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사회에는 숱한 ‘장벽’들이 존재하고 있다. 정권교체에 따라 새로운 ‘성골’과 ‘진골’이 생겨나고 갖가지 연(緣)이 성패를 결정한다. 사회 각 부문에 ‘진입장벽’(Entry Barrier)이 두껍게 처져 페어플레이를 봉쇄하고 있다. 그 결과 정당한 실력과 기술, 효율, 신용은 설 자리가 좁아지고 대신 연줄과 독점, 비효율, 부패가 만연해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대학의 ‘동종교배’와 진입장벽〓서울대 법대는 3월 초 신임교수 임용 심사를 했다. 비(非) 서울대 출신을 뽑도록 한 학교 규정에 따라 다른 대학 출신의 박사 2명이 응시했다. 일부 교수들은 “처음으로 타대학 출신을 뽑는 것인 만큼 좀 부족해도 뽑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수는 “기준에 못미친다”며 부정적이었다. 결과는 6대 3으로 부결. 서울대가 99년 9월 신규 임용한 교수 75명 중 73명이 서울대 출신이었다. 교육부는 학문간 ‘동종교배’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공무원 임용령을 고쳐 99년 9월 이후 3년간 국립대 신규 채용 교수의 30% 이상을 타대학 출신으로 임용토록 했다.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대학 시간강사 이모씨(32·여)는 “시간강사 자리를 구하면 그 때부터 지도교수, 학과장, 이사장 등에 대한 ‘줄타기’에 들어가야 한다”며 “운좋게 전임강사가 돼도 명문대 출신이나 그 대학 출신이 아니면 텃새 때문에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교수들 사이의 파벌도 심해 명문대나 동문 출신이 아니면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고 왕따당하는 경우가 많다.
▽평생 족쇄가 되는 학벌〓학벌은 넘기 어려운 길고도 높은 장벽이다. A기업 인사부 차장 최모씨(39)는 “간부급 이상 임원 대부분이 명문대 출신인데다 주요 보직도 다 꿰차고 있어 ‘자기 후배 끌어주기’ 풍토가 극심하다”고 말했다. 그는 “비 명문대 출신은 일정 단계에 오르면 더 이상 승진이 안 돼 회사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며 “비 명문대 출신들 사이에서는 ‘입사해서 10년 안에 승부를 내고 작은 가게라도 차리자’는 게 정해진 코스처럼 돼 가고 있다”고 전했다.
▽정치도 독점〓6월 지방선거에서 경북 지역 시장 선거에 출마할 예정인 B씨는 택시를 타면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서 거스름돈을 받지 않는다. 그는 “현역 시장 등은 직무를 빙자해 각종 선심성 행사와 시정홍보회 등을 열어 사실상의 사전 선거운동을 하는데 정치 신인인 나를 알릴 수 있는 길은 이것 뿐”이라고 말했다. 현행 선거법상 정치 신인은 공식 선거운동 기간에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고 그 기간에도 개인 홍보물을 개별적으로 배포할 수 없다. 그러나 현역 의원들은 선거운동 기간 전에도 당원단합대회나 의정보고회, 당원교육 등을 마음대로 하면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이처럼 정치권은 정치 신인이 넘기 어려운 높은 진입장벽을 쳐놓고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정당조직에도 변화의 조짐은 있지만 여전히 수직적 독점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법조계도 연줄 우선〓룰(Rule)의 사회인 법조계에도 룰보다는 연줄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지방의 고등법원 부장판사인 C씨는 “지방에 온지 한 달쯤 됐는데 내가 맡는 사건에 이 곳 변호사가 아니라 멀리 서울에 있는 고교 동문이나 연수원 동기가 변호사로 선임돼 온다”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변호사 업계에서는 형사사건 변호사 선임 1순위는 판사의 고교 동문이고 그 다음이 연수원 동기, 다음이 대학 동기라는게 공식처럼 돼 있다. 한 중견 변호사는 “최근 대형 로펌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검찰과 법원의 고위직 출신 영입 경쟁도 연줄 및 전관 프리미엄과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법조계의 페어플레이를 저해하는 최대 요소는 브로커다. 이들은 의뢰인들에게 담당 검사나 판사와 연줄이 있는 변호사를 소개해 주고 수임료의 30% 정도를 소개비로 받는다.
▽고층 아파트보다 높은 선발업체 장벽〓D산업은 2000년 3월 건축업계에서 알아주는 유능한 건축 기술사 5명과 건축사 12명을 스카우트해 의욕적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단 한건의 관급 공사도 따내지 못했다. 입찰시 최근 3∼5년간 누계 시공실적을 제출하라는 통에 기준에 미달돼 떨어졌다. 이 업체 관계자는 “기득권 세력인 선두업체에 유리하게 짜여진 기준 때문에 신규 업체는 기술 수준이 아무리 뛰어나도 시장에 진입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문화 예술계의 장벽〓지난해 신인 가수 K씨의 아버지는 음반 제작비에 접대비를 포함해 10억원 가량을 쏟아부었으나 아들이 TV 프로그램에 잘 등장하지 않자 해당 방송사에 투서를 보냈다. 한 연예계 인사는 “신인 가수의 음반 판매와 성공 여부는 방송 출연 빈도와 직결되는데 실력과는 상관 없이 프로그램 제작진과의 친소 관계에 따라 출연 여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전국 개봉관의 90% 이상이 영화 ‘해리포터’ ‘두사부일체’ ‘화산고’ 등 메이저 배급사의 영화로 채워지고 다른 영화들은 얼굴도 내밀지 못했다. 모영화제작사 관계자는 “영화시장의 독점구조와 진입장벽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며 “대형 배급사를 만나지 못하면 상영 기회를 갖기 어렵고 결국 관객을 만날 기회조차 없다”고 말했다. 배우시장도 마찬가지. 기존의 매니지먼트사를 통해 배급사 및 제작사와 연결돼 있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감독이나 시나리오가 있어도 빛을 보기 어렵다.
한국에 온지 5년째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크게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느낀 적은 없다. 한국인은 외국인에게 친절하고 항상 호감을 갖고 대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서 기업활동을 하는 유럽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들은 자유로운 기업활동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기업간 국제적 자유경쟁을 제약하는 유무형의 진입장벽들 때문이다.
주한유럽연합상공회의소가 이들의 경험을 토대로 최근 발간한 ‘2002 무역장벽보고서’가 이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유럽의 기업인들은 특히 정부의 과도한 개입과 규제 등에서 개선할 부분이 많다고 지적한다. 자동차의 경우를 보자. 한국인은 외제차를 사면 주변 사람들에게서 비애국적인 소비활동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고 세무조사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장벽이다. 한국의 디젤자동차 배출가스 기준은 유럽에 비해 매우 엄격한 수준이어서 가장 발전된 기술로도 만족시킬 수 없다. 세금에 세금을 덧붙이는 방법으로 외국자동차 생산업체에 지우는 부담도 상당하다. 인증에 필요한 서류만도 100여쪽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지나치게 많다.
법조계는 어떤가. 외국로펌은 한국에서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없고 외국 변호사가 개업할 수도 없다. 한국 로펌에 고용된 외국 변호사는 200여명이나 되지만 행정 관리를 받지 못하고 등록 체제도 없다. 적절한 법률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한 외국기업들이 한국에 대한 투자를 포기하는 경우도 생긴다. 시장에서 가짜 유명브랜드가 공공연하게 전시 판매되는 현상도 공정한 기업 경쟁을 가로막는다. 지적재산권의 보호 방안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의 특혜성 기업지원과 금융기관의 ‘국유화’ 등도 여전하다.
한국은 아직 기회의 땅이고 투자할 영역도 넓다. 유럽인의 투자는 점점 늘고 상호교류도 확대되는 추세다. 한국 기업은 책임의식이 강하고 외국인과의 사업 협력에 관심이 많다. 이런 곳에서 공정한 기업경쟁을 가로막는 진입장벽 문제들이 앞으로 대화와 토론을 통해 개선돼 나가기를 기대한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 각 분야의 ‘페어플레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기형적인 경쟁구조라고 지적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 실력으로 경쟁해 승부가 결정되는 구조가 아니라 일단 ‘진입’에 성공하면 그 다음에는 ‘무풍지대’가 된다는 것. ‘학벌 없는 사회 만들기’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김동훈(金東勳) 국민대 법대 교수는 “우리 사회는 모든 분야가 진입하는 문턱에서 심한 경쟁을 해야 하는 구조”라며 “명문대에 목메고 있는 대학입시 풍토나 고시 열풍이 단적인 예”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기형적인 경쟁을 통해 진입 문턱만 넘으면 그 다음에는 별다른 경쟁이 없다”며 “명문대 졸업생끼리, 고시 합격자끼리 서로 뭉쳐 ‘밀어주고 끌어주며’ 세력을 만들어 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도 개혁과 함께 ‘간판’이 아닌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의식 개혁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는 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우선 사법시험을 정원제가 아닌 자격시험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형식적으로 운영되는 계약 교수제도 적극 활용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교수로 임용될 수 있는 공평한 기회를 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호기(金晧起)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의 최대 진입장벽은 학벌중심주의”라며 “이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파벌과 진입장벽이 조성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학벌중심주의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소위 몇몇 명문대에 집중돼 있는 물적 인적 지원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키는 대학개혁이 선행돼야 한다”며 “대학들을 전공에 따라 특화하고 지방대학을 정책적으로 육성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고시를 포함한 각종 공무원 시험에 지역별로 해당 지역 출신이나 해당 지역 대학 졸업생에게 우선적인 기회를 주는 방식을 도입하는 것도 학벌중심주의 완화의 한 방법”이라고 제시했다. 그는 “이런 노력이 없다면 우리 사회의 진입장벽 낮추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줄을 찾아라.’ 명절 때 귀성표 구하기, 종합병원의 진료예약, 골프장 부킹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줄 찾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원(民願) 공화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아는 사람을 통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잇따라 터져 나오는 각종 ‘부패 게이트’의 근저(根底)에도 따지고 보면 고향 선후배, 학교 동창이라는 연고가 개재돼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승진도 줄을 타야〓공직사회에서는 인사철만 되면 윗사람 아랫사람 할 것 없이 정치권을 기웃거리며 줄을 찾아 나서는 게 풍속도처럼 돼있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한 공기업의 경우를 보자. 6월의 임원 인사를 앞두고 지금 지연과 학연으로 뭉친 3개 파벌의 인사 로비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각 파벌을 대표하는 3명의 부장 중 누가 이사로 승진하느냐에 따라 일반 직원에 대한 후속 인사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모 장관 비서관을 지내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A부장은 상급기관 실세 국장과 동향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평. 그러나 최근 라이벌인 B부장의 직속 부하인 C씨가 여권 유력정치인 처남에게 줄을 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A부장 측에 비상이 걸렸다. C씨는 “내가 승진하기 위해서라도 B부장의 승진운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며 “최근 고교 선배인 상급기관 과장급 인사를 두 차례 만나 지원을 요청했고 접대비로 쓰기 위해 적지 않은 액수의 돈도 준비해뒀다”고 털어놓았다. 지방의 공직사회가 단체장선거에 따른 편가르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도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민선단체장들이 자신의 선거운동을 도운 간부들을 요직에 전진 배치하는 반면 상대 후보에 줄을 선 간부들은 한직으로 내쫓는 식의 인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탓이다.
