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아직 비탄의 알로아의 그늘이 드리워져 아침인데도 어둑어둑했다. 해도 보이지 않아 발을 묶인 여행자들은 느즈막히 일어나 음식을 시키는 것도, 지리지리하게 오는 비가 만든 현상 중 하나였다.
"아줌마! 여기 두 사람분 잘 해서 줘!"
컬컬한 목소리로 손을 들며 주방 쪽으로 외치는 털보의 중년 남자의 이름은 베르너 오벨리호드. 보부상으로 시작해 악착같이 돈을 모아 그들 사이에서의 귀감이 된, 돈도 모으고 집도 산 성공한 사례 중 하나라고 했다. 하지만 방랑벽이 도진 건지 한 군데에 엉덩이 붙이고 살지 못하는 건지 어쩐 건지 좋은 종잣말 하나 사들고 여행비 정도는 자급자족하며 (자칭)대륙 순회를 하다가 일찍부터 이 여관의 1인실에서 비탄의 넨스펜사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아하하, 아저씨. 과일도 잊지 마세요-"
그리고 남자의 맞은편에서 연신 싱글거리고 있는 부드러운 인상의 소년의 이름은 레인첼로페 로옌치야. 현재 그가 속해 있는 음유시인 길드의 최연소 길드원으로서 공짜로 얻어먹는 주제에 한술 더 뜨면서 과일까지 챙기는 모양새가 얄밉지 않은 건 역시나 부드러운 인상 때문일까. 진한 초콜릿빛 머리카락에는 부드러운 윤기가 있었고 희고 깨끗한 얼굴 위에는 쌍커풀 없는 초록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반짝였다.
그도 이 여관의 손님이긴 하지만 6일 전의 촛불 사건 때 뛰어난 화술로 오벨리호드의 환심을 사서 현재 그의 재력에 기생하며 잘 먹고 잘 자며 비탄의 알로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여행자 중 하나였다.
"물론이지. 그나저나 이번의 알로아는 좀 긴데?"
"예에. 보통은 늦어도 하루 전엔 그칠 텐데."
그러면서 호주머니를 뒤적여 조그만 종이 꾸러미를 끄집어냈다. 꾸러미를 푸니 주먹만한 크기의 초콜릿 쿠키가 대여섯 개 놓여 있었다. 그것을 쪼개 먹으면서 피식 웃었다.
"뭐, 비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품고, 이야기 속으로 안내해 줄 수 있는 존재니까요. 현자 알시미테르 가라사대, 비는 모든 이야기의 도입이며 결말이라고도 하잖아요? 아, 쿠키 좀 드세요."
"그렇지. 하지만 너무 많이 온다면 많은 사람이 울 걸세.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난 단 건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렇겠지요.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레인첼로페는 싱긋 웃으면서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쿠키에 들어간 초콜릿이 너무 달았던지 약간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곤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아마도 여관 주인과 합의를 본 건지 눈에 잘 뜨이는 벽 한가운데에 벽보를 붙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눈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워낙에 벽보와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앉은 채로도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대충 내용을 훑은 결과 요점은 '전쟁중이니 할 일 없는 자들은 군대에 자원해라' 정도였다. 레인첼로페는 한숨을 쉬곤 자신이랑은 영 상관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전세가 악화되면 그 땐 물불 안 가리고 강제징집할 텐데, 그리해서 자신의 아버지도 끌려가지 않았던가.
칫, 하고 저도 모르게 의미 불명의 소리를 내곤 오벨리호드 씨와의 대화로 관심사를 옮겼다.
"그럼, 오늘은 이런 이야긴 어떨까요? 비의 요정 이야깁니다..."
비가 주륵주륵 오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햇볕 쨍쨍할 날인데도 불구하고 내리는 비탄의 알로아의 눈물은 여지없이 떨어져 대지를 적셔가고 있었다. 전설 속의 소녀 알로아의 비탄에 절은 노랫 소리라도 들려 올 것만 같은 아침. 작은 소란과 함께 시작된 아침에는 멜로디가 담기지 않은 노랫가사가 작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비의 치리자의 영지에 들어선
망국의 공주와 그녀의 젊은 기사와
푸른 눈의 알로아 이야기랍니다.
비의 요정이자 요정 중의 요정.
요정의 여왕 푸른 눈의 알로아.
