창해지리라군 생각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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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가난은 나라에서두 구제 못헌다는데?
[허] 어디 두구봅시다. (밖에서 왁자지껄)
[억쇠] (밖에서) 안돼! 홀몸은 안된다니까!
[매화] (밖에서) 저리 비켜, 억쇠야, 난 생원님을 만나야 한단말야!
[억쇠] (밖에서) 아 요 요게--- 비생산적인 인간은 저어기 금 밖으로 나가 있어야 한다니까!
[매화] (밖에서) 이거 놔라, 이자식아!
[허] 아, 저, 저거 전번에 왔던 술에미 아뇨?
[박] 예, 매환가 봅니다.
[허] 고게 왜 또 와? 얘, 억쇠야 홀몸은 절대루 들이지 말아야헌다.!
[억쇠] (밖에서) 아, 예--- 이크, 요게 샜어? 매화, 매화, (매화, 살짝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허,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려고 한다)
[매화] 생원님---
[허] 오, 오냐. 꼭두새벽부터 웬일이냐?
[매화] (정숙하게) 쇤네두 생원님 따라가요.
[허] 아니다. 네 아무리 인물이 절색인들, 백석도엔 술집이 없단다.
[매화] (추파) 술에미루서가 아니오라 생원님 소첩으루---
[허] 소첩?
[매화] 언감생심 본실 자리야?---
[허] 헛! 그런게아니다.
[매화] 소첩이 과분하옴 몸종으루라두?
[허] 매화야, 난 그런 거 아예 필요가 없단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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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생원님, 동정에 때가 묻구 저고리 고름이 떨어짐 어느 침모가 꿰매 드리오며, 하루 세끼
진짓상을 어므 식모가 챙기오며, 아침저녁 잠자리는 어떤 계집이 있어 보살피오며, 혹시 몹쓸
감기나 염병, 학질루 고생허심 어느 마나님이 약탕관을 공대하오며, 안팎으루 잦은 출입 허실 때
굽이 이지러진 나막신이나마 가지런히 놓아줄 년이 누구오이까?
[허] 오냐, 고맙다. 그건 --- 내가 헌다.
[매화] 쇤넨 비록 천한 술에미오나 몸은 더럽히지 않은 처녀입니다.
[허] 그럼, 너두 짝을 묶어가지구 오려므나.
[매화] 쇤네의 짝은 천생연분 생원님밖엔 없사옵니다. (매화, 돌연 정숙한 태도를 버리고,
마루로 뛰어올라 허생원에게 육박. 수세를 취하는 허. 빙그레 웃는 강선달. 매화, 허생원의 머리를
매만진다)
[허] 내가 왜 이러느냐? 날 어쩔려구?
[매화] 어마나? 이 구레나룻! 오래오래 빗질두 못하셨나봐? 이가 끓었을지두 모르겠네? (매화,
빗으로 머리를 다스리려고 한다. 달아날 구멍한 찾는 허)
[매화] 에그머니나, 이 목에 때. 목욕두 안하시나베? (매화, 허의 목덜미에 손을 너허 겨드랑을
더듬는다)
[허] 얘야, 이러지 말아라---아아이구! 아이구 간지럽다. 얘야!
[매화] 생원니임---
[허] 아하하. 여보슈, 강선달! 으흐흐. 아하하--- 어이구, 얘야.
[강] (몸체 뒤로 몸을 피한다)
[허] 으흐흐, 아하하--- (밖을 향하여) 여보슈, 전수 영감! 얘,
[페이지] 059
억쇠야, 이눔 억쇠야!
그러나, 매화의 공격은 원병의 도래를 기다리지 않는다. 허, 사랑방 안으로 도망친다. 매화,
뒤따라 방안으로 장지문을 닫는다. 억쇠와 박몽인, 무슨 영문인가 하고 대문으로 급히등장. 강,
그들을 손으로 제지한다.
[박] 쉬이. (방안에서 도란도란 주고받는 말소리. 일동, 만족한 듯 빙그레)
[매화] (안에서) 두손으로 버억버억 긁어 드릴께요. 어깨---앞가슴두?
[허] (안에서) 오, 오냐--- 시원은 하다만.
[매화] (안에서) 왜 자꾸만 몸을 비트세요?
[허] (안에서) 제발 이러질랑 말아다우.
[매화] (안에서) 이제 몸이 풀리세요?
[허] (안에서) 오,오냐---허벅다리? 아서라 거긴---인제 그만 해둬라. 이래선 안, 안---
아하하하, 어, 어이구, 으하아하아 하하하-(일동, 장지문 앞으로 다가선다. 정적. 억쇠, 장지문에
구멍을 둠으려는 것을 강이 제지한다.)
[강] 휴우! 초부득삼이라더니---(안심이라는 듯) 십만 냥짜립니다요, 전수 영감.
그러나 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와락 장지문이 열리며 상투바람의 허생원이 옷을 홀딱 벗고
허리띠도 매지 않은 채 맨발로 뛰어난온다. 일동 뻥했으나, 곧 이 돌발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박은 우측 대문에, 억쇠는 좌측 안방, 강은 은행나무 밑에 진을 친다.
[페이지] 060
허, 도망칠 구멍을 찾아 두리번거디다가, 쏜살같이 무대 뒤, 곳간 있는 곳으로 달아난다. 세 사람,
닭을 몰다가 놓친 것처럼 멍청.
[강] 또 놓쳤다!
[억쇠] 흥 ! 독안에 쥔 걸입쇼.
억쇠, 엉덩춤을 추며 무대 뒤로 사라진다. 긴장 속의 짧은 사이, 이윽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시 등장하는 억쇠, 강과 박, 눈으로 묻는다.
[억쇠] (울쌍) 우리 새 쥔마님 ---돈 거 아닌갑쇼?
[강] ?---
[박] ?---
[억쇠] 쥐가 들어가더니만 곳간문을 안으로 잠겄사와요---
[강.박] 원, 내참!
강과박, 바람이 빠지는 고무풍선처럼 땅에 주저앉는다.
-막.
[페이지] 061
[第三話(제삼화) 白石島(백석도)에서 上章(상장)
[곳] 백석도. 남해의 낙도
[때] 제二(이)화에서 약 한 달 뒤, 어떤 날 아침.
[사람들] (등장순)
사또
그부인
吏房(이방)
刑房(형방)
工房(공방)
戶房(호방)
禮房(예방)
똥방자
군관들
통인
그밖에 관속들
백사장一(일)---졸개 출신의 노인
백사장二(이)---두목 출신
그밖에, 백사장들
박몽인
허생원
억쇠
매화
섬 아낙네들
[페이지] 062
[무대] 東軒(동헌) 좌우로 방, 좌측에는 협실이 하나 붙어 있다. 너렁청한 대청 마루에는 병풍을
둘러쳤고 사방탁자에서 백자항아리에 이르기까지 마루방 가구가 적당히 놓여 있다. 뒤로는
내아로 통하는 뒷마루. 별로 특징이 없는 평범한 동헌 구조. 우하수에는 여전한 은행나무.
