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다 팡하」
6. Sativaggo 10. 6장10, 생각(想起=憶念)은 기억에 의존한다.
10. Rājā āha ‘‘bhante nāgasena, kena atītaṃ cirakataṃ saratī’’ti?
‘‘Satiyā, mahārājā’’ti.
‘‘Nanu, bhante nāgasena, cittena sarati no satiyā’’ti?
‘‘Abhijānāsi nu, tvaṃ mahārāja, kiñcideva karaṇīyaṃ katvā pamuṭṭha’’nti?
‘‘Āma bhante’’ti.
‘‘Kiṃ nu kho, tvaṃ mahārāja, tasmiṃ samaye acittako ahosī’’ti?
‘‘Na hi, bhante, sati tasmiṃ samaye nāhosī’’ti.
‘‘Atha kasmā, tvaṃ mahārāja, evamāha ‘cittena sarati, no satiyā’’’ti?
‘‘Kallosi, bhante nāgasenā’’ti.
왕은 물었다.
『존자여, 오래 전의 과거에 행한 일을 상기하는 것은 무엇에 의합니까.』
『기억(記憶)에 의합니다.』
『우리가 상기하는 것은 마음에 의한 것이지 기억에 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왕이여, 그대가 잊어버린 일을 상기할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렇다면, 잊어버린 때에는 마음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그 때에는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왜 마음에 의하여 상기하는 것이지 기억에 의하여 상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까.』
『잘 알겠습니다. 존자여.』
<정형구> Puna ca paraṃ bhikkhave bhikkhu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챙기는 자이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이라도 모두 기억하고 생각해 낸다.
Abhijānāti [abhi + jñā, cp. jānāti & abhiññā] to know by experience,
to know fully or thoroughly, to recognise, know of (c. acc.), to be conscious or aware of
abhijānāti([abhi全面]+[jānāti知]): 全面知(古譯:證知)
{單1現在式abhijānāmi; 單3aor. abbhaññāsi; 複3aor. abbhaññaṃsu; pp. abhiññāta;
ger. abhiññāya, abhiññā}
「빠알리-한글 사전」
1. 경험에 의해서 알다. 철저하게 알다. 2. 인식하다. 갖지(覺知)하다. 증지(證知)하다. 자증(自證)하다.
Naver: 自證
1 . 자기 스스로 증명함.
2 . <불교> 진리를 스스로 깨달아 얻음. 부처의 깨달음은 남이 깨닫게 하여 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10. “By what do we remember what was done long ago?”
“By memory (sati).“
“Is it not by mind (citta) that we recollect?”
“Do you, O king, recollect any business that you have done and then forgotten?”
“Yes.”
“Were you then without a mind?”
“No, but my memory failed me.”
“Then why do you say that it is by mind that we recollect?”
Cirakatasaraṇapañho dasamo.
11. Abhijānantasatipañho 6장11, 기억(念)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11. Rājā āha ‘‘bhante nāgasena, sabbā sati abhijānantī uppajjati, udāhu kaṭumikāva satī’’ti?
‘‘Abhijānantīpi, mahārāja, kaṭumikāpi satī’’ti.
‘‘Evañhi kho, bhante nāgasena, sabbā sati abhijānantī, natthi kaṭumikā satī’’ti?
‘‘Yadi natthi, mahārāja, kaṭumikā sati,
natthi kiñci sippikānaṃ kammāyatanehi vā sippāyatanehi vā vijjāṭṭhānehi vā karaṇīyaṃ,
niratthakā ācariyā, yasmā ca kho, mahārāja, atthi kaṭumikā sati,
tasmā atthi kammāyatanehi vā sippāyatanehi vā vijjāṭṭhānehi vā karaṇīyaṃ, attho ca ācariyehī’’ti.
‘‘Kallosi, bhante nāgasenā’’ti.
왕은 물었다.
『존자여, 기억은 주관적 의식으로부터 자각적으로 일어납니까.