그녀의 모습은 눈꽃보다 고귀하고
그녀의 자태는 난초보다 정숙하며
그녀의 명령은 왕명보다 합당하죠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왜, 그런 땐 날씨가 변덕스럽잖아요=_=강우량도 꽤 되는 편이고.
반응 좋으면 다음 편도 들고오겠습니다=_=(야야
어익후 그나저나 생각해 보니 저 타이틀의 진정한 의미는 중반쯤에나 나오겠=_=
"너- 창녀 같아."
"뭐야. 그런 말은. 상처받는다구."
레인첼로페는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셰-에젤베르크 쪽으로 꾸러미를 내밀었다. 두툼하게 잘라 넣은 구운 고기와 햄, 치즈, 계란과 양상추까지 꽉꽉 끼워 넣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호밀빵 샌드위치였지만 셰-에젤베르크는 선뜻 입에 대지 않고 속을 감싸고 있는 빵만 잘게 찢어 입에 넣을 따름이었다.
"맞잖아. 몸을 파는 거나, 이야기를 파는 거나. 그게 그거지."
"난 직업 자체가 음유시인이라고."
레인첼로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침대에 털푸덕 드러누웠다. 창가는 여전히 셰-에젤베르크가 점령하고서는 쏴아아 떨어지는 알로아의 눈물을 물끄럼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저 녀석, 꼴에 여자라고 센티멘털해진 건가. 쬐끄만 게.
나는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며 일어나서 겉옷을 대충 꿰어 입고 셰-에젤베르크가 서 있는 창가로 다가갔다. 내가 다가와도 전혀 반응 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셰-에젤베르크. 비를 보면 뭔가 영감이 떠오르기라도 해?"
여전히 내리감긴 엷고 흰 눈꺼풀과 섬세한 쌍커풀이 자리한 눈매는 의외로 꽤 고상하게 생겼다. 하는 행동은 꼭 자폐증 걸린 9살 먹은 어린애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레인첼로페는 이 의미심장한 시니컬 소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걸었지만, 여전히 필요없는 말은 대답하지 않는 것을 삶의 모토로 삼고 있는 셰-에젤베르크 양은 아주 느즈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로아에 대해 생각했어."
"알로아?"
"응."
하지만 가끔 들려주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가녀린 버드나무 잎새가 내는 피릿소리와 비슷하다. 아주 가느다랗고, 높고, 깨질 듯한. 불안한 무언가가 도사린 목소리. 셰-에젤베르크는 레인첼로페 쪽으로 힐끗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다시 창문 표면에 비치는 바깥의 풍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의 입 속에서 오랜만에 억양이 엷게 섞인, 멜로디와 비슷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비탄의 알로아. 비탄의 알레인-에름스로페의 울음 소리를 듣고 태어난 아기들은 모두 사랑의 이별을 겪
는다지..."
"알레인-에름스로페는 알로아의 풀네임이잖아?"
"응. 요정어로 해석하면 '마지막 비의 여왕' 이란 뜻이야. 그녀가 태어나고 나서 선대의 비의 여왕이 말하길, 이보다 완벽한 비의 여왕은 보지 못했다. 그녀 이후의 여왕은 존재할 가치조차 없다-. 영속될지어니,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비의 여제, 비의 연인, 아리따운 비의 여왕이여. 그렇게 말했어. 그리고 그리 이름을 지었지. 하지만 누가 알았겠어. 그녀는 잠들었고, 이제 더 이상 비의 여왕은 태어나지 않는다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여왕의 영영한 잠과 함께."
"어째서, 다음 대의 비의 여왕은 태어나지 않는 건데?"
레인첼로페가 묻자 셰-에젤베르크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뚱한 얼굴로 툭 내뱉었다.
"그거야 당연하잖아. 비의 여왕은 자신의 죽음의 시일을 알 수 있어. 그 날이 가까워 오면서 완벽의 여지가 비워지고, 다음 대의 비의 여왕이 태어날 여지를 만드는 거라고. 코르크 마개로 막아 두기만 하면, 내용물을 따를 수가 없는 것처럼. 알레인-에름스로페가 끝나지 않는 잠을 자게 되었으니, 여지가 생길 리가 없잖아."