▽선거판의 연고 찾기〓국회의원 K씨는 의정활동과는 관계없는 직함을 무려 16개나 갖고 있다. 고교 총동문회 부회장, 종친회 자문위원, 향우회 고문, 시민단체가 운영하는 법률상담소의 이사 등. 정확한 단체 이름과 직함을 기억하기 힘들 정도다. 물론 대부분이 선거용 직함이다. K의원은 “같은 성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표를 찍는 유권자가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불가피한 일이다”고 말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출마예정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요주의’ 사조직 2000여개를 감시대상으로 선정했다. 이들 사조직은 동창회 1169개, 종친회 518개, 향우회 293개 등으로 연고로 뭉친 단체가 대부분이다.
▽경쟁력 갉아먹는 연고 위주의 기업 협력체계〓97년 외환위기 직후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기업간 협력체계에 있어 연고주의 관행은 경쟁력을 잠식하는 요인 중의 하나이다. 기술 위주의 아웃소싱 방식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권고한 적이 있다. 그러나 건설업 등 일부 업계에서는 협력업체 선정과 각종 구매 입찰 등에서 연고주의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중소업체인 D건설은 지난해 대기업인 S건설로부터 협력업체 선정에 응해보라는 통보를 받았으나 아무 연고가 없어 고민하다가 S건설 퇴직 간부를 거액의 연봉을 주고 회장으로 영입하는 단안을 내렸다. 덕분에 D건설은 최근 경쟁업체를 따돌리고 S건설의 협력업체로 선정되는 성과를 올렸다. D건설 대표 P씨는 “솔직히 경쟁업체 중에 우리보다 기술력이 뛰어난 곳도 있었다”며 “그러나 새로 영입한 회장의 활약으로 협력업체 선정은 물론 이후 몇 차례의 공사에서 입찰예정가를 미리 알아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건설업계에서는 협력업체 경쟁 때 발주 회사의 현장 소장급 이상 퇴직자가 운영하는 업체에 10%의 가산점을 주는 게 공식화돼 있다는 말도 있다.
▽문화·체육계의 학맥〓지난해 한 지방자치단체가 창작지원금 지급 대상으로 2개 공연단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학맥 논란이 빚어졌다. 심사위원 P씨가 자신의 제자가 단장으로 있는 한 공연단체를 지원대상으로 선정되도록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이 논란의 요지. 체육계의 고질적인 편파판정 시비의 이면에도 학연을 중심으로 한 파벌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최근 검찰 수사로 번진 태권도협회 비리의혹의 출발점은 지난해 4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의 편파판정 시비였는데 여기에는 Y대와 K대 출신 졸업생들이 심판 배정에서 탈락하는 등 학연을 둘러싼 파벌싸움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새치기 민원으로 실종된 예약문화〓연줄을 동원하면 얼마든지 새치기가 가능하다는 인식 때문에 선진사회의 기본인 예약문화가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수도권에 있는 H골프장의 한 임원은 부킹을 받는 매주 화요일이면 휴대전화를 꺼놓는 것은 물론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호텔 객실에서 업무를 본다. 권력기관부터 보통사람까지 온갖 연줄을 동원한 부킹 민원 전화가 폭주하기 때문이다. 국내 항공사들이 설과 추석 연휴 때 임시로 증편하는 항공 좌석은 대부분 VIP의 민원해소용으로 소요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페어플레이의 적들]"의사결정과정 투명하게 공개"
연고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선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각 분야의 모든 의사결정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절차와 과정의 투명성이 보장돼야만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사적(私的) 네트워크가 억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임호범(任浩範) 변호사는 “무엇보다 인사 분야에서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검증장치를 마련해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며 “일정 직급 이상의 공직자에 대해선 인사청문회를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사전 검증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숙명여대 박재창(朴在昌·행정학) 교수는 “사회적 재화(財貨)의 처분 권한이 특정인이나 특정 기관에 집중돼 있는 데서 각종 연줄이 통할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져 있다”며 “권력의 분산에서 연고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연고주의 중에서도 출신학교에 따른 파벌 즉, 학연의 폐해가 심화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견해를 제시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고려대 현택수(玄宅水·사회학) 교수는 “대가족제도가 붕괴되면서 혈연은 상당히 퇴색한 반면 학연의 폐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며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시민교육을 강화해 합리적인 가치관을 심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학벌 없는 사회 만들기’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국민대 김동훈(金東勳·법학) 교수는 “고등학교는 평준화 정책으로 인해 학연의식이 사라져 가고 있지만 출신 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학연은 더 강화되고 있다”면서 “대학의 서열타파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지길(金知吉) 공동체의식개혁국민운동협의회장은 당리당략에 따른 정치권의 ‘지역주의 부추기기’가 우리 사회의 연고주의를 악화시키는 최대의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연고주의의 대표적 폐해인 지역주의는 정치권에 그 1차적 책임이 있다”며 “게임의 룰을 외면하고 편법을 쓸 때에는 반드시 엄중한 벌칙이 따른다는 사회적 철칙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페어플레이의 적들]"기업 연줄경쟁 경쟁력 걸림돌"
4년간의 한국 근무를 곧 마감하는 입장에서 돌이켜보면 단기간에 외환위기를 극복한 한국 기업과 한국인들의 저력이 가장 인상적이다. 그러나 한국이 21세기 국제경쟁력을 갖춘 선진국이 되려면 사회 저변에 자리잡은 ‘연고주의’를 탈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혈연과 지연, 학연 등을 맺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런 ‘비공식적 관계’가 공식적인 업무까지 영향을 끼친다면 기업은 물론 국가 차원에서도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얼마 전 회사의 한 한국인 중간 간부가 나에게 자신이 전에 다녔던 회사를 새 거래처로 추천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그 간부와 그가 추천한 업체의 사업책임자가 대학동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그 회사의 재무상태와 마케팅 상황 등을 점검했으나 조건이 맞지 않아 계약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기업 간의 비즈니스는 철저히 성과와 실적에 따라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한번은 어떤 직원이 정부의 모 부처에 프린터 몇 대를 무상으로 제공하자고 요청했었다. 당시 그 직원은 부처 공무원과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값을 깎아줄 순 있어도 ‘공짜’는 안 된다고 거절했더니 그 직원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정부 부처와 ‘좋은 관계’를 맺으면 향후 거래에도 좋았을지 모르지만 역시 ‘원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련의 정치권 비리도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혈연과 지연, 학연 등을 동원해 사리를 취하려는 ‘편법’의 폐해다. 일본은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30년 전만 해도 ‘연고주의’가 모든 사회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고 본다. 연고주의를 없애는 노력은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 내가 곧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한 지인(知人)이 이삿짐 센터를 소개했지만 나는 여러 업체를 비교한 뒤 직접 골랐다. 한일(韓日) 공동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 사회 전반에 연고주의 대신 ‘룰’과 ‘원칙’이 존중받는 분위기가 확산되길 바란다. 다카하시 마사유키<전 한국엡손 대표이사> 정리〓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떡값, 목욕비, 기름값, 회식비…. 촌지(寸志)가 오고 갈 때 흔히 붙는 말들이다. 안풀리는 일을 잘 되게 해 달라며, 우리 애 잘 봐달라며, 표 구해 달라며, 자리 예약해 달라며, 도와줘 고맙다며 주고 받는 촌지문화가 우리 사회에서 관행화 된 지 오래다. 액수가 적고 ‘누이 좋고 매부 좋기’ 때문에 큰 죄의식 없이 주고 받아온 이런 촌지 관행으로 인해 한국 사회가 보이지 않게 병들어 왔다. 정상적인 일 처리가 뒷전으로 밀리는 등 페어플레이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것이다. 촌지는 한때 ‘미덕’으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페어플레이의 적’일 뿐이다. 우리 사회가 공정사회와 선진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뿌리 깊은 촌지 관행을 하루빨리 도려내야 한다는 게 뜻 있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학교 촌지〓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의사, 법조인, 기업체 임원 등 상류층 학부모들이 매달 직업군별로 정기 모임을 갖고 교사에게 촌지를 건넨다. 