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29-34
정에 흔들린 아합 왕 / 김영주 목사
1. 서론
사람들은 클로버가 가득 핀 들에 가면 네 잎 클로버를 찾으려고 여기저기를 밟고 다닙니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입니다. 네 잎 클로버를 찾으면 행운이 온다 생각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어쩌다 한번 올까 말까한 행운을 찾기 위해 수많은 세 잎 클로버를 짓밟고 다니는 것입니다. ‘행운’을 찾으려고 일상적인 ‘행복’을 짓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쩌다 ‘행운’을 얻기도 하지만 이미 수많은 행복을 짓밟은 뒤여서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행운 하나 얻으려고 이미 수많은 행복을 짓밟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2. 신앙인의 행복
기독교가 타 종교와 다른 점은 ‘신과 대화’ 한다는 것입니다. 쌍방 간의 교통이 가능합니다. 타 종교에서는 신과의 대화가 없습니다. 그냥 가서 소원 빌고 제물 드리고 아뢰고 오는 것입니다. 묵상이 있지만 자기 내면을 돌아보는 것이지 위에 계신 신과 대화하는 게 아닙니다.
예)어느 불신자들이 모인 곳에 갔더니 우연히 종교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내가 믿는 종교에 대해서 나는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대부분 그냥 절이나 사원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예물 드리고 온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떠냐? 묻기에 ‘나는 하나님과 대화 한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하느냐? 언제 하느냐? 그게 가능하냐? 등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인간이 신과 대화한다는 것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독교의 핵이요 매력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기독교도 자기 수양의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기독교 내에도 자기 수양의 모습이 있지만 이것은 신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교통하면서 신을 바라보고 그 분의 뜻을 알고 닮아가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왜 이게 중요합니까? 두 가지를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는 행복이요, 그 다음은 천국을 맛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할 때 최고의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닮아갈수록 이 땅에서 천국 같은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 말씀하실 때는 그만큼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해주시기 위해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3. 신앙인의 불행
1)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진지하게 대화해 본 적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살기 원하시는지 이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대화해 본 적이 없습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과 아무런 생생한 관계가 없습니다. 무미건조한 삶입니다. 믿는 자의 의무로써 주일 예배 한번 드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는 그런 삶입니다.
2)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신자는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얻는 ‘행복함’이라든지, 예수님을 닮아가므로 누리는 ‘여기가 천국인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3)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기 원하시는 바로 그 일을 알 수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4) 나도 모르는 순간에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 하나님 노릇을 하게 됩니다.
4. 아합의 문제
1) 본문의 내용
아람이라는 나라의 왕이 이스라엘 집어 삼키려고 대군을 이끌고 왔습니다. 해봐야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이스라엘 왕 아합이 항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무지막지한 요구사항을 내걸며 이스라엘 집어 삼키려 합니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어서 거절했더니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의 극적인 도움으로 1차, 2차 전쟁을 다 이겼습니다. 1차에 이어 2차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되자 아합은 기고만장해졌습니다. 이 아람 왕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해 버립니다.
2) 아합의 문제는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한 것입니다.
아합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쉬울 때는 다급하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잘 풀리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아니 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내 스스로 결정하고 선언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의 전쟁에서 진 아람 왕이 더 이상 갈데없이 코너로 몰리자 이스라엘 왕에게 사정하고 있습니다. 이때 그 내용이 오늘 본문 31~32절에 나와 있습니다.
31~32) 31“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들은즉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 하니 만일 우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로 나아가면 그가 혹시 왕의 생명을 살리리이다 하고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러 이르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내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이 이르되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느냐 그는 내 형제이니라”
바로 얼마 전까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잡아먹으려고 하던 그 아람 왕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벌써 이스라엘을 집어 삼키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에 지고, 코너에 몰리자 이제는 화친 정책을 꾸밉니다. 불쌍한 모습을 하고 아합 왕에게 나와 살려 달라고 사정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합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아람 왕을 형제라 부르면서 화해의 손을 붙잡습니다.
아합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전쟁을 하나님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스스로 결정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가 아니라 ‘내 뜻대로’ 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싸워야 할 것과, 싸우지 않고 함께 살아야 할 것을 선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대로 하기만 하면 됩니다.
예)신2:9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신2:18~19)“네가 오늘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리니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이들은 정복할 대상이 아니라 품고 넘어갈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다른 사람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리고 족속 같은 경우는 달랐습니다. 하나도 남기지 말고 전부 진멸하라고 했습니다.
예) 수6:20~21)“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믿음이란 하나님이 그렇다면 그렇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복하라면 정복하고, 함께 살라고 하면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 하신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할 때 행복이 찾아옵니다. 큰 유익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 하나님노릇하며 스스로 결정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치라고 한 나라를 아합이 봐줘 버린 것입니다.
