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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10616.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26화 기독교의 얼나는 인류 최고의 사상
210616. [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류영모 ⑨] 임락경 목사 "나에게 스승은 다석이다" 동영상
210617.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㉒ 임락경 목사<上> ---- 아주경제
210623.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㉓ 임락경 목사<下> ---- 아주경제
27. 210623.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27화 십자가는 무엇인가 참죽음이 복음이었다
다석의 오늘살이 철학 6월21일 (월)~6월27일 (일)
28. 210630.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28화 죽음을 오해하지 말라
210630. [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류영모 ⑩] 김원호 이사 "다석은 내 삶의 사표다" 동영상
210630.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㉔ 김원호 이사장<上> ---- 아주경제
210707.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㉕ 김원호 이사장 <下> ---- 아주경제
29. 210707.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29화 마음속 식욕 - 색욕의 짐승이 원죄다
30. 210714.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30화 하루가 일생이다, 예수의 시간을 살다
210714. [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류영모 ⑪] 김성언 총무 "다석은 종교적인 교리로부터의 해방감과
자유함을 주신 분이다." 동영상
210714.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㉖ 김성언 총무<上> ------------------- 아주경제
210721.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㉗ 김성언 총무<下·시리즈 끝> ------ 아주경제
31. 210721.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31화 신의 존재 논쟁을 일거에 타파한, 무유(無有)신학
32. 210728.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32화 서양의 인격신을 배격한 류영모 '허공신'
33. 210804.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33화 '천하효자 류영모'
34. 210811. 34화 다석은 왜 '나를 정음교라 해도 좋다'라고 했나
35. 210818. 35화 '우리말 5개로 신학사상을 혁명하다'
36. 210825. 36화 타고르를 넘는 한국의 시성(詩聖) 류영모의 '복음성가' ---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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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6.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26화 기독교의 얼나는 인류 최고의 사상
https://youtu.be/JY79xamyLvk 26:06
•2021. 6. 16.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언제까지 마르틴 하이데거와 니체를 찾고, 공자와 노자를 통해서만 우리의 영혼과 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는가"
2008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선 아시아 최초로 제22회 세계철학대회가 열렸습니다. 104개국에서 온 2600명의 학자들은 1370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세계 철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단연코 '다석 류영모의 얼나(영혼)와 씨알 사상'이었습니다.
다석은 기독교와 천주교, 유불선을 회통시키고 동서양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순수 한글과 한민족 정신을 통해 '한국 철학'으로 정립한 동방의 성자입니다.
다석 류영모 전기(傳記)를 매주 수요일 오후2시 유튜브 채널 '다석의 생각교실'에서 만나보세요.
*기사 링크 https://www.ajunews.com/view/2021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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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류영모 ⑨] 임락경 목사 "나에게 스승은 다석이다"
https://youtu.be/oYLcS4yehQo 7:44
•2021. 6. 16.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종교 철학자 다석(多夕) 류영모. 다석이 서구의 기독교 정신과 동양 전래의 유불선(儒佛仙) 사상을 회통(會通)해 풀어낸 다원주의 종교철학은 종교적 혼돈의 시대 21세기에 더욱 빛을 발합니다.
다석에게서 직접 배운 제자, 다석을 연구한 학자들을 찾아 큰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인터뷰 시리즈 [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류영모]를 공개합니다.
아홉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임락경 목사입니다.
임락경 목사와의 인터뷰, 영상으로 만나보세요
촬영: 유수민
편집: 윤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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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2021.06.17.(목요일) 06.17 15:13 기준
다석 류영모의 생존 직제자 임락경 "그는 3%의 성자“
https://www.ajunews.com/view/20210609114304137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입력 : 2021-06-16 17:24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㉒ 임락경 목사<上>
다석이 1981년 91세로 숨을 거둔 지 어언 40년이 넘게 흘러갔다. 다석을 스승으로 모시고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났다. 다석의 문하에서 배운 제자는 박영호 임락경(1945~ ) 두 사람뿐이다. 임 목사는 열일곱 살에 광주 동광원에 들어가 1년에 두 차례씩 동광원에 와서 강연을 하던 다석을 만났다. 서울 구기동에 살던 다석은 계명산 자락에 있는 벽제 동광원에도 자주 와서 말씀을 전했다. 임 목사는 양주 장흥의 동광원 남자 수도원에 있을 때 계명산을 넘어가 다석의 동광원 강의를 들었다. 임 목사는 다석의 구기동 집에도 박영호 선생과 함께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찾아갔다.
순창은 행정구역으로는 전북에 속하지만 지리적으로는 광주에 가깝다. 임 목사가 순창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찾아간 곳이 동광원이었다. 그는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지 못하고 화폐개혁(1962)을 한 해라고 말했다. 임락경 소년은 동광원에서 최흥종 목사(1880~1966)를 만났다. 최 목사는 광주 YMCA 초대 회장을 지냈고 평생을 나환자 돌봄과 빈민구제, 독립운동과 교육에 헌신한 광주의 별이다. 그는 최 목사와 이현필 선생 그리고 다석을 인생의 사표(師表)로 삼았다.
당시 한국은 6·25 전쟁을 겪고 나서 먹을 것이 모자라 대부분 가정에서 1일1식을 했고 좀 여유가 있는 집이라야 1일2식을 하던 때였다. 임 목사는 춘궁기에 2일1식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다석을 알기 전부터 1일1식을 실천한 셈이다.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으로서 중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대신 가르침을 얻고자 찾아간 곳이 광주 동광원이다.
“남원에 셋이서 공동경영하는 삼일 목공소가 있었습니다. 순창 고향교회의 오북환 장로, 서재선 배영진 집사, 세 분이 목공소를 했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남원을 찾아오면서 크게 감화를 받은 오국환 서지선 집사가 이 선생을 따라가는 바람에 목공소가 해체되다시피 했습니다. 서 집사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배영진 집사는 고향교회에서 장로로 있으면서 이현필 류영모 함석헌 선생과 현동완 YMCA 총무님 말씀을 자주 했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조금만 더 크면 이분들을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른 나이에 동광원에 들어갔는데, 군 생활을 마치고 갔더라면 이현필 최흥종 선생은 못 뵐 뻔했지요.
다석은 해방 이후부터 매년 광주 동광원에 강사로 왔습니다. 강의가 끝나면 선생님과 같은 방에서 잤지요. 새벽 2시에 함께 일어나 같이 요가를 했죠. 가난해서 강사 숙소가 없었던 게 어쩌면 행운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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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다석을 댁으로 찾아뵌 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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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은 전주 근교에 있던 절 용흥사를 매입해 동광원에 기증했다. 다석이 지은 ‘진달네’라는 시 제목에서 따 진달네 교회라는 이름을 지었다. 다석의 붓글씨를 새겨 현판을 걸었다. 무등산 결핵요양원에서 건강을 회복한 사람들이 전주 진달네 교회로 옮겨와 닭을 기르고 산양 젖을 짜 콜라병에 담아 팔며 자급자족했다. 임 목사도 1969년 군에서 제대한 후 진달네 교회에서 3년 동안 살았다. 다석이 광주 동광원에 강의를 오면 임 목사가 전주로 모시고 가서 진달네 교회에서 하룻밤 묵고 서울로 올라갔다. 다석은 30만원에 절을, 20만원에 인근 산 13 정보를 사서 결핵이 나은 수도자들이 밭을 일구고 살도록 했는데 다석이 세상을 뜬 후 동광원 운영자가 가톨릭 전주교구에 기증했다.
임 목사는 진달네 교회에서 나와 강원용 목사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가톨릭 농민회 활동을 했다. 그 뒤 화천에서 ‘시골교회’를 개척했다. 군대생활을 할 때 일요일마다 예배 보러 갔던 교회가 있던 마을이었다. 화천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55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전북 정읍 옥정호반에 있는 근사한 한옥 건물은 화천 시골교회의 부설 요양원 ‘사랑방’이다. 손자의 난치병 치유에 감사한 할머니가 헌금한 돈으로 지었다. 난치병 환자들이 임 목사로부터 민간요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곳이다.
임 목사는 낮이면 일하느라 전화를 잘 받지 않았고 저녁에는 묵묵부답. 문자 메시지도 씹었다. 심중식 귀일연구소장과 유희영 군산 YMCA 사무총장의 도움을 받아 인터뷰 날짜를 힘들게 잡았다. 그날 인터뷰어가 서울에서 촬영 기자와 인턴 기자를 태우고 네 시간 운전을 해서 정읍 사랑방에 내려갔다. 그리고 두 시간 인터뷰하고 한 시간 식사하고 다시 다섯 시간 운전을 해서 돌아오는 당일치기 강행군이었다. 임 목사는 밭일을 하던 허름한 옷차림새로 서울서 찾아간 손님을 맞았다.
-교회 이름이 하필 시골교회입니까?
“내가 최흥종 목사를 알게 되면서 시골교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최 목사는 결핵 환자들과 함께 살았죠. 1980년대 되니까 관절염, 뇌성마비, 전신마비 환자들이 생기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서 30명이 됐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들끼리 사는 건 시설 인가가 나지 않아서 불법이었어요. 교회 차원에서 하면 규제가 덜했죠. 그래서 교회 간판을 걸었습니다. 장로가 교회를 하고 있다간 목사가 바뀌면 끝나니까 ‘내가 목사가 되자’는 생각을 했죠. 늦게 신학을 배워서 목사가 되고 교회 이름을 ‘망할 교회’라고 지으려고 했지요. 수용할 장애인들이 없어져 교회가 망해버려야 좋은 세상이 되거든요. 그런데 신도들이 교회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냈습니다. 지금 같으면 그냥 밀어붙였을 텐데 그땐 초년 목사라…고향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보니까 ‘시골 향’ 자를 따서 시골교회라고 했죠. 2010년도까지 30~40년 잘 지냈는데, 지금은 장애인들이 갈 곳이 정말 많아요. 그런데 암환자들이 갈 곳이 없어요. 그래서 이곳 사랑방은 시골교회의 암환자 교육관으로 지은 거예요. 암 환자들 교육을 내가 1년에 30회 이상 나갔습니다. 이 건물에서 암환자들이 모여 숙식까지 할 수 있죠. 여기는 교회라기보다는 사랑방으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광주 YMCA 총무를 지낸 최흥종 목사는 어떤 분이었나요?
“다석보다 10년 연상으로 광주 YMCA를 창립하셨죠. 최 목사는 조선이 망해가던 말기에 의병을 살려내기 위해 순검을 했다더군요. 체포된 의병 수십 명을 다음 날 처단해야 하는데 한밤에 최 순검이 ‘너희를 풀어줄 테니 나를 묶어 놓고 도망가라’ 했답니다. 아침에 의병이 다 달아나버린 것이 알려져 난리가 났는데 최 순검은 ‘나 혼자 지키라고 하면 어떡하냐’고 발뺌을 했습니다. 순검을 그만두고 나와서 독립운동을 했는데 3·1운동 때 광주 지역 책임자였어요(최 목사는 서울종로경찰서에서 체포돼 징역 3년을 받았다).
그땐 나병 환자들이 갈 곳이 없었어요. 최흥종 목사가 나병환자들을 위한 시설을 지으라고 선산을 내놓았습니다. 최 목사는 젊은 시절 주먹이 세다고 소문이 나서 나환자들을 지켜주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광주에 가면 최 목사가 돌봐준다고 하니 나환자들이 광주로 우르르 몰려왔죠. 도지사한테 나환자를 수용할 집을 지어달라고 여러 차례 건의했는데, 답이 없자 총독부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광주에서 걸어서 서울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처음에는 150명이 출발했는데 중간에 숫자가 불어나 500명이 모이더래요. 그것을 ‘구나(救癩)행진’이라고 하는데요. 총독부에선 깜짝 놀랐죠. 그래서 만들어준 곳이 여수 요양원입니다. 여수 요양원 박물관에 가면 최흥종 목사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소록도 박물관에도 최 목사 사진이 있죠. 다석 선생이 광주에 올 때면 최흥종 선생과 무척 가깝게 지냈죠.”
-다석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이 세상을 뜨고 없어서 보물 같은 존재가 되셨는데요. 다석의 강연은 어땠습니까?
“다석 기념 학회나 기념 발표할 때 후진들이 글로만 읽고 발표하니까 다석의 모습을 흉내도 못 내요. 촬영 기자가 왔으니 내가 그 모습을 한번 보여주고 싶습니다.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 아오’”
임 목사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노래를 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음성으로 설명하지 않고는 무슨 뜻인지 몰라요. 책에 그저 써놓아도 모르죠. 다석 선생이 하던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다석 선생님은 주시경 선생이 큰 실수를 했다고 했죠. 지금의 한글 자모 24자에 옛글자 4자를 그대로 두었더라면 외국어를 표기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죠.”
우리가 보통 하는 ‘가나다라마바사…’를 다석은 ‘기니디리’로 대신한 모양이다. 다석은 한글을 사랑했고 한글학자들과 가까워 사전 편찬 비용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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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락경 목사가 개척한 화천 시골교회. 여느 교회와 다르게 한옥으로 지었다. <광명시민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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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에 대해 ‘내가 삶의 큰 빚을 진 스승’이라고 말했던데요.
“원래 큰 나무 밑에선 나무가 큰 줄 모르는 거예요. 최초에 최흥종 목사님 영향을 받았고, 이현필, 다석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세 분 다 나로선 빚쟁이죠.”
이현필의 일생을 알고 나면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성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심중식 귀일연구소장 인터뷰 때 가보니 벽제 동광원에 웅장하게 이현필 기념관을 짓고 있었다. 완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현필 선생은 생전에 그런 기와 집에서 하룻밤도 자보지 못했을 것이다.
-심중식 소장이 임락경 목사가 한옥으로 크게 짓자고 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하더군요. 이곳에 와서 보니 사랑방도 호수가에 한옥으로 멋지게 지었네요.
“불교는 어느 나라에 들어가든지 그 나라 건축양식으로 사찰을 짓고 그 나라 옷을 입고 그 나라 악기를 쓰거든요. 기독교는 어느 나라에 가든지 뾰족집 짓고 그 나라 풍속을 안 따라요. 일본에 갔더니 사찰과 신사 건물이 구분 안 될 정도로 비슷해요. 스님들은 일본 정장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복 잘 입으면 중 옷 같다고 하지요. 다석도 평소에 한복 입고 머리 깎고 다니니 중 같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건물을 이렇게 지어놓으니 교회가 아니라 절간 같다고 하는데…. 기독교는 여기서 진 거예요.
