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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성사로 본‘문자와 문학’의 정체성과 세종인문대로
설 성 경(연세대 명예교수)
1. 들머리
세종학은 세종시대의 학문과 세종시대의 학문을 연구하는 그 후 세대의 학문으로 일컬을 수 있다. 후자의 측면에서 보면, 세종학은 한국학 분야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영역인 인문사회 분야에서는「훈민정음」의 본질적인 문제를,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기술과학의 성과를, 사회 과학 분야에서는 외교와 국방, 리더십의 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연구 성과를 거두어왔다. 이들 분야 중에서도, 세종학을 주도해온 분야는 그동안 연구 논저를 가장 많이 내놓은 「훈민정음」연구를 주축으로 한 국어학의 영역이다.
15세기의 대표적인 지성인이 이룬 문자사의 결실로 세종의「훈민정음」을 들 수 있다. <훈민정음>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국어학 영역에서의 단독 연구에서 얻은 성과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국어학 영역의 연구에 문학 영역을 함께 다루는 통합 연구가 요청된다. 특히,「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정신이 숙종 시대를 거쳐서 일제강점기에는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함께 살피는 비교 통시적 연구가 「훈민정음」과 세종정신을 살피는 연구가 되어, 세종대왕을 당대 지성인을 대표하는 군주라는 측면에서 그 정체성을 파악하는 접근이 이 분야 연구의 새 지평을 열 수 있다. 이는 한국지성사로 본‘문자와 문학’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큰 학문의 길로서, 세종즉위 600돌을 맞아 사실 상 단절되어있던 세종인문대로를 다시 잇고, 더 발전된 모습으로 더 넓은 세계를 향해 함께 열어가고자 하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는 그 한 사례로 세종대왕의 위대한 인문정신은 17세기에는 숙종 시대 훈민정음학의 최석정과 문학의 김만중에 의한 숙종의 각성으로 영정조 시대의 문예융성 시대로 계승되고, 다시 20세기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어학회의 주축이었던 외솔 최현배의 민족학으로 살아나서 그의 자랑스런 제자 윤동주 시인의 문학에서 꽃이 피는 역사적 사실을 들고자 한다.
2. 세종이 잠저에 있을 때에 정독한『구소수간』
세종은 역대 조선의 왕들 중에 성군으로 호칭되며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세종이 그렇게 훌륭한 대왕이 된 원인 중에 하나로 애독에서 볼 수 있는 학문에의 열정을 들 수 있다. 그가 세자가 되고 왕이 된 데에도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몹시 춥고 더운 날이라도 밤을 새워 글을 읽는 태도가 반영되었다.
세종이 태종의 왕자로 있을 때에 애독한 책의 목록 중에는 금나라와 원나라 때 활동한 문인 두인걸이 송나라의 구양수와 소식이 주고받은 짧은 서간을 모은 『구소수간(歐蘇手簡)』이 있었다.
『구소수간』의 서문에는 “과거 시험 때문에 이익과 녹봉을 추구하는 공부가 흥기하면서부터 100가지 기예가 모두 폐했으니, 이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로 괴이할 것이 못된다. 무릇 문장을 짓느라고 필묵을 사용하는 것은 사군자가 중시할 일이 못되지만, 만일 장수가 군사를 쓸 때 깃발, 표지, 징, 북 따위가 없다면, 어떻게 보고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겠는가? 척독의 경우는 기예의 가장 말단에 해당한다. 옛사람들은 서른 자의 짧은 편지글도 반드시 초고를 일으켰으니, 어찌 맛이 없겠는가? 지금 신간『구소수간』의 수백 편을 보고 반복해서 읽으니, 이른바“성정을 볼 뿐이고 문자는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 이해가 된다.”“ 나는 또한 임진년에 북쪽으로 강을 건너온 이래로 후생과 만학의 시문들이 왕왕 모두 옛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을 오랫동안 괴이하게 여겼는데, 어째서 그랬는가? 과거시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자가 이 간극을 틈탄다면 무슨 기예인들 진보하지 않겠는가? 또 간독과 계찰 같은 편지글에 그칠 뿐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세종이 군주가 되기 전에『구소수간』을 탐독한 사실은 우선『세종실록』에 나온다.
