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지방 3•1운동은 독립혁명
서울연회본부는 2001년 새 천년이 시작되는 해 3•1절을 맞아, 그 동안 감리교회가 가진 위대한 족적(足跡)을 찾아 입수한 자료 가운데 일부나마, 3•1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을 발췌해 '삼일운동, 그 날의 기록‘을 출판하여 우리 민족사에 내놓았다.
그 가운데 마티 윌콕스 노블(1872-1956) 선교사의 일기(문건 4권, 51-81p) 부분을 중심으로 3•1운동의 진상을 살펴보면,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통치에 저항한 전 민족의 의거(義擧)는 고종의 밀명을 받은 하란사와 의친왕 이강 공이 손정도 목사의 안내로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과정에서, 두 밀사가 단동에서 일경에 잡혀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등 애국독립운동이 미수(未遂)에 그치게 되자, 이후 왕비의 숙부로 최고 권력자인 찬시(贊侍) 윤덕영이 내시 호상학을 교사(敎唆), 고종 황제를 독살함으로 기인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 오전에, 돌아가신 전 황제(고종)가 사실은 일본 정부의 사주(使嗾)에 의하여 살해된 것이라는 전단이 온 거리에 뿌려졌다.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의 전갈을 황제가 강화회의에 전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을 저지하려고 죽인 거라는 내용이었다.’(22면) “오, 황제께서는 참담한 심정으로 돌아가셨다. 우리는 황제께서 어째서 돌아가셨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이제 2백만의 충성되고 한국을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황제께서 어떻게 죽음을 당하셨는지 설명하려고 한다.”
- 최근 강화회의에서 13개의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거기에 세계 많은 나라들의 자유가 걸려있다. 이제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국가의 권리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회의에서 확인된 것이다. 일본과 한국은 공동으로 움직일 때 더욱 발전할 수 있으며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다음 문서에 사람들은 거의 억지로 서명할 것을 강요받았다. 전 황제는 격노하여 서명을 거부했고 그러자 서명을 강요하던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까 두려워 전 황제를 독살하고 상궁들을 죽였다. ... 윤덕영과 호상학. - (29면)
특히, 일제의 총칼과 맨주먹으로 맞서 100여 명이 순국(殉國)한 감리회 수원지방 3•1독립운동은, 제암리교회 외 5개 처 교회 16개 마을을 불태웠고, 죽은 사람도 29명이 아닌 100 여명이 넘는 숫자로, 이는 불의에 항거한 4.19학생혁명보다 한 차원 높은 항일운동으로,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감리회 수원지방 교회들이 주도한 독립혁명이었음이 윌리암 아더 노블(1866-1945) 수원지방 감리사 부인, 마티 윌콕스 노블 문건이 밝히고 있다.
ⅰ. 축소된 사건의 경위
무참한 학살 사건이 자행된 제암리교회는 1905년 8월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당시 이곳 사람 안정후가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친척들을 전도하여 예배드림으로 창립되었다. 제암리교회는 1911년 8칸의 예배당을 건축했고 당시 수촌리교회 김교철 목사와 남양교회 동석기 목사가 순회하며 교회를 돌보고 있었다.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민족교육을 받은 이 교회 안종후, 안종린 형제를 중심으로 천도교인으로 민족주의자인 이웃마을 고주리 김성렬과 모의, 3월 15일경부터 밤마다 뒷산에 올라가 봉화 불을 올리며 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3월 31일과 4월 5일에는 인근 발안(發安) 장터에 나가 대규모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이 발안 시위에 일본 군경이 총격을 가해, 5명이 사망했고 안진순 이하 여러 교인이 체포되었다.
사건 후 이들은, 제암리교회 앞마당에(사망자 장례문제 등 문제협의) 모였던 바, 일본 경찰 4명이 긴급 출동, 충돌하는 가운데 주재소장 사사카(佐板)의 총에 주동자 안종후가 맞아 쓰러졌다. 이에 군중이 격분하여 돌과 몽둥이를 들고 항거에 나서 도망치는 일본 경찰 한 명을 추격하여 타살했다. 이에 수원지방 헌병대장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인솔하는 헌병(일본군 20사단 39여단 제79연대)들이 출동하여 주모자 색출에 나서 야간에 안종후, 강태성, 김세열, 홍원식 등이 체포되는 과정에서 또다시 충돌, 물레방아 거리에서 일본 헌병 2명이 타살 당했고, 주재소를 습격했으며 일본인 가옥을 방화했다.
