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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제주문화유산답사회 임영훈님의 쓴글입니다.
잠시 빌려다 공부하려고 하오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한 여름의 백제
8월10일(금) 왕 흐림, 왕 비
올림픽의 열풍이 불어 새벽까지 달리고 아침이면 졸린 눈으로 사람을 대하는 일상의 연속이 일주일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메달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설레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알람을 맞추어 놓은 휴대전화가 울리고 여지없이 눈을 뜨면서 이내 허리하고 몸을 돌려 보았다. 끊어지는 통증으로 잠을 못 이루고 뜬 눈으로 새웠지만 백제의 고도와 만난다는 설레임이 통증을 이겨 냈는데 아침이 되어서는 그 마음이 달라지려고 한다.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하였다.
침대에서 엉금엄금 기어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인간이 이리도 약한 존재인데, 조그만 통증에도 놀라고 아파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한없이 약한 동물인데, 자는 동안에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으면, 갔으면 좋겠다고 바래고 바랬는데 아침은 통증을 가져가지 않았다. 어제 놀란 허리 근육이 더욱 뭉친 모양이다. 가만히 누워서 오늘 향방을 결정하였다.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상황에서는 답사가 아니라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 되었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 아니라 지옥에서 나를 부르는 콕콕 찌르는 통증이 고통스러워 회원님 모두에게 걱정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 고집만 내세워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익산시외버스터미날에서 광주로 첫차를 타고 가서 제주행 비행기를 타기로 마음을 먹고는 간신히 움직였다. 다행이도 모텔 코 앞이니 망정이었다. 7,300원 이면 그동안의 여비를 지불한 것을 비교하면 저렴하였다. 문제는 광주에서 제주행 비행기가 있는가였다. 금요일인데다가 휴가철이니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였다. 휴대전화에서 검색을 해보았다. 전 좌석이 매진이었다. 몇 번을 검색하고 전화해도 마찬가지였고 휴가철이라 더욱 그렇다는 상담원의 말을 듣고는 다시 방향을 정해야했다. 심하게 허리를 비트는 일도 없었고 걸을 때도 조심 조심 걸어다녔는데, 무거운 물건은 모두 황제폐하가 옮기고 힘쓰는 일은 전혀 없었는데 왜 이런일이 일어 났는지 모두지 상상이 되지를 않았다.
8일날 하루종일 여수 엑스포를 관람할 때도 조심 조심했었다. 요통예방을 외치고 교육을 하고 있는 강사가 요통에 걸리다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허리를 쓰지 말고 다리 힘으로 물건을 드세요, 스트레칭 하세요. 피교육생에게 누누이 강조를 하고 다녔건만 도무지 체신이 서지를 않는다. 그나저나 광주에서 제주행 항공편은 물론이고 청주에서도 없었다. 여행의 즐거움이 편안한 여정에서는 생길 수 없다고들 한지만 고통의 여정은 빨리 포기하는 편이 편익분석을 하면 금방 나오는 셈이다. 조금씩 허리를 움직여 보았다. 강의 때마다 외치고 다닌 스트레칭을 조심스럽게 조금씩 해 보았다. 그 순간 아침이 되었다고 바닥을 청소하시는 분이 내가 걸리적 거리는지 신경질 적으로 대걸레는 좌우로 훔쳐댔다. 발끝에 대걸레가 닿는 순간 갑자기 놀라 스트레칭하던 동작이 무너지면서 자세가 흔들렸다. 그때 그리도 고통스럽던 통증이 완화된 감이 전달되었다. 앉을 때 일어 설 때 통증이 확실히 누그러진 정도가 확연하였다.
다시 마음이 달라졌다. 7시30분이니 1차 목적지인 왕궁리유적지에서 만나면 11시 30분까지는 4시간이 있으니 병원에서 일단 물리치료나 침을 맞아 보고 정 안되면 제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익산에서 광주로 7시55분발 표를 샀는데 얼른 반환해달라고 하였다. 매표원이 요금의 10%를 공제(730원)한다면서 800원제하고 돌려준다. 70원을 돌려 달라고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거스름돈 더 받으려고 거스르다가는 오늘의 일정이 망가질 것 같은 예감도 있고 그나마 청소원 덕분에 통증이 완화되었으니 물 흘러가듯 터미널을 나왔다.
왕궁리유적지까지 20km되었다. 익산 시내를 둘러 볼 요량으로 버스를 기다렸다. 60번대(60, 61, 62, 63, 64, 65번) 버스를 타면 금마까지 간다. 금마에서 왕궁리유적지까지는 걸어서 20분. 왕궁리유적지 홈페이지에 그렇게 적혀있다. 2008년12월에 왕궁리 유적지 박물관이 세워졌으면 2012년 8월10일인 지금은 버스 한 편이라도 정차시켜야 하는 배려가 아쉽다. 요즘 세상에 많은 사람이 승용차로 다닌다고는 하지만 버스로 다니는 소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소수를 위한 배려가 많을수록 아름다운 사회가 된다는 것을 누군가는 알아주었으면 한다.
하여간 버스를 타고 금마터미널에서 왕궁유적지로 걸어간다고 작정을 하고는 버스에 올랐다. 간간하던 비가 장대비로 내린다. 찌는 날씨 보다는 답사하기 좋은 분위기로 간다. 시원한 버스, 요금은 1,400원. 익산 시내를 돌고 돌아 왠간한 곳은 다 지나는 것 같다. 보석가공으로 유명한 익산이다. 백제 왕궁에서 발굴된 갖가지 유물을 뜯어보면 보석 세공기술이 지금까지 그 뿌리가 잊혀지지 않고 전해온다는 확신이 들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가져온 지도와 버스가 가는 길을 맞춰 보면서 나름대로 여행을 즐기기를 30여분, 금마터미널이 종점이었다. 허리를 공들여 옮기면서 하차하였다.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간판이 보였다. 반쯤 앉은 듯 반쯤 일어선 듯한 자세로 눈알만 치겨 세워서 보았다.
백제의원, 부설물리치료실. 시계를 보니 9시30분. 안성맞춤이라는 단어가 이 대목에서 적절하였다. 드드드드 진동이 울리는 물리치료를 따끈하게 받으면 뭔가 새로운 전기가 생긴다는 기대감으로 문을 열었다. 벌써 병원은 만원 사례. 할머니 할아버지로 대기실이 오롯이 만원이다. 시골 동네에서 치과를 개업하면 단기간에 부자된다고 하였는데 치과가 아니라 의원을 개업해도 부자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닐까. 의사의 진료를 완전 초간단하였다. “일어설 때 조심하세요, 물리치료 받아 보실래요?” 전문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의사로서의 결정이 아니라 권유를 한다. 안되면 환자가 원해서 한 것으로 돌리려는 심보였는지, 요통이라는 것이 원래 완치가 어려우니 그럴만도 하겠다만 책임감이 없는 언행에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리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을 집니다. 물리치료 받고 가겠습니다. 아쉬운 쪽이 내가되고 보니 지푸라기라고 잡아야 했다.
2박3일의 여정을 소화하려면 오늘 단단히 몸을 추슬러야 했다. 1시간에 걸친 물리치료와 약을 받고 나니 한결 몸을 돌리는 것이 부드러웠다. 파스 액을 등에 온통 도포해서 화끈거리면서도 시원한 느낌이 전신을 타고 오른다. 순간 순간 통증이 허리에서 머리 끝으로 전달되기는 하였지만 그 빈도가 훨씬 덜 하였다. 백제의원에서 나와 처방전에 있는 약을 사고 보니 11시가 되었다. 이제 걸어가면 딱 맞겠다고 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겨 답사를 시작하려했다. 그런데 걷지 말라는 하늘의 훈시가 비를 타고 강하게 전달되었다. 한 두 방울이던 비가 장대처럼 내린다. 택시의 도움을 얻어 1차 목적지인 왕궁리유적지로 갔다.
