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손목시계
김병직(용문면 연수리)
내겐 얇고 모서리가 둥근 사각 금테 오메가 시계가 있다. 십여 년 전 용문 시내를 산책하다 샀다. 그 시계를 처음 본 것은 아마 고등학교 다닐 때였던 것 같다. 아버지가 해외 나갔다가 오시면서 새 손목시계를 차고 오셨다. 작고 예뻤다. 아버지는 시계를 보여주며 설명하셨다. 유명한 브랜드고 전과는 전혀 다른 시계라는 것이었다. 한 눈에도 달라 보였다. 그동안 시계들은 크고 무겁고 두꺼웠는데 이것은 얇고 가볍고 작았다. 새로 나온 전자 손목시계였다. 시간도 초까지 정확히 맞추고 태엽 감을 필요도 없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그 시계를 보고 또 보고 부드러운 천으로 닦고 하셨다.
아버지는 외국에 자주 나가셨다. 국제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업경제과 교수셨는데 영어가 능숙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영어 잘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크셨다. 국제 세미나 사회를 본 적도 있었는데 여러 나라 학자가 발표하고 토론도 하는데 그들의 발언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려운 일이라고 하셨다. 또 아버지는 상과대학 경제학 영어 원서강독 강의를 하셨는데 서울상대 교수들이 학생들 영어 실력이 좋아 부담스럽다며 아버지에게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말씀이 적었다. 말하시는 모습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감정표현에도 서툴렀다. 웃음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슬픈 표정을 본 적도 거의 없다. 눈물을 보인 적은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뿐이었다. 그런 아버지도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다정히 말씀하셨다. 영어에 관한 아버지의 자부심도 그래서 알았다. 고등학생 때 축구 선수였던 일, 일본 대학 유학 중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일, 중국에서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긴 일, 조선인인데도 일본 군인들을 교육한 일, 전쟁 끝나고 일본 군복을 입었는데도 한국 사람이라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었던 중국 사람들 이야기, 배 타고 서해를 건너오면서 겪었던 어려웠던 일 등 나에게는 여러 말씀을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자랑스러웠고, 한편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높은 관직 제안을 몇 번 받았다. 모두 거절하셨다. 이유는 단순했다. 학자는 학자로 살아야지 다른데 눈을 돌리면 안 된다는 지론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의 그런 결정에 불만이 컸다. 6남매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하면서 좀 월급 많이 받는 곳으로 가서 전과와 수련장도 사주고 학원도 보내주고 싶은 바람이 있으셨다. 아버지는 관직을 마다하고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 정년퇴직하셨다. 우리 육 남매도 아버지의 고지식함에 불만을 갖기는 어머니와 같았다. 나를 제외한 형제들은 모두 어머니 편이었다. 지금도 그런 것 같다. 기일에 모이면 어머니 이야기는 하지만 아버지 이야기는 아무도 꺼내지 않는다.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아버지와 용인 공원묘원에 간 적 있다, 사방이 묘지로 둘러싸인 곧게 뻗은 시멘트 길을 한참 올라갔다. 아버지는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들과 작은 호수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모습에서 아버지 슬픔의 깊이를 가슴으로 느껴서 숨이 막힐 듯했던 형제들은 모르는 나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의 비서이고 아내였다. 언제나 옆에 계셨다. 모든 음식은 아버지를 위함이었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겨우내 입을 한복을 정리하셨다. 밤에는 같이 책 쓰고 다음 날 새벽에 보낼 원고를 정리하셨다.
오메가 시계는 부르는 값을 다 주고 샀다, 치룬 값만큼 믿음은 덜 해서 처음부터 제 기능을 다 할지 걱정이었다. 예감대로 얼마 안 되어 고장 났고, 고치기를 몇 번 반복하다 포기했다. 그럼에도 버리지 못하고 오메가 손목시계는 내 책상머리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외국 출장에서 차고 돌아와 살뜰히 챙기던 그 시계가 돌고 돌아 내게 온 것만 같아서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바라보면 아버지 생각나는 고마운 시계다. 그리운 아버지 생각을 버릴 수야 없지 않은가.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