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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곡절 많은 사랑
구양봉은 황약사와 작별한 뒤 이 단풍나무가 울창한 나루터로 와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그는 강을 건넌 즉시 시가지에 당도했다. 건강부는 워낙 풍요한 고장으로서 시가지는 아주 번화했다. 구양봉은 시가지에 당도하여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한 주점에 들어섰다. 그는 창가에 자리를 잡은 뒤 술과 안주를 청하여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이 술집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창 술을 마지면서 한담을 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그들이 모두 이 시가지의 사람들이고 대체로 부잣집 사람들임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하릴없이 술집에 와서 술을 마시고 한담하는 것으로서 소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양봉은 그들을 관계치 않고 술을 마시는 데만 골몰하였다. 그는 대리로 가는 길에 길도 알아볼 겸 이곳에서 잠시 쉬는 참이었다. 그는 임만을 거쳐 흠주(欽州)까지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것인가, 아니면 건강으로부터 악주(鄂州)까지 가서 또 형주(街州)를 거쳐 육로로 갈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옆의 술자리에서 한 사람이 떠드는 말소리가 들렸다.
"자넨 못 들었나? 그 구부( 府)에서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주 큰 추문이라던데."
그러자 다른 사람이 다그쳐 물었다.
"구부라면 철 장수상표 구 선배님이……."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낚아채듯 말했다.
"언성을 좀 낮추게! 그렇게 소리를 높이다간 큰일을 치르는 수 있어."
그는 남들이 들을 수 없게 귓속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그들이 하는 말을 처음에는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구 선배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은근히 신경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눈짓을 하며 귓속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 구 선배라는 사람을 몹시 두려워하는 눈치가 확연했다.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구 선배라구? 만일 그 철장방의 새 방주를 두고 한 말이라면 필시 그 철 장수상표 구천인임이 틀림없을 거다. 그런데 그렇게 새파랗게 젊은 놈을 보고 선배라니?'
그러면서 구양봉은 구천인 역시 인물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낡은 절에서 구천인이 향로에 손자국을 내어 철장방 방주의 자리를 차지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때로부터 좨 오랜 시일이 흘렀는데 그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이때였다. 그가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왔다, 왔어!"
길 복판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손에 커다란 구리독을 들고 있었다. 구양봉이 창문을 열어젖히고 머리를 내밀어 살펴보니 그는 다름아닌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구리 독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리독에 담긴 물이 찰랑거리는 게 확연히 눈에 띄었다.
구천인은 태연한 기색으로 천천히 술집에 들어와 곧장 구양봉이 앉아 있는 이층으로 올라왔다. 구양봉은 그가 열여덟 개의 나무층계를 올라오는데도 그 걸음이 온건하고 조금도 힘들어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구천인은 층계를 다 올라온 후 깨끗이 치워 놓은 탁자를 골라 구리독을 그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러자 탁자는 구리독의 무게를 견뎌 내지 못하여 뿌지직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구천인은 자리에 앉자 사나운 눈초리로 주위를 살폈는데 아마도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구양봉은 사두장을 술상 옆에 세워 놓은 채로 무심한 척 술을 따라 마셨다. 그는 구천인이 지난날에 비해 내공이 놀라울 정도로 늘었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일반적인 강호의 고수는 물론이고 구양봉조차도 미치지 못할 듯싶었다.
한편 구천인은 구천인대로 호복(胡服)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는 구양봉을 발견하고 그가 중원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이 술집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첫손가락에 꼽힐 인물이리라는 것은 짐작했다. 하지만 대충 스쳐 보았을 뿐으로 그가 구양봉인 것은 알아보지 못했다.
술집에 있던 손님들은 구천인의 일을 이러니저러니 이야기하고 있던 터에 그가 불쑥 나타나자 겁이 나서 숨조차 바로 쉬지 못했다. 그들은 술을 마시는 척하면서 가끔 구천인의 거동을 가만히 훔쳐보았다.
구천인이 자리에 앉은 채 소리쳤다.
"둘째야! 둘째!"
둘째라는 호칭은 술집 심부름꾼들을 하대하여 부를 때 사용하는 것으로서 점잖게 부른다면 주인이라고 부르는 게 상례다. 그런데 이 술집에는 심부름꾼이 따로 없는 터라 주인이 직접 술을 날랐는데 그는 둘째라는 호칭으로 불리고도 하는 수 없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으리님, 뭘 드시겠습니까?"
