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 언어의 필요성은 상상력의 작용과 연결시켜 보면 더욱 명백해진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제창한 물질적 상상력, 역동적 상상력, 원형적 상상력으로 구성된 문학적 상상력의 작동방식과 연결시켜 보면 이러한 논리는 당위성을 확보한다. 물질적 상상력은 만물 속에 기본적으로 임재한 불변의 물질성에 의해 그 이미지가 결정된다. 4원소인 흙·물·불·공기의 결합비율에 의해 결정되는 물질적 이미지는 대상세계로부터 분출될 때 함께 나온 역동적 상상력에 의해 작가가 꿈꾸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비상하게 된다. 이러한 자발적 존재생성의 힘은 원형적 상상력과 연결되면서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궁극성의 세계인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의 세계인 원형에 이르게 된다.
앞서의 언급처럼, 인간이 언어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범주는 언어도단의 경계선까지이다. 언어의 길이 끊어진, 언어도단의 경계선 너머로 작가의 의식을 이끌어 주는 것은 바로 영성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작가의 역동적 상상력을 보편적 본질세계인 원형적 상상력의 세계까지 인도하는 것이 바로 영성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영성을 획득하여 원형적 상상력의 시공간이자 본질 세계인 진리와 교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허구문학에서 상상력은 소재의 채취와 사건 및 이야기의 구성, 인물창조, 시공간과 배경의 창조, 주제의 형상화 등 창조행위를 총체적으로 이끌면서, 인식과 표상의 핵심원리로 작용한다. 이에 비해, 비허구문학인 수필 텍스트에서는 실제로 존재했던 사건과 이야기를 다루므로 상상력은 주로 이야기의 미학성 증진을 위한 사건의 배열방법과 주제, 이야기의 미적 형상화, 그리고 철학성과 미학성 등에 대한 심오한 해석과 인식작용 등을 이끈다.
② 수필언어의 본성
수필언어는 장점이 많은 언어이다. 그것은 산문과 운문의 중간 장르적 속성을 구비하고, 이 두 장르가 지닌 미덕들을 수용하여 산문적 바탕에 운문적 속성을 가미한 절묘한 언어감각을 발휘한다. 그래서 수필언어 속에는 변증성과 서사성, 운문성, 리듬성, 반추성, 체험성, 고백성, 사실성, 함축성, 절제성, 자각성, 영성, 대중성, 흥미성, 평이성, 소박성, 품격성, 세련성, 격조성, 여운성 등의 미덕과 속성들이 골고루 함유되어 있다.
첫째, 수필의 언어는 운문과 산문의 언어적 특성을 변증법적으로 지양시킨 언어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수필의 언어는 산문과 운문의 극단적 속성을 버리고 중간적 장점을 취하는 대신, 이들의 단점을 절제하는 미덕을 요구한다. 수필 문장이 산문의 서사성(이야기성)과 흥미성, 운문의 리듬성과 함축(내포)성 등을 즐기는 대신 소설의 장문성(長文性)과 수다성, 시의 지나친 함축과 난해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 이를 증명한다.
둘째, 수필의 언어는 체험의 언어이다. 수필작가는 자기의 체험 속에서 글감을 취하고 사실을 바탕으로 삶을 반추하는 형식으로 고백을 즐긴다. 시와 소설의 언어가 상상력을 빌어 허구적 진실을 꿈꾸는 데 비해, 수필의 언어는 작가로 하여금 자기의 체험을 털어놓고 곱씹으면서 사실 고백에 전념하게 한다. 체험의 사실적 반추가 수필의 미덕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셋째, 수필의 언어는 각성의 언어이다. 자기 체험의 사실적 반추를 통해 획득된 언어는 기본적으로 각성의 고백에 목표를 둔다. 각성의 언어는 수다와 미문보다는 함축과 절제의 수사를 즐긴다. 언어를 통해서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언어가 바로 초월적 각성의 언어라는 점에서 세련된 수필의 언어는 바로 영성을 통한 본질추구의 미덕을 지향한다. 세련되면서도 난해하지 않은 평이한 함축과 절제를 머금은 산문 속에 깨달음을 동반한 암시적인 영성의 언어가 수필작가들의 연금술적 목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넷째, 수필의 언어는 세련의 언어이다. 이른바 산문언어이면서도 동시에 함축의 멋과 여운의 맛을 추구하는 언어가 바로 수필언어라는 뜻이다. 언어의 멋과 맛을 내기 위해서는 고도의 세련성을 목표로 하는 언어의 조탁(彫琢) 과정을 필요로 한다. 화려한 수식을 배제하면서 감정의 절제를 요구하는 문장 속에는 품격과 격조가 스미고 여운이 맺히기 마련이다.