임금이 잠저에 있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아서, 일찍이 경미한 병환이 있을 때에도 오히려 독서를 그치지 아니하므로, 태종께서 작은 환관을 시켜서 그 서책을 다 가져다가 감추게 하고 다만『구소수간』을 곁에 두었더니, 드디어 이 책을 다 보시었다. 즉위하심에 이르러서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비록 수라를 들 때에도 반드시 책을 펼쳐 좌우에 놓았으며, 혹은 밤중이 되도록 힘써 보시고 싫어하지 않으셨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5년(1423) 12월 23일)
위의 기록에는, 경연에서『통감강목』을 강독한 끝에, 세종이 동지경연사 윤회에게 “진덕수의『통감강목』은 권질이 많아서 임금은 다 보기가 쉽지 않다 하더니, 내가 경자년(1420)부터 강독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르렀는데, 그 사이에 30여 번을 읽은 것도 있고, 20여 번을 읽은 것도 있기는 하지만, 정말 다 보기는 어려운 책이다”라고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 세종의 법고창신· 경세애민 정신의 결실인『훈민정음』
감성에 비교하여 지성은 사물을 개념에 의하여 사고하거나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판정하는 오성적 능력이나 그러한 정신의 기능을 뜻한다. 지성인으로서의 세종대왕이「훈민정음」창제에서 보여준 한국적 특질을 대표하는 법고창신의 정신과 융합 기술은「훈민정음」의 창제에서 절정을 이룬다.
세종대왕은 천재성을 가지고 태종의 아들로 출생하였고, 치열한 노력을 하는 인물로서, 당대 최고의 교육에 의해 지성과 덕성을 구비했을 뿐만 아니라. 왕이라는 지위와 권력도 갖춘 인물이다. 그는「훈민정음」을 완성한 1443년에 두 형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이름이 새겨진 와당을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의 9층탑 안에 봉안하였다. 이것은 자신이 왕이 되고, 필생의 사업인「훈민정음」을 완성하게 된 것은 자신이나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만이 아니라, 이런 환경을 만들어 준 왕가의 모든 이들의 공적임을 역사에 남기려는 성왕다운 마음자리를 보여준다. 세종대왕은「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가장 먼저「용비어천가」와「월인천강지곡」등을 지어서 보급하였다. 이것은 세종대왕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창제는‘일반 백성들의 의사소통에서의 편리한 글자의 실험만이 아닌, 자신이 득통화상을 통하여 접할 수 있었던『금강경오가해』의「금강경」의 반야 진리와 이에 대한 고승들의 해설을 수용한 결과이다. 세종대왕은 세존의 깨달음과 그에 따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대자비에 비교되는, 군주로서의 자비 내지 인의를 통한 덕치가, 글자가 없는 조선에 제공하는 큰 공덕으로서의 <훈민정음>의 창제로 이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훈민정음해례』는 한글의 창제 동기와 목적, 초성해, 중성해, 합자해 등의 이론을 직접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정인지의 서문에 나오는‘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은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즉,‘자방고전(字倣古篆)’에서의 자에 대한 해석이나 번역에서, 첫째, 자를‘자(字)’로, 둘째, 자를‘글자’로, 셋째, 자를‘글자 모양’으로, 넷째, 자를 예서체, 해서체, 행서체, 초서체 등‘자체’로 번역하여 왔다. 이나, 서법의 추사체, 구양수체 등과 구별 사용이 어렵다. 그런데 한태동교수의『세종시대의 음성과 음운』에서의 해석처럼,‘자방고전(字倣古篆)’에서의‘자’는 28자라고 할 때의 ‘글자를 지칭하는데,‘고전(古篆)’은‘글자’만든 원리는‘옛 전자(篆字)’처럼, 글자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의미와 형태와 소리’세 영역에서 형상하였다는 뜻이다. 즉 15세기의 한자는 옛 전자에서 갖추었던 기능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었지만「훈민정음」에서는 원형을 회복하여‘의미와 형태와 소리’의 기능을 두루 갖춘 모범적인 글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해석함이 적절할 것이다.