남편이 의사인 박모씨(39)는 “의사 학부모들이 매월 모임을 갖고 한 명당 20만∼30만원의 촌지를 걷어 교사에게 전달한다”며 “개별적으로 하는 것보다 전달이 수월하고 액수도 커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학교 촌지는 대표적인 ‘방어적’ 성격의 촌지. 혜택을 보자는 것보다는 주지 않아 받을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경우가 많다.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J씨(32)는 “학기 초와 스승의날, 추석 등 명절에 각각 20만원씩 교사에게 촌지를 주는 게 기본”이라고 말했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박경양(朴慶陽) 부회장은 “학교 촌지에서 상대방에 대한 감사의 의미는 오래 전에 퇴색했다”며 “원칙에 따라 일이 처리되지 않는 비정상적인 사회문화가 학교 촌지를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관공서 급행료〓남보다 먼저 서류를 발급받거나 일 처리를 원활하게 하는 등 혜택을 누리기 위한 ‘적극적’ 성격의 촌지에 해당한다. 법원이나 검찰, 등기소에서 기록을 복사하거나 서류를 낼 때 급행료를 건네는 것은 오랜 관행. 98년 1월 변호사개혁모임이 발표한 법조계의 급행료 실태에 따르면 법원과 검찰 직원이 민원을 처리하면서 받는 급행료는 한 번에 5000∼30만원 정도로 조사됐다. 대형 종합병원에서는 △응급실에서의 빠른 환자 수속 △병실 구하기 △수술 일정 앞당기기 △유명 의사에게 외래진료 빨리 받기 등을 위해 급행료가 오간다. 올 초 스키장에서 무릎을 다친 이모씨(30·회사원)는 급행료 덕을 톡톡히 봤다. 서울 강남의 한 병원으로 옮겨지자마자 입원 결정이 났고 유명 의사에게 수술도 받을 수 있었다. 이 병원 관계자는 “이씨의 삼촌이 병원 유관기관의 고위직 공무원인 데다 상당한 액수의 급행료까지 받아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켰다”고 털어놨다. 반면 지난해 말 전남 순천에서 뇌중풍으로 쓰러진 어머니(72)를 모시고 이 병원에 온 김모씨(46)는 급행료를 주지 않아서인지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응급실에 도착한 뒤 6시간 동안 침상을 얻지 못해 어머니가 응급실 바닥에 누워 있어야 했다. 의사의 진찰을 받고 입원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27시간. 김씨는 “돈 없고 힘 없는 사람은 치료조차 받기 힘들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각종 청탁용 촌지〓치과의사 이모씨(55·서울 강남구 신사동)는 지난해 10월 소득세를 덜 내기 위해 세무사를 통해 국세청 직원에게 500만원을 건네고 세금 감면을 청탁했다. 해당 국세청 직원의 비리가 검찰에 적발돼 로비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세금 감면을 둘러싼 세무 공무원과 업자간의 금품 거래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사채업자 김모씨(32·서울 강남구 포이동)는 부가가치세 신고를 할 때면 세무 공무원과의 식사자리를 마련해 30만∼40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선물한다. 김씨는 “이런 식으로 관계를 유지하면 신고한 매출액이 별 탈 없이 인정된다”고 말했다. 서울의 모 대학 행정학과 대학원생 B씨(32)는 박사학위 심사를 받으면서 관례에 따라 심사 때마다 심사위원들에게 300만원을 상납했다. 3차례 심사를 받으면서 900만원이 들었고 심사가 끝난 뒤에도 룸살롱 접대와 지도교수 선물 비용으로 별도로 수백만원을 썼다. 공무원들이 인사 이동으로 자리를 옮길 때 주는 ‘전별금’도 촌지의 일종.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이영란 간사는 “전별금은 높은 직위의 사람에게 바치는 일종의 ‘잠재적 뇌물’이라며 특히 법조계의 경우 전관예우를 받을 사람한테 돈을 줘서 미리 보험에 들어두자는 성격이 강하다”고 말했다. 언론계에서도 최근 기업체나 영화제작 업체의 홍보성 기사를 써주고 돈을 받은 일부 기자들이 검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촌지 만연의 원인〓시사평론가 유시민씨(柳時敏)는 ‘빨리 빨리’를 외치는 한국인의 성향과 ‘완장 문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유씨는 “소수가 촌지를 제공함으로써 재량권을 가진, ‘완장 찬’ 사람으로부터 특혜를 얻으면 만인은 촌지를 줘야한다는 방어적 태도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서정우(徐正宇) 명예교수는 “우리 사회가 촌지 등 부정(不正)에 대해 너그러운 것이 문제”라며 “시민 스스로 파수꾼 역할을 해야만 이런 부정들이 사라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촌지 관행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민 개개인의 의식개혁이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적은 금액의 촌지나 급행료를 주고받더라도 처벌받도록 하고 아울러 공익을 위한 고발정신이 존중되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60, 70년대까지만 해도 간단한 서류 하나를 떼려고 해도 급행료를 물어야 했지요. 각종 규제가 심하고 공무원들의 해석에 따라 될 일도 안 되고 안될 일도 되는 것이 많은 지금도 여전히 민원인들은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약’을 쓸 수밖에 없는 것같아요.”
실천불교 전국승가회 부의장 효림(曉林) 스님은 촌지와 급행료 관행 척결을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쓰게 된 ‘약’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악’이 되고 결국에는 나에게 큰 피해로 돌아오게 되지요. 세상을 바꾸는 힘은 반드시 큰 일을 실천하는 것에서만 생기지는 않아요. 진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힘을 가진 자들이 아닌 우리 소시민의 작은 실천에 있어요. 우리 모두가 ‘작은 일’부터 스스로 실천해 나갈 때 우리 사회는 ‘바른 큰 길’과 통하게 될 겁니다.”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 윤용(尹溶) 대표는 “촌지나 급행료를 주고받는 사람들은 서로 이해가 일치하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기 힘든 실정”이라며 “공익을 위한 고발정신이 존중되도록 내부고발자에 대한 신변을 보호해 주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윤 대표는 또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촌지 관행을 척결하기 위해 도덕 관습 의식 등 의식개혁만을 강조했지만 이제는 이와 함께 상호간 비밀고발이 보장되는 실질적인 제도 마련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부패국민연대 안태원(安泰原) 홍보국장은 “촌지나 급행료는 일이 순서나 원칙대로 처리되지 않는 것에 그 원인이 있기 때문에 일 처리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급선무”라며 “비록 1만∼2만원 정도의 적은 금액일지라도 쌓이면 큰 뇌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촌지나 급행료에 대해서도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외국인이 본 한국…로버트 번스▼
8년째 한국에서 사는 캐나다인 로버트 번스는 지금껏 누구에게 촌지를 줘 보거나 요구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다른 외국인들의 경험이나 언론 보도를 통해 한국의 ‘촌지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비자 연장신청을 하러 담당 기관에 찾아가면 몇 시간 동안 기다려야 했죠. 그 때 친구들 사이에서는 돈을 얼마 집어주면 빨리 처리해 준다더라는 얘기가 돌았습니다. 실제 그렇게 해서 손쉽게 비자 연장을 한 친구도 있었죠.” 번스씨는 캐나다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예일대에서 언어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94년 말 한국에 왔다. 96년부터 올 1월까지 항공대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다 3월 KDI 정책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2년 전부터 참여연대에서 자원봉사도 하고 있다.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기 위해 지원자들이 얼마간 돈을 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외국인들에게는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교수직을 돈으로 산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번스씨는 또 대학원생들이 석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지도교수와 심사위원들에게 심사비 등 돈을 건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개탄했다. “학생들이 자신의 능력이나 실력을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학위를 돈으로 산다는 인식을 주기 쉽죠. 이런 현상은 한국 대학들이 자기 학교 졸업생들을 대부분 교수로 채용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부적절한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지요.” 최근 논란이 됐던 대학의 기여입학제도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촌지문화’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번스씨는 주장했다. “기여입학제를 하는 미국이나 캐나다 대학들은 학생들의 학력을 우선으로 봅니다. 그 다음에 학생의 부모 등이 그 대학을 졸업했거나 큰돈을 기부한 적이 있는가를 보죠. 한국에서 논란이 된 기여입학제는 돈으로 입학증을 팔려는 것과 비슷합니다. 도덕적으로도 불공정할 뿐만 아니라 훗날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킬 것입니다.” 번스씨는 “한국인들은 촌지가 관행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범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3일 현재 전국 25개 지역에서 주민의 집단 민원 때문에 생활폐기물 처리시설 건설이 차질을 빚고 있다. 지난해 주민 5명 이상이 함께 관공서에 낸 집단 민원은 1만5926건으로 2000년보다 5.5% 늘었다. ‘집단이기주의’를 말할 때 흔히 원용되는 지표들이다. 우리 사회가 집단이기주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집단간의 막무가내식 싸움으로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거나 집단의 반발로 국가의 정책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생기고 있다.