또는 외부로부터의 시사(示唆)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주관적 의식(自證)으로부터도 일어나고, 외부로부터도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모든 기억은 근원적으로 주관적 의식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지
외부로부터 조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왕이여, 만일 외부로부터 조성되는 기억이 없다고 한다면,
공부하는 사람이 일이나 기술이나 학문에 관해서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스승도 소용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조성되는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일이나 기술이나 학문에 관해서 해야 할 것이 있고
스승도 필요한 것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존자여.』
Kaṭumikā (f.) [from karoti; see Sk. kṛtrima &kuṭṭima; also kutta &kutti]
artificiality, outward help, suggestion, appld to sati Miln 78, 79
11. “Does memory always arise subjectively or is it stirred up by suggestion from outside?”
“Both, O king.”
“But doesn’t that amount to all memory being subjective in origin?”50
“If, O king, there were no imparted memory
then artisans would have no need of practice or schooling
and teachers would be useless, but the contrary is the case.”
50. It is not clear to me what is meant here.
Perhaps King Milinda is suggesting that since a recollection prompted by another
afterwards arises by one’s own mental effort it is subjective in origin. 65
11. The king said: 'Does memory, Nâgasena, always arise subjectively, [78]
or is it stirred up by suggestion from outside 1?'
'Both the one and the other.'
'But does not that amount to all memory being subjective in origin, and never artificial?'
'If, O king, there were no artificial (imparted) memory, then artisans would have no need of practice,
or art, or schooling, and teachers would be useless. But the contrary is the case.'
'Very good, Nâgasena!'
Abhijānantasatipañho ekādasamo.
Sativaggo chaṭṭho.
Imasmiṃ vagge ekādasa pañhā.
세상 경(S47:28)
Imesañca kho panāhaṃ āvuso catunnaṃ satipaṭṭhānānaṃ bhāvitattā bahulīkatattā
sahassaṃ lokaṃ abhijānāmī"ti.
도반이여, 저는 이러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고 많이[공부] 지었기 때문에
千의 세상을 神通으로 압니다.
가시덤불 숲 경3(S52:6)
Imesañca panāhaṃ āvuso catunnaṃ satipaṭṭhānānaṃ bhāvitattā bahulīkatattā
sahassaṃ lokaṃ abhijānāmīti.
도반들이여, 나는 이러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고 많이 [공부] 지어서
크나 큰 최상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D21
Kacci me sā, bhante, bhaginī bhagavantaṃ abhivādesi?
Sarati bhagavā tassā bhaginiyā vacana’’nti?
"세존이시여, 그런데 그 여인이 세존께 저의 (이름으로) 절을 올렸습니까?
세존께서는 그 여인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Abhivādesi maṃ sā, devānaminda, bhaginī, sarāmahaṃ tassā bhaginiyā vacanaṃ.
Api cāhaṃ āyasmato nemisaddena [cakkanemisaddena (syā.)] tamhā samādhimhā vuṭṭhito’’ti.
"신들의 왕이여, 그 여인은 나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나는 그 여인의 말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존자의 마차 바퀴소리를 듣고 그 삼매로부터 나왔습니다."
고따마까 경(A3:123) [*전 재성 박사 譯 / 대림스님 譯] 3. Gotamakacetiyasuttaṃ
126. Ekaṃ samayaṃ bhagavā vesāliyaṃ viharati gotamake cetiye.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bhikkhavo’’ti. ‘‘Bhadante’’ti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Bhagavā etadavoca –
1. 한 때 세존께서는 베쌀리 시의 고따마까 탑묘에 계셨다.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한 때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고따마까 탑묘에 머무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Abhiññāyāhaṃ, bhikkhave, dhammaṃ desemi, no anabhiññāya.
Sanidānāhaṃ, bhikkhave, dhammaṃ desemi, no anidānaṃ.
Sappāṭihāriyāhaṃ, bhikkhave, dhammaṃ desemi, no appāṭihāriyaṃ.
2.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곧바로 알 수 있는 원리를 설하지, 곧바로 알 수 없는 원리를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근거가 있는 원리를 설하지, 근거가 없는 원리를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설득력이 있는 원리를 설하지, 설득력이 없는 원리를 설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나는 최상의 지혜로 모든 법을 안 뒤에 법을 설한다. 최상의 지헤로 알지 못하고 설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나는 조건을 갖추어서 법을 설한다. 조건을 갖추지 않고 법을 설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나는 [가르침의] 기적을 갖추어 법을 설한다.
[가르침의] 기적을 갖추지 않고 법을 설하지 않는다.