구천인이 노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나? 맛있는 게 있으면 날라 오란 말이야. 술은 열 단지를 가져와!"
구양봉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흠칫 놀랐다.
'나도 두 단지밖에는 마시지 못하는데 저 놈은 열 단지나 마신단 말인가?'
주인은 곧 술을 날라 왔다. 그는 술 열 단지를 구천인의 발치에 놓고 술상에 안주를 가득 차려 놓았다. 만일 탁자 위에 놓인 구리독만 아니었다면 안주를 더 많이 차려 놓았을 것이었다.
구천인이 불쑥 젓가락을 집어 들더니 다시 화를 냈다.
"이 놈의 젓가락은 왜 이렇게 굵어?"
주인은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다.
구천인은 손에 들었던 젓가락에 손톱을 박아 넣더니 힘을 주어 쭉 내리그었다. 그는 이렇게 젓가락을 가늘게 몇 가닥으로 갈라 놓고 나서야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젓가락이란 이렇게 가늘어야 음식을 집기가 좋지."
그제야 비로소 구천인은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기 시작했다.
한쪽에서 이를 지켜 보던 구양봉은 구천인의 술 마시는 모양이
남다른 데 대해 무척 놀랐다. 그는 안주를 집어먹고 나서는 젓가락을 술상 위에 박아 세워 놓는 것이었는데, 그 한 쌍의 참대 젓가락은 술상에 꼿꼿이 선 채 넘어지지 않았다. 그는 술단지의 뚜껑을 떼고 단지째 집어 들고는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꿀꺽꿀꺽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고래가 물을 들이켜듯 한 단지의 술을 단번에 비워 냈다.
구양봉은 그가 이처럼 술을 호걸답게 마시는 것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양봉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독한 술을 단지째 들고 단번에 마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층계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왔다. 열 명이 넘는 그들은 모두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한 나이 어린 공자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그 공자를 바라보던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키드득 웃었다. 그 공자는 옷차림이 아주 멋졌는데 머리에는 공자소요건(公子消遙巾)을 쓰고 몸에는 소수(蘇辯)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좌우 양쪽에는 각기 깨어진 반쪽짜리 옥반(玉盤)을 매어 드리우고 있었다. 소매에는 한쪽에 각기 열여덟 개씩 진주를 박았는데 하나 하나에 불상
이 새겨져 있었다. 발에는 꽃무늬를 수놓은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구양봉이 웃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렇게 멋진 차림을 한 자가 생긴 것은 아주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썹이 짝짝이였는데 한쪽 눈썹이 시커멓게 숱이 많은 데 비해 다른 한쪽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코는 돼지코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한심한 들창코였다. 그자는 단추구멍처럼 살짝 째진 볼품없는 눈을 깜박거리면서 구천인을 바라보았다.
그 사나이들은 구천인의 맞은편의 탁자에 둘러앉았다. 모두 자리에 앉자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리 공손곡주(孔孫谷主)께서 왕림하여 방주님을 배알하여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옵니다."
구천인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곡주라는 자가 소리를 질러 주인을 불렀다.
"이봐, 여기에도 한 상 차리게. 철장방의 방주님 것과 똑같이 말이야."
주인은 이 사람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될 사람인 것을 아는지라 나는 듯이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이윽고 술상이 마련되었다.
공손곡주가 술잔을 들자 옆에 있던 사람이 바삐 술을 따랐다. 공손곡주가 술잔을 치켜 들고 말했다.
"구 방주님, 저한테 한 가지 청이 있사온데 방주께서 허락하여 주십시오."
구천인은 그자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고는 발치에 있던 다른 술단지를 들고 뚜껑을 데서는 입에 대고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한 단지나 되는 술을 단숨에 비우고는 쓱 입술을 훔쳤다.
그는 공손곡주를 쏘아보며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 자네가 그 무슨 절정곡(絶情券)의 곡주라고 해서 나의 철장방을 업신여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행여라도 그런 생각일랑 말어!"
구천인의 어조는 더 아상 의논할 여지가 없이 맺고 끊는 것이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사나운 기색으로 공손지 (公孫止)를 나무랐다. 그 눈길이 어찌나 무서워 보이는지 공손지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공손지는 얼굴에 웃음을 바르며 아양을 떨었다.
"구 방주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구천인이 더는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쳤다.
