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 장 “ 시험이라니, 무슨 시험 말이오?” 진우청은 귀찮은 표정과 함께 그녀를 바라보았다. “ 우리가 한꺼번에 펼치는 일초를 피해보세요.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살초는 아니니 그냥 단순한 비무 정도로만 생각하면 돼요.” 그 말과 함께 을지소소는 두 사내에게 눈짓을 했다. 두 사내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을지소소와 두 사내가 정삼각형 모양으로 진우청을 포위했다. 진우청은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자신에게서 뭘 원하는지 몰라도 자신을 찾는 사람은 북제성주였다. 그러니 아쉬운 건 그들일 텐데 온갖 조건이 많았다. “ 꼭 해야 하오?” 호흡을 가다듬은 세 사람이 초식을 전개하려는 절묘한 찰나, 진우청이 질문을 던졌다. 진우청의 오른쪽에 있던 한 사내가 얼굴이 벌겋게 되며 볼을 씰룩거렸다. 그 사내의 움직임으로부터 공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던지라 진우청의 질문이 숨을 턱 막아버린 것이다. “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을지소소가 날카로운 고함을 터뜨렸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 시기가 너무 공교로웠다. 수유의 순간이라도 늦거나 빨랐다면 출수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그 순간에 질문을 던져 애써 끌어올린 기세를 지워 버린 것이다. 다시 기세를 끌어올려야 했다. 진우청의 왼쪽에 있는 사내가 은밀하게 눈짓을 했다. 그와 함께 세 사람은 서로의 기운을 읽었다. “ 아쉬운 건 당신들이잖소?” “ 컥!” 이번에도 진우청은 결정적인 순간에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 결과 진우청의 왼쪽에 있는 사내가 기침을 토했다. 아까보다 더 강한 기운을 끌어올렸기에 이번에는 그 여파가 기침을 토하게 만들었다. 기침을 토한 사내가 부릅뜬 눈으로 진우청을 쳐다보았다. 강한 의혹과 불신이 어린 눈빛이 폭사되어 나왔다. 잠시 후 사내의 울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느낄 수 없는 변화였다. 나유백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건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고 펼치는 절정의 전음술이었다. 들어보기는 했으나 실제로 펼치는 인간은 본 적이 없었다. 그 전음술로 무슨 의견을 전달했는지 세 사람의 움직임이 약간 달라졌다. 약 반 걸음씩 위치를 이동한 세 사람은 서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이제까지는 초식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면, 이번에는 기세로서 가운데 있는 사람을 제압하기 위해 기운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진우청은 세 사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기운이 전신을 칡덩굴로 감아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온몸으로 발출하는 무형의 기운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우청은 점점 더 증폭되는 그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호흡을 낮게 가라앉혔다. 폭풍우가 아무리 거세어도 폭풍우의 흐름에 몸을 맡긴 갈대는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 와짝! 탁자 위에 있던 찻잔 하나가 터지듯이 깨어졌다. “ 이젠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소.” 극한의 긴장감 속에서 진우청이 불쑥 말을 던졌다. 퍼퍼퍽! 나머지 찻잔들이 옆으로 휘말려 나갔다. 그 자리에서 찌그러지듯 와싹 깨어지던 찻잔들과 달리 무질서하고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그와 함께 을지소소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세차게 끌어올린 기운들이 절묘한 순간에 터져 나온 진우청의 목소리와 함께 또 한 번 흐트러져 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 통과... 했다!” 진우청의 왼쪽에 있던 사내가 더듬거리며 말하고는 기세를 거두어 들였다. “ 사, 사형!” 