[*하단 註 “반대되는 법(paccanīka)들을 제거하기 때문에 ‘[가르침의] 기적(sappāṭihāriya)’이라 한다.”
(AAT.ii.191) “욕망등을 제거하기 때문에 기적(pāṭihāriya)이라 한다.” (AAT.ii.191)
*대림 스님 譯 앙굿따라 니까야 4권 470쪽 하단 註:
최상의 지혜로 안다.(abhijānāti)는 것은
무상.고.무아라고 안 것의 통찰지(ñāta-pariññā)를 통해 그렇게 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안다.(parijānāti)는 것은
마찬가지로 조사의 통달지(tīraṇa-pariññā)를 통해 그렇게 안다는 것이다. (Ibid)
**tīraṇa : [nt.] decision; judgement. ]
Tassa mayhaṃ, bhikkhave, abhiññāya dhammaṃ desayato no anabhiññāya,
sanidānaṃ dhammaṃ desayato no anidānaṃ, sappāṭihāriyaṃ dhammaṃ desayato no appāṭihāriyaṃ,
karaṇīyo ovādo, karaṇīyā anusāsanī.
Alañca pana vo, bhikkhave, tuṭṭhiyā, alaṃ attamanatāya, alaṃ somanassāya –
‘sammāsambuddho bhagavā, svākkhāto dhammo, suppaṭipanno saṅgho’’’ti.
3. 수행승들이여, 나는 곧바로 알 수 있는 원리를 설하지, 곧바로 알 수 없는 원리를 설하지 않고,
근거가 있는 원리를 설하지, 근거가 없는 원리를 설하지 않고,
설득력이 있는 원리를 설하지, 설득력이 없는 원리를 설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충고를 따르는 것이 좋으며,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좋다.
4.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세존은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며, 가르침은 잘 설해졌고, 참모임은 올바로 실천하는 모임이다'라고
만족하기에 충분하며, 흡족하기 충분하며, 기뻐하기에 충분하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렇게 최상의 지혜로 모든 법을 안 뒤에 법을 설하고
조건을 갖추어서 법을 설하고 [가르침의] 기적을 갖추어서 법을 설하면서 나는 교계하고 가르친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지족하기를! 그대들은 마음이 흡족하기를! 그대들은 기뻐하기를!
세존은 정등각이고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으며 승가는 잘 도를 닦는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te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Imasmiñca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sahassī lokadhātu akampitthāti.
5.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 수행승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만족하여 환희했다.
그런데 이 법문이 설해지는 동안 일천세계가 흔들렸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상세한 설명[授記]이 설해졌을 때 1000의 세계가 진동하였다.
Tatiyaṃ.
M1
(1)범부
2. ‘‘Idha,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ariyānaṃ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ṃ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
3.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인도되지 않아서,
pathaviṃ [paṭhaviṃ (sī. syā. kaṃ. pī.)] pathavito sañjānāti; 땅을 땅이라고 인식한다.
pathaviṃ pathavito saññatvā pathaviṃ maññati, 땅을 땅이라 인식하고서 [자신을] 땅이라 생각하고,
pathaviyā maññati, [자신을] 땅에서 생각하고,
pathavito maññati, [자신을] 땅으로부터 생각하고,
pathaviṃ meti maññati, 땅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pathaviṃ abhinandati. 그는 땅을 기뻐한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Apariññātaṃ tassā’ti vadāmi.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 X를 X이다.라고 想한다.; X를 X이다.라고 想하면서 X를 思量한다. X에서 사량한다.
X이다.라고 사량한다. X를 나의 것이다.라고 사량한다. 그래서 X를 즐긴다.
그 이유는 X '의' 를 철저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를', '에서', '이다.', '나의 것이다.'라고 사량하고 즐긴다.
혹은 '땅을 땅이다.라고 想<인식>하면서
땅을 [自我로] 思量하거나→ ①땅[地]을 자아라고
땅 안에서 [자아를] 思量하거나→ ④땅 안에 자아가 있다고
[자아 안에 있는 것이] 땅이다.라고 思量하거나→ ③땅이 자아 안에 있다고
땅을 나의 것이다.라고 思量하니→ ②땅을 가진 것을 자아라고
그래서 → 땅을 즐긴다.'
rūpaṃ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rūpaṃ, rūpasmiṃ vā attānaṃ.
