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기행>
2002년 7월 18일 새벽 3시 반. 몽골의 울란바토르에 도착했다. 몽골과 우리나라는 시차가 없다. 자정 무렵 출발했으니까 북쪽으로 곧장 세 시간 반을 온 셈이다. 경비를 절약하려고 밤 비행기를 탔더니 너무 이른 새벽이다. 공항에서 밤을 지낼 수는 없으니 우선 호텔로 가자. 호텔에 도착해서 막 한숨 돌리려는데 한국인과 일본인 단체관광객이 시끌벅적 들어선다. 그러나 소란스러움은 곧 사라지고 곧 다시 조용해진다. 호텔 로비에서 밤을 지내려는 듯 몽골인과 러시아인 몇몇이 소파에 쓰러져 자고 있다. 7시는 되어야 방은 준다니 우리도 저들처럼 쓰러져 자야 할까보다. 염치 불구하고 호텔에 사정을 했더니 의외로 선선히 방 열쇠를 건네준다. 아이고, 고마워라. 새벽 5시 30분. 하도 피곤해서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몽골은 한반도의 7배나 되는 큰 나라지만 인구는 겨우 2백5십만이다. 몽골하면 사막의 찌는 듯한 무더위와 모래먼지의 거칠고 삭막함에 찌들은 가난이 연상된다.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며 경제수준이 형편없는 나라. 1992년까지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이었다가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민주화되었으나 자기네 고유문자를 포기하고 러시아 문자를 쓸 만큼 러시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나라다. 지역적으로 초강대국 중국과 러시아의 틈새에 끼여 지금은 비록 형편이 옹색하지만 몽골은 한 때 징기스 칸이라는 영웅이 있어 전 세계를 호령했던 민족이다. 우리와 같은 피부의 아시아인이 세계를 정복했던 역사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 이들의 침략으로 참혹한 고통을 당한 쓰라린 경험에도 불구하고 징기스 칸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을 높이 평가한다. 더구나 우리는 몽골인과 생김새도 비슷하고 태어날 때부터 엉덩이에 파란 몽골반점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혹시 같은 민족이 아닐까?
오전 10시. 울란바토르는 한 여름인데도 한국의 초가을 날씨처럼 시원하다. 그러나 대기오염이 심해서 그야말로 숨이 탁 막힌다. 사람도 적고 자동차도 많지 않은데 왜 이렇게 공기가 탁할까? 아무튼 몽골의 정보를 얻으려면 한국인을 만나야 한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서울식당을 찾아갔다. 서울식당은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몽골에서 가장 큰 한국음식점이다. 김 대중 대통령은 물론 몽골을 찾아 온 각 국의 정치지도자들이 다녀간 곳이란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열지 않았다. 12시나 되어야 연단다. 다행히 우 형민 사장(전화 : 9111-5959)을 만났다. 우 사장은 몽골에 온지 불과 3년 만에 이렇게 엄청난 성공을 했단다. 우 사장은 몽골은 영어가 통하지 않아 가이드 없이 다니기가 쉽지 않다며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비지야(Bizya)를 소개해주었다. 비지야는 외모도 그렇지만 한국말을 잘 해서 꼭 한국 젊은이 같다.
울란바토르 46번가의 국립역사박물관에서 징기스 칸의 밀납인형이며 과거 몽골의 영광을 보여주는 화려한 갑옷과 투구, 활, 칼 등을 구경하고 그 옆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몽골에서 출토된 공룡의 화석들을 돌아보았다. 그럭저럭 2시간이나 걸었더니 다리도 아프고 시장하다. 비지야에게 미국에서 먹어 본 몽골리안 바비큐를 먹자고 했더니 그게 뭐냐고 오히려 되묻는다. 몽골사람이 몽골리안 바비큐를 모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미국식 몽골리안 바비큐는 몽골에는 없었다. 한국의 짜장면이 중국에 없듯이….