5. 하나님은 나를 통해 그 분의 일을 하시기 원하십니다.
1) 우리 한 사람이 소중한 이유는?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예) 주일 1부 예배 전 목양실 기도회 때 ‘예배를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합니다.’
2) 바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이 하라고 했던 바로 그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종이 되거나 노예 된 것이 아니라 행복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동안 행복이 보장 됩니다.
3) 순종에는 항상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보상이 있고, 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상주시기 위함입니다.
6. 사단의 공격
1) 사단은 ‘정(情)’에 호소합니다.
32절)“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러 이르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내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이 이르되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느냐 그는 내 형제이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우리의 감정이 방해될 때가 있습니다. 너무 정에 치우친 나머지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쌍해 보이는 것하고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2) 사단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케 합니다.
보이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보는 것 중심의 삶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예) 아버지 문제(7/11 기도 응답)
3) ‘좋은 게 좋은 것이다. ’분명함 보다는 둥글둥글 하기 원합니다.
예) 사울왕 삼상15:2~3,7~9)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7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과거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아말렉 사람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을 다 진멸하라 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죽이기 아까운 소들이 많습니다. 토실토실 기름진 어린양들이 있습니다. 그냥 없애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 보니까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전부 다 죽이라는 데, 아니 동물들이 무슨 죄졌습니까? 사람들이 죈 진 것이지 동물이 진 것 아닙니다. 살려서 하나님께 제사지내면 오죽 좋습니까? 최상의 제사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도 이 정도 기름진 동물이면 최상급에 속합니다. 이걸 왜 죽이라 합니까? 그래서 자기 눈에 보기에 하찮아 보이는 것은 사정없이 죽여 없애고 좋아 보이는 것은 살려뒀습니다.
예)게임중독에 빠졌다고 컴퓨터를 치우면 어떻게 하느냐? 티브이 중독에 빠졌다고 티브이를 없애야 하나? 이걸로 기독교 방송 보면 되잖아?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이런 식입니다. 이렇게 남겨둔 것이 나중에 나를 죽이고 내 영혼을 죽입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주 분명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은 뭐를 말씀하실 때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애매모호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죄를 지적하실 때도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그래야 회개하니까요. 그런데 사단은 죄책감만 주고 죄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융통성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4) 하나님의 뜻 보다는 유명해지기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34절)“벤하닷이 왕께 아뢰되 내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보내리이다 또 내 아버지께서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 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이르되 내가 이 조약으로 인해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았더라”
아람 왕의 제안에 아합이 홀딱 넘어갔습니다.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방법 중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합의 이름으로 다메섹에 거리를 만들어주겠다는 겁니다. 더구나 그 쪽에서 먼저 제한해 온 게 아닙니까? 너무 기분이 좋아서 아람 왕을 놓아주겠다고 조약까지 맺고 놔줍니다. 사람이 너무 붕 뜨면, 자기 주제를 모르고 오버할 때가 있습니다. 아합이 그랬습니다. 지금 아람 왕이 어떤 왕인데 놔줍니까? 유명해 지는 것, 명예를 얻기 위해서 쉽게 타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결국 그들을 무너뜨립니다. 이것은 사단이 수천 년간 써먹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도 그렇게 접근했습니다.
마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4: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유명하다는 사람 중에 예수님 제대로 믿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인기 때문에, 명예 때문에, 적당히 타
협하는 것입니다.
예)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예수님 믿었을 때. 왜 하필이면 기독교냐?
5) 모두가 형제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겉보기에는 아주 포용력 있고, 대범한 사람같이 보입니다. 아닙니다. 적과 형제를 구분치 못하는 게 어리석은 자들의 특징입니다. 아람 왕은 적이지 형제가 아닙니다. 같이 손잡을 대상이 아니라 정복할 대상입니다. 아람은 이스라엘을 집어삼키려고 두 번이나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말할 수 없는 모욕을 줬습니다. 이게 어떻게 형제입니까? 사단은 분별력을 잃게 만듭니다.
적을 형제로 보게 하고, 죄를 매력으로, 실수를 미덕으로 보게 합니다.
사울 왕 같이 좋은 동물은 살리고 안 좋은 것만 죽인 것을 합리적인 사람으로, 여호수아 같이 하나님 명령에 100% 순종한 사람은 너무 냉정한 사람으로 몰아갑니다.
자기 영혼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는 사람을 만나면서 그들도 내 형제라 하면 이상한 사람입니다. 형제인가 적인가는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그렇다면 그런 줄 믿는 것, 하나님이 하라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내 영혼 내 인생에 엄청난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십니다.