①물질[色]을 자아(아뜨만)라고 관찰하고, ②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③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④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한다.]
[*地.水.火.風. 已變成.神.創造神.梵. 光音天.遍淨天.廣果天.勝者天.
空無邊處天.識無邊處天.無所有處天.非想非非想處天. 見.聞.覺.知. 一.多.諸.滅. : 반복구문]
(2)유학
7. ‘‘Yopi so, bhikkhave, bhikkhu sekkho [sekho (sī. syā. kaṃ. pī.)] appattamānaso anuttaraṃ
yogakkhemaṃ patthayamāno viharati,
27.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는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유학으로 위없는 유가안은(瑜伽安隱)을 원하면서 머문다.
sopi pathaviṃ pathavito abhijānāti;
pathaviṃ pathavito abhiññāya [abhiññatvā (ka.)] pathaviṃ mā maññi [vā maññati],
pathaviyā mā maññi, pathavito mā maññi, pathaviṃ meti mā maññi,
pathaviṃ mābhinandi [vā abhinandati (sī.) ṭīkā oloketabbā]. Taṃ kissa hetu?
‘Pariññeyyaṃ tassā’ti vadāmi.
그는 땅을 땅이라고 최상의 지혜로 잘 안다.
땅을 땅이라고 최상의 지혜로 잘알아 [자신을] 땅이라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자신을] 땅에서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자신을] 땅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땅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그는 땅을 기뻐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1.pathaviṃ pathavito sañjānāti; ....Taṃ kissa hetu? ‘Apariññātaṃ tassā’ti vadāmi. : 범부
2.pathaviṃ pathavito abhijānāti; ...Taṃ kissa hetu? ‘Pariññeyyaṃ tassā’ti vadāmi.: 有學
3.pathaviṃ pathavito abhijānāti; ...Taṃ kissa hetu? ‘Pariññātaṃ tassā’ti vadāmi. : 無學]
M36
"그러나 나는 이 극심한 고행으로도
인간의 법을 능가하는 성자에게 어울리는 특별한 지와 견을 증득하지 못했다.
깨달음을 위한 다른 길이 없을까?'라고."
Tassa mayhaṃ, aggivessana, etadahosi –
‘abhijānāmi kho panāhaṃ pitu sakkassa kammante sītāya jambucchāyāya nisinno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itā.
31. "악기웨사나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아버님이 삭까족의 [농경제의] 의식을 거행하실 때(kammante)
시원한 잠부 나무 그늘에 앉아서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喜, piiti]과 행복[樂, sukha]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던 것을 기억한다.
Siyā nu kho eso maggo bodhāyā’ti?
그런데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 될까?'라고.
Tassa mayhaṃ, aggivessana, satānusāri viññāṇaṃ ahosi – ‘eseva maggo bodhāyā’ti.
악기웨사나여, 그런 나에게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가 생겨났다.
'이것은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라고."
M90
Atha kho rājā pasenadi kosalo bhagavantaṃ etadavoca –
‘‘siyā nu kho, bhante, bhagavatā aññadeva kiñci sandhāya bhāsitaṃ,
tañca jano aññathāpi paccāgaccheyya [paccāgaccheyyāti, abhijānāmi mahārāja vācaṃ bhāsitāti (sī.)].
Yathā kathaṃ pana, bhante, bhagavā abhijānāti vācaṃ bhāsitā’’ti?
8. 그러자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다른 어떤 것을 두고 말씀하신 것을 사람들이 달리 이해하게 될 수도 있습니까?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어떤 것에 관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Evaṃ kho ahaṃ, mahārāja, abhijānāmi vācaṃ bhāsitā –
‘natthi s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yo sakideva sabbaṃ ñassati, sabbaṃ dakkhiti, netaṃ ṭhānaṃ vijjatī’’’ti.
‘‘Heturūpaṃ, bhante, bhagavā āha; saheturūpaṃ, bhante, bhagavā āha –
‘natthi s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yo sakideva sabbaṃ ñassati, sabbaṃ dakkhiti, netaṃ ṭhānaṃ vijjatī’’’ti.
"대왕이여, 나는 '한 번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없다.
