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경호원 양성하는 국내 최초의‘홍일점’ 교수
황복희
'20단에 달하는 무술 실력과 80여개 자격증, 수료증을 따낸 21세기형 여장부'
경호원을 지도하는 국내 유일의 홍일점 교수인 황복희 교수. 그는 경비행기 조종 자격증은 물론 청소년
지도사, 스포츠마사지 1급 지도사, 위험물 안전관리
자격증에 이르기까지 무려 80여개에 달하는 수료증
및 자격증을 갖고 있다. 또한 격투기, 태권도, 쿵푸,
검도 등 합이 무려 20단에 달하는 무술 실력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아무도 ‘경호’라는 직업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20여년 전에 남보다 앞서 미래를 일궈낸
그의 진취적인 삶을 만나본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 진출은
특별한 이슈가 되기 힘들다. 그만큼 각 분야로 진출하는 여성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라 여겨온 직업에 발을 들여놓은 여성의 숫자도 꾸준히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복희 교수(42·경기대 사회교육원 경호비서학과)를 만나러 가는 길, 기자의 발걸음에는 가벼운 흥분이 묻어났다.
황교수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경호원을 육성 교육시키는 일을 전담하고 있는 홍일점 교수다.
우리는 흔히 ‘경호원’하면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한손에는 ‘워키토키’를 든 검정 정장 차림의 절도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날아오는
총탄에 몸을 날려 의뢰인을 보호하는 늠름한 모습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거친 세계를 주름잡는 사령탑이 ‘여성’이라니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마치 ‘군인’을 연상시키는 절도 있는 말투. 황교수의 첫인상은 그 말투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단단했다.
강단 있어 보이는 작은 체구는 검정색 전투복과 워커로 빈틈없이 가려져 있다.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퍼머기가 남아 있는 머리 스타일만이
그가 여성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할 뿐이었다.
게다가 만나기 전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황교수는 태권도, 합기도, 검도, 쿵푸, 격투기 등 무술 실력이 합하여 무려 20단이라고 하지 않던가. 웬만한 장정 서넛 쯤은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여성의
몸으로 어떻게 ‘경호’ 업무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 까닭이 궁금했다.
“경호원이 익혀야 할 소양은 참으로 많습니다. 뛰어난 무술 실력은
물론이고, 강인한 위기 대처 능력과 정보 파악 능력, 그리고 사명감과
책임감 등이 요구되는 직업이에요. 제 성향이 이쪽 분야와 맞았던 것
같아요.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았던 때에 ‘경비 지도사(경호원의 정식명칭)’ 분야에 매력을 느꼈으니까요. 꽤 먼 길을 돌아와 지금의 위치에 섰는데, 한번도 후회해본 일은 없습니다.”
대학교 때 우연히 접한 쿵푸의 세계에 푹 빠져
황교수는 59년 강원도에서 군장교였던 아버지와 국민학교 교사였던
조용하고 알뜰한 성품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군 정신으로 무장한 부친은 여자아이라고 해서 보호하는 일 없이 그를 엄하게 키웠다고
했다. 새벽 4시면 일어나 영어 방송을 테이프에 녹음해 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황교수 역시 불혹을 넘긴 이제까지 하루 수면 시간이 5시간을 넘어본 일이 드물다고 한다.
어린 ‘황복희’는 부모의 교육을 받아 예의 바르고 남 돕기를 좋아하는 소녀였다.
“아직 학교 가기 전의 일인데, 하루는 할머니가 개울에 빠지신 거예요. 그러면서 돌에 부딪히셨는지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걸 보고 제가
천을 가지고 한달음에 달려가 할머니 머리를 동여매드렸는데, 알고보니 그게 어머니가 옷 지으시려고 끊어온 한복감이었네요(웃음). 어머니한테 혼날 줄 알고 조마조마했는데, 이웃 사람들의 얘기를 들은 어머니가 칭찬해 주셨던 기억이 나요.”
지금의 ‘터프한’ 모습을 보면 상상이 안되지만 어릴 적 그의 희망은
‘피아니스트’였다고 한다. 실제로도 그는 마을에서 알아주는 ‘꼬마 예술가’였다. 교육열이 남다른 부모의 손에 이끌려 만 일곱살 때부터 피아노와 성악을 개인 레슨받으며, 초등학교 때부터 시·도 대표로 수없이 많은 음악 콩쿠르에 출전하곤 했으니까. 그러나 중학교에
진급할 즈음 가세가 기울면서, 그가 익힌 피아노는 ‘예술’의 꿈을
키우는 목표가 되지 못했다. 차라리 피아노는 ‘생계’를 책임지는 수단이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그는 학교장의 추천으로 인근 고아원의
음악 선생님으로 나가는 등의 활동을 하며 푼돈을 벌었다.
