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좌에 올라 주장자를 세 번 치고 이르시기를
아무런 생각 없이 앉아 있다가 주장자를 들어서 여러 대중에게 보이고 또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쳤는데 여기에 법문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종사가 법을 거량擧揚하는 것이며, 이렇게 하기 전에 눈과 눈이 서로 마주치는데 도가 있는 것이다.
영축산이여, 산은 층층하고
청류동이여, 유수는 잔잔하며
벽공이여, 백운이 편편이 날고
녹음이여, 산새가 남남이 우니
금일 청법대중에게 맡기노라
동쪽으로도 보고 서쪽으로도 볼지어다
아지랑이가 물이 아닌 데 목마른 사슴이 쫓아가고
물에 잠긴 달이 참이 아니건만 어리석은 원숭이 건지려 하네
揚焰非水渴廘趨
影月非眞病候漉
우리 스님네가 법다이 공양供養을 할 때에 외며 관하는 다섯 가지가 있다.
공부의 다소를 헤아리며 식량이 온 곳을 생각하며
나의 덕행이 온전한가 이지러졌는가를 생각해 보고 받으며
마음을 방비하고 허물을 여의는 데는 삼독三毒보다 더한 것이 없는 줄 여기며
밥 먹는 것은 약으로 여겨 몸이 여윔만 지탱하는 데 족하게 생각하며
도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공양을 받는다.
計工多少量彼來處
忖己德行全缺應供
防心雜過貪等爲宗
正思良藥爲療形枯
爲成道業應受此食
사업을 하는 사람은 밤이나 낮이나 머릿속에 사업 일이 떠나서는 안 될 것이며 학문하는 사람도 그 분야의 전공하는 것이 머릿속에서 떠나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이 수행에 뜻을 둔 사람은 모름지기 오관(五觀)을 생각하고 검약하게 생활을 해야겠다.
경에 ‘안수정등岸樹井藤이 기능장구豈能長久리요’란 말이 있다. 이 말의 출처를 말해 보자.
어떤 사람이 가없이 넓은 벌판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사방에서 불길이 일어나 불 속에 포위가 되었다. 그곳에 미친 코끼리 한 마리가 잡아먹을 듯이 사납게 덤벼드는 바람에 도망을 치다가 마침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그 나무에 올라갔다. 코끼리는 나무 위에 올라 갈 수가 없어서 쳐다보고만 있었다.
사람이 나무에 얽혀 있는 칡덩굴을 잡고 매달렸는데, 그 아래에는 크고 깊은 우물이 있고 우물 속에는 용이 되려다 못된 이무기 세 마리가 떨어지면 잡아먹으려고 입을 벌리고 있고, 우물가에 큰 뱀 네 마리가 사람 냄새를 맡고 잔뜩 노려보고 있다. 칡덩굴을 오래 붙잡고 매달려 있으면 힘이 빠지고 손이 저려서 마침내 떨어질 것인데, 그나마도 빨리 떨어지라고 흰쥐와 검은 쥐가 교대로 칡덩굴을 한 가닥씩 갉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 이 형국이 어떠한가 한번 상상해 보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온갖 고생을 하는데, 자식 걱정 돈 걱정 따위는 이것과 비교도 되지 못한다. 이렇게 겁이 나서 칡덩굴에 매달려 있는데, 칡덩굴이 얽혀 있는 나무에 구멍이 나서 그 구멍에 벌이 꿀을 쳐 그 꿀 방울이 똑똑 떨어지니 말할 수 없이 두려운 가운데서도 달콤한 꿀 한두 방울 받아먹는 재미에 무서움도 잊어버리고 매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안수정등岸樹井藤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형태를 비유한 이야기이니 가없이 넓은 들녘은 태어나서 죽어가는 생사의 광야이니 그곳으로 사방에서 불어오는 불길은 욕화欲火로서 생로병사의 불이요, 우물은 황천이며, 미친 코끼리는 무상한 살귀殺鬼요, 나무는 사람의 몸이며, 칡덩굴은 사람의 목숨이며, 검은 쥐 흰쥐는 해와 달이요, 세 마리의 이무기는 삼독이며, 네 마리의 뱀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이요, 꿀은 오욕락五欲樂이다.
《화엄경》에 게송으로 이르기를
알거라 일체법엔
명자名字도 없으며
거래去來도 없으며
다르지도 다르지 않지도 않은 것이며
둘도 둘 아닌 것도 아니다
알거라 일체법엔
형상 없는 것이 형상이요
형상 있는 것은 형상 없는 것이며
분별없음이 분별이요
분별하면 분별이 없음이며
없음이 있는 것이요
있음이 없는 것이며
작위作爲 없음이 작위요
작위가 작위 없음이요
말하지 않음이 말함이요
말함이 말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말하지 않음이 말하는 것이 되고 말하는 것이 말하지 않는 것이 되는가. 이것을 부처님께서 불가사의한 일이라 하셨다.