다섯째, 수필의 언어는 대중 친화적 언어이다. 수필은 기본적으로 작가와 독자의 거리를 두지 않는 만인의 문학을 표방한다. 따라서 시처럼 난해한 작법이나 소설처럼 복잡한 구성법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수필은 흥미로운 삶의 체험을 간결하고 평이한 문장에 실어 전달하는 대중성이 강한 언어를 쓰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깊은 사색과 기품을 요구하는 속성을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수필언어는 산문과 운문의 양 극단으로부터 취한 중간 장르적 장점들을 미덕으로 삼아, 대중적이면서도 기품 있는 문장의 맛과 멋을 추구하는 언어미학적 특성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2)서사의 조직원리
일반적으로 서사문학은 두 가지의 이야기를 내포한다. 하나는 소재로서의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담화(플롯)로서의 이야기이다. 전자는 작가의 미적 창작의도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단순한 글감 수준의 이야기라면, 후자는 그 글감에 작가의 창작의도와 문학성(예술성)을 가미시켜 재구성한 문학적 이야기이다. 이러한 문학 텍스트는 플롯에 의해 조직되는 표면구조(surface structure)와 그 표면구조 아래 스토리에 의해 추상되는 심층구조(deep structure)가 유기적으로 구축한 미적 통일체이다.
우선, 서사체의 표면구조는 텍스트의 의미작용을 패러프레이즈 하는 방식으로 추출할 수 있다. 이것은 작가가 스토리를 플롯으로 재구성하는 미적 변형 논리에 의해 창조되는데, 츠베탕 토도르브는 표면구조를 이루는 서사 시퀀스의 조합원리를 삽입(enchassement), 연결(enchainement), 교체(alternance, 혹은 교착<entrelacement>)의 세 가지로 설명한다. 삽입 원리에는 액자법과 삽화법이 있고, 연결은 주인공 한 사람이 모든 사건과 행동을 차례로 경험하는 중앙집권식 조합법을 가리킨다. 교체와 교착의 원리는 병렬법으로 통하는데, 교체(交替)는 평등한 가치를 지닌 두 개 이상의 이야기를 단순 교차시키는 조직법을 말하고, 교착(交錯)은 앞 이야기의 끝 부분과 뒤 이야기의 첫 부분을 중첩 교차시키는 방법을 말한다. 그 외에도 음악의 화성악을 응용한 대위법(동시병렬법)이 있는데 이 또한 병렬의 한 예가 된다.
작가는 이러한 시퀀스의 조직법을 활용하여 그 사이사이에 문학성을 생성하고 증폭시킬 수 있는 다양한 기법을 삽입한다. 이런 기법의 삽입과정을 거치면서, 이야기의 배열질서는 미적으로 변형되고 보다 예술성이 풍부한 감동적인 이야기로 창조 된다.
수필서사에서도 허구적 서사와 동일한 이야기의 조직원리가 동원된다. 수필작가 역시 소재로서의 이야기를 미적으로 배열하는 과정을 통하여 서사적 의미와 가치를 극대화시킨다. 이러한 이야기의 미적 변형과 배열방식에 대한 검증은 스토리와 플롯의 이야기 질서를 대비 연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미적 의도가 구체적으로 해체되어 재구성되면서 해명된다.