장대비는 설레임을 싣고 택시 창문을 연신 두드린다. 그 설레임을 쓸어내린다고 와이퍼는 좌우로 바삐 움직이고, 내가 장거리 손님이기를 바랬던 택시기사의 바램도 같이 좌우로 흩어지고 말았다. 왕궁리 박물관 홈페이지에 금마터미널에서 택시로 3,000원이면 간다고 덧붙이면 그나마 위안이 되겠다. 11시 5분이니 조금 있으면 일행을 만난다는 설레임이 백제의 고도를 답사한다는 기대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익산문화유산 해설사가 다가왔다. 반갑게 인사하는 첫인상에서 백제의 위풍당당한 기세를 읽을 수 있었다. 제주에서 왔습니다하고 답례를 하니 좔좔좔 왕궁리유적지를 설명한다. 우리나라 10곳의 유적지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는데 11번째로 등재하기 위해서 잠정 등록하였다는 대목에서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듯하였다. 백제하면 항상 멸망한 나라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라도 멸망을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잠재의식이 있었지만 오늘은 멸망이 아니라 백제가 살아 움직이는 문화로 나를 함락하고 말았다. 통일신라가 부각되는 반면에 경쟁에서 밀렸다고 묻혀버린다면 상위 1%만 우대하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골고루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기다리는 동안 찬찬히 둘러보았다. 41년 동안 재위한 백제 무왕의 왕궁터라고 한다면 오히려 익산시 전체가 백제의 문화유적지라고 간주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백제의 문화를 잘 살릴 방법이 없네.
전화가 드디어 왔다. 빈센트님이었다. 집단이 움직이면 항상 지체되고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기 마련인지라 느긋한 기분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원래 보다 1시간 30분이 지체되었으니 당사자 또한 얼마나 애간장이 녹았을까. 점심 식사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답사를 준비할 때 분명히 지역에서 특색있고 맛있는 음식점도 조사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현지에 오면 조사하고, 준비했던 사항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래는 마약, 마약밥으로 유명한 “본향”을 가기로 되었지만 시간이 많이 지체된 관계로 간단하게 아무곳이나 들어가 요기를 하지고 난리였다. 왕궁리유적지에서 합류하여 같이 이동을 해야 하는데 제2탐이 도착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헤매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1팀이 일단 근처 음식점에서 요기를 하고 제2팀이 도착하면 합류하는 것으로 하였다. 내가 물리치료를 받았던 금마터미널 쪽으로 가서 음식점을 찾았다. 정말로 조그만 동네라서 변변한 음식점이 없었다. 빙글빙글 돌다가 또 지치고 말았다. 이럴 바에야 원래 가려고 했던 본향으로 가자는 의견일치를 보았다. 아쉽지만 제2팀은 별도로 식사하는 것으로 했다. 제1팀에는 여성이 네 명, 남성이 세 명, 대세는 여성이 원하는 곳, 마로 유명한 본향으로...... 점심 먹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빗줄기는 굵어지고 본향을 찾는 작업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익산시 신동 139-6을 내비게이션에 입력하면 되는데 대쉬(-)를 입력하는 방법을 몰라서 또 설왕설래...... 여행의 뒷 이야기를 싣고 제1팀은 빗속을 그렇게 달렸습니다.
다시 왕궁리유적지로 왔다. 3시20분이 되어서야 비로소 답사를 시작하는 셈이었다. 미륵사지는 완전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역사(役事)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석탑의 절반이 무너져 없어진 터라 방치하다가는 완전히 훼손될 것이기에 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하고 있었다. 미륵산을 배경으로 9층 목탑이 중앙에 있고, 좌우에 9층 석탑이 서 있으며, 정면에 2기의 당간지주가 떡 버티고 있었다. 석탑은 심주를 중심으로 사방에 통하게 되어있다. 금탁(金鐸)이 탑 처마에 달려있다. 풍경이 절 본당 처마 끝에 달린다면 금탁은 탑 처마 끝에 달려 바람이 불면 청아한 소리를 낸다. 중생에게 들려주어 쇄심(灑心) 한다면 세상도 맑아지련만 언제 다시 들어 볼 수 있을는지.
석탑을 복원하는 공정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필요한 사안이다. 부디 단 시간에 서두르지 않기를 바란다. 동쪽에 복원된 석탑을 보면 심주로 통하는 사방의 문이 고증을 거쳐서 복원이 된 것인지, 그냥 현재 사용하고 있는 대문의 빗장을 설치한 것인지 도무지 난삽하기 그지없다. 익산시 전체 면적에서 복원된 유물이 얼마나 된다고, 빗장을 고증하는데 비용이 얼마나 더 들어 간다고 말이다.
쌍릉에는 대왕릉과 소왕릉이 있는데 왕릉이라는 표시가 없다. 대왕릉은 무왕, 소왕릉은 왕후의 무덤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도굴되었기에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 없는 것이다. 대왕릉의 호둘레는 약80미터, 소왕릉은 약40미터. 직경이 얼마인지 계산하기 바빴다. 알뜨르님의 보폭을 가지고 측량을 했는데 알뜨르님의 보폭이 80cm인지, 70cm인지를 놓고 한참 동안 의견이 분분하였다. 하여간 답사팀의 토론 문화는 알아준다.
고도리석조입상은 둥근 봉분 위에 있다.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마주 보고 있다. 대장님이 입상의 손 모양에 대해서 말문을 여셨다. 오른손이 위로 갔는지, 왼손과 오른손을 어떻게 놓고 있는지 제기하셨다. 마멸된 부분이 있어서 아래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깍지를 낀 것인지. 왼손을 오른손 위로 포개었는지 구분이 잘 안되는 상태였다. 서쪽에 있는 입상은 확실히 웃고 있다고 누군가가 말하니 사철난님이 “그야 매일 마주보고 있느니 웃지”하고 받아치니 모두들 한바탕 웃음 바다를 이루었다. 오른손을 왼손 위로 왼손 약지가 보이도록 포개었다. 왼손 약지가 보이는 편이 더욱 애절한 느낌을 주는 것일까?
이젠 주위가 어둑하려고 한다. 옥룡천을 거쳐 입상이 있는 무왕길을 산책하는 부부가 보인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입상이 환생하여 다리에서 만나 회포를 풀려고 노을이 지는 곳으로 걸어가는 착각이 들었다. 그 부부가 백제 무왕(서동)과 왕비(선화공주)이리라. 무왕길을 만들어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나 대한민국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전달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8월11일(토) 왕 맑음
아침 8시에 모텔 마당에 집결하기로 하였다. 일단 모이면 아침을 해결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다. 당연한 일이다. 어제 한일 축구도 당당하게 이겼고, 일부는 밤을 세워서 지켜보았는데 아침을 안 먹는다면 오늘의 일정에서 커다란 차질이 있을 것 아닌가. 문제는 어디서 무엇을 먹는 문제이다. 출발전에야 음식점 조사도 했지만 일단 투숙하는 장소도 달라지고 현지 상황이 출발 전과 많은 부분이 변경되었으니 식사하는 문제도 달라진다. 일단은 어제 저녁을 먹은 곳으로 차를 몰아 본다. 다행히도 아픈 사람 없이 어제 그 모습 그대로 출발하게 되었으니 여간 다행이 아닌가 말이다. 부여가 좁은 곳 이므로 중심지에서 뱅뱅 맴도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가지지가 않는다. 해장국 집이 새벽이면 부산을 떠는 다른 곳의 모습은 없고 조용하기만 하다. 8시가 되었는데도 말이다. 일단 문을 열어 놓은 곳으로 들어간다. 부여읍에서 특산 슬로건으로 밀고 있는 것이 바로 “굿뜨래야”이다. 홍보전단이나 거리 곳곳을 보면 알 수 있다. 식당 이름도 “굿뜨래야 해장국”으로 들어갔다. 콩나물과 된장 해장국으로 아침을 해결한다. 식당 주인이 컴퓨터를 잘 하시는 분인지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 빈센트님이 막간을 이용하여 사이버 공주시민으로 가입했다고 자랑한다. 사이버 부여시민으로 가입하면 부여 유적지 입장료가 면제된다고 하니 얼마나 큰 혜택인가. 모바일로 가입하려고 몇 번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던 참이라 식사하고 나도 식속하게 가입하였다. 누군가가 된장국이 그리 맛이 없다는 표현을 주인장에게 우회적으로 말을 했더니 주인장의 대답이 걸작이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더 이상 바라지 말라는 의미인지, 맛이 없어도 할 수 없다는 의미인지 아침부터 헷갈리는 한 마디에 오늘의 답사일정을 시작하였다.
