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州 李氏 - "백헌은 치욕의 삼전도 비문 지으셨지만 강직했던 분"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② 전주 이씨 白軒 이경석 12대 종손 이완주 씨, 경찰 퇴직 후 문중 땅 가꿔 낡은 종택 중수하는게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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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울 송파구 삼전도 옛터에는 병자호란의 아픔을 전해주는 삼전도 비(碑)와 ‘삼전도(三田渡)의 수난(受難)’이라는 부조물이 남아 있다. 부조물은 1982년 건립 당시 서울시립대 김창희 교수의 작품이다.
삼전도 부조물 하단 동판에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치욕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뼈아픈 교훈에 대해 담담한 필치로 적고 있다.
가슴에 와 닿을 듯한 이 글을 그러나 이제는 정작 읽는 이가 드물다. 그래서인지 동판 부분은 흉하게 칠이 벗겨져 판독조차 용이하지 않다. 그리고 삼전도 비의 글쓴이를 표시한 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바로 백헌(白軒) 이경석의 휘자(諱字)가 적혀 있던 곳이다.
백헌 이경석(李景奭).
살아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충성을 다했으며 청백한 삶을 살아 후손들까지 그의 삶을 닮게 했던 분이다. 그의 호인 백헌(白軒)에 가장 걸맞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끌로 뭉개지고 왕조실록에는 정면으로 그의 잘못에 대해 공박한 내용이 전해 온다. 삼전도 비문을 지은 당사자며, 국익을 위해 자청해서 죄를 쓰고 청나라에까지 잡혀가 고초를 겪었던, 속 깊은 백헌 상공에게 개인적으로도 또 한 번 수모를 안기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종택, 30년 경찰공무원으로 지켜
이완주(李完周, 1944년 9월 15일생)씨는 영의정을 지낸 백헌의 12대 종손이다.
그는 우리가 즐겨 보았던 드라마 수사반장의 탤런트 최불암씨를 생각나게 한다. 30년 경력의 퇴직 경찰공무원인 그는 거의 20년을 수사 파트에만 근무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도무지 형사 티가 나지 않는다.
종손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石雲洞) 종택에서 태어났다. 종택으로 양자를 온 부친은 한학을 익힌 분으로 문중사에 열성적이었고 가난한 살림에도 자식 교육에는 힘을 쏟았다. 그래서 맏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살고 있던 사촌집으로 유학시켰다.
선친은 백헌 종택으로 양자를 왔으나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선영을 빼고는 정작 경작을 할 농지조차 제대로 없었다.
은로초등, 영등포중학교를 마치고 가난 때문에 서울공고로 진학한 선친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졸업 후 바로 군대에 갔다. 제대 후에는 종중에서 운영하던 버스 회사에 취직했지만 경영난으로 중도 퇴직해야 했다.
결혼까지 했던 종손은 선친의 그런 실직 아픔 때문에 든든한 직장의 필요성을 느끼고 경찰직에 입문했다. 그러나 당시 경찰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마음 한구석에 있어 ‘한 삼 년만 해보자’고 시작한 일이 30년을 지속한 평생 직업이 되고 말았다 한다.
첫 인상은 ‘이런 사람이 어떻게 형사를 했을까’였다. 거칠고 고단했을 수사 분야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호기심이 발동해 종손에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아는 큰 사건도 수사하셨습니까?”
“서초경찰서에 근무할 땐 지존파 현장 검시에도 투입되었고, 연예인 매니저 살해사건도 맡았고....., 저는 제 방식이 있었어요. 동료보다 두세 배 시간을 할애해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확증이 있을 때 피의자를 동행해 증거를 대면 전과가 많은 범죄자라 해도 30분을 못 버팁니다. ”
그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 악수했을 때 느꼈던 단단하고 거칠던 손이 떠올랐다. 그래도 마음만은 비단결 같아 이웃 아저씨란 생각이 든다. 2001년 정년 퇴직한 뒤 ‘노동도 건강을 보살피는 운동이다’라는 생각으로 종택 주변의 2천여 평을 소일삼아 농사짓고 있다고 한다
사는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더니 이내 활기를 띤다.
