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학 2024 여름호 -지난 계절의 시- 서평>
발견의 미학, 깨달음의 미학, 표현의 미학
김광기(시인)
시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되어 작품이 조성해 놓은 정서에 취하거나 작품에서 생성되는 깨달음의 의미에 취하게 된다. 그리고 좀 지나서 정신을 가다듬고는 함께 시를 쓰는 입장에서 무엇이, 어떤 측면이 나를 취하게 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다시 찬찬히 그 작품을 들여다보면 그 작품을 구성한 요소인 발견의 미학, 깨달음의 미학, 표현의 미학적인 측면들이 특징적으로 드러나 있음을 알게 된다. 작품 속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특징적으로 도드라지게 보이기도 하지만 심도가 있고 아우라가 짙은 작품들을 살펴보다 보면 이 세 가지의 요소가 적절하게 버무려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시는 궁극적으로 미학을 구현하는 장르라 할 수 있다. 시의 미학은 시학 속에서 발현되고 시학은 철학을 바탕으로 하지만 현대시에서 이를 구성하는 첫 번째 단계는 발견의 미학이 아닐까 한다. 무언가 시감이 되는 요소를 발견하고 시인은 번뜩이는 재치로 그것을 작품화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을 좀 더 심도 있는 미학으로 승화시키고자 자신에게 던져진 화두 같은 깨달음의 요소들을 되새기며 사유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서 독자에게 의미 깊게 다가갈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두며 표현의 미학에 몰두하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연마하듯 오랜 시간 동안 이러한 과정들을 반복적으로 되살펴서 완성 시킨 작품들을 문예지에 발표한다. 그렇게 발표한 작품들이 각기 재능들을 뽐내며 지면에 정렬되어 있다. 그 작품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시의 숲속을 거닐다가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마는 작품들을 골라 찬찬히 시 읽기를 시도한다.
골목길에 어둠이 찾아오면
낮 사이 깊은 잠에 빠졌던 외등이
화경처럼 눈을 번쩍 뜬다
해종일 일에 지쳐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이들을 맞이하며
수고했어요, 오늘도!
불빛으로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 준다
그러면서 끝까지 잊지 않는 말
힘내요 내일도!
- 김월준, 「외등」 전문
김월준 시인은 해 저물 무렵 골목길에 있는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한적한 골목길에서 누군가의 길을 밝혀주는 “외등”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그 “외등”은 곧바로 자신과 동일화된다. 사물과 화자가 하나가 되는 물심일여를 통해서 온종일 밖에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다. 시인은 가로등에서 불이 켜지는 것을 보고 “화경처럼 눈을 번쩍” 뜨듯 시감을 발견하고는 어쩐지 외로이 고적하게 서 있을 것만 같은 가로등을 “외등”이라 표현하면서 외등(外燈)을 화두로 삼아 깨달음의 세계에 돌입한 듯하다. 쓸쓸해 보이지만 누군가에게 저 가로등처럼 작은 위로라도 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그렇게 하고 싶다는 시인의 시적 의지가 독자에게 따듯하게 다가가면서 포근한 위로를 주고 있다. 일상적이고 가볍게 스쳐 지날 수 있는 삶의 순간이 시인의 눈에 비치고 기록되면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힘이 되고 있다.
저렇게
아름답게
한 생을 마감하는구나.
- 오순택, 「떨잎」 전문
오순택 시인의 「떨잎」을 읽으면 짧고 간결하지만 큰 이미지에 빠지는 환각에 취하게 된다. 제목인 “떨잎”은 시인이 만들어낸 조어(造語) 같기도 한데 읽자마자 ‘떨어지는 잎’을 연상하게 된다. 흔하게 쓰는 말로 ‘낙엽(落葉)’이라는 말이 있는데, 시인은 순우리말을 줄여서 “떨잎”으로 쓰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제목에서부터 한눈에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흡인력이 있다. 그리고 3행이지만 한 문장밖에 되지 않는 “저렇게/ 아름답게/ 한 생을 마감하는구나.” 하는 시어가 제공하는 풍경의 안으로 들어가서 독자 스스로 사유하게 된다. 그 풍경 속에는 나무들의 군락이 있고 형형색색의 낙엽이 지는 늦가을의 풍경이 있다. 독자들이 지금까지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 속의 낙엽 지는 거리가 연상되는 이미지가 펼쳐지게 된다. 여백의 미(美)가 있는 시, “아름답게/ 한 생을 마감하는” 사물들에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깨달음의 요소들이 지금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멈추게 한다. 짧고 간결하지만 제목과 본문 사이의 의미가 짙고 시행의 여운이 길게 남는 시, 발견의 미학, 깨달음의 미학, 표현의 미학적인 요소들이 고루고루 안배되어 응축된 시로 읽힌다.