▽님비현상〓쓰레기처리장이나 화장장, 장애인학교 등 이른바 기피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거부하는 님비(NIMBY·Not In My Back Yard) 현상은 대표적인 집단이기주의로 꼽힌다. 그러나 그 속사정은 사안마다 다르다. 전문가들은 님비현상 그 자체도 문제지만 님비현상을 유발하거나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행정 실패’가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서초구 원지동 추모공원 건립 사업이 이런 경우. 화장장과 납골당을 세우는 이 사업에 2년째 반대하고 있는 현지 주민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 화장장이 들어서는 것을 우리 아닌 남이 결정했고 우리는 결정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됐다”며 노여움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 서울 강남구 일원동에 있는 정서장애인학교인 ‘밀알학교’의 경우 편견과 오해가 집단행동을 불러온 대표적인 경우다. 당시 주민은 학교가 들어서면 아파트 가격이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공사를 방해하거나 법원에 소송을 내는 등 실력행사로 맞섰다. 그러나 학교가 들어서고 난 뒤에도 집값이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일원동의 집값은 대치동 다음으로 많이 올랐다. 이 밖에 경기도의 종합장묘단지 조성 계획, 경북 성주군의 쓰레기매립장 건설 계획 등은 이해당사자들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정부가 1989년부터 추진해온 원자력 발전소 및 핵폐기물 처리장 건립 계획은 국가적 대사(大事)지만 지역 주민 및 환경단체 등과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아직 부지 선정을 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정부는 당초 경북 영덕군에 핵폐기물 처리장을 건설하려 했지만 주민이 어업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1990년 11월에는 충남 태안군 안면도를 부지로 선정하려 했지만 내부 계획이 사전에 유출되는 바람에 주민의 반대가 심해 백지화됐다. 1991년에는 강원 고성 양양, 경북 울진 영일, 안면도, 전남 장흥 등 6곳의 후보지를 선정했다가 지역 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발을 샀고 1995년에는 인천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를 핵폐기장으로 지정고시했다가 활성단층이 발견되는 바람에 백지화했다. 정부는 하는 수 없이 2000년 6월 27일 거액의 ‘개발금’을 내걸고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유치지역 공모에 나섰으나 시한을 한 차례 연장한 지난해 6월까지 한 곳도 신청하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동명기술공단에 부지 선정 용역을 의뢰, 8월 결과가 나오면 교섭에 나서 내년 초까지 부지 선정을 마무리할 계획이지만 이 역시 쉽지 않을 것이란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집단이기주의 논란〓서울대 행정대학원 이달곤(李達坤) 교수는 ‘어떤 사회의 개개 집단이 공익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최대 가치로 보고 사익을 극대화하려고 투쟁하는 것’을 집단이기주의라고 정의했다. 고려대 사회학과 임희섭(林熺燮) 교수는 “집단이기주의가 문제로 부각되는 이유는 집단의 이익추구 행위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그 예로 △이익을 주장하면서도 책임은 무시하는 경향 △자신의 이익은 주장하지만 타인의 이익은 존중하지 않는 배타성 △공익보다 사익을 앞세우는 경향 △이익을 주장하는 절차와 방법의 비민주성과 비합리성 등을 꼽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사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공익’에 대한 정의는 개인과 집단에 따라 다를 수 있어 집단이기주의 규정의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는 게 지배적인 견해다. 또 집단이기주의는 종종 상대방을 공격하고 비방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조희연(趙喜a) 교수는 “공익의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집단의 행동을 ‘집단이기주의적’ 행동으로 규정할 때에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며 “민주주의는 집단간의 이견과 갈등을 끊임없이 조화하고 타협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해결책은 없나〓님비현상에 대해서는 주민을 참여시키는 투명한 행정, 피해의 공평분담, 확실한 보상 등의 해결 방식이 제시되고 있다. 그 예로 경기 안성시는 2000년 ‘1개 마을, 1개 혐오시설’이라는 공평부담의 원칙에 대해 주민 동의를 얻어냈다. 또 전남 강진군은 쓰레기처리장을 유치하는 마을에 일시불 20억원 등 수십억원의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해 현재 3개 군이 유치 경합을 벌이고 있다. 각종 직능단체의 집단이기주의적 행동에 대해 전문가들은 집단 이익의 충돌과 갈등을 해결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으며 명백한 공익을 사익보다 우선하는 시민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숙명여대 법대 이영란(李榮蘭) 교수는 “집단이익을 추구하고 집단행동을 하는 경우에도 법과 윤리를 지키며 제3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는 문화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한국 사회의 ‘베끼기’는 고질이나 다름없다. 학계의 논문 무단 도용과 방송계의 프로그램 표절은 물론이고 상품의 디자인 영역에서도 베끼기가 판치고 있다. 문화 예술 학술 방송 대중문화 컴퓨터소프트웨어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남의 것 훔치기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여행업계조차 새 상품이 나오기가 무섭게 ‘닮은꼴’ 상품을 쏟아내고 있다. 한국의 표절 불감증은 단순한 우려의 수준을 넘어 엄청난 문화산업적 손실을 초래할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 지적재산권 보호를 강화하고 있는 추세를 감안할 때 국내의 베끼기 관행은 다른 국가와의 마찰을 빚을 수 있다는 점에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지난해 대학원을 졸업한 이모씨(28)는 자신이 90% 이상 번역한 책을 그대로 출판한 교수가 번역상을 받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이씨는 “일부 교수들은 대학원 수업에서 사용하는 원서를 학생들에게 번역시킨 뒤 약간 교정해서 자신의 번역서로 둔갑시키곤 한다”고 말했다. 학계에서 제자나 동료 학자가 쓴 논문을 무단 도용하거나 외국 논문을 베끼는 것은 거의 관행화되다시피 했다. 지난해 11월에는 국내 유명 대학의 세 교수가 공동으로 쓴 논문이 표절로 밝혀져 국제학회로부터 망신을 당했으며 올해 2월에는 학회지와 교내 논문집에 실린 대학원생 논문을 표절해 물의를 빚은 대구대 C교수가 면직되기도 했다. 대학에서 표절이 끊이지 않는 것은 교수와 제자 사이의 ‘도제 시스팀’ 때문이라는 것이 공통된 지적. 교수가 제자의 앞날을 ‘쥐고’ 있기 때문에 제자들은 논문을 도용당하거나 번역자의 이름을 바꿔도 속병만 앓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 최근에는 교수 업적 평가의 가장 중요한 잣대가 ‘논문 수’라는 점도 교수들을 표절의 유혹으로 몰아넣는 요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교수 연구 업적에 대한 질적 평가보다 양적 잣대가 중시됨으로써 교수들이 표절을 해서라도 논문 수를 늘리려 한다는 것이다.
대중문화계의 표절은 드라마 광고 영화 가요 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만연하고 있다. 최근 사례로는 MBC 주말극 ‘여우와 솜사탕’이 작가 김수현씨의 ‘사랑이 뭐길래’를 표절했다고 법원이 결정을 내린 것을 들 수 있다. 국내 방송계의 프로그램 베끼기 시비는 끊이지 않는다. 국내 대중음악 평론가와 영화평론가 등이 쓴 ‘일본 대중 문화 베끼기’(나무와 숲·1999)는 지난 30년간 한국이 일본 대중문화를 어떻게 수용해 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희대 영문학과 도정일(都正一) 교수는 이 책에서 “우리 사회가 일본의 대중문화에 취해 온 태도는 이중성과 위선 그 자체다. 매체 종사자들의 파렴치한 베끼기에 의해 시장은 이미 잠식될 대로 잠식돼 있고 그것은 지난 30년간 한국 대중문화의 생산력을 옭아매고 창의력을 질식시키는 데 크게 작용했다”고 밝혔다. 가요의 경우도 90년대 중반 톱가수였던 ‘룰라’가 표절했다가 된서리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도 특정 노래에 대한 표절 시비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IT 분야의 고전적 표절은 소프트웨어 불법복제. 최근 들어서는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불법복제 대상물이 컴퓨터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인터넷 콘텐츠, 게임, 멀티미디어 파일, 데이터베이스(DB)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과거에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불법복제가 판쳤으나 단속이 강화된 요즘에는 소규모, 개인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 서울 영등포에서 PC방을 운영하는 A사장은 지난해 손님 중 한 명이 ‘온라인 게임을 하려는데 서버에 접속이 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나타내 처음엔 대수롭지 않은 시스템 오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원인을 분석한 결과 온라인 게임을 처음 설치할 때 정품 패키지에 포함돼 있는 CD 인증번호(CD 키)를 누군가 불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고 말았다. 게임마니아 P씨는 지난해 서울 용산에서 조립 PC 한 대를 샀다. 자신이 원하는 고(高)사양을 선택해도 속칭 메이커 PC보다는 가격이 쌌다. 하지만 정작 P씨의 계산은 다른 데 있었다. PC 조립상을 제대로만 선택하면 보너스로 엄청난 양의 게임을 하드에 불법으로 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P씨는 “용산에서 조립 PC를 살 때 운영체제인 윈도 XP를 버젓이 복제품으로 주면서 값을 싸게 해주고 그 대신 마이크로소프트사에 고객 등록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줄 정도”라고 전했다. 창업분야에도 따라하기가 거세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실내 서바이벌 경기장, 실내 사격장, 다트 게임장 등에 손님이 몰리자 같은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3년 전 여름에는 ‘조개구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시내에 수백개의 점포가 생겨 음식점 창업시장을 강타했지만 대부분 두세 달도 안 돼 문을 닫았다.
주식투자도 따라하기 식이 많다. 주가가 오르면 ‘족집게 주식 과외’가 극성을 부리는 것이 대표적 사례. ‘투자설명회’ ‘증권세미나’ ‘주식강연회’ 등의 이름으로 서울 강남과 여의도 일대 20∼30곳에서 열리는 주식과외는 남이 하니까 나도 하겠다는 따라하기 투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페어플레이가 통용되는 사회는 이성과 상식, 법규 등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보면 상식은 실종되고 법조차 편할 대로 해석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법을 지키지 않는 자신을 탓하기보다 제도와 법의 문제점을 먼저 탓한다.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픈 심리에서 비롯된 투서와 모함, 비방 등이 판을 치고 있다.
▽모든 게 법 탓?〓중소기업을 운영하는 H씨(44·경기 고양시 일산구)는 지난주 일요일 승용차를 몰고 경기 연천에 일을 보러 갔다. 전곡읍에서 3번 국도와 합류해 왕복 4차로 도로에 접어든 뒤 속도를 높였다. 제한속도 80㎞를 넘어섰다. 그때 맞은편 차로를 지나던 승용차가 전조등을 번쩍였다. ‘단속중’이란 것을 알려주는 표시였다. 그는 급히 감속했다. 조금 뒤 경찰 순찰차 2대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 서울 번호판을 단 차가 ‘재수없게’ 걸려 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단속을 알려준 ‘착한’ 운전자에게 마음으로 감사했다. H씨는 “도로 여건상 시속 100㎞도 충분하다”며 “경찰이 운전자 안전을 생각한다면 속도를 내려는 위치에서 경고를 해야지, 한참 달리고 있는 곳에 숨어서 단속하는 건 단속 건수를 채우려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속도제한 규정과 경찰의 함정 단속을 탓했다. 대부분의 운전자는 단속에 걸리면 ‘재수가 없어 걸렸다’고 생각한다. 법규를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은 칭찬받기는커녕 ‘답답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기 일쑤다.