을지소소가 설마 하는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 호흡.. 도둑 맞았..... 더 이상..... 필요......” 서투른 한어로 말하다 고개를 흔든 사내가 자신들의 말로 빠르게 을지소소에게 뭔가를 설명했다. 을지소소가 불신 가득한 눈으로 사내와 진우청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시작도 하기 전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일초를 무산시킬 줄은 몰랐어요.” 을지소소는 아직도 일말의 의심을 지우지 못한 표정과 함께 말했다. “ 세 사람은 손발이 맞지 않았소. 앞으로도 합공 같은 건 하지 마시오.” 진우청은 그렇게 답하며 호흡을 골랐다.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잠시 대화가 끊긴 후 진우청이 불쑥 말했다. “ 말해봐요.” 을지소소는 약간 피곤한 기색과 함께 답했다. “ 혹시 당신네 성주란 사람과 내가 어떤 관계인지 아는 바가 있으시오?” 진우청의 질문에 을지소소는 물론, 그녀 옆에 앉아 있던 두 사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 당신이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잠시 후 을지소소는 뾰족하게 소리쳤다. 을지소소와 같이 온 사내들 중, 키가 약간 더 큰 사내를 초하이란 이름으로 등에는 고색창연한 검을 메고 있었다. 아마도 절정의 검사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내는 타우란 이름으로 무기는 소지하지 않고 있었지만 주먹에 박힌 굳은살과 팔 근육으로 보아 권장을 절기로 함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이 데리고 온 표범은 흑풍, 늑대들은 백왕과 설아였다. “ 오늘밤 어둠이 짙어지면 떠나겠어요. 그 사실은 아무도 알 수 없게 해주세요.” 간단한 저녁을 끝낸 을지소소는 구양천을 쳐다보며 딱딱 끊어지는 소리로 말했다. 천성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그녀의 목소리와 말투는 얼음 동굴 속에서 흘러나오는 삭풍같았다. 네 개 하늘 중 한곳의 주인인 구양천을 상대할 때도 그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 며칠 쉬며 여독이나 풀고....” “ 두 시진 후에 떠나겠어요. 준비해 주세요.” 나유백의 염려스런 목소리를 자르며 을지소소는 더 냉정하게 뱉어냈다. “ 너무 급박하지 않소?” 마침내 진우청도 불평을 토했다. “ 그러는 게 여러모로 좋아요. 이곳에 길게 있을수록 앞으로 닥칠 난관이 커져요.” 을지소소는 진우청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 난관?” 진우청은 눈살을 찌푸렸다. 난관이니, 기관이니, 혈로니 하는 것들은 이젠 진저리 쳐지는 말이다. 그런 것들과는 되도록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두 시진 후에 떠나는 것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따로 준비할 것은 없다지만 그야말로 이제가면 언제 올지 모른다. 죽을지 살지도 모를 그런 길을 떠나는데 아는 사람들과 인사할 시간도 제대로 안 준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진우청은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따로 인사할 사람들도 없었다. 아는 사람들은 거의 이 자리에 있었다. 여기 없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절명자 오무평과 유화경뿐이었다. 유화경을 생각하자 가슴이 무거워졌다. 오빠들도 떠나고 자신마저 떠난다면 그녀가 의지할 사람은 백봉령주밖에 없을 것 같았다. ‘ 하긴 뭐......’ 진우청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녀는 이젠 누굴 의지하겠다는 마음 자체를 죄악시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준 일이라고는 원하는 유황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제공해 준 것뿐이다. 어쩌면 작별 인사도 안 하고 떠나는 것이 그녀의 공부에 더 도움이 될지 몰랐다. “ 그래도 두 시진 후라면 너무 촉박하지 않겠소? 우리 쪽에서도 준비를 해야 하는데...” 구양천도 약간 난감한 빛을 떠올리며 말했다. “ 무슨 준비 말인가요? 진 공자님만 우릴 따라가면 되는 것 아닌가요?” 을지소소가 약간 의문스런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 그동안 이런 날에 대비해서 우리도 수행할 고수들을 준비해 놓았소. 