몽골 여인들의 옷차림은 아주 현대적이다. 어깨가 훤히 들어 난 티셔츠에 엉덩이가 꽉 끼는 바지를 입고 짙은 화장을 했다. 서울의 아가씨들 보다 더 멋쟁이다. 몽골은 지금이 한 여름이다. 그러나 섭씨 25도 정도여서 한국의 초가을 날씨다. 그나마 그리 길지 않다니 이 때를 놓칠세라 너도나도 한껏 들어내고 모양을 냈나 보다. 울란바토르는 다른 사회주의 공산국가처럼 전기버스가 다닌다. 일반버스에는 60년대 한국처럼 남자 차장이 문에 매달려 큰 소리로 손님을 부른다. 도로 포장이 너무 엉망이고 여기저기 패어있어 택시를 타면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고 있어야 한다. 울란바토르 시내에는 사람들이 커다란 무선전화기를 들고 다닌다. 그 것이 바로 공중전화다. 그들은 전화기를 들고 상가나 극장, 버스정거장 등 사람이 많은 곳으로 옮겨 다니며 전화 걸 사람을 찾는다. 그러니까 무선전화기 한 대만 있으면 사장이 되는 거다. 1분에 100원. 아주 영업이 잘 된단다. 택시에도 공중전화용 무선전화가 있다. 그러니 시내에 공중전화박스가 있을 리 없다. 몽골의 물가는 아주 싸다. 일반 음식값이 대개 2천 원 정도고 커피가 400원, 맥주가 1400원이다. 택시 기본요금이 250원이니까 울란바토르 어디를 가도 1천원만 있으면 된다. 공무원 월급이 6만5천원, 은행원이 12만원 정도라니 그럴 만도 하다.
민속극장에서 몽골의 전통 음악과 춤을 볼 수 있다. 몽골의 노래가 아주 특이하다. 하도 기이한 소리로 노래를 해서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낼까 신기하다. 어깨를 흔들어대며 추는 춤은 북한과 비슷하다. 그러나 몽골 전통예술은 중국과도 다르고 유럽 쪽에 가까운 러시아와도 다른 그들만의 독창성이 있다. 저녁을 먹으려고 들른 서울식당에는 놀랍게도 손님이 엄청나게 많다. 우 사장에게 재벌이 되기는 시간문제겠다고 했더니 여름 한 철 뿐이란다. 한 여름은 20~25도 정도여서 아주 쾌적하지만 겨울은 너무 추워서 관광객이 거의 없단다. 하긴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니…. 갈비와 소주 한 병을 마시니 공무원 반 달치(3만3천원)란다. 그래도 손님이 많은 걸 보면 도대체 어찌된 셈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몽골에서는 외국인을 상대하는 호텔이나 상점에서만 신용카드를 받는다. 호텔에서마저 여행자 수표를 받지 않을 뿐더러 일반 상점이나 음식점에서도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카드를 사용할 요량으로 현금을 조금만 가져온 사람은 은행부터 들려서 현금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 몽골은 아직도 우리의 80년대를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간단사(Gandan monestery)는 울란바토르의 유일한 라마사원이다. 옛날에는 여러 개의 사원이 있었지만 사회주의 시절에 다 부서졌단다. 간단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부서졌던 것을 다시 복원했단다. 간단사의 본관에는 높이가 20미터는 됨 직한 어마어마하게 큰 불상이 있다. 건물 안에 안치된 불상은 흔히 앉거나 누운 형상인데 여기의 불상은 서있는 형상이라서 건물이 탑처럼 뾰족하고 높은 점이 특이하다. 경내에는 어린 아이들이 비들기 모이를 판다. 그러나 다른 여행지의 아이들과는 사뭇 다르다. 끈질기게 달려들거나 귀찮게 조르지 않는다. 한번 눈을 마주치고는 그만이다. 오히려 관광객이 말을 부칠까봐 두려운 눈치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해도 쉽사리 다가오질 않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아이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곤욕을 치르는데 몽골은 전혀 아니다. 몽골의 국민소득이 불과 400불인데도 이들은 구걸을 하거나 악착스럽게 돈벌이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세계를 제패한 징기스 칸의 후예라서 일까?
