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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수지침 대구 복현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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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후 ~ 현재 스크랩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실미도 특수부대
오분순타 추천 0 조회 275 11.09.03 05: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우리도 김일성의 모가지를 따오자!~

                                       북파 비밀특수부대 실미도!~

 

 

1971년 8월 23일.

수도 서울은 충격에 휩싸인다.

 

군복을 입은 신원을 알 수 없는 무장 괴한들이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해 서울을 진입한 것이다.

 

청와대를 향하던 이들은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함으로써

허무하고 끔찍하게 최후를 마친다.

 

 

 

"이 사건은 인천 앞바다,

실미도의 공군관리하에 수용된

특수범 23명의 죄수들이..."

                                              - 정래혁 국방장관 사건 발표

 

오후 3시 30분,

무장 괴한들의 신분을 공비라고 밝혔던 군은

 

6시 30분경,

죄수들이라고 말을 바꾸어 발표했다.

 

그들은 누구인가?

 

의문을 밝힐 틈도 없이 생존자 네 명에게는 사형이 발표되고

난동 사건의 실체와 실미도 특수부대의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문 - "난동 동기는?"

 

답 -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몸이다. 살기가 싫다."

 

답 - "죽으려 했는데, 우리들의 이번 난동의 동기 등에 대해서는 지금 말할 순 없으나 후에 밝혀질 것이다."

 

"특공대라는 것은 그 쪽에서 목표하는 것을 잡아오든지 대들던지 하는 거 아닙니까?

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김일성을 잡아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특공대였습니다."

                                                                                     - 장지량, 부대 창설 당시 공군참모총장

 

"폭력이나 하던 깡패들을 뽑아왔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이건 미친 짓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런 중책을 맡길 수 있나' 했습니다."

                                                                                - 김두만, 사고 당시 공군참모총장

 

"국가에 충성을 하고 그 목적 달성을 했을 때에는

제2의 인생을 국가에서 다시 살 수 있게끔 배려하겠다 했던 것입니다."

                                                                                  - 이준영, 실미도 특수부대 기간병

 

북파 목적으로 창설되었다는 실미도중앙유격사령부 684특공교육대.

실종된 이 사건의 진실은 영원히 밝혀질 수 없는 것인가?

 

1968년 1. 21 김신조부대 청와대 습격

 

실미도 특수부대 창설은

1968년 북한무장공비 31명이 서울에 침투했던 1.21사태에서 비롯된다.

 

 

 

공비 29명이 사살되고,

1명이 자폭,

김신조가 체포되었으나

우리측도 104명의 인명피해를 낸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김신조 기사회견

 

"우리 31명의 임무는 박정희 모가지 뗄 임무고..."

 

"서슴치 않고 박정희 목 베러 왔다 이랬거든.

박정희 목을 베어?

박정희라는 사람은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인데,

그 사람이 잘하든 못하든 우리나라 전 국민의 대통령이야. 그런데 그 사람 목을 베러 와.

그 소리에 격분을 한거야.

이놈...그럼 우리도 김일성 목 베어야 할 것 아냐.

뭐 그렇게 그 부대가 시작된 거예요." 

                                                             - 장지량, 부대 창설 당시 공군참모총장

 

"우리의 자제와 인내에도 한도가 있다는 것을 북한 괴뢰집단에게 ..."  - 박정희

 

눈에는 눈, 이에는 이!

5.16혁명공약에서부터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삼아 체제를 강화하겠노라던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는 더욱 강해졌고

 

북한의 도발 역시 만행으로 이어져

그 당시 사회는 피의 대응을 요구했다.

 

 

                                                              반공궐기대회

  

"이제는 더 못참겠다고 분연히 일어난 성난 시민들입니다.

분노한 시민들의 노효는 천지를 뒤흔들고

그 노효는 김일성의 화형식까지 집행했습니다."

 

 

 

안보 제일을 내세운 박정희대통령은

1.21사태를 계기

북한의 후방 침투에 대비해 200만 명의 향토예비군을 창설했고

학생들에게도 교련 교육을 도입했다.  

 

제비코 작전이라는 TV 외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실미도 특수부대 창설도 이 같은 시대의 산물이다.

 

"내가 보고를 받기로는 전부 범법자라 그랬어요.

골목에서, 거리에서 깡패하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뽑았다고 그래요."

                                                                                  - 김두만, 사고 당시 공군참모총장 

 

작전에 성공하면 죄를 사면시켜준다는 실미도 특수부대에는

무기수 사형수 뿐만 아니라 곡예사, 부랑아

사회 밑바닥에서 생활하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계획은 극비리에 진행시켜 나가게 된다.