한편, 서사체의 심층구조는 A. J. 그레마스가 제의한 ‘기호학의 사각형(semiotic square)’ 논리에 의해 효과적으로 추상된다. 각각 두 쌍씩의 대립관계와 모순관계, 함축관계를 통해 변증법적으로 의미화 되는 그레마스의 이항대립구조는 자아와 세계의 대립이라는 허구적 서사체의 심층구조와 그 의미작용을 밝혀내는 데 효용성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체의 이항대립구조도가 ‘세계의 자아화’인 수필서사의 의미작용을 구조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 체계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다만, 수필 텍스트 분석에서, 그레마스의 제의는 음양사상이나 <비(非) 깨달음의 상황>을 <깨달음의 상황>으로 이끄는 식의 이른바, 이항대립을 함유한 수필서사에서는 유효할 수 있다. 예컨대, 이중액자의 틀 속에 옴니버스 기법을 삽입하여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는 김소운의「가난한 날의 행복」은 작가가 깨달음 전에는 가난 속의 불행을 인식하는 데 그쳤으나, 깨달음 후에는 가난 속의 행복을 인식하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조도가 모든 수필 텍스트의 의미작용의 기본구조를 설명하는 보편 문법이나 논리적 틀로서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검증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 기호학의 사각형은 수필 텍스트 속에서도 기본적인 의미구조와 그 작용을 추상해 올리는 논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3)소재 통찰법과 관조
수필서사는 짧은 산문임에도 불구하고 양질의 문학성과 철학성을 요구한다. 전자는 소재로서의 이야기를 예술성이 높은 문학적 이야기로 탄생시키는 속성과 힘이라면, 후자는 주제에 심오한 철학적 인식의 논리를 제공하거나 깨달음의 세계를 잉태시키는 힘이다.
이 양자는 텍스트 속에서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서, 문학성이 충일하면 그 안에 철학성이 함유되고, 철학성이 충일하면 그 내면에 문학성이 내재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문학성은 철학성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철학성은 문학성을 강화시키는 데 이바지 한다. 문학성은 독자들에게 주제와 텍스트의 예술성을 경험하게 이끌어 준다면, 철학성은 주제의 논리적 근거와 삶의 보편적 이치를 심오한 깨달음의 형태로 제공한다.
수필서사는 이처럼 짧은 산문이면서도 철학성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수필장르가 작가의 삶의 철학이나 경험철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수필작품에서 작가의 철학은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반추를 통한 보편적 깨달음과 깊은 인식의 세계를 수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수필작가의 소재 통찰법은 물리적 대상세계를 기점으로 우주의 근원세계를 투시하는 격조 높은 안목과 철학적 인식력을 요한다. 수필작가에게 망원경이나 프리즘, 현미경과 같은 다채로우면서도 대상의 세계를 총체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를테면, 수필에서는 자연을 소재로 취할 경우, 그것을 물리적 차원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인간 차원이나 우주의 근원세계와의 연결시켜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관계성을 탐구한다.
다시 말해서, 수필서사는 소재와 인간과의 관계성의 탐구는 물론, 소재-인간-우주로 이어지는 근원세계와의 관계 탐구와 의미 해석을 기도한다. 소재와 인간과의 상징적 관계는 예컨대, 철학에서 말하는 적중성, 혹은 해당성의 문제라고 한다면, 소재와 인간과 우주를 잇는 관계성은 포괄성의 문제로서 모든 것이 우주의 본질로부터 나왔거나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수필작가에게는 소재의 물질성으로부터 우주의 근원적인 본질세계까지 투시하는 통찰의 눈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대상에 대한 관조 능력이 요청된다. 이러한 소재 통찰법이 모든 수필작가들에게 보편적인 과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관조 과정에서 획득한 깨달음과 인식들이 철학성과 연결되어 형상화되기 때문이다.
수필작가에게 대상의 본질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격조 높은 영성의 겸비를 운위하는 것도 기실은 소재의 근원세계에 대한 통찰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수필시학자들이 언어, 소재, 영성의 삼자 관계의 탐구를 제의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4)행위자 모델과 통사구조
모든 서사체에는 다양한 인물이 존재한다. 그들에게는 각기 이야기 속에서 수행해야 할 중요한 기능들이 주어지고, 그들의 역할에 의해 한 편의 서사체는 행위자들의 통사구조를 형성한다. 서사시학에서는 주로 텍스트에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행위자들의 보편적인 기능을 탐색하여 일반화 한 뒤, 전체 이야기의 소통체계 속에서 통사적 관계구조를 유형화한다. 이를테면, 대개의 서사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발신자와 수신자, 주체와 대상, 보조자와 반대자 등의 존재가 그것이다.