부여읍 전체를 둘러보면 유적지 위에 읍이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설된 도로 위로 얼마나 많은 유적지가 묻혀 있을 것이고 걷고 있는 보도 밑에는 얼마나 많은 유적이 발걸음에 아파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발굴 유적지라는 표지판이 군데군데 보이고 있기도 하고, 발굴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울타리를 쳐 놓은 것도 많다. 해장국 집 앞은 구아리 백제 유적지이다. 손길이 일단 미치지 못하여 울타리를 쳐 놓았다. 왕궁터가 될 수도 있고 좌평이 살던 곳 일수도 있고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 많은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침을 해결하고 나무 밑에서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 준비하고 있는데 사철난님이 한 마디 하면서 거듭니다. “자귀나무 아래서는 잠을 자는 것이 아니랍니다. 말 그대로 귀신에게 홀려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갑니다.” 소나기님이 다가와 특유의 몸짓으로 잎사귀를 만져보고 확인 절차에 들어갑니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회원님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귀나무 아래에서 저만치 자동적으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본능입니다. 하나님을 믿더라도 말입니다. 한 가지 속설을 저 이야기 합니다. 집 주위에 봉숭아 나무를 심는 이유가 뱀이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랍니다. 줄기의 하얀 액체가 뱀이 싫어하는 성분이 있다고 합니다. 세 사람이 모이면 그중에 한 사람은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하였습니다(三人行 必有我師). 보도 듣고 배우는 길은 끝이 없나 봅니다. 그래서 지금 이와 같이 문화유산 답사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제는 무왕(武王)의 동네, 오늘은 성왕(聖王)의 동네에서 길을 찾는다. 왕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 궁남지(宮南池)로 가는 시간이 9시 30분 인데 태양 빛이 너무도 강렬하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다가와 한 걸음을 옮기기가 부담스럽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차로 돌아와 승차할 때 더워진 차안의 열기 때문에 들어가기 겁난다. 고온의 온도와 습기가 공포로 합쳐진다. 그 더위를 이기고 궁남지에 들어서는 순간 시원한 탄성이 나온다. 물줄기를 뿜어 대는 분수대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왕족이 산보했던 기분을 연상하면서 한 바퀴 둘러본다. 그런데 궁남지 보다도 빙 둘러 조성해 놓은 연꽃 단지가 더욱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사진사가 연꽃을 촬영하고자 벌떼 같이 모여 들어 연신 셔터를 누르기에 여념이 없다. 연꽃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색으로 피어 오르도록 만들었다. 작품을 찍고자 신발을 벗고 연못에 과감히 들어가서 사진기를 들이대는 작가도 있고 밤을 새워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문화 유적지만 내새울 것이 아니라 융합의 시대에 맞도록 변화를 시도하였다는 점이 특색있게 다가온다.
부여에서 연잎밥이 유명한 이유가 설명이 된다. 나이가 지긋하신 세 분이 물위에 무수히 떠있는 수초를 걷어 내고 있다. 대장님이 왜 수초를 걷어 내냐고 물으니 대답이 간단 명료하다. “지저분해서 걷어내지유” 자연스러운 상태가 좋을 듯 하여 왜 걷어 내는지를 복잡한 답변이 올 것을 예상하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간단한 답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오히려 지저분한 곳에서 더욱 청량한 꽃을 피우는 연이기에 아이러니한 일 이었다.
백제의 유적은 아니지만 “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시인의 사회적인 역할과 참여를 외쳐댔던 참여파 시인 신동엽의 생가가 궁남지와 같은 동네에 있었다. 한참 활동한 나이인 40세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신동엽 시인. 그의 부인은 신동엽의 생가를 찾는 이유를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라고 읊었다. 신동엽 시인이 부여 출신이니 등록문화재 제330호가 훗날 국보로 지정되어 더 많은 생가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가는 길에 완전히 불볕 더위가 정점을 이룬다. 해설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20분만 설명을 하겠다고 한다. 제주 멀리서 오셨으니 예정에는 없지만 특별히 설명 해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림사는 평지에 세워진 가람이고 백제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지은 절이라고 하였다. 슬리퍼를 신고 맞이하는 자세가 어쩐지 조금은 어색해 보였다. 답사팀이 듣는 자세가 불량해서인지 마치자 마자 획 돌아서서는 냉정함이 더운 열기를 식히기에 알맞았다. 더위도 더위거니와 더욱 울화가 치미는 것은 정림사지 오층석탑 초층 탑신에 소정방의 전승기공문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탑 사방(四方)에 새겨 놓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견디기 힘들었다.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고 격이었다. 신성한 불탑에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오층석탑에 사방을 둘러가면서 낙서를 저질러 놓은 사실에 너무도 통한의 분루를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치욕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용맹스런 군대 백만이 번개처럼 일어나고 바람같이 드날려 앞에서는 반목(蟠木)을 베다가도, 물러나서는 부상(扶桑)을 베어버리며 얼음은 여름해에 녹여버리고 잎은 가을 서리에 부서지게 한다. 굳센 오영과 밝은 삼령으로 우러러서는 묘략(廟略)을 펴고 굽어서는 군정을 가지런히 하여 바람은 풀잎이 시들 때 보다 엄하고 태양은 강물이 맑을 때 보다 차도다. 서리같이 매서운 창은 밤에 움직이고 구름그린 깃발은 새벽에 빛나 재잘거리며 전군을 찌르고 소리치며 후비의 정병을 잡아당기니 크고 교활한 놈이 머리를 바치고, 체포되어 주살될 놈이 목숨을 청한다. 이 보찰을 깎아 특별한 공을 기록하니 천관(天關)을 막아서 영원히 견고하고 지축을 가로 질러서 끝이 없기를 바란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앞에 연지못이 있고, 가운데 석탑, 뒤쪽에 금당, 그 뒤에 강당이 있는 형태를 갖는다. 목조 형식의 탑에서 벗어나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오층석탑의 격조높은 기품을 소정방이 말살하려고 작정을 하고 평제탑을 만들었으니 장차 이를 어디에다 하소연할까!
정림사는 6세기 중엽 창건된 백제가 멸망한 후 고려 시대 다시 번창한 절인데, 정림사지 석불좌상은 고려시대 번성한 석불이라 한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부여읍내에서 뱅글뱅글 도는 형국이다. 날이 더운 만큼 답사 순서를 조정하기로 하였다. 그래도 덜 뜨거운 시간에 낙화암과 고란사가 있는 부소산성을 올라갔다오고 한참 더운 시간에는 냉방이 되는 박물관 안에서 시간을 가지고 관람을 하기로 하였다. 정말이지 이건 뭐 날씨가 아니고 더위가 아니라 장작 때는 가마솥에 들어가 앉아 있는 꼴이었다. 대장님의 남색 옷이 땀으로 젖어 쪽빛 물감이 위에서 아래로 차차 진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날씨에 산으로 올라가는 시간이니 중간 포기자가 나왔다. 세 사람은 과거에 구경을 했으니 오늘은 너무 부소산성 매표소 앞에서 기다린다고 하였다. 정말 환상의 여름 날씨에 환상이 보인다. 얼음과자로 환상을 달래면서 낙화암으로 간다. 잘못하다가는 이 더위에 삼천궁녀가 될 듯도 하였다. 낙화함으로 가는 길, 토종 다람쥐가 반긴다. 어진백성님의 따님이 여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까무러칠 지경이다. 청솔모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다람쥐를 보기가 여간 힘이 드는데 길목 곳곳에서 다람쥐가 출몰하여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해준다.
왼쪽으로 갈 것인지, 오른쪽으로 갈 것인지 갈림길에서 옥신각신이다. 우로가면 700미터 멀다. 언덕을 오른다. 땡볕이다. 갖가지 구실을 붙여 좌로 간다. 그런데 일반사람은 우로가고 있어서 혼돈되는 모양이다. 부화뇌동이라는 말이 적용되는 순간이다. 좌로 가는 것이 가까운 길임에도 불구하고 우로 가는 사람이 좌로 가는 사람보다 많으면 같이 따라서 우로 가게 되는 것이 부화뇌동하는 사람의 심리이다. 하여간 한참을 격론한 끝에 좌로 가는 것으로 정하였다. 지나는 사람이 흘끔흘끔 쳐다본다. 우리에겐 열정이 있고, 독단으로 행하지 않는다. 시간이 걸려도 같이 결정하고 같이 행동한다. . 좌로 가기로 결정하고 길을 들어선 순간, 그 길은 우리에게 그늘과 바람을 주었다.