 

"박정희는 이 작전계획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재가를 내려주었다." 

                                                                                        - <김형욱 회고록> 중에서

 

"총장이 되면 인수인계를 하니까 그 때 내가 인수를 한거예요.

전임자한테서 인수를 해서 실미도의 존재를 알고 되었고, 그 때 처음 알게 되었어요.

차장 땐 알 수가 없었지요."

                                                                              - 김두만, 사고 당시 공군참모총장 

 

 

 

실미도 특수부대는

당시 권력의 핵심이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대북한공작국장이던 이철희에 의해 만들어졌고

부대 관리는 공군이 맡았다.

 

"공군은 비행기로 부대를 갖다 던질 수도 있고, 북한 침투 방법이 있다 이거야.

그러니 할 수 없이 공군이 붙잡힌거야.

그것까지 내가 거부할 수는 없었어,

그래서 '좋아, 훈련은 우리가 하겠다,

그 대신 언제 보내느냐, 어떻게 보내느냐는 중정(중앙정보부) 너희가 해라, 결정은 너희가 해라' 했습니다."

                                                                                               - 장지량, 부대 창설 당시 공군참모총장

 

이렇게 비밀부대로써의 모든 조건을 갖춘 실미도 특수부대원 31명은 결국 죽게 되고

흔적도 이름도 완벽하게 증발한 채 30년 세월이 흘렀다.

 

숨겨진 실미도 사건을 다시 세상에 들고 나온 사람은 소설가 백동호씨.

그는 1999년에 출간한 소설 <실미도>를 통해

허무하고 원통하게 죽어간 혼령들의 영혼을 대변하고 싶었다고 한다.

 

 

2. 28년간의 침묵,

                실미도 훈련기간병 생존자 여섯 명에게 묻다!~

 

 

국가 기밀이라고 하여 군당국으로부터 아무 도움도 얻어내지 못한 취재팀은

훈련병들은 죽었지만 그들을 훈련시켰던 기간병들 중에는 생존자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삶을 이어가고 있는 여섯 명의 훈련기간병들을 어렵게 찾아낼 수 있었다.

 

제주시 북제주군. 

 

"장백산 줄기 줄기 피어린 자국!~~ "

 

오랜 기간 설득 끝에 입을 연 실미도 기간병 출신 황석종씨

실미도에서 부른 북한군 노래부터 부르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어머님께서 저를 이곳 바다에 데려오셔서 무당 불러 굿하고 그러셨지요... 

꽉 속에만 숨겨 놓으려니 정신적으로 힘들었지요....

지금은 뭐 이렇게 이야기 하고 나니까 마음도 편안하구요..."

                                                                   - 황석종, 51세, 사고 당시 생존기간병

 

"걔네들이 훈련병들 앞에서 총을 맞고 죽었는데...

얼굴에만 총을 삼십 발씩 맞아서...

얼굴에만 탄피가 삼십 발씩 쏟아졌지요..."

                                                                   - 김태수, 50세, 사고 당시 생존기간병

 

"놀래가지고 정신분열증으로 치료도 받고...

약을 먹으면 괜찮은데 그렇잖으면 또 헛소리하고... 담배 피우고... 얼굴 바짝 마르고..."

                                                                      - 한상구, 52세, 사고 당시 생존기간병

 

"차라리 같이 죽었으면...

내가 가슴에 묻고 같이 죽는 게 나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 김방일, 55세, 실미도 특수부대 소대장

 

평생을 가슴 속에 묻고 싶었던 기억.

28년 전 실미도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중년이 된 기간병들이 28년 만에 다시 모였다. 

 

사건이 일어난 지 28년이 지난 후에야 부대원들은 처음으로 다시 실미도를 찾아간다.

죽은 자는 죽어서 말이 없고

산 자도 상처를 품은 채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비극의 현장을 다시 보려는 것이다.

 

실미도는

인천에서 남서쪽 직선 거리로 20킬로미터 떨어진

해발 80미터, 면적은 2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한 사람이 살지 않은 작은 섬이었다.

 

 

 

중앙정보부가 북파 특공대를 훈련 시킬 최적의 장소로 지목한 이곳에서

훈련병과 기간병들은 청춘과 전우를 모두 잃었다. 

 

물이 빠지면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섬, 실미도. 

 

실미도 부대의 공식 명칭은 2325전대 209파견대. 

그러나 부대 이름도 68년 4월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684특공대라 불렸고 

부대 인원도 김신조특공대와 같은 서른한 명으로 구성됐다.