대학생활도 마찬가지. 그는 피아노 바이올린 레슨을 하면서 한 전문대
유아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 2학년 때는 피아노 4대와 바이올린을 마련, 서부교육구청의 허락을 받아 청소년 음악교육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 청소년 음악교육원은 그후로도 14년간 그의 든든한 경제적 터전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던 즈음 대학생 황복희는 우연한 기회에 중국무술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취미 삼아 배우기 시작한 쿵푸가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린 것. 봉술을 비롯해 18기의 무예를 익히는 일은 고됐지만 남모를 희열을 안겨주었다. 애쓰는 만큼 실력도 부쩍부쩍 늘었다.
밤늦게 귀가하던 그에게 멋도 모르고 수작을 부리던 치한은 혼쭐이 났다. 12인용 식탁 끄트머리에 앉아 있다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아기를
몸을 날려 구한 기억도 있다. 길거리에서 여자를 때리는 남자를 제압하는 등 ‘정의의 사도(?)’ 역할도 톡톡히 하던 시절이었다.
“쿵푸가 저와 궁합이 맞았던 것 같아요. 어릴 적에는 6명이 달리면
으레 5등, 6등으로 뒤쳐지던 게 저였거든요. 그런데 쿵푸만큼은 너무
재밌고 신나는 거예요.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더 본격적으로 무술을
익히고 싶었는데, 아버지의 만류로 포기해야 했지요.”
만약 당시에 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중국무술을 익힌 후에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영화 스턴트맨이었다니까 말이다.
비록 유학의 꿈은 무산되었지만 무예에 대한 흥미는 식지 않았다. 그는 쿵푸는 물론 태권도 2단, 합기도 4단, 검도 4단, 격투기 초단 등 차례 차례로 무술을 섭렵해갔다. 그리고 이렇게 취미 삼아 익힌 무술솜씨를 그는 각종 사회단체나 복지기관의 행사에 찬조출연을 하면서 뽐내곤(?) 했다. 그걸로는 성이 안 찼던 그는 결국 명지대 사회교육대학원 연극영화과 무예전공생으로 진학하고 만다. 그때쯤 되서야 완고하던 부친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난 또 차력 같은 거 하는 줄 알고 말렸지. 네 재능이 이쪽인 걸 알았으면 유학을 보낼 걸 그랬다.” 부친의 항복선언(?)이었다.
대학원 졸업 후에도 그의 향학열은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친
김에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대학에서 체육사회학 학사를, 그리고 컨베넌트 대학에서 석, 박사학위를 땄다. 공부에만 매진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에 그는 카이로프락틱(신체교정요법의 일종), 스포츠마사지 1급
지도사 자격 및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 그리고 문화관광부 청소년 지도사, 보이스카우트 훈련 강사, 중국 침술원 1급 자격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자격증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그가
따낸 자격증 및 수료증의 수는 무려 80여개. 딱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자 황교수는 멋쩍어했다.
“그 성취감이라는 게 말도 못하죠. 남들이 못 가진 자격증을 하나하나 따내고 나면, 너무 기분이 좋은 거예요. 마치 중독 같은 거죠. 그러니 이어서 다른 것에 또 도전하는 거죠. 사실 제가 좀 욕심이 많아요.
한가지 일만 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같은 기간에 두 가지 이상 시험공부를 하는 식으로 살았어요. 솔직히 이제껏 쓴 수강료만 모아도, 집 몇채는 사고도 남았을 걸요(웃음).”
이런 남다른 ‘욕심’의 배경에는 부모가 있었다. ‘남보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모이를 먹는다’고 늘 일렀던 부친의 따끔한 교훈과 ‘10원을 비웃는 자, 10원에 운다’고 늘 강조하며 근검절약하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그는 옷과 가방, 화장품 같은, 또래 여자들의 욕심에는
무심했으나 ‘공부’에서만큼은 탐욕스러웠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고시(경찰청)인 경비지도사라는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다. 관련 법규를 익히고 공부를 해나가면서 그는 ‘경호원’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또 유망한것인지, 눈이 뜨이게 되었다.
그가 따온 수많은 자격증이 이 직업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렇게 경호학 공부를 계속한 끝에 그는 현재 명지대 사회교육원 경호비서학과 주임교수를 맡고 있다. 이제
그의 실력은 경찰 관계자들도 인정할 정도라, 경비지도사 합격생들의
소양 필수 교육도 맡고 있다. 이 교육은 동국대와 한국체육대를 제외하면 황교수가 유일하게 맡고 있다.