셰-에젤베르크는 전설이나 신화와 같은 화제가 나올 경우 술술 해박한 지식을 풀어놓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그 때 흘러나온 지식들은 셰-에젤베르크의 외견상 풍겨 나오는 분위기에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지식이었다. 그렇게 설명하고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여전히 형체를 보존하고 있는(단, 다 식어빠진)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는 곧 흐물흐물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맛없어?"
"...마이 너으 가에..."
"...무슨 말이야."
셰-에젤베르크는 그것을 힘들여 꿀꺽 삼키고 창문을 열고 손으로 빗물을 모아 마셨다. 그리고 흰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 깨끗하게 하고는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맛이 너무 강해. 짜고, 느끼하고, 시고, 달아."
"...너, 정상적인 식감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그녀가 먹었던 샌드위치는 내 점심과 같은 메뉴였다. 난 맛있게 잘 먹었는데, 이상하게도 셰-에젤베르크의 입맛은 너무 예민했다. 먹어도 담백한 것만 찾았고, 고기는 입에 대지도 못한다(아니, 권해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싱싱한 야채와 과일에 가벼운 드레싱 정도 얹어 먹는 것으로 식사를 끝낸다. 그러면서도 잘만 움직이는 건 거의 경의에 가까웠다. 결국 샌드위치의 빵(소스가 묻은 부분 제외)만 그녀의 뱃속으로 들어갔고, 나머지는 내가 우겨 넣을밖에 없었다. 으으, 방금 점심 먹었는데 금방 고기며 치즈며 계란이며 들어오니 뱃속이 빵빵하다.
"다음부터 나한테 뭐 먹이려면 빵만 가져와."
"네네, 알아 모십죠. 쳇. ...꺽."
그렇게 일련의 식사를 마치고 자세를 다듬고 유리창에 기대어 비탄의 알로아의 눈물을 물끄럼히 바라보던 그녀는 나를 흘끗 보더니 이내 말을 흘렸다.
"넌 어느 달에 태어났어?"
"나?"
"응."
오! 레인첼로페와 셰-에젤베르크가 함께 여행하며(비록 얼마 되진 않지만)얻은 최초의 성과였다. 드디어 그녀가 레인첼로페에게 [질문]을 한 것이다. 레인첼로페는 셰-에젤베르크가 질문했다는 것을 무척이나 신기해하며 입을 열어 대답했다.
"세인츠릴의 5월 로웨인-이데일로나의 노래 9일인데?"
셰- 에젤베르크는 피식 웃으며 창가에서 시선을 떼고 레인첼로페 쪽으로 다가와 한 손을 들어 손 끝으로 그의 얼굴 윤곽을 슬쩍 쓰다듬고는 중얼거렸다.
"오월의 세인츠릴은 따스해서 상처입은 나날들을 보듬을 수 있는 달이야. 너와 잘 어울리는 날 태어났구나. 널 상징하는 것은 상냥한 이데일로나의 노래. 넌 그걸 싫어하지 않게 될 테지..."
그리곤 다시 돌아서선 창가를 바라본다. 그 때만큼은 셰-에젤베르크가 그와 동년은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문득 레인첼로페는 의문이 들었다. 그걸 싫어하지 않게 된다니, 그럼 역으로 따지면 넌 싫어한다는 거야? 얼굴에 물음을 가득 담은 채로 고개를 들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이미 창가로 돌아가 있었다. 조금쯤 잠긴 목소리로. 그녀는 오늘 레인첼로페에게 재차 물었다.
아타락시아(ataraxia)의 11월 진청의 테슬라 로베르디아
아타락시아(ataraxia)의 11월 라미스(Lmis)의 그림책
셰르-리올첸의 12월.아르민스티의 램프.
셰르-리올첸의 12월.눈의 요정의 발자국.
일라-하야츠만의 13월, 검은 날개의 센릴디크
일라-하야츠만의 13월, 피의 십자가의 일레진
셰인의 14월. 데미안의 수정의 천칭
셰인의 14월. 로드리게스의 사이드(Scythe)
이릴페시앙의 3월. 연록색 심장의 렐드리피아 1일 오전 8시.