그런 경우는 있을 수 없다.'라고 말을 한 것을 기억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참으로 이치에 맞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참으로 이치에 맞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없다. 그런 경우는 있을 수 없다.'라고."
M37/A7:58
‘‘Idha, devānaminda, bhikkhuno sutaṃ hoti – ‘sabbe dhammā nālaṃ abhinivesāyā’ti.
Evañcetaṃ, devānaminda, bhikkhuno sutaṃ hoti – ‘sabbe dhammā nālaṃ abhinivesāyā’ti.
So sabbaṃ dhammaṃ abhijānāti; sabbaṃ dhammaṃ abhiññāya sabbaṃ dhammaṃ parijānāti;
sabbaṃ dhammaṃ pariññāya yaṃ kiñci vedanaṃ vedeti –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so tāsu vedanāsu aniccānupassī viharati, virāgānupassī viharati, nirodhānupassī viharati,
paṭinissaggānupassī viharati.
So tāsu vedanāsu aniccānupassī viharanto, virāgānupassī viharanto,
nirodhānupassī viharanto, paṭinissaggānupassī viharanto na kiñci loke upādiyati.
Anupādiyaṃ na paritassati, aparitassaṃ paccattaññeva parinibbāyati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3. "신들의 왕이여, 여기 비구는 '모든 법들은 집착(*안주/A7:58천착)할 만한 것이 못 된다.'라고 배운다.
신들의 왕이여, 이와 같이 비구가 '모든 법들은 집착할 만한 것이 못 된다.'라고 배우면
그는 모든 법들을 완전히 안다.(A7:58 최상의 지혜로 안다.)
모든 법들을 완전히 안뒤 모든 법들을 철저히 안다.
모든 법들을 철저히 알아 그가 어떤 느낌을 느끼더라도,
그것이 즐거운 느낌이든 괴로운 느낌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든,
그 느낌들에 대해서 무상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그가 이렇게 머물 때 세상에서 그 어떤 것에도 취착하지 않는다.
취착하지 않으면 번민하지 않고, 번민하지 않으면 스스로 완전히 열반에 든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아루나와띠 경(S6:4)
Atha kho bhikkhave abhibhū bhikkhu sikhiṃ bhagavantaṃ arahantaṃ sammāsambuddhaṃ etadavoca:
abhijānāmi khvāhaṃ bhante bhikkhusaṅghassa majjhe evarūpaṃ vācaṃ bhāsitā,
pahomi khvāhaṃ āvuso brahmaloke ṭhito sahassīlokadhātuṃ3 sarena viññāpetunti.
그러자 아비부 비구는 시키.세존.아라한.정등각자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비구 승가 가운데서
도반들이여, 저는 범천의 세상에 있으면서 3000천의 세계에 목소리를 듣게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철환 경(S51:22)
Atha kho āyasmā ānand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ānando bhagavantaṃ etadavoca:
"abhijānāti nu kho bhante, bhagavā iddhiyā manomayena kāyena brahmalokaṃ upasaṅkamitā"ti.
Abhijānāmi khvāhaṃ ānanda iddhiyā manomayena kāyena brahmalokaṃ upasaṅkamitāti.
Abhijānāti kho pana bhante,
bhagavā iminā cātummahābhūtikena kāyena iddhiyā brahmalokaṃ upasaṅkamitāti.
Abhijānāmi khvāhaṃ ānanda, iminā cātummahābhūtikena1 kāyena iddhiyā brahmalokaṃ upasaṅkamitāti.
2 Opātiha3 bhante, bhagavā iddhiyā manomayena kāyena brahmalokaṃ upasaṅkamituṃ.
[PTS Page 283] [q 283/] samañño4 kho bhante,
bhagavā iminā cātummahābhūtikena kāyena iddhiyā brahmalokaṃ upasaṅkamīti.
5 Tayidaṃ bhante, bhagavato acchariyaṃ ceva abbhutaṃ cāti.
신통에 의해 마음으로 만든 몸으로 범천의 세상에 가신 것을 알고 계십니까?[*기억하십니까?]
기억난다.
네 가지 근본물질로 된 몸으로 범천의 세상에 가신 것을 알고 계십니까?[*기억하십니까?]
기억난다.