수년 전 상대방 과실로 교통사고를 당해 한 달가량 입원했던 주부 김모씨(40·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는 사고 이후 더욱 안전에 신경을 써 속도제한 규정을 철저히 지킨다. 최근 경기 파주시 문산에 가기 위해 자유로로 접어들었다. 통일전망대 방향으로 향하는 길의 자동차 제한속도는 시속 90㎞였지만 이를 지키는 차량은 거의 볼 수 없었다. 보통 110∼120㎞, 심지어 140㎞ 정도로 내달리는 차도 있었다. 규정속도를 지키며 가던 김씨는 뒤따라오던 차들이 라이트를 번쩍이거나 경적을 울려대는 바람에 마지못해 옆 차로로 비켰다. 지나는 운전자 가운데는 손가락질을 하거나 흘겨보는 이가 많았다.
승용차 1000만대 시대이지만 우리의 운전문화는 아직 후진국 수준이다. 차량 접촉사고가 나면 길 한가운데에 차를 세워둔 채 상대 운전자의 잘못을 우기며 멱살잡이를 하거나 신호등이 청색으로 바뀌기 전에 노란색만 돼도 빨리 가라며 뒤에서 경적을 울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자신을 반성하거나 법을 지키는 타인을 칭찬하기보다 남의 탓부터 먼저 하고 본다. 나만 생각해 도로 옆에 차를 세워둔 채 과일을 팔거나 상습 정체지역에서 음료수 등을 파는 사람도 적지 않다. 반독재투쟁을 했던 국회의원 출신의 한 인사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라지만 교통안전이나 납세의무라는 사회 정의를 위해서는 마땅히 단속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네탓’ 공방〓지난해 12월 초 떨어질 줄 모르는 국내 기름값의 조정을 둘러싸고 정부와 정유사, 주유소업계는 조정이 잘 안되는 것을 서로 상대방에 책임을 전가하는 공방을 벌였다. 또 같은 달 수지 김 피살사건 진상 은폐 의혹과 관련해 국가정보원과 경찰은 2000년 2월 경찰이 이 사건 내사를 중단한 이유를 놓고 서로 상대방에 그 탓을 돌리기에 바빴다. 정치권의 네 탓 공방은 일일이 그 예를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흔하다. 국회가 공전하거나 예산안 처리가 늦어질 경우 여야는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우선 상대 당에 그 책임을 떠넘기고 본다. 지난해 말 건강보험 재정 통합 유예기간을 놓고 벌인 협상이 결렬된 데 대해서도 여야는 서로 상대방에 책임을 떠넘기며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난무하는 비방과 음해〓정치인들 중에 자신의 말이 언론에 보도돼 물의를 빚을 경우 언론이나 타인에게 그 탓을 돌리는 사람이 더러 있다. 말이 와전됐다거나 곡해했다는 식이다.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난무하고 있는 비방과 음해는 허위 사실로 ‘네 탓’을 부추겨 반사적 이익을 얻으려는 대표적인 경우일 수 있다.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 통계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비방과 음해 등을 통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다 단속된 사례는 지난해 총 1509건으로 전년도에 비해 9.9배나 늘었다. 익명이라는 점을 악용한 이 같은 ‘정신적 폭력행위’는 특히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 고위공직자, 선거 입후보자 등을 겨냥해 이뤄진다. 모 군청의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에 도의원 출마예정자를 겨냥해 “부인이 자궁암을 앓고 있는데도 속이고 암보험에 가입했다”는 내용의 거짓 글을 올린 사람이 검거된 사례도 있다. 인터넷의 속성상 순식간에 정보가 퍼지기 때문에 이런 허위사실이 유포되면 설령 사실무근임이 확인된다 해도 당사자는 씻을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된다.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 단장인 하옥현(河沃炫) 경무관은 “인터넷 상의 비방과 음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은 윤리 의식과 도덕적 규범의 해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조헌주기자 hanscho@donga.com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했던가.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 공짜 세태가 얼마나 만연돼 있는 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경로우대, 장애인우대 등과 같이 ‘선의의 무료’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나만 특혜를 받으면 되고 나에게만 이득이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 심리가 문제다. 하지만 ‘세상에 진짜 공짜는 없다’고 했다. 공짜의 탈을 썼을 뿐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속담에 ‘공짜 치즈는 쥐덫에만 놓여 있다’고 하지만 그 치즈도 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니 진짜 공짜는 아니다.
▽‘공짜라면 뭐든 해∼’〓지난해 3월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영결식을 치른 서울아산중앙병원의 관계자들은 ‘얌체 주차족’ 때문에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영결식장으로 사용될 병원 주차장을 비우기 위해 며칠 동안 안내방송을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차량이 거의 절반이나 매일 남아 있었던 것. 알고 보니 서울시내 종합병원 가운데 유일하게 무료로 운영되는 이 주차장을 지하철 이용 출퇴근자나 인근 주민, 단체 골퍼, 낚시꾼 등이 공짜 주차를 해 왔던 것이다. 결국 이들 차량을 견인한 뒤에야 영결식을 치를 수 있었던 병원측은 결국 올 4월1일부터 주차장을 유료화했다.
올 1월 대한항공이 발표한 한국 승객의 ‘꼴불견 행태 워스트 7’ 중 두 번째가 ‘어이 한잔 더 형’이었다. 여승무원에게 반말을 하며 불러대는 ‘어이 아가씨 형’ 다음으로 흔한 꼴불견이 바로 기내서비스 술이 공짜라고 만취할 때까지 마구 마셔대는 승객이었다. 세일과는 별도로 매출액을 높이려고 사은품과 경품을 경쟁적으로 내거는 대부분의 백화점 판촉행사도 실제로 보면 구매자의 공짜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실제로 현대백화점 천호점이 2월 한 달간 냉장냉동식품 매출을 분석한 결과 무료 시식행사를 한 주가 운영하지 않은 주의 매출에 비해 무려 7배나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백화점 관계자는 고가의 공짜 경품(아파트, 자동차, 보석 등) 여부에 따라 전체 매출이 30∼40% 정도 차이가 난다며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공짜심리를 악용한 범죄〓최근 한국소비자보호원은 ‘공짜 컴퓨터 광고’ 피해자들이 속출하자 ‘소비자 경보’를 발령했다. 또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인터넷 광고를 클릭하면 컴퓨터를 공짜로 주겠다고 꾀어 1050명으로부터 21억원을 가로챈 한 정보통신의 사장을 최근 구속했다. 금융감독원은 일부 컴퓨터학원이 2개월만 다니면 수강료 전액을 되돌려준다고 수강생을 모집한 뒤 수강료를 챙겨 달아나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주의를 촉구했다. 금감원 조사결과 ‘학원비 공짜’라는 광고를 믿은 수강생은 2개월간 1200여명에 금전 피해가 16억원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판단력이 흐린 노인들에게 처음엔 공짜라며 건강식품을 나눠주고는 나중에 언제 그랬느냐며 돈을 청구하는 사례와 공짜 휴대전화 피해사례도 여전하다. 이뿐만 아니다. 공짜 중국여행을 미끼로 여행자들을 중국으로 데려가서는 여권을 훔쳐 달아나는 사건도 끊이지 않고 있다.
▽공짜 관객에 발목 잡혀…〓문화계에서는 ‘공짜표(초대권)’를 없앤 극히 일부 단체를 제외하면 공짜표는 어쩔 수 없이 있어야 할 ‘관례’로 여긴다. 하나의 연극이 막을 올릴 경우 ‘괜찮은 작품’이면 30∼40%, 작품성이 떨어지면 60∼70%까지 초대권을 남발하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일부는 작품의 인기도를 관객수로 과시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회피할 수 없는 공짜표 관객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한 것이다. 관계자들은 “경제적 여유가 있고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공짜표를 더 요구한다”고 털어놓는다. 표를 사지 않고 공짜표를 받는 것이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일종의 ‘특권’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의 대형 공연장인 LG아트센터는 지금은 직원들조차 돈을 내고 관람하는 풍토가 정착됐지만 개관 초기 초대권을 없애면서 ‘큰 저항’을 받는 진통을 겪기도했다.