"개수작 말어! 나의 여동생은 보통 인물이 아니야. 용모가 선녀같은데다 현숙하고 총명해. 이 천하에서 얼마든지 훌륭한 배필을 고를 수 있어. 네 놈이 무슨 덕과 재간이 있다고 감히 그 앨 넘보는 게야?"
공손지가 또 만면에 웃음을 바르면서 술잔을 치켜 들었다.
"방주님, 그런 얘길랑 천천히 하고 술이나 듭시다!"
"술 마시는 일이라면 좋지. 큰 잔을 가져오너라. 내가 한 단지를 마실 때 자네가 한 잔을 마시면 주량이 괜찮은 것으로 치겠어!"
공손지는 주량이 변변치 못한지라 손에 든 술잔을 보며 망설였다. 그러자 구천인이 또 입을 열었다.
"공손곡주가 나의 체면을 봐서라도 그 정도는 응해 주겠지?"
그는 차디찬 눈길로 공손지를 쏘아보았다.
공손지가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제가 마시기 싫어 그러는 게 아니라, 사실 평생 술이라고는 입에 대지 않는 성미가 돼서……."
구천인이 별안간 미친 듯이 웃어대더니 손으로 술상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공손지, 자네가 안 마시겠다면 나도 강요하지는 않겠어. 단, 내 여동생 얘기만은 삼가해 주게."
공손지가 구천인을 쳐다보며 한참 생각을 더듬다가 소리쳤다.
"좋소이다. 술잔을 가져오너라!"
술집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찍소리도 못하고 그들 두 사람이 술 다시는 것을 구경했다. 공손지는 술에 약한지라 냄새만 맡고도 벌써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술 한 모금을 입에 넣기는 했으나 한참이 지나도록 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기지는 못하였다.
구천인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치에 놓인 술단지를 집어 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역시 술단지는 단숨에 비워졌다. 잠깐 사이에 세 단지의 술이 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구천인의 배는 한껏 불러 올라왔다. 그는 묵묵히 공손지의 거동을 지켜 보았다.
공손지는 코를 손으로 잡고 사발에 담긴 술을 겨우 마셨다.
구천인이 입을 열었다.
"공손지, 안주나 집어."
공손지가 억지로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이 안주는 먹을 수 없소이다."
"왜 못 먹겠다는 건가? 이 안주에 독이 들어 있나?"
구천인이 공손지네 사람들을 둘러보니 그들은 공손지의 곁에 앉아 있으면서도 안주를 집어먹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워낙 이 공손지의 가문은 현종(玄宗) 때부터 절정곡 안에 은거하며 줄곧 소식만 하다 보니 비린내가 나는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아 왔던 것이다.
구천인이 '탕! '소리나게 술상을 쳤다.
"자네가 내 여동생한테 장가를 들겠다구? 천만에! 자네 같은 사람은 절간에 가서 중질이나 하면서 살아야 꼭 맞어. 그런 사람한테 시집보낼 수야 없는 일 아닌가?"
공손지는 눈이 휘둥그래져 가지고 구천인을 쳐다보았다. 만일 구천인이 구천척의 오라버니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당장 덮쳐 들어 결사적으로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구 방주님께서 술을 마신다면야 전 목숨을 내걸고라도 모시겠소이다."
구천인은 벌써 세 단지를 마시고도 더 마시려는 눈치였다. 아마 취할 모양이었다. 공손지는 내심으로 그를 취하게 만들면 오히려 일이 수월해질 듯싶어 일부러 술을 더 마시도록 부추겼다.
구천인이 비웃는 투로 말했다.
"술이야 얼마든지 마실 수 있지. 내가 자네 같은 줄 아나?"
한쪽에서 줄곧 지켜 보고 있던 구양봉은 구천인이 이젠 술을 더 마시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술이 세 단지나 뱃속에 들어갔으니 더 마신다면 무슨 수로 견뎌 내겠는가?
이때였다. 구천인은 갑자기 뭇사람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서 두 손을 합장하였다. 그는 마치 중이 참선이라도 하듯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는 숨결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한데 모았던 손을 떼어 앞으로 내밀고는 손가락을 곧게 펴 힘을 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의 열 손가락 끝으로부터 술이 콸콸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닌가. 얼마 안 되어 술집 바닥은 온통 뿜어져 나온 술로 질펀해졌다. 순간 구천인의 불룩하던 배는 홀쭉해졌고 얼굴에 떠돌
던 취기는 말끔히 사라졌다. 처음 상태로 되돌아온 구천인이 공손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손지, 자넨 내 여동생을 어디로 데려갔나? 좋게 말할 때 순순히 내놓는 게 좋을 거야!"
