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는 주말 교외 나들이쯤 되는 해외여행인데 거사를 준비하듯 벼르며 꾸역꾸역 여비만 모았다. 코로나가 꼬리를 내릴 2월 즈음 성격 시원한 친구의 돌발적인 제안에 우린 기다린 듯 동의했다. 세 명 모두 출발하기도 전에 마음이 붕 떴다. 오래전 같은 직장에서 만난 인연이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다. 일터에서 해체된 후 나는 시청 기간제 일을 하다가 지금은 학교에서 기간제 일을 하고 있다. 둘은 그 후 같은 업종의 사업 경영주가 되어 정보를 주고받으며 일과 관련해 공감대도 나눈다. 모임 날은 한 달 중 한 번 걸림이 없는 토요일로 유연하게 탄력적으로 정했다. 비교적 시간이 많은 내가 총무를 맡은 탓에 가까운 나들이 행사 준비부터 돈 쓰는 일까지 총괄 업무를 한다. 사실 나는 숫자보다 글자를 좋아하는 문과형이라 셈을 싫어하고 돈 계산 때 머리 회전도 더디다. 대신 책임감과 섬세함으로 결점이 보완되고 친구들의 호응으로 탄탄한 계가 되었다.
날짜를 정하니 여행사 예약과 부수적인 일은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다들 여행을 위해 신속히 협조해 주었다. 코로나 예방접종 확인서, 여권, 환전, 와이파이 공유기, 자질구레한 준비물들을 착착 갖춰나갔다. 돌아보면 늘 그랬다시피 여행은 출발 전 즐거움이 반을 차지한다. 실질적인 여행 기간에 예열기간은 덤으로 따라온다. 새로움을 경험하는 설렘과 기대로 적잖이 흥분된다. 구매욕이 충천하여 백화점 문도 호기롭게 열어젖혔다. 없어도 되는 것들조차 빛나는 여행을 위해 줄줄이 따라왔다. 여행은 과소비를 조장했다. 그러면 좀 어떠랴. 기회에 유린당한 통장은 잔고를 얼마쯤 녹여내도 괜찮게 강심장으로 변했다. 아이들과 직장 때문에 미뤄둔 해외여행을 이순이 된 지금. 날갯짓의 반란으로 마음은 좌충우돌이다. 어떡하든 나갈 기회만 보고 있으니 말이다.
출발일 목요일 오후 대구 공항은 코로나 말미 성질 급한 여행객들로 가득 찼다. 지친 심신에 특효 처방은 여행만큼 좋은 게 있을까. 잠깐 다 버리고 떠나는 것도 지혜다. 도약을 위한 일탈은 너그러웠다. 마스크 속 얼굴은 탈피의 해방감에 홍조를 띠었다. 출국 수속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가벼운 마음에 두어 시간쯤이야 달콤한 고문이었다.
대지에서 벗어나 2시간 반을 지나니 러시아와 근접한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북해도) 치토세 공항에 내릴 수 있었다. 북쪽이다 보니 해는 뉘엿뉘엿 일찍 저물고 부드럽고 가는 눈발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3박 4일을 같이 할 여행사 직원도 빨간 대형버스 앞에서 친절하게 환영해 주었다. 조그만 생선구이 식당에 차려진 음식과 그릇들이 비로소 일본을 실감시켰다. 호텔로 향하는 창밖은 깜깜했고 온 천지 하얗게 쌓인 눈은 인색한 가로등을 대신해 길을 밝히고 있었다.
단잠에서 깨어난 아침. 호텔 창밖 순백의 세계에 탄성이 절로 나왔고 주체할 수 없는 설레발은 온천탕에 몸을 밀어 넣었다. 유황 냄새가 코를 스치고 나무와 바위에 수북이 쌓인 눈덩이는 수증기와 어울려 몽환적인 그림이었다.
행복이 따로 없었다. 촘촘히 짜인 일정만 아니라면 그날 하루를 다 내주고 말았을 것이다. 대형 연회장 안은 자국민이 태반을 넘었겠지만, 외모로만 보면 잘 구별할 수 없어 한국식당인 듯 했다. 잘 차려진 뷔페 음식은 식욕을 부풀렸다. 청정 대자연의 산해진미가 즐비했다. 그냥 가면 후회할세라 골고루 시식하다 보니 포만감에 모두 배를 두드렸다. 고급 해산물인 연어, 참치, 성게, 생새우, 대게가 혀를 녹였다. 낙농업이 발달했다길래 두루 먹어 본 유제품은 늘 먹던 맛이 아닌 신선하고 탁월한 맛이었다. 낫또, 감자, 옥수수, 소바, 멜론 등 유명한 특산물을 다 맛보기엔 뱃집과 시간이 부족했다. 여행 중 미각이 충만하다면 힐링은 더 극대화되는 것 같았다.