아들이 한림대 사학과를 나와 육군 대위로 군복무 중이며 딸도 동덕여대 국사학과를 나와 결혼했다고 한다. 그런데 모두 역사관련 학과를 나왔다는 것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자신이 자녀와 함께 종가를 반듯하게 건사하고 만들어나가겠다는 의지가 담겨있기도 하다.
“사실 이제까지 어른들에게 문중의 역사나, 백헌 상공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들은 것도 영의정을 했다는 등 벼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전도 비문을 지은 것에 대해서는 말씀들을 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마 반성문을 쓴 것쯤으로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평생을 사셨던 속 깊은 분이 정말 세속적인 이해를 도모했다면 그 일을 담당했겠어요? 세상에서 우리 선조를 욕하는 이들은 만약 선조께서 그 일을 핑계를 대고 회피했다고 한다면 또 그것을 가지고 비난했을 겁니다. 세상에는 일꾼이 있고 생색내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는 상황이다. 비록 종손이 세파에 부대끼며 사느라 많은 책은 읽지 못했지만 사안에 있어 깊이 있는 사고를 한 그 폭과 깊이를 감지할 수 있었다.
“저는 이제부터 누구에게도 벼슬보다는 업적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백헌 상공은 정말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일가일처일노(一家一妻一奴)로 사셨던 분이고요.”
이 말은 종손이 백헌 상공의 분분한 평가 뒤에 내린 결론이었다. 분수를 지켜 집 한 채, 아내 한 사람, 시종 한 사람으로 깨끗하게 사셨던 조상의 삶의 길을 다시 가려고 애쓰는 종손은 시공을 초월해 닮아가는 것 같다.
백헌은 분수 지키면 사셨던 분
황사도 걷힌 봄날 백헌 상공의 묘소를 찾았다. 잘 다듬어진 묘역에 여기저기 핀 봄꽃들이 절기를 알아 피었고 나물 뜯는 아주머니들도 꽃 사이로 띄엄띄엄 보였다.
“재산세가 350만원이 나왔습디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두 달 치 연금을 털어 냈지요 뭐.”
30년 경찰공무원의 보상으로 나오는 연금 두 달 치가 들어갔다는 막대한(?) 종손의 재산은 골기와집 한 채와 그 집을 한 폭의 동양화처럼 감싼 텃밭 2천 평이 전부다. 영남에서 보는 수백 마지기의 논밭 전지의 규모와는 비교도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곳은 서울과 가깝고 또 근자에 판교 개발과 더불어 지가가 급격히 상승해 영남의 한 평에 몇 만 원 하는 땅이 아니다.
하지만 땅값이 아무리 비싸도 선영과 종택 그리고 백헌 상공의 얼을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누구보다 강한 종손에게는 부운(浮雲)과도 같은 물질일 뿐이다. 종손은 백헌상공이 낳은 청백한 정신을 지키며 손이 거칠어지도록 일구고 있는 것이다.
밭에서 나와 봄나물을 다듬고 있는 92세의 노(老)종부는 백헌 상공이 영의정을 한 것에 무한한 자긍심을 가진 듯 “벼슬을 많이 한 어른이세요. 구경 잘 하세요”를 연발한다.
많은 재산세를 감당하면서 정작 종택에 모셔야할 사당도 중건하지 못했고, 기와와 목재는 낡아 그야말로 비바람을 가리기에도 힘겨울 지경이다.
퇴직후 조그마한 서울에 있는 단독집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종손에게 의지는 있어도 자력으로 종택을 중수할 경제적 여력은 없어 보였다.
白軒 李景奭, 국가 위해 헌신… 우암 송시열과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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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헌 이경석이 문과 급제 후 왕으로부터 받은 교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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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백헌 이경석 1595년(선조28년)-1671년(현종12년)
시국관의 차이에서 생긴 오해와 대립, 이념 갈등. 이는 오늘날의 신문 1면 기사가 아니라 350년 전 백헌 이경석(1595-1671)과 우암 송시열(1607-1689) 사이에 있었던 역사다. 명(明)·청(淸) 교체기의 국제 질서 속에서 그에 대응하는 방식에 있어 남인, 서인 내지 노론과 소론 간의 현격한 인식 차에서 야기된 일이다.