불교는 건물 하나를 지어놓고 예불도 드리고 교육도 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다 하거든요. 그런데 기독교는 이렇게 하려면 건물을 5채 지어야 해요. 예배당 따로, 교육관 따로, 숙소, 식사 따로…. 1채로 해결하는 것이 우리 전통 한옥 방식이죠. 화천의 시골교회도 이렇게 한옥으로 지었어요.”
-초등학교만 졸업했다고 하는데요. 책도 10여 권 쓰고 목회자로 활동하시고…. 독학으로 공부를 많이 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나는 낮에는 한 번도 책을 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그래요. 밤에 공부했죠. 낮에는 일해야 하죠. 오늘도 여러분들 오기 전까지 부지런히 일했어요. 그리고 아직까지 책 열 권을 안 사봤어요. 아직 삼국지도 안 읽어봤어요. 내 앞에 없으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책이 100권이 안 됩니다. 책 한 권 사고 싶어도 계속 지킨 전통이 깨질까 봐 안 사고 있어요.
대부분 남의 책을 빌려 읽었어요. 공책도 남이 쓰던 것을 썼죠. 밤에 조카나 동생들이 연필로 쓴 헌 공책에 나는 펜으로 덧입혀서 쓰면 되거든요. 학교 안 다니고 공부하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학교 다닌 사람보다 노력을 배로 해야 해요. 나중에 교수들 하고 회의를 해도 거침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하니까.”
-김성훈 상지대 총장이 국제환경유기농센터를 설립하면서 임 목사를 교수로 임명했는데 ‘초등학교 졸업자가 대학 교수가 된 것은 처음’이라고 소감을 말했더군요.
“김성훈 농림부 장관 때 마침 내가 정농회 회장이었죠. 친하게 지냈어요. 상지대 총장 취임식 날 갔더니 친환경 농업과를 세운다고 하더라고요. 이후에 일부러 찾아갔어요. 친환경 농업과를 설립하는데 친환경 농업이 무언지도 모르는 교수랑 운영하시겠냐고 물었어요. 실제 친환경 농업을 실천한 사람이 교수가 되어야 한다고 했더니, 총장이 학장에게 각 도에 한 명씩 임명하라고 했어요. 강원도의 임락경 등에게 교수 임명장 수여식을 하고 나서 김 총장이 ‘가보로 보관하십시오’라고 해서 화천 집에 임명장을 보관하고 있죠.
미국에서 한 달간 강의 초청이 왔는데 농민과 목사 타이틀로는 비자가 안 나왔어요. 그런데 교수재직 증명서 내니까 금방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미국 가서 한 달간 강의했죠. 서부에서 동부까지 주파했습니다. 가자마자 미주한국일보와 기자 회견했죠. 이현주 목사와 제가 같이 갔어요. 강의는 주로 교민들을 상대로 했죠.
김동성이라는 사람이 중학교 때 나를 따랐는데 미국서 방송을 하고 있었죠. 한인 투표율이 15%였는데, 김동성이 한인 유권자 센터를 만들어서 65%로 끌어올렸어요. 미국 정치인 중에 김동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버락 오바마가 상원의원 때 찾아왔대요. 김동성은 오바마 당선에도 도움을 주고 미국에서 훨훨 날았죠. 김동성을 뉴욕서 만났는데 ‘선생님 내일 방송하셔야 한다’ 하더라고요. 미국에서 방송한다는 것이 신났죠.”
-초등학교 학력으로 목사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야간 신학대학을 정식으로 다녔습니다. 호헌총회 신학대학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대학이지요.”
대한예수교장로회에도 교단이 많다. 호헌총회는 그중에서도 군소교단이다. 신학대학들은 고졸 학력을 기본으로 요구하지만 농어촌 목회자 특별전형은 학력을 따지지 않는다. 임 목사는 정농회 회장을 했고 상지대 초빙교수를 한 경력으로 특별전형을 통과했다.
-기성 대형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기독교 방송에서 추석특집이 나가는데, 목사님 교단이 무엇인지 제일 궁금하대요. ‘대한예수팔아 장사회’라고 적어두고 다신 물어보지 말라고 그랬어요. 다른 목사한테 항의가 오면 어떡하냐기에 ‘나한테 바꿔주라’고 했어요. 전화 바꿔주면 ‘당신은 예수 팔아서 장사 안 하냐?’고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상품이 같으면 싸워요. 가게가 나란히 있어도 상품이 다르면 싸우지 않죠. 예수 팔아 장사하는 사람은 나와 싸우겠지만 거룩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시비를 걸겠느냐 하고 글을 썼더니 다시 한 통화도 안 와요. 그래서 나는 기독교 방송에서 인정해준 대한예수팔아장사회예요.
어디든지 97대 3이라고 하더라고요. 진리를 제대로 하는 것은 3%래요. 제대로 생활하는 사람, 교회, 절이 3%래요. 거기에 다석이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이판사판이 있는데, 이현필 스승님은 ‘이판’이죠. 이판은 청렴결백하게 고기 한 점도 안 먹고 기도만 하는 스님을 말하고, 절 크게 짓고 시주를 좋아하는 걸 사판이라고 하는데요. 나는 이때까지 이판이 훌륭하고 사판은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불교를 지금까지 유지한 것은 이판이죠, 기독교도 마찬가지죠. 이판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유지됐고, 사판 같은 사람이 욕을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영성가 이야기> 책 쓰기 며칠 전에 훌륭한 사판 스님을 만나서 깜짝 놀랐어요. 이판은 자기 밥벌이도 못 한대요. 포교는 누가 하고 절은 누가 지키냐는 것이죠. 그래서 ‘아 사판 중에서 훌륭한 사람이 있고 이판 중에서도 못된 사람이 있구나’하고 판단했어요.
내가 판단하기엔 사판 중에서도 이판 냄새가 나고 이판 중에서도 사판 냄새가 나야 해요. 이판 쪽으로만 가면 외골수가 되고, 사판 쪽으로만 가면 안 되죠. 둘 다 겸할 수 있는 것이 원칙입니다. 다석은 두 가지를 겸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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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묘소 앞에 선 임락경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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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은 수행에서 ‘몸성히’를 강조했는데요. 어려서 콜레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론 병을 앓은 적이 없지요. 비결이 궁금합니다.
“다석은 체조와 요가를 했는데요. 그 시절에도 인도 요가가 있었다면 굉장히 잘했을 거예요. 다석은 스스로 창안한 요가를 했어요(임 목사는 유튜브 동영상용으로 시범을 보였다).
그 체조를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하세요. 두 시간 동안 그 체조만 하는데, 선생님이 허리가 좀 굽으셨거든요. 꼿꼿이 영감님이 왜 그런가 봤더니 앞으로 구부린 체조만 한 거죠. 지금 같으면 뒤로도 펴고 다양한 요가를 했을 텐데…. 그리고 바지 입을 때 손으로 벽 짚지 마라. 목욕탕에서 때 밀어 달라고 하지 마라. 이렇게 생활에서도 요가를 했죠.
내가 한번 선생님께 병원에 간 일이 있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2층에서 떨어졌을 때 ‘내가 왜 낮잠을 자지?’ 하고 돌아보니 병원이라고 했어요. 그때 이후론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없었대요. 일제 강점기에 아들 며느리가 모두 홍콩 독감에 걸렸는데 다석은 안 걸렸답니다. 눈병도, 감기도 안 걸렸다고 해요.”
-다석의 건강법인 1일1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다석 선생님의 1일1식을 따라 해봤어요. 1식도 해보고 2식도 해보고…. 정오가 되기 전에 밥 안 먹기로 결심한 적이 있는데, 아침 4시에 일어나서 타작을 하고, 5시에 밥 먹으러 가면서 산행하는데 배가 고파서 무거운 짐을 들 수가 없더라구요. 밥을 먹으니 둘러멜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일하는 사람이 1일1식은 못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땀 흘리는 일을 안 하는 불한당(不汗黨) 이론에 휘말릴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다석 선생께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일하는 사람은 제때 먹어!”라고 했어요. 무릎 꿇고 앉은 모습을 따라 하니까 “그렇게 앉지 마! 일하는 사람은 그러면 안 돼!”라고 했어요. 항상 예외는 있더라고요.
당시에는 다석 선생님을 따라 한다고 1식을 굉장히 오래 했죠. 그런데 일을 못 하겠더라고요. 다석 선생님은 항상 땀 한 번 안 흘리고 사신 것에 미안해해요. 돈을 안 벌어보고 사셨다고 내가 스승을 불한당이라고 하죠. 종로 집에서 태어나 살다가 한 번 이사 가서 십 여 년 살고, 이사 한 번 또 가서 20년 정도 살고, 환갑 지나서 아들이 먹여 살리니까 평생 돈을 안 벌어보셨지요.”
<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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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2021.06.23(수요일)
다석이 지금 살았으면 환경운동 했을 걸요
https://www.ajunews.com/view/20210620123229975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입력 : 2021-06-23 15:55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㉓ 임락경 목사<下>
임락경 목사는 평생 결혼을 안 했다. 독신으로 살면서 딸 넷을 키웠다. 호적에 입양한 장애인 딸들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식사를 할 때 화천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임 목사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담고 살갑게 전화를 받았다.
“장애인들과 살다 보니 옷을 허술하게 입고 다녀요. 장애인들과 똑같이 살아야 해요. 특별히 구별되지 않게 생활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처음 와서 날 찾으려고 하면 못 알아맞혀요. 예수도 로마 병정들이 붙잡으러 왔을 때 옷을 민중들과 똑같이 입어 찾아내기 어려웠죠.”
인터뷰 중간에 임 목사가 점심을 먹고 계속하자고 제안했다. 이곳에서 자연치유를 받는 분들이 산에서 채취한 아욱 취나물 더덕 무침이 뷔페식으로 나왔다. 산에서 자연으로 자라는 더덕은 밭에서 재배한 것과는 달리 크기가 번데기처럼 작았다. 옥정호 경치를 바라보며 맑은 공기를 마시고 산나물을 먹으면 웬만한 암은 치유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석이 육식도 하지 말라고 했는가요?
“아닙니다. 다석은 육식을 했어요. 다석 댁에 저녁을 먹으러 가면 1960년대에 그 귀한 쇠고기국을 먹더라구요. 질적으로 따지면 다석의 한 끼가 내 다섯 끼 값보다 비싸겠다는 생각도 했죠. 방 안에서 물그릇이 어는 겨울에 선생님 댁에는 스팀이 돌았어요. 거기선 담요만 덮고 충분히 잘 수 있던 거죠.”
-육식도 문제가 되죠. 소가 뀌는 방귀가 온실가스의 주요 원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살이 빨리 찌게 하고 알을 많이 낳게 하는 사료가 괜찮을지 모르겠구요. 채소도 농약을 너무 많이 써서 문제가 되고 있죠.
“내가 경기도 양돈협회 총협회 강사로 갔어요. 나는 고기를 조금 먹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송곳니를 가진 포유류는 고기를 먹고, 어금니가 발달한 포유류는 곡식을 먹지요. 앞니로는 채소나 과일 먹지요. 소나 초식동물은 앞니만 있어요. 그래서 고기 먹으면 미쳐요. 그게 광우병이죠. 사자 고양이 호랑이 늑대는 송곳니만 있어요. 고기를 먹어야 건강해요. 채소 먹으면 병 나요. 개는 어금니와 송곳니만 있어요. 그래서 곡식과 고기를 먹게 되어있어요. 개 예쁘다고 사과 주면 안 먹어요. 돼지는 사람과 똑같이 어금니, 송곳니, 앞니가 다 있습니다. 전체 이 32개 중에 송곳니가 4개. 32대 4, 즉 8대 1을 먹어야 건강한 거죠. 그것을 초과하니까 병이 나는 것이죠. 너무 채식만 하거나, 육식만 해도 안 좋아요. 더운 지방에선 고기를 안 먹는 게 좋고, 추운 지방에선 고기를 먹어야 좋죠. 그래서 부처는 살생하지 말라고 했고, 북유럽에서는 고기를 먹어야 좋다고 한 거죠.
부처님이 잘하신 거는, 더우니까 집을 나가야 하고, 더우면 앉아있어야 하고, 일사병 안 걸리기 위해 그늘에 앉아있어야 하고…. 고기 먹으면 안 되니까 절대 살생하지 말라 했죠. 부처님이 만주에 살았더라면 달라졌을 거예요.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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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동 댁으로 다석을 찾은 사람들. 맨 앞줄 앉은 사람이 다석과 부인 김효정 여사. 맨 앞은 손녀.[사진=임락경 목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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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목사는 건강식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집필했다. 그 내용에 100% 동의하지 않을 전문가도 있겠지만 홀섬(wholesome) 자연식을 강조한 책이니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암환자들을 위한 민간요법을 강의한다는데, 주로 어떤 분들이 오나요?
“병원에서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안 찾아오죠. 의사가 병을 고치지, 나는 병은 안 고쳐요. 항암제 독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아요. 구토하고 머리 빠지고…. 나는 병원에 가지 마라, 항암제 맞지 마라고 하지 않아요. 항암제 독을 해독시켜주면 되지요. 음식 한두 가지 먹도록 하고, 항암제를 맞으면 죽는 환자가 그리 없더라고요. 의사가 아니니까 암 고친다고 하면 큰일 나지요.”
-공기 좋고 물 맑은 데 와서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 암 치유에 아무래도 도움이 되겠지요.
“공기보다는 음식이 첫 째입니다. 자연식을 하면 좋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지요.”
-책을 여러 권 펴냈는데,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어떤 것인가요?
“농민신문에 3년간 연재한 걸 모아서 책으로 펴낸 <흥부처럼 먹어라, 그래야 병 안 난다>가 제일 잘 팔렸죠. 원고료가 상당히 많이 나오더라고요. 잘 받아 썼는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답니다. 그렇게 많이 팔렸다는데 인세가 나오지 않아서 물어봤더니 계약할 때 다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계약을 잘못한 거죠.