가람을 배치하는 방법에는 평지형, 산지형, 배산임수형과 같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정림사가 평지형이었다면 서복사지는 산지형 가람이다. 지금은 터만 남아 울타리만 둘러 쳐져 있지만 멀리 바라보니 금강이 굽어 보인다. 산지형 가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국력이 강성했다는 의미도 된다. 6.25 전사자의 영령을 위로하는 충령사를 일부 열성 팬은 들렀다가 왔지만 대부분은 지나치고 본래의 목적지인 낙화암에 이르렀다. 화강 편마암으로 40여 미터의 단애를 이루고, 삼천궁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1929년 부여군수 홍한표가 이 암석위에 백화정을 지었다. 삼천궁녀가 투신했다는 비극의 장소를 지금의 실정에 맞게 해석하려고 고분군투하였다. 만약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것이 삼천궁녀가 아니라 30명이었다면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까? 훗날 세간의 관심을 계속 갖도록 하고자 한다면 무한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상당히 많다는 의미의 삼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어려울 것이다. 백화정에서 백마강을 좌우로 한껏 눈에 넣어 본다.
낙화암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에도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얽힌 슬픈 전설이 있다. 대장님이 불현 듯 “강건너에 조룡대(釣龍臺)가 어디에 있을까?” 의문을 제기하셨다. 의문대왕이시기 때문이다. 항상 의문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때문에 다른 시각에서 해석하고 다른 이론이 정립될 수도 있으며, 새로운 학설이 탄생하는 여지가 많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특징이다. 그래서 강건너에 조룡대가 있을 것 인데 어디인지는 모른다고 하시기에 두 분을 키고 큰 바위 모양을 찾았지만 강건너에는 도무지 있을 만한 여지가 없었다. 지나가는 과객에게 안내 책자를 빌려도 보고, 물어도 보고 했지만 모른다는 일색이었다. 그런데 유람선 탑승안내문에 조룡대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조룡대와 낙화암, 고란사를 한눈에 유람할 수 있다는 안내문에 눈이 번쩍 뜨였다. 승무원에게 물어 보면 금방 알 것이라 판단하고 얼른 내려가서 물어 보았다. “조룡대가 강 건너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음표를 찍기도 전에 승무원이 대답하였다. “아 조기 있지유. 조거 아니유.” 조룡대는 낙화암 건너편에 있는 바위가 아니라 낙화암 쪽에 바짝 붙어 있는 바다로 치면 갯바위 같은 형태였다. 대장님은 강건너에서 백제로 쳐들어 왔을 것을 가정하고 생각하니 강건너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하여간 백마강과 조룡대, 정림사지 5층석탑의 전승기공문이 소정방과 뒤엉켜 다시 한번 더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꼭 정립되어야 하는 아픈 역사의 심장부를 경험하였다.
고란사(皐蘭寺)는 왕을 위한 정자, 왕실의 내불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려 때(1028년) 지은 사찰이라는 여러 설이 있는 곳이다. 고란사 뒤편에 고란정에서 솟는 약수를 한잔 마시면 삼년씩 젊어진다고 한다. 알뜨르님은 10잔 마셨으니 30년 젊어졌다. 희귀 식물 고란초가 이제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환경생태적으로 기후의 영향, 즉 온도, 습도, 오염도에 민감한 식물인지라 눈에 안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도 모른다.
부소산성 매표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삼인방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다림에 지치고 점심 시간이 한참을 지난 터라 시장도 하실 것이고 더운 바람에 전화 목소리를 계속 실어 보내고 있다. 다행하게도 매표소 500미터 전에 전화를 받았기에 망정이지 오랜 기다림에 지친 삼인방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픈 사건이었다. 늦은 점심을 해결하러 갔다. 모두들 더위를 먹은 탓에 시원한 것을 찾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일성이 막국수였다. 부지런히 차에 올라 유명한 곳을 찾았다. 그러나 길게 줄이 늘어져 있어서 언제 먹을지 기약이 없어 보인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다고 차를 돌려 고풍스런 집으로 갔으나 영업을 안 한다고 한다. 결국 차를 다시 돌려 간곳이 첫날 저녁을 먹은 식당 맞은 편, 굿뜨래야 음식특화지역이다. 정말이지 뱅뱅 돈다. 차도 돌고 머리도 돈다.
시원한 기운을 감지만 해도 시장기가 가신다. 시원한 물 한잔에 시장기를 달래니 세상이 바로 보인다. 전부 콩칼국수를 먹을 기세였으나 막상 주문을 받으니 콩칼국수 8: 비빔밥 4로 나왔다. 곱빼기 같은 보통 콩칼국수로 든든하게 늦은 점심을 행복하게 채웠다. 식사에 막걸리가 빠지지 않는 이유는 막걸 리가 문화유산의 한 가지 이기 때문이다. 콩칼국수 + 콩국물에 알밤 막걸리를 채웠으니 여간해서는 배가 고프지 않을 것 같다. 시장기를 가시고 나니 막걸리 유통기한이 눈에 들어 온다. 8월5일 한. 알뜨르님의 눈에 걸렸다.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는 알뜨르님의 눈에 걸렸으나 주인장의 변명이 시작된다. 술을 원래를 안 파는데 손님이 하도 찾아서 슈퍼에서 몇 병 사오는데 유통기한을 확인하지 않고 가지고 온다고 한다. 죄송하다는 말은 일절 없다. 막걸리 값을 안 받는다는 말은 전혀 없었다. 알뜨르님이 꼭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가져 오시라고 신신 당부하였다. 한 낮의 더운 열기는 막걸리의 술기운을 타고 머리 끝에서 발끝으로 전해진다. 유통기한이 지난 막걸리 때문에 더욱 술독이 세게 발끝까지 전해온다.
다음 목적지가 부여박물관이니 다행이었다. 목적지를 약간 조정한 덕분에 더위의 정점에서 조금은 시원하게 답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부여박물관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를 구경하는 일이 전부라고 할 만큼 찬란한 유산이었다. 향로는 용 모양의 받침, 연잎 모양의 몸통, 신선이 사는 박산을 표현한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다. 뚜껑 꼭대기는 날개를 펴고 정면을 보는 봉황이 장식되어 많은 부조상 중에서 가장 생동감있게 보인다. 금방 날아갈 것 같은 모습이다. 박산형태의 뚜껑에는 봉우리 74개, 인물 12명, 동물 42마리, 나무와 바위를 생생하게 표현하였고, 봉황 주위에는 5명의 악사(북, 거문고, 소, 완함, 피리)가 있다. 그 아래 부분에는 고구려 수렵도와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였는지 보지 않고는 전달이 안 된다. 향로 받침은 용이 하늘로 승천하기 위해 용틀임하고 있다. 왕실의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찬란한 백제의 독보적인 유산이건만 대한민국 국민이 얼마나 알고 있을는지. 이곳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것임을 감안하면 무심해도 너무나 무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와 문화를 철저히 알아야 대한민국의 세계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해외에서 다년간 생활을 했던 경험을 돌이켜 보면 타국 사람은 정치, 경제보다도 문화와 역사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네들에게 대한민국의 찬란한 유산을 전달 할 수 있는 지식이 부족하여 개탄했던 일이 생각난다. 내가 온전히 알아야 남에게 조금이라도 전달할 수 있는 것 이다. 알아야 한다. 알기 위해서는 다녀야 한다. 다니면서 보고 느껴야 한다. 느낀 것을 정리하여 내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간단한 수순인데.....
서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상을 백제의 미소라고 한다.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부여박물관에는 그 복제품이 있다. 언젠가는 서산에서 실체를 확인하고 싶다. 빛의 방향에 따라 여러 가지 표정을 연출하기에 현장에서 꼭 봐야 하는 불상이다. 둥글고 풍만한 얼굴이 특징인 백제 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잠시 나마 실문을 뜨고 바라보았다. 내게 부족한 웃음, 미소를 이젠 많이 머금고 다니리라.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의 탁본을 부여박물관에서 확인하였다. 비명 전문을 해석한 자료는 전시되어 있지 않지만 끓어오르는 분기탱천의 용탕이 다시금 올라왔다. 박물관이 시원했기에 망정이었다.