 

28년이 흐른 지금,

더구나 군이 실미도 관련 모든 증거를 제거한 터라

실미도 부대원의 자취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건전지야 건전지.. 이건 훈련화...삼십 년이 지나도 고무는 그냥 있네...

이거야. 이거. 우리가 신문지 삶아서 다 만든 건데 항공 사진을 가지고 만든 평양 주변 산악모형도지..."

 

북한 침투 훈련을 위해

부대원들이 항공 사진을 가지고 만들었던 북한의 산악 모형도와

이 섬의 유일한 식수원이었던 우물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리 훈련병들 하고 기간병들 하고 여름에 70명이 써도 물이 마른 적이 없었어요.

수질검사를 했는데 수질이 아주 좋았어요."

 

물맛이 좋아 예감이 좋았다는 부대 창설 초기.

실미도 부대원 모두가 사기충천해 있었다고 한다.

 

하루 일과는 여섯 시 기상과 점호, 6킬로미터 산악 구보로 이어지고

적진 침투시 생존을 위한 독도법, 생환법, 폭파기술, 호신술 등을 훈련받았다.

 

실미도 특수부대 편성은 모든 교육을 총괄하는 교육대장,  

직접 교육을 담당하고 내무반에서 함께 기거하는 소대장과 통신병, 의무병, 보급병 등  

훈련병 수와 동일한 수의 기간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모든 훈련병들이나 기간요원들이 사기가 충천했지요.

나라를 위해 우리가 한 번 해내야겠다,

우리가 교육을 받고 또 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능력을 발휘를 해보자 다졌지요."

                                                               - 김이태, 56세, 실미도 특수부대 소대장

 

"훈련을 잘 해요.

걔네들은 뛰는 것도 날아다니다시피 해요.

실미도 그 섬을 몇 바퀴씩 돌거든요 6~7 바퀴씩.

피티 체조 같은 것도 많이 하구요.

단련을 잘 받았습니다.

어디 갖다놓아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훈련을 잘 받았어요."

                                                                     - 김정현, 51세, 실미도 특수부대 기간병 

 

목적을 가졌다는 것,

인생의 한 고비에서 국가를 위해 충성을 하고

의미있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은

훈련병들에게 투지와 희망을 주었다.  

 

"저희들이 명령을 받기에는 곧 124부대를 능가해야 한다,

만약에 124군 부대가 4킬로를 몇 분에 뛰었다고 하면 단 1초라도 능가하게 만들려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근데 그게 한 3개월쯤 시키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 김이태 소대장 

 

"진짜 어디에서 갑자기 목표물이 벌떡 일어나든지 다 명중할 수 있는 정도로 훈련을 시킨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해보면 걔네들 자신감이 언제 북에 내보내도 다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은 정도로 충만했습니다."

                                                                                                                                            - 김태수 기간병

 

"특수기술 같은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최고에 달했다고 보겠습니다."

                                                                                                                     - 김방일 소대장

 

 

 

낙오자는 죽인다!

체포되면 자폭하라!

 

훈련은 인간 한도에 도전하는 혹독한 것이었지만 훈련병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실제로 훈련 도중 일곱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훈련병들과 기간병들은

북한 침투를 목적으로 일당 백의 정신으로 훈련을 버텨 나갔다.

 

"그러니까 연병장 한가운데 해골바가지를 딱 걸어놓고

그 밑에 X자로 뼈를 놓고

그 아래 '우리의 신조'라고 써놓은 게 제일 섬?하게 마음에 들어왔지요.

그게 저녁에 보초 설 때 보면 반짝반짝 윤이 나거든요.

비가 부슬부슬하게 올 때에는 그걸 섬광이라고 그러던가요?

아무리 담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거기 가서 그걸 보면 풀이 팍 죽고 그래요."

                                                                                                                - 황석종 기간병

 

 

 

 

3. 3개월이... 3년이 지나도록...미뤄지는 북파 작전 계획!~

                               섬에 갇힌 그들에게서 터지는 사고!... 

                               

 

이를 악물며 기다렸던 예정된 석 달.

그러나 예정되었던 68년 8월의 북파 침투 계획은 취소되었다!

 

"전에 작전 명령이 떨어져 백록도까지 갔었다가 작전이 취소되어 돌아왔었다고 하더라구요.

그거 한 번 이외에는 어떤 기회도 걔네들한테 주어진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 김태수 기간병

 

실미도 근처의 무의도 섬.

물이 빠지면 걸어다닐 수 있는 이 곳에서 대대로 밭을 일구고 고기를 잡으며 사는 무의도 주민들.

 

실미도 특수부대를 곁에서 지켜보며 고초를 겪었던 또 하나의 증인이다.