"아저씨! 비가 그쳤어요!"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게 개어 있었다. 나는 환성을 지르며 베르너 오벨리호드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도 잠옷바람으로 얼결에 문을 연 후, 자신의 방에 달린 창문으로 날씨를 확인한 후 함께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정말로 거짓말 같은 하늘이었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을 맑고 깨끗한 하늘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둘이 기쁨을 나누고 얼마 후에야 양쪽 다 잠옷 차림이라는 것을 알았고, 둘 다 얼굴이 벌게져서는 어색하게 웃는 작은 헤프닝 이후 오벨리호드 씨의 호의로 우선 그의 코트를 빌려입고 자신의 객실로 무사 골인하는 데에 성공했고, 그 이후엔 부산스럽게 짐을 챙겼다. 어제 밤만 해도 비가 갤 기미는 참새 눈물만큼도 안 보였는데, 오늘은 마치 마법 같은 아침이다.
"비가 그쳤으니까, 떠나는 거야?"
"응? 응."
나는 자신의 가죽 배낭에 이제까지 객실에 뇌까려 놓았던 자신의 물품들을 깨끗히 정리해 집어넣고는 익숙하게 어깨에 맸다. 셰-에젤베르크의 짐도 어차피 달랑 배낭 하나인 데다가 자신의 물건을 이리저리 꺼내놓고 쓰는 성품도 아니어서 그저 가방을 매기만 하면 그만이다. 아니, 애초부터 가방은 그녀의 손아귀에 있었으니까.
"떠나는 거구나..."
나는 셰-에젤베르크가 앉아 있던 작은 걸상에 딸려 있던 탁자에 꽤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았던 지도를 오랜만에 펼쳐 놓고 목적지를 고민하며 필요 물품들을 잠시 재고는 순식간에 다시 접어 가방 깊숙히 집어넣었다. 그리곤 여기 오면서 사 두었던 건량을 다 먹었다는 것을 깨닫곤 여기서 번 돈으로 식량도 사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곤 시선을 올리니 셰-에젤베르크가 여전히 흰 눈꺼풀로 눈동자를 가린 채 실낱 같은 시선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뭔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직- 확실히 증명하지 못했지?"
내 말에 셰-에젤베르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나서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뭔가 홀가분하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일어서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나도 배낭을 메고 에젤베르크와 함께 객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으면서 이번에 이 마을을 뜰 때 먹을 식량을 준비해야 하는데 넌 뭘 먹을 테냐-따위의 자질구레한 것을 물으며 1층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여기 여관에 처음 입실했을 때 아주머니에게 비 그친 날 아침에 떠나도록 그날 오전 9시에 한끼 분량의 도시락을 싸 달라고 부탁했던 기억이 났다. 그 때의 나는 셰-에젤베르크와의 동행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1층 홀에는 나와 같이 이제 떠나려는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 곳에서 쉽게 오벨리호드 씨를 찾을 수 있었다. 작별 인사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 그의 앞으로 가서 꾸벅-인사했다.
"아저씨, 그동안 심심하지 않아 즐거웠어요."
"오? 자네도 갈 채비를 마쳤구만?"
아저씨는 씩 웃으면서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한 입에 다 먹고는 이내 품 속을 뒤졌다. 오벨리호드 씨도 차림을 보아하니 지금 떠날 예정 같았다. 하긴, 나도 여기서 꽤 짭짤하게 벌었으니 그다지 급할 길은 없지만. 그래도 한 여관에 장장 열흘을 비탄의 알로나의 눈물과 함께하자니 좀이 쑤시긴 했나 보다. 이렇게 서둘러 채비를 마친 걸 보니. 속으로 한 번 웃고는 갑자기 뭔가를 내미는 오벨리호드 씨의 손을 엉겁결에 받았다. 가죽으로 된 작은 주머니에서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났다.
"사슴 가죽은 부를 불러온다지. 다른 자들은 다 미신이라지만 난 믿고 있다고. 그리고 이건 음유시인의 고용료니 챙겨 두게."
에? 내 고용료는 내 식비로 끝난 거 아니었나?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오벨리호드 씨는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여행을 하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접촉으로 본연의 미학도 만들어지는 거고. 나는 오늘 좋은 친구를 떠나보내니 조금 서글프이. 그렇지만 나중에 다시 만난다면, 곱절로 기쁘지 않겠나? 우연이란 녀석이 다시 짝을 맞추어 주길 바라 봐야지."