조선조 정조正祖 때의 일이다. 심한 흉년이 들었는데 어떤 여인이 서너 살 된 아이를 데리고 살았다. 어린애는 매일 배고프다고 우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우는 아기를 먹을 것이 없으니 달랠 길이 없었다. 자식이지만 잘못하다가는 아이도 죽이겠고 자기도 죽을 지경이어서 어쩔 수 없이 통도사 부근에다 버리고 갔다. 스님네들에게 아이가 발견되어 절에서 키우고 잘 가르쳐서 장성해서 훌륭한 큰 스님이 되었다.
그 어머니는 흉년을 면하고 절 근처에서 살았지만 그 아들은 어머님을 찾지 않았다. 흉년을 당해서 당신 혼자서만 살기 위해 나를 버리고 떠나버린 비정한 이를 어떻게 부모라고 할 수 있으랴. 그래서 찾아보지 않았다. 그 스님께서 점차 훌륭한 종사宗師가 되어 설법도 하고 덕이 높아지니 궁중의 나인들이 와서 법문도 듣고 하다가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되어 정조에게 까지 그 얘기가 알려지자 그에 대한 글을 지어 그 스님께 보냈는데 다음과 같다.
세상에 또 어디엔들 부모님의 정 같음이 있겠는가
뉘 알랴 그 어미의 버린 가운데 인仁을
흉년에 한 구덩이에 묻히는 것은 차마 못 할 일
하여 짐짓 부처님의 품 안으로 보냈다네
世上元無不是親
誰知其母棄中仁
荒年不忍同溝壑
故置慈悲釋氏門
그 스님이 이 글을 보고 다시 어머님을 찾아뵈었다 한다. 누구나 서로 나쁜 감정이 있고 사이가 험악해져 있더라도 부처님의 제자들은 자기는 좀 손해를 보더라도 헌신하는 불보살님들의 원력으로 서로 화해하고 싸우지 말고 잘 지내야 건전한 세상 살기 좋은 아름다운 사회가 이룩되는 것이다.
세속 재가在家불자들은 여유와 멋을 지니고 살려면 ‘나’라는 소아망상小我妄想에서 벗어나 얽매임이 없어야 한다.
음식을 입에 넣어 줄 때 눈을 감고 넣어도 떡을 넣어주면 이것은 송편이다 이것은 시루떡이다 라고 알게 되고 짠 것을 넣는데 이것은 간장이다 이것은 된장이다 라고 알게 되고, 설탕인지 조청인지 곶감인지를 넣어주는 대로 다 알게 되는데 이 음식이 입안에만 있으면 피도 살도 되지 않는다. 분별없는 경계 이 고개를 넘어가면 짠 것도 신 것도 단 것도 다 없어진다. 이 고개를 넘어가야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아리랑 고개를 미아리 고개니 보릿고개니 하는데 이 고개가 바로 아리랑 고개인 것이다.
수행이나 모든 예술 과학 종교가 이 ‘나’라고 하는 고집의 고개를 넘어선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가야 좀 익어간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업이나 가정 살림살이도 무아의 경지, 무분별의 경계로서 혼신의 힘을 다 내야 무엇을 한 가지 이루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마산에 이장춘이라는 봇짐장사를 하며 고생하던 이가 있었다. 짐을 지고 청도 운문 고개 예령 종성의 큰 고개를 넘으면서 지게를 작대기로 받쳐놓고 쉬며 이렇게 혼잣말을 하였다. “장춘아 너는 지금 땀을 흘리고 있지만 이 고개 마루턱에 올라서면 시원한 바람이 네 겨드랑 밑을 지나갈 것이다. 그러니 힘이 들더라도 올라가자.” 그러면서 고개 위에 올라서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또 한 마디 한다. “장춘아 너도 돈을 벌면 이렇게 시원하고 좋은 때가 올 것이다.” 이렇게 자위하며 돈을 모았다. 이장춘은 부자가 된 뒤에도 돈을 넣고 다니던 망태기는 피와 땀이 얼룩진 노력의 결정이라고 내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자식들은 그렇게 모든 돈을 함부로 쓰니까 불러다 앉혀 놓고 “이 돈이 하늘에서 떨어진 줄 아느냐, 땅에서 솟았는 줄 아느냐, 내가 예령 종성 운문 고개를 넘어 다니면서 피땀을 흘려가며 번 돈을 이 망태기 속에 넣어 다녔다.” 그러면서 망태기를 자식들에게 보이곤 하였다. 모든 예술 학문 종교 철학 그리고 모든 사업이 정신을 집중하고 정성을 쏟고 피와 땀을 흘린 뒤에라야 이룰 수 있는 것이며 또 그런 정열을 기울이는 그 자체가 우리의 살아가는 보람인 것이다.
허공을 찔러 여는 천길 소나무요
속진을 끊고 씻어주는 한 시냇물이네
衝開碧落松千尺
截斷紅塵水一溪
푸른 하늘 만리에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북두칭성이 서너점이로다
靑天萬里回頭看
北斗七星三四點
주장자로 선상을 한 번 치고 할 한 번 하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
출처:원오사 http://wonosa.or.kr/bbs/board.php?bo_table=law01&wr_id=76&pag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