4. 세종정신을 계승한 17세기 지성인 서포 김만중의「구운몽」과 「사씨남정기」
17세기의 대표적인 지성인이 이룬 소설문학사의 결실로, 숙종 시대의 김만중의 한글소설을 들 수 있다. 서포 김만중은 천재성을 가진 전쟁 유복자로 출생하여 치열한 노력을 하는 박학강기의 인물로서, 당대 최고의 교육에 의해 지성과 덕성을 구비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의 당쟁이 치열한 갈등 시대의 관료로서 대제학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명곡 최석정과 소통하면서「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창작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정치적 혼미를 보여주는 젊은 군주 숙종을 깨우치는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구운몽」에서는『예기』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주제를 이끌어 간다. 즉, 8선녀가 석교에서 성진에게 말했던 표현에서 여자와 남자의 행로에서 지켜야 할 질서인 『예기』에서 제시한‘남우여좌’가 아닌‘남좌여우’로 뒤바꾸어 말한 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팔션네 답녜하고 닐오되 우리 위부인낭낭 시녜러니 부인 명을 니어 대긔 문안고 도라가더니 쳡등은 드니 도로의 남 왼녁으로 말암고 부녀 올흔 편으로 다니 이 다리 심히 좁고 쳡등이 이믜 라시니 도인의 말아마미 심히 맛당티 아니니 쳥건 다 길노 쇼셔(규장각 소장본)
서포는「구운몽」의 발단 부분에서 8선녀가 왜『예기』에 있는 내용과는 정반대로 말하게 설정했을까?
8선녀는 위부인의 제자로서 최고의 미인들이다. 그러한 그들의 말,“듣기는 남자는 왼쪽으로 가고 여자는 오른쪽으로 간다.”는 표현은 예론의 기본 지식도 모르는 존재들이다. 얼핏 보면,『예기』를 인용함으로 권위를 가지는듯하지만, 실제는 가장 예의에서 벗어난 행동인 것이다.
「구운몽」과「사씨남정기」에서 군주를 깨우치려던 주제는, 한글소설「사씨남정기」를 읽은 숙종이 세종대왕이 창제한「훈민정음」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글을 씀으로써 확인된다. 숙종은「훈민정음」이 창제된 거의 250년에 가까운 시점인 1691년에 다음과 같은「훈민정음 후서」를 지어 후대에 남겼다.
삼가 우리 세종대왕께서는 타고난 성스러운 자질이 요순보다도 높아 예악과 문물이 찬란히 구비되었는데도 우리나라의 말과 소리가 중국과 달라 어리석은 백성이 뜻을 펴지 못함을 우려하셨다. 그리하여 정사를 돌보시는 여가에 새로 28자를 만들어 밝게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 주셨으니, 대개 쉽게 배워 날로 쓰는 데 편리하게 해 주시려는 것이었다. 형상을 본떠 만들었는데도 고저가 음에 맞으며, 글자가 간략한데도 이리저리 쓸 수 있는 범위가 광대하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 할 것 없이 큰일이나 작은 일 할 것 없이 문자로 형용할 수 없었던 것이 모두 이를 통하여 바른 소리로 풀리게 되었다. 조화의 묘리를 극진히 하고 만물(萬物)의 정을 통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대성인이 하시는 바는 그렇게 만들려고 기필하지 않아도 지극한 도리에 합치되는 것이다. 아, 아름답도다. 아, 훌륭하시도다.
「훈민정음 후서」는 당시 조정에서의「훈민정음」에 대한 인식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원래의 기록은『선원록』에 있었다. 그리고 이 기록은 다시 고종 때의 유학자 이유언의 잡록집인『임하필기』의「문헌지장편」에도 기록되어 있다.
