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손을 잡고 老後를 지나갈 것인가?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서구는 실버타운 빈집 늘고 국내서도 외면하는 노인층 많아… 국가 주도의 노인부양은 한계, 가족·국가의 공동부양 모색해야 15년밖에 안 남은 '초고령사회' 언제까지 모른 척할 것인가.
계절 탓인가 나이 탓인가, 요 며칠 사이 부고(訃告) 소식이 부쩍 자주 들려온다. 지인의 죽음을 접할 때마다 그 가족들이 임종(臨終)은 했는지, 그분이 누구 손을 잡고 이 세상을 떠나셨는지 못내 궁금해진다.
"행복한 가족의 모습은 동일하지만 불행한 가족의 모습은 제각각"이라던 톨스토이의 명언을 그대로 죽음에 적용해도 크게 무색하진 않을 듯싶다.
최근 우리네 일상 및 인간관계의 '상품화'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이제 가족의 손 대신 호스피스의 손을 잡고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제대로 시작조차 못해 본 서구식 실버타운이 '절반의 성공'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우울한 평가가 들려오고 있다.
실제로 서구에선 실버타운 공실률(空室率)이 꾸준히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고령사회 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왜 어르신들께서 실버타운에 들어가는 것을 흔쾌해하지 않는지 요인을 분석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이유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첫째로는 대부분의 실버타운이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자리하다 보니 입성(入城) 초기엔 친지들의 방문이 빈번히 이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친지들로부터 소외됨에 따라 외로움이 깊어간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동안 살아온 익숙한 환경에서 친숙한 사람들과 더불어 여생을 보내고픈 마음이 간절해지는데, 실버타운은 낯선 상황에서 듣도 보도 못했던 사람들과 만나 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적응을 시도해야 한다는 점에서 스트레스 수준이 높아간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거기 가 봐야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들이 모여 있어 가고 싶지 않다."고 했던 한 어르신의 솔직한 고백처럼, 실버타운은 죽음이 일상화된 공동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후엔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스트레스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다.
결국 세대분절(分節)적인 노후공동체 모델의 한계에 직면한 서구에서는 세대통합적 노후공동체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현실적 대안으로 독일에서는 어린이집 가까이에 실버타운을 짓기 시작했고, 일본의 일부 지역에선 노인거주할당제를 시행함으로써 동양식 집단주의와 서구식 개인주의의 혼합에 기초한 공동체 모델 정립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2010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인 '엄마를 돌봐 줘(Later We Care)'엔 꽤 의미심장한 장면이 등장한다.
네덜란드 출신인 클라이러 페이먼과 피트 오마스 감독이 만든 이 영화에서 젊은 시절 총명하고 슬기로웠던 엄마가 치매를 앓기 시작하면서 점차 쇠락해가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지켜보아야 했던 딸은 엄마의 마지막을 돌봐줄 실버타운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노인들이 일사불란하게 획일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현장을 확인하곤 발길을 돌린다. 결국 엄마의 마지막 가는 길을 오롯이 지켜보고 싶었던 딸은 자기 집 가까이에 엄마의 방을 마련해 드리는데…. 어느 날 출근하는 자신을 대신하여 엄마를 돌봐주던 필리핀 이주여성으로부터 "갑자기 일이 생겨 오늘은 당신 엄마를 돌볼 수 없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곤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눈물을 터뜨리고야 만다.
영화제에 직접 참여해서 한국 관객들과 대화했던 감독의 변(辯)인즉, 전통사회의 선례(先例)에서 볼 수 있듯 가족, 특히 여성에게 노인 부양을 책임지우는 것도 분명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국가 주도하에 노인 부양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또한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정답은 가족이냐 국가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할 것이 아니라 가족 의무와 국가 책임 사이에 여러 가지 형태의 조합과 균형을 모색하면서 개인 및 가족 차원에서 다양한 선택지를 갖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란 주장이었다.
이제 2026년이 되면 거리의 성인 5명 중 1명이 65세 이상 노인인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지금부터 불과 15년밖에 남지 않았다.
누구의 손을 잡고 노후(老後)를 지나갈 것인지, 종국엔 누구의 손을 잡고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의 문제를 보다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공론화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가 너무 우울할 것 같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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