건강에 대한 책을 다시 쓰려고 해요. 우리나라 의술이 유럽과 미국을 거쳐 왔는데, 우린 그들과 식생활이 달라요. 허준이 미국 가면 병 못 고쳐요. 허준이 빵, 치즈, 버터 먹는 사람을 연구해보지는 못했거든요. 그래서 한국 사람 병은 <동의보감>(東醫寶鑑)으로 고쳐야 하고 서양 사람 병은 서의보감으로 고쳐야 하죠. 음식이 반 이상 서구화했기 때문에 지금은 허준이 와도 못 고칠 거예요. 허준이 다시 태어난다면 적어도 3년은 새로 공부해야 할 것이에요. 나하고 같이 다니면 1년이면 될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책 제목은 동의보감도 서의보감도 아닌, ‘중의보감’으로 생각해 뒀어요. 기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독재를 할 무렵 농민 노동 여성 부문에서 운동이 활발해지자 당국은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의식화 배후세력의 하나로 규정하고 교육 프로그램의 간사들을 체포했다. 1979년 3월 9일 여성사회분과 간사 한명숙을 시작으로 농촌사회분과 간사 이우재 황한식 장상환, 산업사회분과 간사 김세균, 신인령과 더불어 정창렬(한양대 교수)이 구속됐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원장인 강원용 목사와 함께 유영묵(전 중앙대교수), 박현채 양정규 신혜수가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을 불온 사상을 유포한 불법 지하 용공서클 사건으로 규정했으나 항소심에서 용공서클 혐의는 무죄가 나왔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에 연루돼 붙잡혀가 고생을 했는데요.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더군요.
“나에게 적용된 혐의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조직체계에서 경기도 조직부장이었어요. 세상에 나를 보고 조직에 참여할 사람이 어디 있나요. 거의 서울대 나온 사람들입니다. 임락경 같이 무식한 사람을 어디에 쓰겠어요.”
-고문은 안 당했나요?
“수술을 받거나 담석으로 통증을 느껴도 한 번도 아프다는 소리를 안 했어요. 남산에서 고문당하던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면 통증이 사라져요. 아무리 어려운 일을 겪어도 중앙정보부 끌려가는 것보다는 낫지요. 거기서는 간첩이 되느냐, 사형이냐가 문제였지요. 거기서 경험이 그래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돼요. 아무리 큰일을 겪어도 그보다는 쉬우니까. 아플 때도 아프단 소리 안 해요. 그보다는 나으니까.”
그는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면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지도자들도 함구했다”고 말했다. 약점을 찾아내 협박하고 죽지 않을 만큼 고문하니까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다.
-강원룡 원장은 어떤 혐의로 조사를 받았나요?
“크리스챤 아카데미 직원이 6명인데 6인 서클로 조직도를 그렸죠. 한명숙이 나랑 같이 들어갔습니다. 같이 고문당했지요. 내가 다녀온 뒤에 강 목사가 들어왔어요. 강 목사는 고문을 안 당했더라고요.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노동자 농민 여성 목사 학생 다섯 분야를 교육시켜서 노동, 농민, 여성운동의 싹을 틔우고…. 강 목사는 민주화 운동의 씨를 뿌린 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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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정호 앞에 선 임락경 목사. 호반 순환도로는 풍경이 좋은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사진=유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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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 때 탄압받던 강 목사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방송위원장도 맡고 그랬는데요.
“강 목사가 당시에 ‘나 혼자만 알고 있으라’며 이야기 했는데요. 전두환이 김대중을 사형 집행하려고 할 때 찾아갔대요. ‘내가 당신 시킨 대로 다 할 테니 김대중 사형집행만은 말아 달라’고 했답니다. 그런 연고로 방송위원장과 대통령 자문위원을 맡게 된 거죠. 일각에서 강 목사가 변절했다는 말이 나왔어요. 강 목사가 나한테 “락경이, 누구한테 해명하지 마. 내가 사쿠라가 아니라 겹 사쿠라가 되어도 좋으니까 해명하지 마라” 이러셨죠. 그래서 여태껏 해명을 못 하고 있었는데, 이젠 상황이 바뀌었으니 내가 대신 해명을 합니다.”
임 목사는 다석의 구기동 댁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는 “2층 건물이었어요. 우리나라에 2층 건물이 별로 없을 때였죠”라고 말했다. 인터뷰어가 “다석의 아버지가 유산을 많이 물려줬던 모양이죠”라고 묻자 “종로에 있는 집을 파니까 돈이 남았던 거죠”라고 답했다. “다석이 직접 돈은 안 벌어봤지요. 원래 아버님이 살던 종로 집을 팔아 구기동에 오면서 집과 터가 넓어졌어요. 양봉을 해서 어렵게 생활하지는 않았죠. 손녀들과 함께 사실 때 갔어요.”
-다석이 1일1식하는데 손님들 식사 대접은 어떻게 했습니까?
“보통 선생님은 2시에 일어나시니까, 새벽 4시에 찾아가도 계셔요. 그래서 주로 4시에 찾아갔죠. 저녁만 드시니까, 아침 점심 안 먹고 같이 이야기만 하지요. 저녁까지 있게 되면 저녁을 먹게 돼요. 손님 왔다고 밥을 따로 차리지는 않지만 저녁 때는 다석과 함께 밥상을 차려주시더라고요.”
-다석은 걷기를 좋아했다지요?
“하여튼 어떤 때는 버스 타서 자리가 있더라도 안 앉더라고요. 젊은 사람이 서서 양보했는데도 서서 가시겠다고.”
-책 <영성가 이야기>에서 십자가에 의지하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던데요. 무슨 의미입니까?
“순교자나 옛 성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살았지요. 십자가에 기대고 살면 편할 텐데요. 최흥종 목사와 서서평 선교사의 일대기의 추천사를 내가 썼거든요. 출판 기념식 하는 날 나더러 축사를 하라기에 ‘십자가에 기대고 살면 부자도, 대통령도 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십자가를 지고 살면 어려움만 겪습니다. 최흥종 선생과 다석은 십자가를 지고 산 사람들이죠. 십자가를 지고 살면 힘들고 돈도 안 생기죠.”
-종교는 기독교인데, 가톨릭 농민회에도 관여했더군요?
“다석과 최흥종 목사의 영향이 굉장히 컸어요. 다석 강의가 끝나고 병원장이 ‘예수 이름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는 말을 하니까 다석은 ‘천상천하에 무여불(無如佛)’인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고 합니까’라고 반문했어요. 물론 다석은 기독교에 가까우신 분인데, 기독교 근본주의 논리가 나오면 불경을 대면서 논쟁하더라고요. 불경, 노자, 장자 말씀도 늘 했어요.
그 당시에는 민주화운동을 할 때 가톨릭의 힘이 원체 크니까, 뭐든지 가톨릭을 끼고 해야 안전했지요. 교회는 집회를 못 하게 하는데, 성당에서는 집회를 할 수 있었어요. 천주님과 하나님이 싸우면 하나님이 백전백패예요. 문재현 신부와 문익환 목사가 똑같이 수사를 받았거든요, 그런데 천주님 아들인 문규현 신부는 형을 안 받고 돌아다니고, 문익환 목사는 감옥에 갇혔거든요. 천주님이 훨씬 힘이 세더라는 것이죠. 그래도 저는 천주님 덕을 많이 봤어요. 1978년 가톨릭 농민회에 빨리 가입하라고 해서 했더니, 80년대 전두환이 순화교육(삼청교육대)할 때 가톨릭농민회원은 하나도 안 끌려갔어요. 기독교 단체 친구들은 많이 끌려갔죠. 의정부 경찰서 순화교육 대상자 명단에 내가 1등이었거든요. 그런데도 안 잡혀 가서 이상해서 곡절을 알아보니 가톨릭 농민회에 가입해 있어서 그랬더라고요. 나는 천주님 은혜를 많이 입었어요.”
-정농회라는 단체 회장을 했던데 어떤 단체입니까?
“비료 농약 제초제 쓰지 말고 농사를 바로 짓자는 단체죠. 1976년에 창립했습니다. 우리나라 환경농업 단체 중에서 가장 일찍 이런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러고 나서 다른 환경농업 단체가 생기고… 2000년대 가서는 정농회장을 하면서 환경농업 단체의 이사 감사도 맡고 그랬죠.”
-다른 밭에서는 제초제 살충제를 쓰는데 자기 밭만 안 쓰면 벌레들이 집중돼서 농사를 못 짓는 거 아닌가요?
“옆에서 농약을 치니까, 모든 벌레들이 우리 집 쪽으로 오다가 비료를 쓴 쪽을 먼저 먹으러 가더라고요, 그럼 거기서 농약을 쳐서 죽이는 거죠.
환경농업연합회 농업연구소장이 나를 찾아왔어요. ‘형님 회의 좀 나오세요. 엉뚱한 친구가 회장하려고 해’ 그러더라고요. 환경농업단체에 가보니 모두 70년대에 농민 운동하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들이 전부 단체장이 되어서 왔더라고요. 이 사람들이 60년대에는 사회주의 운동하던 사람이에요. 우리가 ‘70년대까지는 민주화운동하고, 80년부터 2000년대까지 환경운동한 거죠. 그렇게 약속을 한 적도 없어요. 그런데 시대적으로 앞선 일을 한 사람은 그 시대에 그 일을 하더라고요.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하면 훌륭한 사람이고, 조선시대에는 양반 때문에 나라가 망했으니까 양민과 상민을 구별 안 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에요. 70년대는 박정희가 장기집권 독재하니까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죠. 그래서 막사이사이상을 장준하 선생님이 받게 된 것이죠. 80년대는 전두환이 군사독재를 하니까 제정구 의원이 받았죠. 90년대에는 복지 쪽에서 막사이사이 상을 받는다 했더니 꽃동네 오웅진 신부가 수상했죠. 2000년대는 환경 쪽에서 법륜 스님이 받게 된 것이죠.
70년대 훌륭한 사람은 민주화운동 한 사람이거든요. 나는 거기에 맞춰서 살았어요. 근검절약, 평생 헌 옷 입고 살았고, 민주화 운동은 지나칠 정도로 했지요. 90년대 이후에는 복지 운동을 했죠.
유럽에서 양반 상민 차별 없어지고, 독립하고, 근검절약하고, 민주화하고 복지국가 되고, 환경운동으로 이어졌어요. 거기까지 가는데 유럽에서는 한 단계마다 100년씩 걸렸습니다. 내가 소설 <토지> 최서희와 동시대를 살았어요. 다만 ‘과’가 다르니까 최서희는 못 만나도 길상이를 만났겠죠. 내가 환경농민연합회 이사, 감사까지 하기까지 70년이 걸렸어요. 다른 나라는 한 가지를 해결하는데 100년씩 걸려서, 유럽이 저렇게 된 게 수백년 걸렸는데 우리나라는 빨리빨리 민족이라 10년씩, 총 70년 걸리더라고요. 그 대신에 70%씩만 해결이 되었어요. 양반 상민 차별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요. 민주화도 될 듯 될 듯하면서 아직 70%밖에 안 됐죠. 복지정책도 70%밖에 안 됐어요. 캐나다는 장애인이 태어나면 평생 생활비가 나온 데요. 환경도 30% 남았거든요. 앞으로 30년이면 다 될 것 같아요. 30년 뒤에는 양반 상민 없어지고 독립되고, 근검절약 몸에 배고, 민주화도 다 될 것 같은데, 문제는 30년 후에 내가 이 세상에 없다는 이야기죠.”
-아까 책을 산 적이 없어서 <삼국지>도 못 읽어봤다고 했는데 <토지>는 읽어봤군요?
“소설은 안 봤어요. 텔레비전에서 본 거죠. 나는 길상이 과입니다.”
-이민족의 지배와 전쟁 가난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동안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그런지 신흥종교들이 많이 생겼지 않나요. 그런 신흥종교에 대해서 연구를 깊이 한 탁명환씨가 동광원을 이단이라고 비판했던데요. 어떻게 된 겁니까?
“탁명환 교수가 정식으로 사과문을 내고 잘 몰라서 실수했다고 발표했어요. 동광원은 기복신앙이 아닌데요. 일단 그 당시에 머리 깎고 한복 입었죠. 일제 때는 양복 입으면 친일파로 보였는데 1950, 1960년대의 생활풍속을 1970년대까지 끌고 가니까 이단으로 비친 거지만 실제 신앙은 잘 몰라서 그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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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사랑방 문 앞에서 임락경 목사와 인터뷰어 황호택.[사진=유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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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에 관한 시리즈 인터뷰니까 다석 이야기를 좀 더 해보지요.
“다석은 그 시대에 딱 필요한 선각자죠. 일제 때는 오산학교에서 독립군 길러내는 일을 했지요. 지금까지 사셨다면 환경운동을 하셨겠죠.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안 뛰어든 것과 관련해선 그때도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그건 함(석헌)이 잘해’라고 답했습니다. 그 당시에 70, 80이면 지금 100세 넘은 거나 다름없어요. 활동은 못하죠.”
-다석과 함석헌 선생의 관계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더 있나요?
“강원용 목사한테 내가 3시간을 들었지요. 동광원 김준호 선생한테도 ‘함 선생의 여자관계가 어떻고 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김 선생이 답하기를 이승만이 함 선생을 제일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바른말을 하니까. 삼천만 민족이 말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함 선생은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함 선생 말씀은 삼천만 민족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함 선생은 한 마디가 삼천 마디나 다름없죠. 그래서 함석헌을 벙어리로 만들면 삼천만 명을 벙어리로 만드는 것인데, 거기에 함 선생이 말려 들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인도를 다녀온 함 선생이 광주 YMCA 강의를 하러 온다는데 다석이 동광원 강의를 끝나고 ‘거기에 가겠다’고 하시더라구요. ‘왜 가시냐’고 물었더니 ‘내가 꼭 가야해. 함이 강의를 못 하게 해야지!’라고 목소리를 높였어요. 강의 제목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란 말을 듣고는 ‘민족이 나아갈 길? 자기 앞길이나 잘 나아가야지…. 조선의 간디? 난 훌륭한 분이 사는 인도 쪽으로는 평생 소변도 안 봤다. 근데 자기가 인도를 다녀와?’라고 했어요.
그날 다석이 내가 본 모습 중에서는 화를 제일 많이 내셨어요. 함이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여자 문제로 삼천만 국민을 벙어리 만드는 일에 휘말렸다는 것이죠.”
옥정호는 섬진강 다목적댐을 만들면서 생긴 거대한 인공호수로 저수면적이 26.3㎢. 옛날에 붕어 낚시로 유명하던 운암 저수지도 옥정호 안으로 들어갔다. 섬진강 상류에 자리 잡은 옥정호는 일교차가 커서 물안개가 많이 발생하는 봄 가을에는 그야말로 선경에 들어온 듯한 분위기다. 옥정호를 끼고 도는 순환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사랑방 요양원에서 조금 더 가면 임 목사의 고향이 나온다.
“저 위에 폐교가 있었어요. 양로원을 지어보자고 샀는데 동네에서 반대해서 못했죠. 마침 이쪽에 사 놓은 것이 있어서 이쪽에 지었지요. 호수가 좀 보여야 교회도 좋거든요.”
복잡한 서울살이에 찌든 사람들이 이곳에 내려와 며칠 쉬면 스트레스가 다 날아갈 것이다.