우수에는 삼문으로 통한다. 배경에, 흰 돌산과 멀리 바다 수평선이 보이니, 이것으로 가히 동헌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막이 오르면 무대는 잠시 비었다.
[해설] 백석도는 제주도만큼이나 큰 섬이지만, 이름 그대로 흰 돌섬으로 멀리 남쪽바다에
외로이 떨어져 있으니, 여기가 조선의 땅임을 아는 조선 사람조차 극히 드문 망각의 섬이다.
섬사람들은 손바닥만한 땅을 일궈 입에 폴칠할 정도의 나락을 거두면 다행이며, 바다의
고기잡이도 배와 어망이 없으니 겨우 해초나 뜯어 죽이나 쑤어서 이럭저럭 끼니를 이어간다.
일언이폐지해서, 섬사람들의 살림이란 가랭이가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이 가난한 섬고을에도
어찌된 일인지 송사만은 쌓이고 쌓여, 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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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께서는 일년 삼백 예순날을, 크고 작은 송사로 하루같이 바쁘시다. 그러나 원체 가난한
고을이라 환자조차 제대로 거워들이지 못하는 형편이니 항차 서울 대감댁에 진상할 봉물집을
꾸리기가 그리 수월할까보냐? 그러니 백성을 두들겨 [이놈, 네가 네 죄를]식의 호령인들 무슨
효력이 있으랴? 그러던 중, 허가 성을 가진 놈이 개나릿개 선창에 닻을 내렸다는 소문이 쫘악
퍼진 지 며칠이 안된 오늘 아침은 유난히도 동네가 조용했다. 첫새벽부터 술렁거려야 할
동헌이 송사는 커녕, 육방관속을 필두로 사령, 노비까지 자취를 감추어 인적이 괴괴하니, 이
어찌된 영문이냐? 사또 안전께서 내아로 해서 대청마루로 나와, 거드럭 거리며 두루 관속
노비를 찾는 모양이나,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 않는다. 사또, 초조히 뜰로 내려와서 휘이
한바퀴 돌아보고 그래도 미심쩍어 이구석 저구석 찾아보고 뒤쳐보고, 그래도 아무도 없음을
알자, 매우 괘씸하다는 표정. 사또는 다시 대청마루로 올라가서 크게 기침을 한다. 연거푸
기침을 하나,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사또는 드디어 화가난다.
[사또] 거기 아무도 없느냐? 아니, 이놈 육방관속들이란 놈들이 자기 소임을 잊구, 해가 중천에
오르도록 그림자조차 얼씬 않더냐? 어허! 고이헌지고. 얘, 똥방자야! (사이) 이놈은 또 어딜 갔노?
네놈이 뒤지를 들구 대령해야만 내가 뒷간엘 가지 않겠느냐? 허! 이거 아침에 일어나 뒷간에도
못 가게 생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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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에 주저앉아 긴 담뱃대를 입에 문다) 얘, 거기 통인놈 누구 없느냐? 헛! 부시를 쳐서 불을
대어줘야 담배라도 한대 피울 게 아니냐? 통인놈마저 자췰 감췄다? 옳지! 여, 형방! 딸년
수청들기루 말해 놓구, 밤새 살짝 빼돌린 박첨지놈 송산 어떡허지? 그리구 또 여태 인두세를
바치지 않는 김가놈 곤장은 누가 치지? (밖에서, 멀리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사또] 이게 무슨 소린고? 해조와 바람 소리, 그리군 물새 소리밖엔 안 들리던 귀양살이 같은
낙도 살림 몇해에 처음 듣는 숱한 사람들의 인성이로구나. (불안) 이방! 형방! 공방! 예방! (아무
반응이 없다)
[사또] 아니, 비장 통인놈들까지 깜깜 무소식이어? 예, 방자야! (우상수 뒷마루로 속고의바람의
실내마마가 황망히 등장)
[사또] 이크! 첫새벽에 이게 왠 속옷차림의 귀신인가?
[부인] 여보, 영감, 나예요, 나!
[사또] 아니,여기가 어디라구 고윗바람으로 나타나는 거야? 실내마마 채신머리두 생각지 않구?
[부인] (마룻바닥을 치며) 여보 영감 실내마만 뒀다 뭣에 쓰구, 사또 안전은 무슨 소용이우?
아이구 원통허구 분해라. 이 일을 어쩜 좋단 말인구.
[사또] 간밤에 무슨 몹쓸 꿈을 꾸구설랑 이러누? 담뱃불이나 좀 대주우. (담뱃대를 입에 문다)
[부인] 통인놈들은 아 어쩌구 내게 바깥 시중꺼정 시키우?
[사또] 통인만이 아니야. 육방관속을 필두루 방자놈꺼정 얼씬 안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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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뒷간에두 못가구 있잖어.
[부인] 에구머니! 내아에서두 몽땅 몸종년꺼정 싹 뒷문으로 빠져나가 버렸다우! 그러니 조반두
못 짓구.
[사또] 뭐? 그럼, 조반두 굶어야 허나?
[부인] 실내마마 체면두 있지, 어떻게 내 손으루 두레박질을 한단말요?
[사또] 그럼 물도 못 마셔?
[부인] 난리가 난들 이보담 더허겠수?
[사또] 이럴 때일수록 불편헌 건 양반이렷다.
[부인] 아니, 그럼 진정 이게 난리요?
[사또] 조용헌 이 돌섬에 난리야 무슨 난리겠소만---어험, 헛! 저 바깥 소릴 좀 들어보우.
(바깥 훤소, 커진다. 부인, 불안해서 사또에게 매달린다. 이방, 우수 삼문으로 급히 등장, 사또
앞에 읍한다.)
[이방] 사또마님, 이방 문안드리오.
[사또] 어, 이방! 자네만은 나타났네그려?
[부인] 고마우이, 고마워! 하늘이 무너져도 이방만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믿었지.
[이방] 헤, 헤, 헤? 실내마마께서 속곳바람으로 나오셨네?
[부인] (감싸며) 엑게게.
[사또] 여보게 이방, 저 소리가 뭔가?
[부인] 난리가 났다믄성?
[이방] 난립쇼? 어데섭쇼?
[사또] 그럼, 미, 미, 민욘가?
[이방] 헛, 마님께선 꿈을 꾸시나베.
[페이지] 066
[사또] 그럼, 종전에 들린 훤소 소린 뭔가? 사람들이 웅성거리구, 관속들을 비롯하여 통인,
연놈들이 온데간데 없으니?
[이방] 그런게 아니와요, 사또마님. 민요두 아니구 난리도 아닙니다요. 이번엔 사정이 홱
다르단말씸이에요. 우리 섬이 완전 점령됐사와요.