사심 없이 말씀하시는 오벨리호드 씨의 얼굴은 순진했다. 나도 씨익 웃으면서 생각했다. 이 아저씨랑, 정말로 즐거웠다고. 비록 말한 사람은 나였지만, 정말로 흔한 (가끔은 별로 흔치 않은 이야기도 많았지만)열 네 달의 이야기에 얽힌 스물 여덟개의 이야기를 그토록 재미있게 들어 주고 감복해 주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말이다. 솔직하게 웃으면서 오벨리호드 씨가 내미는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어른과 하는 첫 악수지만, 어쩐지 뭔가 통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다음에 만나면 헤릴과 야스아 자매 이야기 마저 해드릴게요!"
-이릴페시앙의 6월. 릴-하르쥬크의 검 8일 오전 8시. 종료.
키랄세르크의 1월. 피 묻은 알세라스 15일. 오후 7시.
"...신룡이 현신했던 자리라구요?"
뮈르데일-루즈드 올브레슈 하이딜로즈는 고명한 마법사들 중에서도 톱을 달리는 하이 클래스의 천재였지만 현재 당면한 문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신룡이라니. 그건 자신의 마법사 생애 40여 년 동안 듣도 보도 못한 소리였다. 현재 존재하는 드래곤들은 속성별로 블루, 화이트, 레드, 그린 드래곤이 각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고, 그 밖의 메탈 드래곤인 실버 드래곤이나 골드 드래곤. 어스 드래곤으로 묶기는 하지만 그 갈래는 수십 가지가 넘는 날개 없는 용들에 이르기까지, 드래곤의 종족별 나열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신이었지만, 신룡이란 것은 그 어떤 고문서에도 있지 않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미지의 단어를 아무도 관심 가져 주지 않는 작은 마을에서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네. 저기 푹 파인 데는 본래 엄청 높은 산이었대요. 거기서 인간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려 마구 피를 흘리자 신께서 징벌을 내리시어 신룡을 현신시키신 거래요."
점점 알 수 없는 단어로 치달아가는 저 문장은 뭘까. 아니, 애초에 신룡이라는 단어는 없다. 신들이 용을 다스린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다. 골드 드래곤이나 실버 드래곤과 같은 본성은 꽤 온후한 종족들도 몬스터는 잡아먹지 않은가. 하지만 저 말을 그냥 거짓말로 생각하기에는 깊게 패인 산의 흔적과, 그 중앙에서 흘러나오는 정체 불명의 묘한 기운, 게다가 이 마을 전체가 다 알고 있다고 자신의 가슴을 땅땅 두드리는 이 급사의 진지한 얼굴을 볼 때, 거짓으로 치부하기에는 좀 껄끄러운 면이 없지않아 있었다.
"이건 진짜 믿으셔야 해요. 사실인걸요."
게다가 사실을 전파시키려는 이 놀라운 열성까지. 무슨 신룡교라도 세운 줄 알겠다. 올브레슈는 피식 웃으면서 자신의 외견을 생각했다. 인간의 나이로는 50세 정도 되었지만 외견은 아직 창창한 이십대 초반. 십대 후반의 어리디 어린 급사가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다니는 긴 머리 늘어트린 이십대 초반의 남자에게 흥미가 없다면 그건 비정상이다.
"예에. 믿어요."
라고 하는 건 사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올브레슈 자신도 이제까지 자신이 겪어 오거나, 저명한 자들의 공인된 이론 외에는 흡수하고 인정하지 않은 자니까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고, 아직 그 고집을 꺾을 필요는 없었다. 내키지 않으면 바로 공간을 이동해서 다른 마을로 가 버리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간단한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확실히 저 산 중앙에 뭔가가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이 정체 불명의 묘한 기운. 느낌. 상념의 옅은 연기가 이 마을까지 닿아 오고 있었다. 아직은 다들 느끼지 못하는 것 같지만.
"아, 그럼 몇 가지 더 물어볼게요. 신룡은 언제 나타난 거죠?"
"에? 아마 진자네즈와 했던 300년 전의 전쟁일 걸요. 그 땐 우리 나라가 아주 조그매서 여기가 최전선이었다나 봐요. 가끔씩 공사라거나 할 때 땅을 파내 보면 사람 뼈라던가, 단검 조각이라든가가 심심찮게 나오거든요."