그들은 30년 전의 일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보통 산꼭대기에서 한 번 뛰면 한 4~5미터를 뛰어넘는 것 같아요.

소나무 같은 것들은 붕 하고 날으는 거 같아요.

굉장히 빨라요. 우리가 봐도 와!~무섭다 싶었지요."

                                                                             - 장해섭 41세 무의도 주민 

 

 "그 사람들 무지 배고파 했어요.

가을 같은 때는 지나가다 고구마나 무우 같은 것도 캐먹고 그래요.

그러다 들키면 짓밟아버리더라구요."

                                                                                      - 김종원 53세, 무의도 주민

 

약속했던 3개월이 지나면서 상부로부터의 식량과 보급은 줄어갔고

인간의 모든 기본 조건이 배제된 실미도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군대 생활 시작하면서 보통 짠밥이라고 그러는데요, 똑같이 먹고 똑같이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단지 그들은 피교육자이고 우리들은 기간요원들이니까,

그들은 더 춥고 배고프고 졸리고 그랬겠지요. "

                                                                                                    - 황석종 기간병 

 

"대장 명령으로 걔네들하고 같이 이렇게 돌아요.

그럼 그 때는 실탄까지 장전을 하고 근무를 서기 때문에

훈련병들하고 같이 섬 주변을 한 바퀴 돌고 할 때는 어떻게 보면 걔네들이 두려웠어요.

외부 어떤 침입자가 무서운 게 아니고, 걔네들이 더 두려울 때가 많았어요."

                                                                                                  - 김태수 기간병

 

대부분 기간병들보다 연장자인 죄수 출신의 훈련병과

기간병들 사이에 갈등도 깊어갔고 

하극상 사건도 발생했다.

 

"훈련을 나갔는데 고추밭에서 맞아가지고, 이마를 때리는데 쓰러져서 권총을 빼앗겼답니다. 

그래놓고 나중에 잘해줄테니까 부대 들어가서 이야기 하지 말라 했대요.

그래서 연대장에 세워놓고 교육장의 지시에 피교육자들을 빠다를 이십 대씩 때렸습니다."

                                                                                                         - 한상구 기간병 

 

실미도 지옥훈련의 장기화는

급기야 무의도의 상처인 용유초등학교 무의분교의 인질 사건을 불렀다.

 

훈련병 세 명이 용의초등학교 무의분교 간사에 난입,

마을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마을 처녀 두 사람을 강간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초등학교 옆에 간사가 있었거든요.

선생님들이 외지에서 오시니까 숙직하며 주무시고 그랬지요.

시간이 나면 동네 젊은이들이 가서 놀고 그랬나봐요.

그런데 두 놈이 들어가서 모포를 덮어씌우고 겁탈을 했는 모양이더라구요."

                                                             - 김종원, 53세, 무의도 주민.

 

인간의 욕망이 생명을 포기할 만큼 절박했던 것일까?

 

사건을 일으킨 훈련병들은 현장에서 자살을 기도,

두 명은 숨지고 한 명은 실미도로 끌려가 죽었다.

 

"생명적인 욕구, 그것도 큰 불만이고 사건의 요인일지 모른다 싶었지요.

그 시기는 잘 모르겠는데, 단체로 항구에 가서 해소시켜준 적도 있었습니다."

                                                                                - 김이태 소대장

 

동료 일곱 명을 잃고도

가혹한 훈련을 견디며

작전 명령만을 기다리던 실미도 특수요원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한 작전 계획은

매번 보류 처분을 받았다.

 

"한 마디로 실망이고, 당혹하고...,

쏜 화살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건데...

다시 돌아왔을 때 돌아온 사람들도 굉장히 낙담을 했습니다..."

                                                                                         - 김방일 55세, 소대장

 

"김형욱은 왜 그 부대를 3년이나 내버려두었나,

북한에 보내든지, 안 보내면 해산해서 고향으로 보내야지,

그게 보통 훈련이 아니예요 굉장한 훈련이라구!

사람인데 그 지옥 같은 훈련을 3년간이나 계속하는데 견디겠나..." 

                                                                                         - 장지량, 당시 공군참모총장

 

죽음보다 더 두려운 건 희망을 잃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려 3년 4개월이 지나도록 상부로부터 아무 지시가 없었다.

 

한편 실미도 특수부대를 만들었던 장본인 중앙정보부장은

1969년 김형욱에서 이후락으로 바뀌고

실미도 처리 문제는 계속 미뤄진다.