이러한 행위자들의 보편적인 기능 유형은 러시아의 민담을 텍스트로 하여 등장인물의 기능을 31개로 유형화시킨 블라디미르 프로프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한다. 그 결과를 A. J 그레마스가 3쌍의 행위소로 유형화시킨 행위자(actant) 모델은 일반적인 서사체의 이야기 구조 속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행동의 관계망이다. 이 구조도는 이야기의 전체 주제와 전개 방향을 3가지 관계의 축을 통해 교차시킨다. 즉, 발신자→객체(대상)→수신자로 이행되는 지식의 축과 보조자→주체←반대자로 이어지는 능력의 축, 그리고 주체→객체로 이어지는 의지의 축이 그것이다. 이러한 행위자 모델은 작가가 플롯을 통해 이야기를 조직하는 인간관계의 보편적 문법으로서 기본적 관계구조를 보여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체의 행위자 유형이 수필서사에서도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보다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하다. 여기서 발신자는 주체가 어떤 행동의 목표(객체)를 설정하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자이다. 발신자에 의해 제공된 행동 목표는 주체의 의지에 의해 달성되거나 실패하게 되고 그 결과는 수신자에게 전달된다. 이 과정에서 주체의 욕망과 행동은 보조자에 의해서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반대자에 의해서는 방해를 받기도 한다.
수필 텍스트에서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각기 작가 자신과 타인일 가능성이 공존한다. 발신자와 수신자가 작가일 때는 수필이 자기 체험을 자기고백의 형태로 들려주는 자기 회귀적 내용일 경우이며, 그것이 타인일 때는 소재를 타인들로부터 제공받아 그 이야기의 의미를 독자와 공유하는 경우이다. 수필 텍스트에서 보조자와 반대자도 역시 존재할 수 있다.
5)초점화와 간극의 기능
수필서사의 초점화 작용도 시학의 중요한 탐구대상이다. 브룩스와 워렌 등의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전통소설론의 ‘서술의 초점’론은 시점과 서술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구조시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신의 초점으로 인정하는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을 제외한 어떤 시점에서도 시점의 시공간과 서술의 시공간은 일치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그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 간극(間隙)의 형태로 개입함으로써 초점화자(焦點化者)와 서술자 간의 인식 차와 관점의 거리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도표가 지시하는 것은 이야기의 체험주체이자 인식주체인 초점화자와 그 이야기를 다시 문학적으로 재구성하여 독자에게 들려주는 전달주체인 서술자 사이에는 상당한 인식상의 거리와 관점 차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데 있다. 구조시학자들은 그러한 양자간의 거리가 발생하는 원인을 초점화자와 서술자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의 기능으로부터 찾고 있다. 그래서 허구적 서사에서는 초점화자와 서술자를 서로 다른 존재로 간주한다.
수필서사에서도 이러한 초점화자와 서술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이 양자의 기능 작용에 대해서는 허구적 서사의 경우와는 구별된다. 수필은 외형적으로 동일한 작가가 시간차를 두고 자신의 경험을 비전환적 표현을 통해 자신의 입으로 들려주는 서사구조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허구적 서사체는 초점화자와 서술자를 작가가 아닌 각각 허구적 인물로 설정하는 데 비해, 수필서사는 경험적 서사체로서 초점화자와 서술자를 모두 작가 자신으로 자임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구조적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수필 서사체가 시공간적 간극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작가 자신이 제 모습을 일관되게 드러내놓고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일관성과 집중력의 차이를 낳게 한다.
그러므로, 수필서사에서는 초점화자와 서술자가 시공간적 거리를 뛰어넘어 동일한 대상을 동일한 초점으로 집중력을 갖고 일관되게 관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수필서사에서는 그러한 간극 자체가 오히려 소재에 대한 사실성과 객관적 인식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장치로 활용된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는 결국 수필서사가 허구적 서사에 비해 리얼리티를 증진시키는 구조적 우월성을 갖게 하는 데 기여한다. 다시 말하면, 창작과정에서 작가 스스로 시공간적 거리를 두고 초점화자와 서술자를 자임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이야기의 인식과 서술의 두 차원에 있어서 체험자(목격자나 증언자)로서의 사실성과 진실성을 인증 받게 하는 전략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볼 때, 수필서사의 초점화자와 서술자는 본질적으로 수필문학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6)서술 방법과 소통체계
수필시학의 서술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1인칭 서술자의 사용 문제와 시간착오, 그리고 자기 회귀적 소통체계 등에 대한 검토에 머물기로 한다.