여성이지만 그가 지닌 카리스마는 남다르다. 전국 8천여명의 우락부락한 체육관장들을 모아놓고 강연을 하면서도 얼굴 한번 붉어지는 일이 없는 그다. 그런 매서운 교수 아래서 ‘미래의 경호원 지망생들’은 경호전문 교육과 시사, 경호관계법, 외국어는 물론 경비행기 조종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련 학문을 익히고 있다.
아침에 출근하면 밤9시까지 꼬박 학과 사무실을 지킬 정도로 경호비서학과에 쏟는 황교수의 애정과 관심은 매우 크다. 필리핀 바기오 대학과의 연계도 그 대표적인 예. 정규 대학의 학과가 아니라 사회교육원 소속 학과라는 핸디캡 때문에 학생들이 받는 불이익을 안타깝게 여겨 그는 자신이 체육교육학과장을 겸임하고 있는 필리핀 바기오 대학과의 연계를 추진했다. 이에 경기대 경호비서학과 학생들은 2년에 걸친 과정이 끝나면, 필리핀 바기오대학의 3학년으로 편입, 졸업과 동시에 대학 졸업증서를 받는다. 이번에 졸업하는 1기생 5명은 필리핀 바기오대학 3학년으로 편입이 확정된 상태다.
그뿐만이 아니다. 올해 여름 SBS TV <리얼 코리아>팀에서 자신을 취재하러 왔을 때도, 황교수는 자신 대신 학과 학생들을 카메라 앞에 세우도록 종용했다. 자신보다는 학과에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다보니 황교수에 대한
학생들의 신망도 두텁다. 최이정 조교(21)는 황교수에 대해 “교수님이 억세 보이지만 실제로는 학생들 하나하나를 챙기는 정이 많고 여성스러운 분”이라고 귀띔한다.
‘모전여전’ 국내 최연소 경비행기 자격증 취득한 작은 딸
황교수는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는 남편과의 사이에 딸만 둘을 두었다.
스물아홉에 주위의 소개로 만난 남편과는 만난 지 2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결혼을 결정했다. 그의 일에 전폭적인 지원과 이해를 해주는 남편은 아내가 경호비서학과 교수로 발령받자 “경호원이라면 경호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셰퍼드 한마리를 학과에 기증하기도 했다고.
“서로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은 가지되, 간섭은 일체 하지 말자는 주의예요. 남편이야 이해를 하니까 괜찮은데, 한참 자라는 딸들한테는
미안하죠. 역시 곁에 있어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니까 말이죠.
그래도 아이들이 원하는 무엇이라도 배울 수 있게, 학비에는 돈을 아끼지 않고 투자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해질 때마다 황교수는 ‘늘 옆에서 돌봐주는 엄마가
못될 바에야 열심히 일하는 여성으로서 엄마를 보여주자’는 각오를
새롭게 다진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중3인 큰딸과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딸은 엄마의 빈 자리를 허전해 하는커녕 도리어 자랑스러워한다고 한다. 게다가 작은 딸은 얼마 전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따내기도 했다. 작은 딸의 기록은 국내 최연소라고 하니 그야말로 ‘모전여전’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제가 딸 가진 엄마라서가 아니라, 경호원이라는 직업은 여자에게도
유망하다고 봅니다. 우리 학과 이름을 보세요. 경호비서학과입니다.
즉 비서업무에 경호업무가 더해진 것이라고 보면 되죠. 여기에 전문성만 갖추면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업무에 보탬이 된다고 확신합니다.
앞으로 경호원은 단순히 의뢰인을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서 탐정 업무는 물론 비서 업무까지 요구받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전문직인 셈이죠. 또 ‘사생활 보호’가 중요한 이슈가 되고있는 요즘은 꼭 연예인이나 고위 공직자와 같은 특수한 영역의 사람들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까지도 경호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스토킹이나 왕따 같은 문제만 봐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여성 경호원의 숫자는 전국 약 40여명의 규모. 지난 11월 초 경호비서학과에서 신입생(정원 40명)을 모집했는데, 황교수도 이번 학기에는 더 많은 여학생을 선발할 계획이라고 한다.
“자신의 인생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가려는 사람이라면 남녀를 가릴 필요가 없겠죠. 전 재학중에 학생들에게 되도록 많은 자격증을 취득하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이렇게 미리 준비하는 사람의 것이니까요.”
‘불도저’ ‘불독’이라는 별명처럼 저돌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온 황복희 교수. 누군가는 그를 보고 억척스럽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억척스러움 뒤에 숨겨진 부단한 자기계발 욕구와 흐트러짐 없는 자기 관리, 그리고 진솔한 인간미야말로 그의 ‘성공 인생’의 진정한 열쇠가 아니었을까.
■ 글·정지연 기자
■ 사진·최문갑 기자
■ 기사 입력시간 : 2001.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