-임 목사에게 다석이란 무엇입니까?
“나의 영원한 스승이죠. 정신적으로 하늘을 가깝게 해주신 분이죠. 육체 건강도 다석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늘 일어났다 앉았다 하시면서 건강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먼저 다석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으신 최흥종 목사님, 나중엔 이현필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다가 두 분이 돌아가시니까 다석 밖에 의지할 곳이 없더라고요. 20년 정도 찾아다녔죠.”
임 목사의 배웅을 받으며 사랑방을 떠날 때 밭에서 난치병을 앓는 아주머니 넷이서 밭일을 하고 있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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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27화 십자가는 무엇인가 참죽음이 복음이었다
https://youtu.be/k0ULn3jbEL8 20:19
2021. 6. 23.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언제까지 마르틴 하이데거와 니체를 찾고, 공자와 노자를 통해서만 우리의 영혼과 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는가"
2008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선 아시아 최초로 제22회 세계철학대회가 열렸습니다. 104개국에서 온 2600명의 학자들은 1370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세계 철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단연코 '다석 류영모의 얼나(영혼)와 씨알 사상'이었습니다.
다석은 기독교와 천주교, 유불선을 회통시키고 동서양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순수 한글과 한민족 정신을 통해 '한국 철학'으로 정립한 동방의 성자입니다.
다석 류영모 전기(傳記)를 매주 수요일 오후2시 유튜브 채널 '다석의 생각교실'에서 만나보세요.
*기사 링크 https://www.ajunews.com/view/202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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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모음] 다석의 오늘살이 철학 6월21일 (월)~6월27일 (일)
https://youtu.be/CcenEGv80ms 9:50
2021. 6. 27.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오늘, 오늘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가장 중요한 오늘을 사는 동안 우리가 고도의 벼랑끝 협상이나 일상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든, 초긴장의 조직경영이나 외줄타기의 재테크를 하든 승패는 결국 "자기 관리"에서 판가름 납니다.
코로나 19와 갖가지 갈등으로 고심하는 우리들의 영혼육을 치유하고 단단하게 하는 다석 류영모님의 '오늘살이 철학과 三寶(體·智·徳)' 운동. 2021년 지구촌의 정비공시대에 자기관리의 해법이 될 ‘정음(正音)’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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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28화 죽음을 오해하지 말라
https://youtu.be/MsPXSRGEeMg 18:48
2021. 6. 30.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언제까지 마르틴 하이데거와 니체를 찾고, 공자와 노자를 통해서만 우리의 영혼과 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는가"
2008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선 아시아 최초로 제22회 세계철학대회가 열렸습니다. 104개국에서 온 2600명의 학자들은 1370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세계 철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단연코 '다석 류영모의 얼나(영혼)와 씨알 사상'이었습니다.
다석은 기독교와 천주교, 유불선을 회통시키고 동서양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순수 한글과 한민족 정신을 통해 '한국 철학'으로 정립한 동방의 성자입니다.
다석 류영모 전기(傳記)를 매주 수요일 오후2시 유튜브 채널 '다석의 생각교실'에서 만나보세요.
*기사 링크 https://www.ajunews.com/view/20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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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류영모 ⑩] 김원호 이사 "다석은 내 삶의 사표다"
https://youtu.be/hTzNm1InAPI 6:41
2021. 6. 30.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종교 철학자 다석(多夕) 류영모. 다석이 서구의 기독교 정신과 동양 전래의 유불선(儒佛仙) 사상을 회통(會通)해 풀어낸 다원주의 종교철학은 종교적 혼돈의 시대 21세기에 더욱 빛을 발합니다.
다석에게서 직접 배운 제자, 다석을 연구한 학자들을 찾아 큰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인터뷰 시리즈 [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류영모]를 공개합니다.
열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김원호 이사입니다.
김원호 이사와의 인터뷰, 영상으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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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은, 하늘과 씨알 섬긴 차원높은 군자였죠
https://www.ajunews.com/view/20210628102552365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입력 : 2021-06-30 16:43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㉔ 김원호 이사장<上>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철학자 대회에서는 이틀 동안 19명 학자들이 류영모 함석헌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당시 류영모는 국내에서도 크게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고 함석헌은 민주화 운동가로 더 이름이 높았다. 두 사람이 세계철학자대회를 통해 세계 사상계에 데뷔를 하기까지 씨알재단의 역할이 컸다.
씨알재단은 류영모 함석헌 선생의 씨알정신을 널리 알리고 전파할 목적으로 2007년에 설립됐다. 다석학회 회장 정양모 신부, 유미특허법인 김원호 대표, 함석헌사상연구소 박재순 소장 등이 논의해 씨알재단의 얼개를 만들었다.
다석 류영모는 <노자(늙은이)>를 번역하면서 백성 민(民)을 ‘씨알’이라고 풀었다. 씨알의 저작권은 다석이 갖고 있지만 씨알사상의 홀씨를 세상에 널리 퍼뜨린 사람은 함석헌이다. 그는 <씨알의 소리>라는 정기간행물을 발간해 지금까지 그 맥이 이어져오고 있다.
-함석헌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인지요?
“함 선생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제목을 바꿔 수정증보판을 낸 해가 1965년입니다. 고등학생(1963~1966) 때 함 선생을 뵈었죠. 서울대학에 입학한 이후 함 선생이 문리대 강당에 와서 강연을 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명동 가톨릭 전·진·상 교육관에서 노자 장자 강의를 했습니다. 1970년 4월 <씨알의 소리> 창간호가 나왔을 때부터 정기구독을 해 늘 그분의 생각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1977년경 아내가 셋째 애를 가질 무렵에 함 선생 댁이 있는 원효로에 저도 살게 됐습니다. 그 시절 함 선생이 한복을 입고 원효로 언덕을 오르고 내려가는 모습을 뵐 수 있었습니다.”
-다석 류영모 선생을 직접 뵙지는 못했나요?
“1994년 문화일보에 연재가 시작된 박영호 선생의 글을 보고 류영모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나중에 정양모 신부로부터 다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씨알재단 설립은 제가 존경하는 정양모 신부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재단 설립을 맡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김원호 이사장을 인터뷰하기 보름 전에 용인시 수지구에 가서 정양모 신부를 인터뷰했다. 인터뷰어가 “정 신부가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종교철학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 하더라”고 전하자 김 이사장은 “워낙 명석하시니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간단명료하고 조리 있게 말씀하시죠”라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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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과 함석헌 선생의 공통분모는 씨알이라고 말하는 김원호 씨알재단 이사장.[사진=윤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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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을 연구하고 숭모하는 단체도 있구요. 함석헌 선생 관련 단체도 여럿으로 나뉘어 있는데요. 류영모와 함석헌 두 분의 사상을 함께 계승 발전시키는 단체를 만든 연유가 궁금하네요.
“나는 신앙인 아카데미 조직을 만들어서 진리를 찾는 모임을 했습니다. 정 신부가 그 모임에서 강의를 했지요. 정 신부는 성천문화재단에서도 성서신학 강의를 했는데 그때 류달영 이사장을 통해 류영모 선생에 대한 말을 처음 들었다고 합니다. 정 신부는 ‘성서에 깃들어 있는 사상을 우리말로 포착한 훌륭한 사상가를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석이 세상을 떠난 게 1981년입니다. 정 신부가 독일 유학 갔다가 귀국해서 1971년부터 광주가톨릭대학 교수를 했으니까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그분을 뵙고 한 말씀 들을 수 있었을 텐데…‘라며 무척 아쉽다고 하셨죠.
다석은 1928년부터 1963년까지 35년 동안 YMCA에서 매주 1회 연경반 강의를 계속했습니다. 1955년 어느 날 다석이 1년 뒤 ‘김교신이 죽은 날에 나도 죽는다’ 라고 사망 가정일을 선포하자 김흥호 선생이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속기사 최용식을 불러서 강좌를 쭉 기록하게 했어요. 이렇게 해서 1년치(1956년 10월 17일~1957년 9월 13일) 강의 내용이 세상에 남아 전해지게 됐습니다.
그 뒤 30년이 넘도록 출판하지 못해 기록 원본이 흩어져 사라질 염려가 있었지요. 정 신부가 강의 시간에 ‘누군가 1억 원만 희사하면 출판할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해서 ‘할 사람 없으면 내가 하겠다’고 불쑥 얘기했죠. 그렇게 해서 현암사에서 <다석강의>라는 책이 2006년 3월에 나왔습니다. 정 신부가 ‘책이 나온 김에 학자들이 연구하는 조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서 다석학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박재순 목사는 함석헌 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다석학회에 참여한 것이구요.
함석헌 선생과 다석 선생이 사제지간이죠. 물론 중간에 곡절이 있긴 했지만, 사상의 뿌리가 같은 거지요. 두 분을 기리는 단체를 통합해서 씨알 사상을 제대로 연구하고 알리자는 취지에서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씨알이라는 이름이 두 분의 공통분모 아니겠어요? 씨알 재단을 만들기로 했지만 모금이 잘 안됐죠. 그래서 또 ‘정 안 되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고 했죠. 그렇게 하여 재단이 2007년 9월에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어느새 14년이나 됐군요.”
인터뷰어가 “씨알사상을 요즘 젊은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달라”고 하자 김 이사장은 “나도 씨알사상을 한마디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몰라요”라고 겸손하게 답하면서도 준비된 답을 풀어냈다. “우리가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국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얼이 바탕에 깔려 있는 무언가가 씨와 알이 아니겠어요? 씨와 알을 합치면 바로 그게 하늘의 자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씨알을 깨치고 키우면 하느님 같은 존재가 됩니다. 말하자면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진화된 인간의 모습이죠. 그것은 예수도, 석가모니의 모습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런 취지에서 씨알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함석헌 기념사업회(이사장 목성균)가 올 4월 17일 재단법인 씨알을 비롯한 유관 단체들을 초청해서 함석헌 탄신 120돌, <씨알의 소리> 창간 51돌 기념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장에 가보니 다석과 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모임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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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진.
해미읍성 성지를 찾은 정양모 신부(오른쪽)와 김원호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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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재단이 두 선생을 따르는 모임을 통합해서 대표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런 뜻에서 재단법인 씨알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두 분의 생각을 기리고, 또 그것을 실천하자는 거죠. 여러 갈래의 단체가 하나로 합쳐 공동으로 활동을 모색하는 시기에 접어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단체 하나도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지금처럼 다들 나뉘어 있으면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죠. 점차 좋은 기회가 마련되리라고 봅니다. 함석헌 탄신 120돌 관련 단체 좌담회에서 조직은 달리하고 있지만,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고, 특히 교육의 내용을 새로 짜 청년들을 참여시켜 보람 있는 씨알살이를 할 수 있도록 힘쓰자는 내용을 논의했습니다.”
-2008년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한국의 근대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다석과 함석헌 선생에 대한 연구 발표가 있었는데요. 씨알재단 이사장을 맡고서 류영모 함석헌 선생의 관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봤을 것 같은데요.
“다석은 제자 함석헌에게 ‘내가 오산학교에 온 거는 바로 너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로구나. 그것으로 큰 보람을 느낀다’라고 했습니다. 1921년 다석이 오산학교 교장으로 갔을 때 다석이 31살, 함 선생님이 20살이었습니다. 두 분이 11년 차이지요. 무교회주의자였던 함 선생은 1930년대부터 YMCA 연경반에 나와 다석 강의를 열심히 들었습니다. 김흥호 선생이 연경반 강의에 참여한 것은 해방 후에 이북에서 내려온 이후죠. 어느 날 연경반 강의에 참석자가 하나도 없어 다석이 그냥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 분이 “우리 둘 중의 하나는 연경반 강의에 꼭 참석하자”고 약속했습니다.
다석과 함석헌 선생은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사유를 확장하고,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서 우리말로 사유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두 분은 비슷한 점이 상당히 많으면서도 활동 영역은 또 다른 면이 있었죠.”
함석헌은 1940년 8월 도쿄에서 터진 계우회(鷄友會) 사건에 연루돼 평양 대동경찰서에서 1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다석은 이 소식을 듣고 그동안 그만두었던 ‘통성(通聲)기도’를 다시 하게 됐다. “함석헌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고서는 하느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 안 할 수가 없어 다시 목소리를 내어 간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제자 함석헌을 끔찍히 아낀 것이다.
-두 분의 관계에도 기복(起伏)이 있지 않습니까? 함석헌 선생의 ‘여자 문제’에 대해 다석이 꾸중을 심하게 했고, 두 분이 관계가 소원해진 기간이 오래 갔습니다. 그러나 다석은 일지에서 함석헌 선생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함 석생은 다석이 돌아가신 후에 다석 추모 예배를 이끈 것을 보면 두 분 다 그릇이 크지 않으셨나 싶기도 합니다.
"다석은 옛날로 보면 선비 같은 양반이죠. 함석헌 선생은 굉장히 낭만적이고 감정의 폭이 큰 양반이었습니다. 아마 거기서 다석 선생이 바라는 바에 못 미치는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인간의 잘못으로도 볼 수 있지만 함 선생은 그런 약점이 있기 때문에 더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함석헌 선생에 비해 다석은 정치현실과 거리를 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3·1운동 때 관여가 되어 다석 선생도 잠시 옥살이를 했지요. 그러고 나서는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성서조선> 등에 기고를 활발히 했지요. 그런데 정면으로 권력 집단을 향해 예언자처럼 외치고,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한 사례는 함 선생과 비교하면 거의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죠. 이것 역시 그분의 기질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당신 기질이 조용하고 나를 가꿔 나가는 분이기 때문에 사회활동보다는 개인적으로 계속 하느님을 찾고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찾았던 것이죠.
다석 강의를 보면 언뜻 언뜻 현실에 대해서 울분이라고 할까요, 그것을 표현하는 대목이 나오지요. 사회문제를 완전히 내 문제가 아니라고 한 것은 아니에요. 다만 내가 앞장서서 무엇을 하시지는 않은 거죠. 옛날로 치면 군자(君子)처럼 정치 세계를 떠났던 분으로 생각이 되네요.
일생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한 분이죠. 1943년 53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랐고. 당신의 생각을 펴기 위해서 사회 운동을 펼치는 게 아니라, 적은 인원의 사람을 앞에 두고 교육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생각은 굉장히 차원이 높다고 할까요. 하느님에 대한 정의라든지, 또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에 대한 관점도 인본주의적인 것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이 펼치는 사상은 어쩌면 경천애민(敬天愛民·하늘을 공경하고 씨알, 백성을 사랑한다) 아닐까요?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을 그런 관점에서 제시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예수가 삶의 모토라고 하셨는데요, 역사적 예수는 성경 속에 나오는 예수와는 어떻게 다른지요.