그러니 그들을..” “ 호호호호.” 구양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을지소소가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내내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던 구양천의 눈썹이 이때만큼은 약간 흔들렸다. “ 죄송해요.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어요.” 을지소소가 웃음을 멈추고 다시 말했다. “ 우린 진 공자님과 동행하며 움직이는 것도 정말 부담스러워요. 변장을 한다고 해서 남들 눈에 뜨이지 않을 체격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까지 데리고 가란 말인가요?” “ 그게 아니라 우린 호위를....” 이번에는 나유백이 나섰다. “ 우리를 .... 아니, 여러분들 표현대로라면 북제성이죠. 북제성을 대체 뭘로 아시는 건가요? 북제성 인원 백 명이면 남패천과 겨루어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지 못했나요? 건방진 말 같지만 우리 세 명이 합공을 한다면 천주님도 당하실 수 없어요. 그런데 더 이상 무슨 호위가 필요하죠?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에요.” 말을 마친 을지소소의 얼굴에 도도한 빛이 흘러넘쳤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런 모습이 정말 건방져 보일 것이지만 그녀에겐 오히려 그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북제성이라 수식어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금 전에 진우청에게 일격을 가했던 채찍을 생각하면 수긍이 갔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손목을 움직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섬전처럼 쏘아지던 채찍은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구양천이나 나유백, 진우청 아니면 누구도 막을 엄두조차 못 낼 수준이었다. “ 또한 백왕과 설아, 흑풍이면 호위병 백 명보다 나아요. 그러니 그런 걱정은 말아주세요.” 을지소소는 흑표와 두 마리 늑대를 쳐다보며 말을 맺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면 이곳을 떠나 길고 험한 여행을 해야 한다는, 약간으 무겁고 약간은 흥분된 마음으로 숙소에서 간단한 준비를 하고 침상에 앉아 있던 진우청은 구양혜림과 함께 들어오는 유화경을 보며 벌떡 신형을 일으켰다. 그녀들 뒤에는 백봉령주도 있었다. 복수에 매진하는 그녀에게 그냥 아무 통보 없이 떠나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구양혜림이 유화경을 이끌고 온 것이다. 여전히 초췌한 모습의 유화경이었다. 오면서 눈물을 흘렸는지 얼굴에는 희미한 눈물자국이 있었지만 표정은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너무 갑작스럽군요.” 잠시 머뭇거리던 유화경은 그렇게 서두를 꺼냈다. “ 나도..... 그래. 하지만 그쪽에서 온 사람들이 오늘밤 어둠이 짙어지면 소리없이 빠져나가야 한다고 뜻을 굽히지 않으니....” 말끝을 흐리며 답한 진우청은 괜히 이것저것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 그럼, 두 분 작별 인사를 나누세요. 우린 잠깐 자리를 피해 드릴게요.” 구양혜림은 말이 끝나자마자 얼른 백봉령주의 팔을 끌고 몸을 움직였다. “ 아, 아니에요. 언니, 그냥 이렇게 얼굴 한 번 보고가면 그게 작별 인사지요. 참 이거...” 백봉령주와 함께 밖으로 나가려는 구양혜림을 애써 만류한 유화경은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진우청에게 건넸다. “ 그게...... 뭐냐?” 얼른 받지 못하고 진우청은 질문했다. “ 제가 가지고 있던 몇 가지 금붙이와 패물이에요. 저한테는 이젠 이런 거 필요없어요. 이건 길 떠나는 사람이 더 필요할 테니 가지고 다니다가 노잣돈 떨어지면 팔아쓰세요.” 유화경은 머뭇거리는 진우청의 손에 억지로 주머니를 쥐어주었다. “ 나란 놈은 당장 맨몸으로 쫓겨난다고 해도 굶고 다니지는....” “ 그런 건 그냥 받는 거예요. 진공자!” 진우청이 도로 돌려주려고 하자 백봉령주가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 그리고 이건 어제 제가 완성시킨 화탄이에요. 위기가 닥치면 여기 튀어나온 곳을 세게 누른 후 던지세요. 누른 다음 다섯을 셀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그렇게 맞춰 던지면 돼요. 