울란바토르 남쪽, 자이산 봉우리에는 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탑이 있다. 이 곳에 오르면 울란바토르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울란바토르에는 고층건물이 없다. 기껏해야 5층이 고작이고 그것도 최근에 지은 주거용 아파트들이다. 그러나 상상했던 것처럼 황량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전체 몽골인구의 3분지 1인 80만이 모여 사는 도시치고는 왜소한 느낌이다. 서울처럼 큰 도시만 보아서 그럴까? 가로를 정비하고 조경을 많이 하면 좋은 전원도시가 될 듯하다. 여기저기 상점을 기웃거려도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은 보이질 않는다. 눈치 없는 가이드 비지야가 특산품인 캐시미어 전문점엘 데려갔다. 몽골의 캐시미어는 품질이 좋아서 관광객에게 인기가 최고란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선물을 해야 한다며 기어코 260불 어치를 싸 들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오후 9시인데도 대낮처럼 훤하다. 그래서 울란바토르의 밤거리는 화려하다. 그 시간이면 평화의 거리(Peace Avenue)의 노천카페는 문전성시다. 장작불을 지펴놓고 양고기 바비큐가 한창이다. 몽골사람들은 해가 긴 여름철 저녁 무렵이면 노천카페에서 시간을 보낸다. 여기서도 한국 맥주가 아주 인기다. 손짓 발짓으로 양고기 산적구이(천 원짜리 두 개면 저녁식사가 될만하다.)와 생맥주를 시켜놓고 있으려니 한 젊은이가 아는 체를 한다. 한국 자동차를 수입해서 파는 것이 직업이라며 은근히 으스대는 모습이 재미있다. 호주에서 공부를 했다는 녀석은 대단한 수다쟁이여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저 혼자 떠든다. 한국을 ‘살아 움직이는 나라(Working country)'라며 침을 튀긴다. 교통이 불편하고 사람이 너무 많지 않느냐니까 그래도 몽골보다는 좋은 환경이란다. 아무려나 칭찬을 해주니 싫지 않다.
몽골에 오니 기분이 좋다. 왜냐고? 도로에는 한국의 자동차가 지천이다. 아마 전체의 90%가 현대 자동차 같다. 몽골 최고의 직업은 한국에서 중고차를 수입하는 거란다. 노천카페에서 만난 30대 몽골인과 40대 후반의 캐나다인도 모두 자동차 수입상이다. 식료품 가게에는 한국 식품이 넘쳐나고 일류 백화점의 식품코너에는 여러 가지 김치가 이보란 듯 진열되어있다. 재래시장에서는 한국 제품을 찾을 수 없다. 일제나 미제, 한국산 등 고급 상품은 백화점에나 있단다. 거리에는 한국의 여배우가 화장품을 선전하고 울란바토르 중심지에는 ‘테헤란로’처럼 ‘서울로’가 있다. 한국 음식점들이 시내 여기저기 20여 곳이나 되고 모두 한글간판을 달고 있다. 국립체육관에서는 2002년 아시아 태권도 선수권 대회가 열리고 한-몽 공동 유적발굴단의 포스터가 눈길을 끈다. 자원의료봉사단 ‘열린 의사회’와 예수교 장노회의 ‘○○선교단’를 태운 버스가 달린다. 울란바토르 남쪽 자이산 밑에는 의료봉사를 하다 돌아가신 이 태준 박사의 기념공원이 있다. 더구나 요즘에는 월드컵 4강을 해낸 탓에 몽골의 젊은이들은 한국사람을 만나면 공을 차는 시늉을 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몽골에서의 한국의 위상은 그야말로 OECD국 이상이며 아마도 G-10정도는 되는가 싶다. 아, 정말 ‘대~한민국’이다.
이른 아침, 테렐지(Terelji)로 떠났다. 테렐지는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가까운(약 60킬로) 국립공원이다. 하루 45불에 승용차를 세냈다. 휴일을 맞아 친척집에 간다는 비지야의 가족(아내와 세 살 난 딸)과 함께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국의 갑부인 셈이다. 운전사가 딸린 승용차로 가이드와 그 가족까지 데리고 여행을 하다니…. 비지야의 아내는 식품위생담당 공무원이란다. 몽골은 토요일도 휴일이라니 놀랍다. 이 점은 우리보다 한 발 앞선 셈이다. 몽골은 대부분이 유목민이라서 아이들은 초등학교부터 도시로 유학을 떠난다. 유목민들은 계절 따라 집을 옮기기 때문에 도시로 떠난 아이들은 소식을 전할 방법이 없다. 방학이 되어 자기 집을 찾아갈 때도 여기쯤이지 싶은 곳에서 이웃에게 자기 집을 어디냐고 물어야 한다. 우리로선 상상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사실이었다.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나 초원이 나타나고 몽골의 전통가옥인 게르(Ger : 흰색 천으로 씌워놓은 모양의 이동천막.)가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할 무렵 비지야는 이 근처 어딘가에 친척집이 있을 거라며 이리저리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더니 드디어 찾았다며 회심의 미소를 짖는다. 참 희한하구나.