공손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구 방주님, 여동생을 만나는 건 쉬운 일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자기 뒤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장대한 체구의 사나이가 창가에 다가가서 밖에 대고 손을 저었다. 술집 앞에는 지붕을 씌운 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마차에서 한 처녀를 부축하여 내리고 있었다. 처녀는 날렵한 걸음걸이로 술집에 들어섰다. 층계를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처녀는 곧 모습을 드러냈다. 기막히게 아름다운 처녀의 용모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처녀는 무슨 까
닭에선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처녀는 두 탁자 사이에 섰다.
구천인이 반갑게 소리쳤다.
"천척아, 이리로 오너라!"
처녀도 구천인을 보더니 매우 반가운 기색이 되었다.
"오라버니……."
그녀는 설움이 왈칵 치미는 듯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여동생을 바라보는 구천인 역시 가슴이 쓰린 듯 간신히 말했다.
"천척아, 내가 이 곡준 녀석과 결판을 내겠다!"
그는 공손지를 매섭게 쏘아보면서 동생을 끌어당겼다.
공손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람에겐 정이란 게 제일 무서운 거지요. 제 생각엔 구 방주님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정을 떼어 버리지는 못할 겁니다."
구천인은 얼른 여동생의 기색을 살폈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구천인은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듣자니 절정곡에는 정화(情花)라고 부르는 기이한 꽃이 있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그 꽃에 원인이 있는 것 같군. 거 놈의 말을 들으면 천척이 정화의 독을 받은 게 틀림없어.'
그는 발끈해서 입을 열었다.
"공손지, 내 다시 한 번 경고하겠는데 자네 주제를 알라구. 그런 상판때기를 하고 내 여동생의 남편이 되겠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그래!"
공손지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나의 이 용모 때문에 저 여자와 배필이 되지 못한다는 말씀인가요? 좋소이다. 나의 외모 때문이라면 당장 보기 좋은 얼굴로 바꾸겠소이다."
그는 대뜸 탁자 위의 술잔을 집어 자기 얼굴에 끼얹었다. 그는 술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구천인을 쏘아보다가 몸을 돌려 두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피부가 한 껍질 벗겨져 나갔다. 뒤에 섰던 사람이 수건을 넘겨주자 그는 수건으로 얼굴을 말끔히 닦은 다음 몸을 돌렸다. 순간 구천인과 뭇사람들은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손지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구양봉도 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한편 우스운 감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공손지가 미남으로 변하긴 했지만 열네댓 살밖에 안 되는 너무나 어린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린 모습의 사내가 구천척과 혼사를 치른다는 것도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 가운데서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구천척이었다. 그녀가 공손지를 처음 만났을 때도 공손지의 얼굴은 추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몸에 정화의 독을 입은 탓에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틈엔가 그를 연모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녀가 마음을 다잡으려 하면 할수록 정화의 독은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터에 공손지가 비록 용모는 말끔하고 고와졌으나 열네댓밖에는
안 돼 보이는 어린 소년이 되자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저렇게 어린 사람을 어찌 남편으로 섬길 수 있겠는가?
구천척은 공손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물었다.
"공손 공자님, 금년에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공손지도 서먹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금년 국월(菊月) 열이렛날이면 열다섯 살이 되오."
구천인은 여동생과 공손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도 따라 웃었다. 공손지만이 냉담한 표정으로 사람들이 웃음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는 눈길 한 번 떼지 않고 뚫어져라 구천척을 쳐다보았다.
구천척이 기가 막힌 듯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이제야 겨우 열다섯 살이군요, 이제야 겨우 열다섯 살……."
술집에 있던 사람들은 웃고 또 웃었다. 열다섯 살밖에 안 된 놈이 어른 행세를 하며 장가들겠다고 청혼하는 꼴이 너무도 우스웠던 것이다.
공손지가 구천척의 표정을 지켜 보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낭자, 나를 등지고 돌아서서 그날 옥에 오던 정경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오."