큰 위력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쓰기에 따라서는 소용이 될 곳이 있을 거예요.” 유화경은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 벌써 이런 걸 만든 거야? 든든하긴 한데.... 몸을 너무 혹사하는 건 아닌가?” 다섯 개의 메추리 알만한 화탄을 받아 든 진우청은 책망하는 눈빛과 함께 소리를 높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듯한 유화경에게 이별의 순간에서나마 부드러운 말로 토닥거려 주고 싶었지만 그런 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예전처럼 대하는 것이 나았다. “ 제 걱정 마시고 이제부터 오라버니 걱정이나 하세요. 여기까지 왔던 길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사지나 마찬가지의 길일 테니까요.” 유화경은 걱정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 이게 있으니까 이젠 걱정없지 뭐!” 유화경의 걱정에 태평스럽게 대답한 진우청은 손바닥 안에 든 화탄 다섯 개를 차례로 허공에 던졌다. 놀란 구양혜림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몸을 날렸다. 휘리릭- 손을 움직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다섯 개의 화탄이 물레방아가 돌아가듯 몇 바퀴 허공에서 돌다가 진우청의 손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간 떨어질 뻔 했잖아요!” 뾰족하게 고함을 지른 구양혜림이 가슴을 쓸었다. 단순히 떨어져서는 폭발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지만 화탄에 대한 지식이 없는 그녀로서는 많이 놀란 모습이었다. “ 육 장로님의 쇠구술이군요.” 눈을 흘기던 구양혜림이 뭔가 생각난듯 소리쳤다. 방금 진우청이 장난처럼 화탄을 허공에 던지던 동작은 여덟 장로 중 여섯 번째 서열의 장로 문형종의 암기술이었다. 육장로가 쇠구슬을 던질 때는 그것이 몇 개인지도 도저히 분간할 수가 없었다. 진우청은 다섯 개로 흉내 내었는 데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무사히...” 말을 다 끝내지 못한 유화경이 얼른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구양혜림과 백봉령주도 서둘러 한마디씩 작별 인사만 남기고는 황급히 유화경을 따랐다. 진우청은 그녀들이 사라진 방문 쪽으로 멍하니 시선을 두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 독하네. 울 줄 알았는데 끝까지 안 울고 돌아서네.” 유화경이 기거하는 작업실로 돌아가며 구양혜림이 유화경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진우청의 방을 나와 여기까지 한마디도 안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은 온몸으로 오열하는 것보다 더 슬퍼보였지만 끝까지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피가 나도록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그래서 유화경은 구양혜림의 말에 대답도 못하고 있었다. “ 남자들은 무공이 높아질수록 그만큼 마음도 무심해지는 것 같아. 진 공자도 그렇게 경 매의 큰 오라버니도......” 구양혜림은 이번에는 백봉령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지난 가을 무적대를 이끌고 떠나던 날 유화성 역시 진우청과 비슷하게 무미건조한 분위기로 백봉령주와 작별 인사를 했다. 그게 너무 서운했던 백봉령주는 며칠 동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 멍청이들 같으니... 말재주가 없으면 걸려 넘어지는 척하며 한 번 콱 안아주는 융통성이라도....” “ 언니!” “ 아가씨!” 제멋대로 중얼거리던 구양혜림은 유화경과 백봉령주의 날카로운 고함 소리에 얼른 입을 다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나오는 대로 중얼거린 말이 어머니의 귀에라도 들어갔다간 바깥 출입이 열흘은 금지될 터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안 구양혜림은 가슴을 쓸었다. “ 정혼녀는 없었는데....” 잠시 입을 닫고 있던 구양혜림은 다시 혼잣소리로 중어거렸다. “ 무슨 말이에요. 아가씨?” 백봉령주가 즉각 말을 받았다. “ 저번에 할아버지의 지시로 비원각에서 진공자님에 대한 조사를 좀 했거든. 