“성경 속에 나오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래서 우리들을 위해서 하느님이 사람으로 내시고 또 그분의 고난을 통해서 그리고 고난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들을 구원하는 관점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 살아있는 예수의 모습을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죠.”
-그럼 살아있는 모습으로의 예수, 역사적 예수는 어떤 의미입니까?
“2000년 전 당시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자기 민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바탕으로 그들이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세상에서 무거운 짐을 벗고 좀 더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복음 아니겠어요? 예수의 삶이 그들과 모든 것을 같이 했지요. 그래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분만큼 지극한 사람이 없었거든요. 어느 특정 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그분의 삶 자체를 직시해서 그 모습을 쫓아 살아야 하겠지요. 오늘 교회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확실히 다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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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진
씨알재단 창립 10주년 기념식장에서 연설하는 김원호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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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활동을 계속하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그 시대에 어떤 일을 했고, 그 조직 안에서 김 이사장이 설립한 신앙인사회학교는 무엇을 했는지요.
“종교인의 사회적인 참여는 당연히 해야 할 의무지, 그것 자체가 정치행위라고 생각하지는 않게 된 것이죠. 과거에 사회 참여는커녕, 지배계급에 영합해서 그냥 살아온 가톨릭의 역할이 끝난 것이지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결정으로 신부들이 미사를 집전할 때 라틴어를 쓰지 않고 모국어로 하게 됐습니다. 그 전에는 사제 혼자서 라틴어로 집전을 하고 신도들은 신부의 뒷모습만 보며 멍청하게 앉아 있었지요. 제단은 벽을 향해 있었죠. 지금은 신도들을 향해 있잖아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2년 요한 23세 교황이 소집해 논의를 계속하다 선종하면서 바오로 6세 교황이 이어받아 1965년 마무리를 지었다. 가톨릭의 변화를 상징하는 공의회였다. 개신교를 갈라진 형제로 인정했으며, 동방정교회와 화해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가톨릭이 사회적 불의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항하는 예언자적 책임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저명한 신학자이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신학 자문으로도 활동한 칼 라너 사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톨릭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치독일의 전체주의에 저항하지 않은 점을 비판했다. 비오 12세 교황(재위 1939~1958년)은 히틀러의 유태인 말살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다간 가톨릭 신자들에게 위해가 가해질 것으로 우려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칼 라너 신부는 최근 작고한 한스 큉과 함께 20세기 기독교 신학의 양대 고봉(高峰)이다.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프랑스 선교사들은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앙의 자유만 인정해주면 일제에 저항하지 않는 입장을 취했다. 신부들은 총독부가 시키는 대로 남산의 신사에 가서 참배를 했다. 일제의 정책을 거부하다간 조선시대 100년 동안 이어졌던 것 같은 가톨릭 박해를 다시 부를 것으로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이 계속 내려오다가 유신독재를 맞으면서 가톨릭이 달라졌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김원호 약력>
1948년 출생
1963~1966년 서울고교
1966~1970년 서울대 철학과
1970~1972년 서울대 경영대학원
2005~2007년 가톨릭대학교상담심리대학원
1981~2018년 유미특허법인 대표변리사
2021~현재 유미특허법인고문, 재단법인 씨알이사장,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이사장, 에코피스아시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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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의 하늘ㆍ세상ㆍ인간 보는 법 배워야
https://www.ajunews.com/view/20210705145426508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입력 : 2021-07-07 17:23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㉕ 김원호 이사장 <下>
1972년 유신통치가 막을 올리면서 민주주의와 기본권에 심각한 제약이 가해졌지만 공포정치로 인해 야당, 대학, 교회 등 사회 각계가 저항을 못 하고 침묵하고 있었다. 공포의 침묵 속에서 지학순 주교와 김수환 추기경이 저항의 목소리를 내고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된 것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지학순 주교 구속을 계기로 해서 결성된 것이 정의구현사제단입니다. 그러나 그 전부터 그런 기운이 있었죠. 김수환 추기경이 1971년 미사 때 민감한 발언을 하자 중계방송이 끊긴 일이 있었거든요. KBS에서 중계하는 성탄 미사였죠. 김 추기경이 사회에 대해 발언을 하기 시작하자 약한 사람들의 억울한 사정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거기에 천주교가 발을 맞추어 함께 걸어갔죠. 명동성당이 말하자면 옛날 소도(蘇塗)처럼 억울한 사람들이 찾아가 한을 표현하는 장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 분위기에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이 결성되고, 그 교육을 위해 신앙인 사회학교가 만들어졌죠. 사회의 어두운 곳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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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서울 가회동 성당을 찾은 김원호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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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때 신부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진보 보수로 양극화하면서 천주교의 정의구현 사제단 활동에 대해 보수층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어렸을 때는 천주교 신자가 50만 명 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00만 명이 넘어섰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구의 1할 정도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가톨릭교회가 다시 보수화했죠. 아픔을 달래주는 교회가 아니라, 현실에 안주해서 종교 행위를 하고, 교회에도 그런 신자들이 늘어나는 보수화가 진행됐습니다. 그리스도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고 고민하는 진보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보수 진보의 갈등이 심한 편입니다.
사회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골이 깊어지고 있지요. 이 갭이 커지면 어디로 귀착이 되겠습니까.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가 편중되게 어느 한쪽에 많이 주어지는,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에 맞지 않는 일이죠.
부동산이나 학교 교육이 그런 쪽으로 흘러가니까. 이것을 잡아줘야 합니다. 남북문제도 좌우 갈등에 이용되고 있지요. 무엇이 사실인가? 사실을 정확히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진영논리에 따라 각자 자기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함석헌 선생 같은 어른이 그리워지는 것이죠. 진정 우리 사회가 가야 하는 길이 어느 길이어야 하는가. 갈등을 치유하고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사회,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각기 이해관계에 억눌려서 해결방안이 나오질 못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의 보수화는 김 이사장의 개인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 전국에 8,000명의 사제가 있다. 이중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는 800명가량으로 추산되는데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 원로 신부는 김 이사장에 대해 “가톨릭 평신도가 550만 명에 이르고 이 중에 진보적인 평신도 단체 5개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지금도 뒤치다꺼리를 다 한다”고 말했다.
-천주교 내부에서 보수 진보의 시각 차이가 존재하는 현상은 민주화가 많이 진척되었기 때문에 뜨거운 공동의 목표가 상실된 현상은 아닐까요.
“그 시대에 비해서는 어느 정도 밝아졌다고 보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를 해치는 거짓이 많습니다. 자기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영향력이 큰 정치 세력이 문제죠. 상대방이 무엇을 한다 해도 다 반대를 하니까요. 어떤 관점에서 정책을 펴나가고, 법안을 만들어가야 합니까. 공동선을 생각해서 나오는 법률이기보다는 어느 계층을 더 위해주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은 ‘국민 국민’ 하니까 그 부분에서의 거리감이 있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는 믿음을 잃은 사회라는 것이죠.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면 치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조부 때부터 가톨릭을 믿은 집안 분위기에서 신부가 되려고 했다는데 그 뜻을 중도에 접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집안에서 삼촌과 사촌 형이 사제의 길을 갔어요. 나도 제대로 사는 길은 신부가 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죠. 그래서 가톨릭 대학에 가려고 공부했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혼자 사셨거든요. 6‧25 때 고향인 진천에서 아버님이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생사를 모르지요. 저는 외아들이고요. 예전에 신부는 부모를 모시지 못했어요. 외아들이 신부가 되면 어머니를 노후에 모실 사람이 없게 되니까요. 외삼촌께서 ‘네가 신부가 되면 네 엄마는 어찌하려고 그러느냐’고 말리시더라고요. 젊었을 때 생각해봤던 길이지만 지금은 아쉬움이 없어요. 신부가 못된 대신에 철학과를 갔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상이 훨씬 자유로울 수 있었지요.
학교에 다니면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생각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신부의 길에서 멀어졌지요. 우리가 예수처럼 살아간다면 어디에 있더라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변리사가 된 경력이 특이합니다.
“신학교 가는 꿈을 접고, 타협한 전공이 철학이었습니다. 철학이 살아갈 길을 제시해주는 학문으로 생각했어요. 사실 잘못 생각한 거죠. 그걸 제시해주는 학문은 없거든요. 내가 앞으로 살아갈 목적의식을 제시해줄 줄 알고 선택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직장생활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선택한 전공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대학원은 경영대학원을 다녔어요. 그리고 장사를 하려고 했더니, 어머니가 ‘내가 너를 장사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공부시킨 줄 아냐’고 공부 더하라고 했어요. 경영대학원에 들어가 2년을 배웠죠.
아주경제가 있는 이 건물이 이마빌딩이죠. 여기에 옛날에 가장 큰 특허 사무소가 있었어요. 이병호라고 대통령 후보로도 나왔던 분이 아버님과 고향이 같은 충북 진천이거든요. 아버님과 비슷한 연배에 같은 소학교를 나와서 그것을 인연으로 해서 무역회사에 근무하다가 이리로 옮겨와서 변리사 자격증 없이 5년 반 정도 근무했죠. 그러다가 그분은 사무실에서 내가 심복 노릇을 하길 원했는데, 나는 직원들의 처우 같은 것을 강조했지요. 그분이 ‘저놈을 가만히 둬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해고를 했죠. 그게 오히려 약이 되어서 공부할 기회를 얻어 변리사 시험을 치게 되었죠. 그리고 개업을 해서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느 틈에 내 사무실이 중앙 특허사무소보다도 더 커졌지요.
이름은 유미특허법인입니다. 김앤장을 빼면 랭킹 1위인 셈이죠. 파트너십 제도에 따라서 나는 지분을 물려주고 지금은 은퇴했습니다. 보통은 죽을 때까지 하거든요. 나는 70에 은퇴했지만 창립자여서 고문으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전화위복이죠. 이병호 변호사께 감사한 일이죠. 그래도 나는 따로 변리사 사무소를 하면서도 그분 사무실로 출근하는 꿈을 많이 꾸었어요. 정이 많이 들었던 터라.”
다석은 좋은 일이라면 돈을 선뜻 내놓았다. 다석처럼 언행일치의 삶을 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김 이사장은 “내 몫의 어느 부분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돌려주는 취지라고 볼 수 있겠죠. 그게 종교의 정신이죠”라고 말했다.
-김 이사장도 변리사를 하면서 월급의 일정 부분은 기부했다고 들었습니다.
“월급의 반은 집사람 주고, 반은 내가 썼어요. 그러고 내가 가진 반 중에서 기부를 한 것이죠. 그것도 나중에 또 사무실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이후에 일이지 그전에는 사무실 꾸려가기가 녹록지 않았고, 빚도 있었습니다. 고마운 것은 그런 일을 할 때 집사람이 한 번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고, 오히려 잘했다고 했어요. 정양모 신부가 그런 점에서 집 사람을 칭찬했죠. 그런 관점에서 제가 가진 것의 반 정도는 사회활동을 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으로 충당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죠.
다석강의라는 책을 만드는 데 1억이 든다고 해서 정양모 신부에게 1억을 드렸는데 돈이 남았어요. 그래서 다석학회를 만들고 남은 돈을 거기로 돌렸습니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을 알고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말했더군요. 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까?
“저보다 못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 대해서는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왠지 모르게 그런 것이 있어요. 그래서 누가 돈 빌려달라고 하면 거절을 못 하고 보증 섰다가 집사람을 힘들게 한 일이 있었지요. 내가 대학원 1학년 때 23번 버스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들었습니다. 전태일 씨와 나는 똑같은 나이였죠. 그런 뉴스를 접하고 이렇게 편안하게 공부하는 나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던 거죠. 인간이 살아가려면 저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쭉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죠.”
-성경에서 어떤 구절을 제일 좋아합니까?
“예수께서 수난 전날 밤에 언덕에 올라서 바친 기도가 있죠.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는 구절(마태복음 26:39)이 기억에 남네요. 그러고 죽을 때 이러고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복음 19:30). 숨을 거두면서 ‘이제 다 이뤘다’고 하셨거든요.”
-에코피스 아시아(Ecopeace Asia) 이사로 활동하던데요. 우리는 식민지, 전쟁을 겪고, 먹고 사는 일에 바빠서 환경에 눈 뜰 여유를 갖지 못했는데 다석은 시대를 앞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자기 곁에 있는 대상들이 수단이 아니고 그것들은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진 존재라는 생각을 다석이 했기 때문이죠. 사람을 수단화해도 사달이 나듯이 다른 생명체를 수단화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를 먹고서 살아가고 있어서 죄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대로 된 먹거리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먹더라도 제대로 키워서 먹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 것이 우리 지구를 보존시키는 길로 이어지겠지요. 다석이 식사하는 것을 제사라고 한 것은 의미가 있어요. 예수도 하느님께 제사 지내는 제물이었죠. 우리가 다른 생명을 제물 삼아서 살아가는 나는 제사의 값을 해야죠.”
-다석에 관해 학자와 제자들이 많은 책을 썼는데, 다석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싶은 책은 어떤 것인지요.
“내가 본 것은 극히 한정적이지만 <다석 강의>와 박재순 교수의 <다석 류영모>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이 상당히 좋았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성서조선> 글을 모아놓은 <오늘>이라는 책이 있어요. 다석이 ‘오늘을 오 느을 같이 살라’고 했죠.”
-성지순례를 많이 다니셨다는데 어디가 가장 인상적이었나요.
“역시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에 예수께서 설교했던 곳, 겟세마네 동산, 장례 치른 곳, 태어난 곳,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행한 곳에 들어선 성당도 있죠. 그러나 그분이 있었을 때 성지(聖地)지, 그분이 떠난 자리에 서 있는 것은 그건 과거지사이죠. 이스라엘의 성지를 보면서 우리가 사는 땅도 모두 성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죠. 인간 삶의 발자취가 있는 곳이면 모두 성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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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고문과 인터뷰하는 김원호 이사장(왼쪽). [사진=윤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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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신부가 안 된 이유를 들면서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했는데, 대학생 때 만난 건가요? 두 분의 러브 스토리를 양념 삼아 말해 주시죠.
“저희는 이태원 성당에서 만났어요. 1964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나서 친구처럼 지내고, 교회 봉사활동도 같이 했죠. 그러다가 대학교 2학년 때 ‘내가 저 사람과 사귀어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그때부터 5년을 사귀었죠. 결혼하기까지 거의 9년을 만났지요.