몽골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말을 타고 다닌다. 보통 한 가정에 말이 열 마리는 된단다. 최소한 한 사람이 두 마리 정도는 있어야 번갈아 탄단다. 말은 주인이 달리라면 당장 숨이 넘어가도 달리기 때문에 자주 갈아타지 않으면 죽어버린단다. 그래서 말 타고 전쟁하던 그 옛날에는 병사 한 사람이 말 세 마리를 끌고 전쟁에 나갔단다. 아하, 듣고 보니 몽골이 어떻게 세계를 제패했었는지 알 것 같다. 생각해 보라. 졸병부터 장수까지 모두 말을 탄 군대가 질풍처럼 쳐들어온다면 여간해서 싸울 엄두가 나겠는가? 더구나 여유분의 말까지 같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과거에 고려가 몽골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분명하다. 몽골 사람들의 인상은 아주 유순해 보인다. 험상궂은 구석이라곤 없다. 그러나 투구를 쓰고 말을 타면 다 우락부락하게 보이지 않을까?
테렐지 입구의 언덕에는 큰 돌무더기가 쌓여있다. 이것이 ‘오보’라는 몽골의 성황당이다. 이들은 이 돌무더기가 병과 재난을 막아주고 가축을 번성하게 해 준다고 믿는다. 한 떼의 말 탄 청년들이 들이닥치더니 이 돌무더기를 빙글빙글 돈다. 제 고향을 떠나 멀리 떠날 때는 반드시 이 돌무더기를 세 바퀴 돌아야 한단다. 그래야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돌아온단다. 언덕을 넘어 한 구비 돌아서니 카스 캠프(Cass camp) 간판이 보인다. 우리 카스 맥주 상표다. 과연 한 대현(43세)이라는 한국인이 주인이다. 울란바토르에서 4년 째 건축업을 하고 있는 한 사장은 장래를 내다보고 여기에 3억5천이나 투자했단다. 아무튼 한국사람은 대단하다.
테렐지의 Mirage 캠프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다. 산봉우리는 뾰족한 암반이고 그 아래는 푸른 전나무 숲, 그리고 파란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넓은 초원이 이어진다. 마치 잘 가꾸어놓은 골프코스 같다. 파란 하늘아래 초원에는 말, 소,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멀리 산자락에는 하얀 게르가 게딱지처럼 붙어있다. 몽골을 누가 황량한 사막이라고 했던가? 천만의 말씀이다. 스위스의 알프스라는 착각이 든다. 우리가 묵을 게르에는 침대 겸 소파가 4개, 가구라곤 탁상 한 개가 전부다. TV는커녕 라디오도 없이 조명용 알전구 한 개가 천장에서 달랑거린다. 하루에 40불. 용변이나 샤워는 공동시설을 이용해야 한다. 혹시 밤에 화장실에라도 가려면 손전등이 있어야 할 텐데 찾을 수가 없다. 그래도 몽골에서는 이런 게르가 신혼여행지로 인기란다. 신혼부부가 화장실과 샤워시설 없이 어떻게 견딜까? 다행이 방 한 복판에 난로와 장작이 있어서 추위는 피할 수 있겠다.
몽골에 온 관광객은 누구나 한번쯤 말을 탄다. 사실은 말을 타는 것이 아니라 말이 사람을 태워주는 거다. 달린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말이 가면 가고 말이 서면 속절없이 그냥 서 있어야 한다. 그럴 테지, 말 타기가 그리 쉬울까. 한 시간에 5불. 천천히 끄떡거리며 초원을 간다. 속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참으로 한가로운 모습이리라. 그러나 말을 처음 타는 나 같은 사람은 바짝 긴장한 탓에 다리엔 쥐가 나고 엉덩이가 얼얼하다. 말이 유순하고 길이 잘 들어서 천만다행이다. 말은 참으로 영리한 동물이다. 제 몸에 붙은 파리를 쫓으려고 채찍을 치는지 빨리 가라고 때리는지를 다 안다. 믿어지지 않지만 50킬로도 더 떨어진 학교까지 아이들을 태워주고 저 혼자서 집을 찾아온단다. 어떤 녀석은 제 주인이 아니면 태워주지도 않고 심술만 부린단다. 게다가 몽골사람들은 다급하면 잡아먹기도 하니 말이야말로 몽골에서는 없어선 안 될 귀한 존재다. 그래서 몽골에서는 가장 친한 친구를 ‘말 같은 친구’라고 한단다. 몽골 남부지방에는 아직도 야생마가 많다니 몽골사람들은 말에 관한 한 복 받은 민족이다.