▽기본을 흔드는 공짜심리〓흔히 선거때 뿌려지는 돈은 ‘눈먼 돈’이라 해서 ‘못받은 사람이 바보’라고 할 정도. 선거때면 후보들에게 금품과 향응을 요구하며 손을 내미는 유권자들의 행태는 상상을 초월한다. 지역 주민을 모아놓고 후보를 부르는 것은 고전적인 방법. 각종 친목단체들은 선거철만 되면 행락비용 지원을 공공연하게 요구한다. 잘사는 동네라고 예외는 아니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단지 부녀회 상당수가 선거철이면 ‘여성표는 투표율이 높다’는 것을 무기로 후보들에게 거액의 금품을 요구한 사례가 끊이질 않았다. 비단 어른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중학생 아들을 둔 유모씨(43·여·서울 마포구 도화동)는 “아들이 반장으로 뽑힌 뒤 ‘반장이 되고도 왜 아무 것도 없느냐’는 말에 시달린 끝에 반 급우 모두에게 음료수와 햄버거를 돌리는 것은 물론 친한 급우는 ‘별도 대접’을 하고서야 압력이 끝나더라”며 “공짜 세태가 아이들까지 물들게 한 것을 보며 너무 씁쓸했다”고 말했다. 안영식기자 ysahn@donga.com
▼전문가 진단▼
공짜 심리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연세대 의대(정신과) 민성길(閔聖吉) 교수는 “한국 사람들이 공짜를 당연시하고 탐닉하는 이유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과잉보호를 받은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진단했다. 부모가 일방적으로 베풀어주는 것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어른이 돼서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 대한 개념이 희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소비자보호원 안현숙(安賢淑) 상담팀장은 “공짜상술에 속은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구제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공짜인줄 알고 받은 물품에 대한 대금청구서가 날아오거나 신용카드 결제가 진행중이라면판매업체측에 내용증명 우편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신용카드사를 상대로 카드결제 중지를 요청하는 항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 만약 이런 조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경우 소보원은 피해자를 대신해 판매업체의 위법사실을 사법기관(검찰, 경찰)에 고발하는 등 피해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안 팀장은 “이미 결제된 금액에 대해서는 항변권을 행사할 수 없으므로 피해가 발생한 즉시 상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지불능력이 없는 미성년자에 대해서는 법적인 보호장치가 있지만 인지능력이 떨어져 공짜상술에 취약한 노인들은 단지 성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보호장치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초대권 없는 공연장’으로 유명한 LG아트센터 최정휘(崔正煇) 홍보 마케팅담당자는 “훌륭한 공연이란 공연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관객이 함께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며 “관객이 공짜 손님인가, 유료 관객인가에 따라 공연의 분위기와 수준은 전혀 다르다”고 밝혔다. 그는 “초대권이 남발될수록 입장료는 비싸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초대권 없는 공연은 결국 관객을 위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 강승수(姜承秀) 대장은 “이미 잘 알려진 공짜상술에 속는 피해사례가 끊이지 않는 것은 어처구니없다”며 “적정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받은 물품이나 서비스는 100% 사기”라고 단언했다. 안영식기자 ysahn@donga.com
▼외국인이 본 ‘공짜문화’▼
“미국 프로농구에도 초청 프로그램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른바 공짜 표와는 거리가 멉니다.” 6년째 한국농구연맹에서 심판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미국인 제시 톰슨(66)은 한국의 프로스포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홍보 티켓’과 미국프로농구(NBA)의 초청 프로그램은 확실히 구별된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홍보 티켓은 일반인들 사이에 ‘공짜 표’라는 인식이 강한 반면, 미국의 경우는 각 구단이 주로 지체장애인들을 위한 복지 사업의 하나로 초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을 뿐 그 외는 무료 티켓이 없다는 것. 그는 “다만 전국 규모의 프로 스포츠가 아닌 지역별로 운영되고 있는 마이너 스포츠의 경우는 간혹 공짜 표를 구할 수도 있지만 역시 한국만큼 많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초청 프로그램의 예를 들어 “공짜라고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다”며 “사회에 도움이 되는 공짜도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25년 경력의 국제 심판인 톰슨 심판부장은 미국에서 NBA 심판으로 10년 간 활약하다 97년부터 한국에서 심판 생활을 하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주한 미군으로 한국에 머물기도 해 한국과는 인연이 꽤 깊은 편이다. 그는 “한국의 공연, 운동 경기 등에 나돌고 있는 공짜 표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이익을 얻으려는 한국인의 심리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농구 경기에서도 유독 한국 선수들이 경기 중 심판을 속여 파울을 얻어내려는 동작을 많이 하는데 이도 그런 심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는 “그 경우 당장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반복되면 결국 본인에게 불리하게 된다”고 농구 경기와 한국 사회를 연관지어 꼬집었다. 최근 가벼운 교통 사고를 겪은 적이 있다는 톰슨 부장은 교통사고에서 피해 경중을 떠나 무조건 입원해 보상금을 타내는 일이라든지, 한국 사회에서 자주 보게 되는 식사, 술 대접 등의 향응 제공 등을 공짜 문화와 연관짓기도 했다. 그는 또 받는 쪽에서는 공짜라서 흔하게 여기고, 주는 쪽에서는 흔해서 공짜 표를 더 돌리게 되는 ‘공짜 문화의 악순환’을 생각하게 하는 말도 덧붙였다.
“한국에서는 홍보 티켓을 돌려도 실제로 경기나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공짜 표의 80∼90% 정도는 사용되지 않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공짜니까’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요?”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개성 강하기로 세계에서도 이름난 한국인의 자부심과 자기존중.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고도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 헐뜯기’와 ‘잘 나가는 사람 끌어내리기’라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빚어내기도 했다. 선거철과 인사철이면 빠짐없이 재현되는 흑색선전과 투서, 음해는 사회적 통합을 해치는 대표적인 ‘공공의 적’ 가운데 하나. 고속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라는 정보화의 물결은 인터넷을 통한 흑색선전을 한층 빠르게 확산시키고 있다.
▽뒷다리잡기식 음해〓경기 광주경찰서 경무과 민원실에 근무하는 J경사(54)는 10년 넘게 장애인 30여명을 돌보고 있는 선행의 주인공. 그의 집에 어느날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경찰관이 장애인들을 합숙시키며 앵벌이 구걸을 시킨다”는 음해성 투서가 경찰서에 들어갔기 때문. 현직 교사 P씨는 수도권 K시에서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무료 한자 강의를 펼치는 ‘고전문화 지킴이’다. 어느날 그는 교육청에 출두해야만 했다. 인근 학원 강사들이 “현직 교사의 불법 과외”라며 교육청에 제보를 했던 것. 중앙 일간지에서 부동산을 담당했던 C기자는 외환위기 직후 부친의 도움으로 서울 잠실에 재건축 대상 아파트를 샀다. 다행히 값이 올랐고 지난해 이 집을 팔았다. 그때부터 부동산업계에 루머가 돌았다. 사전 정보를 취득한 기자가 수억원대의 차익을 남겼다는 것. 심지어 기업들이 증권가에서 사보는 정보지에도 실렸다. C기자는 “내가 집을 판 직후 집값이 1억원 이상 더 올랐다. ‘작전’을 썼다면 멍청하게 쓴 셈”이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흑색선전이 가장 잘 번식하는 토양은 단연 선거판.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악성 투서와 음해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최근 한 광역시의 구청장은 “모 국장이 상대당 후보 예정자와 밀착해 있으니 조심하라”는 익명의 투서를 받았다. 이 구청장은 “투서를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자니 꺼림칙하다. 당사자를 보면 표정부터 어색해진다”고 털어놓았다. ‘줄서기’와 관련된 비방은 선거 유세장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흩뿌리는 흑색선전에 비하면 차라리 ‘애교’에 속한다. 중앙 정치권과 지방선거뿐만 아니라 농협조합장, 대학총장, 교육감, 노조위원장 등 각종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흑색선전과 투서 논란은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흑색선전〓국가 정보화의 상징기관인 정보통신부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이 지난해 10월 전격 폐쇄됐다. 휴대전화 요금, 인터넷 내용등급제 등을 둘러싼 네티즌의 게시판 시위에서부터 ‘특정업체와 정부가 결탁했다’는 등의 음해성 게시물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 정보통신부는 6월부터 3개월간 자유게시판에 올려진 글을 분석한 결과 명예훼손과 비방성 게시물이 27%에 달한 반면 건의와 질의는 각각 10, 14%에 지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다른 정부기관의 게시판들도 ‘욕설마당’으로 변해가면서 운영방식을 실명제로 바꿔나가고 있다. 주민등록번호와 실명이 올바르게 기재돼야만 글이 올라올 수 있게 한 것. 인천지방경찰청 자유게시판의 경우 지난해 매달 평균 300여건의 글이 올랐으나 올 1월 게시판 실명제를 실시한 이후 게재건수가 10분의 1 이하로 줄었다. 인천경찰청 관계자는 “기존에 자유롭게 욕설 게시물을 올려놓던 네티즌들이 자기의 신원이 공개될 것을 우려해 다른 사이트로 이동한 것 같다”고 말했다. 특정 기업이나 집단의 잘못된 행태를 널리 알려 바로잡는다는 취지에서 도입된 안티사이트가 최근에는 도를 넘어 흑색선전과 비방의 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특히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안티사이트가 붐을 이루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라이벌 사이트를 찾아 출처가 불분명한 억지소문과 폭언을 퍼붓는 경우가 많다. 여성 보컬 P그룹의 한 안티사이트 자유게시판은 P그룹의 라이벌인 모 그룹 팬들과 P그룹 팬들이 서로 비방하는 내용을 올려 ‘격투의 장’을 방불케 한다. 전문 비평가를 연상케 하는 분석적 게시물도 있지만 인신공격성 발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해외서도 망신〓지난해 7월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수출입은행에 대외경제부장관 명의의 편지를 보냈다. ‘한국에서 대외경제협력기금 차관으로 제공한 수출품 중 일부가 당초 계약과 다르니 자금집행을 중지해달라’는 내용. 수출입은행 담당자는 “정작 물건을 받는 우즈베키스탄 교육부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대외경제부에서 문제를 삼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재경부 관계자는 “과학기자재 납품업체 선정에서 탈락한 국내 업체들이 우즈베키스탄 정부에 납품제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투서를 보낸 탓에 이런 일이 빚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2년 전에도 대외경제협력기금 차관의 일환으로 일부 중남미 국가에 의료기자재를 보내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독일 교민 H씨는 요즘 주변의 독일인들을 만날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가 사는 도시의 한국교민회장 선거에서 “현 회장이 공금을 유용했다” “○○○는 한국과 독일에 각각 부인이 있다”는 등 인신공격이 벌어져 이 사실이 현지 신문에 보도됐기 때문. H씨는 “한국인은 해외에서도 서로 헐뜯는다는 말을 그동안 터무니없다고 묵살해 왔지만 실제 경험하고 보니 황당할 뿐”이라며 씁쓸해 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전문가 진단▼
최근 한 무명의 네티즌이 전파시킨 ‘게시판에서 싸움나는 순서’라는 글이 네티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우리의 미숙한 토론문화를 함축적으로 잘 보여줬기 때문.