그런데 진 공자님 형은 저번에 같이 왔던 하수린 소저와 어릴적부터 정혼이 되어 있었는데, 동생은 너무 골칫덩이라 아무도 정혼을 안 하려고 해서 없다고 알고 있는데.....” 구양혜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명했다. “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이번에는 유화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아까 경매와 작별을 할 때 모습을 보면 꼭 가슴속에 감춰놓은 정인이 있는 사람 같잖아. 정혼녀도 없는데다가, 사저나 사매도 없고, 산에서 내려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간 제대로 만나 여자라고는 경 매가 유일할 텐데 말이야.” “ 워낙 무뚝뚝한 사람이니까 그렇지요. 아가씨 말대로 그런 방면에서 있어서는 딱 한사람만 빼고는 짝을 찾기 힘들 정도로 멍청하기도 하고....” 백봉령주는 샐쭉한 표정으로 유화경을 한 번 쳐다보고는 앞서 걸아나갔다. “ 딱 한 사람.......? 아! 그렇지. 그런 사람이 있었지. 푸훗! 화탄제조 기술을 제대로 배우려면 그런 쪽에도 네가 신경 좀 써야 했는데...... 그런 걸 보면 너도 참 눈치가 없어!” 과장스럽게 호들갑을 떤 구양혜림이 유화경의 팔을 잡아끌며 앞서 나간 백봉령주를 따랐다.
“ 대체 어떤 놈이 진짜야?” 곤룡포를 입은 비대한 느낌을 주는 한 중년인이 살점 가득한 안면 근육을 움직이며 말했다. 워낙 두둑한 살점 때문에 중년인의 표정은 화를 내는 건지, 웃는 건지 구별이 잘 가지 않았다. 시립해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으로 봐서 중년인의 표정이 화를 낸 것으로 짐작될 뿐이었다. “ 동방회에 심어놓은 첩자들이 지난 초여름의 사건을 계기로 남패천에서 모조리 색출되는 바람에 정보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소.” 태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한 노인이 가까스로 답했다. “ 문제군!” 비대한 중년인은 여전히 얼굴 근육을 기묘하게 움직이며 말했다. 중년인의 이름은 모비광. 별호는 한때 천살광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별호로 불려지지 않는다. 그 별호다는 네 개의 하늘 중 하나인 서왕문의 문주란 명칭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자고로 얼굴에 살이 찔수록 그 사람의 인상은 후덕하게 보이는 법이다. 몸도 비대하고, 특히 얼굴 살이 많은 모비광은 더욱 후덕한 인상을 주었다. 하나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절대로 그런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후덕한 인상 뒤에는 마귀보다 더 잔인한 성품과 뱀보다 더 차가운 냉혈지심이 숨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 별호마저 천 명의 인간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이는 미친 칼이라는 뜻의 천살광도였다. 그는 십 년 전 서왕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인 권력투쟁에서 위로 두 명의 형을 참살하고 현 서왕문주가 된 것이다. “ 정보의 부족은 항상 이런 답답함을 선사하지. 정보망을 재구축할 가망성은 없는가?” 모비광은 앞에 선 한 중년인을 향해 말했다. 문사건을 쓰고 깊은 눈빛이 간간히 흘러나오는 중년인은 서왕문의 군사직을 맡고 있는 구충서였다. “ 워낙 철저히 무너지는 바람에 지금으로선 불가능합니다. 설사 재구축한다고 해도 이미 늦은 일이지요.” 구충서는 느릿하게 말했다. “ 그럼 현재 그놈이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인가?” 모비광은 구충서의 느린 말투가 답답한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빠르게 물었다. “ 다른 여러 경로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놈은 북제성에서 온 사람들과 같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리 떠난 남패천의 혈랑대 이백 명이 그들의 경로로 예상할 수 있는 선점하여 우리 문도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그들이 북행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어느 경로로 움직이는지는 도저히......” 구충서는 말을 흐렸다. “ 이대로라면 남패천 본거지를 치기도 전에 북제성의 인간들이 오랜 은거를 깨고 기어 나와 우리와 싸우게 될지도 모를 일이구려.” 장로 한 사람이 은은한 노기와 함께 구충서의 말을 받았다. “ 교활한 늙은이......” 