[부인] 완전 점령?
[사또] (떨며) 청인이 쳐들어왔나? 왜놈이 다시 왔나?
[이방] 왜놈두 청인두 아닙니다, 마님, 왜 며칠전에 남산골 샌님이 큰배 쉰남은 척에, 수천명을
싣구 개나릿개에 닻을 내렸단 말씸알고 계십죠?
[사또] 그 얘긴 들었네.
[부인] 그 놈들이 그래 어떤 쟁길 가지구 왔던가?
[이방] 쟁기란 건, 총칼이 아니오라 사내놈들은, (빠른 속도로) 보습, 소스랭이, 쾡이, 호미, 낫,
가래를 둘러메구, 쌀, 보리, 콩, 팥, 서속, 수수에다가 소, 돼지, 닭을 몰구 오는가 험, 아낙네들은
주발, 식칼, 장독단지에다가 빗, 실짝, 가위, 실패, 바늘까지 이구 왔으니 여기서 영 눌러 살림을
차릴 속셈이 아니구 무엇입니까요?
[사또] 흐, 흐, 흐. 이야말루 복덩이리가 제발루 굴러들어왔네그려? 간밤에 꿈이 그럴싸
하더니만 으, 흐, 흐.
[이방] 헛! 복덩어리라닙쇼?
[사또] 물실호기로다. 이방! 우리 고을에선 일년 삼백 예순날을 가야 좁쌀 한됫박 바치는 놈이
어디 있었나? 자네 말이 사실이람, 이건 호박이 넝쿨째 떨어진 게 아니구 뭔가? 엉? 이방은 이
[페이지] 067
제부텀 좀 바쁘게 됐네. 히, 히, 히.
[이방] 사또마님, 정신 좀 똑똑히 잡수세요. 저 사람들이 뭐 관가에 돈이나 양곡을 바치려구
자진해서 바다를 건너온 줄 아십니까?
[부인] 그야 그렇지. 그래두 이방이 쫓아다니구, 형방이 달구치니까 좁쌀 한 됫박이라도 내놨지.
[사또] 암! 제물이란 항상 뺏어야 하는 거지. 가져다주길 기다리는 병신이 어딨누?
[이방] 사또마님, 뺏기는커녕, 환자 곡식이나마 잘 간직하십쇼. 작은 두령, 큰 두령들이
가가호호 찾아 다니믄설랑---
[사또] 뭐? 작은 두령, 큰 두령? 그놈들이 화적떼란 말이냐?
[이방] 화적치군 너무 양반스러워요. 작은 두령은 십사장이구, 큰 두령은 백사장인뎁쇼. 이
양반들이 집집마다 곡괭이니 들것을 나눠 주믄설랑, 이걸루 돌을 캐옴 좋은 값으루 사들인다구
하믄설랑---
[사또] 그러믄설랑?
[이방] 앞으룬 이유없인 아예 관가에 돈이나 곡식을 바치지 말라믄설랑---온통 동네방넬
떠들썩해놨단 말입니다요.
[사또] 헛! 그놈들 화적치구두 아주 뻔뻔스러운 놈들이로구나? 어험! 이방, 냉큼 형방을
불러들여 크구 작은 놈을 가릴것없이 한 줄에 묶어 대령케 허게.
[이방] 히, 히, 히. 형방을입쇼? 형방이 선참으루 저쪽에 붙은 걸입쇼?
[사또] 뭐, 어쩌구 어째?
[이방] 사또마님께선 아직두 우리 관속나부랭이들의 속맘을 깨치지 못허구 계시나베.
[부인] 속맘이 어떻단 말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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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 헛, 헤헤헤? 실내마님꺼정 소인넬 몰라주심 소인네 입장이 뭐가 됩죠?
[사또] 알았네, 이방! 그럼 냉큼 가서 형방부터 묶어오게나.
[이방] 이방이 형방을 묶다닙쇼?
[사또] 오, 아, 아니다. 그거 거꾸로로구나. 여, 형방! 형방---이방을---
[이방] 아니, 소인넬입쇼?
[사또] 아니, 그것두 아니다. 너희들 중에 누구든 죄없는 놈이 먼저 밧줄을---
[이방] 어쭈?
[사또] 아, 아니. 그것두 아니냐? 그렇지 참, 그럴 수야 없지. 누가 누굴 묶겠나? 이바앙, 자네가
가서 모조리 골고루 만나서 곱게 타이르게나, 응? 요를 화적 두령만큼 낸다구.
[이방] 안옵다니요, 마님.
[사도] 그럼, 그 곱을 내마.
[이방] 허, 허?
[사도] 세 갑절?
[이방] 히, 히, 히?
[사또] 그럼, 얼말 줌 관속들을 다시 불러올 수 있겠나?
[이방] 요가 많구 적구가 문젠갑쇼? 도대체 사또마님 말씸을 누가 믿사와요?
[부인] 이방! 어느 안전이라구 함부로 입을 놀리지?
[이방] 히, 히, 히, 히. 이제들 다 제발루 걸어올 걸입쇼, 머. 히.
밖에서 큰 북소리. 깜짝 놀라 뛰는 사도 내외. 북소리에 이어 유량한 삼현육각.
[페이지] 069
[이방] 신관사또 행찹니다요.
[사또] 머, 신관사또?
[이방] 실내마님께선 어서 보따릴 싸가지구, 서울 가실 채비나 허세요.
[부인] 오, 그러구보니 자네두 저 화적떼와 배가 맞았구먼?
[이방] 배가 맞음 어떻구, 등이 맞음 어떻습니까요? 소인네야 구관이 올라가심 신관을 모시는
게 맡은 바 구실인걸입쇼. (삼문 밖에서 삼현육각이 유량한 음률과 함께 흰소 더욱 커진다.)
[사또] 이크, 정말 쳐들어오는구나!
[부인] 여보, 영감---
사또 내외가 겁을 집어먹고 서로 끼어안고 안절부절못할때, 우수에서 영기(令旗), 청룡기를
비록하여 울긋불긋한 각색를 들고, 형방을 선두로 관속군관, 통인, 방자들이 취타 (吹打)소리도
유량하게 등장하여, 무대 가득히 늘어선다. 공포에 사로잡혔던 사또 내외, 일동 중에 낯익은
얼굴들을 알아보고 안도와 동시에 분노와 모욕을 느낀다.
[사또] 형방! 어이쿠, 저기 공방 예방 호방에다가 비장통인 방자놈까지 끼었구나? 아니,
너희들이 이러기냐, 응? 여태까지 상전으로 모시던 사또 안전 앞에서 이게 무슨 당찮은
소행이냐?
[형방] 어서 물러앉으시오. 곧 우리 사또께서 도임허십니다.
[사또] 우리 사또? 자네 눈엔 내가 안 보이나?