왕궁리유적지에서는 5인이 동시에 볼일을 볼 수 있는 측간(화장실)이 있었는데 부여박물관에서는 1인용 남성용 요강을 보았다. 호자라고 하는데 중국 고대 기록에는 황제 행차시 시중 하인이 들고 다니면서 따라 다녔다고 한다. 호랑이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모습에서 호자라고 이름을 붙인 것 같다. 남성용 변기가 있었다면 여성용 변기도 분명히 있을 것 이다. 이리 저리 둘러보니 병원에서 환자 간호할 때 사용하는 플라스틱 변기와 흡사한 모습이 있었다. 여성용 변기였다. 왕궁리유적지에서 출토된 토기를 부여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또하나 자랑스러운 유물이 있다. 문익점보다 800년 빠른 백제의 면직물인 창왕명사리감이다. 고려의 문익점이 중국 원나라의 목화씨를 처음 갖고 들어왔다는 14세기에 비하여 800년이나 앞선 국내 최고의 면직물로 볼 수 있다. 강한 꼬임의 위사를 사용한 독특한 직조방식의 직물로 백제인의 직조기술을 확인 할 수 있다. 백제인의 기술과 자부심을 심어 주는 백제박물관 답사를 마치고 입구를 나서자 강한 햇살의 기운이 조금은 누그러 졌다고는 하지만 남아있는 열기에 등골에서 전율이 타고 흐른다. 한참을 세워둔 차 안은 찜질 가마였다. 슬기롭게 순서를 조정한 것처럼 남아있는 답사 순서를 조정하기로 하였다. 능산리 고분을 가야하지만 차속에서 시원하게 냉방기를 틀면서 드라이브를 하고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목적지가 있어야 하므로 대장님이 낙화암 건너편에서 낙화암을 한번 바라보자는 일성이 있었기에 금강을 건너 롯데리조트로 차를 몰았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의 궁궐과 능산리 고분군의 절, 능사를 재현해 놓은 백제문화단지가 근처에 있지만 재현한 곳이기에 일단을 배제하고 롯데리조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아직 공사현장이 있어서 도로가 막혔고 돌아 나와 백제대교 바로 앞에서 우회전하여 강변으로 들어섰다. 냉방기 빵빵하게 틀고 가니 차안이 시원하다. 정신이 바로 선다. 낙화암 정면에서 한참을 낙화암을 바라보았다. 삼천의 궁녀가 낙하했다니 강을 메웠으리라. 확인하고 싶다고 용감한 삼인방인 대장님, 알뜨르님, 빈센트님이 금강의 물결로 들어갔다. 정면에서 낙화암을 보니 절벽에 빨간 한자 세 자가 보인다. 송시열의 글이라고 한다. 巖 花 落
금강 물에 들어갔다가 나온 소감을 물었다. 빈센트님은 “미지근 합니다”, 알뜨르님은“대장님이 볼일을 보셨기에 더 따뜻합니다”, 마지막으로 대장님은 “바닥이 갯벌같이 질척한 진흙같은 것이 깔려 있고 정말 물이 뜨끈뜨근 합니다” 뜨근한 물을 뿌렸다는 말을 듣고는 사철난님이 받아 친 한 마디에 우리 모두는 자지러졌습니다. “남자인 대장님이 볼일을 봤으니 삼천궁녀가 아주 오랜만에 좋아하겠네” 사철난님의 지지러지는 한 마디에 우리를 실타래처럼 감쌌던 더위는 하늘로 높이 올라가고 말았다.
다음 목적지는 부여 나성이지만 이 더위에 위치를 확인 할 길이 막막하여 생략하기로 하였다. 산위에 축조한 산성, 궁권 주위를 둘러싼 궁성, 마을까지 내려와 성을 쌓은 나성으로 성을 구분할 수 있는데 대장님은 농담으로 나성은 미국 LA에 있는 성이라고 하였다.
능산리고분군은 우리에게 엄청난 문화유산을 남겨준 곳이기에 꼭 답사를 해야 하는 곳이다.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고 지금도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백제문화단지에 능사를 재현해 놓았다. 주차장에서 능산리 고분으로 가는 길에 야트막한 둔덕이 보인다. 소나기님이 그 둔덕으로 보고는 아 저곳이 나성이라고 기쁨의 일갈이 있었다. 고분군이 있는 입구의 좌측에서부터 오른쪽을 가로질러 부여읍내 중간까지 뻗어 있는 둔덕을 분명히 확인하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보인다고 염두에 두고 있으면 눈에 언젠가는 보이기 마련이다. 부여나성은 평양나성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성의 하나이기에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능산리고분군은 백제왕릉원이라고 표지가 되어 있다. 분명히 자긍심을 심어 주고자 했으리라. 무덤은 앞뒤 2중로 3기씩 있고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있어 모두 7기이다. 무덤은 도굴되어 유물의 대부분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고 금구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는데 절터에서 국보 제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어 이곳이 왕실 무덤지역이라는 점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대향로 하나만으로도 능히 찬란했던 문화의 일면을 보고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교육용으로 무덤의 내부를 관람할 수 있도록 조성한 무덤이 있어서 가까지 갔지만 열쇠로 꽁꽁 잠궈 놓아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고분군이 있는 정상에서 아래를 보니 급경사 잔디광장. 비료포대만 있으면 활강놀이하기에 딱 좋은 언덕이다. 그 언덕으로 뉘엿 뉘엿 넘어가는 서쪽의 하늘이 붉은 빛으로 변하고 있다. 발갛게 잘 익은 하트 모양의 복숭아와 백제의 모습이 아롱아롱 겹쳐진다. 백제의 색은 잘 익은 복숭아 빛깔이리라.
나머지 답사지는 부여읍내를 벗어나는 곳이다. 부여읍 남서쪽에 위치한 홍산관아(鴻山官衙)는 일제에 의해 사라지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유홍준 전문화재청장이 재직하면서 사라진 관아 330 곳 중에서 제주목관아, 홍산관아 등 6 곳을 복원하였다. 최영장군이 왜구를 물리친 홍산대첩이 있었던 만큼 충청권에서 중요한 고을의 위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복원된 모습은 아직 성에 차지 않는다. 비가 많이 와서 곳곳이 패이고 동헌과 형방에 있는 유물은 어지럽게 널려있고 왜, 어떤 의식을 가지고 복원을 했는지 의문스럽다. 부여읍에 있는 유적지는 그나마 복원이나 발굴한다고 했건만 읍내에서 떨어져 있다고 홍산면은 외곽으로 떠도는 것일까? 홍산현감이 있었으니 홍산마을 전체를 도시계획을 하듯이 오밀조밀하게 고증을 거쳐 꾸며 놓았으면 좋으련만 항상 예산타령만 하는 지경이 더 이상 없으면 한다. 조선시대 관아의 중심건물은 객사라고 한다. 왕의 교지나 교서를 받을 때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며 손님이 머무는 곳 이므로 중요한 기능을 하던 곳이다. 그 홍산객사를 찾으려고 눈을 씻고 발품을 팔아도 찾지 못했다. 객사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헌이라 칭하는 지식을 동원하여 시선을 멀리 두었지만 근처에는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 했다.
홍산객사를 보지 못한 아쉬운 마음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아쉬운 마음을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무량사로 돌린다. 1호차의 내비게이션은 골목길을 좋아한다. 대로와 좁은 길이 있으면 영락없이 좁은 길로 안내한다. 고생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뻔히 대로를 버리고 좁은 길을 안내하여 충돌 위험을 감수하게 하고 시간이 더 걸리게 만든다. 내비게이션도 더위를 먹은 탓인가? 대장님이 유독 내비게이션과 치열하게 싸웠다. 옆에 앉은 조수는 내비게이션을 믿지 말고 이탈하지 않고 잘 가고 있는지를 기사에게 잘 신호를 보내야 한다. 빈센트님이 바짝 긴장하여 허리를 세워서 이탈 여부를 감시하고 있다. 소나기님도 뒤에서 휴대전화에서 올레내비를 켜 놓고 이중, 삼중으로 감시하고 있다. 차량에 탑재된 것과 휴대전화 네비게이션이 서로 길 안내가 다른 경우도 있다. 첫날 2호차가 청주공항에서 익산으로 오는 길에 전주까지 빠지는 바람에 목적지에 늦게 도착한 사례가 있었기에 더욱 신경을 쓰이는 부분이 되었다.