여행 2일 차. 눈의 왕국답게 보이는 것은 눈뿐이며 도롯가 상점과 주택 지붕엔 백설기 같은 눈덩이가 켜켜이 쌓여 무척 인상적이었다. 북해도 최대의 공원 오오도리공원은 세계 3대 축제 중 하나인 삿포로 눈축제가 열리는 곳인데 아쉽게도 며칠 지난 뒤다. 도로엔 제설차가 쉴 새 없이 지나다니고 공원엔 무릎이 빠지도록 눈이 쌓여 있었다. 거대한 삿포로 TV 탑 중간엔 대형 디지털시계가 껌벅거렸고, 옆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시계탑이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었다. 건물 머리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는 아날로그 시곗바늘이 천연덕스러웠다. '러브레터' 촬영지인 오타루 운하에 간다니 영화의 감흥이 되살아나 '오겡끼 데스까' 대사가 메아리치는 듯했다. 환상은 운하와 오르골 전시장으로 가는 빙판길에서 허무하게 깨졌다. 미끄러워 휘청거렸고 갑자기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급한 대로 삼각 머플러를 머리에 덮어쓰니 동화속 성냥팔이 소녀가 따로 없었다. 후키다시공원으로 이동하는 중 멀리 보이는 요테이산은 평지에 우뚝 솟아 하얀 모시 모자를 연상케 했다. 공원의 100대 명수 최고의 약수는 청춘을 돌려준다길래 벌컥벌컥 마셨다. 명약의 효과 때문인지 우린 눈밭을 뒹굴뒹굴 동심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헤어날 수 없었다.
도야호수 앞에서 눈을 뜬 다음 날은 황홀한 코발트 빛 전경에 넋을 잃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유람선 선상 난간에서도 낭만을 찾았다. 사이로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본 호수는 하늘과 경계를 찾기 어려웠고 조그만 섬들은 눈과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호수를 뒤로 하고 간 곳은 활화산 쇼와신잔이다. 연기와 매캐한 유황이 산등성이를 감고 있었다. 숙주나물이 절반인 해물 철판구이는 약간 실망스러웠으나 기념품을 사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동안 다 잊었다. 북해도 3대 온천 중 한 곳인 노보리베츠에는 지다이무라 테마파크 공연장이 있었다. 우리나라 민속촌 같은 곳인데 일본 에도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지옥 계곡에는 명성만큼이나 고약한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윳빛 온천수가 흐르는 계곡은 열기로 풀 한 포기 없었고 흡사 시멘트를 채굴하는 공사장 같았다. 식사 후 숙소에서는 피로를 푸는 건지 피로를 얻는 건지 모르게 온천욕을 원 없이 하고 숙면에 빠졌다.
마지막날 도마코마이의 노잔 호스파크로 가는 길 자작나무 숲속에는 먹이를 찾는 야생 사슴들이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광활한 공원엔 눈발이 날렸고 이윽고 퍼붓는 눈 폭풍으로 말타기 체험 코스는 취소되어 그날 말은 운이 좋았다. 여행 일정 내내 오락가락 눈이 왔지만, 그 순간은 평생 못 볼 정경이었다. 설국에 파묻힌 자체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막간에 스노우모빌과 튜브 썰매를 탈 수 있었다. 스릴과 동심은 절정에 달했다. 삿포로 관광의 하이라이트인 맥주박물관 시음 이벤트는 밀려드는 인파로 무색하게도 자판기 맥주로 대신해 싱겁게 끝이 났다. 연이은 대게 뷔페 코스는 한동안 게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실한 대게 살이 입안에서 춤을 췄다. 여행의 대미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과자 시로이 코이비토(백의 연인)를 만나러 갔다. 제과회사답게 동화 나라로 꾸며져 있었고 소프트아이스크림은 행복을 불러오는 맛이었다. 달콤한 여정의 마무리였다.
치토세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 가이드는 출항 여부를 확인했다. 날씨 사정으로 간혹 결항이 있다고. 속으로 그러거나 말거나 차라리 뜨지 말았으면 하고 심술을 부렸다. 짧은 여정치고는 흡족하고도 남는 여행인데 넘어진 김에 쉬어가고 싶었다. 예정대로 비행기는 떴고 밤하늘 상공에서 내려다본 치토세 공항의 야경은 환상적이었다. 하늘길 불과 두세 시간 거리에 저리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걸 가보지 않았다면 모를 일이었다. 3박4일 북해도 여행은 내가 내게 준 선물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첫댓글 오마나~ 경숙샘 북해도 여행을 우째이리 리얼하게 잘썼나요 막 가고 싶어져요 겨울 아니어도 눈 있을려나 설국보러~ㅎㅎ
갈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가고 싶은 곳이에요. 안 가 보신 분들께는 강추코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