친구 시절에도 서로 존경했고, 그 뒤에 존경이 뜨거워지니까 사랑으로 바뀌었습니다. 묘한 것이 첫날밤이 첫날밤이었어요. 루소의 <에밀>에도 나오지만 그런 것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시대였지요. 만나면 대화가 많았죠. 결혼 생활을 한 이후에는 연애 시절보다 대화가 없어졌습니다.”
-자녀는 어떻게 되나요?
“셋을 두었어요. 딸, 아들, 딸. 올해가 결혼한 지 49년이거든요. 제일 큰 애가 49살이고. 손주가 일곱이나 됩니다. 어머님도 96세이십니다.
아주 집사람에게 고맙죠. 외아들이 좋은 게 하나 있어요. 누구에게 미룰 수가 없다는 것이죠.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한 학년 위의 여자를 잠시 좋아한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저 애를 사귈 바엔 수산나(부인의 세례명)를 사귀라고 했어요. 장모님도 저를 좋아했고 어머님도 수산나를 좋아했죠.”
-다석을 말하는 사람은 많으나 다석처럼 사는 씨알들이 흔치 않은 현실에 대해 한마디 해주신다면….
“다석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어려움이 없으셨던 분이죠. 자신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던 여건이 돼 있었던 셈이죠. 그분의 독특한 생활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본받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나의 일상 속에서 하늘과 세상 그리고 인간들을 바라다보는 눈길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실제 내 행동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경천애민을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길이 보일 것입니다.”
그에게 다석 릴레이 인터뷰 대상에게 공통으로 하는 “나에게 다석이란?” 질문을 던졌다. “나에게 다석이란 내 삶의 사표(師表)입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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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모음] 다석의 오늘살이 철학 6월28일(월)~7월4일(일)
https://youtu.be/4Tcq9jeLDZg 7:44
2021. 7. 4.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오늘, 오늘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가장 중요한 오늘을 사는 동안 우리가 고도의 벼랑끝 협상이나 일상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든, 초긴장의 조직경영이나 외줄타기의 재테크를 하든 승패는 결국 "자기 관리"에서 판가름 납니다.
코로나 19와 갖가지 갈등으로 고심하는 우리들의 영혼육을 치유하고 단단하게 하는 다석 류영모님의 '오늘살이 철학과 三寶(體·智·徳)' 운동. 2021년 지구촌의 정비공시대에 자기관리의 해법이 될 ‘정음(正音)’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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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210707.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29화 마음속 식욕 - 색욕의 짐승이 원죄다
https://youtu.be/j2tYN04C5V4 18:48
2021. 7. 7.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언제까지 마르틴 하이데거와 니체를 찾고, 공자와 노자를 통해서만 우리의 영혼과 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는가"
2008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선 아시아 최초로 제22회 세계철학대회가 열렸습니다. 104개국에서 온 2600명의 학자들은 1370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세계 철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단연코 '다석 류영모의 얼나(영혼)와 씨알 사상'이었습니다.
다석은 기독교와 천주교, 유불선을 회통시키고 동서양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순수 한글과 한민족 정신을 통해 '한국 철학'으로 정립한 동방의 성자입니다.
다석 류영모 전기(傳記)를 매주 수요일 오후2시 유튜브 채널 '다석의 생각교실'에서 만나보세요.
*기사 링크 https://www.ajunews.com/view/202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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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모음] 다석의 오늘살이 철학 7월5일(월)~7월11일(일)
https://youtu.be/eT0GUpSzL4Y 7:31
2021. 7. 11.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오늘, 오늘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가장 중요한 오늘을 사는 동안 우리가 고도의 벼랑끝 협상이나 일상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든, 초긴장의 조직경영이나 외줄타기의 재테크를 하든 승패는 결국 "자기 관리"에서 판가름 납니다.
코로나 19와 갖가지 갈등으로 고심하는 우리들의 영혼육을 치유하고 단단하게 하는 다석 류영모님의 '오늘살이 철학과 三寶(體·智·徳)' 운동. 2021년 지구촌의 정비공시대에 자기관리의 해법이 될 ‘정음(正音)’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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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210714.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30화 하루가 일생이다, 예수의 시간을 살다
https://youtu.be/nEnfseh1qC8 19:08
2021. 7. 14.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언제까지 마르틴 하이데거와 니체를 찾고, 공자와 노자를 통해서만 우리의 영혼과 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는가"
2008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선 아시아 최초로 제22회 세계철학대회가 열렸습니다. 104개국에서 온 2600명의 학자들은 1370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세계 철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단연코 '다석 류영모의 얼나(영혼)와 씨알 사상'이었습니다.
다석은 기독교와 천주교, 유불선을 회통시키고 동서양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순수 한글과 한민족 정신을 통해 '한국 철학'으로 정립한 동방의 성자입니다.
다석 류영모 전기(傳記)를 매주 수요일 오후2시 유튜브 채널 '다석의 생각교실'에서 만나보세요.
*기사 링크 https://www.ajunews.com/view/202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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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14. [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류영모 ⑪] 김성언 총무 "다석은 종교적인 교리로부터의 해방감과 자유함을 주신 분이다."
https://youtu.be/HceJPGs7EQc 11:39
2021. 7. 14.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종교 철학자 다석(多夕) 류영모. 다석이 서구의 기독교 정신과 동양 전래의 유불선(儒佛仙) 사상을 회통(會通)해 풀어낸 다원주의 종교철학은 종교적 혼돈의 시대 21세기에 더욱 빛을 발합니다.
다석에게서 직접 배운 제자, 다석을 연구한 학자들을 찾아 큰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인터뷰 시리즈 [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류영모]를 공개합니다.
열한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김성언 총무입니다.
김성언 총무와의 인터뷰, 영상으로 만나보세요
촬영·편집 : 윤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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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은 다원주의자 아닌 一元多敎주의자
https://www.ajunews.com/view/20210709160342308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입력 : 2021-07-14 16:38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㉖ 김성언 총무<上>
다석 문하에서 배운 제자들, 다석을 연구하는 학자들, 그리고 다석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자들을 만나는 릴레이 인터뷰의 마지막은 다석사상연구회 김성언 총무다. 다석의 직제자(直弟子)로는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임락경 목사 두 분만 남아 있고 김성언 총무는 박 회장으로부터 다석을 배운 손자 제자인 셈이다.
이 인터뷰는 일단 12명으로 마감을 한다. 하다 보니 예수의 열두제자와 숫자가 같아졌지만, 우연의 일치일 뿐 의도된 것은 아니다. 다석에 관한 논문과 책을 쓴 학자들 몇 분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모시지 못했음을 아쉬움으로 남겨둔다.
다석은 종로 YMCA 연경반에서 소수의 인원을 대상으로 35년 강의를 이어갔다. 어느 날 강의 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함석헌 선생과 김흥호 교수가 우리 둘 중에 한 명은 반드시 참석하자고 약속해 그 뒤로 다석이 강의를 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는 일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다석이 세상을 뜬지 40년이 지났지만 서울 여의도 성천문화재단에서는 박영호 회장과 제자들이 다석 강의의 불씨를 살려가고 있다. 박 회장이 강사로 나오지 않는 날은 호주에서 돌아와 암 투병 중인 최성무 목사와 김성언 총무 둘만 나올 때도 있다.
-다석 사상의 수강생이 적어서 아쉽습니다.
“수강생들을 모으자면 널리 알려야 하는데 스스로 찾아오는 사람들만 받고 있으니 청중이 적지요. 박 회장은 ‘사람 많이 모으려 하지 말라. 사람 많아서 무엇 하려고 하는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임을 알리는 행사를 하거나 전도하는 일은 안 합니다. 어떤 때는 저희 모임 회원들조차도 거의 안 나오고 대표인 최 목사와 저만 단둘이 나올 때도 있었지요. 다석의 ‘참’을 공부하는 것은 외로움 속에서 하는 것이지 여럿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마복음서 말씀 74에 쓰여 있는 글을 읽으며 위안으로 삼습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선생님, 술자배기 둘레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샘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
술자배기는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쩍 벌어진 형태의 옹기를 말한다. 술 주전자 몇 개가 들어갈 수 있는 그릇이다. 술자배기 자리는 걸판지게 술잔이 오가는 주석을 뜻한다. 흥겨운 술자리에는 사람이 모여들지만 참 진리의 맑은 샘물을 찾는 사람은 드물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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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진
김성언 총무는 술자배기 자리엔 사람이 모이지만 진리의 샘물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도마복음의 구절을 인용했다. [사진=윤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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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이 강의하던 종로 YMCA 연경반의 맥을 다석사상연구회가 이어오고 있군요?
“성천 재단은 류달영 선생이 설립해서 그 아들인 류인걸 이사장이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주 화요 모임으로 저녁 7시에 시작했는데 5년 전부터는 일요일 오전 11시로 바꿨습니다. 회원들이 모여 박영호 회장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돌아가면서 주제 발표를 하고 토론하고 점심을 합니다. 다석의 참 진리를 같이 공부하고 알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겠어요. 진리는 혼자 스스로 공부하는 거지, 많이 모여서 같이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보통 열 명 안팎으로 모이다 박 회장이 한 달에 한번 나오는 날에는 20명 안팎으로 늘어납니다. 나머지 주일에는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강의를 하죠.”
-김성언 총무는 박영호 회장을 20년 동안 사사(師事)했다면서요. 박 회장은 어떤 분인가요?
“다석의 정신을 이어가는 데 온 정성을 다 바친 분입니다. 한때 지성인들의 우상이었던 함석헌 선생 농장에서 생활하면서 인간의 겉과 속을 분명히 알게 되고, 다석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단사(斷辭)’의 정신을 이었지요. 다석의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땀 흘리며 농사를 지었습니다. 아주 순수하고 겸손하고 총명하십니다. 박 회장은 이따금 ‘내가 호랑이인 다석을 고양이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하고 자성적(自省的)인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내가 다석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석을 우상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느님을 알리는 데 다석만한 재료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박 회장은 ‘자기(제나)’가 없으신 분이지요. 오직 하느님인 ‘참을 알리는데 평생을 다 바친 분입니다. 내가 박 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3월 서강대에서였습니다. 불교에서는 1만 겁(劫)의 인연이 있어야 스승을 만날 수 있다고 해요. 정말 맹귀우목(盲龜遇木)의 인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승은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입니다.”
김 총무는 대학에서 아랍어를 전공했다. 남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언어를 배우고 싶었다. 아프리카 수단의 카르툼에서 아랍어 석사학위를 받았다. 인터뷰어는 1987년 사하라 사막의 수단에 취재를 하러 간 적이 있다. 그 나라 대통령을 인터뷰했는데 육군 소장 시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사람이었다. 서명해달라고 하니까 직책을 ‘대통령’이라고 하지 않고 ‘육군 소장’이라고 적었다. 육군 소장이 더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온통 모래바람만 날리는 가난한 나라였다. 밤을 모르는 더위로 새벽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마실 물이 부족해 늘 물통을 갖고 다녀야 했다.
-나도 수단에 취재를 가서 거의 보름가량 있었는데요.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수단 카르툼에 22개국 아랍연맹 산하의 국제 아랍어교육 연구소가 있습니다. 내가 유학을 하러 갔을 당시엔 모든 사회적 환경이 열악했지요. 전기가 수시로 끊겨 40~50도 오르내리는 더위와 싸우며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3년 공부하면서 두 번 쓰러졌는데 공부 다 마치고는 더는 체류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귀국했어요. 3년이 마치 10년은 된 듯했지요. 수단에서의 공부가 나를 많이 단련시켜주었어요. 어려운 공부를 하면서 무엇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세계를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랍어 강사를 하다 어떻게 다석에 접하게 됐습니까?
“처음에는 보통 사람들처럼 돈을 벌어, 집도 사고 세계여행을 하면서 살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를 맞으면서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대학 시절에 인생을 이야기해 주는 스승을 만나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쉽게 느껴졌지요. 하루하루 소일하다가 한 서점에서 류달영 선생의 <소중한 만남>이라는 책이 눈에 띄어서 읽게 되었습니다. 감동적인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통해 다석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던 차에 문화일보에 연재된 다석 시리즈를 읽으면서 내가 지금까지 찾고자 한 사상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고 다석 사상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다석이 ‘알라(하느님)’라는 한글 시를 일지에 적어 놓아 그 부분을 해석하는 데 아랍어 지식을 유용하게 사용한 적이 있어요. ‘알라’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단적인 단어라 입에 올리지 않는 말인데 다석은 아무런 선입견 없이 자유롭게 쓰셨어요. 다석은 코란(이슬람교 성서)을 읽고 마지막 114장인 나스(인간)장을 일지에 기록해 놓으셨지요.” 다석이 기독교와 불교 도교(노장)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종교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는 일화다.
-다석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던데요?
“다석 사상에 입문하려는 초심자를 위한 책입니다. 조선대학교 학생회장을 했던 조카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요. 그에게 다석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잘 모르더라고요. 그런데 함석헌 선생에 대해서는 알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다석은 함석헌 선생의 스승이시다. 내가 한번 광주에 내려가서 다석 사상을 강의할 테니 모임을 주선해 달라’고 했지요. 그러면서 무슨 강의를 할까 고심하다가 다석의 시 ‘우리는 어찌 되는 길인가? 인생은 신이 되는 길이다’를 가지고 한 시간 반 이상을 강의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다석 사상은 모든 종교 사상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졌죠. 광주 강연 이후로 많은 사람이 어렵다고 하는 다석 사상을 어떻게 쉽게 풀이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다석의 시(詩) ‘우리는 어찌 되는 길인가?’ ‘참’ ‘마음과 허공’ ‘이승’ 네 편과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 ‘꼭 한 가지 빌 것이다’의 두 편의 오도송(悟道頌)을 풀이하면서 제 나름대로 다석 사상을 정리해 보았지요. 딱딱한 내용이 아니라 부드럽고 함축적인 시(詩)를 통해 초심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가령 ‘이승’이란 시는 여섯 줄에 불과합니다만 그 시속에 인생이 다 들어가 있지요. 인생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살라는 다석의 메시지가 들어 있어요. 한번 들어보세요.
‘이승의 삶이란 튕겨논 줄 쟁쟁이 울리우나 멀잖아 끊길 것
이승의 삶이란 피어난 꽃 연연히 곱다가 갑자기 시들 것
이승의 삶이란 방울진 물 분명히 여무지나 덧없이 꺼질 것’”
-지금 쓰는 책에 다석은 다원주의자가 아니고 일원다교(一元多敎)주의자라고 했던 데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학자들이 편하게 다원주의(多元主義)라고 쓰는데 다석 사상은 일원다교입니다. 어떻게 으뜸 원(元)자가 여럿이 될 수 있겠어요. 다석 사상은 ‘하나’에서 시작해서 ‘하나’로 끝난다고 할 수 있지요. 천부경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과 같아요. 다석 선생은 ‘하나’밖에 없다고 했어요. 많은 종교가 있지만 다 같이 ‘하나’만을 가르치고 있지요. 그래서 일원(一元)이 되어야 하고 교(敎)가 많으니까 다교(多敎)가 됩니다. 다석은 종교는 다 다르지만 ‘하나’로 같다고 했습니다.”