우선, 1인칭 서술자의 사용문제는 수필만의 독특한 장르적 속성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최근에 일부 작가들이 인칭의 자유로운 사용을 실험적으로 제기하고 있으나 수필 장르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 조동일이 지적한 것처럼 수필은 비전환표현(非轉換表現)을 본성으로 갖는 문학이다. 그에게 수필의 또 다른 이름인 ‘교술(敎述)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작품외적 세계)을 서술? 전달하는 것으로서 작품외적 세계가 개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자아의 세계화’를 뜻한다. 여기서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이란 작가가 체험한 사실을 뜻하고, 작품외적 세계가 개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자아의 세계화란 작가의 경험에 대한 내적 성찰의 의미가 담겨있다.
수필에서 1인칭 서술자의 사용은 사실성과 진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서술전략과 관련된다. 실제 작가가 서술자로 얼굴을 내밀고 1인칭 고백 형식으로 서술행위를 이끄는 것은 자기의 경험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주는 최상의 서술구조를 갖게 하는 데 의미가 있다. 물론, 소설에서는 3인칭 작가 전지적 시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허구적 관점에서 서술자에게 신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을 가정하므로 사실담과는 거리가 있다. 사실담처럼 꾸미기 위해, 사실담 같은 감동을 전달하기 위해 허구적 상황하에서 신의 서술능력을 부여한 문학적 관습은 어떤 경우에도 허구적 사실임을 벗어날 수 없게 한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수필작가들이 실험성을 앞세워 3인칭 서술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1인칭 서술을 능가하는 미학적 가치와 유용성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인다.
둘째, 시간착오기법(anachronism) 또한 서사체의 서술 전략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수필서사의 서술에서도 시간착오기법은 이야기의 효율적인 전달과 감동의 창조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작가가 체험한 이야기를 어떤 순서와 빈도로 배열하여 어떤 시간의 길이와 속도로 서술하는가의 문제는 주제의 감동적인 형상화와 미학성의 창조를 위한 핵심 전략이다.
제라르 주네트는 시간착오를 순서, 지속, 빈도로 설명한다. 순서(order)의 시간착오는 스토리상에서의 이야기 발생 순서를 담화상에서 어떻게 변형시켜 배열(서술)했는가를 설명하는 논리이다. 이것은 시간지표를 측정도구로 하여 확인할 수 있는데 소급제시와 사전제시로 나누고, 내적, 외적, 혼합적인 방법과 동종, 이종 등의 하위 유형을 갖는다. 물론, 수필 담화는 시간적으로 모두 과거의 체험담이지만 반드시 과거형만으로 들려줄 필요는 없다.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들려주기 위해서 ‘역사적 현재’의 서술기법을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필 텍스트에서 현재형이 유독 많은 것은 이러한 원리에 기반한다.
지속(duration)의 시간착오는 스토리상에서 사건이 발생하는데 걸린 시간과 그것을 담화 상에서 서술하는 데 걸린 시간(독서시간)과의 차이와 변형 정도를 일컫는다. 이 경우에는 가속과 감속 개념이 측정도구로 활용되는데, 가속 효과를 노리는 지속의 시간착오에는 최대 가속기법인 생략과 요약이 있고, 감속 효과를 위해서는 묘사를 위한 휴지(description)와 연장(의식흐름, 꿈 등) 등이 활용된다. 그 외에도 대화나 직접화법 등과 같은 대등한 지속이 있다.
빈도(frequency)의 시간착오는 어떤 사건이 스토리상에서 발생한 횟수와 그것이 담화상에서 언급되는 횟수 사이의 차이와 변형 정도를 가리킨다. 빈도의 측정 단위는 반복성인데, 한 번 일어난 일을 한 번만 서술하는 단회서술(1N/1S), n번 일어난 일을 n번 서술하는 다회서술(nN/nS), 한 번 일어난 일을 n번 반복하는 중첩반복서술(nN/1S), 그리고 n번 일어난 일을 한 번만 언급하는 요약반복서술(1N/nS) 등이 있다.
이러한 시간착오기법은 수필서사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앞으로 수필의 서술방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전략적 개념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착오기법 외에도 수필서사에서만 통용되는 특수한 기법이 따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미적 효용성에 있어서도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에 대해서 심도 있게 살펴야 할 것이다.
수필서사의 소통체계에 대한 논의도 만만치 않다. 웨인 부드(1961)에 의해 소개된 서사물의 소통체계 개념을 기호학적 소통모델로 명료하게 도식화 한 것은 시모어 채트먼(1978)이다. 그에 의해 정리된 소통체계의 개념은 실제작가와 실제독자, 내포작가와 내포독자, 화자와 피화자로 구성된 3쌍의 여섯 가지 기능자들에게 의해 구조화된다.