구천척은 그의 말대로 몸을 돌려 공손지를 등지고 그날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그날 구천척은 한 놈의 원수를 죽이려고 절정곡까지 추격하여 갔다가 공손지를 만나게 됐었다. 공손지는 구천척을 보자 마을이 흔들리며 마치 천인이라도 만난 듯한 기분이 되었다.
'이 처녀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곳으로 왔으며 또 이곳에 와서 뭣 하려는 걸까? '
이때 구천척이 말을 걸어 왔다. 그녀는 공손지에게 낯선 사람 하나를 보지 못했는가고 물었고, 두 사람은 서로 말을 주고받다가 정이 통하게 되었다. 공손지는 용모가 기막히게 아름다운데다가 무예까지 뛰어난 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강호에서 10년 가까이 돌아다녔으나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여태 보지 못했어. 평생에 한 번 만나 볼까말까한 저 여인을 그냥 놓아 보낸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지. 그렇다면 저 여인을 어떻게 붙잡지?'
공손지는 외모는 볼품이 없어도 아주 죄가 많은 사람이라 구천척을 데리고 곡구(谷口)에 있는 꽃밭으로 구경을 갔다.
구천척은 정화를 발견하고는 몹시 기뻐하며 몇 송이를 꺾어 들고 냄새를 맡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은 처음이에요."
그 꽃은 꽃송이가 탐스럽고 큰데다가 향기 또한 강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매혹시켰다.
공손지는 속으로 슬그머니 웃음을 베어 물었다. 그리고 한껏 정중한 자세로 말했다.
"이 꽃은 천하에 드문 꽃이오. 그대의 외모 또한 그처럼 아름다운데 이 꽃잎을 몇 개 맛보는 게 어떻겠소?"
구천척은 그가 자기의 미모를 칭찬해 주자 수줄은 듯 빙그레 웃었다.
"이 꽃잎을 먹을 수 있나요?"
공손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 꽃잎은 다른 사람이 먹어 봤자 쓸모가 없지요. 말하자면 나같이 못난 사람은 그것을 아무리 먹어도 무익하지요. 하지만 그대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꽃잎을 몇 개 먹으면 좋은 점이 아주 많아요."
"꽃잎을 먹으면 무슨 좋은 점이 있나요?"
"좋은 점이 아주 많지요. 향초(香草)는 미인이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이라고 굴원이 말한 바 있소. 미인의 아름다움은 형(形), 신(神), 색(色) 세 가지에 달려 있는 거요. 그대의 아름다운 모습과 뛰어난 자태는 형(形)이 아름답다는 것을 말해 주오. 또 그대가 그토록 얌전하고 부드러우며 밝게 웃을 줄 아는 것은 신색(神色)이 아름답다는 것을 말해 주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외모가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말하나 여인이 갖고 있는 향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
소. 천하의 미색이란 모두 이 향기 속에 있는 것이오. 그대가 이 꽃잎을 먹게 되면 양귀비처럼 될거요."
그러자 구천척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양귀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뭐예요?"
공손지가 말을 이었다.
"그대한테 솔직히 하는 말이지만 우리 가문의 선조는 바로 안사(安史)의 난을 피하여 이 절정곡에 정착하였다오. 우리 가문의 선조는 일찍 천보(天 ) 연간에 벼슬을 했었기 때문에 양귀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소."
그는 말끝에 시 한 구절을 읊기 시작했다.
봄 추위에 맑은 물에서 목욕하니
온천물에 씻겨 살결 부드러워지네.
시구를 읊고 나서 공손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양귀비의 가장 아름다운 점은 자태와 정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살결에 있다오. 양귀비는 살결이 각별히 부드럽고 온통 향기로 그윽했다고 하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양귀비의 몸에서 나온 때는 연지로 사용될 정도였다고 하오. 그것이 무엇에서 연유했는지 아시오?"
"저도 그런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사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아요. 무엇 때문이었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건 양귀비가 바로 이 정화를 먹었기 때문이오."
구천척은 공손지의 이 말을 곧이들었다. 그녀는 수중에 있는 정화가 아름답고 향기가 훌륭한 탓에 그 꽃에 독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자기의 미모를 양귀비에 비교하며 부추기는 데야 어찌 그 꽃을 먹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구천척은 꽃잎 한 개를 떼어 내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어 보았다. 별로 특이한 맛은 없이 처음에는 좀 달짝지근하던 것이 후에는 약간 쓴맛이 났다. 하지만 그 쓴맛도 심하지는 않아 그런대로 참아 낼 만했다.