-박영호 회장은 "다석 사상으로 조직종교를 한다면 이미 다석 사상이 아니다"며 다석 사상을 종교화하거나 교회화 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던데요. 실제 어떤 종교화 움직임이 있었습니까?
"박 회장은 다석 사상에는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과 제자가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다석 사상을 공부하면서 다석의 진리 정신을 이을 생각을 해야지, 사람들을 많이 모아 교회처럼 조직을 키운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박 회장은 어떤 조직도 만들지 않았던 다석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조직이 있는 단체들은 더욱더 세(勢)를 확장하려고 하지요. 그것이 다 탐욕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그냥 사람들이 많으면 좋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사실은 사람들이 많을수록 진리와는 멀어지고, 세속적인 이야기가 난무하지요. 다석은 석가 예수처럼 진리 보존을 우선하라는 뜻에서 조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김 총무는 종교가 있습니까?
“내가 다석 사상을 접하기 전에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렇게 두루두루 공부를 해봤습니다. 아랍어를 공부한 것도 다석 사상 연구에 도움이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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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진
임락경 목사(가운데)가 사목하는 화천 시골교회에서. 오른쪽이 박영호 회장, 왼쪽이 김성언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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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은 제자 중에서도 특별히 아꼈던 박영호 회장과 단사(斷辭)를 하고 나중에는 ‘마침보람’이라는 졸업장을 주었는데요.
“마침보람은 박 회장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으신 것으로 그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이는 마침보람이 하버드대 졸업장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석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주고받는 말을 끊고, 즉 말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하느님께 말씀을 받는다는 의미로 단사(斷辭)라는 말을 썼지요. 박영호 회장이 스스로 영적 자립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계기가 되었지요. 단사 기간에 박 회장은 ‘새 시대 신앙’이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단사는 성직자들이나 교육자들이라면 꼭 생각해 봐야 할 말씀이지요. 단사에 대하여 다석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조직이란 자꾸 끌어 붙이자는 것인데 실은 풀어 헤치는(分散) 것만큼 시원한 것은 없어요. 우리는 시원한 자리에 가자는 것입니다. 거래란 귀찮은 것이지요. 다 흩어져 제 노릇을 하자는 것입니다. 단사(斷辭)를 해야 해요. 만나고 싶은 생각도 편지할 생각도 안 나야 합니다.’
단사(斷辭)란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 말입니다. 단사(斷辭)하여 자오(自悟: 스스로 깨달음)하시오. 정(情)을 빨리 떼어버려야 하느님 사랑이 됩니다. 다르마(참, 진리)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불경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석은 “선악과에 죄가 없다. 탐진치(貪瞋痴)가 원죄”라는 말을 했는데….
“기독교 교리가 선악과의 원죄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석은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를 원용(援用)했습니다. ‘탐’은 말 그대로 탐욕, ‘진’은 진성에서 화냄 분노, 불교의 ‘치’는 어리석음을 의미하는데요. 다석은 치가 ‘치정(癡情)’의 성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죠. 크리스천들이 이것을 가지고 다석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왜 기독교의 선악과를 말하지 않고 불교의 탐진치를 얘기하는가. 다석은 사람이 탐진치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셨죠. 그래서 바로 그 탐진치에 죄가 있는 것이지, 선악과를 먹어서 원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죄는 자기가 없애야 죄 사함을 받는 것이지,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왜 기독교에서는 죄를 사람 각자에게 있다고 하지 않고 죄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지요? 그리고 죄 사함을 예수의 보혈로 받는다는 것이 21세기 첨단산업인 인공지능, 의과학 시대에 보편적 인식으로 통용될 수 있을까요? 다석이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죄’는 사람 각자에게 있는 것, 즉 우리가 타고난 탐진치에 있는 것이지요. 탐진치를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는 속물로서 죄인 그대로 사는 것이고, 탐진치를 다스리면 ‘얼나로 솟나’ 성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석이 2500년 전 붓다의 삶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볼 수 있어요. 더는 탐진치를 불교의 전유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깨어 있는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탐진치를 잘 다스려서 스스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김성언 총무 약력>
1956년 출생
1976~1983년 명지대학 아랍어과
1983~1986년 수단 카르툼 국제 아랍어 교육대학원 석사
1987~1988년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 아랍어과 주임교수
1987~1995년 명지대학 아랍어 강사
1999년 다석사상 연구회원
2005년 다석학회 회원
2010~2014년 인천 국제교류센터 아랍어 강사
2013년~현재 인천 다석사상 연구회 대표
2017~현재 다석사상 연구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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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모음] 다석의 오늘살이 철학 7월12일(월)~7월18일(일)
https://youtu.be/4FRgIbSVKyk 8:37
2021. 7. 18.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오늘, 오늘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가장 중요한 오늘을 사는 동안 우리가 고도의 벼랑끝 협상이나 일상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든, 초긴장의 조직경영이나 외줄타기의 재테크를 하든 승패는 결국 "자기 관리"에서 판가름 납니다.
코로나 19와 갖가지 갈등으로 고심하는 우리들의 영혼육을 치유하고 단단하게 하는 다석 류영모님의 '오늘살이 철학과 三寶(體·智·徳)' 운동. 2021년 지구촌의 정비공시대에 자기관리의 해법이 될 ‘정음(正音)’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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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이단이라 부르지 말라…다르면서도 같은 것 많다
https://www.ajunews.com/view/20210715132700276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입력 : 2021-07-21 17:02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㉗ 김성언 총무<下·시리즈 끝>
성경에는 신화적인 이야기가 많다. 하느님이 세상을 6일 만에 창조했다는 창세기라든가, 예수의 동정녀 탄생,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탈출할 때 바다가 갈라졌다든가, 예수가 죽은지 3일 만에 부활했다든가···.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 비교종교학과 명예교수는 이것을 신화적 상징으로 보지 않고 문자주의로 해석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던데요. 선악과도 신화적 상징으로 봐야지, 문자 그대로 푸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요?
“정확한 지적입니다. 신구약에 정통한 정양모 신부도 창세기는 신화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부가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대단히 용기 있는 말씀이죠. 신화적인 입장으로 보는 것과 그것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신화로 인정을 한다면, 종교 간 혹은 교리 간 갈등이 없을 텐데요. 그것을 문자적으로 곧이곧대로 해석하다 보면 과학이 첨단으로 발달한 21세기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잖아요. ”
-다석은 박영호 선생이 문화일보에 글을 쓰기 전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데…장자의 성인무명(聖人無名)을 실천하려는 정신 때문이었나요?
“다석은 장자의 성인무명을 의도적으로 실천하진 않았어요. ‘이름’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있었지요. ‘이름’이란 필요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니 이름을 내려고 할 필요가 없지요. ‘이름’에 대한 다석의 말은 이렇습니다.
‘생명은 고정할 수가 없다. 고정하면 죽는다. 발전해가는 것에 이름이 있을 수 없다. 이름은 고정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름이 있을 수 없다.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나가 아니다. 벌써 다른 것으로 바뀐다.’(다석어록)
이렇게 ‘나는 이름이 없다’고 선언했어요. 성인무명(聖人無名)이 저절로 된 것입니다. 또한 ‘이름’에는 이르름(至)이라는 뜻이 있다고 했지요. 이름만 불러가지고는 쓸데없다는 겁니다. 하느님 앞에 가고, 가고, 가고 해서 거기 가서 이루는 거, 거기 도달하는 거, 그걸 말하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 하느님의 이름만 불러가지고 나는 참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실제로 거기에 다다라 이루어야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거라고 다석은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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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진
다석 묘소를 찾은 김성언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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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중용(中庸)에서 적연이일망(的然而一亡) 암연이일장(暗然而日章)이라고 했는데요. 뚜렷하게 있는 것은 나날이 망해버리고, 캄캄하고 암담한 것은 나날이 빛난다는 뜻이죠. 김 총무는 지금 쓰고 있는 책에서 다석 사상이 바로 암연이일장이라고 했던데요. 이것은 “어둠이 분명히 빛보다 크다”는 다석의 말과도 통하는가요?
“다석사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참을 찾아 그 참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상’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너무나 형이상학적인 말인데 그것을 잘 표현한 것이 중용에 있는 ‘적연이일망 암연이일장’ 입니다. 세상적인 것들은 다 드러나 있어 바로바로 보고 알 수 있지만 그것은 겉모습만 볼 뿐 속은 모르지요. 겉은 분명히 좋아 보이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해 나빠지게 됩니다.
붓다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모든 상대적 존재)에서 몽환포영(夢幻泡影: 꿈, 허깨비, 거품, 그림자)이라고 말했지요. 그런데 다석사상은 처음엔 어려워서 캄캄하게 생각되지만 공부해 갈수록 조금씩 혜안이 생기고, 삶에 힘이 되며 빛이 비취는 것 같은 희망이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어둠이 분명히 빛보다 크다’는 다석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석은 “나는 공부를 안 해서 한글 맞춤법을 모른다”고 겸손하게 말하면서도 훈민정음에 관심이 많아 국어학자 이정호와 함께 연구를 했지요. 한글을 뜻글자처럼 활용하기도 하고요. 재야학자 서상덕의 저서 ‘국문철자법’ 출판비용을 대줬는데요. 서상덕이 책에서 ‘다석이 땅을 팔아 출판비를 만들어주셨다’고 칭송했더군요. 다석의 공익을 위한 기부 정신과 한글사랑이 드러나는 일화지요.
“다석의 훌륭한 점은 불교계가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마음과 ᄆᆞᆷ을 뚜렷이 구분해 준 것과 표음문자(表音文字)인 한글을 표의문자(表意文字)처럼 살려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과 ᄆᆞᆷ을 가려서 쓰고 싶습니다. 마음이란 상대적인 세상에 욕심을 붙여서 조금 약게 영생하는 데 들어가려는 것입니다. ᄆᆞᆷ이란 모든 욕심 다 떼어 버리고 자신을 세워나가겠다는 것이죠.
지극한 한글 사랑으로 천부경, 노자, 중용, 반야심경등을 순 우리말로 풀어 놓으셨지요. 지식인들이 자기가 아는 외국어로 표현하면서 지식을 뽐내지만 다석은 하느님이 준 선물인 우리말을 살려나가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말 ‘오늘’은 오! 감탄사와 ‘늘’이라는 영원을 뜻하고, ‘아침’은 아! 처음이며, ‘기쁨’은 기가 하늘에서 뿜어져 나옴이고, ‘사람’은 (말씀을) 사뢰는 이, ‘사나이’는 산 아이, ‘고맙다’는 고만하다, ‘모름지기’는 모름을 지키는 이….
서상덕 선생의 책 서문에 다석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천우신조하시와 이번에 자하문 밖에 계신 류옹(柳翁)께서 땅을 팔아 출판비를 만들어 주셔서 다행히 이 <국문철자법>의 책자를 내놓게 되오니 여러 동포들과 함께 기뻐하며 열 번 절하고 지성으로 류옹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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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진
황호택 논설고문(왼쪽)과 대담하는 김성언 총무.[사진=윤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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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팔아 <국문철자법> 비용을 대준 일화에서도 드러나듯이 다석의 돈철학이 남다른 것 같아요. 다석은 종로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한때 아버지의 권유로 장사도 했지만 재산이나 돈에 대한 애착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석 선생과 이현필 선생 사이에 있었던 미담(美談)을 동광원의 김준호 선생이 ‘이현필’이라는 책에서 써놓았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빛고을 광주에서부터 걸어서 서울 삼각산 밑에 있는 다석 집을 찾아갔다. 한 달 이상이 걸리는 길을 갈아입을 옷도 없이 흰 옷 한 벌로 다석 집에 도착했을 때는 흰 옷이 까맣게 때가 묻었고, 땀을 흘려 머리도 미친 사람 마냥 덥수룩한 모습이 거지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다석은 이현필 선생을 보자마자 맨발로 뛰어나와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안아 주듯이 꼭 안아 주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옷을 갈아 입히고 사모님 한 테 옷 빨라고 내놓고 길가에서 거지를 안아다가 목욕을 시키듯이 씻어 주셨다. 그리고는 새 옷으로 갈아 입히고, 또 옷을 빨고 말려서 다시 입을 때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일주일 후에 이현필 선생이 떠난다고 하니 다석은 신문지에 돈 뭉치를 싸서 내주시면서 이걸 가지고 가서 쓰세요라고 했다. 그 돈은 다석이 30년간 십일조를 모은 것이라고 사모님이 귀띔해 주었다. 그러나 이현필 선생은 그 돈을 자신을 위해서나 동광원을 위해서 한 푼도 쓰지 않고 내려오는 길에 대전 목포 부산등지를 돌면서 어려운 가정에 한 뭉치씩 떼어주고 빈손으로 광주로 돌아왔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30년간 모은 십일조를 서슴없이 내놓는 다석의 모습 속에서 참사람(眞人)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다석은 돈이란 남이 빌리러 오면 빌려줄 수 있을 정도면 된다고 하시면서 재물부자보다는 마음부자로 살고 싶어했지요.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마음부자로 사는 것인 줄은 한동안 몰랐어요. 그러다 무릎을 딱 치는 다석의 글을 만나게 되었지요.
‘마음 그릇을 가지려거든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가지세요. 우리 마음이란 지극히 큰 것으로 마음을 비우면 허공(하늘나라)이 그 안에 들어옵니다.’
마음속에 하늘나라가 들어오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음부자로 살고 싶은 분들은 마음을 비우면 되지요. 마음이란 끊임없이 비워 나가야 조금씩 비워집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가지면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돈에 매여 살기 때문에 부자유스럽습니다. 그래서 다석은 매임과 모음을 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사람에게 매이려 하고 재물을 모으려 하는 매임과 모음은 그만두어야 한다. 이 세상을 죄다 잔뜩 모아서 앉아 있으려 하여도 그렇게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사람이 모은 것과 매이는 것을 전제로 공부를 한다면 아예 공부를 하지 말든지 해야지, 그래서 세상에 나와서 무슨 짓을 하겠는가? 매이기만 하고 모으기만 하려고 하면 영원과는 융합이 될 수 없다. 꿈 같은 이 세상에 꿈꾸듯 지나가는 것밖에 안 된다. 매이는 것과 모으는 것은 집어치워야 한다. 자꾸 매임과 모음만 찾다가는 마귀 생각에 빠지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다석어록)
-다석이 "나는 통일(統一)이 싫고 귀일(歸一)이 좋다"고 했는데요.