실제작가(real author)와 실제독자(real reader)는 내포작가와 내포독자라고 하는 대리자에 의해 그 기능이 대리된다. 내포작가(implied author)는 실제작가의 제2 자아로서 실제작가가 창작과정에서 꿈꾸는 이상적인 작가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포작가는 실제작가와 동일 인물이 아니며 목소리도 없는, 단지 독자에 의해 심미적으로 구축된 하나의 구성적 존재일 뿐이지만, 시종일관 창작과정을 이끌어가는 실재로서 화자와 구별된다. 내포독자(implied reader) 역시 독자의 추측에 의해 구성되는 하나의 기호적 구성물로서 내포작가의 파트너이자 이상적인 독자상이다. 이러한 내포작가와 내포독자는 모든 텍스트가 한 쌍씩 가지고 창작에 임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화자(narrator)와 피화자(narratee) 역시 필요한 존재들이다. 서사체 속에는 반드시 화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피화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화자의 파트너로서 화자 자신이 피화자일지라도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항상 내포되어 있다.
문제는 수필의 소통체계에서의 이들의 기능 방식이다. 수필 텍스트에서도 내포작가와 내포독자, 화자와 피화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가이다. 내포작가는 앞서 언급처럼 그 어떤 서사체에서도 실제작가가 집필과정에서 떠올리는 이상적인 작가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욕망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내포독자는 작가가 창작과정에서 내포작가와 함께 떠올리는 이상적인 독자상이라는 점에서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자기고백의 문학인 수필에서는 두 가지 형태로 달라질 것이다. 즉, 수필이 작가의 자기고백 형식이라는 점에서 보면 내포독자는 작가 자신이 되지만, 수필독자가 대중일 때에는 내포독자의 존재는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자와 피화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수필에서 화자의 존재는 작가 자신이다. 따라서 그의 파트너인 피화자 역시 작가 자신일 경우에는 존재의 필요성을 못 느끼지만, 작중인물이거나 일반 독자일 경우에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수필 텍스트에서 내포독자와 피화자의 존재는 두 가지 상황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앞으로 수필 텍스트의 소통체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것은 이러한 특이성에 대한 미학적이고도 시학적인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필이 타 장르와 구별되는 소통체계를 갖고 있다면, 그 특이성과 미적 효용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가 시학연구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필이 자기고백의 서술체계를 가짐으로써 일종의 자기 회귀적 소통체계를 갖는 것도 소설이나 희곡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장르적 속성이라는 점도 보다 체계적으로 논증되어야 할 것이다.
7)시공간의 기능과 진실
허구문학에서 시간과 공간은 가능성의 시공간이다. 그것은 있음직한 행동과 사건을 있음직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펼쳐 보이는 허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구적 시공간은 경험적 시공간과는 달리, 경험 가능한 개연적인 가상의 시간과 공간을 뜻한다. 허구문학이 궁극적으로 가능성의 문학인 것은 이런 논리에 근거를 둔다.
이에 비해, 비허구문학은 실제의 시공간을 활용한다. 실제의 시공간이란 작가가 삶의 현장에서 어떤 사건과 행동을 체험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의미한다. 그래서 비허구문학으로서의 수필은 가상의 문학, 가능성의 문학이 아니라, 실상의 문학, 경험적 사실의 문학이 된다. 또 그런 의미에서 수필은 체험적 사실 속에서 찾은 진실을 토로하는 비허구문학의 대표적 장르가 된다.
이러한 수필문학이 실제 삶의 시공간에서 채취한 사건과 행동을 소재로 취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내포한다. 문학의 궁극적 목표가 언어를 통한 진실한 삶의 미적 탐구에 있다면, 수필은 작가가 자신의 인생에서 취재한 소재를 빌어 진실한 깨달음을 감동의 산물로 제시한다. 여기서 허구적 진실과 비허구적 진실 간의 거리가 발생하는데, 전자는 가상의, 개연적이고 상상적인 가능성의 진실을 추적한다면, 후자는 실상의, 경험적인 실제의 진실을 고백한다. 이러한 차이는 본질적인 것으로서 허구문학과 비허구문학의 경계선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는 근거가 된다.