 

 

"아!~보니까 분위기가 안 좋다 이거예요!~

가보니까 훈련병들이 하도 오래 갇혀 있어서, 3년이 지나도록 약속 이행을 안 해준다 이거예요!~

그래서 내가 장관한테 그랬어요!~이건 도대체 말이 안 된다 그랬어요!~

이런 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빨리 정리해야 된다 그랬어요!~"

                                                                                                  - 김두만 당시 공군참모총장

 

"이대로 둬선 안 됩니다 자꾸 사고도 생기고.

수영 훈련 중 물에 빠져 죽는 훈련병도 있었고,

그러니까 추후 어떤 개선 방안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훈련병들을 하사나 장교로 인가를 시켜주자 그런 방안도 있었고,

실제 상부로 보고도 올리고 그랬습니다."

                                                               - 김이태 소대장 

 

 

4. 밖깥 세상은 바뀌고!~실미도엔 올 것이 오고!~

            실미도 훈련병들!~그들의 탈주 경로, 그리고 최후!~

 

 

실미도 밖의 상황은 변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 8.15선언을 기점으로 남북 관계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마침내 전면에 나서서 평화통일안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결코 전쟁이라는 비극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72년 남북회담으로 이어지고

실미도 특수부대의 존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중국 입장에서는 소련과의 중소분쟁에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기 때문에 미국과의 화해를 원했고,

미국은 또 월남전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데탕트(긴장완화)를 원했습니다.

 

이런 소위 70년대 국제적인 데탕트가 본격화 되고

이런 것들이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미쳐서

북한의 일관된 군사주의 노선이나

또한 실미도 특수부대 같은 걸 만들어서 보복노선을 지향했던 박정희 정권의 군사주의 노선,

양쪽에 다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군사노선 역시 대화노선을 취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

                                                                                    - 이종석 박사, 세종연구소

 

"군에서 어떡하란 말이야.

모든 걸 중정(중앙정보부)이 통제하는데...

인원, 후방 다 자기들이 장악하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판인데...

예산도 마찬가지.

참모총장이 안된다, 보내라 할 수 없는 문제라고...

국방장관도 마찬가지...

                                                                         - 장지량 부대창설 당시 공군참모총장 

 

"권력으로 봐서는 장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 아니예요?

정보부 일이니까 장관이 더더욱 난처했죠.

그 때만 해도 난 군대에서 쭉 자랐기 때문에 유교적 질서(?)를 생각해서 정보부에 얘기를 안 했다구요. 

근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때 내가 정보부장한테 직접 이야기 했어야 했는데 후회가 돼요."

                                                                                            - 김두만, 당시 공군참모총장

 

버려진 실미도 중앙유격사령부 684특공대!

마침내 파국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1971. 8. 23일 새벽 6시경. 

훈련병들은 탈출을 위한 행동 개시에 들어갔다. 

 

"잠자다가 새벽에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가지고 일어나려고 하니까

내무반 안으로 들어와 총을 난사하는 거예요.

육감이 아!~올 게 왔구나!~해가지고..." 

                                                                                                       - 황석종, 51세, 생존기간병 

 

"훈련병들이 총을 들고 기간 요원 내무반으로 몰려가며 총을 쏘더라구요.

그래서 거기 있으면서 늘 불안했던 사고가 현실로 다가왔구나!~..."

                                                                                                        - 김태수, 생존기간병 

 

외딴 섬 실미도는 순식간에 피비린내 진동하는 난장판으로 변했다.

훈련병들은 3년 4개월간 훈련 받을 실력으로 기간병을 습격했다.

 

그 당시 24명의 기간병 중 살아남은 기간병은

매트리스 아래 숨거나 화장실에 갔다가 숨은 이 등 여섯 명 뿐이었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화장실 문을 열어봤더니 훈련병들의 난동이 눈 앞에 보였습니다.

화장실에서 나오질 못하고 있다가 문을 열어둔 상태로 화장실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한 이틀 전에 화장실 청소를 했기 때문에 내려갔더니 무릎 밑으로 변이 올라오더라구요.

그래서 거기서 있는 동안 기간병들을 걔네들이 사살한 거죠..."

                                                                                              - 김태수 생존기간병

 

"걔네들이 명사수이기 때문에 머리 아니면 심장 부분을 쏠 것 같았기 때문에

매트리스 안으로 들어가서 오른팔로 머리 모양을 하고 납작하게 엎드려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른팔과 등에 총알이 스쳐가지고 제가 생존을 했는데요..."

                                                                                                        - 황석종 생존기간병

 

이날 교육대장을 비롯 열두 명이 사살되고,

여섯 명은 바다로 도망가다가 익사,

모두 열여덟 명의 기간병들이 희생됐다.  