"단순히 이 글만을 본다면 다석은 남북통일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닌가 오해하기 쉽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네, 그 말만 들었을 때는 다분히 그런 오해가 있을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은 죽으면 자연스럽게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귀일을 늘 강조하셨죠. 불교에서도 귀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했듯이, 다석 선생님은 귀일을 가장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통일은 인위적인 힘에 의해 돌아가는데, 귀일은 자연스럽게 돌아가니까 아주 좋아하셨죠. 인위적인 통일 보다는 자연스러운 귀일(귀일(歸一))을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만법귀일(萬法歸一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이라고 하지요."
-다석어록에 ‘동야자이야(同也者異也), 즉 같은 것이란 다른 것이다. 이단이라고 헤프게 부르지 말라. 자기하고 다른 것이 이단이면 자기 자체 속에 또 다른 것이 좀 많겠는가. 이 죄다가 이단일 것이다’라고 했는데요. 다석이 말한 '동야자이야'의 원전(原典)이 있습니까?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에 비슷한 표현이 있긴 합니다. 불능동자 즉동이이야(不能同者 卽同而異也·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같은데 있으면서도 다른 것이다) 불능이자 즉이이동야(不能異者 卽異而同也·다르다고 할 수 없는 것은 다른데 있으면서도 같기 때문이다)란 구절이 그것입니다. 다석은 금강삼매경의 개념을 원용(援用)하고 확장했지요.
'함부로 이단(異端)이라고 헤프게 불러서는 안 된다. 자기하고 다른 것이 이단이라면 자기 자체 속에도 다른 것이 좀 많겠는가? 그렇다면 죄다가 이단일 것이다. 나 아니고서는 모두가 이단인 것이다. 한 가지라고 할 것이 하나도 없다. 동야자이야(同也者異也)는 또 사뭇 다른 것은 같다는 뜻도 된다. 머리하고 발하고는 절대 다른 것이다. 그러나 다르다고 해서 다르게 움직이면 되겠는가? 그래서 우리의 머리와 발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같다는 말 속에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일치할 것이다. 같은 것이라도 따지면 다르고, 다른 것이라도 따지면 같은 것이 된다.'”(다석어록)
새로운 사상이란 바로 이런 이단적인 생각으로부터 나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란 한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자들의 이단 사상이다.'"
‘같으면서 다르다’ ‘다르면서 같다’는 다석의 말은 이단을 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세계의 주류 종교들은 자기들의 교리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이단이라고 공격하지만 예수도 이단으로 몰려 십자가형으로 처형을 당했다. 거기서 나온 종교가 지금은 서양문명의 주류인 기독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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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진
김성언 총무는 다석의 해혼(解婚) 정신을 실천해 아내를 '안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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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어록에 ‘예수는 가정에 갇혀 살지 않았다. 유교는 가족주의로 망했다. 자신과 자기 식구들만을 위해 잘사는 것은 짐승의 종족 보존과 다를 바 없다’고 했는데요. 다석의 표현 중에서는 강도가 센 것 같습니다.
“석가 예수는 가정을 초월했지만 유교는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가족주의로 망했다고 다석은 말했지요. 짐승이 종족 보존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사람은 종족 보존을 뛰어넘어 진리 보존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만 사람들이 짐승 같이 식색(食色)으로 살다보니 진리 보존하고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들고 바쁘다는 핑계로 ‘진리’라는 단어는 잊어버린 지 오래된 낯선 단어가 되어버렸지요. 소수의 사람만 그 뜻을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수천 만명의 신앙인과 교인들이 있지만 ‘진리 보존’에 사명감을 갖고 사는 신앙인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가족을 초월한 석가 예수의 진리정신을 이어받을 것인가, 가족을 중심으로 한 공자의 가족주의를 받아들일 것인가 중요한 갈림길에 있어요. 짐승의 목적이 종족 보존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지요. 그러나 사람의 삶의 목적이 진리 보존이란 말은 학교나 교회 성당 사찰 등 사회 어디에서도 들어 본적이 없어요. ‘짐승은 종족 보존, 사람은 진리 보존’이라는 다석의 말은 짐승과 사람의 역할을 가장 뚜렷하게 구분 짓는 말이 아닐 수 없지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겨우 자신과 자신의 식구들만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단지 종족 보존에 불과하지요. 물론 물질의 풍요 속에서 사람들이 식색(食色)의 맛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아요. 식색(食色)이란 짐승이나 사람이나 공히 갖고 있는 본능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삶의 본능에만 충실하다면 ‘참사람’이라 할 수 없어요. 사람에게는 본능을 넘어설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기에 식색(食色), 즉 종족 보존을 넘어 진리 보존을 목적으로 삼아야 삶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석의 말이 이 사회에 두루두루 퍼져 각성(覺醒)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진리 보존’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실천해서 각자의 영성(靈性)이 풍요로워지기를 바랍니다.”
-다석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91살 장수를 했는데요.
“다석처럼 철저하게 몸을 살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기 때문에 몸성히에 열심이셨지요. 의사가 30살밖에 못 산다고 했는데 무려 91살을 사셨으니 몸이란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지요. 다석은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이중으로 갇힌다고 했어요. 그래서 삶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요. 다석의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우’를 다석의 삼보(三寶)라고 부르고 싶어요. 다석이 우리 겨레에게 물려준 정신적인 유산인 삼보(三寶)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 건강하고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걷기, 요가체조, 냉수욕을 통하여 몸성히를 이루고, 맘놓이를 통해 마음을 비우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나’란 무아(無我)로 빔을 느끼게 되지요. 그리고 몸성히 맘놓이를 이룬 다음에는 생각을 토대로 자신의 밑둥을 깊이 파고 들어 하느님이 주신 바탈(性)을 타고 하늘나라로 들어가 ‘얼생명’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김 총무에게 다석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첫째는, 종교의 교리로부터 해방감과 자유함을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대(代)를 이어 찾을 것은 ‘참’ 하나뿐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그 말에 가장 깊이 감동을 받아서 제 인생관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참을 찾아서, 그 참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저의 모토가 되었습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 이주영 인턴기자>
※ '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유영모'는 모두 12명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해 27회에 걸쳐 연재를 했습니다. 이 릴레이 인터뷰는 오늘로 마치고 곧 책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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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210721.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31화 신의 존재 논쟁을 일거에 타파한, 무유(無有)신학
https://youtu.be/RRvhesdgv4g 18:28
2021. 7. 21.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언제까지 마르틴 하이데거와 니체를 찾고, 공자와 노자를 통해서만 우리의 영혼과 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는가"
2008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선 아시아 최초로 제22회 세계철학대회가 열렸습니다. 104개국에서 온 2600명의 학자들은 1370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세계 철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단연코 '다석 류영모의 얼나(영혼)와 씨알 사상'이었습니다.
다석은 기독교와 천주교, 유불선을 회통시키고 동서양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순수 한글과 한민족 정신을 통해 '한국 철학'으로 정립한 동방의 성자입니다.
다석 류영모 전기(傳記)를 매주 수요일 오후2시 유튜브 채널 '다석의 생각교실'에서 만나보세요.
*기사 링크 https://www.ajunews.com/view/202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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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모음] 다석의 오늘살이 철학 7월19일(월)~7월25일(일)
https://youtu.be/EHElOku-Z40?list=UU7ebvIGffNqWLH8Tl_UBnPA
2021. 7. 25.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오늘, 오늘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가장 중요한 오늘을 사는 동안 우리가 고도의 벼랑끝 협상이나 일상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든, 초긴장의 조직경영이나 외줄타기의 재테크를 하든 승패는 결국 "자기 관리"에서 판가름 납니다.
코로나 19와 갖가지 갈등으로 고심하는 우리들의 영혼육을 치유하고 단단하게 하는 다석 류영모님의 '오늘살이 철학과 三寶(體·智·徳)' 운동. 2021년 지구촌의 정비공시대에 자기관리의 해법이 될 ‘정음(正音)’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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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210728.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32화 서양의 인격신을 배격한 류영모 '허공신'
https://youtu.be/fiCHMMtZgtg 19:02
2021. 7. 28.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언제까지 마르틴 하이데거와 니체를 찾고, 공자와 노자를 통해서만 우리의 영혼과 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는가"
2008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선 아시아 최초로 제22회 세계철학대회가 열렸습니다. 104개국에서 온 2600명의 학자들은 1370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세계 철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단연코 '다석 류영모의 얼나(영혼)와 씨알 사상'이었습니다.
다석은 기독교와 천주교, 유불선을 회통시키고 동서양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순수 한글과 한민족 정신을 통해 '한국 철학'으로 정립한 동방의 성자입니다.
다석 류영모 전기(傳記)를 매주 수요일 오후2시 유튜브 채널 '다석의 생각교실'에서 만나보세요.
*기사 링크 https://www.ajunews.com/view/2021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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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모음] 다석의 오늘살이 철학 7월26일(월)~8월1일(일)
https://youtu.be/6zslhFPpOMs 7:20
2021. 8. 1.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52세부터 91세까지 하루 한 끼 식사와 해혼을 실천한 선각자. 새벽 여명을 기도와 명상, 종교 사상 탐구로 맞이한 영성가요 사상가. 죽음 맛을 보고 싶어 하셨고, 예수와 석가의 길을 따라 얼나(성령, 불성)로 솟나 하느님께 귀일하신 참사람."
2008년 세계철학자 서울대회에서 쟁쟁한 지구촌 철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단연코 '다석 류영모선생님의 얼나(성령,불성)와 씨알의 사상'이었습니다.
다석은 기독교와 천주교, 유불선을 회통시키고 동서양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순수 한글과 한민족 정신을 통해 '한국 철학'으로 정립한 동방의 성자입니다.
대한국인의 영적 자존감을 드높이고,우리들의 영혼육을 치유하는 다석 류영모님의 '오늘살이 철학과 三寶(體·智·徳)' 운동. 지구촌의 정비공 시대에 자기관리의 복음이 될 훈민‘정음(正音)’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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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
210804.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33화 '천하효자 류영모'
https://youtu.be/Q3hRqz4w0gc 19:45
조회수 49회2021. 8. 4.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언제까지 마르틴 하이데거와 니체를 찾고, 공자와 노자를 통해서만 우리의 영혼과 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는가"
2008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선 아시아 최초로 제22회 세계철학대회가 열렸습니다. 104개국에서 온 2600명의 학자들은 1370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세계 철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단연코 '다석 류영모의 얼나(영혼)와 씨알 사상'이었습니다.
다석은 기독교와 천주교, 유불선을 회통시키고 동서양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순수 한글과 한민족 정신을 통해 '한국 철학'으로 정립한 동방의 성자입니다.
다석 류영모 전기(傳記)를 매주 수요일 오후2시 유튜브 채널 '다석의 생각교실'에서 만나보세요.
*기사 링크 https://www.ajunews.com/view/202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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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모음] 다석의 오늘살이 철학 8월2일(월)~8월8일(일)
https://youtu.be/gRk-Dk4mPNA 8:06
2021. 8. 8.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52세부터 91세까지 하루 한 끼 식사와 해혼을 실천한 선각자. 새벽 여명을 기도와 명상, 종교 사상 탐구로 맞이한 영성가요 사상가. 죽음 맛을 보고 싶어 하셨고, 예수와 석가의 길을 따라 얼나(성령, 불성)로 솟나 하느님께 귀일하신 참사람."
2008년 세계철학자 서울대회에서 쟁쟁한 지구촌 철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단연코 '다석 류영모선생님의 얼나(성령,불성)와 씨알의 사상'이었습니다.
다석은 기독교와 천주교, 유불선을 회통시키고 동서양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순수 한글과 한민족 정신을 통해 '한국 철학'으로 정립한 동방의 성자입니다.
대한국인의 영적 자존감을 드높이고,우리들의 영혼육을 치유하는 다석 류영모님의 '오늘살이 철학과 三寶(體·智·徳)' 운동. 지구촌의 정비공 시대에 자기관리의 복음이 될 훈민‘정음(正音)’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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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210811. 34화 다석은 왜 '나를 정음교라 해도 좋다'라고 했나
https://youtu.be/8J6SJGLIE5g 23:38
2021. 8. 11.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언제까지 마르틴 하이데거와 니체를 찾고, 공자와 노자를 통해서만 우리의 영혼과 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는가"
2008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선 아시아 최초로 제22회 세계철학대회가 열렸습니다. 104개국에서 온 2600명의 학자들은 1370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세계 철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단연코 '다석 류영모의 얼나(영혼)와 씨알 사상'이었습니다.
다석은 기독교와 천주교, 유불선을 회통시키고 동서양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순수 한글과 한민족 정신을 통해 '한국 철학'으로 정립한 동방의 성자입니다.
다석 류영모 전기(傳記)를 매주 수요일 오후2시 유튜브 채널 '다석의 생각교실'에서 만나보세요.
*기사 링크 https://www.ajunews.com/view/202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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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모음] 다석의 오늘살이 철학 8월9일(월)~8월15일(일)
https://youtu.be/LGb7XH7BmqM 8:22
2021. 8. 15.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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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
210818. 35화 '우리말 5개로 신학사상을 혁명하다'
https://youtu.be/lRqTBaNWogQ 21:38
2021. 8. 18.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기사 링크 https://www.ajunews.com/view/202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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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모음] 다석의 오늘살이 철학 8월16일~8월22일
https://youtu.be/L8R-yTk5K4g 8:33
2021. 8. 22.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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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210825. 36화 타고르를 넘는 한국의 시성(詩聖) 류영모의 '복음성가'
https://youtu.be/txkqQzrjCt8 26:03
2021. 8. 25.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기사 링크 https://www.ajunews.com/view/2021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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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모음] 다석의 오늘살이 철학 8월23일(월)~8월29일(일)
https://youtu.be/u3upeEqlAvs 8:20
2021. 8. 29.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
2008년 세계철학자 서울대회에서 쟁쟁한 지구촌 철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단연코 '다석 류영모 선생님의 얼나와 씨알의 사상'이었습니다.
한국인의 영적 자존감을 드높이고, 우리들의 영혼육을 치유하는 다석 류영모님의 '오늘살이 사상과 三寶(體·智·徳)' 생활철학. 지구촌의 정비공 시대에 자기관리의 좌표가 될 훈민‘정음(正音)’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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