다시 말하면, 허구적 진실은 제 아무리 사실적인 작품일지라도 여전히 개연성에 바탕을 둔 가상적이고 가정적인 진실일 뿐이다. 가상과 가능성에 바탕을 둔 개연적 진실과 실제 진실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21세기 들어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메타픽션을 통해서 자기반영적 글쓰기와 반사실주의적 글쓰기를 천명하고 나선 것도 기실은, 소설가들이 보여준 지금까지의 노력이 실제 진실과는 거리가 먼 상상적 진실, 가능성의 진실에 머물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수필이 다루고 있는 실제 경험세계에서 발견한 진실의 이야기는 진짜 진실이거나 그에 가깝다는 점에서 진실의 질적 측면에서 항상 허구적 서사보다 우위에 선다.
이런 사실은 세계 문예사조적 관점에서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인류가 유사 이래 추구해온 문예사조의 철학적 본질이 항상 대상세계의 진실 인식과 진실 전달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삶의 실제 진실을 다루는 수필문학은 앞으로 오랜 허구문학의 시행착오적 글쓰기의 대안적 장르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4. 수필시학의 탐구와 전망
수필시학은 한마디로 수필의 장르적 본질에 대한 언어학적이고 미학적인 질문을 추구한다. 그럼에도 그동안 한국 수필이 연구자들로부터 외면당해 온 이유 중의 하나는 장르 자체에 대한 왜곡된 인식도 한 몫을 했다. 예컨대, 수필은 심오한 이론이 없는 문학이라든지, 붓 가는 대로 쓰는 여기(餘技)의 문학이라는 식의 왜곡된 인식이 젊은 학자들의 도전의지를 꺾어 놓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수필장르는 이론보다는 창작 쪽에 경도되어 기형적인 발전양태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한국 수필계는 작가는 많으나 이론가와 비평가는 희귀한 장르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떤 문학 장르가 바람직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창작과 이론의 두 영역이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한국 수필계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작품만 승하고 비판적 논리의 뒷받침과 새로운 이론의 제시가 빈곤한 현실 속에서 수필의 질적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튼튼한 이론으로 무장한 비평가와 연구자들을 시와 소설장르에 빼앗기고 있는 현실에서 수필시학 연구의 후진성은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희망적인 것은 시와 소설에 비해 수필이 젊은 장르에 속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수필 장르는 아직 개발의 여지가 많은 미개척 분야임을 뜻한다. 세계문학사 속에서도 인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2,500년 동안 허구문학의 연구에만 전념해왔고, 비허구문학에 대한 관심은 거의 저조했다. 그 결과 수필 장르는 아직 채굴되지 않은 원석처럼 21세기의 새로운 탐색 장르로서의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 게다가, 시와 소설 중심의 세계문학사는 실험의 한계에 봉착한 채,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나서야 할 기로에 서있다.
따라서 전 세기 말부터 불기 시작한 수필에 대한 세계문학사적 관심은 긍정적 요인과 부정적 요인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긍정적 요인이란 수필에 대한 관심 증가로 그것이 미래의 지배적 장르로 성장할 가능성을 뜻하며, 부정적 요인이란 장르 세력이 약한 수필이 지배적인 장르에게 흡수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이다. 이러한 변화의 시점에서 수필시학에 대한 탐구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수필문학이 21세기의 지배적 문학 장르로 성장할 가능성은 몇 가지 점에서 발견된다.
첫째는 그것이 아직 세계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탐구되지 않은 비허구문학의 대표적 장르라는 점이다. 상상력을 활용한 허구문학은 이제 그 한계에 도달해 있다. 게다가, 허구적 진실은 아무리 사실적인 모방술을 동원해도 가상적인 진실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현실로 인정하기 시작한 현대문학의 흐름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둘째는 수필 장르도 시와 소설에 못지않은 깊은 미학과 철학적 논리를 겸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 파헤쳐지지 않은 새로운 미학의 세계, 신비로운 시학의 세계가 수필장르 속에서 발견됨으로써 21세기 세계문학인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것도 이런 반증이다.
셋째는 수필이 어느 장르보다도 가장 대중 친화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시와 소설은 독자들이 글쓰기에 참여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비해서, 수필은 본성적으로 독자들을 창작에 끌어들이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것만으로도 수필시학과 수필미학의 탐구가 21세기 한국문학의 새로운 과제로 부상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