[형방] (통인에게) 옳아, 구관 사또께 마지막으루 담배라두 한 대 피어올려야겠구나
[방자] (열중에서 나오며 )아니올시다, 형방나으리.
[형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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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 사또마님 일과는 뒷간에서부터 시작하옵니다. 히히히. (사또에게) 그렇습죠?
[사또] 네가 내 앞에서 너무 방자스럽구나? 이놈, 방자야!
[방자] 히히히. 쥐구멍에두 햇빛이라구 이젠 이놈두 승차했단 말씸.
[사또] 뭐, 뭐, 뭐? 네놈에 네멋대루?
[방자] 모르시는 말씸. 신관 사또의 특명입죠.
[부인] 도대체 너희들이 어찌 이리 허탕허냐? 영감마님이 이렇게 시퍼렇게 앉아 계신데?
[형방] 헛! 이렇게두 깨치지 못허실까? 오늘부터는 당신 남편은 원님두 아니구 사또두
아니란말씸이야. 이 속고의바람의 마나님아?
[부인] 속고의바람의 마나님? 에게게 정말. 여보, 영---가암, 나 죽네에--- (부인, 수치와
홧김에 까무라친다. 사또, 부인 옆에 쭈그리고, 안절부절 못한다. 밖에서 훤소 더욱 커진다.)
[박] (밖에서) 신관 사또 듭시오.
[형방] (군관들에게 사또를 가리키며) 어서 묶어 치워라!
군관들 마루로 뛰어오른다. 사또, 쥐구멍을 찾아 맴돌다가 겨우 좌하수로 도망친다. 똥방자
급히 휴지를 들고 대령. 이윽고 나막신과 파립(破笠)의 허생원, 박몽인과 늙은 졸개 출신의
백사장들을 거느리고 우수삼문으로 둥장. 일동, 그를 사또에 대한 예의로 맞는다. 예방이 허를
안내하여 대청에 오르자, 이 소란통에 사또 부인, 의식이 돌아와 [에게게] 소리를 지르며, 속곳을
감싸쥐고 내아로 내뺀다. 허생원, 홀랑 마루 위로 뛰어오른다. 군관들 도임상(到任床)을 고이고
정중히 집례. 계속하여 관속들 현신(現身). 당황하는 허생원
[페이지] 071
[사령들] 사령들 헌신이오.
[허] 아, 아니다.
[이방] 이방 헌신이오.
[허] 난 사또가 아니다.
[일동] 아니라닙쇼?
[허] 백석도 목사는 어딜 갔느냐?
[형방] 저희들은 생원님을 사또로 모시기루 결정허구 있읍니다.
[허] 그거 안될 말이다. 사또를 모셔오너라. (일동, 불만의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방자] 히히히. 마지막 시중입죠.
[형방] (좌수를 향해) 어서 그만 나오슈! 언제까지 쭈그리구 들어 앉아 있을 생각이오?
[사또] (밖에서) 그저 목숨만 살려줍쇼. (사또, 엉거주춤하고 조심조심 허생원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린다)
[사또] 지체높구 귀허신 분을 몰라뵙구 이렇듯 경망했으니, 그저 죽어 마땅하옵니다.
[허] 이러지 마오.
[하또] 곳간에 쌓인 나락과 필육은 쌀 한톨, 무명 한자투리 축내지 않았사왔고---
[허] 그거 참, 기특하구려. 수청들기루 헌 딸을 살짝 빼돌린 박첨진 어떡헐 셈이요?
[사또] (머리를 조아리며) 박첨지뿐 아니오라. 최좌수, 김영좌, 농부와 뱃놈에 이르기까지
분부대로 당장 백바하겠사옵니다.
[허] 그거 또한 기특헌 생각이구려. 여, 형방.
[페이지] 072
[형방] 예이.
[허] 사또 분부대루 지체없이 거행하오.
[형방] 예이. (우수로 퇴장)
[사또] 그저 이놈의 목숨 하나만 살리시오.
[허] 그런 거 걱정할 것두 없구, 겁낸 일두 아니외다.
[사또] 예?
[허] 내가 이 섬에 온 연유는 머, 당신 감투나 재물을 탐내서가 아니오.
[사또] 그러시담 역시 대감께선, 아, 아, 암행어사?
[허] 어사두 아니구 특사두 아니외다. 식구들을 거느리구 살려고 왔을 뿐이오 .
[사또] 살다니? 이 돌섬에서요?
[허] (끄덕)
[하또] 휴우! 그러시담 길을 잘못 드셨읍니다. 이 섬에서 나는 나락 이라군 섬사람들이
먹기에두 모자랄 지경이구, 그렇다구 새로 논밭을 일굴래야 보시다시피 온톤 돌산뿐이오니
아무리 생각해두 뱃길을 잘못 잡으셨나 싶소이다.
[허] 사또, 내가 노린 것이 바루 그 돌산이오.
[사또] 아, 돌산? 헤헤헤. 그까짓 돌산이람 몽땅 떠나지구라두 가십쇼. 아니 섬 하나쯤 그대로
서울로 떠옮겨가신들 누가 뭐랍니까?
[허] 허! 그거 참. 인심도 좋구 고마운 말씀이로군. 여, 백사장들, 사또 분부가 그러시니 지체
말구 십사장에게 일러 사람들을 독려하여 돌 캐길 시작하오.
[백사장] 예, 분부만 기다리구 있었읍니다.(백사장들,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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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소인은 장차 어떡험 좋습니까?
[허] 오가는 건 사또 의사에 달렸소. 저 전수 영감처럼 여기서 우리와 함께 돌을 캐시든지,
서울가서 실속있는 감툴 떼내시든지.
[사또] 어이구, 감축하여라. 그럼 소인네 내자와 의논해서 결정짓겠읍니다. (네 발 걸음으로
내아로 퇴장) 여보 마누라, 마누라아. (밖에서 장고 소리와 함께 떠들썩하는 아낙네들의 혼성)
[억쇠] (밖에서) 실내마마 듭신다아.
[허] (내아를 돌아보며) 실내마마? 내아에 있는 건 뭐구, 웬 마마가 또 있느냐?
일동. 기대를 걸고 삼문 쪽을 주시한다. 이윽고, 억쇠를 선두로, 동네 아낙네들 가마를 들고
떠들썩하며 등장. 가마 안에서 족도리를 얹고 곱게 단장한 매화가 나와, 허생원에게 큰절.
[허] 어이구, 조, 악발이가! 너 여기가 어디라구 수륙 수천리 길을?---
[매화] 생원님만 모실 수 있담, 구만리 길인들 머다 하겠읍니까?
[허] 매, 매화야 제발 뱃길이 있을 때 속히 돌아가거라.여기선 짝 없는 홀몸은 안 받아들이는
규칙이다.