하여간 이중, 삼중으로 안전장치를 한 덕분에 무량사 입구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어느덧 7시가 되었다. 매표소 앞에 어르신 한분이 관림 시간이 다 끝났다고 잘라 말한다. 바리게이트 앞에서 갸날픈 의자 하나 놓고 7시간 째 이렇게 감시하고 있다고 한다. 몰래 들어가는 사람을 막는다고 한다. 게다가 관람시간인 6시가 훌쩍 지났으니 그 어르신이 딱 잘라 말할 만 했다. 알뜨르님이 불쌍한 표정으로 부탁하였다. 제주에서 일부러 무량사를 보러 왔는데 한 번 봐주시라고 아주 슬프고 불쌍한 표정으로 얼굴을 디밀고 손도 잡으면서 들여보내 주기를 부탁하였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안 되는 일은 없었다. “빨리 보고 나오쇼” 허락이 떨어졌다. 입장료도 없이 들어가는 기분과 오늘의 마지막 답사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쉴 수 있다는 기대감이 한 번에 몰려왔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 일주문이 우리를 맞는다. 광명문(光明門)이라고 편액이 걸려있고 기둥은 옹이가 있는 곳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오랜 세월을 이긴 고색창연한 색이 만수산(萬壽山) 속으로 일행을 이끌고 있었다. 저녁 예불 시간이라 목탁소리와 스님의 독경 소리가 만수산에 울린다. 보물 제233호인 석등, 보물 제185호인 오층석탑, 보물 제356호인 극락전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한번으로 사진에 담는다. 부여가 내세우는 가장 아름다운 고찰, 무량사의 극락전은 2층 구조이다. 하지만 내부는 통으로 터져 있는 아주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은 사철난님이 보완해 준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은 방랑 끝에 말년을 무량사에서보내고 세상을 마쳤는데 바로 그 김시습의 영정을 영산정에 모셨다고 하면서 사철난님은 꼭 봐야 한다고 한다. 가던 길을 돌아서 스님에게 사철난님이 허락을 구했다. 스님은 시간이 지났다고 한 마디 하면서 허락해 주신다. 모두들 김시습의 영정에 여기에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고 놀랐다. 하지만 영정을 볼 수는 없었다. 늦은 시간이기에 더이상 부탁은 어려울 것 같아 영산정을 보는 것 만으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좌절과 변절로 얼룩진 세상과 자신의 비정상적인 삶을 비하하여 세상의 쓸모없는 늙은이라는 췌세옹(贅世翁)으로 세상을 마감한 김시습을 품에 않은 만수산, 그리고 무량사는 과연 백제가 내세우는 사찰이라는 칭호가 꼭 맞아 떨어진다.
부지런히 무량사에서 내려왔지만 이미 주위는 어두워지고 주위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라고는 했지만 한 가지 일정이 남았다. 저녁식사다. 어디서 저녁을 먹을까 걱정하는 답사팀의 걱정을 해결하고자 어제 사전에 봐 두었던 곳으로 안내하였다. 부여읍내로 다시 들어가 부소산성 입구에서 오른쪽에 있는 백제의 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였다. 이제는 매뉴를 놓고 한참 걸렸다. 결국 연잎밥과 주물럭 쌈밥으로 낙찰을 보았다. 궁남지 주위에 심어 놓은 무한한 연잎으로 싸서 쪄내어 놓은 연잎밥을 먹게 되었으니 답사 시작부터 노래를 불렀던 소원을 이루게 되었으니 좋다. 주물럭 쌈밥으로 전체적인 가격을 맞추고 나니 오늘 가마솥에서 푹푹 찜질을 하느라고 고생한 일은 어느새 사라지고 어서어서 자리에 눕고 싶은 생각만 간절하다. 피곤하지만 행복한 하루였다. 모두 추가 일정없이 끽소리 못하고 그대로 잠이든다.
8월12일(일) 흐림, 왕 비, 맑음
어제는 세상을 분간하지 못하고 일찍 잠이 들었기에 일찍 눈이 열렸다. 5시30분에 기상하는 습관이 몸에 밴 탓도 있지만 어제는 14시간의 답사 일정을 소화하느라고 강행군을 했기에 일찍 잠이 들었고 그 덕에 자동 기상하게 되었다. 하루의 본격적인 일정을 소화하기 전에 아침의 민생고를 해결하고자 우왕좌왕하는 시간을 줄이고 운동 겸 산책을 했다. 모텔에서 우측으로 가보지 않은 곳으로 슬슬 걸었다. 거리는 정말 조용하다.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멋쩍고, 평범한 읍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이도저도 아닌 것이 매력을 발산하는 곳이다. 식당 한곳이 눈에 들어온다. 김삿갓 식당이다. 한식이 골고루 있고, 부여의 특산 우여회도 맛 볼 수 있다. 금강에서 올라온 민물고기를 회로 먹는다는 것 또한 즐거움 일텐데 아침부터 회를 먹는다는 점이 걸리기는 한다. 하여간 아침식사 장소를 해결하고 모텔로 돌아왔다. 인기척이 많아지자 한 사람 두 사람 일어난다. 이제는 텔레비전을 틀자 본격적으로 왁자지껄 하는 소리에 모두 부산하다. 그 틈을 비집고 백제왕조실록과 나의문화유산답사기 6권을 간독하였다. 그토록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던 역사가 단시간에 이해가 되고 나의 지식이 되었다. 어제 홍산관아에서 객사를 찾지 못한 이유도 알게 되었고, 답사를 하기 위해서 사전에 준비를 정말로 철저히 하여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역사의 몸통이 건축이라면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서는 건축물을 없애면 될 일이기에 일본은 건축물과 문화재를 싸그리 일본으로 약탈해갔다. 일본을 거쳐 전 세계로 우리의 문화재가 돌아 올 줄 모르고 있다. 입양된 한국 아이는 성인이 되면 뿌리를 찾는다고 한국을 찾지만 한번 한국을 떠나간 문화재는 영영 돌아올 줄 모른다. 눈에 보이는 문화재 뿐만이 아니다. 무형의 문화재 또한 소중하게 간직하여야 하는 귀중한 자산이다. 오늘의 첫 번째 답사지는 바로 무형문화재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곳이다. 김삿갓 식당을 들어 갈 때 부터 세차게 내리던 비가 우렁 된장찌개로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나와도 그칠 줄 모른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뙤약볕을 받으며 걷는 것 보다는 비가 오는 편이 차라리 낫다.
첫 번째 목적지는 은산별신당이다. 어제 답사를 하여야 했지만 정말로 빡빡했던 일정을 소화하지 못해서 오늘 답사를 해야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친다. 비가오는 가운데 물어 물어 찾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데 그래도 가야할 것인지를 대장님께 여쭌다. 선뜻 답변을 못하시고 얼버무리는 듯한 태도에 답사 취소를 건의한 사람도 무안해 진다. 순간 지도를 보고 있다가 은산별신제 표시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얼른 일러 주었다. 힘을 받은 대장님은 도착하면 비가 그칠것이니 예정대로 가자고 하였다. 순간의 결정은 다음 일정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처음 시작이 잘 되어야 뒷 일정도 순탄하게 진행된다. 은산별신제가 백제와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고 멸망한 백제의 군사와 병사의 넋을 위로하는 마을 제사이다. 유형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다면 이번은 무형문화유산을 답사하는 길이다. 참으로 중요한 전환이 아닌가 말이다. 유형, 무형의 문화유산 모두 우리가 보존하고 가꾸고 발전시켜야 하는 자산이다. 지도에는 은산초등학교 뒤편에 한점으로 표시되었다. 일단 은산초등학교를 찾으면 마을 사람에게 물으면 될 일 이라는 판단이었다. 어제와는 정말 딴판인 비오는 날씨를 뚫고 은산리에 도착하였다. 내비게이션이 또다시 좁은길로 안내를 한다. 좁은길 내비게이션이다. 차량을 반납하면서 반드시 내비게이션의 특징을 잘 전달해야겠다. 교환하라고 하던지. 이제는 마을 사람에게 물어 보는 것이 상책이다. 은산초등학교는 맞는데 옛날 초등학교고 지금은 초등학교가 조금만 더 가면 있으니 학교를 가로질러 우측에 별신당이 있다고 한다. 예상보다 쉽게 찾았다. 그만큼 마을 사람이 모두 알고 참여하고 있는 중요한 마을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은산천 바로 옆에 별신당이 있다. 파란 운동복을 입은 보기 드문 젊은이가 독신제를 위해서 물기 묻은 바닥을 닦고 있다. 연신 수건을 짜면서 우리가 묻고 부탁하는 말에 짧게 대답을 한다. 알뜨르님이 간곡한 말투로 한 가지씩 묻는다. 하나씩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질문과 대답을 하는 동안 그 청년은 은산별신제의 장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완전히 제대로 만났다. 소나기님이 이곳에 온 경위를 설명하고 안내를 부탁하였더니 별신제추진위원회 총무에게 전화를 하였다. 총무님이 흔쾌히 열쇠를 가지고와서 별신당을 열어주었다.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운데에는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 왼쪽에는 칼을 거머쥔 복신장군, 오른쪽에는 창을 겨누고 있는 토진대사가 모셔져 있다. 첫 번째 일정에서 잘 풀려야 다음 일정도 잘 진행이 된다고 하였는데, 오늘 전체적으로 잘 진행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은산별신제는 한국의 4대 제사 중의 하나라고 한다. 중요무형문화재 9호로 지정되었고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전혀 알 수는 없지만 전수관이에 진시된 1937년 사진을 보면 일제시대에도 태극문양을 그대로 쓰면서 별신제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올해 별신제를 크게 지냈고, 내년에는 소규모로 치룰 것이라고 한다. 말 타고 장군역할을 한 청년은 고창수라고 하였다. 순박하고, 우직한 모습의 별신제 전수자 고창수님이 미래의 위원장으로서 충분히 무형문화를 잘 전수받아 발전시킬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설명을 듣고 보고 대화하는 동안에 비가 그치고 있다. 보령시로 넘어가야 하기에 장군청년, 총무님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였다. 총무님은 대장님에게 내년 별신제에 한번 오라고 초청하였다. 다시 좁은길을 좋아하는 내비게이션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시점이다. 부지런히 길을 재촉해야 오늘의 일정도 소화할 수 있다. 오늘은 제주행 비행기를 타야 하기에 정확히 시간을 맞추어야 한다.