이른 아침부터 마실 물을 챙겨서 산책을 나섰다. 길을 따라 걷는 게 아니다. 그냥 앞을 바라고 초원을 가로지른다. 초원이 계속되는 구릉지역을 따라 마냥 걷는다. 푸른 나무숲은 아직 아침 이슬이 가시지 않아 신이 젖어온다. 빨강, 노랑, 보라 그리고 하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바위틈에는 작은 선인장이 꽃 몽우리를 막 피우려는 참이다. 캠프에서 누군가가 멀어져 가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넉넉하니 서두르지 않아도 좋다. 그야말로 양이나 염소처럼 어슬렁어슬렁 간다. 숨이 차면 앉아서 쉰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본다. 어제 밤에는 저 맑은 하늘에 어찌나 큰 별들이 그리도 많던지….
몇 개의 원주민 게르를 지나서 한가롭게 앉아있는 세 늙은이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왔습니다.’했지만 알아들어야 말이지. 노인들은 대뜸 호쇼르(건빵)와 말린 고기가 든 부대자루를 내 앞으로 밀어놓는다. 또 양재기에 타르크(요구르트)를 가득 담아 내 놓는다. 설탕을 듬뿍 타서 먹으니 약간 시지만 먹을 만하다. 두 부인이 큰 양푼에 음식을 하나 가득 담아 가지고 왔다. 양고기, 감자, 당근을 샐러드처럼 버무린 쯔븡이다. 숟가락을 치맛자락에 쓱쓱 닦아서 건넨다. 아내는 더럽다고 난처해했지만 나는 그들이 민망해 할까봐 한 입 가득 털어 넣었다. 처음에는 약간 비위가 상했지만 생각처럼 비위에 거슬리지는 않는다. 짭짤하니 먹을 만하다. 일부러 쩝쩝거리며 맛있게 먹었다. 그랬더니 더 먹으라고 성화다. 이런 변이 있나? 배가 부르다고 가슴을 내밀어 보였다. 그때 마침 어린 아이 너덧이 달려왔다. 낯선 우리에게 호기심이 나나보다. 바둑 껌을 두 알 씩 나눠주며 질겅질겅 씹는 법을 보여주니 마냥 즐겁단다.
캠프에서는 아무 하는 일없이 망중한(忙中閑)을 즐긴다. 따스한 햇빛을 쪼이며 책을 읽고 맥주를 마신다. 그리고 다시 말을 탄다. 만나는 아이들에게 줄 바나나와 초콜릿 등을 배낭에 담아 메고 다시 산책을 나선다. 개울에서 천진스럽게 발가벗고 목욕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계집애들은 팬티를 입었지만 입으나마나 알몸이 다 훤히 보인다. 샤프, 볼펜, 바나나, 초콜릿을 나눠준다. 산책이 끝나도 할 일이 없으면 늘어지게 낮잠을 잔다. 이거야말로 정말 늘어진 팔자다.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이 그냥 그렇게 세월을 죽인다.
내일이면 즐거운 몽골여행도 끝이다. 이제 하루 밤을 더 자면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한다. 저녁에는 울란바토르로 돌아가 노천카페엘 가자. 그리고 예쁜 몽골처녀들을 훔쳐봐야지.
-몽골 사람은 순박하고 남을 속일 줄도 모른다.
-몽골은 인구 증가를 위해 아이를 많이 낳으면 훈장도 주고 세금도 면제해 준다.
-몽골은 병역의 의무가 있지만 일년에 600불씩 2년만 내면 면제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뒤늦게 자본주의를 배운 나라는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 정말일까?
-몽골에는 골프장이 없다. 늪지를 제외하고는 뱀도 개구리도 거의 없다. 거지도 떼를 쓰는 행상도 없다.
2002. 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