일본 군경이 연이어 타살되고 일본인 가옥의 방화와 주재소가 습격되자 발안 주재 순사보, 조기창과 제암리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던 일본인 사헤케(佐伯)를 통해 주모자 명단을 파악한 일본군은 4월 15일 1개 중대 병력 30여 명을 제암리에 급파, 마을을 포위한 후 성인 남자 모두를 모이게 하고 교회당에 모인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에게 처음에는 그 동안 자신들이 저지른 야만적인 행위를 반성하는듯하더니 아리타 중위가 교회 밖으로 나오면서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교회를 포위하고 있던 헌병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당시, 교회당에 있었던 사람 중 노경태 한 사람만 살아남아 도망쳤고 남편이 교회당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홍원식 권사의 부인 김씨 또한 달려오던 현장에서 총에 맞아 죽었으며 3대 독자인 강태성 속장의 부인이 통곡하는 것을 보고는 칼로 그의 머리를 쳐서 죽게 하였다. 또한 교회당에 감금된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를 창밖으로 내 보내며 ‘어린 것만은 살려 달라’고 했는데도 칼로 그 어린아이를 찔러 죽이는 야만적인 행위를 자행했을 뿐 아니라 교회당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질러 시체 모두를 태움으로 제암리를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이어, 그들은 이웃 고주리로 달려가 천도교인 김성렬을 비롯한 주모자 6명을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웠고, 같은 날 수촌리에서 4월 21에는 화수리에서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으로 숨진 사람은 제암리에 남자 21명, 여자 2명, 고수리 6명 등 29명이었다. 이 사건이 서울에 알려지자 사건이 난 이틀 후인 4월 16일 언더우드 선교사가, 당시 주한 미국 영사 커티스와 현장에 달려와 이 참상을 미국 선교부에 알렸으며, 4월 17일 감리교회 수원지방 노블 감리사와 게일, 케이블, 빌링스, 벅크 선교사와 스코필드 박사, 캐나다 선교사인 하디 선교사가 내려와 현장을 돌아보고 일제의 야만적 행위를 국제 사회에 알렸다.
ⅱ. 노블 문건에서 밝혀진 사건의 내용
노블 문건에 의하면 일본 군경이 3월 15일 만세 시위자의 마을인 제암리교회를 불사르고 23명을 살상한데 이어, 천도교 시위 주동자 마을인 고주리에서 6명을 총살하는 등 29명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문건에 의하면 그 이전 사강리에서 39명이 총살되었고 326채의 가옥이 불타 1,600명의 이재민이 발생되었을 뿐 아니라, 이 사건은 제암리 중심의 두 마을에서 4~5일 간에 벌어진 일제의 만행으로 30여 명이 처참하게 죽었으며, 연 이어 16개 마을에서 학살이 자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원지방내 또 다른 5개 처 교회가 같은 화를 당했다는 것이다.
노블 감리사(부인)의 현장 기록에 의하면, ‘또 다른 다섯 마을의 상황은 시체가 묻혀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암리와 다를 바 없었다. 이 지역에서만도 16개 마을이 전멸되다시피 하였다.’고 했고, ‘또 다른 마을의 어떤 여자는 교회 교인 중 총에 맞거나 타죽은 사람 11명의 이름을 적어 주었다.’ ‘이 같은 만행은 제암리에서 약 20리 떨어진 아찬 마을에서였다.’ 또한, ‘살해당한 우리 감리교회 목사의 아들을 보았는데 그는 핏발 선 눈에 머리를 산발하고…’, ‘열흘 전에 부상을 당하고 전혀 치료나 도움을 받지 못한 한 남자는 몹시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들이 알기로는 그 지역에서만 16개의 마을이 전멸되다시피 했다. 양쪽 끝의 몇 집을 빼고는 성한 집이 없었고 남은 집들에는 여자들과 애들 몇 명이 숨어 지내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쳐 풀뿌리나 나무뿌리를 파먹고 살고 있었다.’는 기록과 ‘정동교회의 한 여신도가 그 지역에서 사는 아버지와 가족의 안부가 궁금해 친정을 방문했다. 친정집은 넓은 평야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동시에 아홉 개의 마을이 불타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아기와 15살 난 아이를 데리고 황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우리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는 최근 그 지역에 사는 친척들 중에 세 집이 불타버렸으며 장모가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의 장인 장모와 자녀들은 살던 집이 불타버린 뒤에 주위의 산에 숨어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아침 다른 산으로 가던 장모가 군인들의 눈에 띄어 죽고 말았다. 요리사는 다른 친지들을 만나러 그저께 떠났다’는 등 간접적인 증언을 통한 사건의 정황 기록도 있다.