진자네즈와 했던 300년 전의 전쟁이라... 그 때라면 확실히 기록이 있다. '의문의 괴멸' 이라는 불성실하고도 불충분한 기록이. 그 기록은 그 때의 정경을 본 병사가 보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보내 오던 전령의 발길이 끊기자 탐색대를 조직해 직접 파견되어 관찰 후 올린 보고였었다는 사족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하지만 그 기록을 요약하자면 사람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역류해 튀었고, 적아군 할 것 없이 같은 방식으로 당했다고. 딱히 외상은 없으며, 최대 격전지의 중심축이었던 로헴 산은 무언가 커다란 것에 부딪혀 분화구 모양으로 깍아내려졌다. 정도가 전부였다. 올브레슈는 진자네즈와의 300년 전의 전쟁 '의문의 괴멸' 건에 '신룡'이라는 퍼즐 조각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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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뮈르데일 루즈드-올브레슈 하이딜로즈라는 풀네임은 확실히 깁니다, 길어요;_;
뮈르데일 루즈드라는 것은 마법사의 단계를 말하는 것이고, 올브레슈는 이름, 하이딜로즈는 성입니다<-
[덧 1. 초반에 적어 둔 날짜를 잘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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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그 창녀 소리 그만할 수 없어? 게다가 난 남자라고.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셰-에젤베르크는 여전히 저 말씨를 고수하고 있어서 나는 졸지에 남장 여자(게다가 창녀)로 오인받아버렸다. 저 녀석의 입을 콱 막아버릴까 싶었지만 어차피 말을 시키지 않는 이상 필요 이상 과묵한 녀석이니 참기로 했다. 아아, 저 녀석에게 조언을 구한 내가 잘못이다.
현재 위치는 에브릴 강 유역에서 해운업을 해 오며 발전한 하일레르크 시의 정문을 바로 앞에 두고 신분 증명 과정을 통과하기 위해 기다리는 작은 열로서, 꽤 길게 늘어선 열을 줄이는 데 참지 못하고 셰-에젤베르크에게 질문을(그것도 전설, 신화를 제한 다른 화제)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럼 남창이라고 불러 줄까?"
"...이게 죽을라고."
그리고 결국 그녀는 내게 꿀밤을 한 대 먹었다. 하지만 마냥 어린애처럼 중얼중얼 삐지는 것도 아니고,
그대로 다시 서서 동상처럼 명상하듯 잘 참아내는 아이니, 내가 딱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남창이라니! 난 홍등가 근처에도 안 가본 순결한 남자라고!
주위 사람들은 이런 나와 셰-에젤베르크의 관계를 흘낏흘낏 보고는 수근거린다. 나는 얼결에 얼굴이 샛붉어졌다.
"...난 라프란치아 최연소 길드원이란 말이다. 길드 회비도 따박따박 내고 있다고!"
뭐, 안 냈다간 그 망할 길드장 할아범이 친히 시 몇 줄을 읊으시면 난 닥치고 그걸 네거리 한가운데서 복창해야 한다는 가슴 아픈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비밀, 이다. (길드장 영감이 읊는 그 시 같잖은 싯구의 내용을 밝히는 것도 차마 요구하지 말아 달라.)
본의가 아니게 남창 오인을 받은 직후부터는 필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느라 죽는 줄 알았다. 두 시간 가까이 서서 기다리자니, 도착한 하일레르크 시의 성문 앞에선 검문을 맡은 시의 경비대 둘에게 무한한 경의감이 솟아올라 길드에서 발급해준 내 신분증을 제출할 때도 [수고하십니다, 정말로!]라고 큰 소리로 손을 맞잡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점점 내 차례가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이런 흉흉한 시대에 셰-에젤베르크가 신분증을 갖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게다가 저 녀석, 한때 자살 전적까지 있지 않은가? 그런 녀석을 비 그쳤다고 좋다고 달고 왔으니 태어난 본향의 영주님이 발급한 정식 신분증을 기반으로 한 신분 증명패가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뒤로 빠지자니 이젠 너무 가까운 곳까지 와버려서 도망가면[이 간첩 거기 서!]이 분위기로 갈 것만 같은 묘한 기분. 나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에서 자박자박 걸어오고 있는 셰-에젤베르크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어이, 너 신분증 있냐?"
"..."