[매화] 그런 줄 알구 쇤네도 짝을 무울려구---
[허] 누구허구? (매화, 토끼처럼 깡충 몸을 날려 대청으로 뛰어올라, 허를 포옹)
[매화] 생원님하구!
[허] (엉덩방아를 찧으며) 아, 아서라, 어이구 내 몸이 또 비비 꼬이기 시작허는구나. 얘,
억쇠야!
[억쇠] (반응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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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여보슈, 전수 영감.
[박] (무반응)
[허] 여, 백사장! 여보게 백사장! 밖에서 뭣들 허구 있나? (밖에서도 응답이 없다. 매화, 더욱
적극적으로 공세)
[허] (일동에게) 너희들은 장승이냐? 뻣뻣 서서 보구만 있구--- 아, 매화야, 이러는 게 아니다!
내겐 마누라가 있단다. 이래선 못쓴다. 여, 여길 좀 놔라.
허생원, 가까스로 매화의 포옹을 벗어나서 내아를 뛰어들다가 마침 묏산자 보따리를 허리에
띠고 나오던 사또 내외와 박치기. 허, 삼문 밖을 도망치려고 하나, 일찌감치 박몽인, 억쇠, 관속,
통인들로 난공불락의 진을 쳤다. 좌수에는 아까부터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똥방자. 허,
궁요지책으로 은행나무에 기어올라 새둥지를 튼다. 일동, 닭쫓던 개.
[박] 사또께서 이게 무슨 망령이십니까? 어서 내려오셔서 도임상을 받으시오.
허, 나무 위에서 도리도리. 박을 비롯하여 육방관속, 비장, 아낙네들, 일제히 땅에 꿇어 앉아
허를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축원.
[아낙네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사또 안전 비나이다.
[허] (도리도리)
[사내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사또 안전 비나이다.
[허] (도리도리)
[페이지] 075
[박] 도임상을 받으시오.
[일동] 어서어서 받으시오.
허, 나무 위에서 완강히 도리도리. 남녀들의 축원이 되풀이하여 계속될 때, 돌연 난데없는 굉음.
일동, 혼비백산하여 일제히 뒤로 자빠진다.
[허] (멀리 뒷산을 바라보며) 어, 벌써들. 돌을 캐기 시작했구나. (굽어보며) 여봐라, 이제 우리
섬은 천지간에 가장 부유한 고을이 될 것이로다.
돌을 캐는 폭파음. 계속되는 가운데
-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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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章(하장)
[곳] 前業(전업)과 같은 곳
[때] 前業(전업)에서 일년 뒤, 이른 저녁
[사람들] (등장순)
허생원
변승업
이완 대장
백사장一(일)
백사장二(이)
백사장들
[무대] 무대가 밝아지면서, 멀리 가까이 은은하게 들리는 노동요(勞動謠). 동헌, 대청에는
허생원과 변진사가 마주앉아 있으나, 해설이 끝나기까지 깍아놓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지극히
공손한 변진사와 여전한 행색의 허생원.
[페이지] 077
[해설] 일년이 못되어, 백석도는 조선에서 가장 부유한 고을이 됐다. 돌멩이라구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 섬의 흰돌이 알구보니 바로 대리석이란 거다. 일테면, 섬 전체가 대리석이니, 섬 전체가
곧 돈덩어리랄 수 밖에. 섬사람들은 돌을 캐어 허생원이 거느리고 온, 오십여 척 큰배에 실어
밖으로 내다가 팔게 되니, 집집마다 살림이 넉넉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 섬에서는
가끔 쓰고 남은 돈일랑 바다에 던져야 하니 이는 통화 정책상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운종가의 변진사가 아무 연통도 없이 불쑥, 수륙천리길을 찾아왔으니, 어느새 돈냄새가
서울까지 풍긴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억쇠란 놈이?
억쇠가 주안상을 들고 나와 두 사람 사이에 놓고 변진사에게 지그시 눈짓을 하고 퇴장.
허생원과 변진사, 비로소 몸을 움직여 술잔을 주고 받는다
[허] 멀리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소이다. 변진사, 어서 한잔 드시오.
[변] 감사합니다.
[허] 안주라곤 콩나물뿐이라서 --- 옳아, 오늘은 미역 무친 게 있군.
[변] 오늘은 사또 안전께 특히---
[허] 난, 사또가 아니외다.
[변] 그렇겠읍죠. 사또로 대하기엔 그릇이 크지요.
[허] 막걸리 하나만은 팔도강산 편답해도 이만할 게 없다우. 자, 한잔.
[변] 제가 온 용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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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전에 강선달을 통해 보낸 이문이 부족했던가요?
[변] 천부당허신 말씀. 상가의 상례룬 원금의 십분의 일루 충분하옵죠. 그런걸 원금의 갑절을
주셨으니---
[허] 내야, 상가의 법칙을 알아야지.
[변] 아무렴, 그러셔야죠. 상가의 풍습을 아신다는 건, 되려 사또마님의 높으신 덕을 훼손시키는
백해무익헌 일이옵니다.
[허] 어, 그럴까요? 나두 좀 배우려고 했는데? 사농공상 넷 중에서 농사두 못 짓구, 공장이
재간두 없구 장사눈치도 없음, 뭐나 해먹지?
[변] 아, 원 겸손의 말씀두.
[허] 아내 말이 이것저것 다 못허겠거들랑, 도둑질이라두 허라는바람에--- 헛, 삼년은 더
읽어야 헐 책자를 놓고 나섰던 게, 용케 변진사 영감을 만났지. 생각만 해두 등골이 오싹허구
식은 땀이 납니다. 석달을 빚진 종으로 살려니---
[변] 석달에 십만 냥을 잡으시다니, 우리들 쪼무래기 장시치들이야 날구 뛰는 재주가 있어두
생원님을 못 따릅니다.
[허] 십만 냥 돈을 쌓놓구보니 가슴이 아프구 저립디다요.
[변] 지당허신 말씀.
[허] 변진사, 아예 내가 헌 짓을 본받질랑 마슈. 과일이 있었기 무방했지, 백성에게 없어선 안될
물건을 독점해가지구 값을 올림이건 역적의 행위라오.
[변] 예, 명심하겠읍니다. 그러나 이번에 뵙고자 온 것은 장삿일이 아니오라---
[허] 돈놀일 좀 해보시려구?
[페이지] 079
[변] 아, 아니올시다.
[허] 그럼? 돈을 꾸어가실려구?
[변] 돈이 많으신가요?
[허] 힛! 그렇담 하루 늦었는걸. 이 섬에선 돈이 남아돌아가 바다에 버린다우.
[변] 바다에 버려요?
[허[ 어제두 오십만 냥을 바다에 던졌는걸요. --- 통화정책상.
[변] 오십만 냥을 바다에?