이 지역 교회 책임자였던 ’아더 노블 감리사는 화재가 난 남양에 갔다가 5월 15일 밤에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감옥에서 매를 맞아 죽고 그 시체는 타버린 어느 젊은이의 부탁으로 그와 함께 교도소로 가서 아버지의 유골을 받아 지게에 지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20마일 떨어진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일본 군인들이 따라와 그 아들을 붙잡아 갔다. 체포된 그는 아버지의 유골을 지고 아버지가 화를 당한 마을로 끌려와 가장 가까운 교도소에 수감되어 2주일간 갇혀 있었다. 그는 2주 후에 다시 아버지의 유골을 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를 잃고 감옥에서 나온 그 젊은이와 남편을 잃은 가련한 부인(젊은이의 어머니)의 얼굴보다 더 슬픈 얼굴은 정말이지, 본 적이 없다고 남편(아더 노블)은 말했다’는 애절한 기록도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사망자 기록만도 3월 30일 수원에서 30명이 죽었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제암리 29명, 사강리 39명, 어천리 11명 등 어림잡아도 109명이나 된다. 이와 관련하여 유의해 볼 만한 기록이 있다. ‘선동자들이 총에 맞거나 칼에 찔려서 죽었을 때 친지나 친구들이 매장 허가를 얻으려면 사망 원인을 써내야 한다. 만일 총상이나 칼에 찔린 자상이 원인이라고 써내면 허가가 나지 않는다. 허가를 얻으려면 자연사라고 써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사건의 기록은, 4월 15일의 제암리 만행이 확대되어 4월 19일 전후해 16개 마을 5개 교회에서 더 큰 만행이 자행되었다는 것과, 이 엄청난 참변(慘變) 현장을 영국과 미국 공사가 방문했고, 하세가와(長谷川) 총독이 직접 수습에 나서 사건을 축소, 은폐했다는 것이다.
하세가와 총독은 노블 감리사에게 전소한 3개 교회에 대해서 한 교회당 재건축비 5백엔을 지급하는 대신 이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했으며, 16개 마을에서 5개 처의 감리교회가 전소됐고 불탄 집, 한 집당 50엔씩을 주겠다고 하나 가장 싼 집이라도 재건축하는데 250엔이 들고 쓸만한 집은 1천 엔이 들어간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사건은, 은폐되어 역사에 묻혀 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노블 감리사는 “이후에도 이들은 불시 검문을 통해 성경이나 찬송가를 발견하면 즉시 경찰서로 끌고 가, 그중 한 사람(홍씨)이 죽어 5월 15일 현지에 내려가 장례를 치루었다.”는 증언을 하고 있어 3•.1운동을 보는 일제의 시각, 즉 3•1운동은 감리교회가 일으킨 독립운동임을 시사하고 있다. 수원지방을 중심으로 한 3•1운동은 대학살 사건으로, 독립혁명과도 같은 차원에서 재조사되고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ⅲ. 수원지방 3.1운동은 독립혁명
1919년 3월 15일~5월 30일을 기준으로 수원, 남양, 사강, 제암, 어천, 고주, 수천, 화수리 등 16개 마을의 사망 기록을 확인해 볼 수 있다면 대충이나마 죽은 사람의 이름과 숫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추측컨대 이 숫자는, 500명은 넘을 것이며 사건으로는 1942년 나찌 등이 체코의 작은 마을 리디체(Lidice)에서 행한 대학살 사건보다 20여년 더 앞선 것이었고, 1960년 3.15마산 항거에 이은 4.19학생혁명보다 5배나 큰, 비무장 독립혁명이었다고 본다.
이 육필(肉筆)의 주인인 노블 감리사(부인)는 한국 감리교회의 핵심인 정동구역회를 관장한 감리사를 선두로 42년간 한국 감리교회를 지킨 분 일 뿐 아니라, 그 분의 아들 하워드 노블은 해방 직후 맥아더 사령부의 최고위 정보 보좌관으로 근무하면서 소련의 전면 남침을 38선에서 막은 최고의 공로자이기도 하다. 그는 U.N.군의 참전에 앞서 미극동군이 무조건 개입되도록 맥아더를 설득시킨 분이기 때문이다. 노블의 큰 딸은 아펜젤러 선교사의 장남과 결혼하였다.
3•1운동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 속에 발흥한 독립혁명으로,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에 목숨을 걸고 싸운 단일 민족의 단합된 대 항거이며, 전 민족이 참여한 정치적 투쟁이다. 이 운동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상해 임시독립정부를 수립하게 했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이 땅에 건국하는데 밑바탕이 되었다.
<대한민국헌법 전문> -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