이봐! 이런 건 좀 따박따박 대답하라고! 사람 속 타 죽겠네! 하지만 셰-에젤베르크는 진짜 신분증이 없는 건지 내가 열심히 옆구리를 찔렀음에도 불구하고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내 바로 앞의 사람이 신분증을 제출하는 것을 보았다. 아마 용병 길드에서 발급받은 건가 보다. 힐끗 보니 얊은 동판에는 짧은 검 두 개가 겹쳐진 모양이 투박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예상 외로 그 길드는 유명했는지, 어쨌는지 불행하게도 순식간에 내 차례가 되고 말았다.
"신분증,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아, 네."
나는 긴장해서 약간 떨리는 손으로 라프란치아의 증빙패를 내밀었다. 희귀 금속 아르닌을 깎아 만든 투
명한 패에는 백합과 단검과 백색의 날개가 섬세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받아 살펴본 경비대원은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내 증빙패를 돌려주었다. 여담이지만 음유시인 길드 라프란치아는 우리 나라는 물론 이웃나라 진자네즈와 홀포른. 저 먼 에르세노스에서도 그 위명을 떨치고 있는 범세계적(?)길드였다. 이 패로 국경까지 넘을 수 있다고 한다면 믿겠는가? 음유시인은 자애와 평화의 상징인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리고 아직까지는 음유시인으로 위장한 간첩은 없다고 알고 있다.
"음유시인이셨군요. 저희 하일레르크 시를 대표하여 당신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당신의 입술에 깃들인 평화가 이 곳에도 깃들어 영영하기를."
"아하하하... 네, 물론이고 말고요. 음유시인의 발걸음은 평화를 남긴답니다, 아하하하하하..."
평소에는 훨씬 우아하고 고상하게 맞받아쳤겠지만, 지금은 확실히 뭔가 걸리는 게 있으니 뒤게 켕기는 게 저런 의미심장한 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나는 내 증빙패를 돌려다보며 흘낏 셰-에젤베르크 쪽을 바라보았다. 아. 나머지 한 사람이 아무 말도 없는 그녀에게 신분증명패를 달라고 말할 참이었다.
"저기, 하일레르크 시 안으로 들어가려면 신분 증명패를 좀 보여 주어야 하거든? 꼬맹이 너도 여행자니?"
다른 쪽의 경비대원의 꼬맹이라는 말에 만세 삼창을 들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셰-에젤베르크는 묵묵부답인 채, 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발걸음만 옮겼다. 챙- 하고 그녀의 가슴께에 랜스의 날이 닿았다.
"...아?"
뭐야. 딴 생각 했던 거였냐! 그래서 내가 그렇게 열심히 찔러대도 아는 척 안 한 거였냐고! 어이고 그러면서도 날 잘만 따라오더니만! 셰-에젤베르크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배낭을 열고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경비병에게 넘겼다. 그 안에는 감청색의 얇은 패가 들어 있었다. 마치 보석의 단면을 보는 것처럼 깨끗하게 그 너머의 잔상이 비쳤다.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 저 색상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저런 투명도 있는 유색 보석으로 이루어진 패를 지니고 있는 자들은 명망 있는 길드의 고위 길드원이라던가, 무지 부자 여행자라거나 귀족이거나, 공작 집안의 후계자라든가, 공을 세운 기사, 그 외에도 신분 높으신 분들 중 하나란 소리이고, 그 색상에 따라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난 저 색깔의 셰-츠알리미디즈는 전혀 본 적이 없었다. 설마 저 나이에 길드의 고위 멤버는 아닐 테고, 전장에서 공을 세우지도 않을 테니까...너 귀족이었냐!!
"...히익!"
내가 무언의 압박을 받고 있을 때, 그녀의 패를 손에 들고 살펴본 경비병은 얼굴이 새하얘져서는 덜덜 떨며 허리를 구십 도로 팍 숙이곤 우렁차고 덜덜 떠는 묘한 조합의 목소리로 말했다.
"즈,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꼬...꼬맹이라는 망발을..."
하긴, 당황할 만도 하지. 하지만 그는 딱히 다른 처분을 받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만날[꼬맹이]라느니,[바보]라느니 여러 가지 별칭으로 자주 호명했건만 별로 신경쓰는 기색은 없었다. 예상 외로 무척 소탈하던가, 아니면 무심한 건가, 양자 중 하나일 것은 분명했다.