 

"일단 입구에 들어가니까 연병장하고,

기간병 내무반 안에 들어가니까 담요와 매트리스를 뒤집어쓰고 있고, 시체는 널려져 있고,

기간병 내무반 앞에 훈련병 하나가 쓰러져 죽어 있더라구요."

                                                                               - 김방일 55세 실미도 특수부대 소대장

 

"샅샅히 찾으면 다 죽일 수 있지만 

우리하고 감정이 없었기 때문에 여섯 명이나 생존했던 것 같습니다."

                                                                                                 - 한상구, 생존기간병

 

훈련병들은 무이도에 건너가

당시 이장에게 부대장이 급성맹장염에 걸렸다면서 배를 부탁한다.

 

"훈련병 두 명이 선착장 쪽에서 이장님네 마당으로 걸어오더라구요.

걸어 들어오면서 이장님 어디 계시냐고 물어보는데 제가 복장을 보니까

 

먼지투성이의 지저분한 훈련복만 입고 훈련하던 훈련병들이

완전히 A급 피복에 자동소총을 어깨걸이 하고 실탄은 주머니마다 가득 찼고

피워 보지 못한 빨간 신탄진 담배도 주머니마다 몇 갑씩 집어넣고

저희가 볼 때는 완전히 생소한 복장이었어요.

 

이장님을 불러내가지고 하는 말이

자기 부대장이 급성맹장으로 위급하다는 거예요.

후송을 해야 하는데 배 좀 지원해달라 했어요."

                                                                               - 차성교 45세 무의도 주민

 

 

 

낮 12시 20분경.

훈련병들은 인천시 남구, 소칭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다.

 

3년 4개월만에 육지 구경이었다.

이 때 해안 초소의 근무하던 초병이 이들을 소대본부에 신고한다.

 

"그 때는 물이 많이 나가서 배가 육지에 이르다가 닿지 못하고

여러 명이 걸어서 육지쪽으로 나왔어요. 총을 매고.

독배부리가 여긴데, 여기하고 송도유원지 하고, 그 중간 지점으로 나온 걸로 기억이 되네요."

                                                                                           - 최수광 43세, 사고 당시 목격자

 

 

12시 53분.

송도역 앞 삼거리에서 시내버스를 탈취,

서울로 향했으나 연락을 받고 대기 중인 육군 스물네 명과 총격전을 벌인다.

 

 

"바로 이 자리예요!

여기 도로가 약간 올라가는 부분이 있었는데 거기 군인들이 막 도착해서 버스를 세웠어요.

그러니까 버스 안에 있던 군인들처럼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막 버스 유리를 총으로 깨더니 총을 쏘았고

맞아 쓰러지는 군인이 있으니 군인들도 버스를 향해 막 총을 쏘면서 교전을 했어요.

그 때 마당에서 놀던 아이가 자기 집으로 간다고 막 올라가다가 바로 죽었어요."

                                                                                  - 김수덕 64세, 사고 당시 목격자

 

이 교전으로 저지하던 군인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13시 20분.

주안동 정류장에서는 뒷바퀴가 펑크나자

맞은편에서 오던 버스를 강탈해 서울을 향해 달린다.

 

당시 승객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훈련병들은 겁에 질린 승객들을 향해

해치지 않을테니 몸을 숙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말하는 걸 들으니 배를 많이 굶은 것 같더라구요.

우리는 배 굶고 자기들은 따뜻한 밥 먹으며 우릴 왜 섬에 가둬 놨느냐,

우리를 죽이려고 가둬 놨느냐, 어떤 식으로 가둬 놨느냐,

그러니까 박정희를 죽여야 한다라고 하대요.

 

그래서 고속도로도 그 소리를 듣고 안 갔고

국도로 가야 검문소가 있고,

혹시 내가 전조등을 켜고 난리를 치고 가면 위반차량이니까 경찰관이 안 잡겠나,

헌병초소가 있으면 헌병이 나와서 안 잡겠나

이런 생각을 하고 국도로 들어섰는데 아무도 잡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 당시에는..." 

                                                                                     - 정영소 사고버스 운전

   

 

오후 1시 30분경.

오토바이를 타고 추격하며 정지 명령을 내리던 동인천경찰서 소속 경찰이 순직한다.

 

"뒤에서 보니까 경찰 사이카가 막 쫓아와요.

뒤에 훈련병들이 잔뜩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소릴 막 지르더라구요 저 새끼 쏴 죽인다고.

그러니까 앞에서 소대장이 내버려두라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사이카가 더 빠르더라구요.

버스를 질러 앞에 딱 서니 소대장이 쏴 죽이더라구요."

                                                                                  - 김준희 43세, 사고버스 승객

 

 

13시 38분.