무거우면 안는다, 책 더미든 슬픔이든
두 팔에 품는 순간 수굿이 실려 오는
적막도 양식만 같아 굽이굽이 들어주듯
들어보니 이순(耳順) 따위 애먼 후문이라
갓 닿은 시집들에 귀나 더 맑히려니
시경쯤 몰라도 좋은 호젓하니 호사라고
호사 같은 소리하네, 모기가 좀 개겨도
위리안치 고치 짓는 별짓처럼 오호라
탱자는 못 품을까나 혹하면 또 별이라니
- 정수자, 「호젓한 호사」 전문
정수자 시인의 작품 「호젓한 호사」는 시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평시조 3편이 붙어 하나의 시적 플롯을 갖고 있다. 거기에 각각의 행마다 연 구조를 이뤄 행간의 의미를 극대화한다. 하지만 3행씩 끊어서 읽어보면 각각의 그것대로 의미가 있고 다 함께 붙여 읽어보면 또 그것대로의 의미가 한 플롯으로 흘러간다. 그러면서 각각의 행이 주는 여운, 또는 평시조 3편으로서의 여운이나 전체적인 1편으로서 여운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시적 구성의 기교가 실로 현란한 시라 아니할 수 없지만 한 행 한 행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시적 기운에 빠지게도 되고 슬픔과 적막, 위리안치(圍籬安置) 같은 화자의 고난이 각각의 행간에서 재치있게 변주되는 것을 맛보게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호사 같은 소리하네” 하는 화자의 시니컬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탱자는 못 품을까나 혹하면 또 별이라니” 하는 마지막 행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식물의 가시 중에서 탱자나무 가시만큼 단단하고 뾰족한 가시가 또 있을까 싶다. 그 가시를 품는 행위인 혹(惑) 또는 혹(酷)에서 느끼는 “별”의 의미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여운을 갖고 있다. 이 작품은 발견의 미학, 깨달음의 미학이 바탕을 이루고 있지만 표현의 미학이 특징적으로 도드라진 작품으로 보인다.
‘영~차’ 하고 소리를 내보면
신기하게도 없던 힘이 생긴다
기대어 비빌 시대의 언덕들이 사그라들고
이제 정말 포기하고 싶은 무기력이 어깨를 짓누를 때
영~차
주술 같은 이 한 마디에
절망은 밀려나고 이상한 용기가 솟는다
싸워서 상대를 꼭 이기라는 ‘파이팅’ 아니고
약자끼리 서로 힘을 합쳐 밀어올려 보자는
영~차
늘어진 어깨 다시 올라가고
굽어가던 등허리 활짝 펴지는
봄햇살 같은 집단의 아이덴티티
자본이 곧 힘이라며 양극화를 부추기는
이리 떼의 소굴 같은 막막한 이 시대
정치 경제 사회 인문… 그 모든 불황의 늪에 빠져
공황장애 우울증으로 허우적거리는 모든 이들에게
영~차
마법 같은 이 한 마디
날마다
날마다 송신한다
- 임애월, 「영~차」 전문
임애월 시인의 「영~차」를 읽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다 함께 고난을 밀어붙여 타개하자는 메시지에서 힘을 얻게 된다. 단순하고 단조로운 말이지만 “영~차”라는 “주술 같은 이 한 마디에/ 절망은 밀려나고 이상한 용기가 솟는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영~차”라는 말을 그동안 많이 써오기도 했고 어려운 의미가 있다고 조금도 생각지 않았지만 “영~차”라는 말 속에 이렇게 “마법 같은” 힘이 있는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듣고 보니 ‘아, 그렇지!’ 하는 깨달음을 주는 말이지만 시인은 이러한 의미를 발견해서 ‘우리, 함께 고난을 극복해보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시에서 보일 수 있는 발견의 미학적 측면이 도드라진 게 아닐까 한다. 