시종 경(S55:6)
Tasmiṃ kho pana bhante, samaye nāgopi rakkhitabbo hoti, tāpi bhaganiyo rakkhitabbā honti,
attāpi rakkhitabbo hoti.
Na kho pana mayaṃ bhante, abhijānāma, tāsu bhaginīsu pāpakaṃ cittaṃ uppādetā.
Ayaṃ kho no bhante, etamhā sambādhā añño sambādho sambādhataro ceva
sambādhasaṅkhātatataro cāti
세존이시여, 그때 저희는 코끼리를 보호해야 하고 그 여인들을 보호해야 하고 저희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그 여인들에 대해서 삿된 마음을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기억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저희들에게는 이러한 갇힘보다 더한 다른 갇힘이고
갇힘이라 불리는 것보다 더 큰 갇힘입니다.
난다마따 경(A7:50)
Atthi me aññopi acchariyo abbhuto dhammo:
Idha me bhante, sāmiko kālakato assa aññataraṃ yakkhayoniṃ upapanno. 1
So me teneva purimena attabhāvena uddasseti.
Na kho panāhaṃ bhante, abhijānāmi tato nidānaṃ cittassa aññathattanti.
Acchariyaṃ nandamāte, abbhūtaṃ nandamāte, yatra hi nāma cittuppādampi parisodhessatīti.
(4) Na kho me bhante, esova acchariyo
그러나 그 아이가 잡혔거나 잡힐 때나, 끌려갔거나 끌려갈 때나, 죽었거나 죽어갈 때나
저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존자시여, 여기 제 남편이 임종을 하여 어떤 약카의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자기의 전생의 몸을 [만들어] 제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경이롭습니다, 난다마따여. 놀랍습니다, 난다마따여. 이처럼 마음을 청정하게 하다니요.
자애 경(A7:58-2/59)
9. Mā bhikkhave, puññānaṃ bhāyittha.
Sukhassetaṃ [PTS Page 089] [q 89/] bhikkhave, adhivacanaṃ yadidaṃ puññanti. 1.
Abhijānāmi kho panāhaṃ bhikkhave,
dīgharattaṃ katānaṃ puññānaṃ dīgharattaṃ iṭṭhaṃ kantaṃ manāpaṃ vipākaṃ paccanubhūtaṃ.
욱가 경(A8:21)
Evaṃ vutte ahaṃ bhante, tā devatā evaṃ vadāmi:
vadeyyātha vā evaṃ kho tumhe devatā no vā vadeyyātha, atha kho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ti,
na kho panāhaṃ bhante, abhijānāmi tatonidānaṃ cittassa uṇṇatiṃ,
maṃ vā devatā upasaṅkamanti ahaṃ vā devatāhi sallapāmīti.
마음이 흔들린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무애해 경 A7:37 7. Paṭhamapaṭisambhidāsuttaṃ
38. ‘‘Sattahi, bhikkhave, dhammehi samannāgato bhikkhu nacirasseva
catasso paṭisambhidā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eyya.
Katamehi sattahi?
1.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오래지 않아
네 가지 무애해를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게 될 것이다.
무엇이 일곱인가?"
<*정형구: ....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
Idha, bhikkhave, bhikkhu ‘idaṃ me cetaso līnatt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jjhattaṃ saṃkhittaṃ vā cittaṃ ‘ajjhattaṃ me saṃkhittaṃ citt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bahiddhā vikkhittaṃ vā cittaṃ ‘bahiddhā me vikkhittaṃ citt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2.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이 나의 정신적 태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안으로 마음이 위축되어 있으면 '나의 마음은 안으로 위축되어 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밖으로 마음이 산란해져 있으면 '나의 마음은 밖으로 산란해져 있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tassa viditā vedan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viditā saññ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viditā vitakk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그에게는 분명하게 지각하는 느낌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꺼진다.
분명하게 지각하는 인식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꺼진다.
분명하게 지각하는 생각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꺼진다.
sappāyāsappāyesu kho panassa dhammesu hīnappaṇītesu kaṇhasukkasappatibhāgesu
nimittaṃ suggahitaṃ hoti sumanasikataṃ sūpadhāritaṃ suppaṭividdhaṃ paññāya.