[허] 섬사람들의 돈을 합침, 넉넉히 아홉 나라 임금의 머리를 살 수두 있겠지만--- 변진사 자,
콩나물---(허, 젓가락으로 콩나물을 똘똘마라, 변진사 입에 넣어준다. 변은 황송스러이 입으러
받아 꿀꺽 삼킨다.
[변] (목메인 소리로) 생원님, 이번 소인의 용건은 장사나 돈거래가 아니오라---
[허] 아니, 그럼 무슨 일루 궁중을 한손에 쥐구 흔드는 변진사가 이 낙도엘 다 오셨수?
[변] 상감마마의 분부를 받자옵고---
[허] 상감마마?
[변] 궁중의 귀하신 분을 모시고 왔읍니다. 생원님을 만나뵐려구---
[허] 날 만나요? 이거 무슨 망령된 말씀이오?
[변] 삼문 밖에서 기다리구 계십니다. 모셔오겠습니다. (변, 일어나 우수로 퇴장)
[허] 이걸 어떡험 좋담?--- 백석도까지 궁중에서 귀하신 분이 올 때야 필유곡절이렸다. 헛!
이야말루 자다가 벼락맞긴걸.
[페이지] 080
허생원, 숨을 곳을 찾는다. 밖에서 인기척. 허, 허겁지겁 내아로 통하는 뒷마루로 퇴장. 평복으로
신분을 감춘 이완(李浣) 대장이 변의 안내로 등장.
[변] 어? 사또가 어딜 갔누? 방금 여기 있었는데?
[이] 아니 방금 여기 있던 사람이 홀연 승천을 했단말요? 땅 속으루 잠적을 했단말요?
[변] 글쎄올시다. 괴이헌 일두있지, 장군님, 확실히 소인허구 여기 마루 위에서 권커니
자커니---하, 하아? 뒷간엘 갔나? 사또! 허 사또! 허? 소식과 행방이 아울러 묘연허구나--- 얘,
억쇠야! 네놈두 좀 나와서 찾아라, 너희 사또마님. (변진사, 이완과 함께 계속 이구석 저구석을
샅샅이 뒤진다. 억쇠, 뒤쳐나와 두 사람의 꼴을 보고 웃는다)
[억쇠] 마님, 머 잊으셨사와요?
[변] 너희 사또마님, 내아에 드셨냐?
[억쇠] 아아뇨?
[이] 헛, 그래애 이야말루 선관이 신출귀몰의 조활 부리는가보구나.
[억쇠] 생원님이 꺼졌군입쇼?
[변] 방금 여기 있었는데?
[억쇠] 히히히.
[변] ?---
[억쇠] (귓속) 생원님은 사람 꼬락서니가 뵈기 싫을 때마다 잠적허는 은신처가 있사와요. 이리
오십쇼, 마님.
억쇠,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대청마루로 오른다. 뒤따르는 두 사람. 억쇠, 소리나지 않게 살며시
병풍을 걷는다. 그런 줄도
[페이지 081
모르고 안심하고 병풍 뒤에서 쪼그리고 앉아 코털을 뽑노라 여념이 없는 허생원.
[이] 여기 있다.
[허] 어이쿠!
[억쇠] 히히히.(억쇠, 병풍을 접어서 들고, 뒷마루로 해서 내아로 퇴장. 허, 아직도 숨을 곳을
찾는지 네발 걸음으로 마루 위를 맴돈다. 꼬리잡이하듯, 변진사와 이장군도. 허, 내아로
도망치려는 것을 변진사가 민첩하게 덮친다.
[변] 잡았다! 우리 사또!
[허] (겁을 먹고) 나, 난 사또가 아니라니까요?
[변] 종二(이)품 어영대장 이완 장군이시오.
[허] (더욱 떨며) 장군? --- 내가 뭘 잘못했다구?
[이] 잘못이라뇨? 원 당찮은 말씀두! 전 사또를 모시러 왔소이다. (큰절)
[허] (황급히 맞절) 모시러? 누굴? 날? 왜?
[이] 낙도에 계신다구 사또께서 나랏일을 한신들 잊으실리야 있겠소?
[허] 제가 언제부터 사똘니까?
[이] 이러지 마시오. 일찌기 변진사를 통해, 사또 성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소이다.
[허] (겨우 안심하고 대좌, 두 손을 내저으며) 신관이 도임헐 때가지 동헌을 비울 수 없어
지키구 있을 따름입네다.
[이] 그럼, 신관이 도임 않음 언제까지나 이 섬에서 어둠에 잠겨 세상을 마칠 생각이오?
[허] 헐수없죠, 머. 예로부터 어둠에 잠긴 사람이, 머 한둘이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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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 수, 술이 있소이다. 코, 콩나물두 있구. (허, 콩나물을 젓가락에 똘똘말아 이완의 입에
넣어준다. 허(虛)를 찔린 이완, 어린애처럼 입으로 받아먹는다)
[허] (안주를 고르며) 趙聖基(조성기)란 사람은 원수 나라에 사신으로 보낼 말하건만, 잠뱅이루
늙어죽었구--- 磻溪 柳馨遠(반계 유형원)두 넉넉히 군량을 나를만헌데, 扶安(부안)에서
허송세월을 허구 있소이다.
[이] 알구 있소이다.
[허] 이거, 콩나물허구 미역밖에 없으니--- 어디 뭐 좀 없나. (일어나려고)
[변] 안주 걱정은 마시오. 생원님 같은 사대부들이 이런 때 앞장을 서서 팔뚝을 뽐내고 슬기를
펴지 않음 누가 허겠소?
[허] 뭘 해요?
[변] 팔뚝을---이거--- 팔뚝 말씀이오.
[허] 어젠 바다낚실 나갔지만, 어디 꽁치 한 마리 물어줘야말이지.
[이] (심각하게) 상감께선 북쪽 경영에 골몰허시답니다. 볼모살이 팔년에 원한이 사모치신
거라우.
[허] (무관심)
[변] 시정과 여염에 혹시 기이헌 재주가 있어, 나랏일을 함께 의논헐 자가 없을까 말씀하시믄성
낙루하셨소.
[허] 상감께선 그런 사혐으로 북쪽을 경영허신답니까?
[이] 상감마마뿐이 아니오. 영의정 대감께서두---
[허] 그분이야, 이미 멸망한 명나라지만 아직두 이나라에 살아남은 유일한 명나라 충신일걸,
머---콩나물?
[이] 아, 그만 충분하오. 바루 그점이오. 명나라는 망했지만, 우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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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명나라의 은의에 보답허지 못했소이다.
[허] 그건 개인사정이구.
[이] 그걸 영의정 개인사정으로만 보겠소? 허사또는 병자년 삼전도의 굴욕을---
[허] 해는 짧은데 말을 길겠는걸---(일어서며) 옳지, 육포가 어디 있을 거야.
[이] 사또!
[허] 난 사또가 아니라니까요. (허, 여기저기 찾다가 드디어 백자항아리에서 육포를
끄집어낸다.)