이는 명분과 실리로 갈린 기싸움이었다. 고심한 끝에 실리의 측면에 선 이가 백헌 이경석이었고 명분에 입각해 열정적으로 조선의 자존을 확립하려고 있던 이가 우암 송시열이었다.
백헌과 우암은 서로가 인정하는 그 시대의 대표적 인물이다. 일반적인 성취의 측면에서 본다면 백헌은 우암을 크게 앞지른다. 학문을 바탕으로 진작 문과에 급제해 소위 출세가도를 달려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마침내 영의정이라는 최고 지위에까지 올랐다.
우암은27세 때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2년 뒤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일의 효종)의 사부가 된다. 그러나 그는 문과에 급제하지 않고서도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결정적인 계기는 1649년 척화파(斥和派)와 산림(山林)을 대거 기용하면서다.
이제 우암에게는 문과 급제라는 것은 의미가 없게 된다. 우암은 ‘산림’의 대표자였기 때문에 당시 백헌을 압도했다. 조정이라는 홈그라운드에서는 백헌이 승리했지만 전국 무대의 링에서는 백헌은 이미 우암의 적수가 못되었다.
여기서 ‘산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산림양덕지사(山林養德之士)’ 즉 산림은 재야에서 학문과 수양을 닦아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국왕의 부름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대개 이들은 경전에 밝고 행실을 잘 닦아 학문과 덕망이 모두 당대 최고였다.
‘십정승(十政丞)이 불여일왕비(不如一王妃)요 십왕비(十王妃)가 불여일산림(不如一山林)’이라는 속언이 전해지거니와 산림이라는 사람은 일종의 선민적(選民的)인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산림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산림을 불러 올려 이들에게 내리는 상징적인 조정의 직책은 성균관 시강원 찬선(贊善, 정3품)이나 사업(司業, 정4품)과 성균관 좨주(祭酒, 정3품)다.
좨주는 정3품직이지만 성균관의 책임자인 대사성(정3품)을 능가할 뿐 아니라 영의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국왕의 최고 자문역을 담당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한글 음으로는 ‘제주’이지만 성균관의 직책일 때만은 그 음이 ‘좨주’라고 바뀌는 독특한 이 직이 바로 ‘산림’의 상징이었다.
이 좨주는 혹독한 국가적 시련이었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재편되는 국가 질서 속에서 효종9년에 부활한다. 그 최초 임명자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었다.
동춘당은 우암 송시열과는 라이벌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며 그 후임이 우암 송시열이었다. 효종과 현종 숙종(1649-1720)으로 이어지는 산림의 전성시대는 이렇게 열렸다. 이 70여 년의 시기는 조선조에 있어서 가장 치열한 당쟁의 시기이기도 했다.
산림의 위상은 이후 좨주 직에 임명된 사람의 면면을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 이후 윤휴, 윤증, 박세채, 허목, 이현일, 이희조, 정제두, 송덕상, 이직보, 송치규, 송계간, 송문흠, 홍직필, 채지홍, 임성주, 박윤원으로 조선 말까지 이어졌다.
백헌에게는 우암 송시열과의 악연이 있다. 우암 송시열(1607-1689)과 백헌 상공의 첫 만남은 인조23년(1645)에 시작된다.
당시 백헌이 51세 우암은 39세 였다. 백헌은 이해 4월 이조판서 직에 있었고 9월에 우의정에 오른다. 백헌집에는 이때 이조판서 자격으로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 탄옹 권시를 등용했다고 적고 있다.
효종9년에 영중추부사인 백헌은 이조판서 송시열의 예론(禮論)을 지지한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재야 시절에 서울에 오면 백헌의 집을 찾아 서로 즐겁게 만났던 관계였고, 이는 천거를 받아 조정에 나갔을 때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현종2년(1661) 67세의 백헌은 고산 윤선도 해배건으로 인해 서로 틈이 생기게 되었고, 마침내 현종10년(1669) 우암 송시열이 삼전도 비문을 지은 백헌을 풍자해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서로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말았다.
우암은 심지어 백헌을 ‘향원(鄕原)’에 비유했다. ‘향원’은 요즘 말로 ‘악덕 지방 유지’ 정도에 해당된다.