모비광은 살점 많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모든 사람들 눈에는 오히려 웃는 것처럼 보였다. “ 구양천 그 늙은이는 손도 안 대고 코를 풀려고 하고 있다. 혈랑대는 어차피 버린 자식이었다. 그런 그들을 이용하여 우리의 이목을 전부 그쪽으로 쏠리게 하고 있다. 더 나아가 북제성으로 관심을 돌리려 하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쪽으로 신경을 쓰지 않을 수도 없고.. 결국은 구양천의 의도대로 전력이 분산되겠군.” 모비광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쩝! 공손 노인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은 몰랐군! 그렇게 허무하게 가려거든 고서점에 정보라도 좀 남겨놓고 갈 것이지.....” 모비광은 무척이나 아쉬운 듯 연방 입맛을 다셨다. “ 공손 노야의 죽음은 저로서도 뜻밖입니다. 빈객으로 있으면서 본신 내력을 모두 보여주지 않았지만 노야의 무공의 가히 절대고수라 할 만 했습니다. 그런 노야의 철수공을 허물어뜨리고, 그것도 모자라 내력으로 노야를 쓰러뜨릴 수 있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놈이.....” 구충서는 모비광의 눈치를 슬쩍 보며 말했다. 질투심이 남다른 모비광에게 다른 사람을 절대고수라 칭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모비광은 그걸 의식하지 않고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쩌면 이제 죽어버린 사람이니 절대고수든 하늘이든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 어쨌든 그쪽 사정은 이제 투더운 안개에 감싸인 것처럼 흐릿해져 버렸군. 그러나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일이지. 남패천이 소유한 그 막대한 부를 우리가 차지한다면 더 이상 동방회에 손을 벌리지 않아도 우리 서왕문은 천하제일문에, 무림일통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오.” 모비광은 다짐하듯 말했다. “ 물론이지요.” “ 물론입니다. 비좁은 사천땅을 벗어나 이젠 중원 전역으로 뻗어나갈 때이지요.” 모비광의 말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격동 어린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천하사패의 한곳이라 했지만 십 년 전에 벌어진 후계자쟁탈전의 혈사로 인해 서왕문을 그동안 다른 곳에 비해 그 세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때로는 세인들로부터 천하사패가 아니라 천하삼패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모비광뿐만 아니라 서왕문도들이라면 누구나 이를 갈았다. 그러나 십 년 동안 절치부심으로 노력한 덕분에 이젠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은밀히 동방회와 손을 잡음으로 해서 천하제일의 문파로 거듭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무림일통의 대역사를 꿈 꿀 수도 있게 되었다. “ 남패천이 무너지고 나면 동방회의 부도 우리 것이 되겠지.” 모비광의 말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하지만 그때까진 절대로 그런 내색을 해서는 안 될 것이오. 이른바 적이 될 때까지는 절친한 친구로 행세해야겠지요.” 모비광이 자아도취하면 너무 앞서 간다고 생각한 장로 한 사람이 분위기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 하하! 물론이오. 하지만 동방회의 임자건 그 능구렁이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남패천을 무너뜨리고 나면 그 다음으로 우리를 무력화시켜 자신들의 부를 지키려 하겠지요. 후후.” 모비광은 낮은 웃음을 흘렸다. “ 어쩌면 남패천보다 동방회가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놈들의 금력은 전 중원 금력의 반 이상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놈들은 우리가 남패천과 싸움으로 힘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뒤통수를 칠 것입니다. 그 조짐이 지금 드러나고 있습니다.” 군사 구충서가 조심스럽게 서두를 끄집어냈다. “ 조짐?” “ 어떤 조짐 말이오, 군사?” 