A: “어제 중국집 가서 자장면 시켜 먹었는데, 정말 맛있더군요.” (평범한 문제제기)
B: “자장면이 뭐가 맛있어요? 우동이 훨씬 맛있지. 맛을 안다면 우동!” (반론 위한 반론)
A: “그럼 우동 안 먹는 사람은 맛을 모른단 말인가요?” (말꼬리 잡기)
B: “그만큼 우동이 낫다는 거죠. 에이, 자장은 느끼해서….” (상대방 깎아내리기)
C: “자장면에 대해 잘 모르시는군요. 제가 설명해드리죠. 유래는 어떻고 종류는 어떻고… 자장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상대방 무시)
D: “잘 읽었습니다만, 근데 말투가 기분 나쁘군요.” (말투 물고 늘어짐)
C: “너 몇 살이야?” (반말, 나이로 권위 내세움)
이 글은 이 외에도 흠집내기, 욕설, 말 막기 등으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식의 토론문화를 꼬집었다. “재미있고 정확한 글이군요. 흑백 논리가 팽배한 우리의 사회 구조와 토론문화가 학습되지 않은 환경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종리더십개발원 민주시민교육센터 송창석(宋昌錫·42) 소장의 진단이다. ‘나와 다르다’는 것이 곧 ‘용서받지 못할 적’이 되어버리는 우리의 현실을 감안할 때 ‘민주사회란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라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내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송 소장은 말했다. 상대방의 가치나 태도를 인정하는 가운데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훈련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부족하다는 것.
“미국 프랑스 등 선진국가에서는 ‘토론’이 교과과정에 포함돼 있어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토론 훈련을 거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학교교육 대부분이 지식전달 위주의 입시교육에 그쳐 교사조차 토론과 토의에 익숙지 않습니다.” 송 박사는 “철자법과 맞춤법을 배우면서 글을 익히기 시작하는 것처럼 학교에서부터 커뮤니케이션 기법, 경청하는 법, 찬반 논쟁하는 법을 기술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외국인이 본 ‘흑색선전’▼
베로노 스콧 토킹턴(메리츠증권 연구원·33)
“중상과 비방을 일컫는 영어단어 ‘mudslinging’을 ‘mudfighting’이라고 말하는 한국인을 많이 보았습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더군요. ‘싸우다’라는 뜻의 ‘fight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구나 싶어서요.” 5년째 한국에 살고 있는 미국인 토킹턴씨는 한국의 정치권에서 행해지고 있는 흑색선전이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대통령 후보 경선제는 같은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끼리 뭉쳐 더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악선전’이라는 부정적인 면이 더 많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정치적 선전을 위한 과장된 비방과 갈등을 조장하는 발언 등이 유권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이에 비하면 세제(稅制)나 복지 등 유권자가 피부로 체감할 만한 부분은 후보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요. 관심들이 없는 것인가요.” 토킹턴씨는 유달리 한국의 정치문화와 선거풍토에 관심이 많다. 한국에 오기 전 지인들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대한 자료를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남달리 정의감이 강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비방’에 대한 검증이 거의 없다는 것이 오히려 놀랍기까지 해요.” 그는 “초고속 커뮤니케이션과 30초 광고로 대표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정치인들이 인신공격이나 중상모략의 힘을 빌리려는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유권자가 옥석을 잘 가려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흑색선전을 일삼는 정치인에게 응해줘서는 안됩니다. ‘액션’에 불과한 정치인들의 말에 한국인도 넌더리를 내고 있는 것 같아요. 중상모략에 가담하는 정치인을 거부하고, 깨끗한 이슈로 선거운동을 하면서 한국의 미래를 위해 실행 가능하고 합리적인 청사진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투표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1996년 27위, 97년 34위, 98년 43위, 99년 50위, 2000년 48위, 2001년 42위…. 독일 베를린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투명성위원회(TI)가 매년 조사해 발표하는 국가부패지수 순위에서 한국이 받은 성적표다. 지난해 91개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받은 42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로 제3세계권 국가들 수준이다. 싱가포르(4위)는 물론이고 홍콩(14위) 일본 (21위) 대만(27위)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서도 크게 뒤떨어진다. 우리 사회에 ‘검은 돈’이 넘쳐나고 ‘뒷돈 거래’가 성행하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넘치는 검은 돈〓정현준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 윤태식 게이트…. 자고 나면 새로운 부패 사건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웬만한 규모의 부패사건은 뉴스가 되지 않을 정도다. 이 때문에 부패 불감증 문화가 자리잡았다는 냉소가 나오기도 한다. 온갖 ‘게이트’의 핵심은 돈과 부패한 권력의 결탁이다. 경제성장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대우그룹의 부실회계 금액이 22조9000억원에 이르고, 외환위기 전후인 96∼98년의 기업 접대비 총액은 10조원이었다. 국가경제가 위기로 치닫는 상황에서도 검은 돈은 흥청망청 넘쳐흘렀다는 얘기다. 지난달에는 전현직 고교 교장 등 44명의 교육공무원이 학교건물 신축공사 등과 관련해 500만∼7000여만원씩의 뇌물을 받은 혐의가 적발됐다. 2월에는 300억원의 구조조정기금을 편법 지원받은 벤처기업과 그 대가로 7억원 상당의 주식 등을 받은 공무원들이 적발됐다. 그러나 이건 빙산의 일각이다. 정치자금법을 엄격히 적용하면 현직 국회의원은 한 명도 빠짐없이 감옥에 가야 할 것이라는 말을 의원들 스스로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부패지수와 사업여건 간의 상관계수는 0.93으로, 국가경쟁력(0.91)이나 경제자유도(0.88)보다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 기업활동에서 부패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케 한다.
▽선거는 ‘돈 먹는 하마’〓97년 대선에서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은 1935억원의 수입을 올렸고 이 중 1009억원을 지출했다고 중앙선관위에 신고했다. 야당이던 국민회의는 수입 516억원, 지출 349억원을 신고했다. 이 액수도 엄청난 것이지만 정작 정치권에서는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지방선거와 대선이 함께 치러지는 올해 여야 각 정당에 지급되는 국고보조금은 1138억원. 이와 별도로 각 정당이 합법적으로 모금할 수 있는 후원금 한도는 각 400억원이다. 이 중 200∼300명에 이르는 중앙당 사무처 직원의 월급 등 경직성 경비를 제외하면 정작 선거운동에 쓸 수 있는 돈은 정당별로 300억원 정도밖에 안된다. 이 돈으로는 지방선거도 치르기 힘들다는 게 여야 재정 실무자들의 고백이다. 사활을 건 총력전으로 진행되는 대통령선거는 지방선거보다 훨씬 돈이 많이 든다. 대부분의 대선 자금이 불법 루트를 통해 조달될 수밖에 없다. 2000년 16대 총선 출마자 70여명을 대상으로 동아일보가 지난해 선거자금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들이 스스로 밝힌 선거비용은 평균 5억1만원으로 법정선거비용 한도액(평균 1억1600만원)의 4.3배나 됐다. 30억원을 썼다고 실토한 후보도 있었다. 서울에서 출마한 한 후보는 “중앙당이 마련해 준 지원금만 해도 5억원이나 됐다”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최근 부당한 정치자금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해 정치권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정작 선거전이 본격화된 상황에서도 재계가 정치권의 은밀한 지원 요구를 거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고비용 정당구조〓각 정당은 전국 227개의 선거구마다 지구당을 운영하고 있다. 각 지구당은 또 읍 면 동 통 반에 이르기까지 조직 책임자를 두고 있으며 조직원 수는 지구당별로 1000∼3000명이나 된다. 이들은 모두 이른바 ‘관리되는’ 조직원들이다. 충청권의 한 의원은 “명절에 이들에게 작은 선물 하나씩만 돌려도 수천만원이 들고 선거 때 조직을 움직이려면 금세 수억원이 달아난다”고 말한다. 중앙당이 조직책을 임명하고, 그 조직책이 지구당에 내려와 당원을 모으고 조직을 구성해온 이제까지의 하향식 정당 구조에서는 불가피한 일이다. 조직관리에 드는 비용은 대부분 ‘검은 돈’으로 충당되기 마련이다. 지구당위원장들로서는 이권 개입, 공천 헌금까지 가리지 않고 돈을 끌어모을 수밖에 없다. 잘못된 정당구조가 검은 돈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은 지상 11층, 지하 4층, 연면적 8685평짜리 건물을 임차해 중앙당으로 쓰고 있는데 보증금만 37억원이다. 한나라당은 97년 지상 10층, 지하 6층, 연면적 7598평짜리 당사를 짓는 데 수백억원을 들였다. 종이 한 장 생산하지 못하는 정당이 이처럼 ‘거창하게’ 운영되는 것은 결국 검은 돈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페어플레이]외국인이 본 검은 돈
한국에 부임한 지 3년째다. 한국 사회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기업의 투명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히 느꼈다. 기업의 투명성이 보장되면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활동에서 ‘뒷돈 관행’은 여전한 것 같다. 한국에서 활동 중인 일부 외국기업의 임직원들로부터 그런 사례에 대해 종종 얘기를 듣는다. 수십년 전엔 일본의 기업들도 ‘뒷돈’과 ‘비자금’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기업들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충실히 따라 그런 관행들을 없앴다. 그 결과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세계 유수 기업들의 공통점은 어떤 큰 이익이 있더라도 절대 ‘편법’이나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뒷돈 거래’로 기업의 이미지가 실추될 경우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기업 활동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필수다. 토요타의 경우 회계상으로 어떤 종류의 비정상적인 현금 유통도 불가능하다. 모든 재무와 회계과정에 엄청난 투명성과 정확성이 요구돼 뒷돈이나 비자금이 끼어들 틈이 없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해당 임직원을 엄중 문책한다. 그러니 누가 사소한 편법에 자신의 일자리를 걸려고 하겠는가. 일본 기업들은 또 저마다 엄격한 ‘윤리규정(Code of Ethics)’을 갖고 있다. ‘검은 돈’을 매개로 한 정경(政經)유착은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이에 대한 적절한 처벌 여부다.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하면 언제든 비리가 반복되기 마련이다. 비자금이나 뒷돈으로 사리를 취하는 개인이나 기업들은 반드시 망한다는 사회적 교훈을 남기는 노력이 중요하다. 