소사역에서 2킬로 떨어진 지점에서는 신앙촌 검문소 경찰들이 부상을 당한다.  

 

경인가도에서의 희생자들은

이처럼 사고 연락을 급히 받고 출동한 경찰들이 많았다.

 

"순찰오토바이 순경이 죽은 후, 연락이 되었는지 길을 돌아가니까 경찰관이 권총을 들고 서 있더라구요,

그러니가 그들이 하는 말이 머리를 쏠까 목을 쏠가 하더라구...

그리고는 50미터 남겨두고 탕소리가 났고 경찰이 서 있던 데를 가니까 목에서 피가 나면서 쓰러지더라구요..."

                                                                                                                - 정영소, 사고버스 운전

 

 

 

오후 2시 15분경

버스 운전자 정영소씨가 탈출, 실미도 훈련병이 직접 버스를 몬다.

 

"운전자가 도망가고 훈련병이 운전을 하는데 차가 엉망으로 흔들리더라구요.

그래서 차라리 사고라도 났으면 좋겠다 했는데 그냥 어떻게 끌고 가더라구요.

그런데 가다가 창밖을 보니까 무장한 군인이 쫙 깔러 있어요."

                                                                                   - 김준희, 승객

 

"칼빈총과 실탄을 배급 받아서 당시 대방동 여기엔 잔디밭이 있었습니다.

잔디밭에 대기하려는 찰나에 이미 버스가 진입을 했고

버스 타이어를 쐈던 것으로 기억이 되고..."

                                                           - 이무부, 사고 당시 기동타격대원

 

 

 

"그 때 잠깐 교전이 붙었어요.

제 기억으로는 확실하게 안에서 먼저 쏘지 않았어요.

밖깥에서 먼저 쏘았어요.

밖에서 먼저 쏘면서 교전이 벌어졌는데,

차가 조금 갔는지 어쨌는지 유한양행 가로수를 들이받은 거예요."

                                                                                       - 김준희, 승객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고도로 훈련된 이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면 피신이 훨씬 용이했을 텐데

왜 굳이 무리지어 청와대로 향했을까?

 

이들은 결국 유한양행 앞에서 수류탄으로 생을 마감한다.

왜 이들은 가장 위험한 선택을 한걸까? 

 

"이왕에 죽을 바에 그들이 막 들고 일어난 거야.

누구를 죽이러 온 건 아니래.

북에 보내든지, 우리를 죽이든지 해결해달라고 온거야..."

                                                                             - 장지량 당시 공군참모총장 

 

"배신감입니다.

그들은 3년 4개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체포되면 자폭한다는 구호를 외쳤고

이 한 목숨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조국에 바쳐 통일을 앞당긴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그들을 보안 유지를 위해 전부 죽여버리자는 안이 나왔고

그걸 안 이들이 죽을 때 죽더라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따져야겠다는 배신감, 분노로 떨쳐 일어난 겁니다."

                                                                                            - 백동호, 소설 <실미도> 저자

 

 

5. 이제 국가에게 묻는다!~

                개인의 인권을 지켜주지 못하는 권력은 정당한가!~

 

 

또 하나 떨쳐버릴 수 없는 의문은

훈련병들이 외부와의 통신 시설을 끊어버린 시간은 아침 6시 15분경이다,

헬기로 19분이면 닿을 공군정보부대, 그리고 중앙정보부는 실미도의 난동을 정말 몰랐을까?

 

"통신실에서 제가 통신을 보고 접수하는 일을 맡았는데,

저희가 30분 간격으로 실미도와 교신을 합니다.

그런데 첫번 교신이 안 들어왔어요.

그래서 통신실에 다시 교신을 넣어봐라 했는데,

두 번째 교신도 또 안 들어와서 바로 보고를 드렸어요."

                                                                          - 이준영, 50세, 사고 당일 공군정보부대 통신병 

 

"보고가 들어갔을 겁니다.

보고가 들어가게 되어 있으니까 난 잘 모르지만. 조직상..."

                                                                                  - 김두만, 사고 당시 공군참모총장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 공군 관리하에 수용중이던 특수범..."

                                                                                 - 정래혁 국방장관 사건 발표

 

(범인들입니까?)

- 죄수들입니다.

 

(일반인들이 아닌 건 확실합니까?)

- 군인은 아닙니다.

 

8.23사건 당시 보도도 많은 의혹을 남긴다.

 

군은

공비, 죄수, 특수범, 특수부대 요원 등으로

말을 바꿈으로써 혼선을 빚었고

 

대방동 주민의 협조를 얻기 위해

공비로 발표했노라는 옹색한 변명을 해 은폐 의혹을 가중시키고

 

사건 이틀만에

정래혁 국방장관의 사표가 전격 수리됨으로써

실미도 사건은 서둘러 종결되었다.