[허] 헛! 여기다 두구설랑!
[변] 육포 조박이나 먹으려구 온 게 아닙니다.
[허] (제자리에 앉으며) 이것밖에 없는 걸 어떡헙니까? 내가 본래 육식을 않기에 이거라두
남았지.
[이] (진지하게) 조련을 끝낸 군사가 일만오천은 되오.
[허] 장군두 육식을 좋아하지 않으신가본데?
[이] 군량과 마초두 일년쯤을 지탱하게끔 비축되었소.
[허] 일만오천 군량과 마초가?
[이] 예, 아니 군사가.
[허] (허리를 잡고 웃는다)
[이] 군량과 마초는---
[허] 일년을 지탱헌다?
[이] 그렇소.
[허] (데굴데굴 구르며) 으하하하--- 임진왜란이 일기 훨씬 전에 율곡 선생이 뭐랬죠? 북쪽
오랑캐와 남쪽 왜놈을 막으렴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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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만 말이의다, 장군. 막으렴---십만의 군사를 길러야 헌다구---으하하하 ---일만오천으루
일년을 지탱헌다? 거 참, 장허시우.
[이] 그렇다구, 한달에 몇차례씩 북변을 침범허는 오랑캐를 그냥 두구 볼 순 없지 않소?
[허] (대들다시피) 북방에 설치헌 여섯 개 진에선 뭣들 하나요?
[이] 그런 미봉책으로 해결 안되오.
[허] 그럼 멸망한 명나랄 위해서, 청국을 쳐야 직성이 풀린다 말씀이오?
[이] 명나라에 대헌 은의를 생각험---
[허] 옳아, 박첨지가 가져온 지가 일년이 넘었어---내가 섬으루 오자마자였으니까요.
[이] (실망해서 변진사를 본 뿐)
[허] 길을 따루 있지.
[이] 어떤 길? 무슨 방법?
[허] 만주 오랑캐에 쫓겨, 우리나라루 온 명나라 난민의 수효가 적지 않다믄성요?
[이] 예, 그것두 골칫덩어리의 하나요.
[변] 여염집 부녀자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허] 그렇담. 그 친구들 장갈 보내둬야겠구먼?
[이] 장가?
[허] 예, 은헤에 보답하려면--- 양반 재상가에서 골고루 규수를 골라서, 홀애비들에게 시집을
보내구 살림두 차려주시구---
[이] 허 허어? 아직 나이두 젊은 양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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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그럼 여염집 부녀자에게만 욕을 보이게 헐 셈이오?
[이] 용의치 않은 일이오.
[허] 그걸 못하겠더든?--- 그럼, 양반이나 재상가의 자제를 만주땅으루 보내시지.
[이] 아니, 양반 자젤 오랑캐 땅으루?
[허] 머리두 깍구 청인의 옷을 입혀서---
[이] 상투를 짤라요?
[허] 예, 그래서 賓貢科(빈공과) 과거에두 응시시키는거라.
[변] 헛헛! 생원님, 그래 그게 명나를 위허는 거요, 청국을 위허는 거요?
[이] 요즘, 우리 사대부들은 모두가 삼가 예법을 지키는 바라, 그런 소릴랑 입 밖에두 내지
마오.
[허] 뭐, 사대부? 예법? 도대체 사대부란 뭐 말라죽은 귀신들이오? 남쪽 미개인의 방망이
상투처럼 머리털을 한테 묶어서 송곳처럼 짜구 앉았음 예법에 들어맞는 거요.
[변] 생원님, 종2(이)품 어영대장 안전이오.
[허] (변에게) 양반 나으리들은 이례준칙으루 불가능허다 허니, 그럼 마지막으로 변진사밖에
해낼 사람이 없구먼?
[변] (펄쩍뛰며) 헛, 소인이?
[허] 진사가 턱으루 부릴 수 있는 운종가 사람들을 멀리 강남땅으로 보내시오.
[변] 예? 강남으루? 그러나 거기두 이미 오랑캐 땅이 아니오?
[허] 잡상들이 이미 들구난다는 소식을 내가 머, 모를 줄 알구?
[변] 아, 예. 가아끔 어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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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그건 명나랄 위함이오? 청나랄 위함이오?
[변] 우리가 다른 나라보담, 솔선해서 항복을 했으니, 오랑캐편에선 조선 장사치람
그만이라기에 그저 가아끔.
[허] 암, 변진사가 누구라구? 그래, 그 친구들 상툰 잘랐나요?
[변] 상투요?
[허] 아니, 변진사두 상투가 아깝소? 캐구 봄, 천 석짜리.
[변] 예, 소인이야 근본이 운종가 출신에 지나지 않소이다만
[허] 장사치들에게 상투가 무슨 소용이며 사대부의 의례 준칙이 무슨 아랑곳할 바요? 이왕
오랑캐허구 상종할 바에야 상투쯤, 머. (코로 맡아보고)아, 이 육포 좀 변했나 보다? 얘, 억쇠야!
[이] 생원님, 잡인을 물리치구 우리끼리 은밀히.
[허] 그래두, 원 멀리서 오신 손님대접이 이럴 수가 있읍니까? 얘, 억쇠야!
[이] 안주 땜에 온 게 아니라니까요!
[허] 그래요? 정말?
[이] 그래, 상툴 짜르군?
[허] 돈두 벌구--- 그 사람들과 사귀다가, 명나라 태조와 본관이 같은 주씨들을 만나거든,
그들과는 특히 좋이 지내는 게라. 요행 주씨 문중에서 임금이라두 나오게 됨---
[변] 임금?
[허] (무릎을 치며) 그땐, 영락없이 우린 청국의 스승이 되겠군!
[이] 청국의 스승?
[허] 아니, 명나라의 삼춘쯤--- 되나?
[이] (변에게, 허생원이 좀 이상하다는 시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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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작게) 첨 만날 때부터 좀 이상했읍죠.
[이] 잠꼬대요.
[변] 망상이오.
[허] 그렇소, 꿈에서 깨시오, 노고지리 우짖는다.
[변] 헛! 수륙 천리길을 헛탕 쳤군--- 장군님 뵈올 낯이 없읍니다.
[이] 상감께 뭐라구 품헌다?
[허] 그만 돌아가시게? (생각하고) 가만있자---그런게 아니렷다. 갈 사람은 따루있어. 병풍
뒤까지 쑤셔냈으니 이제 내 몸 둘 곳이 어딨지? 얘, 억쇠야?
[억쇠] (등장) 예이.
[허] 백사장들 빠짐없이 들라 해라.
[억쇠] 예이. 백사장들 들랍시오.
박몽인을 비롯하여 백사장, 그를 포함한 십수명 좌수로 등장, 대청 앞에 정렬한다. 허, 쪼르르
대청마루에서 뜰로 내려와서 사열하듯, 일동을 훑어본다.