최근 세계시장에서는 한국기업들이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매우 인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 사회와 기업들에 ‘페어플레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인식이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검은돈’을 없애기 위해서는 더욱 엄격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특히 정치자금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김민전(金玟甸) 경희대 교수는 “10만원 이상의 정치자금은 수표를 사용한 실명 기부만 허용하는 등 정치자금의 유입과 지출내용을 완전 공개하도록 법제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고계현(高桂鉉) 정책실장은 “기업이 일정 규모의 정치자금을 낼 때는 이사회 결의를 거치도록 함으로써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지정 계좌를 통해서만 정치자금을 받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정당의 중앙당 및 지구당 체계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용호(金容浩) 인하대 교수는 “대규모 중앙당 체제는 과거 수만∼수십만명을 동원하며 선거를 치르던 시절에 필요했던 조직”이라며 “이젠 정보화시대에 걸맞게 원내정당으로 탈바꿈하고 당 조직을 획기적으로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고보조금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매년 1000억원대의 국민 세금이 여야 정당에 지급되는데, 사용처 검증이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대선이 있는 해에만 보조금을 지원하며 이에 대해서는 연방선거위원회가 사용 내용을 심사하고 위법행위가 있으면 직접 수사권을 발동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98년 한 자민당 의원이 국고보조금을 자동차 구입 등 개인용도로 유용한 사실이 발각돼 구속되기도 했다. 한국은 일본보다 15년 앞선 81년 국고보조금 제도를 도입했지만 눈에 띄는 위반사항 적발이 한 건도 없는 실정이다. 공무원의 부정 축재를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인 공직자 재산등록 및 공개 제도도 속빈 강정이라는 비난이 높다. 올해만 해도 1급 이상 공직자 중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을 비롯한 35명이 부모나 자녀의 재산 공개를 거부해 법 실효성이 반감되고 있다는 지적을 사고 있다. 93년 시행 이후 10년 동안 불성실 신고자가 2만7000여명이나 적발됐지만 해임 등 중징계를 받은 사람은 단 2명에 그쳤다.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여성이라서, 장애가 있으니, 피부색이 검어서….’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장애나 피부색 등을 이유로 빚어지는 차별. 우리 사회의 ‘페어플레이’를 가로막는 요소 중 하나다. 차별은 우리의 제도 관습 전통 문화 등과 관련이 있다. 문제는 이런 차별이 통용되는 사회에서는 실력에 바탕을 둔 공정성이 설 자리를 잃는다는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계속되는 성차별〓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한 ‘2001년 여성 권한척도’에서 한국은 전체 64개국 중 61위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조사에서도 한국은 ‘여성지위 후진국’에 포함된다.
한국에서의 성차별은 평생 계속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통계연보에 따르면 2000년 현재 전체 인구 4600여만명 중 0∼14세는 남자 508만8000명, 여자 455만1000명으로 남자가 53만7000명 더 많다. 이는 남아 선호사상이 ‘개입’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남아 선호와 관련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얼마 전 아들 못 낳는 것을 비관해 자살한 한 종갓집 종부(38)의 사연은 극단적인 예. 그는 유서에서 “딸만 둘을 낳고 아들을 낳으려 온갖 노력을 다해 봤지만 몸만 축났을 뿐이다. 이젠 자유를 찾고 싶다”고 말했다. 취업 승진 임금 등에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회를 제한당하거나 폄하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해 9월 한국여성개발원 조사에서 기업들은 남성의 채용 기준으로 성적, 자격증, 재능, 발전 가능성 등을 주로 꼽은 반면 여성의 경우 용모, 인상, 성격을 중시한다고 답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유경준(兪京濬) 연구위원은 최근 한 보고서에서 1999년 여성 노동자의 월 평균임금이 106만원으로 남성의 63.1%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 중 47%는 교육·근속·경력에 바탕을 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57%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발생한 ‘차별’이었다고 분석했다.
▽뒷전에 밀린 장애인과 노인〓승진 대상 1순위였던 충북 제천보건소장직에서 탈락한 장애인 의사 이희원(李熙元·40)씨는 “장애인은 몸이 좀 불편할 뿐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임면권자가 밝힌 그의 탈락 사유는 ‘능률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1987년 서울대 의대 재학 중 뇌출혈로 쓰러져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그는 지난해 11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하자 가장 먼저 이 문제를 진정했다. 서울대 김용익(金容益·의료관리학) 교수는 “장애인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일반의 고정관념부터 언페어하다”고 지적했다. 장애인 혼자 휠체어를 타고 100m를 나아가기도 힘든 환경에서 장애인의 능력을 논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추산한 2000년 국내 장애인 수는 인구의 3.09%에 해당하는 약 145만명. 이 중 64.5%가 지체장애인이다. 이들은 법에 정해진 장애인 고용의무도 지켜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영위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일할 능력과 의사를 가진 노인들도 뒷전에 밀려나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장지연(張芝延) 부연구위원은 “미국에서는 연령차별금지법에 따라 채용 배치 구조조정 때 나이를 이유로 차별하지 못하게 돼 있다”며 “한국도 나이보다는 능력으로 구별하는 쪽으로 사회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벌은 곧 계급〓올 2월 한 지방대를 졸업한 김모씨(26)는 사회 첫 관문에서 학벌의 벽을 절감해야 했다. 토익 900점에 대학 평균 3.7학점의 성적을 들고 대기업에서 벤처기업까지 무려 20여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겨우 3곳에서 서류전형을 통과했을 뿐 한 군데도 면접을 통과할 수 없었다. ‘학벌 중시주의’는 기업들이 최근 수시채용 방식을 채택하면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 사원이 학교 후배를 데려오는 ‘사원추천제’도 학벌 편중 현상을 부추긴다. 국민대 김동훈(金東勳·법대) 교수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출신 대학이 사회적 부와 권력, 신분을 매기는 결정적 기준이 되고 있다”며 “이 기준은 한번 결정되면 영구히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봉건적 계급제도와 같은 성격까지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몇몇 대학 출신들이 요직을 독점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가 2000년 11월 말 조사한 ‘국내 100대 기업 최고경영자의 출신 대학별 분포’에서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출신이 70%를 차지했다. 16대 국회의원 중 이들 3개교 출신이 56%, 검사의 경우 75%(2000년 7월 현재), 3급 이상 행정부처 공무원은 52%(1999년 1월 현재)였다.
▽인권 사각지대의 외국인 노동자〓국내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임금체불, 산업재해, 폭행과 폭언 등은 다반사다. 국내 불법체류 외국인은 지난해 말 25만여명으로 전체 외국인 노동자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64.1시간으로 국내 법정 근로시간(44시간)보다 20시간이나 많다. 경기 성남시 ‘외국인 노동자의 집’ 김해성(金海性) 목사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내국인이 기피하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언제든지 강제 추방될 수 있는 존재로 취급돼 왔다”며 “이제 이들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인 차별, 장애인 차별, 여성 차별…. 이 많은 차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문화적 분파주의’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이화여대 최준식(崔俊植·한국학) 교수는 이를 ‘우리주의’라고 부른다. 어디를 가든 나(우리)와 남을 가르려 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 한국인은 특히 유교의 영향을 받은 집단주의가 더해져 더욱 심각한 양상을 보인다고 최 교수는 지적했다. “한국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철수’나 ‘영희’가 아니라 ‘누구네 집 몇째 아들(딸)’로 인식됩니다. 학교에 들어가 크고 작은 편가르기로 발달하는 집단주의 감정은 사회에 나가서도 ‘정(情)’이라는 단어로 집약됩니다. 물론 이 정은 ‘내 집단’ 안에서만 통하는 것이지요.”고려대 현택수(玄宅洙·사회학) 교수는 횡적, 수평적인 사고방식 대신 종적 위계질서가 득세하는 사회 현실에서 원인을 찾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갖가지 구분은 있게 마련이지만 이를 ‘다름’이나 ‘다양성’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우열을 가르려 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 현 교수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잣대로 능력을 평가한 뒤 자신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보다 상대가 떨어진다고 판단하면 무시하는 사회분위기가 차별의 원인”이라며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릴 적부터 교육을 통해 고쳐나가는 것이 근본적인 치유책”이라고 말했다.
당장 눈앞의 차별을 개선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최 교수는 차별에 맞설 수 있는 ‘대항세력’의 육성을 들었다. 단적인 예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장애인 및 여성 단체 덕분에 장애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이 상당히 누그러졌다는 것. 최 교수는 “이런 맥락에서 누구도 편들어줄 사람이 없는 외국인 근로자의 차별에 대한 국가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경기 부천 외국인 노동자의 집 이란주(李蘭珠·33·여) 사무국장은 국내 ‘3D 업종’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1992년 도입한 산업기술연수제도 자체가 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조속한 개선을 촉구했다. 그는 “제도가 보장하는 외국인 연수생 수가 실제 필요인력 40만명에 크게 못 미치는 8만명에 그쳐 불법 체류를 조장하고 있는 데다 임금 등 노동조건도 열악해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편견을 낳고 있다”고 말했다. 정경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