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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면 지장리 출신 황정하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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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깨나 썼던 망나니에서 교수로 그는 많은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은 듯 했다. 현재에 오기까지 그에게 몇 번의 전환점이 있었고, 그는 그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한 치 앞도 못 내다본다지만, 모처럼 찾아온 기회와 그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어려운 고개를 하나둘씩 넘어섰던 것이다.
왕년에 주먹깨나 썼고, ‘망나니’였다던 그가 현재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리에까지 서는 데까지는 어떤 요소가 필요충분조건으로 자리 잡았음이 분명했다.
그 조건은 아무래도 ‘고향’인 듯이 보였다.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해주는 곳, 자신을 있게 해준 부모님의 영혼이 서린 곳, 산하를 같이 뛰놀던 순수한 친구들이 있던 곳에서 그는 끝없이 겸허해졌으리라. 한창 젊었을 때는 넘치는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고, 숱하게 나쁜 일도 많이 했지만, 한낱 치기에 불과한 철없는 짓이었다고 후회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는 이미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그를 만난 것은 얼마 전 만난 ‘양심적인 내부고발자’ 대전지방 국세청으로 자리를 옮긴 한화교씨의 추천때문이었다. 그를 지난 8일 대전에서 만났다.
▶옭아 맨 도시락과 군동초 등교길 군동초등학교 졸업, 옥천중(25회), 옥천실고 출신이다. 5남2녀중 막내지만, 윗형과 누나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대전으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그만 혼자 옥천에서 학교를 다녔단다. 당시에는 형과 누나들이 없어 외롭기도 했고, 괴롭힘과 소외를 당하기도 했단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 그 친구들이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풍요로운 자산이다.
군동초 동창회는 2개월에 1번씩 꼭 모임을 갖는다. 지금은 수녀원이 된 폐교가 못내 아쉽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솥단지 걸어놓고 옛날 생각하며 운동장을 마구 뛰어놀았단다.
“당시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약 3km였어요.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비만 오면 막 뛰어가느라 정신없었어요. 뛸 때마다 대각선으로 옭아 맨 도시락에서 반찬통과 숟가락, 젓가락이 춤을 추었고, 양철 필통의 연필들도 그에 질세라 박자를 맞추면서 신나는 행진곡이 되었죠. 다이빙한다고 수영도 하고, 수북리에서 오대리까지 수영을 해서 건너곤 했는데, 그 때 못 건너면 ‘왕따’를 당하고 ‘남자’로 인정을 받지 못했죠.”
▶이젠 고향에 매형인 박철용 면장만 남아 아버지 황한수씨는 조치원경찰서에서 경찰로 근무할 때 6.25전쟁에 참전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단다. 당시 얻은 휴유증으로 신경통을 비롯해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고생을 하다 돌아가셨지만, 서류가 불에 타 없어져 끝내 참전용사로 인정받지 못했단다.
“다행스럽게도 조부님께서 일궈 놓은 땅이 많아 근근이 먹고 살았는데, 형이 ‘가수’한다고 하며, 나훈아씨의 곡을 만들어 주기도 한 작곡가 김학송씨의 생계비를 대면서,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죠. 그러면서 집 재산도 많이 줄었어요.”
황정하씨의 조부는 황실경씨로 동이초 설립자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단다. “부모님 돌아가신 이후로 고향 지장리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요. 안내 박철용 면장님이 둘째 매형이거든요. 누나와 둘째 매형만 옥천에 살고 나머지 형제들은 다 고향을 떠났죠.”
옥천실고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조그만 대학을 다니다가 79년 9월 그는 해병대에 입대한다. 제대를 하고 나서 배워둔 태권도로 대전과 옥천 등지에서 잠시 거리를 돌며 방황을 했단다.
“맨 처음에는 태권도, 킥복싱 등을 배우며 무술배우를 꿈꿨는데, 그게 잘 안됐죠. 성질 못 죽이고 망나니처럼 굴었어요. 그러다가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형, 누나들의 다그침도 있었고, 저도 마음을 잡아야겠기에 공채로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에 입사했어요. 그것도 안 좋은 일로 그만두고, 산자부 산하 대한송유관공사에 취직을 했어요. 거기서 9년 넘게 근무하다가 쭉 공부를 해 온 사회복지학에 대해 관심을 가져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인연이 닿아 공주영상정보대 사회복지계열에서 겸임교수를 해왔어요. 올해 계약이 만료가 돼서 우송정보대로 옮기게 됐죠. 현재는 경기대학교에서 사회복지정책분야를 공부해 박사학위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고향의 버찌 맛 잊지 못하는 옥천인 그에게 불현듯 다시 기회를 준 것은 ‘고향’이라 했다. 이제 제대로 나아갈 길을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기회만 된다면, 자기가 배운 이론적인 것들을 실제로 펼쳐 보일수 있는 사회복지기관을 하나 세우고 싶다는 것. 부모님이 시골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사는 모습에서 그는 사회복지분야 중에서도 ‘재가노인복지서비스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이를 석사논문의 주제로 삼기도 했다.
오갑식 군의원, 김인용, 이복무, 이종관씨 등이 나오는 동이면 해병선후회도 꾸준히 참여한다는 그는 그 옛날 학교를 오가면서 입술을 검붉게 물들이며 먹던 뽕나무의 오디와 벚나무의 버찌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
첫댓글 7회 최경룡 선배와 황정하 선배 그리고 8회 오지마을 아저씨 3명이 소모임 개념으로 붉은명찰 미니 전우회라도 만들어야겠네요 최경룡 선배는 포항부대에서 내가 하사일때 계급적으로 쫄병인 상병인 상황에서 연병장에서 한번 만났었는데 환갑전에 다시 뵐수있었으면 좋겠네요 ^*^
정하 친구.... 오랜만이네... 대전에 살면서 자주 못보네...
옛날에 망나니였고 주먹을 썼으면 어떻습니까.지금의 황정하 교수님으로 서계신 교수님을 축하 합니다.
정하냐 니얼굴 보니까 반갑다 건강한 모습보니 더좋고 ,,,, 아무쪼록 사회에 공헌하는 좋은 제자들 많이 배출하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