그리고 언뜻 보면 일상적인 언술 같지만 “기대어 비빌 시대의 언덕들이 사그라들고/ 이제 정말 포기하고 싶은 무기력이 어깨를 짓누를 때”나 “늘어진 어깨 다시 올라가고/ 굽어가던 등허리 활짝 펴지는/ 봄햇살 같은 집단의 아이덴티티/ 자본이 곧 힘이라며 양극화를 부추기는/ 이리 떼의 소굴 같은 막막한 이 시대”와 같은 환유 특성의 시적 표현은 시인이 얼마나 표현의 미학적 특성을 살려서 전달하려 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또 그러한 시적 표현, 시적 플롯이 독자들에게 가벼운 듯하지만 심도 있게 전달되며 깨달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봄이 가기 전에
비가 오고
벚꽃들 몇 바람에 쩍 달라붙는다
저녁의 산책은 초저녁 길모퉁이를 돌아
몇 개의 잠정적인 꽃들을 지나쳐
봄내음에 떠밀려온 신선한 공기는
돌 틈바구니에 피어있는 풀꽃들로 환하다
작은 것들, 낮은 울타리 너머 더 낮은 풀숲들
그리고 또 다른 작음들,
내가 거인이 되어 어느 소인국에서의 날들처럼
비좁은 곳으로 오고가는 길이거나
땅콩 속, 연가의 멜로디처럼 흘러나온 시간은 고아하다
작은 것들은 그러나 주눅 드는 일이 없다
너무나 섬세해서 단단해서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불멸의 천형들,
나는 봄이라는 따뜻한 저녁에
가까운 공원을 걷다가 마주친 풍경들을 잊을 수 없다
- 홍문숙, 「봄, 저녁의 산책」 전문
홍문숙 시인의 「봄, 저녁의 산책」을 읽으면서 독자는 시인과 함께 시적 산책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시인이 나직하게 들려주는 삶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봄에 대해서 생각하고 “벚꽃들”과 “몇 개의 잠정적인 꽃들을” 만나다가 “작은 것들, 낮은 울타리 너머 더 낮은 풀숲들” 사이에 있는 작은 존재들에 대해서 생각하며 ‘작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성찰을 하게 된다. 물심일여(物心一如)가 된 나와 사물들의 존재적 미미함 속에서 겸허함을 갖게 된다. 하지만 “땅콩 속, 연가의 멜로디처럼 흘러나온 시간은 고아하”여 “작은 것들은 그러나 주눅 드는 일이 없”고 “너무나 섬세해서 단단해서/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불멸의 천형들”처럼 누구도 존재를 부정하지 못할 힘을 갖는다. 미세하고 미세한 “작음”이란 것이 하늘에서 내려지는 바꿀 수 없는 형벌 같은 것이겠지만 ‘작다’라는 것은 “너무나 섬세”하고 “단단해서” 천형과 같은 운명을 헤쳐나갈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시행의 플롯이 잔잔하지만 파동이 크고 화자의 목소리가 나직하지만 그 울림이 크게 느껴진다. 그래서 화자와 함께 “나는 봄이라는 따뜻한 저녁에/ 가까운 공원을 걷다가 마주친 풍경들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새기게 된다.
시인들은 작품에서 발견의 미학, 깨달음의 미학, 표현의 미학적인 특성들이 도드라지는 자신만의 시적 형상, 시적 세계를 갖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작품 한편 한편마다 또 다른 시작이 있고 그 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 작품을 쓸 때마다 시적 수행을 끊임없이 하며 초심으로 앉아 시를 쓰고 있다. 그 작품의 첫선을 보이는 문예지라는 마당에서 다시 만날 아름다움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