공손지는 그녀가 꽃잎 몇 개를 다 삼킨 것을 보고 또 입을 열었다
"됐소. 한 가지 잊은 게 있는데 그대가 이 꽃을 먹은 이상 절대로 사내 생각을 해선 안 되오. 그러면 병이 나게 되오."
그 말을 들은 구천척은 당장 안색이 변했다. 멀쩡한 처녀가 어찌 남녀간의 정이며 사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자 문득 무림의 젊은 협객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그녀 주위를 싸고 돌며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법석을 떨던 일들이 하나하나 생각났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 순간 그녀는 갑자기 펄쩍 뛰었다. 천만 개의 바늘이 심장을 찌르는 듯 아팠던 것이다. 그녀는 통증을 견디다 못해 공손지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이 나쁜 놈아! 도대체 이게 무슨 꿍꿍이속이냐?"
공손지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구 낭자, 난 그대를 보자마자 우리 절정곡에 좋은 일이 생기게 될 줄 알았다오. 그대는 아름다운데다가 무예까지 뛰어난 처년데 나한테 시집오지 않겠소?"
구천척은 어이가 없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공손지, 웃기지 좀 마세요. 당신 같은 사람은 돈 몇 푼 들여서 아무 집의 계집종이건 데려다가 자식이나 보게 되면 다행인 줄 아세요. 나한테 장가들려는 건 망상이에요."
공손지는 속으로 화가 치밀었으나 드러내지 않고 서글픈 어조로 말했다.
"구 낭자, 낭자 말이 맞소. 나의 이 추한 외모 때문에 누구도 내게 시집오려고 들질 않지. 그러니 당신이 나를 불쌍히 여겨 시집와주오."
구천척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끝없이 욕설을 퍼부어 댔다.
공손지는 젊은 여인이 이처럼 심한 욕설을 퍼부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공손지는 노기를 간신히 눌러 참으며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시집오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처럼 사납게 굴 것까지야 있소? 구 낭자, 평소에 당신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이 당신을 좋아하던 일을 생각하노라면 화가 누그러질 거요. 방금 내가 한 말은 없었던 일로 합시다."
그가 이렇게 나오자 구천척도 더는 화를 낼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사람과 혼인한다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이 사람은 생긴 건 저래도 확실히 이 절정곡의 주인이 아닌가. 추한 사람도 아내는 얻어야 하는 거다. 저 사람이 나의 미모에 반하여 잠시 나한테 장가들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그녀는 마음을 약간 진정하고 평소에 강호에서 만나던 젊은 영웅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자기한테 친근하게 굴던 일을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이 절로 흥분되면서 느닷없이 온몸이 가시로 찌르는 듯 아파 왔다. 그녀의 입에선 자기도 모르게 절로 신음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땅바닥에 드러누워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을 쳤다.
이를 지켜 보던 공손지가 큰소리로 말했다.
"구 낭자, 낭잔 정말 바보요. 내가 주의를 주었는데도 왜 말을 듣지 않소? 이제 정화의 독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 날로 더 심해지고 해독약도 없어 죽게 되오."
구천척은 견디다 못해 다시금 욕설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공손지는 구천척의 몸에 있는 대혈을 눌러 놓은 다음 그녀를 품에 안고 정화가 무더기로 피어 있는 순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구천척을 땅에 내려놓고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여인이란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로구나. 보면 볼수록 사람을 심취하게 만들거든."
그는 구천척의 자태를 자세히 살펴보며 계속 중얼거렸다
"옛사람들은 꽃을 여인에 비겼다만 오늘에야 여인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되었구나."
그는 구천척의 볼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요 귀염둥이야, 하필 정화를 먹을 게 뭐냐? 절정곡에서는 절정이란 두 글자를 명심해야 하는 거야. 일단 정을 가지기만 하면 이 곡에선 편안히 보낼 수 없거든. 한번 생긴 정은 끊어 내기가 어려우니깐 말야."
그는 천천히 몸을 기울여 구천척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개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구천척은 눈물만 흘렸다. 그녀는 수치심을 느꼈으나 눈을 꼭 감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공손지는 두 손으로 구천척의 젖가슴을 집요하게 주물러 댔다. 그가 손가락 끝으로 젖꼭지를 가볍게 건드릴 때마다 젖꼭지는 구천척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빳빳하게 일어섰다.