"그 정도면 내 신분은 증명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설마 시의 경비를 맡고 있는 자가 셰-츠알리미디즈(명예의 증명)의 식별법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그리고... 언제나 변함 없이 반말을 쓰기는 마찬가지였다. 뻣뻣하게 굳어 거수경례까지 붙이는 두 명의(셰-츠알리미디즈라는 정체 불명의 단어를 듣자마자 반대편에서 다른 사람들의 패를 확인하고, 보내 주던 경비병의 귀가 번뜩 뜨였던지, 함께)경비병을 역시나 감은 눈동자로 자박자박 걸어갔다. 언제였는지 내 손은 녀석에게 잡혀 있었다.
키랄세르크의 1월, 피묻은 검의 알세라스 15일 오후 9시
시골 여관의 일인실이란 것은 무척 소박한 경우가 많다. 대체적으로 비좁은 방 안에 일인용 침대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 곳에는 작은 책상에 의자까지 딸려 있는 데다가 방문에는 허브로 엮어 만든 리스가 은은한 향을 풍겨내고 있었고, 책상에도 자잘하고 보들보들한 들꽃들이 투박한 꽃병에 담겨 느릿한 새벽녁에 싱그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문득 새벽 바람이 차가운 습기를 머금고 살짝 열린 창틀 사이로 흘러든다.
올브레슈는 얼마 전 여관의 어린 급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방식대로 재구성했다. 삼백 년 전의 이 장소는 적마법사들의 총본산으로 명성을 떨친 곳이다. 그런 그들이 용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을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신룡]이라는 무책임한 단어로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코드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일그러짐을 뒷받침할 사유로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용이 아닌 절대적인 무언가가 나타나서 공격을 가했다는 것, 또 하나는... 아직까지. 혹은 그때에는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속성을 지닌 드래곤이 적색 마법에 능숙한 수백의 마법사, 수천의 마술사들을 완전히 쓸어버렸다는 것. 하지만 300년 전부터 지금까지 마법사 학회에서 새롭게 발견된 속성을 지닌 드래곤은 전무하다. 그렇다면, 역시 후자보다는 전자가...
"하아-"
올브레슈는 책상머리 학자 타입의 마법사다. 아니, 그렇게 길러졌다. 애초에 한 사람의 뮈르데일-루즈드로서의 목적이 달성되기 전까지 올브레슈의 신병(身炳)을 쥐고 있는 자는 올브레슈 본인이 아니었다.
천재가 발견되고, 천재를 교육한다. 그런 단순한 수레바퀴 속에서 올브레슈 자신은 단지 무언가를 넣는 바구니로 전락되었다고 여겼다. 무한정 들어가는 바구니 말이다. 그리고 그가 흔치 않은, 뮈르데일-루즈드의 위치에 오르자, 그들은 이제 올브레슈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은 괴물을 만들어 버린 게 아닐까-하고. 마치 어린 나이의 불장난으로 생겨버린 아이를 외면하듯 말이다.
처음엔 후견인에서부터,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은근한 독립을 권했다. 딱히 못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미 그들 얼굴에는 경계의 무언가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느릿하게 올브레슈 주위의 모든 자들을 감염시켰다.
팔락
못 대신, 크고 작은 화상들과 동상의 흔적들이 물에 풀어진 붉은 색 수채물감처럼 진하게 묻어나는 흰 손의 중앙에는 하얀 깃펜이 심겨져 전혀 개연성 없는 이야기를 적어내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근처에서 구한 질 낮은 초지(草紙)의 귀퉁이를 잡아 슬쩍 들었다 놓았다.
신룡의 진짜 의미. 신의 징벌의 존재. 타락한 인간.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신의 대리자로 탈바꿈하기 위
한 조건은 뭐지?
슬쩍 감은 눈은 자신의 글씨를 보고 있지 않았다. 올브레슈는 푹 숙인 고개 아래로 너울거리는 머리카락을 내버려 두고 낙서와 같은-그에게 직접 물어 보면, 이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습관이라고 대답할 것이다-종이를 흘낏 바라보았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시야를 돌리니 창문에 붙은 유리창 너머로 신룡이 현신했다는 산이 검은 실루엣만을 보이며 옅게 부는 커튼에 흘낏흘낏 능선을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