[일동] ?---
[허] 난 그만 가겠소.
[백사장1] 가시다닙쇼?
[허] (이완을 돌아보며) 궁중에서 나오셨으니 알아서 허시겠지만, 곧 훌륭헌 사또가 도임할
거요.
[박] 그럼, 생원님은 내직으로 듭시나요?
[허] 내직? 내 관상을 보구 좀 말허우, 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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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장2] 그럼 다른 섬으루 옮기잔 말씸입니까?
[허] 아아니
[백사장2] 그럼 어디로 가잔 말씸입쇼?
[허] 가자는 게 아뇨. 나 혼자 간단말요.
[백사장들] 혼자서요?
[허] 당신네들이 있으니, 떠나는 내 맘두 든든하외다.
[백사장1] 안될 말씸이오, 생원님!
[허] 그럼, 당신네두 나와 함께 가겠단말요?
[백사장들] 물론이죠!
[허] 그렇게 됨, 십사장들두 들먹거릴 거 아뇨?
[백사장들] 물론이죠!
[허] 헛, 그럼 채석장 일은 누가 돌본다? 금싸래기 같은 돌이 아직두 무진장인데.
[백사장1] 그럼 도대체 혼자서 어디루 가신단 말씸이시오?
[허] (수연히 토방에 쭈그리고 입안의 소리) --- 공부두 계속 허야겠구--- 남산골 집두 너무
오래 비웠어. 그동안에 마누란 굶어죽지나 않았는지 몰라?
[백사장들] ---
[허] 벌써 날이 저물었네?
[박] 생원님, 생각을 돌리십쇼.
[허] 더 만류허지 마오. 맘이 괴롭소. (마루를 향하여) 모처럼 찾아오신 손님대접이 아닙니다만.
(허생원, 이장군과 변진사에게 목례하고 우수로 향한다)
[허] (백사장들에게) 이미 날이 저물었지만, 떠나기 전에 돌캐는 소리나 한번 더 들어봤음? (허,
퇴장. 백사장들, 그를 옹위하듯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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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른다. 억쇠, 머뭇거리다가 역시 우수로 퇴장하려고 한다)
[변] 억쇠야.
[억쇠] 예?
[변] 실내마만 어째서 이런 판국에 꼼짝 않구 계시냐?
[억쇠] 실내마마라닙쇼? 아가씨 말입쑈?
[변] 어느 세상에 실내마마가 둘 셋씩 있느냐?
[억쇠] 아가씬 아직두 부엌데긴걸입쇼. 식모두 좋구 침모나 종살일 해두 좋다는걸입쇼.
[변] 아니, 아가씨가 아직 그 고생이냐?
[억쇠] 저 좋아서 사서 하는 고생인걸입쇼, 머.
[변] 그애두 제 정신이 아니로구나?
[이] 따님두 여기 와 있소?
[변] (한숨) 예, 사윗감으로 점찍어 놨다는 게 저 꼴 아닙니까.
[억쇠] 영감마님께서 허락하시구설랑?
[변] 생각할수록 분허기만 허다. 어서 모시구 나오너라 함께 서울루 올라가자.
[억쇠] 흥! 쇤넨 생원님 따라갈걸입쇼.
[변] 아니, 넌 아직두 저 실성한 놈을 쫓아다닐 생각이냐?
[억쇠] 실성은 누가 했는뎁쇼?
[변] 아, 저놈--- 옛 상전을 몰라보구?
[억쇠] 매화야---아, 아니 아가씨. (억쇠, 내아로 통하는 일각문으로 퇴장)
[이] --- 어쩐지 난 천하의 기인을 잃은 것 같구려.
[변] 깨끗이 잊읍시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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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럴까?---
[변] 오십만 냥을 바다에 처넣은 놈 아닙니까?
[이] 행동거지가 좀 이상허긴 하지만---
[변] 느닷없이 상툴 짜르지 않나---
[이] 그래. 양반댁 규수를 명나라 홀애비헌테 내주라니.
[변] 그리구 머, 스승이 아님 삼춘이 된다구?
[이] 으흠.
[변] 내 외동딸이, 저 미친놈의 부엌살일 했다니 생각만 해두 눈물이 쏟아집니다. (밖에서,
허생원을 환송하는 훤소 취라 소리)
[매화] (밖에서) 생원님!
[변] (깜짝 놀란다) 아, 저거 내 딸년 아냐? (변, 내아로 급히 달려갔다가 튀어나온다)
[매화] (밖에서) 기다려줘요, 생원님! 쇤네두 함께 가요! 나 혼자서 어떻게 살아요-- 쇤네두,
(점점 멀어지며) 함께 가요오.
변진사, 황급히 삼문으로 향하려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은행나무에 기어올라, 후경에 보이는
바닷가를 멀리 굽어본다.
[변] 아이구, 저기 억쇠놈과 뛰어가는 게 틀림없이 내 딸년이로구나! (소리지른다) 얘야, 아가!
네가 미쳤냐? 아가!
[매화] (밖에서 더울 멀어지며) 생원님---생원님---생원님--- 징소리와 취라 소리에
사람들의 혼성이 섞인다.
[변] 전송나온 사람들이 구름 같구나. 얘가 어디 묻혔는지 이젠 뵈지두 않는구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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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변진사.
[변] 장군님은 기인을 잃었다지만 소인은 미친놈에게 외동딸을 뺏겼나봅니다.
[이] 허생원은 실성한 사람이 아니오.
[변] 예?
[이] 실성헌 사람은 내요.
[변] 아니, 장군님이 실성했다니?---
변진사, 완전 혼란, 이장군을 유심히 지켜보며 나무를 내려올 때 난데없는 굉음. 변,
대경실색하여 다시 나무 위로.
[변] 어이쿠, 이게 무슨 소린구?
[이] (조용히) 돌캐는 소리여--- 변진사, 생원이 섬을 떠나기 전에 한번만 더 듣구
싶다던---돌캐는 소리란말여
변진사, 다시 나무위에서 내려오려고 할 때 또 한번 폭파음. 변, 나무 위로 기어올라
나뭇가지를 얼싸안고, 눈이 휘둥그래져서 도롱도롱 나무 위에 맺힌다. 폭파음 계속하는 가운데-
[후기] 一九세기의 대표적인 實學派(실학파) 학자의 한 사람인 燕巖(연암) 朴趾源(박지원)의
단편, <許生(허생)> 李家源(이가원) 교수 譯編(역편) [李朝漢文小說選收錄(이조한문소설선수녹])을
원본으로하고 아울러 同人(동인)의 단편 <兩班傳(양반전)과 故(고) 蔡萬植(채만식)씨의 소설
<許生傳(허생전)>을 부분적으로 인용,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一九七(일구칠)0년 四(사)월 作者(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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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오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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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14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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