우암의 명분론에 의거한 견해로는, 백헌이 당시 그렇게까지 굴욕적인 문자를 동원해 비문을 짓지 않고 그저 짓는 시늉만 했으면 되었는데 자존심을 모조리 무너뜨린 상태로 지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반론은 그의 손자인 이하성(李夏成)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우리 임금이 몸을 굽히고 욕을 참으신 것은 종묘사직을 위하고 만백성을 위해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인조께서는 처음에 신풍부원군 장유(張維), 전부사(前府使) 조희일(趙希逸) 및 신의 조부에게 함께 의논해 하룻밤 사이에 지어오라고 명하였는데, 소를 올려 끝까지 사양하였지만 사세가 급박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지어 바쳤던 것입니다.”
그 뒤 세 사람의 글을 청나라로 보냈고 그 중에 저들의 납득을 받은 백헌의 글도 고쳐짓기를 독촉받았다. 이에 국왕은 백헌을 불러 저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다는 절박함을 역설하고 다시 지으라고 종용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오늘날 삼전도 비문이다. 때는 인조15년(1637, 정축년) 12월, 당시 백헌은 43세로 도승지 겸 예문관 제학(종2품)을 맡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백헌은 자신이 천거하고 비호했던 우암으로부터 신랄한 공격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실학자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이라는 책에 보면 ‘백헌은 조정에서 벼슬한 지 50년 동안 한 번도 다른 사람과 다툰 적이 없었던 분’이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면은 그가 지은 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기질적으로 지위를 가지고 남을 억누르거나 문장으로 뻐기는 유형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다툰 대상은 불의요 오랑캐였을 뿐이다.
백헌은 전주 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의 왕족 출신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학자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이름난 제자다. 그는 도승지, 대제학,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에 이른다.
당시 그의 나이 55세였다. 그는 학자와 시인으로도 괄목할 성취를 이뤘다. 문집(1700년 활자본으로 간행)은 56권 18책으로 시가 1832편, 문이 527편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사후에 나라에서 공을 기려 내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의 고결한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한 수의 시가 ‘새벽에 일어나서’라는 작품이다.
曉起 효기 西舍鷄三唱(서사계삼창) 서쪽 집에는 새벽이라 닭이 훼를 치고 東峯月一眉(동봉월일미) 동쪽 봉우리에는 달이 살짝 걸려 있네 秋空正澄廓(추공정징확) 가을 하늘은 참으로 맑고도 드넓은데 心亦澹然時(심역담연시) 이제 내 마음도 참으로 담담해지네.
이 시의 중심 단어는 ‘담(澹)’ 자이다. 이 글자는 담박할 담, 편안할 담, 싱거울 담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이 시에서 이 글자는 그 뒤에 ‘연(然)’ 자를 더해 욕심이 없이 담담한 모습, 또는 욕심이 없이 깨끗한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로 쓰이고 있다. 깨끗하고 청백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백헌는 부친의 임지인 충청도 제천에서 태어났고 주로 현재의 서울 정릉에서 살았으며 뒤에 취현동(聚賢洞)으로 옮겨 살다가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현재의 분당구인 광주부(廣州府) 낙생면(樂生面) 선영에 모셨다.
참으로 부득이한 상황에서 지어진 삼전도 비문은 현재 백헌의 문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 연유 또한 짐작이 간다.
이제 우리는 그 비문을 차분히 읽으면서 국론이 분열되고 힘이 없으면 외적에게 굴욕을 당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세상은 백헌과 우암 시대 이상으로 갈라져 공격하고 시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전도비 (원명, 대청황제공덕비) |
조선 인조17년(1639) 건립 사적 재101호(1963. 1. 21) 위치: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289-3 규모: 총높이 5.7m, 비신 높이 3.95m, 폭 1.4m 재료: 비신-대리석, 귀부-화강암
다산 정약용의 송파수작(松坡酬酌)이라는 시 작품을 보면, “다만 지금 가랑비 속의 삼전도에는(只今煙雨麻田渡), 화각 단청한 비각 속의 큰비는 붉은 글자 가득해(畵閣穹碑字字)”라는 구절로 보아 당초에는 지금과 달리 비각이 있었다고 본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