구충서의 말에 장로들의 눈길이 전부 구충서에게로 모였고, 모비광의 얼굴살이 처음으로 표시 나게 찌푸려졌다. “ 오늘 아침 막 입수된 것인지라 조금 더 추이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지만.... 구파일방의 수뇌들이 극비리에 회합을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 구파일방? 그 인간들이 왜?” 모비광은 점점 더 찌푸려지는 얼굴로 구충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덧붙였다. “ 그놈들은 우리 서왕문과 남패천이 동패구사하기를 가장 바라는 놈들이 아니오? 그때까지는 섣부른 짓하지 않고 지켜볼 것이라 생각했건만.” “ 아직까지는 짐작만 할 뿐이지만 아마도 동방회의 수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패천이 무너지고 나면 우리를 견제할 힘이 필요할 테니까요.” “ 남패천의 그 여우 같은 영감은 무얼 한답디까? 그동안 구파일방의 그런 움직임을 가장 적절히 막아왔던 곳이 남패천주 구양천이 아니었소?” 초로의 장로 한 사람이 구충서를 향해 목소리를 높여 질문했다. 구파일방이 회합을 추진한다고 해서 당장 무림맹이니 정파연합이니 하는 단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아홉 개의 문파와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이 하나의 단체를 만든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각 파의 이해타산이 충돌하기 일쑤여서 자칫하면 그런 시도를 한 후부터 사이가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것들을 가장 잘 이용하여 이제껏 구파일방의 힘을 적절히 분산시킨 곳이 남패천이었다. “ 이젠 그 영향력을 잃어버렸겠지요. 아니면 일부러 그 영향력을 거두어 버렸는지도.... 그것도 아니면 동방회보다는 오히려 남패언이 그들을 준동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군사 구충서가 답했다. “ 그 영감탱이가 제 무덤을 파는 것이 아니오? 구파일방이 남패천에 대해서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텐데 말이오.” 모비광은 눈까지 가늘게 뜨며 구충서를 쳐다보았다. “ 얻는 것도 있겠지요.” “ 어떤 점에서 말이오?” “우선은 상황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들어 우리의 시선을 어지럽게 분산시키자는 것이지요. 지금 남패천이 제일 중점을 두는 것은 북제성을 끌어들이는 것이니까요. 또 정파무림이 힘을 되찾고 서서히 목소리를 높이게 되면 우리의 길이 막히게 되지요.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다 보면 직선으로 갈 수 있는 길도 돌아서 가야 하니까요.” “ 머리가 조금 아프군.” 모비광이 태사의 깊숙이 상체를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 하지만 구파일방의 그런 움직임이 지금 당장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시간을 두고 조금 더 지켜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우선은 북제성을 끌어들이려는 놈들의 의도부터 꺾고 볼 일입니다.” 구충서가 결론을 내렸다. “ 증원군을 좀 더 보내야겠군. 천도! 게 있느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모비광은 고함을 질렀다. “ 왜그러시는지요, 아버님!” 모비광의 큰 아들 모천도가 앞으로 나섰다. “ 네 동생 천기만으로는 힘이 부치는 모양이다. 네가 도와주어라.” 그러자 장내에 일렁거림이 일었다. 큰 아들 모천도는 아버지 모비광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아 냉철하고 잔인한 성품이다. 그러나 그 성격은 절대로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 평소에는 한없이 유순했다. 그런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차기 문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런 큰 아들을 둘째 아들에 이어 또 밖으로 내보려는 모비광의 행동이 무모해 보일 것이다. “ 아니되오. 문주! 큰 공자는 다음 대에....” “ 그만두십시오. 수석 장로님! 언제까지나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될 수는 없지요. 나가서 싸워야 이번 대를 쟁취한 아버지처럼 강해지지요. 후후!” 모천도가 자신의 장도를 빙글 돌려 어깨에 걸치며 등을 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