 

"그 후에 오후 3시쯤 특수부대에 의한 난동사건이라고 말을 흐렸어요.

그리고 난 후 일체 실미도 사건에 대한 진상이 국회에서도, 언론에서도 전혀 언급이 없었어요.

합동조사위원회에서 조사한 것만 보도되었지, 그 이외의 내용에 대한 보도는 일체 없었습니다."

                                                                                         - 강근호, 65세 사고 당시 국회의원

 

 

 

1971년 8월 24일.

국회내무국방위합동조사단이 조사를 했지만 별 성과없이 막을 내리고

이후 실미도 사건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금기시 된다.

 

"실미도의 일이라고 장소도 비밀인데,

장소의 비밀을 누설해서 김일성에게 이익을 줬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항공법을 같이 적용을 해서 관제공산당으로 몰려서 복역을 했습니다."

                                                                                - 김한수, 63세, 사고 당시 국회의원

 

  

말할 수 없는 사건 실미도.

 

실미도 사건과 연관된 이들은 상처를 묻은 채 소리 죽여 울어야 했고

그렇게 잊혀졌다.

 

그리고 그나마 울어줄 가족도 없는 생존 훈련병은

사건 한 달만에 군사재판을 통해 총살 당한다.

 

"걔네들 중에 조사 받는 네 사람이 있었으니까 봤죠.

걔네들이 악수를 청해요.

그래서 손바닥이 뺨으로 올라갔지요.

우리 동료를 죽인 게 너무 괴씸해서 손바닥으로 뺨을 때렸어요."

                                                                      - 황석종, 기간병

 

"부대는 전부 쑥밭이 되서 난장판이 되고, 여기저기 시체가 늘어져 있고 해서

우선 제1소대 내무반에 들어갔더니 제 옷하고 무기하고 들고 나가는데 앞에 쪽지가 하나 있어요.

 

봤더니

"소대장님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쪽지를 남겨 놓았더라구요.

그 땐 아무 감정이 없었는데 세월이 가면서 보니까 나 하고 교감이 있었구나 싶고,

내가 자기들 아끼는 만큼 자기들도 나를 아꼈구나 하는 개인적인 감정 지금까지 갖고 있어요."

                                                                                                               - 김방일, 실미도 소대장 

 

"정말 청춘을 다 바쳤는데 그게 실패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말을 못하고 있는데

그 땐 정말로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 김이태, 소대장

 

대한민국을 위해

산하하리라 결심했던 젊은이들!

 

아무런 명분도 없이 비명 속에 죽어간 이들을 위해  

살아 남은 이들이 28년만에 위령제를 올린다.

 

이 목숨 다 바쳐서 충성을 하면 새 삶을 얻으리라고 기대했던 서른한 명의 훈련병들! 

그리고 그들을 열심히 훈련시키다가 희생양으로 숨진 열여덟 명의 기간병들!

 

그들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죽더라도 의미있게 죽고 싶었다!

 

누가 이들에게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했는가! 

 

 

 

"만들어는 놓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이 버려진 채

 

그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청와대를 점령해서

박정희 대통령과 담판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으로 만들어 간 것은

전적으로 국가 잘못이라 생각을 합니다."

                                                                           - 백동호 소설가 

 

"국가가

북한에서 그들의 군대를 게릴라를 남파시키는 것처럼

우리도 사지에 우리 군인을, 죄수라 하더라도 우리 군인들이거든요. 몰아넣은 것입니다.

그래 놓고 약속을 지킬 수도 없는 것이고

또 우리 국민을 사지로 몰아넣었다고 본다면

비록 죄수들이라하더라도

당시 국가가 야만성이라고 할까요,

그런 비인간성을 보여준 것이다 봅니다."

                                                                        - 이종석 박사, 세종연구소 

 

우리는 대의를 위해 개인을 버리는 것이 소중한 것이라고 교육 받아왔고, 또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은폐되고 뒤틀린 역사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지금 누구를 위한 안보였던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전쟁과 분단의 시대가 요구한 분노가 애국의 이름으로 한 정권의 야욕으로 이용된 면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  

 

이들은 물을 것이다.  

국가가 개인과 했던 약속은 저버려도 좋은 것인가?

 

그 속에 숨겨진 힘 없는 개인의 인권과 생명은 무시해도 좋은가! 

 

그리고 한 시대의 무모함이 빚은 끔찍한 희생이

국익에 위배된다는 명분으로 은폐된다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과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제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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