Imehi kho, bhikkhave, sattahi dhammehi samannāgato bhikkhu nacirasseva
catasso paṭisambhidā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eyyā’’ti.
도움이 되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법들에 대해,
저열하거나 수승한 법들에 대해,
검거나 흰 부분을 가진 법들에 대해
표상을 잘 취하고 잘 마음에 잡도리하고 잘 간직하고 통찰지로 잘 꿰뚫는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일곱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오래지 않아
네 가지 무애해를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게 될 것이다."
.........
Sattamaṃ.
부기 09.16. 10.10: <정형구>
Yassa yassa ca abhiññā sacchikaraṇīyassa dhammassa cittaṃ abhininnāmeti
abhiññā sacchikiriyāya tatra tatreva sakkhibhabbataṃ pāpuṇāti
sati satiāyatane.
그래서 최상의 지혜[*自證]로 실현 시킬 수 있는 법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최상의 지혜로 그 경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그가 마음을 기울이면
그런 원인이 있을 때는 (*念처에 있을 때) 언제든지 그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6신통 (S16:11) cha abhiññā )
첫댓글 <사념처를 닦는 전재 조건이 '올바른 작의'라는 점>,
쌍윳따 니까야 5권의 '사념처 설명 부분'을 보시면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올바른 작의'는 '니미따'와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사띠'와 '작의(마나시까라)'와 '니미따'>는 상호 작용이 밀접합니다.
봄봄님께서 '기억'이라는 작용이 <'작의(=마나시까라)된 니미따'를 상기하는 작용>이라는 점을 밝히신다면, 사띠에 대한 봄봄님의 견해가 설득력을 갖게 된다고 봅니다. 우리는 대상에 대한 '개념'을 저장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특히 '산냐'를 기억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37조도품(=중도)을 수행가능케하는 공통된 전제 조건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올바른 작의'가 두 번째로 언급빈도가 높은 '전재조건'입니다.(제가 보기에 '가장 언급빈도가 높은 것'은 '방일하지 않음'이고 그 '방일하지 않음'이 '사띠'와도 관련이 깊다고 봄) 그리고 '육근수호'는 바로 <니미따에 의한 공격으로부터 육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육근을 지키려면?
'심의식'이라는 관점에서는 <현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이 심의식에 주는 영향'>입니다. 그러할 때 '니미따'가 <의(마나스, 마노)에 새겨지는 문제>와 <식이 '니미따'를 쫒아다니는 문제>가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 사선에서는 '산냐의 문제'를 취급하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가르쳐 주셔도 말귀를 못 알아 들으니 혼자 이리 저리 궁리하다... 도움을 청합니다.
'의에 새겨지는~'에서 '새기다'가 무슨 뜻인지?
이와 같은 의문들에 대한 답이 <37조도품(=중도)의 공통된 전재조건[=경전에는 태양이 떠오를 때 전조가 있듯이 사념처를 닦는 전조가 '올바른 작의'라는 비유로 설해짐.]이 '올바른 작의>라는 설명에 있을 수 있다는 저 나름대로의 지적입니다. 쌍윳따니까야 5권.
그리고...............우리가 '기억'이라는 작용을 하는 것은............제 생각에는 ..........(확고한 자신은 없는 단정).........<색이 주는 니미따와 그 니미따에 대한 싫고 좋은 니미따, 성, 향, 미, 촉, 법이 제공하는 니미따와 그 니미따에 대한 싫고 좋은 니미따>를 새기고서 상기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어렵고 난해한 이야기입니다.
그러하기에 <37조도품(=중도)의 공통된 전재조건>이 '올바른 작의'가 될 수 있는 이치라고 저는 봅니다.
아빈냐는 <~~에 대한 앎>이라는 의미도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아빈냐가 <법과 연기에 대한 앎>이라면~~~~<작의 집이 법의 집>이고 <집은 연기와 동의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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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작의'는 <부처님 가르침(=경전에는 '타인의 이야기'로 언급 됨)과 '올바른 작의'>라는 세트로 언급됩니다. 그 둘이 '왜 세트를 이루는 것일까요?' 왜?
'작의(=마나시까라)된 니미따'를 념두에 두고 경을 계속 공부하겠습니다.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미리 인사 드립니다. 추석 잘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