보령시로 넘어가는 길은 비가 그치는 시점에 피어오르는 구름속으로 뚫고 달리는 길이었다. 석탄을 캐느라고 생긴 갱에서 나오는 차가운 바람을 이용하여 냉풍 해수욕장이 성업중이고, 석탄 박물관이 있어 쇠락한 석탄산업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제는 문화유산으로 다시금 광영을 누릴 시기가 오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성주사터를 보면서 알 수 있었다. 골이 깊은 양쪽 산세를 이용하여 자리잡은 성주사터의 유물은 백제시대가 아닌 통일신라 것이다. 백제시대에는 법왕이 왕자시절인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지은 작은 절로 오합사(烏合寺)라고 했다. 백제 멸망 후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가 9세기 들어 세력을 확장한 지방호족이 낭혜화상을 모셔 대찰로 중창하면서 면모를 일신하였다. 88세에 세상을 떠나자 진성여왕은 국사로 예우하고 국사의 비문을 지으라고 최치원에게 명하였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이 바로 국보 8호인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이다. 오석을 갈아 비석의 몸체를 만들고 비문을 새겨 넣었는데 특이하게도 비문 중간 중간에 9군데의 주석을 달았다. 글자의 크기가 1.2로 줄어들고 1줄 폭에 2줄이 새겨있다. 옥편을 보면 2줄로 설명해 놓은 부분과 같은 방식이다. 탁본을 하면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오석이기에 마모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다. 탑비는 거북이 형상이 받치고 있는데 머리 부분이 깨져 있으며, 좌우 발의 고저가 차이가 있다.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듯한 역동적인 느낌을 주고 있으며, 꼬리가 한번 반 말려서 위로 치켜들고 있어 아주 귀여운 모습이다. 그런데 탑비를 보존하고 있는 건물은 국보가 있는 곳 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탑비와 주변과 어울리지를 않는다. 건물 하단부 마감을 회벽으로 처리하였으니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상태이고 보면 건물이 생긴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다고 그리 될까 의문이다. 아니 처음부터 국보를 대우한다면 완벽하게 설계하고 관람객이 보기 좋게 세워야 할 것이다. 발굴하고 일반에게 공개를 하려면 일반인의 눈이 무섭다는 사실도 이제는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성주사터를 빛내고 있는 보물이 있으나 또 무성의하다고 할까? 금당과 강당 터 사이에 거의 똑같이 생긴 삼층석탑 3기가 나란히 있다. 왜 금당과 강당 사이에 있을까? 또하나 3기의 석탑이 문화재로 지정된 번호도 날짜도 달라 문화재 안내판을 세 개 딸 세운 것이다. 탑 2기는 보물이요 오른쪽 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이다. 3기의 석탑이 모두 같은 시대에 똑같이 만들어진 명작인데도 이리도 다르다고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적고 있다. 왼쪽 석탑에는 구멍이 송송 뚫려있다. 아마도 탑에 장식을 하기 위해서 구멍을 만들었다는 추측이다. 6개의 구멍을 한 조로해서 장식을 부착했을 것이라면 상당히 화려한 석탑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보령시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길에 또 홍역을 치뤘다. 네비게이션에 직진 표시를 직진으로 가고 있는데 금방 다시 유턴하라고 한다. 좋아 지시한 대로 U턴을 하여 갔는데 길이 공사 중이라 갈 수 없다고 한다. 뒤에서 따라 오던 2호차가 어안이 벙벙하여 대책이 없는 표정이다. 정말이지 이상한 항법 시스템을 갖고 있는 네비게이션이다. 비가 온뒤 개이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보령시의 맑은 공기와 자연이 어우러진 환상의 드리이브 코스를 지나 이제는 공주로 길을 잡는다. 얼추 점심 시간도 다가온다. 공주의 공산성에 도착하면 점심을 먹고 공산성과 무령왕릉을 보면 전체 일정을 다 소화하는 것이 된다. 낙오자 없이 사고없이 건강하게 한 셈이다. 금강을 끼고 달린다. 장장 연장 441km의 금강이다. 공산성은 백제의 두 번째 도읍인 웅진에 세운 산성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웅진씽크빅이 공주 출신이라한다. 64년간의 수도 치고는 좀 작다는 생각이 든다. 알뜨르님은 공산성을 올려 보더니 아 정말 괜찮은 산성이고 하루종일 있어도 좋을 만큼 상상외로 좋은 곳에 왔다고 하였다. 산성 안에는 과연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일단 중요한 과정인 점심을 해결하여야 한다. 공산성 바로 앞에 쌈밥집이 있다. 학창시절을 회고할 수 있는 갖가지 물품이 식당안을 장식하고 있다. 답사 첫날 두 끼의 식사를 해결하느라고 무지막지하게 비용이 들어간 탓에 여유를 부릴 틈이 없기에 눈치를 보면서 매뉴를 고른다. 돌솥밥이 가장 싸다. 콩나물 돌솥밥과 돌솥밥으로 압축되어 갈 무렵, 이탈자가 있었다. 꽃잎 비빔밥. 어진 백성님이 제일 비싼 가장 돋보이는 매뉴를 선택하였다. 도우미가 비빔 돌솥인지, 그냥 돌솥밥인지를 자꾸 묻는다. 그냥 돌솥밥이 나와도 비벼 먹는 것이니 별 상관이 없기에 그냥 돌솥밥을 주문하였다. 막상 주문한 돌솥밥이 나오고 보니 도우미가 물어 보았던 이유가 있었다. 간장에 비벼 먹으라고 한다. 꽃잎 비빔밥은 화려하다. 모두들 감탄의 물결이다. 이리 비비고 저리 비비고 하는 동안 꽃잎의 화려함이 맛과 함께 사그러들어 사라지고 말았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는데 정 반대인 모양이다. 꽃잎을 먹은 경험으로 만족해야 하는 점심이었다.
사이버 공주시민증이 있으니 입장료는 당연히 면제다. 일단 해설사에게 설명을 부탁하였다. 지금은 방학 기간이라 한참 바쁘다고 한다. 예약을 하지 않아서 동행하여 설명하기는 어렵고 간단하게 공산성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하였다. 사철난님은 몇 번이고 “매표소에 해설사가 필요하다가 말했더니 그 직원은 올라가서 말하면 바로 해설해 준다고 했는데 해설사님은 왜 안됩니까?”를 반복하여 따졌다. 해설사도 지지 않고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하루 전이 아니고 일주일전에는 예약을 해야 한다고 서로의 입장을 강조하였다. 출발전에 해설사가 필요하면 예약하는 준비가 필요하다. 상황을 보니 학생들과 관광객 무리를 이끌고 열심히 설명을 하는 해설사가 보인다. 예약을 안 해서가 아니라 해설사가 부족한 상황을 이해하고 짧은 시간만 우리에게 할애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지만 사철난님은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해설사의 설명도 중요하지만 듣는 우리의 자세도 진중하게 들어야 한다. 설명 중에 사진 찍고 돌아다니고 분위기 어수선하게 하면 해설사도 설명할 기분이 달아 날 것 이다. 해설사의 설명이 유창하다. 짧은 스커트 차림의 젊은 미인 해설사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접한다. 백제의 웅진시대를 대표하는 산성으로 동성왕과 무령왕을 이어 성왕 16년(538년) 부여로 천도할 때 까지 64년간 백제의 수도였기에 백제인의 기개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알뜨르님이 말한 것처럼 볼만한 산성이다. 왕궁터에는 또 한 무리의 학생이 해설사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다.