여동생에게 이런 일이 있은 줄을 구천인이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그는 여동생이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풀이 죽은 채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
"천척아, 너 정말 저 놈한테 시집을 가려느냐? 네가 한마디만 해라. 시집을 가겠다고 한다면 저 놈을 놔둘 게고 시집을 안 가겠다고 한다면 저 놈을 죽여 버릴 거야!"
구천척은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외쳤다.
"싫어요, 싫단 말이에요!"
구천인은 동생이 싫다고 말하자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좋다, 좋아! 내 여동생이 네 놈과 같이 살지 않겠다고 했어!"
그는 부릅뜬 눈으로 공손지를 쏘아보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저 애가 널 싫어하니 넌 죽는 길밖에 없다!"
구천인이 한 발자국 내디디며 공손지의 머리에 일장을 먹이려는 찰나였다.
"오라버니, 잠깐만요!"
구천척이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구천인의 장은 이미 공손지의 머리를 후려친 뒤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느닷없이 구천척이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신음을 삼켰다.
구천인은 뜻밖의 상황에 놀라 동생에게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냐? 뭐가 잘못되기라도 한 거냐?"
구천척이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우물거렸다.
"할말이 있으면 어서 해!"
구천인이 답답한 듯 발을 굴렀다.
구천척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구천인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무엇인가 애걸하는 빛이 역력했다.
"오라버니……."
"그래, 어서 말을 해라.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
"오라버니, 저 사람을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공손지에 대한 분노와 연민이 뒤엉킨 심정으로 안타깝게 말했다.
공손지가 쓴웃음을 지으며 구천인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신이 내가 사랑하는 구 낭자의 오라버니이기 때문이지 당신의 철장공력을 겁내서가 아니오,"
그는 말하다 말고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내 검을 가져오너라!"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두 가지의 병장기를 넘겨주었다. 하나는 검이었는데 색깔이 까맣고 매우 가벼워 보였으며 다른 하나는 톱날로 된 금칼이었는데 그것은 아주 무거워 보였다. 공손지는 두 자루의 병장기를 손에 쥐더니 늠름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구 방주, 오늘 난 당신과 승부를 내겠소!"
구천인이 가소롭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네 놈이 나와 겨뤄 보겠다구? 오래 살다보니 별 재미있는 일이 다 생기는구나."
"구 방주, 당신의 철장공력이 아무리 뛰어나기로서니 이렇게 날 깔봐도 되는 거요?"
"네 놈이 병장기를 내드는 걸 보니 무예를 약간 알긴 아는 모양인데, 난 네 놈과 싸우는 것으로 내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그러니 네가 나한테 재주를 좀 보여 줘 봐라."
구천인의 말에 공손지의 뒤에 섰던 몇몇 사나이들이 욱하고 달려들어 구천인과 싸우려 했다. 공손지가 얼른 그들을 만류했다.
"구 방주가 날 존중한다니 내가 몇 가지 법수를 보이겠소. 방주께서 가르쳐 주시오."
공손지는 말을 마치더니 양손에 각각 병장기를 나눠 들고는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연거푸 스물한 가지 동작을 해 보였는데 두 개의 칼날이 엇갈리며 나는 듯이 움직였다. 이를 지켜 보던 구천인은 잠시 멍청해졌다. 공손지가 이렇듯 훌륭한 무예를 갖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공손지가 구천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구 방주님, 당신 보기에 어떻습니까? 나의 이 '음양도란인법(陰陽倒亂刃法)'에 무슨 허점이라도 있다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구양봉은 그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일심이용(-心二用), 쌍심격물(雙心格物)의 방법으로서 음(陰)을 양(陽)으로 변화시키고 양을 음으로 변화시켜 음양을 교차적으로 사용하는 법수였다. 사람들이란 무릇 무예동작을 쓸 때 모두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법수를 취하게 된다. 빠르게 되면 그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다. 칼과 검을 쓸 때면 반드사 상대방에게 착각을 일으켜야 하는데, 금칼이 날아올 땐 그것이 무거우니 속도가 느릴 것이고 흑검이 날아올 땐
그것이 가벼우니 속도가 빠를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구양봉은 이 공손지가 내력이 부족한데다가 병장기를 쓰는 법수가 숙련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읽어 냈다.
그러나 구천인은 구양봉의 생각과는 달리 공손지에 대해 찬탄을 금치 못했다.