「훈민정음 후서」를 학문적인 저서에 최초로 소개한 학자는, 일제강점기에 언어독립운동가로서『우리말본』과 함께『한글갈』을 집필한 외솔 최현배였다. 그는『한글갈』에서‘한글의 기림’항목을 설정하고, 그 예로서 세종 때의 정인지의 기림으로 <훈민정음 서>, 세종 때의 최만리의 기림으로 <반대 상소문> 중 일부, 성종 때의 성현의 기림으로『용재총화』, 광해군 때의 이수광의 기림으로『지봉유설』을 제시하고, 그리고 특이한 군주의 경우로는 유일하게 <숙종 대왕의 기림>을 소개하였다.
5. 외솔 최현배의 제자 윤동주의 암흑기 횃불같은 한글시「간」
20세기 전반의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지성인이 이룬 시문학사의 결실로 일제 강점기에 창작된 윤동주의 한글시를 들 수 있다. 동주는 북간도 이민 3세로 출생하였고, 민족운동가의 조카로서 애국심과 신앙심이 강한 인물로 국권을 상실한 시대에, 민족의식이 강한 기독교 학교의 노력 형 학생이었다. 시인 윤동주는 비록 연희전문 문과의 학생이었지만, 암흑기 당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의 지성은 연희전문에서 키워졌고, 특히 스승 외솔로부터 받은 영향이 지대하다. 외솔 최현배는『한글의 바른 길』에서 우리의 말글을 사용한 대문호의 출현을 기대하였고,『우리말본』에서는“하나님이여, 자유를 주소서”를 표현하며강조 하였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언어 독립운동가 외솔 최현배의 <조선어> 과목 100점 제자인 연희전문 문과의 젊은 지성인 윤동주는 세종정신의 핵심인「훈민정음」창제의 정신과 기술을 담아「간」을 창작하였다. 그는 나라를 빼앗겨 공식적으로는 일제에 의하여 한글을 쓰지 못하게 된 시기인 1941년 11월 29일에, 한글로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는「간」을 지어 세종의 삶과 한글창제 정신을 계승하였다.
「간」에서는「구운몽」의 주인공인 성진의 상징적 의미가 깨달은 토끼로 변용되어 등장한다. 육관대사의 제자 성진이 1차는 현실로, 2차는 윤회 속의 꿈이라는 참선의 이치로 표현된 동정용궁에 다녀오는 이야기 끝에『금강경』의 반야지혜를 깨치듯이, 「간」의 토끼는 개체적인 토끼가 아닌 종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선구적 존재로 승화된다. 그 결과, 자신의 간을 독수리에게 헌증 하는 토끼의 희생은 상대적 위치에 있던 악의 상징인 반영웅 푸로메드어쓰를 끝없는 침전으로 소멸해가는 ‘패망’이라는 심판을 받게 한다.
윤동주는 「토끼전」 등에서는 육지의 이야기와 수궁의 거북 이야기로 전개되던 낯익은 우화를 일제라는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로서의 조선인의 항거의식으로 전환시키고, 낯선 서양의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는 천상의 신격이면서도 인류를 위해 희생하다가 제우스를 속인 죄로 벌을 받는‘프로메테우스’의 영웅적 행동처럼 속이면서,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고, 조선인을 식민지 백성으로 압제하고, 조선의 말과 글을 말살하려 하고, 심지어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뿌리조차 없애려는 창씨개명 정책을 펼치는 일제의 잔혹사를 고발하기 위하여 고심 끝에‘악인의 전형’을 상징하는 시어를 창안해내었다. 극심한 고통을 견뎌내는 의로운 영웅‘프로메테우스’와는 전혀 상반된 존재인 악인의 전형을 형상하고자 고유명사로 된‘푸로메드어쓰’이미지를 창조하여, 침략자 일제를 조선의 주권을 도적질한‘불도적’으로 비유 내지 상징화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윤동주가 제시한 간의 마지막 6연에서는“푸로메디어쓰, 불상한 푸로메디어쓰, 불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푸로메드어쓰’에서,‘푸로메디어쓰와 푸로메드어쓰’의 차이를 두어『훈민정음』창제 당시에‘ㅣ 와 ㅡ’는 곧‘인(人) 과 지(地)’를 상징하던 문자였음을 고려해볼 때,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정신이 일제 강점기 지성시인 윤동주에게로 이어져 한국지성사의 높은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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