공주가 한국의 가운데 위치하여 320년간 감영이 있었고 한양으로 과거로 보러 갈 때 삼남지방 사람은 반드시 금서루를 거쳐 가야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5박6일 동안 피난왔던 아픔과 금강이 공주를 안고 있는 아름다움을 동시에 머금은 곳이다.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할 때 공주에 물물교환 형식으로 제공한 것은 금강철교였다는 것, 한국의 3대 부자 김갑순이 공주 사람이며 우마차를 끌던 시절에 포니 자동차를 몰고 다닐 만큼 부자였고 금강에 놓인 배다리는 김갑순을 위한 다리였고, 악질이었기에 악평으로 더 유명하다는 설명 등을 곁들여 주었다. 약간 이탈하여 낙화함에서 삼청궁녀가 떨어졌다는 설에서 조선시대 궁녀가 몇 명이나 되었을까 묻기도 하였다. 조선초기 궁녀의 수는 50여명, 조선이 안정되면서 100명으로 늘었고 조선중기 영·정조시대에 이르러서 600여명의 궁녀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백제시대에 삼천궁녀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설명이 있었다. 하여간 공산성에 대한 설명보다는 공주시에 대한 설명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여 우리가 공산성에 서있는 이유가 조금은 퇴색되는 느낌이었다.
왕궁터에서 쌍수정을 올라가는 계단 옆에 인절미의 유래가 적혀있다.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이곳에 피난왔을 때 어떤 백성이 콩가루를 뭍힌 떡을 만들어 드렸다. 인조는 떡의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니, 떡의 이름은 없고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것 참 절미(絶味)로다, 그런데 떡의 이름이 없으다고 하니 임(任)씨가 만든 절미라는 의미에서 임절미라고 하였다가 부르기 쉽게 인절미로 되었다고 한다. 임씨(任氏)인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누구도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고선생님이 지적하였다. 이괄이 제주목사로 재임하였다는 것이다. 맞는 사실이었다. 이괄(李适)은 선조36년(1603) 11월 대정현감에 도임하고 1606년에 떠났다가, 광해8년(1616) 병진5월 제주목사로 도임, 광해 11년(1619) 기미2월 떠났다. 사람의 머리를 맞대면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이젠 일반화되어 한마디의 착각이나 실수도 용납치 않는다. 문헌에 근거가 없으면 단정짓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한 가지만 알고 둘은 모르는 내 자신이 한 없이 작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를 제외하면 대한민국의 역사의식이 전 세계로 쭉쭉 전파되어 나아가는 희망도 같이 본다.
공산성에서 많은 시간이 지체되어 빨리 금번 답사의 최종 목적지인 무령왕릉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3시까지 공산성을 답사한다는 처음의 말만 듣고 느긋하게 둘러보고 있는 빈센트님을 기다린다. 느긋함. 스으으로우의 미학이 몸에 배었다고도 할 수 있으나 어찌 보면 한 가지라도 더 눈에 넣고자 열심히 다니는 빈센트님이다. 궁남지에서도 남들은 가지 않는 곳을 구석구석 찾아다닌다. 그만큼 시간이 더 필요하다. 전화를 하니 다 왔다고 한다. 남들은 뛰어 내려 올만도 한데 천천히 걸어서 내려온다. 매표소 부근에 이르자 그제서야 약간 경보로 바뀌었다.
공산성을 내려오니 비로 인한 습기와 온도가 합해져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다. 무령왕릉에서 우리 일정의 대미를 장식할 만큼 무령왕릉의 가치는 지대하다. 백제의 웅진시대 왕들의 무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이다. 모두 7기가 있는데 왼쪽 검지를 구부린 모습으로 분포가 되어있다. 17기가 있는 중에 7기만 발굴되었으니 아직도 언제 어디서 고분이 발견 될지 모른다고 한다. 공주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의 절반 이상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이라고 한다. 나머지 1호에서 6호분의 유물은 발굴 당시 전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고 하니 일제의 약탈 정도와 도굴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역사를 싼 값에 팔아먹은 더 무서운 도굴범.
전시된 유물 중에서 목침과 족침을 보니 성주사 삼층석탑과 같이 지정된 등급이 다르다. 같은 목침이라도 왕비의 목침은 국보 제164호로 지정되었고, 왕의 목침은 지정된 등급이 없고, 반면에 왕의 족침은 국보 제165호로 지정된 반면, 왕비의 족침은 지정된 등급이 없었다. 서로 엇갈려서 국보로 지정하였다. 왕비의 목침은 문양을 상감하여 새겨 넣어서 국보요, 왕의 목침의 문양은 밋밋한 장식이라서 등급이 다른 것 인지 파고들수록 묘한 일이다.
무령왕릉의 전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상상의 동물 석수(石獸, 국보 제162호)가 통통한 아기 돼지처럼 생겼다. 묘지석, 오수전, 그 외 수 많은 부장품을 모두 연결하여 해석하고 파헤치기에는 너무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역사의 단절만큼 답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앞과 뒤를 연결하고 오른쪽과 왼쪽은 연결하고 위와 아래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유물, 유적이 필요하다. 일제가 약탈한 유물, 도굴범이 파헤쳐 팔아먹은 유물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실태조차 알지 못하는 현실이 정말로 분통하기만 하다. 그나마 무령왕릉에서 유물이 있었던 것은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1924년 일제가 발굴할 때에도 설마 왕의 무덤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봉분이 왕의 무덤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바짝 붙어 있기 때문에 왕의 무덤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알뜨르님, 소나기님, 고선생님 모두 해설사를 둘러싸고 모여서 열띤 질문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봉분 하나가 왕 1명의 무덤인지, 아니면 장식용으로 봉문을 만들어 놓은 것인지를 캐 물었다. 결국 왕의 무덤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봉분의 크기가 작고, 거리도 서로 아주 가깝게 붙어서 고분군이 형성되었다는 해설사의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발굴 또는 도굴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우리가 그 찬란한 백제의 문화유산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답사일정을 접어야 하는 시간이다. 땀에 쩔어있는 겨드랑이의 땀내가 기내에서 번져 옆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걱정을 하게 된다. 남들은 그저 혐오의 대상일 뿐이지만 우리에겐 찬란한 백제의 향기이다. 백제에서 흘린 땀의 결과가 언젠가, 어디에선가는 실하게 맺힐 것을 기대한다. 백제의 문화유산을 보고 경험하고 나누기도 했지만 회원님들과 가슴으로 열정을 함께 했고, 문화유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으로 함께한 것이 한 여름의 백제가 내게 주는 커다란 의미이다.
황제폐하 전화다. 2박3일 동안 처음 전화다. 난 한번도 못하고 카톡도 그저 간단하게 하고 말았다. 그대신 서툰 몸짓으로 백제와 부대꼈다. 돌아갈때는 백제를 무던히도 많이 알고 간다고 뿌듯했는데 제주공항에 내려 복숭아 상자를 찾는 동안 다시 현실의 무게에 눌려 어리가 하얗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운전과 전체적인 일정을 지휘하시느라고 고생하신 대장님, 슬로우로 운전하신 빈센트님, 백제의 백과사전 BK님, 분위기를 잘 잡아 주시고 날카로운 질문으로 담사회의 품격을 높이신 알뜨르님, 궂은 일을 도맡아서 하시되 한 번의 짜증도 없던 소나기님, 해박한 역사의식과 지식으로 우리를 일깨우신 사철난님, 진득하게 답사팀의 얼굴 역할을 해주신 고선생님, 힘든 일정을 소화하는 우리를 오히려 위로하고 격려해 주신 대정 해설사님, 낙화암이 왜 먼곳에 있어서 고생을 시키냐고 두털거렸지만 어려운 일정을 잘 참고 함께 해주어 참으로 고마운 어진백성 따님, 그리고 꽃잎비빔밥 만큼 아름다우시고 1호차 뒷 좌석에서 고생하신 어진백성님, 그리고 옆 좌석에서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고 자원봉사를 많이 하시는 정이 많으신 분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즐거웠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한 여름의 백제에서 행복한 피서를 보낸 2박3일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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