"훌륭하군, 훌륭해. 자네가 칼과 검을 동시에 다를 줄 아니 실력이 대단한 편이야!"
공손지가 입을 열었다.
"제가 구 낭자한테 청혼하는 건 마음 깊숙이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오니 방주께서 소망을 이루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공손히 예를 올렸다.
구천인이 대꾸했다.
"자네의 검과 칼 쓰는 법수는 좀 자리가 잡힌 듯하나 자네의 내력은 아직 약해."
"그렇지요. 그렇고말고요."
공손지는 얼굴에 웃음을 바르며 얼른 대꾸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보고 내력이 약하다구? 그럼 이 세상에 네 놈처럼 한 손으로 물이 가득 담긴 구리독을 들고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어야 한단 말이냐? 나한테 그만한 천생의 신력이 있었다면 '음양도란인법' 정도는 벌써 익히고도 남았을 거다.'
구천인이 또 입을 열었다.
"이걸 좀 보게나."
그는 품속에서 네모 반듯한 옥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구천인은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말을 이었다.
"사람이 내력이 없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거네. 마치 비단옷을 입고 밤에 나선다거나 대낮에 도적질을 하는 것처럼 아무 효과도 못 보고 일만 망쳐 먹게 되는 거야. 내공을 잘 닦는 것이 무예 연마의 기본이라는 걸 자넨 알아야 해."
구천인이 탁자 위에 놓은 옥석을 오른손으로 힘껏 내리치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세 조각이 났다.
"보게. 바로 이래야 한단 말일세."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탄성을 질렀다.
공손지도 그가 일장에 옥석을 바스러뜨리는 것을 보자 두려운 마음이 되었다.
'저 놈이 저 장법으로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벌써 죽였을 거야. 그런데 날 내버려두는 것을 보면 자기의 여동생과 같이 살게 할 생각이 있는 거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구천척에게 읍하면서 말했다.
"구 낭자, 그대가 실수로 정화의 독을 입었으나 불행히도 내겐 해독제가 다 떨어지고 없소. 그러니 구 낭자는 나를 따라 절정곡에 갈 수밖에 없겠구려. 시간을 끌다가는 멀지 않아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요."
구천인이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동생에게 말했다.
"천척아, 넌 다시 저 사람을 따라가거라. 며칠 후에 내가 절정곡에 널 보러 가겠다. 이 친구가 우리 구씨 가문의 사람을 함부로 하진 못할 거다."
말을 마친 그는 한바탕 요란하게 웃어대더니 왼손에 구리독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부서진 옥석들을 끌어 모아 쥐고는 층계를 내려갔다.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내가 화산에 가 무예시합을 하게 된다면 가장 강한 적수는 아마도 이 철 장수상표 구천인일 것이다. 이 놈을 뒤따라가서 틈을 봐 싸워야겠다. '
구양봉은 얼른 몸을 일으켜 구천인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구천인의 걸음걸이가 어찌나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가지를 벗어나 강변에 당도하였다. 구천인은 나룻배를 불러 타고 대안으로 저어갔다. 구양봉은 구천인을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다른 배 한 척을 찾아냈으나 그가 배를 타고 대안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구천인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화가 나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길가에 옥석 한 개가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고 난 구양봉은 아주 기뻤다. 그것은 바로 구천인이 술집에서 박살낸 그 옥석의 부스러기였던 것이다.
구양봉은 옥석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방금 땅 위에 놓여 있을 때는 온전하던 것이 손으로 잡는 순간 그대로 부서졌다. 멍하니 옥석을 바라보던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옥석은 겉보기엔 밀정해도 이미 부서져 있는 것이었다. 구천인은 근본적으로 뛰어난 공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기꾼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때였다. 구천인의 모습이 다시 눈에 띄었다. 그는 강물 위를 나는 듯이 걸어가고 있었는데 강폭이 수십 미터는 될 것 같았다. 구천인이 사기꾼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뛰어난 경공을 갖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구양봉은 즉시 몸을 일으켜 강변으로 달려갔다.
강물을 자세히 살펴보고 난 그는 또다시 너털웃음을 웃었다. 먼 곳에서는 똑똑히 볼 수 없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두 미터씩 사이를 두고 나무등걸 한 개씩이 박혀 있는 게 눈에 피었던 것이다. 수면에 약간 잠겨 있을까말까 한 이 암교(暗橋)는 먼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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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난 무협소설잘읽엇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